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도 때와 시기가 있다. 두 번쯤 읽으려다 결국 읽지 못하고 그렇게 안녕을 고할 뻔했던 <패배의 신호>를 이 가을 늦은 밤에 읽는다. 사강의 작품들이 대개 그렇듯이 네 명의 남녀가 등장하고, 아 이 사람들 결국 사랑에 빠지겠구나,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은 또 상처받겠구나…. 엇갈리는 사랑과 관계가 곧 펼쳐지겠구나 초반부터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랜만에 사강을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가을밤이라는 시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사강 특유의 섬세한 문장들과 사랑에 빠지기 직전 또는 사랑에 빠져버린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들이 고스란히 가슴에 다가와 박힌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이 책이 내 마음에 유난히 더 와닿는 그 까닭을…. 좋은 책은 그 작품을 통해 읽는 이의 상황과 현실을 반추해보게 하는 힘이 있다. <패배의 신호>가 내게는 그랬다. 얼마 전 나는 애인과 크게 말다툼을 했고, 오랜 기간 만나오면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싸움을 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상태가 심각해서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낸 지 며칠이 흘렀고, 관계 자체가 흔들릴뻔했다. 결국 이번에도 마음 넓은 그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상처받았을 쪽인 그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자존심이라는 못나고 거추장스러운 그 감정 때문에 결국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 나는 결국 우리 관계를 망가뜨려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내게 손을 먼저 내민 그 사람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헤아리지조차 못했던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되고는 우리에겐 ‘퇴각의 북소리’가 울리지 않았구나. 아니 우리에게는 어쩌면 영원히 울리지 않겠구나 생각하며 이 사랑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본다.
그렇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또 대부분의 사강이 그리는 사랑의 모습들이 그러하듯이 그 안에서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행복하지는 않다. 아니 행복한 순간은 찾아온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그 사랑은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하려는 어떤 사람의 마음의 갈등 때문에 곧 깨지고 만다. 아니, 서로가 다른 형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그 행복이 유지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옳으리라. 루실, 서른 초반의 그녀는 무위도식하는 것을 인생 최대의 행복으로 여긴다. 어떤 관계에도 어떤 상황에도 딱히 심각해지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그녀의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가 이토록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24시간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는 나이는 많지만 엄청난 경제력을 지닌, 그래서 루실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척척 사줄 수 있는 그런 애인이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20년이 넘는 나이 차가 있지만 루실은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샤를의 경제력과 평온하고 안락한 삶 속에서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루실만이 그러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루실과 곧 사랑에 빠질 예정인 앙투안이라는 청년. 루실과 비슷한 또래의 이 남자 또한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돈도 많은 디안이라는 애인을 두고 있다. 그런데 루실과 달리 앙투안은 출판사에서 일하며 자기만의 좁은 원룸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루실보다 낫다고 볼 수 있지만, 돈 많은 애인의 경제력을 누리거나 이용하면서 편히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점에서 앙투안과 루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동류’임을 알아보고 각자의 애인과 함께했던 어느 사교모임에서 눈이 맞아 곧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부유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지루한 애인을 두었던 루실과 앙투안, 게다가 둘 다 매력적이 외모라 샤를과 디안이 자신들의 어린 애인이 자신을 딱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내 옆에만 있어 달라는 듯한 태도로 돈과 마음과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이 아이들은 그래서 더 둘이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루실과 앙투안의 관계를 바라보는 이들은(책 속에서나 책 밖에서나) 이 두 사람이 빠르게 사랑에 빠지고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서로를 갈망하더라도 그 사랑이 곧 시들어버릴 것을 아니, 시들지 않더라도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안다. 왜냐하면 루실의 행복의 원천은 ‘무위(無爲)’인데 앙투안과 함께 하는 삶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실의 샤를과 루실의 앙투안은 크게 다르다. 경제력도 차이가 있지만 샤를이라는 캐리터는 좀 독특해서 루실의 모든 장단점을 알고도 그녀를 사랑한다. 심지어 루실이 앙투안과 사랑에 빠질 것임을,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도 사랑한다. 돌아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돌아오라면서 루실을 앙투안에게 보내주기까지 한다. 현실 속 사랑에서 이것이 가능할까 싶은데 이 남자에게는 그만큼 루실의 존재가 절대적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당신이 행복한 것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랄까. 그래서 샤를은 앙투안에게 루실을 보내면서도 언젠가 앙투안은 지금 너의 장점으로 보이는 면들 때문에 너를 비난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그 말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앙투안은 루실의 자유로움, 루실의 가벼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그 매력에 푹 빠지지만 자신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그것은 곧 그의 눈에는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루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넌 아무것도 안 하니? 넌 아무것도 안 하고 나만 기다리니? 넌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책만 읽니? 왜 넌 일을 하지 않니? 네가 일을 하면 우리 삶이 좀 더 나아질 텐데.....
집요함만큼이나 야망도 없고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만큼이나 직업을 갖고 싶은 마음도 없는 루실에게 앙투안의 이런 요구는 점점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그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생활전선에 뛰어들기도 하지만 자신을 애초부터 일을 할 수 없게 태어났다고 믿는 루실에게 노동의 나날을 지옥과도 같다. 그리고 그 방 안, 집이 아닌 앙투안과의 방 안에서의 생활도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사랑이 빵에 바르는 버터는 아니기에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는 이 두 아이들은, 어른인 샤를과 디안의 도움 없이 그들 자신의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그 길은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루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돈 많은 애인에게 기대어 살 궁리만 하다니, 게다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 격분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무위를 향한 집념(여기에는 루실조차 집념이 있어 보인다)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나도 그렇지만 나의 연인도 아침이면 일어나 노동하러 일터로 나간다. 그리고 저녁이면 녹초가 되어 돌아와 하루하루 그날의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또 내일을 위해 잠들기 바쁘다. 때로는 알코올로 잊고 또 때로는 서로 이야기하면서 풀고 또 때로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면서 잊고는 하지만 노동이라는 쳇바퀴를 떠날 수는 없다. 삶에 지치면 인간은 예민해지고 그러다 보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게 된다. 일상의 피곤함에 지고 말아 “있잖아, 난 널 영원히 사랑해”라던 처음의 맹세들은 빛이 바래고 마는 것이다.
루실이 샤를를 이용하기만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루실은 앙투안을 사랑했듯이 샤를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샤를을 사랑했을 것이다. 이 여러 빛깔의 사랑에서 샤를의 사랑은 단연코 빛난다. 돈 많은 남자가 젊은 애인을 물심양면 지원해주면서 곁에 잡아두려는 게 뭐가 그렇게 빛이 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루실을 단 한 순간도 구속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오롯이 루실을 있는 그대로, 그녀의 장점도 장점 그대로 단점도 단점 그대로 보면서 알고 사랑해준 사람, 끝까지 그녀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샤를이었다. 나는 샤를의 사랑에서 또 많은 것을 배운다. 내가 돈이 많다면 나의 애인에게 너는 일하지 않고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아,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샤를이 루실에게 해주듯이 나의 연인에게 해줄 수가 없다. 누군가를 진정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 그러니까 그 사람의 온전한 행복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알 것이다. 샤를의 그 마음 만큼은 닮아보자고 내 마음에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