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한지 8년 된(그땐 최신식이었던) 우리집 컴퓨터는 상당히 느리다.
애들은 피같은 지들 용돈까지 보태겠다며 바꾸자고 바꾸자고 성화다.
그러나 우리집 재무부 장관 되시는 '나'님은 그럴 의향이 전혀 없으시다.
그도그럴것이 나는 이 컴퓨터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피드에 목숨 거는 게임따윈 할 줄도 모르거니와 웬만한 궁금증은
다 해소시켜주는 검색질이며 알량한 서재질과 가끔 한글에서 문서작업
정도가 전부인 나의 요구를 구닥다리 컴퓨터는 너끈히 해치우고 있는데
뭣하러 돈타작을 한단 말인가.
더구나 오늘 나는 이 느림보 구닥다리 컴퓨터로 말미암아 어떤'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접속, 다운로드, 업로드....그 어느 것 하나 재빠른 기색없이
굼뜨는 이 애가, 방금 알라딘에 접속하여 내 서재를 여는 순간,
나에게 가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I like fall"
모니터 한 가득 귤색과 연한 갈색이 노을빛으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우울한 날에 노을을 바라보았다던 어린왕자처럼 나는 모니터 속 노을을 응시했다.
어린 왕자가 의자를 당겨가며 마흔 세번의 노을을 봐야 할 만큼 슬펐을 그 어떤
날을 화면이 온전히 다 로딩되는 짧은 순간에 나는 생각했다.
아, 그리고 노을 위로 셔터를 막 누르는 손 그림도 빠뜨리면 안 되겠다.
엄지손가락 손톱이 길어 걸리적거려 보이는 것 외에는 퍽이나 이쁜 손이었다.
아니다. 꼼꼼이 뜯어보면 아주 예쁜 손가락 축엔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달막하고 몽툭해서 프로포즈 반지를 받을 때도 쭉 펴지 못하고 옴츠려들기만
했던 내 손가락과 비교하여 사뭇 다른, 가녀려 보여서 부러운 손가락이다.
소매가 약간 볼룩한 검은 옷을 입은 팔꿈치께도 길쭉하니 우아한....
아무튼지 셔터를 누르는 우아한 손 그림은 나를 금새 로멘틱하게 만들었다.
케케묵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을 내 카메라를 꺼내 이 가을엔 사방팔방
쫒아다니며 찍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불끈불끈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윽고 전깃불이 들어오는 동네 저녁풍경처럼
진주의 야문콩 천천히 씹기-내 서재 타이틀 로고와 사진, 메뉴바의
글자들이 톡톡 켜졌다.며칠 전 내가 심은 검은 활자들이 총총하게 박힌 페이퍼가
맨 위에 셔터 누르는 손 그림만 남긴 채 노을을 가리며 마지막으로 등장하였다.
요즘 나의 심사를 말하자면 물기 하나 없는 모래알처럼 '가을이야 오거나 말거나'
하는 짝이었다. 알라딘 서재가 개편에 개편을 거듭하면서 대문 장식하는 이미지를
많이 갖추었다고 자랑해싸도 어느 것 하나 썩 마음에 내키는 것이 없어 집적거렸는데
이토록 예쁜 배경그림이 있다곤 진작 몰랐다. 간만에 마음에 쏙 든다.
어젯밤 서재를 나가기 직전에 대충 택하여 눌러놓고 나갔다가
오늘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에 쏙 드는 배경 그림'도 속도 겁나 빠른 컴퓨터였다면 미처 보지
못했을 것이다. 느리게 그림 펼치기 기술은 2004년식 낡아빠진 구닥다리 느림보
컴퓨터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일종의 베테랑만이 만드는 여유랄까.흐흣~
이러니 우리집 아해들은 당분간은 새 컴퓨터에 대한 소망은 버려야 할 것이다.
20110918ㅇ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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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아아..그렇다고 우리집 컴퓨터 속도를 형편없이 무시하진 마시길 바란다. 내 서재 열기에 클릭하여,노을을 보고 어린왕자를 생각하고 손가락을 감상하며 쳐박혀 있을 내 카메라를 생각하며 가을에 빠지는 일련의 과정도 알고보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광속 상상력도 부디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갖다버리고 새 컴퓨터로 갈아 앉히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집 컴퓨터는 아직 건재하고 있고, 단지 높은 사양 컴퓨터의 '눈깜짝할 새'의 속도가 보여주지 못하는 여유를 갖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