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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품으로는 별 다섯개, 역자가 별 하나 삼켜버려 네 개가 됐네요.
예전에 보들레르로 논문을 쓴 적이 있었다. 불어 실력이 형편없어, 원문을 읽고 논문을 제출하자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 번역본을 토대로 논문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고는 <악의 꽃>을 먼저 읽었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다른 번역본을 찾아 읽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서 또 다른 번역본을 읽었지만 번역본들마다 의미가 다르니 점점 더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전을 옆에 두고 단어 하나 하나를 찾아가며 원문을 읽었더니 그제서야 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악의 꽃>은 김붕구, 김인환, 박은수, 윤영애 총 네 가지 번역본이 있지만, 이 중에 단 한편의 시라도 제대로 번역된 <악의 꽃>은 감히 말하지만 단 한 권도 없다. (최근에 나온 악의 꽃은 아직 확인 못했네요.)
이 책처럼 작심하고 번역본과 원문을 대조해 읽다보면 숱한 오역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는 걸까? 김화영 번역본의 오역들에 대한 번역자의 지적에 공감하고, 그보다도 번역에 대한 그의 철두철미한 태도에 우선은 존경을 표한다. 분명 여러 부분에서 오역들을 바로 잡아 준 번역가의 노고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껄끄러운 부분들이 없지 않다. 기회가 된다면 전문을 다 비교해 보고도 싶지만 몇 가지만 지적하겠다.
Des odeurs de nuit, de terre et de sel rafraîchissaient mes tempes. La merveilleuse paix de cet été endormi entrait en moi comme une marée.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 Elles annonçaient des départs pour un monde qui maintenant m'était à jamais indifférent.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j'ai pensé à maman.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김화영 역>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이정서 역>
굳이 두 번역을 비교하자면 김화영 역의 ‘뱃고동’소리가 어울린다. 나라면 des sirènes을 ‘세이렌들’ 로 번역했을 것이다. 싸이렌들이 어떻게 울부짖을 수 있단 말인가?
세이렌은 이탈리아 반도 서부 해안의 절벽과 바위로 둘러싸인 사이레눔 스코풀리(Sirenum Scopuli)라는 섬에 사는 바다의 님프들이다. 하신 아켈레오스가 무사 멜포메네나 스테로페, 혹은 테르프시코라에게서 낳은 딸들로, 모두 3명(피시오네·아글라오페·텔크시에페이아 혹은 파르테노페·레우코시아·리기아) 혹은 4명(텔레스·라이드네·몰페·텔크시오페)이라고 한다.
세이렌은 여성의 유혹 내지는 속임수를 상징하는데, 그 이유는 섬에 선박이 가까이 다가오면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뛰어드는 충동질을 일으켜 죽게 만드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특히 암초와 여울목이 많은 곳에서 거주하는 이유도 노래로 유인한 선박들이 난파당하기 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번역가가 인용한 부분의 앞 뒤 원문을 더 실었다. ‘소금 냄새’와 ‘밀물’이란 표현에서 바다를 연상할 수 있다. 뫼르소는 웽웽거리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엄마 생각을 했을까? 바다의 님프들인 ‘세이렌’들의 노래 소리 때문에 바다와 발음이 똑같은 ‘어머니’를 연상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세이렌은 또한 다가올 죽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두 번역자의 뒷 문장들도 다시 번역해야 된다. ‘한 세계로의 출발’은 무얼 뜻할까? 당연히 다가올 죽음의 세계다. 그 죽음의 세계는 ‘나와 관련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살아있는 현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계다. 해석하자면 아래와 같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세이렌들이 노래했다. 그것은 현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j'ai pensé à Marie.
이정서는 김화영의 ‘오래간만에 처음으로’라는 번역이 오역이고 ‘아주 오랜만에 다시’가 올바른 번역이라고 말한다. 처음인데 어찌 오래간만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주 오랜만에 다시’가 맞을까?
안타깝지만 둘 다 틀렸다. ‘처음으로 오랫동안’의 뜻이다. 뫼르소는 마리에 대해, 엄마에 대해 물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부 짧은 단상들 뿐이었다. 뫼르소는 감옥에 들어와서야 엄마나 마리에 대해 ‘처음으로 오랫동안’ 깊게 생각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엄마의 삶, 마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욕망, 자신의 필요에 따라 ‘타인’을 생각했을 뿐이다.
전반적으로 이 정서 번역의 장점은 서술 부분과 묘사 부분이 매끄럽다는 것일 텐데, 대화로만 가면 이상해진다.
이정서는 뫼르소의 어머니 죽음 이후, 뫼르소의 단골 식당 가게 주인인 셀레스트의 대사 “어머니란 단 한 분밖에 없는데”의 김화영 번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는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한 분 뿐인 게지.”라고 번역한다. 분명 좀 더 원문에 가까운 적확한 역은 이정서 역이다. 그러나, 저렇게 말하는 한국 사람이 있나? 번역체 문장을 못 참아 하는 개인적 취향 탓일까? 나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걸까?
......그런 게지.
김화영 역에 ‘누구에게나’만 삽입하면 끝날 일인데, 김화영 역을 피해가려다 보니 다소 무리수에 가까운 번역들이 흘러넘친다.
아마도 이러한 ‘무리수 번역’의 결정판이 ‘Je le descends?’ ‘Je le descendrai’일 것이다.
김화영의 “해치워 버릴까?”, “내가 쏘아 버릴 테니까”의 번역이 일관성이 없다며 이정서는 “ 저 녀석 맛을 봬줄까?”, “ 그때 맛을 봬주지.”, “내가 맛을 봬줄게”로 번역했다.
누가 봐도 김화영이 역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정서 역처럼 말하는 사람이 요즘 있나. 이거 나만 웃긴 건가?
......그런 게지.
이런 식으로 쓴다면 번역가가 했듯 나 역시 매일 매일 블로깅을 해야 할 지경이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지금까지 <이방인>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뫼르소가 살인을 한 이유가 ‘태양 때문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잘못된 번역이 만들어 낸 조작된 이미지다. 앞의 번역이 전부 잘못되어 있으니 이해를 잘 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뫼르소가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하는 저 말만 듣고 만들어 낸 오해였던 것이다. 기실, 저 문장에서 방점은 ‘태양 때문’이 아니라, ‘두서없이’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에 찍히는 것이다. 앞서 밝힌 바대로 뫼르소가 총을 쏜 것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찌르는 위협적인 칼날’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지금 뫼르소가 총을 쏜 가장 큰 이유는 ‘눈을 찌르는’ 칼날 때문인 것이다. 그 번쩍이는 칼을 든 사람은 앞에서 친구(레몽)를 잔인하게 찔렀던 바로 그 위험한 사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바로 정당방위인 것이다.
......정당 방위로서의 첫 발, 그리고 ‘약간의 텀’을 두고 발사되는 네 발의 총알,.......정당한 이유로서의 한 발과, 위장된 도덕, 종교, 권위,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향한 무의식적인 발사.
이정서의 주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태양 때문이 아니라 정당방위였다는 것이고, 김화영의 오역 때문에 독자인 우리가 뫼르소의 살인의 동기를 ‘태양 때문에’라고 오해했다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 저러는 걸까? 애초부터 전략적으로 노이즈 마케팅을 기획한 걸까? 물론 정당방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첫 발이 정당방위였는지 아니였는지 우리로선 알 수 없다. 아랍인과 뫼르소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였는지 작가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뫼르소의 눈을 파고든 ‘칼날에 반사된 빛’이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를 촉발했다는 것이다.
왜 뫼르소는 아랍인의 몸에 네 발의 탄환을 더 쏘았을까?
번역에 상관없이 뫼르소의 주장대로
‘태양 때문’이다.
왜 ‘태양 때문’인지 번역가는 차분히 앉아서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bien longtemps’ 생각해보길 바란다.
번역가는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를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로 바꿀까 하다 고민 끝에 그대로 두었다고 하는데 정말 잘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바꿨다면 나는 이 책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 이해를 못한 것 같은데 왜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번역해야 했는지 이것 역시도 ‘처음으로 오랫동안’ 다시 한 번 고민해 보길 바란다.
메모한 문장
p168.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제던가, 모르겠다. (내 멋대로 해석)
p87. 나는 땀과 햇볕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한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 댔고 탄환은 흔적도 없이 박혀 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
p99.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분개하며 앉았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으며, 심지어 그분을 외면하는 사람들조차 그렇다고. 그것이 그의 신념으로,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려든다면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진다고 그가 말했다. “당신은 내 삶이 무의미해지길 바랍니까?” 하고 그가 소리쳤다. 내 생각에,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p154. “그래, 그렇다면 난 죽는 거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가치 있게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본질적으로, 서른이나 일흔이나 죽는다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어떤 경우에라도 또 다른 남녀들이 살아갈 테고, 수천 년간 그럴 테니까. 요컨대 그보다 명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게 될 것은 언제나 나였다.
p161. “ 이 모든 돌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땀을 흘리고 있네. 나는 그것을 안다네. 나는 고통 없이 그것들을 본 적이 결코 없네. 그러나 나는 가슴 깊이 아네. 자네들 중 가장 비참했던 자도 그것들의 어둠으로부터 드러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을. 그것이 자네가 보기를 요구받게 될 얼굴일세.”
나는 조금 기운을 차렸다. 나는 수개월간 이 벽의 돌들을 바라봐 왔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내가 이것보다 더 잘 아는 것도,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 나는 거기에서 어떤 얼굴을 찾았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태양의 빛깔과 욕망의 불꽃을 띠고 있었다. 그건 마리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것을 찾아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제 그것은 끝났다. 그리고 나는 어쨌든, 땀 흘리는 돌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p163. 그는 너무나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확실성은 여자 머리카락 한 올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나는 마치 빈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나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그가 확신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삶을, 다가올 이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내겐 그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진실이 나를 꼭 움켜쥔 만큼 그것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옳았고, 여전히 옳았으며, 항상 옳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지만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했고 저것은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건 하지 않았으나 또 다른 건 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이 모든 시간 동안 이 순간을, 이 이른 새벽을, 나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기다려 왔던 것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겠다.
p164 내가 살았던 부조리한 삶 내내, 내 미래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아직 오지 않은 수년의 시간을 건너서 어두운 바람이 내게로 거슬러 왔다. 그 바람은 이 여정에서, 내가 살았던 시간보다 더 사실적일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당시 내게 주어졌던 모든 것들을 그만그만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른 이의 죽음이나 어머니의 사랑이 내게 뭐가 중요하며, 그의 하느님이나 우리가 택하는 삶, 우리가 정하는 운명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p166.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쫓아내고, 희망을 비워 낸 것처럼, 처음으로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2014. 9.1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