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침내 급기야! 이 책을 다 읽은 나를 칭찬한다. 누워서 읽기 정말 불편한 두께. 손목이 아파서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 집사가 이 책 떨어뜨리면 어떡하지? 공포에 젖은 3호의 눈망울- 나도 양심은 있어서(우리 고양이 이 책에 맞으면 큰 일ㅋㅋㅋ) 이 책은 읽다가 한 번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2015년에 출간되자 마자 사 놓고 서문과 중간에 관심 있던 장 조금 읽고는 일단 미뤄뒀던 이 책.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된 데에는 은바오의 힘이 컸다..... 응(?)
요즘 기말과제발표시험 기간이었던 은바오. 그래도 양심(?)은 있는, 아니 욕심&승부욕은 있는 학생이라 북플을 멀리하고 나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았는데, 아니 요 녀석을 보아하니 내 100자평에는 계속 나타나서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기는 게 아닌가. 그래도 자기도 부담은 되는지 리뷰나 페이퍼 같은 긴 글은 차마 못 읽고 내가 올리는 100자평에는 계속 흔적(영역 표시???-_-?)을 남기고 가던데....
급기야 나는 머리를 굴려서, 은바오 시험 끝날 때까지 100자평을 올리지 말아야겠다! 싶었는데 내 습관상 책 읽으면 몇 시간 내로 100자평을 올리고 정리를 하기 때문에 이걸 안 하기도 뭐했다. 게다가 200쪽 남짓 분량의 책은 술 안 마시는 날이면...(은 아니고 술 마시고도) 하루면 읽고 100자평을 남기게 되더라. 그래서 짜낸 묘안! 아, 그래! 100자평을 쉽게 남길 수 없는 두꺼운 책을 읽자! 하다가 손에 든 게 바로 이 엄청난 두께의 <일탈>이다. 집에 벽돌 책이 많기는 하지만 요즘 이 책이 읽고 싶기도 했다. 드디어 읽어야 할 때. 그러니까 <일탈>은 “은바오야 너는 글공부를 하거라 이 에미....아니 이 스승....아니 이 약혼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는 책을 썰.....테니? 아니 이 책을 격파할 테니. 이런 심정으로 완독하게 되었다는.
그런데 시험 끝나고 은바오 읽은 책장 목록에 추가된 책들을 보니... 음 무려 6권이나 추가가 되었더라. 이 녀석, 시험공부를 한 거니, 시험 기간에 책 읽는 능력을 시험한 거니? 게다가 <일탈> 읽고 남긴 내 100자평에 은바오가 남긴 댓글을 보니 “어쩐지 잠자냥님 100자평이 뜸하다 싶었는데”라는 구절 발견. 그러니깐 너는 계속 북플에 접속했던 것이로구나?! 허허허. 결국 ‘너는 글공부를 하거라 나는 이 책을 격파할 테니’는 큰 그림에서는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만 내 개인 독서로서는 뿌듯했다.
게일 루빈의 <일탈>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LGBTQ(루빈이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쓸 무렵에는 A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간 개개인의 성적 차이-섹슈얼리티 기호-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인정할 때 진정한 성 해방이 올 수 있다는 조금은 뻔한(?) 결론일 텐데, 접근방식이 인류학적이라는 점(방대한 연구)과 기존의 페미니즘 연구와는 차별되는 지점(그래서 오도되거나 혐오 또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이 있다는 게 큰 차이이다. 그러니까 루빈의 이 책에는 S/M 즉 사도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무수히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가죽족”이라는 생소한-그렇지만 어쩐지 상상이 되는- 단어도 자주 등장하고,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9장 ‘카타콤-똥구멍 사원’의 경우 ‘주먹성교’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한다(아침부터 미안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게일 루빈 자체가 이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루빈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인데 여기에 덧붙여 레즈비언 S/M 단체인 사모아의 공동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1960년~9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가죽족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9장 카타콤은 S/M 가죽족과 주먹성교자들의 섹스 바였던 카타콤에 관한 민족지학적 기록으로 루빈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진솔하게(..... 말잇못) 그려진다. 이런 루빈의 성적 기호는 <일탈>을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 미시간대학에 입학한 후 레즈비언으로의 커밍아웃, 이후 사도마조히스트로 또 한 번의 커밍아웃. 루빈의 이 정체성은 그의 논문과 함께 센세이션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루빈은 동성애자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더 적대적인 취급을 받을 이들-사도마조히스트나 성도착자 등 ‘성적 하층민’ 즉 섹슈얼리티에서의 일탈자들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모든 억압에 반대한다. 바로 그 지점 때문에 2차 페미니즘 물결 속 페미니스트들과 극명하게 대치하게 된다. 루빈의 급진적인 삶과 관점이 주류 학계에서는 일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주류 페미니즘은 당연하게도(?) 성범죄와 성폭력의 주범으로 포르노그래피를 지목하고 반(反)포르노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포르노그래피를 비롯한 모든 성적 쾌락과 자유를 옹호하고 추구해온 루빈의 이런 입장과 관점을 담은 논문들은 당연하게도 페미니스트들의 공격과 혐오,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모든 섹슈얼리티의 절대 자유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은 페도필리아마저 옹호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루빈의 이 급진적인 논문들은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서조차 오랫동안 금기의 대상, 논외 대상이었다,
<일탈>에 실린 논문 중 백미는 역시 이 책 1장인 <여성 거래>와 5장 <성을 사유하기>이다. <여성 거래>는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쓴 논문으로 <성의 변증법>을 쓴 파이어스톤처럼 루빈 또한 천재구나 싶어진다. 이 논문에서 루빈은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이론을 차용해 남성 지배 사회의 기원이 여성 거래를 통한 친족 형성에 있음을 밝히는데, 이 관점은 굉장히 신선하다. 이 논문에서 루빈은 성적 불평등과 여성 억압을 계급 범주로만 규명할 수 없음을 밝히고 ‘섹스/젠더 체계’란 한 사회가 생물학적 섹슈얼리티를 인간 행위의 산물로 변형시키고 그와 같이 변형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련의 제도라고 정의 내린다. 제2물결 페미니즘이 여성 억압을 설명하던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만으로는 젠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인류학, 정신분석학, 후기구조주의 관점에서 젠더 연구 방법론을 제시한 탁월한 논문이 아닐 수 없다.
“성을 사유할 때가 왔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5장 <성을 사유하기>는 루빈의 생각이 집대성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 영감을 받은 루빈이 온갖 일탈적인 성을 처벌하고 억압함으로써 이성애 정상성에 이르는 현대판 성의 역사를 연구한 것으로 동성애, S/M, 포르노그래피를 비롯해 아동성애 등 모든 섹슈얼리티의 절대 자유를 옹호하는 급진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 나 또한 루빈의 이 논문을 읽는 내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성인들 간의 합의 아래 이루어지는 S/M이야 그렇다 쳐도 소아성애는 아니지 않은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순간 그의 주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루빈은 이 장에서 그림과 도표를 동원해 성 위계질서를 명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 위계질서의 맨 꼭대기에는 결혼/출산하는 이성애 커플이 있고, 그 아래에는 비혼 일부일처주의 이성애 커플이, 다른 이성애자가 그 아래에 위치한다. 또 그 아래에는 장기간 안정된 관계를 맺는 동성애 커플이 존재하고(루빈은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현대 사회에서 인정하는 섹슈얼리티라고 본다), 그 아래로는 바에서 섹스 파트너를 물색하러 다니는 다이크나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게이가 놓인다(루빈이 보기에는 이 지점부터 사회의 혐오와 탄압, 멸시가 극렬해진다).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는 존재들이 트렌스섹슈얼, 복장 도착자, 페티시스트, 사도마조히스트, 소아성애자, 성노동자이다. 그는 이 “성적 하층민들”의 이른바 성적 일탈을 탄압하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소아성애 옹호론자로 오도되었고, 때문에 그 유명세에 비해 루빈의 저술이 북미에서조차 그다지 연구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면 루빈은 정말 소아성애를 옹호했을까? 그보다는 성 위계질서의 가장 바닥을 차지하는 이들, 소아성애라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금기에 도전함으로써 법적인 미성년자의 섹슈얼리티, 합의에 따른 세대 간 성관계, 도덕적 판단에 근거한 특정 섹슈얼리티의 범죄화 등의 문제를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 예컨대 아동과 청소년은 성과 관련해서는 늘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가(이 지점도 논란이 많을 것 같다), 섹슈얼리티에서 도덕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합의에 근거한 성인과 미성년의 성관계를 범죄화하는 것은 타당한가? 아동, 청소년, 미성년은 성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그들의 나이는 또 어떤 기준에 따라서 결정하는지, 또한 십 대 중후반의 청소년과 성인의 성관계는 어떻게 볼지, 10대들이 그들끼리 휴대폰이나 채팅으로 자신의 성적 이미지를 주고받는 행위를 ‘아동 포르노그래피’라 단정 짓고 범죄화하는 것은 타당한가 등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도덕 기준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밖에도 루빈과 주디스 버틀러의 대담을 담은 12장 <성적 거래>와 부치와 젠더 경계에 대한 성찰을 담은 10장 <미소년과 왕에 대하여>, 그리고 9장 카타콤도 솔직히 흥미롭게 읽기는 했다. 9장을 통해 나는 주먹성교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주먹성교라는 단어만 보고는 주먹을 서로 맞부딪치나....하는 순진한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으나 그건 역시 아니고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올해 초반은 주필리아의 존재를, 올해 후반은 주먹성교자들의 존재를 알게 된 아주 알찬...... 한 해였다.......
낙인이 찍힐까 봐, 모두가 두려워했던 질문을 그는 서슴지 않고 던졌으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일탈자로 다시 낙인 찍혔던 게일 루빈.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 억압의 철폐 그 이상을 꿈꾸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 역할들의 제거를 꿈꾸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꿈은 양성적이며 (섹스가 없진 않겠지만)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다. 그런 꿈속에서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할 것이다.”라고.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한 사회. 이것이 루빈이 꿈꾼 궁극적인 유토피아였다. 그녀의 몇몇 주장에는 이 책을 다 읽은 후로도 여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꿈꾼 유토피아만큼은 나 또한 바라는 사회이다. 끝으로 이 책에서 루빈이 인용한 어빙 고프먼의 <낙인>의 한 구절을 옮겨 적어보기로 한다. 섹슈얼리티에서의 절대 해방을 주장한 루빈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아닐까.
우리 정상인들의 낙인 찍힌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그런 사람에게 취하는 행동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반응은 관대한 사회적 행위를 통해 부드럽게 개선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히도 낙인찍힌 사람은 인간 축에 들지 못한다고 여긴다. 이런 가정으로 인해 우리는 여러 가지 차별을 행사한다. 우리는 차별을 통해 효과적으로, 종종 아무런 생각 없이 그들이 누려야 할 생활의 기회를 빼앗는다. 우리는 낙인 이론을 지어내고, 그런 사람의 열등성을 설명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가 대변하는 것들이 위험하다고 설명한다. 때로 우리는 사회적 계급 차이 같은 말하자면 다른 차이에 바탕을 둔 적대감을 합리화한다... 우리는 원래의 불완전함에 그 밖의 온갖 불완전함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일탈>, 607-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