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이야기의 이야기

 

 

1

 

집 근처에 숲이 있다.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산이라 부르겠지만, 퇴근길 역에서 내려 걷는 20분 가운데 15분을 오르막에서 소진하는 내게 그 공간은 명백히 숲이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의 절반은 숲을 휘감고 도착한다. 대문 앞 좁은 골목길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백 걸음 앞에서 가지를 흔드는 나무가 있다. 숲까지 백 걸음. 숲까지 오십 걸음. 삼십 걸음 남짓 남으면 다시 방향을 틀어 나는 도시 방향의 내리막으로 걸어 내려가야 하는데, 그럴 때면 늘 생각한다. 숲에서 오는 바람의 색깔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2

 

어떤 이야기들이 마음속을 떠돌고 있다. 작품은 될 수 없겠지만 나 역시 어엿한 한 줄기의 이야기라고 그것들이 외친다. 이야기를 품었으면 뱉어내야 한다고 믿던 시기가 있었다. 떠오른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고 내 안에 두었다가 잃어버리는 일은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훔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던 순진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죽었다. 완벽주의와 귀차니즘이 힘을 합쳐 그 아이의 목을 졸랐고, 그 아이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죽인 죄로 죽어서 어른이 되고 말았다. 어른이란 이야기로부터 빼앗은 글을, 요구나 명령이나 대답이나 거절 같은 분명하고 선명한 것들의 품에다 안겨 줌으로써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3

 

여자가 프라하행 비행기에 오르던 바로 그 순간에 남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로 시작하는 글을 반 페이지쯤 썼다가 지웠다. 바로 그 백지에다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야기의 시체 위에 수의처럼 덮어 놓은 글. 이야기가 불탈 때 함께 사그라들 허망하고 약한 글. 소각되기 위해 태어난 글.

 

 

 

4

 

가진 이야기가 너무나 커서 마음을 똑바로 가누기 힘들었던 사람에 관한 전설이 있었다. 그는 숲으로 들어가서 소리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도 듣지 못하는 동시에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가 한 이야기는 사라졌다. 그가 이야기한 대상도 사라졌다. 오늘 남은 것은 그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뿐이다. 이야기는 가고 이야기의 이야기가 남았다. 생각한다. 숲에서 오는 이야기의 파편을 챙겨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5

 

집 근처에 숲이 있다. 가끔 바람이 불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인다. 숲으로부터 오는 이야기가 비어 있다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그 공백이 너무 커서 마음을 똑바로 가누기 힘든 때가 오면, 그땐 내가 저 숲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글이 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실컷 부려놓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떤 귀 밝은 사람이 마을에 살아서, 숲에서 부는 바람 속에서 내 이야기를 챙겨 듣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국 숲과 바람만 들은 그 이야기들은 다시 사라지고, 세상에는 나라는 사람이 있어서 숲으로 들어가 목놓아 이야기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만 남을 것이다.

 

이야기의 이야기가 온다.

 

 

 

--- 읽은 ---

 


71. 다시 자본을 읽자

고병권 지음 / 천년의 상상 / 2018

 

한 번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데 대뜸 다시읽자고 하시니 이것 참 부끄럽네요.

 

다시 자본을 읽자는 말은 완전 남의 이야기인데, 다시 다시 자본을 읽자를 읽자는 말은 내 이야기여서, 이걸 자랑스러워 해야 하나 부끄러워 해야 하나 아리까리하다. 당초 열 두 권을 다 사서 매년 1월에는 1, 12월에는 12권을 읽을 뜻이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일단 <자본>을 읽고 나야 다시’ <자본>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72. 콜로노스의 숲

E. M. 포스터 지음 /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6

 

이종인 선생님의 번역을 의심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선생님의 한국어 문장도 그렇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쩐지 문장이 고풍스러워서 읽다가 자꾸 졸았다. 이래뵈도 이 책은 판타지 장르라고 볼 수 있는데, 환상적으로 졸렸다. E. M. 포스터라 하면 거장의 거의 끝까지 갔다고 볼 수 있는데 거의 끝까지 졸렸다. 허어…….

 

 

 

73. 열두 겹의 자정

김경후 지음 / 문학동네 / 2012

 

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한 글자면서 백 글자처럼 단순하지 않다. 지나간 것들 위에 지나간 것들을 겹치며 빚어가는 것이 삶이고, 시도 그렇다. 겹으로 접혀 있는 이야기들을 빳빳하게 펴기보다 그 틈에 들어가 눕는 것이 사는 것이고, 시를 읽는 일도 그렇다. 그대로. 열두 겹의 자정을 펼쳐보지 않고 겹겹의 눈으로.

 

 


74. 그림 속 경제학

문소영 지음 / 이다미디어 / 2014

 

NICE TRY!

 

 


75. 시작의 기술

개리 비숍 지음 / 이지연 옮김 / 웅직지식하우스 / 2019

 

이걸 읽고 나서 syo가 뭔가를 시작했겠는가?

 

 

 

 

--- 읽는 ---

그렇다면 칸트를 추천합니다 / 미코시바 요시유키

한장 보고서의 정석 / 박신영

만화로 보는 영화의 역사 / 남무성

1cm 다이빙 / 태수, 문정

 

 

 --- 갖춘 ---

데이터베이스 for Beginger / 우재남

돈의 속성 / 김승호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몰리 2020-06-26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자본’을 읽자는 말은 완전 남의 이야기인데, 다시 ‘다시 자본을 읽자’를 읽자는 말은 내 이야기여서 ----- : 아 이거 당신은 방금 현실웃음을 선물하셨습니다. 웃깁니다 아....

syo 2020-06-29 22:44   좋아요 0 | URL
몰리님의 코드는 난해합니다..... 저거 굉장히 처연한 기분으로 쓴 것이온데 ㅋㅋㅋㅋ

2020-06-27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9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0-06-2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뭘 시작하셨습니까? ㅎㅎ

syo 2020-06-29 22:44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요 으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