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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2012년 5월 21일 녹음 시작, 총 24시간 30분 소요 녹음 완료
이 책은 9년 전에 부산점자도서관에서 낭독녹음 완료했던 책이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약간의 편견이 엿보이는 대목만 빼면 너무나 좋은 소설이다. 단편 형식이지만 다 읽고 나면 마치 장편을 읽은 느낌이다. 13개의 이야기 모두에 올리브 키터리지가 등장하는데 다 읽고 나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충분히 이해되는 70대 그녀의 일생이 파노라마로 그려진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에 과감한 생략과 함축, 소소한 사건들의 인과성과 세월의 강물을 몸으로 새기고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개성 있는 묘사, 쓸쓸하면서도 가슴 저 밑바닥을 적시는 뜨뜻한 생의 이면 그리고 생의 황혼에 찾아오는 놀라운 발견이 붉게 타는 지평선을 멀리서 바라보는 기분을 선사한다.
비슷한 형식의 최근작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일상적인 매일의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존중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이 느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일상은 규칙이 되어버린 경이로운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 소설은 당시 구매하여 집에서 먼저 읽었던 책인데 굉장히 신선했다. 나와 인연이 맞았던 것일 수도 있는데, 너무 좋아서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들려 드리고 싶었다. 음성정보팀장에게 물어보고 전국에 시각장애인 도서로 녹음된 기록이 있는지 확인해 보니 다행히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럼 녹음해도 좋다. 이 절차는 꼭 필요하다. 녹음완료 후 1차 편집수정 작업을 하며 한 번 더, 총 세 번 읽은 책이다. 나로선 읽을 때마다 기대되는 스토리라 기뻤고 다양한 층위의 인물들 성격이 잘 드러나게 대사를 읽는 부분도 내가 그 인물이 된 듯 목소리 연기를 하며 흥미로웠다. 녹음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좋은 녹음도서가 나온다.
녹음실 가는 길에 운전하며 EBS ‘책읽는라디오’를 듣는다. 매번 가며 오며 꽤 행복한 시간인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특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읽을 생각에 설레었다. 고집 세고 까칠하고 우리가 그렇듯 여린 면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올리브의 목소리는 어떻게 내야 할까. 조금은 투박하고 꼬장꼬장하면서도 무심한 듯, 이런 정도로 설정하였다. 그외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는데 사람들의 목소리를 나름 설정하며 새삼 목소리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 목소리라 하더라도 날마다 그때그때 다르고 나이 들면 목소리도 손등만큼이나 늙는다. 한 사람을 관통하는 시간의 궤적에 따라 목소리도 변화를 겪는다. 이 책을 녹음하는 동안 비교적 다양한 목소리층을 연기한 것 같다. 생의 쓸쓸하고도 충만한 풍경에 까무룩 잠겨 자주 울컥하고 목이 잠기기도 했다. 낭독자가 빙의되는 건 조심!! 대사가 아니라 내레이션 부분에서 저렇게 울컥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얼른 정신차리고 파일을 돌려 다시 녹음한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세 번째 장편이고 2009년 퓰리쳐상 수상작이다. 오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글을 써온 그녀는 이런 유의미한 조언을 한다. "작가가 되겠다면 포기하지 말며,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되, 그럴 수 없다면 계속 글을 쓰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며 습작을 게을리하지 말라." 그녀는 존 치버와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며 육필원고를 고집한다. 나는 필사 대신 녹음하면서 한 번 더 읽는 것으로 필사를 쉽게 대신한 셈 치자.
스트라우트의 문장은 읽을수록 감탄사가 나온다. 섬세하면서도 강하고 생의 위트와 연민이 공존한다. 농후한 생의 이력과 소화력이 엿보이는 문장들, 군더더기 없는 전개, 강인하면서도 시적 서정성이 엿보이는 유려한 문장들로 가득한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큰 강을 이루는데, 하나같이 서사가 독특한 구성 안에서 흐른다. 많은 등장인물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인, 올리브 키터리지가 있다. 강인하고 괴팍하고 불같은 성미를 지녔지만 따뜻함을 숨길 수 없는 이 여인과 남편 헨리, 외아들 크리스토퍼,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오랜 세월을 이어온 이야기가 거대한 테피스트리처럼 엮여 햇살 비치는 벽에 걸린다. 드러내어야만 치유 받을 수도 있는 생의 미려한 상처들에 온기 어린 시선과 응원을 보내는 이 소설을 작가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 헌사한다고 했다. 역시 작가에게는 이야기꾼 어머니가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 '약국'의 첫 문장은 이렇다.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 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 눈을 통해 그려 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
(올리버 키터리지 43쪽)
이 책의 후반부를 녹음하고 있을 당시 입하가 벌써 2주 전이었던 걸 떠올렸다. 요새는 봄, 가을이 없이 여름이 오고 겨울로 넘어가는 것 같다고 엄살인데, 전적으로는 동감되지 않는다. 봄과 가을은 나름의 빛과 향으로 우리에게 머물다 갔고 우리는 호들갑스레 봄을 노래하고 가을을 누렸으면서 그 모든 걸 망각한다. 좋았던 봄은 잊어버리고 그건 그저 없었던 듯 아무것도 아니었던 듯, 여름이 너무 빨리 온다고 법석이다. 입하! 그리고 성하! 나는 입춘보다 이 말을 더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봄을 잊고 싶진 않다. 봄은 늘, 여름 속에도 가을 속에도 그리고 겨울 속에는 더 속속들이 녹아있는 크림치즈 같은 것. 생은 내내 봄날을 어깨에 겯고 가는 걸. 아, 그걸 뒤늦게야 깨달은 한없이 가엾은 올리브 키터리지!
수정편집 과정에서 세 번째 읽으며 올리브는 어쩜 그렇게 살아서 튀어나올 정도로 생생할까 감탄했다. 어쩜 이리도 사람의 구질구질한 이면과 내면을 짚어내 두근대게 하는 걸까. 올리브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가슴 아픈 사연, 생의 빛나는 비밀이 생을 그럭저럭 잘 살아냈다는 훈장처럼 매달려 있는 그들의 이야기에는 늘 덩치 크고 성질 사납고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그러면서도 사람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감출 수 없는 올리브가 이어져 있다. 결국은 한 곳으로 귀결될 우리의 삶처럼 둘러가는 듯 하나로 아우르는 각각의 이야기가 남몰래 간직한 이런저런 상처로 너덜너덜한 가슴을 화살처럼 날렵하게 적중한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이러저러함에 의연하고 현명해지라는 은근한 응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구역질 나는 순간의 기억들마저도 생의 프레임 밖으로 내치는 게 아니라 안으로 끌어들여 안고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 내게 준 게 많든 적든, 아니 많다고 생각하든 적다고 생각하든, 적절하다고 여기든지 말이다.
때때로, 지금 같은 때, 올리브는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한 그것은 점점 더 무서워지는 삶의 바다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이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담배 피우는 앤을 바라보며 생각하건대, 그런 안정감을 갖는 데 아버지가 각기 다른 세 아이가 필요했다면 사랑으로는 불충분했던 게 아닐까.
(올리버 키터리지 378쪽 ‘불안’)
처음 편 '약국'에서 시작하여 징글징글한 생의 파란만장을 다 겪고 마지막 편 '강'에서 마무리하며 일흔 넘은 올리브 키터리지의 이루어질 수 없던 사랑이 눈물겨웠다.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착한 당신 외로워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하며 폭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 올리브 키터리지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곁에 있는 사람이다. 늦지 않았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건 그 사람의 숭숭 구멍 난 지난 삶까지 끌어안는 걸 뜻할까.
하지만 지금 둘은 이렇게 만났다. 올리브는 꼭 눌러 붙여놓은 스위스 치즈 두 조각을,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 보았다. 삶이 어떤 조각들을 가져갔는지를.
(올리버 키터리지 484쪽 ‘강’)
찬란한 은유로 가득한 이 책을 읽으며 생은 어쩌면 거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을 은유로 산다면 생각보다 훨씬 견딜 만할까, 파란만장도 거대한 하나의 은유 속에서 일상의 원관념들이 위트 있는 (어떨 땐 찌질하다 해도) 보조관념들로 너그럽게 윙크를 날리지 않을까, 그런 난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도 찡긋 윙크로 답변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눈물도 웃음도 바람에 파도에 가볍게 흘려보내는 게 생의 진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