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 생겨나는 것

 

 

1

 

이유 없이 살이 조금씩 빠지고 있다. 물론 살짝 적게 먹고, 퇴근길 15분 오르막 걷기는 비 오는 날에도 거르지 않고 있긴 하다. 그렇게 보면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겨우 이딴 게 살 빠지는 이유가 되는 거였다면 그간 인생이 참 쉬웠을 것이다. 어찌됐던 일단 반기는 중이다. 최소한 지금은. 바지 사이즈 경계선 증후군을 오래 앓아왔는데, 이참에 애매함을 청산하고 명징한 허리를 가져보고 싶다.

 

 

 

2

 

syo의 양대취미는 독서와 노래다. syo는 알라딘과 코노의 날개로 난다. 그랬는데 직장생활이 책을, 코로나가 마이크를 걷어갔다. 연초까지 푸른 창공을 거침없이 날던 syo는 난데없이 타조가 되어 일상의 초원을 다다다 달리고 있다.

 

노래 부르기는 확실히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라고 말하면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노래나, 온몸 율동을 동반하는 댄스곡을 부르는 모습이 즉각 연상되나 본데,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모름지기 스트레스는 발라드로 푼다. 구슬픈 발라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를 희극이 아닌 비극을 정의하는 데 사용한 것은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슬픈 발라드를 겁나 슬프게 부를 때, 등신, 있을 때 잘하지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빌빌대냐 싶은 가사를 빌빌거리는 느낌 확 살려서 부를 때, 가사와 가사 사이에 호흡 한 번 넣어봤는데 뜻밖에 감성 오지게 걸렸을 때, 뭐 그런 식의 감정 정화 요인들이 잔뜩 있다.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이나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면 즐겁지 않아도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슬픈 발라드는 웃는 마음으로 시작해도 끝에는 기필코 먹먹한 마음이 되어 마치게 마련이다. 제대로 부르기만 했다면. 그렇게 먹먹syo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여운을 즐기는 동안, 방금까지 여운을 즐겼던 은 먹먹이 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그렇게 두 남자가 교대로 먹먹한다. 앉아있는 남자는 먹먹해졌고 서 있는 남자는 먹먹해지는 중. 우리에게 코노란 그런 곳이다.

 

요즘은 드라마도 뭣도 거의 안 보는데, 오직 노래하는 예능 두 개만 보고 있다. 나도 먹먹해지러 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3

 

말이 잘 되는 날은 희한하게 잘 된다. 명사가 제 짝의 동사를 불러들이고 체언이 제게 오직 하나뿐인 용언을 입 안에서부터 데리고 나온다. 그런 날이면 민원인들은 아주 감동을 받아 울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반면 말이 안 되는 날은 더럽게 안 된다. 진짜 더럽다. 명사는 명사와, 부사는 부사와 부사와 그리고 부사와 손을 잡고 나타난다. 무슨 타잔이나 모글리 말 배우는 수준이다. 잠에서 깨어났더니 정글의 왕자가 된 기분이다. 민원인들이 아주 답답해서 울고 비웃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아침 첫 번째 전화나, 첫 번째 보고에서 모든 게 판명난다. 그때 절면 그날은 저는 날이다. 그때 날면 그날 하루는 그냥 I believe I can fly 하면 된다. 뭘 해도 되는 거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자기 전에, 현란한 말솜씨 글솜씨가 들어 있는 작품을 몇 페이지 엎드려 읽고 잔다. 어쩐지 마지막 읽은 말, 들은 말의 영향을 받을 것 같아서. 정확히 같은 이유로 과의 대화는 절대로 피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쟤는 입 대신 코로 소리 내는 데 능하다. 잠들면 바로 소리가 난다. 아주 다양한 소리가 난다. 음유시인이 따로 없다.

 

 

 

4

 

비가 처럭처럭 내린다. 은 맞은편에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수요일부터 은 양재가 아닌 구로에 있는 지점 비스무리한 곳으로 출근을 하는데, 그렇게 두어 주 보내고 나면 회사는 이 아이를 지방 공장에 꽂을 예정이다. 그는 분기탱천하여 다른 직장을 알아보겠다고 설치지만, 실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처음 예측한 것이 벌써 두 달 전이고, 그때부터 오늘까지 자기소개서 한 장을 못 쓰는 걸로 미루어 보면, 얘는 지방살이를 꽤 하겠고 아마 한동안 나 혼자 살게 될 것 같다.

 

이 세상에 혼자 사는 남자가 하나 더 생겨날 모양이다.

 

 

 

--- 읽은 ---



76. 그렇다면 칸트를 추천합니다

미코시바 요시유키 지음 / 김지윤 옮김 / 청어람e / 2017

 

가물가물하긴 한데,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라는 1,200쪽짜리 두껍한 책에서, 칸트 파트가 300 가까이 되는 걸 보고 학을 떼었던 기억이 있다. 칸트가 그런 남자다. 도무지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칸트를 읽겠는가? 아무래도 그건 또 아닌 것 같죠? 그렇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77.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

 

내 시집을 가지고 있는 기분이란 어떤 느낌일지 괜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남들이 모르고 나만 아는 뭔가가 잔뜩 있어.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끄집어내곤 하겠지만, 진짜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를걸? 뭐 이런 생각을 하진 않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다 똑같지는 않고 똑같은 글을 읽고 다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왜 시를 읽는 것일까? , 사람은 왜 이렇게 도무지 만질 수 없는 날씨를 끝내 살게 되는 걸까?

 

 

 


78. 한 장 보고서의 정석

박신영 지음 / 세종서적 / 2018

 

원체 중언부언 떠벌떠벌 스타일인 syo에게 보고서는 진짜 어려운 장르다. 특히 한 장 보고서는 마의 영역이다. 요즘 업무 관련해서도 슬슬 원페이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그래서 살겠다고 한번 읽어 봤습니다.

 

근데 이렇게 잘 안 된다. 어씨.

 

 


79. 만화로 보는 영화의 역사

남무성 지음, 황희연 글 / 오픈하우스 / 2013

 

덮었는데 다 까먹었다. 아직 영화에 관심을 둘 단계는 아닌가 봐.

 


 

 


80. 코로나 이후의 세계

제이슨 솅커 지음 / 박성현 옮김 / 미디어숲 / 2020

 

코로나 판 제3의 물결 비슷하다. 저자는 해야 할 말을 빼먹지 않고 하는데 집중하느라 굉장히 의미있고 재미없는 책을 만들어냈다.

 

 


 


81.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타오카 이치타케, 무카이 마사아키 지음 / 임창석 옮김 / 이학사 / 2019

 

단연 라캉에 관한 가장 쉬운 책 같다. 이렇게까지 선명하다고? 라캉은 어느 정도 불투명하고 모호해야 라캉 같아서, 선명한 이 책이 오히려 더 불안하다. 사실 라캉이 아니라 가타오카 이치타케를 읽은 것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불안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어차피 라캉은 모르고 죽을 건데.

 

 


--- 읽는 ---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 박재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도시를 걷는 시간 / 김별아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20-06-29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조... 에서 뿜음 ...-.-;

syo 2020-06-30 20:04   좋아요 0 | URL
다다다다 ~(0_0)~

추풍오장원 2020-06-30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고서를 많이 쓰신다는건 그만큼 인정받는다는 증거 아닐까요..^^

syo 2020-06-30 20:05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진 않고, 너도 공무원이면 그냥 입 닫고 글로 써라 이런 것 같은데요? ㅎㅎㅎ

문모운 2020-07-02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코노가 스트레스 푸는 창구였는데 코로나가 되는 대로 블루투스 마이크를 쥐어주네. 하지만 가내에서는 뭔가 절제된 창법을 구사하여만 하니 스트레스는 더 오르고 코로나 왜 안 죽지 싶고.

syo 2020-07-02 23:43   좋아요 0 | URL
어떤 노래 불렀더라.... 가물가물하네.
나는 도리어 절제된 창법으로 불러야 스트레스 풀리는 노래를 좋아하니까, 블루투스 마이크를 구매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