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亭

 

 

조금 더 선명하게 행복하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다. 나를 더 잘 알고 싶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잘 알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잘 원하고 싶었다. 행복이라는 녀석은 원하는 것을 가지고 나서 뒤따라오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가지러 가는 길에, 그리고 그것을 손에 넣은 딱 그 순간까지만 옆에 있어주는 야속한 친구 같아서, 행복하기 위해 늘 내가 지금 어디에 무엇을 가지러 가는지를 선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답은 내 마음속에만 있는 것인데, 내 마음이라는 것이 내 마음만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마음들이 장마철 빗물처럼 들이쳐 뒤섞이는 난장판인 거라, 들여다볼 때마다 색이 변하고 윤곽이 흐려져 도통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삶의 어떤 시간을 통과하기 위해 다른 순간들을 가져와 버팀목으로 써야만 하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인 것을 알아도, 가끔은, 정말 아주 가끔은, 다른 순간에 나를 가져다 놓지 않고 오직 이 시간, 이 장소에만 있게 하는 장면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통유리로 된 벽 너머에 물방울이 무너지는 흰 바다가 펼쳐져 있고, 에어컨은 몹시 시원하고, 일곱 권의 책과 일곱 병이 넘는 술이 놓인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은 다정한 사람들이 있는 장면 같은 것. 바다는 보는 것이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더니 막상 해변에 나가자 정신없이 첨벙거리고 노닥거리고 덩실덩실 춤도 추고 영혼이 탈곡되는 모양의 사진도 찍는 사람들이 있는 장면. 이제 내가 올라탄,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요놈의 길 위에서 나는 부단히도 저 장면들을 떠올리며 나를 위로하고 나로부터 위로받겠지만, 정말로 내가 떠올리고 싶은 것은 내게도 온전히 그 순간 행복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내가 믿고 싶은 것은 앞으로도 그런 순간들이 종종 찾아올 거라는 순박한 추측이다.

 


 


기행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졌다아니비로소 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랄까타오르는 갈탄의 힘으로 한쪽 표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난로며좀체 귀에 와닿지 않는 변방의 사투리며도내에서도 손꼽히는 축산반을 자랑한다는 협동조합을 찾아간다는 사실 등등이 모두그때 그는 눈이 푹푹 나리는 밤 안에 있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 있었다그 밤과 마음이 지금 그와 함께 있었다.

김연수일곱 해의 마지막

 

나는 복원되지 않는다

무수하게 뚫고 메우다보면

처음의 벽은 이미 사라진 벽

우리는 어둠을 갱신하며 서 있다

최현우회벽부분

 

 

--- 읽는 ---

말의 서랍 / 김종원

수학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 / 다카하시 요이치

1년 안에 AI 빅데이터 전문가가 되는 법 / 서대호

마르크스 철학연습 / 한형식

성숙한 어른이 갖춰야 할 심리습관 / 류쉬안

90년생이 온다 / 임홍택

마흔 이후는 사람 공부 돈 공부 / 박길상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 이즐라

라이브 경제학 / 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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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8-0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이다... 사진 정말 근사하네요!

syo 2020-08-08 13:32   좋아요 0 | URL
그렇죠? 뭔가 아련하다...

blanca 2020-08-0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시원해지는 페이퍼네요. 저긴 대체 어딥니까? 김연수 책은 저는 한번 읽어서는 집중이 잘 안되더라고요. 다시 한번 읽어야 될 것 같아요.

syo 2020-08-08 13:33   좋아요 0 | URL
저긴 부산 송정해수욕장 앞입니다 ㅎㅎㅎ
저도 김연수는 두 번 세 번 읽는데, 읽을 때마다 좋지요^-^

반유행열반인 2020-08-0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여름이었네요.

syo 2020-08-08 13:34   좋아요 2 | URL
너무 좋은 여름이었습니다. 좋아요.

수이 2020-08-0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포토제닉이다!!

syo 2020-08-08 13:34   좋아요 0 | URL
포토제닉꺼리가 한두 개가 아니라, 저건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잖아요?

건조기후 2020-08-08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만개 누르고 싶다는 관용구(?)를 오랜만에 쓰게 되는 페이퍼네요. :)

syo 2020-08-08 13:34   좋아요 0 | URL
건조기후님도 되게 오랜만에 뵙네요! ㅎㅎㅎ

페크pek0501 2020-08-08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죽이지만 사진이 참 죽인다, 하고 봤네요.
움직이는 그림을 벽에 걸어 놓고 있는 집 같아요.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하는 집이네요, 저에겐.

syo 2020-08-08 13:35   좋아요 0 | URL
집 좋더라구요. 놀고 가기에도 좋지만 사는 것도 좋았겠어요.
당연히 못 사고 못 살겠지만...... ㅠㅠ

stella.K 2020-08-08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저 사진 속 총각이 스요님이라는 겁니까? 아니라는 겁니까?ㅋ

syo 2020-08-08 13:35   좋아요 1 | URL
저거 전데요 ㅎㅎㅎ

stella.K 2020-08-08 13:45   좋아요 1 | URL
헉, 정말요...?ㅎㅎㅎㅎ
전 스요님이 통통하고 귀여운 상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틀렸네요. 저 분노의 포도알갱이 때문인 것 같슴다.
게다가 나름 트릭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이래봐도 한 예민합니다. 그게 항상 맞지 않아서 그렇지.ㅋㅋㅋ
이렇게 슬림한 뒤태라니...!^^

syo 2020-08-08 19:36   좋아요 0 | URL
그런 이미지로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으하하하.

공쟝쟝 2020-08-08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syo 2020-08-08 19:37   좋아요 1 | URL
진짜 메피스토펠레스 튀어나올 뻔한 밤이었었지..

단발머리 2020-08-08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너무 멋져요!!! 엄지척👍🏼

syo 2020-08-10 07:24   좋아요 0 | URL
사진사 엄지척 👍

비연 2020-08-0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밤, 사람 아련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그대 쇼~

syo 2020-08-10 07:25   좋아요 0 | URL
아련함, 그것은 어쩌면 음주 때문에....

북다이제스터 2020-08-1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본인 뒷태세요?^^

syo 2020-08-13 23:00   좋아요 0 | URL
네 ㅎㅎㅎㅎ 제뒷입니다.

tintin2506 2020-08-1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모습보니 역시 인싸셨군요 ㅜㅜ

syo 2020-08-17 11:21   좋아요 0 | URL
뒷모습을 보고 그런 걸 알 수 있으시다니!
그렇지만 저는 특별히 인싸도 아싸도 되지 못한 인생인 것을요....
 

환각

 

 

1

 

비가 대차게 온다고 했다. 비어 있을 집이 걱정되어 죽을 뻔했는데, 매미가 울고 새들이 지저귀고 심지어 야구도 한다.


三은 오송이라는 곳으로 내려갔다. 주말에 가끔 온다고 한다. 


그동안 '남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사랑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이 시간부터는 'syo 혼자 산다'가 방영됩니다.

 


 

2

 

모처럼 편히 쉬는 주말이라 찬찬히 나를 한번 돌아보았다. 써놓은 글이 있다는 것은 이럴 때 유용하다. 작년의 syo와 재작년의 나와 그 이전의 기록된 모든 syo는 지금보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웃을 줄 아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팔 할이 자조였지만 어쨌든 웃을 땐 진짜 웃었고 웃거나 웃기거나 웃게 만들거나 웃기게 만들면서 뭔가를,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있었던 어떤 허방이나 그늘 같은 미끄럽고 어두운 것들을 요리조리 회피하며 비교적 행복하게 살아내는 모습이었다. 2020syo2019syo를 부러워할 줄을 2019syo는 전혀 알지 못했다. 2019syo는 자기가 최악의 syo라고 생각했었는데, 현재가 최악의 지점인지 아닌지는 객관적인 상황만 놓고 판정할 수 없는 문제였던 듯하다. 아무래도 슬픔이나 우울 같은 것들을 버텨낼 수 있는 마음의 힘 같은 것이 줄어든 모양이다. 그러니까 불행 체감의 수식 같은 게 있다면, 분자는 줄어들었지만, 분모가 더 크게 줄어드는 바람에 결국 더욱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2020syo는 도통, 웃는 글을 쓰지 않는다. 쓰지 못한다.

 



무수한 과거가 우리에게 들어왔다가 사라져간다다만 그 안 어딘가에 다이아몬드처럼 소비되기를 거부하는 파편들이 존재할 뿐이다용기를 내어 그것들을 수집한다면 우리는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설터스포츠와 여가

 

 

 

3

 

그렇게 한다면 물론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쁨의 뒤꿈치에 슬픔이 붙어올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 오랫동안 슬픔만이 있을 것이다.

 

 

 

--- 읽은 ---

 


93. 타인은 놀랄 만큼 당신에게 관심 없다

이종훈 지음 / JUNO 그림 / 성안당 / 2020

 

재기가 넘친다. 그런데 고르지 않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늘 고민하게 된다. 성게는 뾰족한 데가 있어 놀라게 하지만, 굴려보면 공처럼 잘 굴러가지는 않는다. 누구든 한번 찔리면 나를 확 느끼게 만드는 뾰족함과, 읽는 이를 멀리까지 굴러가게 만드는 둥긂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 걸까.

 

 

 

--- 읽는 ---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에티카를 읽는다 / 스티븐 내들러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 캐슬린 배리

논어를 읽다 / 양자오

스토너 / 존 윌리엄스

혼밥생활자의 책장 / 김다은

스피노자 매뉴얼 /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산소리 /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제야 어디에 힘을 빼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 안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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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8-01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도 그렇고 흄도 그렇고 아마도 스피노자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철학자들은 대게 모두 세상이 아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고 고심하고 분석하여 세상 원리를 파악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름 휴가 안 가세요.^^

syo 2020-08-01 23:2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비가 주룩주룩 오네요. 독서하기 좋은 날인 듯합니다. 저는 이런저런 사정을 겪는 중인데, 북다님은 휴가 안 가시나요 ㅎ

페넬로페 2020-08-0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떡해요~~
삼 님이 그리워서요^^
한 번씩 소식 전해주세요**
앞으로 혼자 사는 syo님의 사연도 기대합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제가 책에는 1도
관심없는 사람처럼 보이네요 ㅎㅎ
책얘기도요~~

syo 2020-08-01 23:26   좋아요 0 | URL
삼놈은 어디서나 빈둥빈둥 잘 살겁니다. 간혹 안부 전할게요 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8-01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쁘고 웃을 일이 많이 생기길 빌어요. 뒤꿈치에 붙은 슬픔은 그 발바닥 미는 돌로 갈아 버리고 다른 기쁨 찾아 나서면 되지.

syo 2020-08-01 23:27   좋아요 1 | URL
늘 고맙습니다 ㅎㅎ 슬픔이란 것이 쓱싹 갈아지는 것도 아니고 기쁨이 또 뚝딱 찾아지는 것도 아니라서 서글프네요...

모운 2020-08-01 2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2020년 절반 이상 사용해서 반품이 안 된대

syo 2020-08-01 23:28   좋아요 1 | URL
중고나라에 올려야겟네

페크pek0501 2020-08-02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이 책을 여기서도 보네요. 좋은 책은 발 없는 소문을 몰고 다니나 보네요.

글이 뜸하신 적이 있어 바쁘신 일이 있나, 했습니다.

syo 2020-08-02 13:45   좋아요 1 | URL
말 그대로 일이 바쁘더라구요....

사람 장소 환대는 지금 몇 페이지 안 읽었는데도 굉장히 좋습니다 ㅎㅎ 아직 독서 전이시라면 권합니다^-^
 

 

쌍칼



우리가 여성은 억압과 전유의 대상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추상화의 작동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억압에 대한 인식은 억압에 대한 반응(대항해서 싸우는)일 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개념을 전체적으로 재평가하고억압의 관점에서부터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 전체를 재조직화하는 것이기도 하다나는 이것을 억압받는 자에 의해 만들어진 억압의 과학이라고 부른다현실을 이해하는 작업은 우리 모두가 수행해야만 한다이것을 주체적인인식적인 실천이라고 부르자현실 층위 사이를 오가는 운동(억압의 개념적 현실과 물질적 현실은 둘 다 사회적 현실들이다)은 언어를 통해 완수된다.

모니크 위티그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72-73

 

syo는 우리가 서로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제일 신기하다. 찰떡같이 말했을 때 개떡같이 알아듣는 일, 혹은 그 반대의 일은 하나도 신기하지 않다. 찰떡같이 말했더니 찰떡을, 개떡같이 말했더니 개떡을 내밀 때, 그때가 바로 놀라야 할 때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 완전히 같은 언어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는 특정한 뜻이 없다. 마치 원자핵 주변에 있는 전자의 위치를 확률값의 구름으로만 짐작할 수 있듯, 모든 단어는 정해져 있지 않은 모호한 의미의 덩어리다. 단지 어떤 시간, 장소, 정황, 발화자의 감정, 청자의 상상력, 발화자와 청자 사이에 쌓여있는 역사,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회의 역사, 문화적 좌표 뭐 이런 것들이 뒤섞이면서 한 순간 특정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의미는 구름처럼 흩어져 버린다. 후려치면, 맥락에 따라 단어의 의미나 뉘앙스가 다를 수 있다- 수준에서 끝날 이야기같지만,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모든 단어의 의미는 사회적 산물이다. 그리고 단어의 의미를 조정하는 것은 단지 시간의 흐름만은 아니다. 내가 펩시콜라에 대해 코카콜라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것이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다면, 직접적으로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으로(사용한다고 착각하면서) ‘펩시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내가 속한 언어의 장에서 펩시라는 단어의 위상이 조금은 변한다. 태평양 바다에 민물 한 스푼을 부어 넣는 수준이겠으나, 분명히 변한다. 촘촘히 쳐진 거미줄에 매인 이슬처럼, 단어는 늘 흔들리고 불안하다. 모든 언어는 그렇다. 그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수프 같은 것이어서, 사용자들의 관념을, 태도를, 그리고 무의식을 반영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한다면 우리가 언어를 구조화할 때 무의식의 손을 빌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모든 단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단어의 의미는 사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총합에다가 사용자의 언어 권력을 곱한 가중평균값의 위치쯤에 있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단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는다. ‘여성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하고,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되어있지 못하고, 그리하여 이건 여성이고 저건 여성이 아니고- 와 같은 개인적 견해들의 뭉텅이에 그들의 사회 언어적 권력의 크기를 곱한 다음 사용자의 총수로 나눈 어느 자리에, ‘여성이라는 단어의 사회적 의미가 존재한다.

 

내가 사용하는 여성이라는 단어는 내 개인적 견해의 산물이므로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여성이라는 단어와 미세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데, 앞서 산출한 여성이라는 단어의 사회적의미는 거대한 질량(권력)을 앞세워 개개인이 사용하는 작은 질량의 여성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위치로 맹렬하게 끌어당긴다. 지구의 중력이 사과를 끌어당기듯이. 아무 생각 없으면, 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성을 표현하는데 여성이라는 단어를 빌려 쓰는 이상, 우리는 여성이라는 단어에 덧씌워지는 의미의 거대한 수작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여성 신화여성 신화라고 표기하는 이상, 이것은 여성이라는 언어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단어가 뒤집어쓴 여성 신화를 해체하고 그것을 여성의 바깥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모니크 위티그는 여성자체를 탈출하는 전략을 취하는데,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도리어 손쉬운 일이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이미 너무 오랜 세월 오물을 뒤집어 쓴 채 사용되어 왔고, 심지어 그 쓰레기 의미들은 자연적인 것으로까지 숭배받는다. 뒤집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일단 빠져나와서 싸우자는 것이다. 주체로. 주체로서. 여성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아니다. 계급으로서의 여성은 여전히 우리가 손에 쥐고 싸울만한 무기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는 유물론의 인식은, ‘여성이 자연적인 것도, 신화적인 것도 아니라 사회적, 정치경제적인 위치(계급)로부터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통찰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조력자이므로. 그러니까 위티그는, 왼손에 주체, 오른손에 계급을 들고 여성을 여성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성 범주 그 자체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자는 것이다.

 

유물론적 용어로 개별 주체를 정의하는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유물론과 주체성은 언제나 상호 배타적이었기 때문에이 임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그런데도 이해를 포기하는 대신에 우리는 다수가 '여성신화(우리를 지탱하는 덫일 뿐인 여성이라는 신화)를 포기함으로써 주체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필요를 인식해야 한다모두가 계급의 구성원으로서뿐 아니라 개인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실질적 필요성은 혁명 성취의 첫 번째 조건일 것이다그것이 없이는진짜 싸움 혹은 변화는 없다.

  그러나 반대 역시 진짜다계급과 계급의식 없이는진짜 주체는 없다소외된 개인들만이 있을 뿐이다여성이 유물론적 용어로 개별 주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레즈비언들과 페미니스트들이 한 것처럼 '주체적인', '개별적인', '사적인문제가 실제로는 사회적인 문제계급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섹슈얼리티는 여성 개인이나 주체의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폭력의 사회적 제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일단 소위 모든 사적인 문제가 계급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더라도우리에게는 여전히 개별 여성 주체의 문제가 남는다신화가 아니라 우리 각자이 지점에서 인류를 위한 새롭고 개인적이며 주체적인 정의가 성 범주(여성과 남성)을 넘어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해 보자그리고 개별적인 주체의 등장은 성 범주를 파괴하는 것성 범주의 사용을 중지하고그 범주를 그들의 토대로 사용하는 모든 과학(실질적으로 모든 사회과학)을 거부하는 것부터 요청한다.

같은 책, 73-74


그래서 이것은 인식의 싸움인 동시에 언어의 싸움이다. 그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역사상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강자들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늘 그것을 이용해 왔다. 언어를 통해 관념을 조작하고, 관념을 통해 언어를 바꾸면서.


 

 

--- 읽은 ---



91.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박상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

 

봉곤이의 문장이 개인적으로 더 좋았지만, 사람은 어쩐지 상영이다(귀엽잖아). 봉곤이는 잃었지만, 제발 상영이만큼은 이런저런 모습으로 영원히 내 옆에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92. 라이프니츠가 들려주는 모나드 이야기

김익현 지음 / 자음과모음 / 2008

 

아직까지도 syo는 모나드가 제일 어렵다. 왜 이렇게 개소리 같은지 모르겠다. 내가 기묘하기가 세상에 짝이 없다는 양자역학도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부드럽게 쓱 받아들인 사람인데, 모나드 이것만큼은 진짜 뭔가 싶다.

 

 


--- 읽는 ---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모니크 위티그

마르크스 철학 연습 / 한형식

타인은 놀랄 만큼 당신에게 관심 없다 / 이종훈

90년생이 온다 / 임홍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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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7-2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 잡고 제대로 쓰신 글인듯 합니다...^^

syo 2020-07-26 10:1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마감(?)에 치여서 후다닥 쓰고 말았습니다...^-^

다락방 2020-07-2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데요?

syo 2020-07-26 10:1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이제 100쪽 읽음...

라로 2020-07-26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상영 작가의 책을 미리보기로 읽었는데,,,토비 님의 글을 읽는 듯한? 근데 토비 님 글보다 약간 모자르는 느낌? (진심) 그래도 재밌네요.^^

syo 2020-07-26 10:19   좋아요 0 | URL
그럴 리가! 상영이 얼마나 잘 쓰는데요.... ㅎㅎㅎㅎ

2020-07-26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7-26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오 빨간 책 사면 뒷면에 해제-하고서 붙어 있는 글이군요. 짝짝짝짝

syo 2020-07-26 10:20   좋아요 1 | URL
그러고 다음 챕터를 읽었더니, 제가 완전 딴소리를 하고 있던 것이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20-07-26 10:2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아무렴 어때. 이 글은 책 표지 감춰도 그 자체로 읽는 맛+유익함 잔뜩이었습니다.

단발머리 2020-07-2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데요. 엄지척! 척척척!!!

syo 2020-07-26 10:20   좋아요 0 | URL
바로 다음챕터에서 혼 남....

수이 2020-07-26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 언니가 더 좋아지는 글입니다. 실로 감탄. 아침부터 뇌가 즐거워지는.

syo 2020-07-26 10:21   좋아요 0 | URL
밤에 쓴 편지 같다, 아침에 읽어보니까 저렇게까지 단정적으로 깝칠 일이었나 싶네요....

비연 2020-07-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뤠잇!

syo 2020-07-26 10:21   좋아요 0 | URL
왜 다들 여기서 출첵을 하죠? ㅋㅋㅋㅋㅋㅋ

AgalmA 2020-07-2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작가에 관심을 더 가지려는 시기에 나타난 봉곤과 상영 제게서 다 안타깝게 점수를 잃어서 저는 맘 편한 해외 작가로 다시 ㅜㅜgogo
그런데 코카콜라와 펩시 맛을 구분 못 한다는 게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김 빠진 상태라면 몰라도 펩시는 코카콜라보다 좀 싱거운 게 분명 느껴지는데...

syo 2020-07-26 14:1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상영이 봉곤이를 다 잃으셨군요. 슬픔.....
콜라사랑 27년차로 접어드네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맛은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김 빠진 상태에서조차 그 두 콜라는 맛 자체가 다른데요.

공쟝쟝 2020-07-28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봉곤찡.... 왜그랫졍....
 


 

바람 속에서 제비가 높게 날았다. 흐린 가운데 대기가 투명해 멀리 앉은 산이 진한 녹색이었다. 그 녹색을 에두르며 솟아오른 아파트들은 지나치게 하얗고 날카로와 마치 지구의 뼛조각 같아 보였다. 구름이 달리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옥상은 소리로 가득 차 있어서 바람 안에서 숨 쉴 때마다 위태로움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숲이 몸을 흔든다. 옆집 빨래건조대가 뒹군다. 앞집 옥상에 늘 있던 성격 나쁜 강아지는 어디론가 치워졌다. 시끄러우니까 없어졌으면, 하고 나쁜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 맑은 날이었다. 사람은 맑은 날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흐리고, 곧 다시 비가 올 것만 같고, 옥상에 올라오는 계단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보라색 나팔꽃들이 분분히 흩어져 있다. 어제를 견디지 못하고 옆집 옥상으로부터 날아든 모양이다. 내다보니 아직 꽤 많은 꽃이 잘 매달려 있다. 위태롭되 싱싱하다. 늘 그렇다. 바람이 크게 일면, 줄기를 부여잡는 힘이 약한 녀석들은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바람은 한 번도 꽃잎에 친절한 적이 없다. 꽃잎도 바람의 진심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바람에 몸을 맡긴다-고 이르기보다는 바람에 멱살을 잡혀 내동댕이쳐진다-고 표현하는 게 낫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줄기는 알게 된다. 꼭 닮은 무수한 꽃 가운데 어느 놈이 줄기에 더 적합한 놈인지를. 꽃도 알게 된다. 나는 줄기와 하나가 아니었구나, 그저 줄기에 얹혀 있던 것이었구나, 이 모든 게 바람이 크게 불면 들통날 짧은 거짓말이었구나,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러니 이제는 더 높은 곳으로, 그러니 이제라도 더 먼 곳으로,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다시 한 번 더…….

 

 

 

--- 읽은 ---

 


90. 스포츠와 여가

제임스 설터 지음 /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5

 

관능의 기억으로만 남는 사랑이 있을까. 관념과 섞이지 않은 관능은 섹시하지 않고 기억 속에서 오래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를 안았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안았을 때, 그 두 가지를 서로 구분할 수 없었을 때, 그때 그 순간 말고 그 순간을 둘러싼 많은 일들과 그 일들을 둘러싼 많은 감정들과 그 감정들을 둘러싼 많은 제약 조건들과 그 조건들로 둘러싸인 중에서도 늘 펄떡펄떡 뛰놀았던 감정들, 사건들, 그런 것들이 다 함께 녹아있는 안에서 지나간 관능들은 섹시하다. 나는 아직도 내 치골을 오래 강하게 찍어누르는 어떤 꼬리뼈의 감각이라든지 내 얼굴에서 다른 얼굴로 줄지어 떨어지던 땀방울의 온도 같은 것들을 종종 떠올리는데, 그것은 그 관능의 장면이 관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능의 뒤에, 관능과 관능의 사이에, 그것은 있다. 스포츠처럼, 여가처럼,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서, 더 아름답게 해 주는.

 

 


91.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

 

여리다는 것. 결국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내 안에다 벽을 들여놓고 내 안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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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7-2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좋아요 먼저 누르고!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저 로또 살까요? 토비 님의 글에 제가 일빠로 좋아요하고 댓글 쓰다니!!!ㅎㅎㅎㅎ)

라로 2020-07-24 12:31   좋아요 0 | URL
음,,,,댓글과 좋아요를 먼저 한 후 글을 자세히 읽으니 저런 댓글 단 것 후회되고,,,로또는 무슨...ㅠㅠ 너무 반가와서 저랬나보다,,그렇게 생각해줘요,,그랬으니까.

syo 2020-07-24 12: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라로님 반가워요. ‘라로‘라는 두 글자만으로 딱 위안과 위로가 됩니다 ㅎㅎ

추풍오장원 2020-07-2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강아지 성격 정말 고약한 친구였나 봅니다.다른데 갔을까요?

syo 2020-07-26 00:15   좋아요 0 | URL
최근에 복날이 있었다는 것이 힌트가 되려나 했으나, 오늘부터 다시 짖기 시작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7-25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에 스포츠와 여가를 읽었는데 등장인물이 몇 번 하나(뭘...)세어봤던 기억이 나네요.

syo 2020-07-26 00:16   좋아요 1 | URL
몇 번 하던가요? 적잖게 하긴 하던데.....

2020-07-26 0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6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6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syo의 정수리와 흐르는 의식의 시궁창

 

 

책상 위에는 책이 있고, 차마 다 세어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무한 개쯤 있고, 나는 이것들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만 할 것 같은데 세상일이 참 마음대로 되지가 않고, 고작 한 달 동안 내 손을 거쳐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꽂히는 돈의 액수가 내가 평생 벌어도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려서 나는 마우스를 쥐고 오들오들 떨고 있고, 이 와중에 우리 회사보다 옆 회사가 괜히 더 좋아 보이고, 그런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회사에서는 면허 따라고, 친구는 운동하라고, 커피메이커는 세척해 달라고, 이런 난리 난리 가운데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콜라를 마시고, 엑셀 바이블이나 뒤적거리고, 기초연금 선정기준액을 외우고, 오늘은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버거킹에서 햄버거 하나 먹어야지 다짐하고, 행복한 일상이란 건 마치 지구 외 지적생명체처럼 확률적으로는 세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봤다고 증언했다가는 반쯤 미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일 정도로 만나기 어려운 존재인 것이고, 그렇다면 일상 속 행복이라는 것은 있느냐 하면 그건 또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고, 그대여 힘이 되 주오 길을 터 주오 불러 볼 사람도 없는 것이고, 그럼에도 분노도 슬픔도 그렇다고 즐거움도 기쁨도 뭐 하나 특별히 치고 나오는 감정이 없는 걸 보면 나는 차분하게 침착하게 부드럽게 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고,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이 글을 쓴 놈은 굉장히 불쌍하고 스트레스 많고 꿈도 희망도 미래도 비전도 없는 놈처럼 보이고, 근데 막상 그놈 자신은 또 바쁘고 정신없는 거 말고는 특별히 힘들거나 불행하거나 하지는 않고, 도대체 이건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서 있는지 모르겠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시간은 흘러가고, 갈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은 부산까지 이제 스무 날 남짓 남았고, 정수리가 간지러워서 긁은 손 냄새는 대체 왜 맡아보는 것이고, 기왕 맡았으면 그냥 넘어가지 왜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고, 그 와중에 나만 이런 놈이고 싶진 않았는지 네이버에 검색해 보는 것이고, 봤더니 정수리 긁고 자동적으로 냄새 맡는 것은 인류 공통의 전통 깊은 행동양식이었던 것이고, 덕분에 으하하하 웃었다가 이내 내가 대체 무슨 세상에 살고 있는가 싶어서 오싹해지는 것이고, 이러고 허비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책이나 읽자 등신아 하며 봤더니 책상 위에는 책이 있고, 차마 다 세어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무한 개쯤 있고, 나는 이것들에 대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만 할 것 같은데…….

 

 

 

--- 읽은 ---

 


87. 나의 첫번째 과학 공부

박재용 지음 / 행성B / 2017

 

이 점수를 가지고 내가 대학을 간다는 마음으로 과학을 배우고, 문제집을 풀고, 그렇게 대학을 가서 이 점수를 가지고 내가 취업을 하거나 유학을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과학을 배우고, 문제를 풀고, 뭐 그런 식으로 과학과의 인연을 오래 쌓은 사람은 과학 교양서를 읽기에 다소 부적합한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게 말고 개인에게도 과학이 필요하다면, 그 필요성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그 차이에 따라 과학책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인문학도에게 권하는-’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과학도에게 권하는첫 번째 철학 공부- 라는 책을 보았을 때 어떤 감정이 들 것인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렇게 쓰고 나니까 원서 읽으시라 원전 읽으시라 강권하는 분들이랑 비슷해진 것 같다.

 

 


88. 이기는 몸

이동환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


건강을 유지하는 일은 어려운 듯하면서도 쉽고,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데가 있다. 알아야 할 것, 먹어야 할 것이 많고 움직이는 데 써야 할 시간도 많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지금 건강하기 위해 당장 무엇을 먹거나 먹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고는 있다. 이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 그런 일이다. 눈 딱 감고, 이 책이 시키는 대로 1년만 살아볼까?

 

 


89. SQL 첫걸음

아사이 아츠시 지음 / 박준용 옮김 / 한빛미디어 / 2015

 

난 데이터베이스 과목 학점 A였는데 오늘날 이 시점에 첫걸음을 낑낑 거리며 보고 있다. 15년의 세월이 무섭다. 3 육상 꿈나무도, 그의 시간을 15년만 거꾸로 돌리면 첫걸음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 읽는 ---

스포츠와 여가 / 제임스 설터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모니크 위티그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이제야 어디에 힘을 빼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 안블루

수학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 / 다카하시 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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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7-12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는 이의 불행은 읽은 이에게는 왜 재미난 것인지...의식의 시궁창을 허우적대며 안타까운데도 왜 재밌는 글빨인가...(사악한 독자 올림)

syo 2020-07-12 11:23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일주일이나 되었으니 뭐라도 써뱉어야 한다는 강박이 저런 걸 만들어내고 말았다......

반유행열반인 2020-07-12 11:35   좋아요 2 | URL
무엇이 되었든 생존신고는 좋은 일...더 여유로워지고 덜 힘든 날이 어여 오길 빕니다.

수이 2020-07-12 13:49   좋아요 2 | URL
같은 마음 찌찌뽕, 오늘쯤이면 쇼님 글이 올라올 테니 알라딘 들어가봐야지 하고 아침 설거지 하면서 생각했더니 짜잔_

추풍오장원 2020-07-12 2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리워진 길은 유재하보다 김현식 버전이 더 좋더라구요.
유재하가 김현식만을 위해서 쓴 듯한 노래..

페크pek0501 2020-07-13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책 구경, 잘하고 갑니다. 글은 언제나 재미지고... 질서가 없는 듯하면서 질서가 있는 글에 감사^^

나와같다면 2020-07-14 0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힘들죠? 그래도 저는 syo님이 취업 되었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괜히 기분이 좋았어요

공쟝쟝 2020-07-16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 긁으며 읽다 화들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