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다. 
그것도 깊은 밤이다. 
1시 30분, 이 시각은 어떤 이들에겐 '깊은'이라는 수식어가 엄살이겠지만 나같이 초저녁잠 많은 사람한테는 심연의 밤이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기도 하고 또 휴일이라 마음을 풀어서인지 나는 기어이 초저녁잠을 이기지 못하였다. '온 가족'이래봐야 네 명인데도 그 넷도 다 모이기도 쉽지 않다. 이런 날 온 가족이 함께 티비도 보고 수박도 잘라 먹고 놀면 좀 좋을까.  

 

저마다 편한 자세로 뒹굴거리는 휴일의 초저녁, 나는 그만 꿀송이보다 더 달디 단 잠에 빠져들었다. 간간이 아이가 '엄마가 좋아하는 코너 해요!'하며 어깨를 흔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개콘 600회라고 엄청 재미있다고 애가 미리 예고도 했었다. 제발 잠 자지 말고 같이 보고 웃자는 거다. 내일이면 얼마나 웃기고 재미있었는지를 이야기 해 줄 것이다. 원망도 한 줌 섞어서. 그러게, 같이 와그작 웃고 놀면 얼마나 재미지고 행복할지 풍경이 선한데 말이다...... 

 

기말고사 이틀 치루고, 이제 남은 이틀을 더 버텨야 하는  작은 녀석 잠자는 머리맡에 책이 한 무더기다. 놀고 싶고 자고 싶어도 차마 시험의 중압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책은 붙잡고 있었나 보다. 프린터물과 문제집 따위와 씨름한 티를 내며 곤히 잠들었다. 

 

고3이라는 큰 녀석, 참, 엄마가, 할 말이 없다.......늘 엄마가 먼저 잠들어서 염치가 없다. 얼마나 노곤한지 온 몸을 휴지조각처럼 이리저리 구기며 널브러졌다. 예민하고 잠귀가 밝아 키울 땐 애먹었는데 오늘은 등에 깔린 이불을 살그머니 빼 바로 덮어 줘도 세상 모르고 잔다. 업어가도 모를 고3인게다.  

 

남편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쓸쓸하다. 잠든 옆얼굴이 낯설기조차하다. 얕게 코를 골다가 큰 숨을 내쉬기도 하면서 일정한 리듬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달려가고 있다. 나는 오늘밤을 지새울지라도 잠에서 그를 불러내진 못한다. 심심해 죽겠다고 떼를 쓰면 꾸벅꾸벅 졸면서 놀아주던 신혼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나도 조금이나마 철든 마누라가 되어서 그렇게 하지도 않겠지만 깨운다고 호락호락 불려 나오지도 않을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수고로운 하루를 위해 베풀어주신 안식의 시간이니까. 우리는 각자 오늘 하루도 힘에 부치도록 수고하였다. 잠든 남편의 턱에는 수염이 주인 모르게 자라고 있다. 까칠해 보이는 남편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꿈 속에선 아내나 가족, 일 등 현실에서 소중한 것들이 제외 되어도 좋겠다 싶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유년기로 돌아가 품에 안겨 맞아도 좋고, 아니면 고향의 푸른 동산에서 마구 뛰놀아도 좋겠다. 온 몸 가득 푸른 기운 충전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면 좋겠다. 잠든 그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나요?  

 

잠 자는 남편과 아이들의 모습은 깨어 있을 때와는 달리 연민이 스민다. 어루만지고 토닥여 주고 싶지만 행여나 잠이라도 깰까봐 참고 일어서 나는 창문을 열고 깨스 중간 밸브를 잠그고 욕실 수도꼭지를 확인하며 환영처럼 소리없이 다녔다. 초저녁잠 달게 자고 일어나니 잠은 도망가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제 불 끄고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계속 잠이 안 오면 어떡하나, 걱정은 된다. 20110704ㅇ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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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7-0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주무셨어요? 진주님^^
저도 대개는 늦게 자는 편이고 밤에 숙면이 잘 안 돼요.
요즘 부쩍 그래요. 고3 아들 건강 잘 챙기고 잘해나가고 있죠?^^
우리집 고3딸도 오늘 아침 또 기숙사 데려다주고 왔어요.
주말에 오면 완전 쉬고 너무 웰빙 고3이 아닌가 싶은데..
알아서 하겠지 싶어 아무말 안 해요.

진주 2011-07-04 14:06   좋아요 0 | URL
아뇨~~새벽 3시까지도 깨어있었어요...ㅠㅠ
덕분에 오늘 새벽기도도 못 가고요, 하루종일 피곤해 죽겠어요 ㅋㅋㅋ
웰빙고3요? 그렇다면 우리집 큰놈도 웰빙고3이네요 ㅋㅋ
주일은 쉬는 날이라고 교회가는 일 외엔 푹~잘 쉬죠.
저도 그건 말리고 싶지 않아요. 애가 기계도 아닌데 쉬는 날도 없이
공부시키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요.
문제는 주5일제 공부를 하려고 들어서 걱정이예요ㅎㅎ
기말고사 보는 와중에 친구랑 트랜스포머 개봉했다고 다녀오더군요ㅡ.ㅡ
그러면서도 성적 떨어지지 않는 거 보면
지 말대로 집중력있게 알아서 잘 하는가 보다하고 위안을 삼아요ㅎㅎ



 

 

기억상실은 드라마처럼 드라마틱하게 진행되진 않는 것 같다.  


 가벼운 치매증상이라는 진단을 수년 전에 듣긴 했지만 별탈없이 지내오셨던 엄마는 수술을 받으신 후로 우리를 종종 당황스럽게 한다. '아차! 깜빡 잊었다'라고 말하던 시절의 엄마가 그리울 지경이다. 우리가 놀라서 바로 잡아주거나 상기시키면 엄마는 '아이구..내가 정신 차려야지!'하며 화들짝 놀란다. '엄마, 원래 전신마취하면 아이큐가 10씩 팍팍 떨어진대~내가 애 둘 제왕절개수술해서 낳느라 그 좋던 머리 다 나빠진거잖아~헤헤헤'하며 엄마를 위로한답시고 나는 싱거운 소리를 해쌌는다. 

 

 남편 차를 손 좀 봐야해서 정비공장에 따라 갔다.
정비공장 사장 부인이 나를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오며 반가워하는거다.
이 공장과 거래 튼지 7~8년 동안 우리가 얼굴 본 건 고작 한 두 번인데(그래서 솔직히 나는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데)분에 겨운 환대를 받는 것 같아 살짝 머쓱했다.

-기억력 좋으신가봐요.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어머, 제가 사모님을 어떻게 잊겠어요!

돌아온 대답이 사뭇 사연있게 들리는 거다. 말귀 못 알아듣는 내 표정을 알아채곤 얼른 부연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 우리 첫 애 낳았을 때, 장미꽃 보내주셨잖아요!
  저 그때 완전 감동 받았잖아요~ 

 

내 차에 남편을 태우고 정비공장을 빠져 나오자마자 득달같이 남편에게 물었다. 

-있지..저기 사장 마누라가 그러는데...
  그 집 애 낳을 때 '내'가 꽃다발을 보내줬었대. 빨간 장미꽃으로.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것 같아 민망할까봐 어물쩡 넘어가긴 했는데...
  혹시, 그 말..맞아? 내가 그 집에 꽃 보내준 거 맞아?  

-웅, 그때 그랬잖아. 

-내가? 

-응. 

-꽃을? 내가 왜? 그 사람과 친하지도 않는 내가 뭣 때문에?
  우..우리가 그렇게 친했나! 

-아, 이 사람 왜 이래? 기억 안 나? 
  꽃집에 같이 간 것도 또렷이 기억나는구만....
  꽃다발 포장할 때 마지막에 반짝반짝 뿌리는 약, 그거 뿌리지 말라고 그랬었잖아? 

   

이쯤이면, '아하!' 하며 기억도 날 법한데 나는 남의 이야기같이 들렸다.
내가 할 수있는 거라면 오로지 '내가 그랬단 말이지? 허을' '헐!'만 연발할 따름이었다.  

근래 이런 류의 내 기억력 때문에 실수를 두 번이나 했다. 이래갖고서야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겠나?그 두 번의 실수-나는 여태까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벅벅 우기고 있던 중이었다. 상대방은 분명히 나한테 말 했다고 하고 나는 전혀 들은 적 없다고, 내가 듣기라도 들었다면 뒤늦게라도 생각나야 하는데 전혀 금시초문이라고,그러니까 나한테 말하지 않은게 분명하다고 우기고 있었는데-이게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밝혀진 것만 두 번이지, 내 기억력에서 완전히 사라저 없어진 것이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나 치매 검사 같은 거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어째 남의 이야기같이 전혀 기억도 안 날 수가 있냐? 에휴..... 

하며 친구한테 털어놓으니까, 친구는  

"네가 요즈음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봐. 요 근래에 얼마나 큰일들을 겪었니?
  수용할 용량을 넘겨버려서 뇌가 버리는 것도 있나봐...쯧쯧..."
 

뇌가 버리는 것.
친구 말처럼 다 넣어 둘 공간이 없어서 기억 몇 가지 지울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버려진 그 기억의 예쁜 편린일랑은 오늘처럼 조우하게 된다면 좋겠다. 기억에 없는 어느 순간의 나 때문에 누군가가 행복해했다는 말을 들을 때 나 스스로 얼마나 기특하였던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마흔 다섯번째 생일을 맞이한, 아직은 한참 쌩쌩한 마흔 다섯이지 절대 일흔에 접어든 할머니의 일기가 아니란 걸 밝히며 쓰는 바이다ㅋㅋ20110614ㅎㅂㅊㅁ 

덧)  생일이었어요.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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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6-14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진주님 어제 생일을 이제야 ㅎㅎㅎ
아무튼 마흔다섯번재 생일 축하축하 드려요^^
저도 그럼 아이큐 20 + 20 떨어졌겠어요. 아흑 그런 지금 제 아이큐는 완전 ㅠ
홀로 되신 어머니 곁에 진주님이 늘 있어드려야 겠어요.

진주 2011-06-18 09:47   좋아요 0 | URL
ㅋㅋ 알고보면 아줌마들도 예전에 머리가 무지 좋았다는~ㅋㅋ
엄마요...다른 도시에 산다고 '늘' 곁에 있어드리진 못하고요, 전화만 자주 해요.

마노아 2011-06-1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하루 지난 생일을 이제사 축하해요.^^
저는 올해 들어서는 뇌가 이렇게 늙는구나 실감이 날만큼 잊어버리고 생각 안 나는 게 무척 많았어요. 애를 낳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겁이 날 정도였어요. 이것도 익숙해지니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해요. 다들 그렇겠지 뭐... 이러고요. 어제는 수년 만에 통화한 사람이 그때 누구누구였다고 설명을 하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행사에서 밥 한끼 같이 먹고 얘기 좀 나눈 게 다였지만 그래도 생각이 안 나니 답답하긴 했어요. 다들 그런 거겠죠? 우리만 그런 것 아닐 거예요.^^;;;

진주 2011-06-18 09:49   좋아요 0 | URL
우리라니요~아직 미혼이신 마노아님은 우리에서 뺄거예욧!! ㅋㅋ
후제 마노아님이 결혼해서 애 낳아 본 후에야 마노아님이 제명된 이유를 알게 될거예요.

chika 2011-06-1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쌩쌩한 마흔다섯 진주님! 생일축하해요. 일주일정도는 생일주간으로 축하받는거잖아요, 그죠? ^^


진주 2011-06-18 09:51   좋아요 0 | URL
오~어떻게 아셨죠?
안그래도 우리집에선 깜박증 남자들을 위해 '어머니 생신주간'을 가동하고 있답니다. 1주일 내내 저는 생일을 축하 받을 권리가 있는거죠 ㅋㅋㅋ

조선인 2011-06-15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드려요. 난 진주님 페이퍼 절대 공감이에요. 사실 많은 아줌마들이 그럴 거에요. ㅋㅋ

진주 2011-06-18 09:53   좋아요 0 | URL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제가 건방져서 이렇게 소리쳤답니다.
" 난 나이들어도 절대로 아줌마가 되진 않을거야!"
흥, 그래놓고선 되려 지름길로 달려가고 있네요 ㅋㅋ
세월을 누가 이긴다고 그런 철없는 소릴 했을까요...

혜덕화 2011-06-1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그러더군요.
두 가지를 동시에 기억하기 힘들다는 내 말에
"그래, 맞다. 껌 씹으면서 횡단보도 건너기 힘들다."는 말에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습니다.
그래도 좋으네요.
내가 기억하지 못 하더라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준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있다는 것은.

진주 2011-06-18 09:5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빨간 장미꽃으로,
어여쁜 꽃다발을 선물했다던 여자의 모습을 그려보니
예뻐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봄비, 내린다' 

이렇게 이쁜 말을 놔두고 황사비도 모자라 방사능비라고 불러야 한다. 

 

비에 젖은 꽃잎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알았다.
꼭 이맘 때였을 거다. 봄볕에 깜스럼하게 얼굴 그을린 조고만 가시내였던 나,
냉이는 이미 꽃이 폈을 테고 뽀얗고 통통한 쑥을 캐러 다니고 있었을 거다.
지금은 어딘지 가늠할 수도 없는 어느 들녘에서 이슬처럼 나리는 
봄비를 만났다.  이슬비에 젖은 복사꽃의 분홍빛!  
영롱하고 맑은 곱디 고운 빗방울에 굴절된 꽃잎.
꽃잎의 보드레한 솜털과 수술과 암술, 코끝에 아리는 향긋함....
나는 이 세상에서 보호해줘야할 가장 여린 것이 꽃잎이란 것을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해마다 봄이 오듯
봄비가 내리고
꽃이 핀다. 
올해는 비에 무서운 것이 섞여도 여전히 들녘마다 가득 메우고 있겠지. 
복사꽃, 매화꽃, 살구꽃, 사과꽃,자두꽃들아!  

20110408ㅌ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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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0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1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혜덕화 2011-04-1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사비도 방사능비도 봄 꽃의 향연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요.
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삶의 구차스러움도 애틋해지는 봄입니다.
우리가 뿌린 것을 우리가 거두는 것에도 호들갑떠는 것을 보면서
봄 꽃이 빙그레 웃고 있는 것 같네요.
야들아, 정신 차리래이 하구요.^^


진주 2011-04-16 11:59   좋아요 0 | URL
정신...차려야 할 텐데
인간의 오만함과 무지함이 어디까지 뻗칠지....
잘 지내시는거죠? 혜덕화님^^
신학기 지나고 애들이 학교에 좀 적응되면 여기 들리시려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여름방학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언제나 강건하시고 행복하시길.

2011-04-28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2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2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4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말 의  힘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찌릿하다. 후련하다.

     기분좋은 말을 소리내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만져보자. 햝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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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4-1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툭 내뱉는 말의 과보를 받으면서도
과보 받는 줄 모르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말의 힘을 느낍니다.
말이 곧 기도이고 진언임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데......

진주 2011-04-16 11:57   좋아요 0 | URL
말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죠.
우리가 상대방의 내면세계까지 읽어낼 재주는 없어도
흘러나오는 말을 보면 그 속에 어떤 샘이 있는지 짐작은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가하면 말은 내면을 가꾸는 힘도 갖고 있나봐요.
입에 부정적이고 거친말을 담으면 마음도 황폐해지는데 비해
예쁜 말 좋은 말을 소리내어 발음하다보면 어느덧 마음도 정화되기도 하니까요...
 

양잠설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환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뽕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다. 이 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여 엿빛을 띠게 된다. 그 때 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면기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념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 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면,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一齡), 이령 혹은 한 잠, 두 잠 잤다고 한다. 오령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에 가서 특상, 1등, 2등, 3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대개 한때는 문학 소년 시절을 거친다.
이 때가 가장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이 때 독서를 많이 해야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 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대로 빛난다. 이 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 서적에서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떠서 제각각 제 길을 찾아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한 사색에 잠긴다. 최면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 잠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舊殼)을 벗는다.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 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벽에 몸부림친다. 혹은 그를 요사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전에 읽었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제 이령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하는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며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탈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 자기대로의 세계에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1등품, 3등품으로 후세의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람의 일생을 60을 1기로 한다면 20대가 1령기요, 30대가 2령기, 40대가 3령기요, 50대가 4령기요, 60대가 되면 이미 5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짓고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 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이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만치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며 지어 논 고치[境地]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의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20대~60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인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연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가 남의 글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있다.

"그 사람은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 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것이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5령기를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다."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그렁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지. 훌륭한 문장가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作 : 윤오영



...윤오영...
수필가, 호는 치옹 또는 동매실 주인.서울 출생(1907-1967)
보성고등학교 교사를 지냄.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하여 격과 아취를 소중히 여김. 수필집에는 <고독의 반추>과 있고 저서에는 <수필 문학 입문>이 있다. 특히 <수필 문학 입문>은 종전의 서구식 문학의 관점과 다른 전통적인 시각에서 설명한 귀중한 노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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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1-04-04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심비에 새기듯이 또박또박 타자쳤던 것이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끄트머리 윤오영님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윤오영의 양잠설에서 문장론을 배웠다."
라고 나중에 써먹으려고 했던 야심찬 작정도 기억도 난다.

십 년이 지난 오늘 아침, 오자 하나 없게 정성들여 타자한 이 글을 다시 마주한다. 십 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의 문장은 어떠한가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즈음 내가 상상했던 십 년 후의 나의 글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