올림픽공원

 

 

1

 

바람 아래 앉아 있었다.

시를 읽었다.

 

움직이는 것이 많아 좋았다.

 

 

 

2

 

다시 바다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모래와 바람과 큰물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스쳐 내는 소리가 저녁과 어울려 늠실대는 곳.

 

나는 바다면 좋았다. 좋은 것이 참 많지만 바다가 참 좋았다. 바다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다 좋았고 모든 시간의 바다가 다 아름다웠다. 그래서 모든 순간 바다를 생각하지만 유독 바다가 생각나는 순간도 있어서 일 년에 한두 번은 바다를 앓는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든, 바다에 찾아가면 어떤 마음이 된다. 바다는 너무 크고 넓고 철썩거리고 바람에도 간이 배어 있고 그렇게 수억 년을 그 자리에 있던 지구의 거대한 기억 같은 장소여서 바다 앞에서 바다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두고 온 세상을 온통 잊어버린다. 그렇게 해주는 장소는 이 우주에 딱 두 군데뿐이라 늘 그곳 주위를 빙빙 맴돈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그곳에 바다가 있어서 이 별은 참 다행이다.

 

앉아 있으러 갈까. 천천히 가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3


 

계급투쟁은 계급을 구성하고 폭로하면서 동시에 계급을 제거함으로써 두 개의 억압된 계급 사이의 모순을 해결한다모든 여성이 경험하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계급투쟁은 성별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고 제거하는 동시에 이해되게 한다우리는 모순이 항상 물질적 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갈등(혁명투쟁이전에 반대 범주는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차이가 있을 뿐이다대립의 폭력적 현실과 차이의 정치적 질서는 투쟁이 발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선언이 된다대립(차이들)이 기존에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면, "자연적인갈등이나 투쟁이 없다면변증법도변화도운동도 없다.

모니크 위티그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46 


계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혹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본 신분제 사회의 모습이 떠오르셨나요? 혹은 시가를 입에 문 배 나온 양복쟁이 자본가가 $라고 쓰인 돈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누덕누덕 기운 멜빵 청바지를 입은 노동자가 렌치나 곡괭이 같은 것을 들고 노려보는 장면 같은 건 어떠신가요. 그런 그림이 제일 먼저 떠오르셨다면, 당하셨네요. 당하셨어요.

 

계급이라는 단어가 주는 전근대적인 이미지 때문에 오해하기 쉽지만, 계급은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가 클라스clas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용법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는 온갖 장르의 영역에서 계급사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셨으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보세요. 가족들이 있나요? 그 가족들 사이에서 당신의 계급은 어디쯤인가요. , 혼자 사시나요? 그렇다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계급에 비해 혼자 사는 계급인 당신이 겪어내야 할 각종 경제적·관습적·안전 비용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만원버스를 타고 출근하시나요? 클라스 오지시네요. 외제차 타고 출근하신다구요? 클라스 오지시네요! 점심은 뭘 드시나요. 혹시 비건이신가요? 옆자리에 앉은 동료는 오늘 점심부터 삼겹살을 굽자고 하시네요. 지구는 두 분 중 누구를 옹호할까요? 윤리는요? 자유와 자기결정권은 또 어떨까요?

 

사회라는 구조체 속에 산다면, 모든 것이 계급입니다. 사물의 기본 입자는 쿼크, 전자 뭐 그런 애들이 아니라 계급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신가요? 당신이 이 말을 이상하다고 느끼게 만들려고 계급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암암리에 안배해 왔을까요?

 

차별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보통 수많은 종류의 차별을 병렬적인 문제로 놓습니다. 그런 체제 하에서는 성, 계급, 장애, 인종, 종교, 지역, 경제력, 정치력 등등에서 발생하는 각종 차별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각자의 문제로 취급되게 만드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이쪽 평면에서의 피해자인 우리가 저쪽 평면에서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죠. 모니크 위티그의 도식에서는 저 모든 차별 및 폭력이 계급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녀는 성별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 흑인과 백인은 인종이 아니라 저마다 하나의 계급.

 

이렇게 계급의 관점으로 볼 때 생기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단, 내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계급의 목소리를 들으며, 혹시 내게 피해를 입힌 계급이 내가 입은 피해를 부인하거나 인지하지 못했듯, 나 역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 쉬워지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계급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내가 입고 있는 계급 피해는 어떤 이유에서든 자연화/당연시되지 않는다는 점이 크겠네요.

 

그러니까 모니크 위티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느낌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는 여혐 1도 없다니까?, 내가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는데!“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유는 혐오라는 용어를 좁게, 사전에 나오는 단 한 줄의 의미로만 좁게 사용하며, 언어의 사용이 그렇다 보니 사고의 사용 역시 협소해지는 메커니즘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녀 문제가 계급 문제의 일종이라는 명제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보며, ‘계급이라는 단어를 신분적 혹은 경제적인 영역에만 국한해 사용하면서 놓치게 될 여러 돌파구들을 아쉬워해야 하지는 않을까요. ‘혐오라는 용어를 확장적으로 사용하듯 계급이라는 용어의 외연을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sex)은 없다억압받는그리고 억압하는 성이 있을 뿐이다성을 생산하는 것은 억압이며그 반대가 아니다반대편은 성이 억압을 생산한다고 말할 것이다혹은 억압의 원인(기원)은 성 그 자체에서 발견된다고 말할 것이다이미 존재하는 사회에서(혹은 사회 바깥에서성은 자연적인 분할이다.

같은 책, 45


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자연적인 성질로 인해서 억압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억압의 기원을 자연적인 것으로 돌려 억압을 유지하기 위해 성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의미 같습니다. 이런 전복은 재미있잖아요. 이것은 사회가 성차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체를 만들었다는 뜻에서 전복적입니다. 성은 당연히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단지 그 두 성 사이의 차이만이 사회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관점이 낳게 될 다른 억압과 차별이 있습니다. 그 억압과 차별이 의 바깥에 있는, 이를테면 LGBT에게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인정하는 바운더리 안쪽에 있는 여성에게도 가해질 수 있다는 관점이 독창적이네요. 심지어 이미 사회가 존재하고(그리고 존재한 이상 이제는 그 바깥에서조차) 성은 자연적인 분할로 취급받는다는 명제는 짜릿한데도 있구요.

 

아무튼 마르크스는 모니크 위티그를 대하기가 난처하겠습니다. 모니크 위티그가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선언을 누구보다 강하게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그 계급이 주로 경제적평면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의 또 다른 주된 주장을 완전히 승인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3.5

 

모니크 위티그의 문장은 syo에게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선명하게 읽힙니다. 그래서 오해를 해도 선명하게 오해할 것 같아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습니다. 모호한 오해보다 위험한 것은 모호한 이해밖에 없으니까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는 순간의 모니크 위티그의 기분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문장을 가지고 하는 짓(?)이 비슷하거든요.

 

그러므로 (sex)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이 있을 뿐이다.“

 

이 문장에서 앞의 과 뒤의 은 어떤 관계일까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든, 바다에 찾아가면 어떤 마음이 된다.“

 

쪼랩 글쟁이 syo가 앞에 써놓았던 이 문장에서 앞의 어떤과 뒤의 어떤은 또 어떤 관계일까요.

 

 

 

 

--- 읽은 ---

 

85. 카카오프렌즈 러브 1

오쭈 지음, 흑부 그림 / 대원앤북 / 2019

 

귀여워서 봐줬다. 진짜.

 

 

 


86.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 /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

 

읽어버렸으니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말에 사로잡혔다. 그 말이 참 아프고 기쁘다.

 

 

 

--- 읽는 ---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 박재용

스포츠와 여가 / 제임스 설터

이기는 몸 / 이동환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모니크 위티그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SQL 첫걸음 / 아사이 아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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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7-05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트레이트 마인드 해제 페이퍼 따로 써서 책으로 묶어도 좋겠다 싶은 이 멋들어진 글 좀 보소

syo 2020-07-05 12:59   좋아요 0 | URL
으쓱으쓱하면서 쑥쑥 자란다ㅎㅎ

다락방 2020-07-05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좋군요! 좋으네. 좋군. 계속 스트레이트 마인드 읽고 써주시기 바랍니다.

수이 2020-07-05 13:03   좋아요 0 | URL
뭔가 또렷또렷해지죠? 와 하고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 지점. 스트레이트 마인드 얼른 읽게 하고 모셔서 강의 듣고싶은 마음.

syo 2020-07-07 07:24   좋아요 0 | URL
근데 안 가지고 다닌다 ㅋㅋㅋㅋㅋ 😂

겨울호랑이 2020-07-0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자요산 지자요수 仁者樂山 知者樂水 이라 했는데, 움직임(動)과 물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syo님은 지혜로운 쪽인 듯합니다.^^:)

syo 2020-07-07 07:2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지만 물을 좋아한다고 다 지혜로운 이겠어요 ㅎㅎ

단발머리 2020-07-0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좋으네요. <스트레이트 마이드> 정확하게 읽었는지 알고 싶어서 syo님 글을 두번 세번 읽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syo님이 먼저 읽고 단락별로 정리해주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소심하게 해봅니다. 소심하게, 똑똑!!

syo 2020-07-07 07:25   좋아요 0 | URL
재밌잖아요 다들? 왜 나만 재밌는 분위기지??

페넬로페 2020-07-05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를 syo님께서
너무 절묘하게 표현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어제 올림픽공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ㅎㅎ

syo 2020-07-07 07:26   좋아요 0 | URL
날씨도 좋고 드넓어서 올림픽 공원 참 좋았어요 ㅎㅎㅎ 페넬로페님도 계셨구나

북깨비 2020-07-05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에도 간이 배어 있다고 하시니 ㅠㅠ 갑자기 바다가 오감으로 느껴집니다. 당장 바다 가고 싶어요. ㅠㅠㅠ 🌊 syo님 책 안 내시나요.. 언젠가 syo님 글을 책장에 꽂아두고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혹시 저만 모르고 있다던가.. 😳

syo 2020-07-07 07:27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은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ㅎㅎ 뻘글이지만/이라서 알라딘 밖에는 없습니다.

추풍오장원 2020-07-0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페이퍼를 자주 올려주셔서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책은 읽어야지 하면서 구입이 참 늦어지는군요...

syo 2020-07-07 07:30   좋아요 1 | URL
사사키 아타루 참 기묘한 사람이지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말을 잘 모르겠다 싶게 하고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알 것 같다 싶게 하고....
너무 유명하고 많이 읽힌 책이라 추풍님처럼 많이 읽으시는 분께서 아직 안 읽으셨다는 게 믿기 어렵네요 ㅎㅎㅎ

비연 2020-07-0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시 떠오르네요...
바다와 스트레이트 마인드... 곧 이 둘 앞에서 syo님의 이야기를 들을 날이 올라나요.

syo 2020-07-07 07:30   좋아요 0 | URL
바다다... 일단 바다입니다!!

얄라알라 2020-07-0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개해주신 저 많은 책 중에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가 눈에 확 들어오는 이 와중에, 제 책상 오른쪽 위에는 크래커 상자가^^:;;;;

syo 2020-07-12 10:5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는 정말, 일단 제목 자체만으로 끌어당기죠. 저 말 한 번 안해본 사람 있나요....

무식쟁이 2020-07-1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줄만 읽어도 좋네요.. 이런..

syo 2020-07-12 10:56   좋아요 0 | URL
댓글만 읽어도 좋네요, 으하하하.

공쟝쟝 2020-07-16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이 페이퍼가 띵페이퍼인지 오늘에 와서 정확히 알게되어 기쁘기 그지 없읍니다. 또써줘요!!!
 

 

오지 마라 가고 싶다

 

 

1

 

살아가기만 하면 저절로 다 되던 때가 있었다. 사람도 사랑도 꿈도 즐거움도 모든 것이 내가 얻으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가오던 때가 있었다. 우리에게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 시절은 끝났다. 이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운도 좋아야 한다. 사랑은 언감생심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것, 꿈은 부끄러운 졸업앨범처럼 버리긴 아쉽지만 사실상 잊고 사는 무언가가 되었다. 즐거운 순간에는 지금 너무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즐거움을 자주 맞닥뜨리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즐거워한다. 숨 쉬는 사람이 들숨과 날숨을 세지 않듯이. 물속에 오래 얼굴을 처박고 있다가 고개를 꺼내면 내가 숨을 쉬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온몸의 세포로 느낄 수밖에 없듯, 요즘 나는 즐거운 순간이 오면 지금 내가 즐겁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낀다. 숨처럼 그냥 오던 모든 것들은 다 죽었다.

 

그건 온몸을 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가가긴 해도 닿지는 않기 때문이고, 함께 웃긴 해도 함께 울진 않기 때문이다.

 

 

 

2

 

며칠 전에 요즘 살이 빠지고 있다고 썼다. 그러기 무섭게 살빠짐이 멎었다. 오만하면 될 일이 없다. syo가 응원하고 있던 야구팀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승장구를 하던 중 어느 몹쓸 기자가 피어오르는 우승의 향기줄여서 피우향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를 쓴 즉시 7연패하고 중위권으로 추락했다. 매사 입이 문제다. 기대가 앞서도 입은 다물어야 한다. 될 것 같다가도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연기처럼 증발했던 가능성들을 기억하라.

 


 

3

 

회사도 대충 그렇겠지만, 공무원들은 휴가가 겹치면 사장이 아니라 시민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구청은 직원들의 휴가 기간을 큰 틀에서 조율하고자 시도한다. 83일부터 5일까지 휴가 가겠노라 당당하게 써 올렸는데, 어떻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4

 

7월은 인사발령 시즌이고, 관련하여 부서에 업무분장이 새로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작은 업무 하나를 더 떠맡았다. 게다가, 어찌 보면 우리 과에서 가장 중차대하다 할 수 있는 업무, 기초연금 지급 업무를 담당하는 주임님이 전출 예정인데, 전입자가 바로 오는 것이 아닌지라 업무에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번 달 기초연금 지급은 syo가 떠맡았다. 기초연금, 이건 정말 무시무시한 업무다. syo가 하루만 늦장을 부리면 수만 어르신 대군이 죽창을 들고 일어서 구청을 유린할 것이다. 이 와중에, 전체 휴관 중인 경로당이 슬슬 개관의 용트림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하반기는 일 부자, 일 갑부, 일 게이츠, 워크 버핏으로 살아가야 할 모양이다.

 

 

 

5

 

, 휴가는 부산을 생각하고 있다. 부산에는 바다와, 좋은 숙소와, 좋은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팔바지와 이소라의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와 나팔바지를 입고 구슬프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를 부르는 syo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있어야 하나?

 

 

 

 

--- 읽은 ---



82. 도시를 걷는 시간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8

 

걷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걸을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빌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도시를 걷는 일은 누군가에겐 그 자체 최고의 유희일 수 있다.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역사가 조용히 누워 있는 공간이고, 그 공간을 찾아가는 이가 가만히 엎드려 있는 역사를 흔들어 깨울 수 있는 눈과 손을 갖추었다면, 도시를 걷는 시간은 다른 누구보다 도시를 걷는 그 사람에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시를 걸어본 자들의 책을 읽고 나서는 반드시 도시를 직접 걸어야 한다. 알게 모르게, 이 도시에는 걷는 데 시간을 쓸만한 곳이 너무도 많다.

 

 


83.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이현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

 

책등에 함께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굳건한 신뢰를 주는 이름의 쌍들이 있다. 이를테면 고병권 선생님과 니체, 백상현 선생님과 라캉, 문성원 선생님과 레비나스, 류동민 선생님과 마르크스 같은. 그리고 지젝 하면 당연한 듯 달라붙는 이름이 있다. 이름에 값한다- 고 평가하고 싶지만 사실 평가할 능력 같은 건 없고, syo는 그냥 믿을 뿐이다.

 

 


84. 1cm 다이빙

태수, 문정 지음 / FIKA(피카) / 2020

 

시도부터 구성까지 이래저래 귀여운 책이다. 딱히 그러려고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애잔하고 귀엽다. 잘 됐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 읽는 ---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 박재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스포츠와 여가 / 제임스 설터

이기는 몸 / 이동환

카카오프렌즈 러브 1 / 오쭈, 흑부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 이동진

천문학 아는 척하기 / 제프 베컨, 사라 베컨

파이썬 코딩 도장 / 남재윤

 

 

--- 갖춘 ---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모니크 위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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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7-02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완전히 못했고 오늘은 바보같이 못했죠,
그 야구팀요. 화나서 오비맥주 마셨어요. (???)

변동 없이 즐겁고 건강한 휴가 즐기시길 미리 바랍니다.

syo 2020-07-04 10:42   좋아요 0 | URL
저는 야구를 끊었습니다.
매년 야구를 70번정도 끊긴 합니다만....

유부만두님도 안전한 와중에 즐거운 여름 되시기를

비연 2020-07-0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syo 2020-07-04 10:4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우 저 곰같은 웃음...

Angela 2020-07-0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우향때문에 7연패 ㅠㅠ 정말 입조심해야되는데, 그래서 우울모드예요. 그전까지는 정말 잘했거든요 ㅜ

syo 2020-07-04 10:4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Angela님도 저랑 같은 팀 응원중이셨군요.

왜 그러셨어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0-07-0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일 많아서 허덕이는데 일이 더 많아진다고요? 맙소사... ㅠㅠ
아무튼 이 페이퍼에 진심을 담은 희망을 놓고 갑니다...

syo 2020-07-04 10:43   좋아요 0 | URL
될 것도 같아요. 같은 팀 내에서는 겹치는 날짜가 별로 없어서...

cyrus 2020-07-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에 안 오세요? ㅎㅎㅎ

syo 2020-07-04 10:44   좋아요 0 | URL
가죠. 주말에 대구에 갔다가 평일을 부산에서 보낼 계획입니다.
가면 한번 볼까요? 너무 오래 못 봤네요.
이정도 못봤으면 그 사이 사이러스님이 토르 몸이 되어 있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겠는데요?

추풍오장원 2020-07-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휴가 시즌이네요.
전 연가보상비도 못받는데 연가는 다 쓰라고 엄명아닌 엄명을 내렸습니다.
전 직원들이 눈치보지 않고 당당히 연가도 쓰고 육아시간도 쓰고 유연근무도 하게끔 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업무에서도 충실히 잘 따라주고 있어서 고마울 따름이지요..

syo 2020-07-05 13:04   좋아요 0 | URL
모범적인 부서장님이시네요.
아름다운 공무원 사회 화이팅...

블랙겟타 2020-07-1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익..)

syo 2020-07-12 10:56   좋아요 0 | URL
뭡니까, 이거....

블랙겟타 2020-07-12 12:38   좋아요 0 | URL
아 위에 곰같은 웃음이 있길래.. 저는 공룡같은 걸로다.. 한다는게 너무 맥락이 없었죠? ㅎㅎㅎ;;
 

 

사라지는 것 생겨나는 것

 

 

1

 

이유 없이 살이 조금씩 빠지고 있다. 물론 살짝 적게 먹고, 퇴근길 15분 오르막 걷기는 비 오는 날에도 거르지 않고 있긴 하다. 그렇게 보면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겨우 이딴 게 살 빠지는 이유가 되는 거였다면 그간 인생이 참 쉬웠을 것이다. 어찌됐던 일단 반기는 중이다. 최소한 지금은. 바지 사이즈 경계선 증후군을 오래 앓아왔는데, 이참에 애매함을 청산하고 명징한 허리를 가져보고 싶다.

 

 

 

2

 

syo의 양대취미는 독서와 노래다. syo는 알라딘과 코노의 날개로 난다. 그랬는데 직장생활이 책을, 코로나가 마이크를 걷어갔다. 연초까지 푸른 창공을 거침없이 날던 syo는 난데없이 타조가 되어 일상의 초원을 다다다 달리고 있다.

 

노래 부르기는 확실히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라고 말하면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노래나, 온몸 율동을 동반하는 댄스곡을 부르는 모습이 즉각 연상되나 본데,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모름지기 스트레스는 발라드로 푼다. 구슬픈 발라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를 희극이 아닌 비극을 정의하는 데 사용한 것은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슬픈 발라드를 겁나 슬프게 부를 때, 등신, 있을 때 잘하지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빌빌대냐 싶은 가사를 빌빌거리는 느낌 확 살려서 부를 때, 가사와 가사 사이에 호흡 한 번 넣어봤는데 뜻밖에 감성 오지게 걸렸을 때, 뭐 그런 식의 감정 정화 요인들이 잔뜩 있다.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이나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면 즐겁지 않아도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슬픈 발라드는 웃는 마음으로 시작해도 끝에는 기필코 먹먹한 마음이 되어 마치게 마련이다. 제대로 부르기만 했다면. 그렇게 먹먹syo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여운을 즐기는 동안, 방금까지 여운을 즐겼던 은 먹먹이 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그렇게 두 남자가 교대로 먹먹한다. 앉아있는 남자는 먹먹해졌고 서 있는 남자는 먹먹해지는 중. 우리에게 코노란 그런 곳이다.

 

요즘은 드라마도 뭣도 거의 안 보는데, 오직 노래하는 예능 두 개만 보고 있다. 나도 먹먹해지러 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3

 

말이 잘 되는 날은 희한하게 잘 된다. 명사가 제 짝의 동사를 불러들이고 체언이 제게 오직 하나뿐인 용언을 입 안에서부터 데리고 나온다. 그런 날이면 민원인들은 아주 감동을 받아 울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반면 말이 안 되는 날은 더럽게 안 된다. 진짜 더럽다. 명사는 명사와, 부사는 부사와 부사와 그리고 부사와 손을 잡고 나타난다. 무슨 타잔이나 모글리 말 배우는 수준이다. 잠에서 깨어났더니 정글의 왕자가 된 기분이다. 민원인들이 아주 답답해서 울고 비웃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아침 첫 번째 전화나, 첫 번째 보고에서 모든 게 판명난다. 그때 절면 그날은 저는 날이다. 그때 날면 그날 하루는 그냥 I believe I can fly 하면 된다. 뭘 해도 되는 거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자기 전에, 현란한 말솜씨 글솜씨가 들어 있는 작품을 몇 페이지 엎드려 읽고 잔다. 어쩐지 마지막 읽은 말, 들은 말의 영향을 받을 것 같아서. 정확히 같은 이유로 과의 대화는 절대로 피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쟤는 입 대신 코로 소리 내는 데 능하다. 잠들면 바로 소리가 난다. 아주 다양한 소리가 난다. 음유시인이 따로 없다.

 

 

 

4

 

비가 처럭처럭 내린다. 은 맞은편에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수요일부터 은 양재가 아닌 구로에 있는 지점 비스무리한 곳으로 출근을 하는데, 그렇게 두어 주 보내고 나면 회사는 이 아이를 지방 공장에 꽂을 예정이다. 그는 분기탱천하여 다른 직장을 알아보겠다고 설치지만, 실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처음 예측한 것이 벌써 두 달 전이고, 그때부터 오늘까지 자기소개서 한 장을 못 쓰는 걸로 미루어 보면, 얘는 지방살이를 꽤 하겠고 아마 한동안 나 혼자 살게 될 것 같다.

 

이 세상에 혼자 사는 남자가 하나 더 생겨날 모양이다.

 

 

 

--- 읽은 ---



76. 그렇다면 칸트를 추천합니다

미코시바 요시유키 지음 / 김지윤 옮김 / 청어람e / 2017

 

가물가물하긴 한데,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라는 1,200쪽짜리 두껍한 책에서, 칸트 파트가 300 가까이 되는 걸 보고 학을 떼었던 기억이 있다. 칸트가 그런 남자다. 도무지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칸트를 읽겠는가? 아무래도 그건 또 아닌 것 같죠? 그렇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77.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

 

내 시집을 가지고 있는 기분이란 어떤 느낌일지 괜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남들이 모르고 나만 아는 뭔가가 잔뜩 있어.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끄집어내곤 하겠지만, 진짜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를걸? 뭐 이런 생각을 하진 않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다 똑같지는 않고 똑같은 글을 읽고 다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왜 시를 읽는 것일까? , 사람은 왜 이렇게 도무지 만질 수 없는 날씨를 끝내 살게 되는 걸까?

 

 

 


78. 한 장 보고서의 정석

박신영 지음 / 세종서적 / 2018

 

원체 중언부언 떠벌떠벌 스타일인 syo에게 보고서는 진짜 어려운 장르다. 특히 한 장 보고서는 마의 영역이다. 요즘 업무 관련해서도 슬슬 원페이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그래서 살겠다고 한번 읽어 봤습니다.

 

근데 이렇게 잘 안 된다. 어씨.

 

 


79. 만화로 보는 영화의 역사

남무성 지음, 황희연 글 / 오픈하우스 / 2013

 

덮었는데 다 까먹었다. 아직 영화에 관심을 둘 단계는 아닌가 봐.

 


 

 


80. 코로나 이후의 세계

제이슨 솅커 지음 / 박성현 옮김 / 미디어숲 / 2020

 

코로나 판 제3의 물결 비슷하다. 저자는 해야 할 말을 빼먹지 않고 하는데 집중하느라 굉장히 의미있고 재미없는 책을 만들어냈다.

 

 


 


81.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타오카 이치타케, 무카이 마사아키 지음 / 임창석 옮김 / 이학사 / 2019

 

단연 라캉에 관한 가장 쉬운 책 같다. 이렇게까지 선명하다고? 라캉은 어느 정도 불투명하고 모호해야 라캉 같아서, 선명한 이 책이 오히려 더 불안하다. 사실 라캉이 아니라 가타오카 이치타케를 읽은 것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불안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어차피 라캉은 모르고 죽을 건데.

 

 


--- 읽는 ---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 박재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도시를 걷는 시간 / 김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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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6-29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조... 에서 뿜음 ...-.-;

syo 2020-06-30 20:04   좋아요 0 | URL
다다다다 ~(0_0)~

추풍오장원 2020-06-30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고서를 많이 쓰신다는건 그만큼 인정받는다는 증거 아닐까요..^^

syo 2020-06-30 20:05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진 않고, 너도 공무원이면 그냥 입 닫고 글로 써라 이런 것 같은데요? ㅎㅎㅎ

모운 2020-07-02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코노가 스트레스 푸는 창구였는데 코로나가 되는 대로 블루투스 마이크를 쥐어주네. 하지만 가내에서는 뭔가 절제된 창법을 구사하여만 하니 스트레스는 더 오르고 코로나 왜 안 죽지 싶고.

syo 2020-07-02 23:43   좋아요 0 | URL
어떤 노래 불렀더라.... 가물가물하네.
나는 도리어 절제된 창법으로 불러야 스트레스 풀리는 노래를 좋아하니까, 블루투스 마이크를 구매해야겠군.
 

 

이야기와 이야기의 이야기

 

 

1

 

집 근처에 숲이 있다.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산이라 부르겠지만, 퇴근길 역에서 내려 걷는 20분 가운데 15분을 오르막에서 소진하는 내게 그 공간은 명백히 숲이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의 절반은 숲을 휘감고 도착한다. 대문 앞 좁은 골목길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백 걸음 앞에서 가지를 흔드는 나무가 있다. 숲까지 백 걸음. 숲까지 오십 걸음. 삼십 걸음 남짓 남으면 다시 방향을 틀어 나는 도시 방향의 내리막으로 걸어 내려가야 하는데, 그럴 때면 늘 생각한다. 숲에서 오는 바람의 색깔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2

 

어떤 이야기들이 마음속을 떠돌고 있다. 작품은 될 수 없겠지만 나 역시 어엿한 한 줄기의 이야기라고 그것들이 외친다. 이야기를 품었으면 뱉어내야 한다고 믿던 시기가 있었다. 떠오른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고 내 안에 두었다가 잃어버리는 일은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훔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던 순진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죽었다. 완벽주의와 귀차니즘이 힘을 합쳐 그 아이의 목을 졸랐고, 그 아이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죽인 죄로 죽어서 어른이 되고 말았다. 어른이란 이야기로부터 빼앗은 글을, 요구나 명령이나 대답이나 거절 같은 분명하고 선명한 것들의 품에다 안겨 줌으로써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3

 

여자가 프라하행 비행기에 오르던 바로 그 순간에 남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로 시작하는 글을 반 페이지쯤 썼다가 지웠다. 바로 그 백지에다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야기의 시체 위에 수의처럼 덮어 놓은 글. 이야기가 불탈 때 함께 사그라들 허망하고 약한 글. 소각되기 위해 태어난 글.

 

 

 

4

 

가진 이야기가 너무나 커서 마음을 똑바로 가누기 힘들었던 사람에 관한 전설이 있었다. 그는 숲으로 들어가서 소리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도 듣지 못하는 동시에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가 한 이야기는 사라졌다. 그가 이야기한 대상도 사라졌다. 오늘 남은 것은 그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뿐이다. 이야기는 가고 이야기의 이야기가 남았다. 생각한다. 숲에서 오는 이야기의 파편을 챙겨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5

 

집 근처에 숲이 있다. 가끔 바람이 불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인다. 숲으로부터 오는 이야기가 비어 있다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그 공백이 너무 커서 마음을 똑바로 가누기 힘든 때가 오면, 그땐 내가 저 숲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글이 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실컷 부려놓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떤 귀 밝은 사람이 마을에 살아서, 숲에서 부는 바람 속에서 내 이야기를 챙겨 듣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국 숲과 바람만 들은 그 이야기들은 다시 사라지고, 세상에는 나라는 사람이 있어서 숲으로 들어가 목놓아 이야기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만 남을 것이다.

 

이야기의 이야기가 온다.

 

 

 

--- 읽은 ---

 


71. 다시 자본을 읽자

고병권 지음 / 천년의 상상 / 2018

 

한 번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데 대뜸 다시읽자고 하시니 이것 참 부끄럽네요.

 

다시 자본을 읽자는 말은 완전 남의 이야기인데, 다시 다시 자본을 읽자를 읽자는 말은 내 이야기여서, 이걸 자랑스러워 해야 하나 부끄러워 해야 하나 아리까리하다. 당초 열 두 권을 다 사서 매년 1월에는 1, 12월에는 12권을 읽을 뜻이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일단 <자본>을 읽고 나야 다시’ <자본>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72. 콜로노스의 숲

E. M. 포스터 지음 /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6

 

이종인 선생님의 번역을 의심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선생님의 한국어 문장도 그렇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쩐지 문장이 고풍스러워서 읽다가 자꾸 졸았다. 이래뵈도 이 책은 판타지 장르라고 볼 수 있는데, 환상적으로 졸렸다. E. M. 포스터라 하면 거장의 거의 끝까지 갔다고 볼 수 있는데 거의 끝까지 졸렸다. 허어…….

 

 

 

73. 열두 겹의 자정

김경후 지음 / 문학동네 / 2012

 

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한 글자면서 백 글자처럼 단순하지 않다. 지나간 것들 위에 지나간 것들을 겹치며 빚어가는 것이 삶이고, 시도 그렇다. 겹으로 접혀 있는 이야기들을 빳빳하게 펴기보다 그 틈에 들어가 눕는 것이 사는 것이고, 시를 읽는 일도 그렇다. 그대로. 열두 겹의 자정을 펼쳐보지 않고 겹겹의 눈으로.

 

 


74. 그림 속 경제학

문소영 지음 / 이다미디어 / 2014

 

NICE TRY!

 

 


75. 시작의 기술

개리 비숍 지음 / 이지연 옮김 / 웅직지식하우스 / 2019

 

이걸 읽고 나서 syo가 뭔가를 시작했겠는가?

 

 

 

 

--- 읽는 ---

그렇다면 칸트를 추천합니다 / 미코시바 요시유키

한장 보고서의 정석 / 박신영

만화로 보는 영화의 역사 / 남무성

1cm 다이빙 / 태수, 문정

 

 

 --- 갖춘 ---

데이터베이스 for Beginger / 우재남

돈의 속성 / 김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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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20-06-26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자본’을 읽자는 말은 완전 남의 이야기인데, 다시 ‘다시 자본을 읽자’를 읽자는 말은 내 이야기여서 ----- : 아 이거 당신은 방금 현실웃음을 선물하셨습니다. 웃깁니다 아....

syo 2020-06-29 22:44   좋아요 0 | URL
몰리님의 코드는 난해합니다..... 저거 굉장히 처연한 기분으로 쓴 것이온데 ㅋㅋㅋㅋ

2020-06-27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9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0-06-2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뭘 시작하셨습니까? ㅎㅎ

syo 2020-06-29 22:44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요 으하하하하....
 

  

안생겨요

 

 

1

 

결혼 생각 없다는 말에 말리거나 의아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내가 결혼을 포기했더니 주변 사람들도 내 결혼을 포기한 것이다. 간섭받지 않는 인생은 즐겁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막상 포기당해보니 떨떠름.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일수록 더 쉽게 포기한다. 아직 6개월밖에 안 된 직장 동료들은 그래도 나를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것 같다. 지나가듯 소개팅 이야기가 있었다. 웃으며 거절했는데 돌아서 생각해보니 너무 단칼에 끊어낸 것은 아닌가 싶어서 찝찝.

 

사람들이여, 내가 포기했다고 나를 포기하지는 말아줘요…….

 

 

 

2

 

사실은 생각 없다보다 가능성 없다혹은 가망 없다가 더 맞춤한 말인지도 모른다. 남편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다. syo는 남편은커녕 남친으로서도 그리 고퀄 고성능은 아닌 데다가, 연식이 오래되어 부품 교체도 어렵다. 교환 환불이 웬말, A/S조차 믿을 만하지 않았다.

 

요는 연애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3

 

주말엔 지나간 사랑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는데 좋았던 일들이 무진장 많았다. 다들 syo에겐 넘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같이 받는 일보다 주는 일에 더 열중했던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제일 많이 떠오르는 건 그 사람들이 죄없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들이었다. 영화 잘 보고 나와서 갑자기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syo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떨구던 사람이 있었다. 쉬었다 가자고 했는데 까였다고 뿔이 나서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syo의 옆에서 힘들게 속도를 맞춰 걷던 사람이 있었다. 못난이가 자기 못난 것 깨닫고 자신감도 없는 상못난이가 될까 봐 못나도 못났다 말 한번 못하고 전전긍긍 제 살을 깎아 바치며 오래 숨죽이던 사람이 있었고, 뭣 모르고 말 한마디 잘못 던졌다가 갑자기 차가워진 내 옆에서 꽁꽁 얼어붙어 벌벌 떨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나니까, 그 장면 속에 들어 있는 제각각의 그녀들과, 그녀들을 지나오면서도 한결같이 하자였던 남자 하나가 선명하게 보이고 나니까, 마음의 문을 닫는 게 쉬워졌다.



삼차방정식 그래프를 그리는 일이나 주기율표를 작성하는 일은 곧 까먹겠지만, "사랑해"라고 말한 경험은 영영 잊혀지지 않는다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연수사랑이라니선영아


나는 마음속으로내가 그토록 루치에를 사랑했어도그녀가 그렇게 완벽하게 유일한 존재였어도그녀는 우리가 서로 알게 되고 매혹되었던 그때의 상황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사귀어 간 모든 상황에서 그 여인을 떼어 놓으려고 하는 것집요한 정신 집중으로 그녀에게서 그녀 자체가 아닌 모든 것을 벗겨 내려고그러니까 사랑에 형태를 부여하는그녀와 함께 겪은 그 사연을 다 없애 버리려고 애쓰는 것은 어떤 추론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농담

 


 

4

 

퇴근길, 손을 꼭 잡고 앞서 오르막을 오르는 젊은 부부가 보였다. 그들은 세상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맞춰서 나란히 밤을 헤쳐 길을 만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는 길과 한 사람이 가는 길은 같지 않다. 두 사람이 되어 걷는 길과 혼자서 걷는 길은 같지 않았다.



 네가 있었을 것이다 사방에서 나를 부르며 찡그린 물이 흘러들었다 너를 쓰다듬기 위해 나는 천천히 떠올랐다

권혁웅회전문에 두고 온 손가락 하나」 부분 


 

 

 

 



65.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 마이클 굿윈

 

나쁘지 않다. 다정하다. 기초지식이 필요치는 않지만 있다면 좋을 것. 두세 번 봐도 좋을 듯.

 



 

6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 도제희

 

책 읽고 쓰는 생활 에세이의 달인 D(21세기의 명저로 알려진 어떤 책의 저자이기도 함)가 알라딘에 있다. 웬만해선 넘기 힘든 허들이다. (룸메이트)은 재밌다고 읽었다. 물론 재밌지만, 걔도 알라딘 활동을 했다면 나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좋은 책이지만, 여기 이 판에서는 이걸로 좀 부족합니다.

 



 

67.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읽는 것만으로도 나를 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하나 아는데 쓰기까지 해야 하다니 너무 가혹하다,

 

싶지만 그것도 욕심.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해도 마침내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나를 알기 위해 써도 마침내 나를 알게 된다는 보장은 없는 법. 결국 읽는 일, 쓰는 일이 모두 나를 나에게 이끌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읽고 쓰는 일에는 지도도 나침반도 없어서, 그 위에 올라타면 어디로든 가긴 가는데 그게 어딘지는 도착해 봐도 잘 모른다. 그래도 이미 다녀와 본(혹은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최소한 이렇게 읽고 이렇게 쓰면, 그 끝에 내가 알고 싶던 내가 있다는 것은 배웠다.

 

 


 

68.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가 고비다. 개인적으로 에티카보다 이 전기의 앞쪽 150~200 페이지가 더 읽기 힘들었다. 스피노자가 나타나면 그때부터는 좀 낫다.

 

이란 부사의 제일 잦은 사용처는 자신을 속이는 데라고 하던데.

 


 

 

69. 허변의 모르면 호구되는 최소한의 법률 상식  / 허윤

 

고등학교 때 배운 논리인데, ‘이거 모르면 호구된다는 말이 보증하는 것은 이거 알면 호구가 되지 않는다가 아니다. ‘호구가 아니면 이건 안다.’이다. , 호구가 아닌 사람은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지만, 이거 아는 사람 중에도 호구는 있을 수 있다는 뜻. , 이 책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아도 호구 탈출은 요원할 가능성 있다는 의미가 제목 속에 들어있다. 호구 떼는 게 어디 그리 쉽나. 쉬웠으면 이 나랑 살았겠는가. 세상 만만한 거 아니다.

 




70. 빨강머리 앤 / 루시 모드 몽고메리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게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주제가가 진술한 앤의 인상착의다. 늘 궁금하고 따지고 싶었다. 현상수배 전단지에 쓰여 있는 호남형 얼굴이라는 것은 어떤 얼굴인가. 호남에는 잘생기진 않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가? 내 눈에 잘생긴 사람이 쟤 눈에도 잘 생겼으리란 법은 있는가? 예쁘지는 않다는 말을 함부로 한 것도 문젠데, 사랑스럽다고? 당신이 뭔데 내 사랑의 향배를 결정합니까? ? ?

 

이제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읽는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 ~ 115

코로나 이후의 세계 / 제이슨 솅커 : ~ 100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타오카 이치타케 : 105 ~ 222

발터 벤야민 평전 / 하워드 아일런드, 마이클 제닝스 : ~ 61

 

 

--- 갖춘 ---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슬라보예 지젝

실험실 생활 / 브뤼노 라투르, 스티브 울거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 7가지 / -다비드 나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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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23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읽는 중이거든요. 어제 읽을 때까지만 해도 우와 잘쓴다~ 이러면서 읽었는데 오늘 출근길에 쇼님의 이 페이퍼 읽은 다음에 다시 난.도. 읽으니까... 음.... 역시 생활에세이는 D 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신기하다...

단발머리 2020-06-23 09:02   좋아요 0 | URL
생활 쪽으로도 강한데 영화나 소설 요쪽으로도 괜춘해요, 그 D작가 말이지요...... 추천드리고 싶어요.

비연 2020-06-23 09:53   좋아요 0 | URL
역시 D 죠~ ^^

syo 2020-06-23 21:47   좋아요 0 | URL
도 선생과 맞장뜨는 다 선생님

페크pek0501 2020-06-2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주목하고 있는 책은 남들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또 한번 이 페이퍼에서 확인합니다.
그 책이 뭔지는 비밀입니당~~~ㅋㅋ

syo 2020-06-23 21:48   좋아요 1 | URL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아닐까요? ㅎㅎ

페크pek0501 2020-06-24 00:08   좋아요 0 | URL
딩동댕 입니다. 센스가 만점이신 분!!!

북다이제스터 2020-06-2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젝의 <실재의 사막 ~> 갖춰놓았습니다. ^^

syo 2020-06-25 22:58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갖춰는 놓았는데 언제 읽게 될지.....

감은빛 2020-06-2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갖춘- 이라고 쓰시기도 하는 군요.
제가 syo님 서재에 자주 오지 않아서 그동안에는 못 봤던 걸까요?

제가 syo 님처럼 글을 쓴다면 거의 대다수의 책이 -갖춘- 에 들어가고,
-읽은- 혹은 -읽는- 에는 거의 들어갈 책이 없겠죠. 흑흑

syo 2020-06-29 22:47   좋아요 0 | URL
책을 많이 안 사는 편이라서, 살 때마다 기록을 해두고 싶어지더라구요.
저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그럴것 같으면 사실 ‘읽는‘조차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보니,
결국 그냥 기록에 남기게 되었네요.....

감은빛님이야 워낙 바쁘시니까!
일하면서 책 읽는 건 진짜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종종 백수 시절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