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생겨요

 

 

1

 

결혼 생각 없다는 말에 말리거나 의아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내가 결혼을 포기했더니 주변 사람들도 내 결혼을 포기한 것이다. 간섭받지 않는 인생은 즐겁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막상 포기당해보니 떨떠름.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일수록 더 쉽게 포기한다. 아직 6개월밖에 안 된 직장 동료들은 그래도 나를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것 같다. 지나가듯 소개팅 이야기가 있었다. 웃으며 거절했는데 돌아서 생각해보니 너무 단칼에 끊어낸 것은 아닌가 싶어서 찝찝.

 

사람들이여, 내가 포기했다고 나를 포기하지는 말아줘요…….

 

 

 

2

 

사실은 생각 없다보다 가능성 없다혹은 가망 없다가 더 맞춤한 말인지도 모른다. 남편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다. syo는 남편은커녕 남친으로서도 그리 고퀄 고성능은 아닌 데다가, 연식이 오래되어 부품 교체도 어렵다. 교환 환불이 웬말, A/S조차 믿을 만하지 않았다.

 

요는 연애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3

 

주말엔 지나간 사랑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는데 좋았던 일들이 무진장 많았다. 다들 syo에겐 넘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같이 받는 일보다 주는 일에 더 열중했던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제일 많이 떠오르는 건 그 사람들이 죄없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들이었다. 영화 잘 보고 나와서 갑자기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syo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떨구던 사람이 있었다. 쉬었다 가자고 했는데 까였다고 뿔이 나서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syo의 옆에서 힘들게 속도를 맞춰 걷던 사람이 있었다. 못난이가 자기 못난 것 깨닫고 자신감도 없는 상못난이가 될까 봐 못나도 못났다 말 한번 못하고 전전긍긍 제 살을 깎아 바치며 오래 숨죽이던 사람이 있었고, 뭣 모르고 말 한마디 잘못 던졌다가 갑자기 차가워진 내 옆에서 꽁꽁 얼어붙어 벌벌 떨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나니까, 그 장면 속에 들어 있는 제각각의 그녀들과, 그녀들을 지나오면서도 한결같이 하자였던 남자 하나가 선명하게 보이고 나니까, 마음의 문을 닫는 게 쉬워졌다.



삼차방정식 그래프를 그리는 일이나 주기율표를 작성하는 일은 곧 까먹겠지만, "사랑해"라고 말한 경험은 영영 잊혀지지 않는다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연수사랑이라니선영아


나는 마음속으로내가 그토록 루치에를 사랑했어도그녀가 그렇게 완벽하게 유일한 존재였어도그녀는 우리가 서로 알게 되고 매혹되었던 그때의 상황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사귀어 간 모든 상황에서 그 여인을 떼어 놓으려고 하는 것집요한 정신 집중으로 그녀에게서 그녀 자체가 아닌 모든 것을 벗겨 내려고그러니까 사랑에 형태를 부여하는그녀와 함께 겪은 그 사연을 다 없애 버리려고 애쓰는 것은 어떤 추론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농담

 


 

4

 

퇴근길, 손을 꼭 잡고 앞서 오르막을 오르는 젊은 부부가 보였다. 그들은 세상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맞춰서 나란히 밤을 헤쳐 길을 만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는 길과 한 사람이 가는 길은 같지 않다. 두 사람이 되어 걷는 길과 혼자서 걷는 길은 같지 않았다.



 네가 있었을 것이다 사방에서 나를 부르며 찡그린 물이 흘러들었다 너를 쓰다듬기 위해 나는 천천히 떠올랐다

권혁웅회전문에 두고 온 손가락 하나」 부분 


 

 

 

 



65.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 마이클 굿윈

 

나쁘지 않다. 다정하다. 기초지식이 필요치는 않지만 있다면 좋을 것. 두세 번 봐도 좋을 듯.

 



 

6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 도제희

 

책 읽고 쓰는 생활 에세이의 달인 D(21세기의 명저로 알려진 어떤 책의 저자이기도 함)가 알라딘에 있다. 웬만해선 넘기 힘든 허들이다. (룸메이트)은 재밌다고 읽었다. 물론 재밌지만, 걔도 알라딘 활동을 했다면 나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좋은 책이지만, 여기 이 판에서는 이걸로 좀 부족합니다.

 



 

67.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읽는 것만으로도 나를 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하나 아는데 쓰기까지 해야 하다니 너무 가혹하다,

 

싶지만 그것도 욕심.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해도 마침내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나를 알기 위해 써도 마침내 나를 알게 된다는 보장은 없는 법. 결국 읽는 일, 쓰는 일이 모두 나를 나에게 이끌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읽고 쓰는 일에는 지도도 나침반도 없어서, 그 위에 올라타면 어디로든 가긴 가는데 그게 어딘지는 도착해 봐도 잘 모른다. 그래도 이미 다녀와 본(혹은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최소한 이렇게 읽고 이렇게 쓰면, 그 끝에 내가 알고 싶던 내가 있다는 것은 배웠다.

 

 


 

68.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가 고비다. 개인적으로 에티카보다 이 전기의 앞쪽 150~200 페이지가 더 읽기 힘들었다. 스피노자가 나타나면 그때부터는 좀 낫다.

 

이란 부사의 제일 잦은 사용처는 자신을 속이는 데라고 하던데.

 


 

 

69. 허변의 모르면 호구되는 최소한의 법률 상식  / 허윤

 

고등학교 때 배운 논리인데, ‘이거 모르면 호구된다는 말이 보증하는 것은 이거 알면 호구가 되지 않는다가 아니다. ‘호구가 아니면 이건 안다.’이다. , 호구가 아닌 사람은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지만, 이거 아는 사람 중에도 호구는 있을 수 있다는 뜻. , 이 책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아도 호구 탈출은 요원할 가능성 있다는 의미가 제목 속에 들어있다. 호구 떼는 게 어디 그리 쉽나. 쉬웠으면 이 나랑 살았겠는가. 세상 만만한 거 아니다.

 




70. 빨강머리 앤 / 루시 모드 몽고메리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게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주제가가 진술한 앤의 인상착의다. 늘 궁금하고 따지고 싶었다. 현상수배 전단지에 쓰여 있는 호남형 얼굴이라는 것은 어떤 얼굴인가. 호남에는 잘생기진 않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가? 내 눈에 잘생긴 사람이 쟤 눈에도 잘 생겼으리란 법은 있는가? 예쁘지는 않다는 말을 함부로 한 것도 문젠데, 사랑스럽다고? 당신이 뭔데 내 사랑의 향배를 결정합니까? ? ?

 

이제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읽는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 ~ 115

코로나 이후의 세계 / 제이슨 솅커 : ~ 100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타오카 이치타케 : 105 ~ 222

발터 벤야민 평전 / 하워드 아일런드, 마이클 제닝스 : ~ 61

 

 

--- 갖춘 ---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슬라보예 지젝

실험실 생활 / 브뤼노 라투르, 스티브 울거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 7가지 / -다비드 나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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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23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읽는 중이거든요. 어제 읽을 때까지만 해도 우와 잘쓴다~ 이러면서 읽었는데 오늘 출근길에 쇼님의 이 페이퍼 읽은 다음에 다시 난.도. 읽으니까... 음.... 역시 생활에세이는 D 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신기하다...

단발머리 2020-06-23 09:02   좋아요 0 | URL
생활 쪽으로도 강한데 영화나 소설 요쪽으로도 괜춘해요, 그 D작가 말이지요...... 추천드리고 싶어요.

비연 2020-06-23 09:53   좋아요 0 | URL
역시 D 죠~ ^^

syo 2020-06-23 21:47   좋아요 0 | URL
도 선생과 맞장뜨는 다 선생님

페크pek0501 2020-06-2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주목하고 있는 책은 남들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또 한번 이 페이퍼에서 확인합니다.
그 책이 뭔지는 비밀입니당~~~ㅋㅋ

syo 2020-06-23 21:48   좋아요 1 | URL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아닐까요? ㅎㅎ

페크pek0501 2020-06-24 00:08   좋아요 0 | URL
딩동댕 입니다. 센스가 만점이신 분!!!

북다이제스터 2020-06-2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젝의 <실재의 사막 ~> 갖춰놓았습니다. ^^

syo 2020-06-25 22:58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갖춰는 놓았는데 언제 읽게 될지.....

감은빛 2020-06-2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갖춘- 이라고 쓰시기도 하는 군요.
제가 syo님 서재에 자주 오지 않아서 그동안에는 못 봤던 걸까요?

제가 syo 님처럼 글을 쓴다면 거의 대다수의 책이 -갖춘- 에 들어가고,
-읽은- 혹은 -읽는- 에는 거의 들어갈 책이 없겠죠. 흑흑

syo 2020-06-29 22:47   좋아요 0 | URL
책을 많이 안 사는 편이라서, 살 때마다 기록을 해두고 싶어지더라구요.
저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그럴것 같으면 사실 ‘읽는‘조차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보니,
결국 그냥 기록에 남기게 되었네요.....

감은빛님이야 워낙 바쁘시니까!
일하면서 책 읽는 건 진짜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종종 백수 시절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