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은 톰과 잤다] 손홍규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2013년 3월 20일 녹음 시작 5월 3일 완료, 총 17시간 소요
4월에 심신이 편하지 않아 2주일 못 갔더니 녹음완료일이 다소 늦어졌다.
손홍규 소설집 [톰은 톰과 잤다]는 무겁지만은 않은 철학적 담론 같기도 하고 시시한 연애 같기도 하고
시대상을 반영하며 자전적이기도 하고 사회참여적이기도 한, 아홉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중 '불멸의 형식'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학창시절에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교실에서 복닥대며 함께했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면 좋은 이유는
가장 찬란히 빛났던(물론 그때는 그걸 모르지), 어쩌면 가장 순수하고 예뻤던 시절의 나를 기억하고 너를 떠올려
그걸 재료로 도마질에 난도질, 웃음 한바탕 벌일 수 있어서다. 성격도 제각각, 성적도 제각각, 취향도 적성도 제각각이었던
우리는 이른 아침이면 만원버스에 시달리면서도 단어장을 손바닥에 올려들고 웅얼거리며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교문을 통과했다. 가방엔 도시락 두 개. 그 중 하나는 1교시가 끝나면 후다닥 비워진다. 창문을 열고 냄새를 채 내보내기도
전에 2교시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모두 함묵하지만 선생님의 표정도 그래 어쩌겠니, 바로 그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야간자습 시간까지 그러니까 잠자는 시간 몇 시간을 제외한 거의 하루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중년의 고개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너나 나나 그저 애틋한 거다.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수다는 이어지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웃고 있는 눈가에 세월이 주름지다.
늙지 않는 방법은 딱 한 가지라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는 거라고.
- '불멸의 형식' p121
'불멸의 형식'에서 화자의 친구는 시인이자 교수인, 연상의 스승을 사랑한다.
그가 사랑을 구현하는 방식은 서점 앞 2절지에서 화자가 발견했던 요령부득의 메시지를 통해서다.
'나는 소멸하여 불멸할 것이다.' (p139)
증오할 능력이 없는 상태, 즉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화자의 친구(박형규)는 스승이자 연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사랑은 끝없이 번져가는, 그래서 종국에는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불멸하는 형식이라는 걸
그는 보여주었다.
(중략)
육체를 내주지만 정신을 내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 그와 정반대인 사람, 육체와 정신 모두를
내주지만 이를테면 발가락을 애무하길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 그 모든 실패를 겪은 뒤에 나는
사랑이란 점령하지 않고 내버려둔 영역에서만 서식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관념이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
사랑도 능력이라는 걸,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사랑에 대해 지껄여왔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p141-142)
[너 없는 그 자리] 이혜경 소설집, 문학동네
2013년 4월 3일 1차편집 시작 현재 133쪽까지
다시 읽어도 한 편 한 편이 재미있다.
응달에서 피어나는, 아니 응달에서 서서히 나오려고 하는 인물들의 속속들이 사연들,
눈물나게 구차하고 서글프지만 희망이 없지 않다. 작가는 희망을 너무 떠벌리진 않는다.
그저 이제는 응달에서 나오라고, 숨바꼭질 그만하라고 손잡아주는 작가의 재담이 놀랍다.
무작정 희망을 심어주려고 하지 않고 좀더 냉철하고 현명해길 바라는 이야기들.
긍정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빛과 그림자 모두를 안아 들일 수 있는 마음과 영혼. 빛만 들이고 싶다면 장난인 거지.
세상은 넓고 우리 삶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포진해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떤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 선택의 범위가 그리 넓지 않다는 진실에 무참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진실인 걸.
이것 아니면 저것, 예스 아니면 노. 손홍규가 말한 불멸하는 형식, 사랑도 그런 카테고리가 아닐까.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프린터를 뽑고 CD에 저장하고 나면, CD굽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컴퓨터 프로그램은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듯이 묻지만 선택의 범위는 넓지 않다.
작업 내용을 저장하거나 저장하지 않거나. 그때,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 '한갓되이 풀잎만 p56
내일 녹음 시작할 책이다.
이승우 장편소설 [지상의 노래], 민음사
첫 문장...
천산 수도원의 벽서는 우연한 경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