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에 이 책을 다 읽고 약간 기운이 빠져 있었더니 집사2가 무슨 책을 읽었기에 기분이 나쁘냐고 물었다. 오츠의 책인데 이러저러하다 말하다가 “아니, 왜 여자들은 쓰레기 만나서 그렇게 당하고 또 쓰레기를 만나는 거야?”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소설인데도 왜 이렇게 빡치는 것일까. 무슨 내용이냐고 묻기에 이 책에 실린 4개의 중편 중 쓰레기를 피해 또 다른 쓰레기에게로 자진해 걸어가는 여성이 등장하는 <환영처럼: 1972>를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피해자 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가끔 집사2에게 ‘너니까 하는 말이지만…’ 하면서 정말 답답한 피해자를 탓하는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환영처럼: 1972>의 ‘앨리스’도 나를 빡치게 한 답답한 여성이다. 앨리스는 이제 스무 살 대학생이다. 똑똑하고 예쁘다. 그래서 그런지 당장 철학과 강사의 눈에 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수순으로 그놈은 앨리스에게 접근한다. 쏟아지는 온갖 칭찬- 너의 재능, 너의 미모, 너의 뛰어남, 너는 다른 학생과 다르다....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은데 차나 한잔? 이런 순서들- 열아홉에서 스무 살- 그 어린 나이에는 좀 지적이고 섬세한 거 같고 예민해 보이는 똑똑한 남자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더불어 외모를 칭찬해주면 대개는 귀가 번쩍, 눈이 번쩍 솔깃솔깃해져서 기분이 방방 뜨기 마련이다. 인간이라면 그런 허영쯤은 누구나 갖고 있고 또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쳐 간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속성을 잘 아는 놈들은 늘 그런 부분을 공략하는 것이다. 이런 강사 놈 같은 놈 말이다......지금도 세계 곳곳의 대학에서 강사와 교수가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나이로는 성년이지만 머릿속 관념이나 생각으로는 아직 미성숙한 이 어린 학생 앨리스는 그의 추켜세움에 넘어가 그와 차를 마시려고 하고, 많은 카페와 음식점을 놔두고 차를 왜 집에서 마셔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집에까지 가게 된다. 안 돼, 앨리스! 제발 돌아가! 내가 샤프롱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놈 집에서 단둘이만 남게 되니, 당연히 그놈은 본색을 드러낸다. 차를 마시자더니 왜 앨리스의 몸을 왜 쓰다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놈의 손길은 바빠진다. 당혹한 앨리스가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며 뒤로 물러나자 그놈은 기분이 잡친 듯 말한다. 내숭 떨지 말라면서 여기까지 따라온 건 너도 동의한 거 아니냐고 다그친다. 비웃고 조롱한다. 야, 이놈아. 뭘 동의해! 차 마시겠다고 했지 몸 섞는다고 동의했니! 그러나 앨리스는 어린 여성- 그 앞의 남자는 자신을 가르치는 강사- 학점도 그놈 손에서 나오겠지. 결국 일은 그렇게 벌어지고 만다. 그놈은 몇 번 더 앨리스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런 쓰레기들이 늘 그렇듯이 이제 앨리스를 모른 체한다.
에휴.......... 답답해. 그런데 이런 사이에서 수정은 또 얼마나 잘 되는지. 앨리스는 덜컥 임신을 하고 만다. 이 작품의 제목은 <환영처럼: 1972>- 1972년이 배경이다. 낙태가 불법인 시절- 앨리스는 끊긴 생리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제발 자고 일어났을 때 침대에 피가 묻어있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런 헛된 기대의 나날을 보내는 사이 몸은 점점 불어나고, 앨리스는 전처럼 학교를 다닐 수가 없다.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다(아니 에르노의 <사건>이 절로 생각난다). 그래도 학교를 아예 안 나갈 수는 없어서 힘겹게 수업을 듣는 중 영문학 시간이었나, 한 시인의 강의를 듣다가 또 일이 벌어지고 만다. 시인이자 늙은 교수의 질문에 영특한 앨리스는 남들과 좀 다른 대답을 하게 되고 그러는 바람에 이 늙은이의 눈에 또 띄고 만다. 휴... 이 장면에서 샤프롱 본능이 발동한 나는 앨리스에게 대답하지 말거나 평범하게 답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앨리스는 말을 해버렸어.
아니나 다를까 이 늙은이는 앨리스의 답변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벌어지는 일들은 젊은 강사놈의 비열한 시즌2 또는 늙은 교수의 변주곡이다. 늙은이는 앨리스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며(그놈의 집, 그놈의 차! 아니 제발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라고!!! 아니면 학교 매점이나 카페 없어?!) 시와 문학 이야기를 하면서 영특한 그녀의 재능을 칭찬해주고 환심을 산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강사놈처럼 다짜고짜 몸부터 덮치려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공을 들인다(나이가 들어서 그건 좀 무리겠지....). 너는 재능이 있으니 내 일을 도와다오. 보수는 넉넉히 주마. 우리는 문학과 시에 관해 지적으로 충만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등한 친구 사이다 운운.... 아니 교수님 근데 왜 느닷없이 앨리스 입에 혀를 넣으시나요? 친구끼리 누가 혀를 넣는다고.
그런 중에도 앨리스의 몸은 불어가기 시작하고 늙은이는 세상살이에 이미 만랩이라 앨리스가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쉽게 짐작한다. 그래서 그 약점을 공략한다. 경제적인 지원, 그리고 결혼해서 그 아이를 함께 낳아 키울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 1972년, 낙태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비혼모로 살아가기는 더 쉽지 않은 상황- 궁지에 몰린 앨리스에게 그의 제안은 쉽사리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이다. 저런 불량식품인데.... 먹지 마. 앨리스 아니야, 그 이상한 나라에서 도망쳐! 소리쳐 보지만 이 책 밖의 샤프롱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릴 리가 없다. 드디어 이 앨리스가 자기의 손아귀에 넘어왔다고 생각하여 흥분한 영감탱이는 욕실에 들어가서 무슨 준비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부산스러운데 그 틈바구니에 넘나 흥분했는지 안 그래도 고장 났던 심장이 덜커덕 문제를 일으킨다. 아이고야, 이 앨리스의 앞날은 과연 어찌될 것인가.
《카디프, 바이 더 시》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은 대부분 절망적이다. 그리고 그 절망적인 상태는 대학 강사, 교수의 그루밍에 의해 성폭력 희생자가 되는 앨리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가정’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폭력을 행사하는 가부장 남성들은 모두 이 작품 속 여성들보다 나이가 한참 많다. 힘이나 나이 등 물리적 상황 및 심리적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답답한 작품을 읽은 후에 <정희진의 공부> 6월호를 듣는데 때마침 ‘학습된 무기력일까? 희망일까?’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정폭력이든 학교폭력이든 데이트폭력이든 우리는 대부분 피해자가 무기력에 빠져서 그러니까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희진은 도리어 그런 상황 속의 피해자들은 ‘학습된 희망’ 때문에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 사람이 언젠가는 달라질 거야’ ‘술을 마셨을 때만 저러는 거야, 원래는 착한 사람이야.’ ‘내가 바꿀 수 있을 거야’ ‘나 아니면 저 사람을 바꿀 수 없어’ ‘저러다 말 거야’ ‘좋은 사람이니까 달라질 거야, 바뀔 거야’ 이런 희망고문 같은 것들- 가정이나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자신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언젠가는 바뀔 거라는, 자신(만)이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못해서 결국 더 큰 희생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카디프, 바이 더 시》의 대부분의 여성들도 그렇다. 운 좋게 벗어난다 한들 그 트라우마와 불안 공포는 평생 그녀들을 따라다닌다. 살아있어도 삶은 지옥이다.
여자들아, 조금만 낌새가 이상하면 도망쳐라....... 당신은 그를 바꿀 수도 없을뿐더러, 그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당신이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언젠가는 그가 바뀔 거라는 희망은 결국 당신을 무덤으로 이끌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