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에 누굴까? 1 - 나야 나, 강아지 내 뒤에 누굴까? 1
후쿠다 토시오 지음, 김숙희 옮김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아이가 많이 자란 지금,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거나 아장걸음으로 쫒아다니는 아주 어린 아이들을 보면 새삼 귀엽다. 십여년 전 큰딸아이의 손을 잡고 밖에 나가면 아이는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고분고분 발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내 손을 잡아당기며 이것도 보고싶고 저것도 보고싶고 호기심으로 눈을 굴렸다. 내 경우만이 아니라, 고맘 때의 아이손을 잡고 길을 걸으면 아이는 한 방향으로 곧장 걸어가는 일이 드물다. 이곳 저곳으로 엄마 손을 끌며 제가 가고 싶은 곳이 많기도 하다. 아이의 눈망울은 쉼없이 굴러다닌다. 아이는 위, 아래로 혹은 앞으로, 뒤로 끊임없이 돌아보고 올려다보며 엄마의 바쁜 마음을 애태우곤 한다.

<내 뒤에 누굴까?>의 시리즈로 첫번째 그림책은 <나야 나, 강아지>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은 강아지다. 아니 강아지 같은 아이다.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면, 아이가 하는 말처럼 짧고 귀여운 토막이 굴러오는 것 같다. 강아지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친근한 동물이다. 강아지의 친구들도 많이 등장한다. 거북이, 고양이, 꼬끼리, 새, 다람쥐, 뱀, 부엉이, 기린, 토끼 그리고 쥐들이다. 이 동물들이 한 곳에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은 없지만 어린 아이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은 것 같다. 동물친구들을 보며 내 눈은 한 곳에 붙박였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이다. 아래를 쳐다볼 때의 눈, 위를 올려다볼 때의 눈, 앞을 볼 때의 눈 그리고 뒤를 힐끗 돌아볼 때의 눈망울이 실감나게 그려져있다. 단순한 모양과 색감이지만 충분하다. 그 눈망울을 따라가다보면 동물친구들을 쫓아가며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다.

이 책은 장점이 여럿 보인다. 우선 색채가 주는 안정감이다. 종이도 누르스럼하고 부드러워 눈이 부시지 않고 촉감도 따스하고 도톰하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채도를 낮추고 갈색톤과 녹색톤을 주조로 하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단순한 윤곽선으로 동물의 특징을 잘 살려 그린 점도 마음에 든다. 첫 장을 펼치면 넓은 땅에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아름답게 펼치고 서 있다. 튼실해 보이는 나무의 나뭇가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가슴을 한껏 벌리고 숨을 쉬는 것 같다. 가지에는 연두빛 작은 잎새가 달려 있어 갓피어나는 봄을 느끼게 한다. 마치 여린 잎의 아이들을 연상하게 하는 신선한 그림이다. 이 풍경에는 아직 아무런 동물친구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요한 새벽, 아직 우리의 친구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시각이다. 맑은 기운이 스미는 것 같다.

다음 장을 넘기면 순하게 생긴 강아지 한 마리 뒤에 거북이의 머리가 보인다. 둘의 눈망울을 비교해보면 재미나다.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내 뒤에 누굴까?" 라고 물어보며 아이의 대답을 기다려보자. 그러고 나서 책장을 넘기는 식으로 이어가다보면 반가운 동물친구들을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내 뒤에도 있고 앞에도 있고 나무 위에도 있고 땅 아래에도 있다. 앞만 보고 걸어가는 어른들과는 달리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동물의 특징적인 면을 부각하여 그려놓아 인지발달을 도울 수 있겠다. 하지만 고정이미지를 형성하지 않을까, 약간의 고민이 된다.

반복되는 짧은 어구를 써서 아이에게 말하기를 가르치기에도 좋아보인다. 리듬을 살려 밝은 음성으로 들려주고 따라하게 하면 말하기와 함께 단어(동물이름)도 눈으로 익히기 좋아보인다. 마지막 장에 가면 모든 동물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잘 모르고 있었던 친구들이 서로서로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보았던 텅 비어있던 풍경에 동물친구들이 다 모여 단란하고 다정다감한 느낌이 든다. 여기서 다시 한번 '뒤, 앞, 위, 아래'를 가리키며 공간감각과 함께 동물이름을 짚어보면 좋겠다.

그런데 여기서 앞에 나왔던 그림의 동물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 게 몇 있어 아쉽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앞에 그림과 그 위치를 일치하여 그렸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새와 다람쥐의 위치 같은 것이다. 

"새 위에 있는 건 누구지?"

"아, 다람쥐구나"

그런데 마지막 그림에서 다람쥐를 찾아보면 새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나뭇가지에 다람쥐가 앉아있다.  그새 다람쥐가 아랫가지로 발발거리며 내려온걸까.^^  분명 앞의 그림에서는 복슬복슬한 다람쥐 꼬리가 새의 머리 위에서 달랑거리는데 말이다. 처음의 이야기를 끝과 통일성 있게 맺음으로써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기를 의도한 것 같아, 이왕이면 이 부분도 맞추었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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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2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서평이네요

sokdagi 2007-08-2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너무 좋아요. 얼른 읽고 싶어 장바구니에 담아가요
 
고슴도치 아이 그림이 있는 책방 1
카타지나 코토프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보림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고 난 후 가슴에 밀려오는 느낌이 무척 벅차다. 이 책은 입양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세상 엄마 아빠에게 부모로서의 의미를 묻고 있는 책이다. 구절구절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과 콜라쥬로 꾸민 삽화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딸 둘과 함께 살고 있는 나는 두 아이를 모두 어렵게 가졌다. 결혼하면 아이는 그냥 오는 거라 생각했던 나는 아이를 몇 년 미루었다. 그러다 첫아이를 가지려고 하니까 들어서지를 않았다.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하여 첫아이가 왔다. 그 아이는 건강하고 예쁘고 총명하였다. 물론 '고슴도치 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둘째 아이는 그로 부터 3년 후 가지려고 했는데 역시나 또 쉽게 들어서지 않았다. 처음엔 애를 쓰다가 마음을 비우고 여유있게 지내니 그로 부터 2년 후 들어섰다. 그래서 큰아이와 5년 터울의 둘째 딸을 얻었다. 역시 '고슴도치 아이'가 아니라 밝고 건강한 아이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 모든 불임부부(지난 날의 나를 포함해서)에게 작가는 묻고 있다. 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죠? 아이란 골칫덩어리인데.. 돌보고 보살필 대상이 필요해서? 부부만 살면 외로워서? "사랑과 진심과 자유"를 주고 싶어서?  작가는 이렇게 어른의 입장에서 필요하여 아이라는 선물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 입장에서 아이가 함께 살아야할 부모가 필요할 때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이다.

아이가 함께 살 부모가 필요하여 찾아온 거라면 부모는 아이를 소유하려들지 않아야 한다.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하고 부모 품을 벗어나 하늘로 훨훨 날아갈 때 축복해주어야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새처럼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피오트르는 몸에 있었던 가시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상처가 가시가 되어 남을 찔러댔지만 입양엄마는 자기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꼭 안아주었다. 아이를 사랑하고 믿고 격려하는 말로 아이 몸에 무성했던 가시를 없애고 마음을 열게 했다.

또한 아이가 나를 선택하여 온 것이라면 아이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지녔든, 남보다 모자라든, 장애가 있든 내 마음대로 내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게 부모 됨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내게 처음 왔던 날의 경이로움을 다시 떠올려본다. 아이는 나를 거쳐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다리와 같은 역할만 할 뿐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품어줄 때 아이는 밝고 바른 인성을 지닌 한 인간이 되겠다.

3학년 아이들과 이 책을 읽었는데, 좀 성숙한 여자아이의 말이 귀에 울린다. 가시에 찔린 경험이 있냐는 질문에 그런 경험이 있는데 자기가 아프다는 생각은 잠깐이고 가시도 아플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어쩜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한 걸까. <고슴도치 아이>의 피오트르는 상처 입은 아이다. 그 상처로 인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최소의 수단으로 가시가 생겨났고 마음은 점점 더 뾰족해졌다. 타인을 찌르는 가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이 무척이나 싫을 테다. 자신의 가시를 떼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얼마나 그리울까. 이 책은 그런 과정을 섬세하고 따스하게 그려내고 있다.

혈통주의를 비판하는 대목도 나긋나긋하다. 아이는 내 몸을 통해 내게 찾아올 수 있지만 다른 몸을 통해서 내게 찾아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좀 에둘러 찾아오긴 했지만 얼마나 미쁜가. 그 아이를 찾았을 때 알아볼 수 있는 눈은 "마음의 눈"이다. 보이는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면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가족이란 '핏줄'보다 '사랑'이 우선 조건이라는 표어를 온기 있는 글과 그림으로 잔잔하게 그리고 있는 이 책을 모든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들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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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4-2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면 볼 수록 좋아요...
 
프린들 주세요 사계절 중학년문고 2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양혜원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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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표지그림을 자세히 보며 볼펜이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린' 자의 세로획이 붉은 펜으로 그어져있다. 뭔가 펜과 관련된 내용일 것 같은데 '프린들'이란 이름은 아주 낯선 이름이다. 그 이름만으로는 무슨 강아지 이름 같기도 하고.. 읽는 이의 호기심을 잔뜩 부풀려두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우선 점수를 딴다.

작가이름을 보니 <랄슨 선생님 구하기>를 쓴 사람이다. 역시 유쾌하게 펼쳐지는 아이들의 학교이야기가 줄기를 이루며 주인공은 개성있고 총명한 아이이고 괜찮은 선생님을 비롯하여 어른들이 등장한다. <랄슨 선생님 구하기>에서 주인공은 여자아이이지만, 여기서는 남자 주인공이다. 초등 5학년에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이 중심이 되어 10년 후의 어느 날로 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프린들 주세요>는 언어의 생명력과 책임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더불어 권위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아이들이 기존의 권위에 항거하며 변화를 몰고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혜롭고 사명감 있는 어른이 어떻게 한 아이에게 힘을 실어주며 자연스럽게 아이를 성숙하게 만드는지도 감명 깊게 그려진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무겁거나 교훈적이지 않다. 초등 3학년일 때의 닉의 활약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하는데 시종일관 유쾌하고 밝은 어조를 놓지않는다. 글에 걸맞게 흑백의 삽화도 생동감이 느껴진다.  주인공에게 걸림돌이 되는 악역이 있지만 악역의 선생님이 품고 있었던 깊은 뜻이 드러나는 반전의 대목은 그동안 졸였던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닉과의 낱말전쟁을 일부러 더 문제화하여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게 한 선생님의 의도는 닉과 '프린들'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공을 세웠다.

'퀴즈'라는 단어도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적인 정보를 들어 작가는 '프린들'이라는 말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펜'과 '프린들'이 경쟁을 하여 어느 한 쪽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말에도 이렇게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말이 많이 있다. '얼짱'이라는 단어가 금성출판사의 국어사전에 올랐다고 한다. 한 때의 유행어로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고 신문에도 그대로 쓰이는 낱말이다 보니 국어의 조어방식에는 맞지 않지만 사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 새로 생긴 사물이나 관념이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사라진 사물이나 개념들은 사라져가는 단어를 양산한다. 이렇게 말이란 생명이 있어, 나고 변하고 사라지기를 거듭하며 성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프린들'이라는 낱말이 사전에 버젓이 올라있다. 닉이 '프린들'을 쓰고 퍼뜨린 이후로 십년의 세월이 흘러서 이루어진 일이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즐겨쓰는 말이라고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후의 승자는 닉이 되었지만 배후에서 지지하고 숨은 도움을 준 그레인저 선생님의 존재는 빛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읽으며 생각할 수 있는 동화이다. 이 책을 읽은 아이들도 언어의 창조자가 되어보고싶은 욕구가 마구 솟아날지도 모른다. 언어생활도 자신이 주도할 수 있다면 사고도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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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미 2007-01-3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감상평이네요. 모셔가도 되지요?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07-01-3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lgmi님, 반갑습니다. 새로운 지기님이 이렇게 방문해주셔서 발자국 남겨 주시면
더욱 기쁘지요. 칭찬도 고맙습니다. 근데 어디로 모셔갔는지^^ ... 님 서재로 인사하러 달려갔더니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ㅎㅎ 종종 오세요..
 
 전출처 : 끼사스 > [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이오덕 (한국일보 2006년4월26일)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백성의 말’을 향하여
 
^‘우리글 바로쓰기’(초판 1989, 고침판 1992)를 쓰며 이오덕(1925~2003)이 글과 말에 대해 품은 생각은 한글학회 둘레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한글학회 언저리의 한국어학자들과 한국어운동가들이 대체로 언어민족주의자라면, 이오덕은 언어민중주의자였다. 물론 이오덕은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우리글 바로쓰기’에는 언어민족주의자 이오덕의 생각을 드러내는 문장이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우리말과 글을 바로 쓰는 일은 무엇보다도 밖에서 들어온 불순한 말을 먼저 글 속에서 가려내어 깨끗이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거나 “우리말이 잡스럽게 되는 것은 마침내 우리 겨레의 넋이 말에서 떠나 버리는 것”이라는 견해 따위가 그 예다. 그는 또 우리 글자로 써서 알 수 없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라고도 했다. 이오덕 역시, 최현배를 비롯한 언어민족주의자들처럼, ‘깨끗한 우리말’ ‘순수한 우리말’에 깊은 정을 보였다. 다시 말해 드센 순화 욕망이 그에게도 있었다. ‘우리글 바로쓰기’의 적잖은 지면은 그렇게 깨끗하고 순수한 우리말을 보여주는 데 쓰였다.
^그러나 이오덕이 보기에 흔히 민족적이라 일컫는 것이 민중적인 것과 고스란히 겹치지는 않았다. 민족적인 것은 민중적인 것의 바탕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민족적인 것을 그리도 내세운 것은 그것이 대체로 민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둘이 우연히 맞부딪치게 될 때, 이오덕은 기꺼이 민중 쪽을, 그의 말을 받아쓰자면 ‘백성’ 쪽을 편든다. 그 점이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것은 이른바 한글운동가들이 새로 만든 말에 대한 그의 거리낌에서다. 이오덕은 말한다.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책상 앞에 앉아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관청의 관리들이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내는 것과 다름없이 겨레말을 어지럽힌다.” 한글학회 둘레의 일부 호사가들이 즐기던 고유어 새말 만들기를 이오덕은 혐오했다. 그 신조어들은, 억지로 갖다 붙이자면 민족과 관련될 수는 있겠지만, 민중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모람’(회원)이나 ‘먹거리’(먹을거리), ‘읽거리’(읽을거리) 같은 말은 이오덕이 보기에 우리말이 아니었다. 민중언어의 어법 바깥에서 억지로 만들어진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오덕은 국어운동가 대다수보다 한결 보수적이었다.
^그러니, 우리말과 글을 ‘한말글’이라 부르려는 시도를 이오덕이 크게 나무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한말글 사랑 겨레 모임’이라는 국어운동단체의 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이를 사양하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대관절 ‘한말글’이 무슨 말입니까? 나같이 평생 책 읽고 글 쓰면서 살아온 사람도 귀에 설게 느끼는 이런 말을 온 백성 상대로 일을 해 나가려는 모임의 이름으로 내걸고 싶어하는 분들의 속뜻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말이 안 돼도 새로 만들어 자꾸 퍼뜨리면 결국을 쓰게 된다’고 할 것 같은데 그런 태도는 분명히 우리말을 바로잡는 일을 해친다고 봅니다.”
^이오덕이 이런 새 말 만들기만 꺼린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이미 있어온 고유어라 할지라도 보통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말을 굳이 찾아내 쓰는 사람들 역시 슬그머니 타박했다. “중국글자말(한자어-인용자)도 아니고 일본말이나 서양말도 아니고, 그러니까 순수한 우리말인데 이미 옛말이 되어서 요즘은 입말로 쓰지 않는 말을 글에서 즐겨 쓰는 경향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넘어가고 싶다. 순수한 우리말인데 지금은 그다지 쓰지 않는 말을 찾아내어 쓰는 일은 대단히 바람직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로 우리 것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람들이 입으로는 말하지 않으니까 좀 귀에 설고 새롭고, 그래서 그것을 쓰면 유식해 보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그런 좀 근사해 보이는 말을 써 보자고 하는 마음인 것 같다. 그런 증거로는 똑같은 뜻을 가진 말로서 많이 쓰는 말이 있는데도 그런 입말을 쓰지 않고 일부러 입말이 아닌 말, 어쩌다 글에만 나오는 말만을 즐겨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옛말이 되어 요즘은 입말로 쓰지 않는 말’을 글에서 쓰는 것까지 마땅치 않아 했으니, 거의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고유어를 사전 한 귀퉁이에서 찾아내 제 글에 버젓이 끼워 넣는 언어민족주의자들의 멋 부림을 이오덕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말하자면 이오덕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이 순수한 우리말이냐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백성의 말이냐 여부였다. 그 백성의 말은 ‘글의 해독을 입지 않은 말’이었고, 그 적잖은 부분은 ‘농민의 말’, ‘어렸을 때 배운 고향 말’이었다. 당연히, 그는 사투리에 너그러웠다.
^이오덕이 바람직하게 생각한 글은 ‘언문일치’의 글이었다. 이때의 언문일치란 이광수 이후 현대 소설 문체에서 확립됐다고 흔히 여기는 언문일치가 아니었다. 이오덕의 언문일치는 글을 말에 고스란히 포개는 진짜배기 언문일치였다. 그러니, 이광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요즘 소설도 이오덕이 생각하는 언문일치에선 멀찌막하다. 지난해에 발표된 소설 한 대목을 보자. “망각이 우리를 구원한다.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닐지라도 새롭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망각의 힘이다. 하지만 그 기능은 선택적이어서 행복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거둬가면서 불행의 기억은 조각들을 남겨두곤 한다”(조선희의 ‘한때 우리 신촌거리에서 만났지’에서). 나무랄 데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오덕이라면 많이 나무랐을 것이다.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오덕에게 야단을 덜 맞으려면 이 문장을 이런 식으로라도 고쳐야 하리라. “잊을 수 있으니 살 수 있지. 진짜 새로운 게 아니더래두 새롭다구 착각하게 하는 게 망각의 힘이야. 그렇지만 그게 또 불공평해. 행복했던 기억은 말끔히 없어지는데 불행했던 기억은 남아있을 때가 많거든.”
^그러니까 이오덕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문학은 구비문학이었다. 그는 ‘우리글 바로쓰기’ 제4장 ‘말의 민주화’ 제1절 ‘이야기글의 역사’에서 경기도 강화군(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81세 할머니가 구술한 ‘까투리와 오리의 결혼’이라는 이야기를 옮겨놓으며, 이를 우리말의 본 바탕을 짐작하게 하는 깨끗한 말로 칭찬하고 있다. 이오덕이 이 책 여러 곳에서 지적했듯, 이런 언문일치의 글에서는 문장이 ‘-다’로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그 속에서는 지문과 대사가 문체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오덕은 소설이고 수필이고 논문이고 할 것 없이 우리 글을 모조리 ‘다’ 하나로 끝맺게 된 상황의 첫 책임자로 이인직을 꼽고, 이런 관행이 일본글의 흉내라 지적한다. 이오덕에 따르면 바로 이 ‘-다’ 글체야말로 우리말 이야기글을 입말에서 떼어놓은 주범이다. 글 쓰듯 말하지 말고 말하듯 글을 쓰라는 것이 ‘우리글 바로쓰기’의 요지다. 물론 그 때의 말은 학교교육의 때를 타지 않은, 우리가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이다.     
^‘우리글 바로쓰기’의 상당 부분은 저자가 잘못됐다고 판단한 표현들을 잘된 표현으로 고치는 형식으로 서술됐다. 관형격 조사 ‘-의’와 접미사 ‘-적’의 사용을 절제하자거나 ‘-에 있어서’, ‘-에의’ 같은 일본말투를 쓰지 말자는 제안은 특히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사사로운 회고를 하자면, 나는 89년 이 책의 초판을 읽은 뒤 그 때까지 별 생각 없이 써오던 ‘-에 다름 아니다’나 ‘주목에 값한다’ 따위 표현들과 헤어졌다. 나는 그 뒤 ‘-에 다름 아니다’를 쓸 자리에선 ‘-와 다르지 않다’, ‘-와 한가지다’ ‘-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고, ‘주목에 값한다’고 쓸 자리에선 ‘주목할 만하다’고 썼다.
^그러나 이오덕의 처방을 죄다 따를 수는 없었다. 어느 땐 그의 견해에 공감할 수 없었고, 어느 땐 공감하면서도 해묵은 습성을 이기지 못했다. 이오덕의 우리 말 치료는 어휘 수준을 훌쩍 넘어서 문체에 이르고 있는 만큼, 그에게 ‘양호’ 판정을 받을 글쟁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글 바로쓰기’ 전체를 통해서, 함석헌, 문익환, 권정생 같은 이들만 겨우 퇴원 허가를 받았다. 주시경이나 최현배 같은 보수적 국어학자조차, 영어 문법의 과거완료 시제와 과거완료진행 시제를 베껴와 ‘-었었다’ ‘-고 있었었다’ 따위를 우리말 시제 체계에 넣었다는 이유로 입원 가료 판정을 받았다. 이오덕 선생이 살아 계셔 이 글을 읽으신다면 고치실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이 고치신 곳을 내 고집대로 되돌려 놓을지도 모른다. 객원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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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4-26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이 쌩까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지요.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은 '한글 운동가'들도 비판하시거든요. 제맘대로 말을 휘두르지 말라고...
지나치게 불필요한 한글 맞춤법만 강조한다든지,
순우리말만 지향하는 순수주의자들.(명사를 이름씨, 동사를 움직씨로 쓰던 이상한 외계어를 만들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일본말, 영어에 오염된 말을 고치자고 하면, 고종석같은 치들은 '이미 그렇게 쓰고 있는데 까탈스럽게 왜 그러셔?'할는지 몰라도,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은, 당신 죽기 전에 우리말이 어떤 것이었는지 남겨 두고 싶으셨던 거지요. 원래 우리 말이 어땠다는 것. 오염되었다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말은 이랬는데 오염되었다는 것을 적고 있는 것이지요. 고종석은 무조건 순수를 싫어하고 오염을 좋아합니다만, 그런 고집은 짜증납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대구 까면서, 복거일 같은 넘의 공용어론에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헤벌레한 논리.

프레이야 2006-04-2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쌩까고 있는 고종석 ㅎㅎ 글샘님 안녕하시죠?
 
이안의 산책 - 자폐아 이야기
로리 리어스 지음, 이상희 옮김, 카렌 리츠 그림 / 큰북작은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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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안의 산책>은 '자폐아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 제목 때문에 이안이라는 귀여운 남자아이가 자폐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책장을 열게 된다. 이 책은 자폐아의 행동에 대해 구체적이며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어서 조금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폐아는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특별한 아이 같다는 생각만이 약간 들 뿐이다.

작가는 오랜 교직생활 중 7년간을 특별한 아이들과 지냈다고 한다. 그 때의 경험을 살려 이 글을 썼다. 그래서인지 자폐아 이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아이의 특이한 행동과 심리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해야 바람직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안에게는 착한 누나가 둘이나 있다. 그 중 작은 누나 줄리가 이 책의 이야기꾼이다. 한시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주의를 듣고 이안을 데리고 산책길에 나선 줄리는 이안의 남다른 행동 때문에 조바심을 내고 성가시다는 느낌도 갖는다. 하지만 공원에서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이안이 사라지자, 줄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노심초사하는 장면은 참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그저 보통의 아이들이 호기심을 기울일 만한 곳만 말해주어 줄리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안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줄리, 자신이다.  곰곰이 생각해본 덕택에 이안을 찾고 얼싸안는 장면 또한 가슴을 젖게 한다.

이안의 감각은 아주 발달해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감각들에 특별한 기관이 달려있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이 생각해보면 그런 감각들은  보통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지만 그저 지나쳐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혹은 무감각하게 지내고 있는 게 아닐까. 이안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아이는 자신만의 감각에 상대적으로 예민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안 같은 아이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웃을 줄도 모른다. 이안의 세계를 이해해주는 타인이 없기 때문이다. 감동스러운 부분은 줄리가 이안을 찾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줄리는 이안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안이 하듯 따라서 행동한다. 귀를 기울여 이안이 듣는 소리를 향해 촉수를 세우기도 하고 이안처럼 천장선풍기를 어지럼증이 나도록 올려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집에 도착해서 줄리는 "멋진 산책이었어, 이안." 이렇게 말한다. 이안은 줄리를 바라보고 씽긋 웃는 표정을 짓는다. 아주 잠깐이라도...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의 가족 모두에게 힘을 주는 가슴 뜨뜻한 이야기이지만 전혀 신파조이지도 않고 억지스럽거나 과장된 부분이 없다는 점 또한 이 책의 미덕이다. 2학년 아이들과 함께 보았는데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그림이 참 좋아요. 누나가 참 착해요."

역시 교훈은 가르쳐서 주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젖어들게 하는 것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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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4-21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에도 자폐아가 있는데 지금 방년 25세의 아리따운 아가씨예요. 자폐아 키우는 것 정말 보통 일 아이더라구요. 장애를 겪는 것도 힘든데 주위사람들의 시선도 그렇고, 사회보장시설도 열악하고....저런 책이 많이 나오는 건 좋은 현상이겟죠?

프레이야 2006-04-2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해를 하는 아이도 본 적이 있어요. 애정결핍에서도 이런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아이도 보았구요. 사실 우리 모두 어느정도 자폐증세를 갖고 사는 건 아닌가싶네요..

석란1 2006-07-0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뵙습니다. 잘 읽고 추천하고 갑니다. 혹시 <착한아이사세요>의 작가 배혜경님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