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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1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작품으로는 별 세 개. 역자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별 하나도 주고 싶지 않다.
제목 <나의 투쟁>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작가인 칼 오베가 독자에게 날리는 ‘퍽 유’ 둘째, 역자가 독자에게 날리는 또 한 번의 강렬한 ‘퍽 유’ 셋째, 독자인 우리가 역자와 벌여야 하는 ‘니’와의 투쟁. 역자는 제목 <나의 투쟁>에서 ‘점 하나를 지운’ ‘니’의 투쟁을 감행한다.
역자인 손화수 씨는 ‘설마 어머니를 점 하나 지워 ’어미니‘로 부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미 ‘니’를 사랑하신다. 지루해질까 싶으면 가끔씩 어미 ‘나’로 끝내시는 센스.
소설 속 그 어떤 캐릭터도 ‘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이가 많건 적건, 여자건 남자건, 귀를 뚫건 안 뚫었건 누구나 ‘니’로 대화를 끝내야만 한다.
“무슨 일이니”
소년 칼 오베에게 던지는 오베 아버지의 첫 대화문은 일종의 전조였을까.
혹은 역자가 독자에게 보내는 은근한 암시?
노르웨이를 모르니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러나, 인물의 성격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대화체 문장을 거의 ‘니’로 끝내는 건 이 소설을 죽이겠다는 심산인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자 소개를 찾아보니 역자는 1998년부터 노르웨이에 이주해 살고 있었다. 아마도 거의 20년 간 한국어를 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역자가 번역을 개차반으로 해놨어도 40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길사에는 일 하는 편집자가 없나.
비판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 테니 예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불 밑에는 뭘 숨겨두었니?” - 30대 초반의 오베 아버지.
“내 카세트를 만졌니?”, “내 방에서 뭘 하고 있었니”
“그럼 내 방에서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니?” - 18살의 오베의 형 윙베 (p25)
“학무보 회의가 6시라고 했니?” , “너는 계속 여기 있을거니?” - 오베 아버지 (p79)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니?” - 오베 아버지 (P80)
“그게 정말이니?”, “그래서 어떻게 되었니?”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거니?” - 오베 형 윙베
“잘 놀다 왔니? ” - 오베 엄마
“재밌게 잘 놀았니?” - 오베의 단짝 친구 얀 비에르의 아버지.
“너희들 왔니?”, “언제 성탄절 방학식이 끝나니?”- 오베 할머니.
그래 좋다. 위의 예문은 연장자가 오베에게 말했기 때문에 ‘니’로 번역했다고 하자.
그럼 오베와 친구들 사이는 어떨까? 참고로 10대의 오베는 양쪽 귀를 뚫고 밴드에서 드럼을 쳤다.
“지금 뭐라고 했니?” - 리타에게 말하는 오베 (P101)
“널 이렇게 찾아왔는데 기쁘지 않니?”, “시간당 얼마 받니?”, “혹시 날 좋아하니?”
오베에게 말하는 리네
“그럼 우린 이제 헤어지는 거니? ” - 오베의 첫 여자친구 수잔네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 오베 단짝친구 얀 비다르.
“병 따개 있니, 양주 가져온 사람 있니?” - 오베
“지금 뭐라고 했니?” - 오베가 짝사랑한 이레네
“어, 그러니?” -오베의 절친 페르
“안녕, 오래 기다렸니?” - 오베가 사랑한 힌네
1부는 주로 오베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이 주를 이룬다. 그저 누구나 겪었을만한 평범한 일상이다. 2부는 결혼하고 애를 낳고 작가가 된 어른 오베가 화자다. 2부는 오베 아버지의 죽음을 골자로 한다. 오배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할머니 집에서 운명했다. 그리고 2부의 핵심내용은 ‘청소’다. 오베와 윙베는 아버지 사망이후 몇 일간이나 아버지가 운명한 할머니 집을 청소한다. 그리고 끝이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된 오베와 윙베.
‘니’의 투쟁이후 역자는 2부에서 ‘요’의 투쟁을 가미한다.
“몇 시에요? 있었어요? 지금요? 누워요? 안 돼요? 알잖아요. 당신이에요. 고집을 피우고 있군요. 알고 있어요. 느껴져요? 느낄 수 있어요. 신기해요. 미안해요........“ - 오베 아내 린다.
“소금은 어디 있나요?” - 오베
“여기요” - 오베 형수 카리 안네
“토리에는 어디 있나요?” - 오베
“아직 자고 있어요.” - 형수
“그런데 주전자는 어디 있나요?” - 윙베가 할머니에게
“저기 있네요” - 오베가 윙베에게
“커피는 어디 있나요? 찬장에 있어요?” - 윙베가 할머니에게
그렇다고 역자는 ‘니’를 포기한 것도 아니다.
“ 윙베는 어디 있니? 벌써 집으로 돌아갔니?” - 오베 할머니
이게 무슨 동화책인가.....요?
역자는 현실과 유리된 번역으로
모든 등장인물을 ‘의미와 내용도 없는’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렸다. 나이, 성별, 계급, 계층에 따라 대사의 톤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역자는 그런 언어의 뉘앙스들을 말살한다.
(역자는 ‘번역의 히틀러’가 되고 싶었던 건가요?)
역자는 <나의 투쟁>이 어떠한 문학 사조에도 포함되지 않고 어떠한 문학 이론으로도 정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피아노만 치시던 분이.....확실한가요?
<나의 투쟁>은 일본 사소설 형식을 차용한다. 그런데 단지 좀 길 뿐이다.
한마디로 <나의 투쟁>은 ‘21세기 노르웨이 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다른 독자 분들은 어쩜 이리 관대한지. 만일 내가 이 책을 구매해서 읽었더라면
한길사에 리콜을 요구했을 것이다. <나의 투쟁> 2권 번역 역시 1권과 똑같은
손화수 씨 번역이라면 나는 이 책과 더 이상 투쟁하지 않겠다.
이해할 수 없는 옷으로 치장한 배우의 코디가 안티라면
이 책은 역자가 작가의 안티다.
밑줄 그은 문장
p296.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들을 그림자 속에서 꺼내오는 작업이다. 그게 바로 글쓰기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아니라 ‘그곳’자체다. 그것이 글쓰기의 장소이며 목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p313. 아우구스트 스트린드 베리는 교란적 정신 상태에서 하늘의 별은 벽에 난 구멍이라고 아주 깊고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다.
(P337~345는 작가의 예술론)
p337. “물리학은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고 정리해내는 한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접하게 되면서 내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카테고리라는 개념을 사용해 허구적이고 가공적인 세상의 가치를 재고 분석해왔다.”
p338. 상황이 이러다 보니, 당연히 세상은 우리를 중심으로 존재하며, 세상에는 밖으로 통하는 통로나 문이 없고, 심지어는 우리가 근친상간적인 협소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도 하기 마련이다. 실제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세상 밖을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를 가끔 느끼는데, 어떤 때는 그 욕구가 너무 커서 통제가 불가능할 때가 있다.
나는 이 욕구의 동경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씀으로써 세상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글을 씀으로써 나는 좌절한다. 미래를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은 유토피아가 무의미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문학은 항상 유토피아를 지향해왔다. 유토피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문학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내가 시도했던 것은, 짐작건대 모든 작가가 한 번쯤은 시도해본 것이기도 하겠지만, 픽션으로 픽션과 맞서 싸우는 일이었다.
p390 조크 스터지스의 사진.
p501. 나는 아도르노를 읽으며 내면이 풍요로워짐을 느끼곤 했는데, 그건 내가 아도르노의 글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도르노를 읽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