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잘 지내니? 네가 생각났어. 어제는 밤새 눈이 내렸어. 네가 있는 곳도 눈이 왔니? 내린 눈 때문인가, 아니면 그 겨울 때문일까. 하루키 때문인 것 같아. 요즘 너는 무슨 책을 읽니, 난 하루키를 읽고 있어. 내가 너에게 하루키를 읽어보라고 했던 적이 있었나? 그랬을지도 몰라. 그땐 하루키 읽는 게 유행 같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래서 네가 생각난 건 아닌 것 같아. 하루키의 새 작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아이들, 그러니까 열여섯, 열일곱 소년, 소녀야. 십 대의 아이들이 걷고, 웃고, 이야기 나누고 서로 줄곧 붙어 다니면서 아무 말이나 해도 즐거워하는 걸 보니 너와 나의 그때, 열일곱 그때가 생각났어.
그런데 그토록 서로 좋아하던 아이들이 함께 늙어가는 건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인가 봐. 열여섯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려. 마치 너처럼…. 소년은 열일곱 그때 그토록 좋아한 소녀를 상실해버린 거야. 아무 말도 없이 어느 날 사라진 첫사랑.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일까. 너는 그래도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거듭했지. 스무 살, 서른 살…. 너를 마지막으로 본 그 겨울에 너는 한 번만 안아보자며 나를 가볍게 껴안고는 쓸쓸히 웃고 떠났지. 나는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는데 왜 그 후로 아무 연락이 없는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또 곰곰 생각해보곤 해. 그날이 정말 끝일까? 아니면 또 몇 년 뒤에 불쑥 다시 너는 내 앞에 나타날까? 하루키가 창조한 세계의 소년은 소녀를 잊지 못해. 첫사랑이라서, 갑자기 사라져서 더 안타까운 거겠지.
소년은 그렇게 나이 들어가. 대학을 가고, 사회에 나가 취직을 하고, 사람들과 섞이면서 살아가고자 애를 쓰지만 소녀가 그렇게 사라진 이후의 삶은 예전 같지 않아서 어딘가 나사가 빠져버린 듯해. 그리고 이제는 마흔이 넘어버려서 중년에 접어들었어. 공허한 나날 속에 소년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삶을 바꿔버려. 그렇지만 소년은 모험가 기질이 넘친다거나 역동적인 사람은 아니라서(하루키 작품의 남주인공들이 대개 그렇듯이), 살던 도시를 떠나서 어느 외진 시골 마을로 갈 뿐이야. 직업을 바꾸기는 하는데 그 직업이 좀 재미나. 책을 좋아하던 소년이 사회에 나가 하고 싶던 일은 편집자였는데 성적이 모자라서 그 일은 못하고 출판사에 취직하기는 하지만 주로 도서 관리를 하는 일이었거든, 그런 적성을 살려서 시골의 한적한 도서관에서 일하게 돼. 도서관장 자리를 맡은 거야.
이런 지점들이 나는 좀 재미났어. 주위 사람들은 이제는 마흔다섯이 된 이 소년의 삶을 무료하고 적적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한적한 시골에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산책하듯이 직장에 나가고 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과 씨름하다가(이 도서관은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아서 사람을 상대할 일이 별로 없어. 환상이지?!)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또 책을 읽다가 잠드는 삶. 좋은 인생이지 않니? 소년, 아니 중년에 접어든 이 남자도 그런 삶 자체는 만족스러워해. 단 한 가지 소년의 “너”, 그러니까 소녀가 없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이 고통스러울 뿐이야. 소녀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리고 너는 또 어디에 있니?
흥미롭게도 소년이 나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소녀는 열여섯 그 모습 그대로야. 그렇겠지 왜냐면 소년의 기억 속에 소녀는 사라질 무렵의 그때 그대로일 테니까. 그런데 나도 널 생각할 때면 열여섯 열일곱 그때의 네가 가장 선명하게 떠올라. 오후 다섯 시 무렵 해가 저물 때쯤 운동장을 달리던 너…. 나는 이 소년과 달리 네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도, 너는 내게 열여섯 그때의 그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어. 왜일까. 아마도 그때가 감정적으로 가장 격렬한 시기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래도 인간에게 순수하던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때라일까? 소녀와 소년도 그래. 소년은 그래서 열여섯의 소녀를 머릿속으로도 마음속으로도 밀어내지를 못해. 소년에게는 불치병 같은 존재, 그게 열여섯 그 소녀야. 누군가를 처음 좋아한다는 건 그런 거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실로 순수한 백 퍼센트의 마음” 그 마음이 가능하던 시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이런 이분법적인 세계가 끊임없이 펼쳐져. 도시 안과 도시 밖, 그림자와 실체, 꿈과 책, 시간과 비시간,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 그런데 무엇보다 “그림자와 실체” 이 두 단어가 이 작품에서는 계속 등장해. 소녀와 소년이 함께 하던 그 시절에 소녀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해. 이곳의 자신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나 마찬가지라고, 자기의 실체는 저기 어딘가 다른 도시에 있다고. 소녀가 말한 ‘저기 어디 다른 곳’이 바로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소년은 이 말을 좀 의아하게 받아들이지만 나중에 소녀가 말한 그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게 돼. 그런데 재미난 건 소년은 오히려 그 도시 안에서 그림자를 상실하고 만다는 점이야. 도시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림자는 벽 밖에 두고 온 거야. 왜 그래야 했을까?
그런데 문득 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소녀가 말한 이 도시 안 세계도, 그림자와 실체의 이야기도, 그걸 굳게 믿는 소년의 생각도 모두가 사랑하는 이들이 빚어낸 자기들만의 굳건한 세계는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 왜 그렇잖아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기도 하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창조하기도 하듯이 이 열여섯 열일곱 소녀 소년도 책 읽고 꿈꾸기를 좋아했던 아이들이라 그런 자기들만의 이야기, 세계를 창조해낸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세계에서 소녀는 소년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또 소년은 소녀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서로 그러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견고한 자기들만의 세계를 빚어낸 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니까 소년은 성장해서 나이 들어가도 머릿속은 여전히 소녀와 함께 있던 그 세계에 머물기를 꿈꾸거나 자꾸만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겠지. 소년이 소녀를 다시 만나느냐고? 그건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그렇지만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한 시절, 계속 되돌아가고 싶거나 내내 머물고 싶은 세계를 누군가와 창조해낸 적이 있다면 그래도 소년은 행복한 게 아닐까, 그의 그림자도 웃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이 소년만이 아니라 도서관장 고야스 씨도, 옐로우 서브마린 소년도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이 세계에는 없는, 어딘가 다른 곳에 그 간절함이 존재하는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은 모두 현실에서는 “마음에 깊은 구멍이 뻥” 뚫린 채로 살아가지만 한번쯤은 순도 “백 퍼센트의 마음”을 누군가를 향해, 나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해 열어 보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시간들은 삶이면서도 삶이 아닌 것이 되는 거지. 이 사람들 모두가 책을 좋아하거나 꿈을 읽는 능력을 갖고 있어. 이 작품에서는 도서관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현실이나 비현실에서나 도서관은 책과 꿈으로 가득해. 책과 꿈은 모두 인간의 정신과 맞닿아있지. 이들은 그 정신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 정신을 보존하는 일을 숭고하게 생각하기도 해. ‘지의 기둥’이자 ‘궁극의 개인 도서관’ 이곳들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서 보호해야 할 가치를 지닌 곳이기도 해. 세상의 속된 것들이 아닌 순도 백 퍼센트의 마음과 정신이 깃든 공간이라 그런 게 아닐까.
책을 좋아하던 내가 책 만드는 사람이 된 걸 알았을 때 아주 흡족해하던 네가 떠오른다. 열여섯 열일곱 그때도, 스무 살을 넘긴 그때도 그리고 서른, 그리고 다시 만난 그때도 늘 너와 나는 만날 때마다 책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요즘 무슨 책 읽어?” 몇 년 만에 훌쩍 나타나도 너는 어제까지 만난 사람처럼 묻곤 했지. 지금 생각해보니, 넌 현실이 힘들 때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삶이 공허해졌을 때마다 그렇게 물으며 나타났다는 걸 이 책을 읽다가 깨달았어. 너와 내가 책 이야기로 빚어낸 그 세계가, 너에게는 어쩌면 백 퍼센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의 온갖 역병으로부터 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궁극의 개인도서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너에게 나는 문지기 역할을 했던 건 아닐까. 있잖아, 어떻게 지내니? 보고 있니? 이 책 궁금해? 넌 내가 책 이야기하면 늘 궁금해 했잖아. 이 책도 빌려줄 수 있는데 어디에 있니.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고 그 하얀 눈 때문에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여. 그래도 내 그림자는 잘 붙어 있어. 너와 네 그림자는 잘 있니? 운동장을 달릴 때 길게 늘어진 네 그림자가 그리운 날이구나. 한때 네 그림자가 되고 싶다고도 생각했던 나는 너를 또 이렇게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