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책만 사러 다니다가 '서재'라는 기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서재를 열고 뭔가 끄적거리며 쓰기 시작한지가 한 10년 세월이 흘렀을까..
지금 내 서재의 페이퍼들은 대부분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데
세어보니 9개의 방이 비공개로 잠궈져 있다.
그 중에서 일기처럼 일상을 쓴 '쉴만한 물가'란
페이퍼에는 약 420개의 글이 숨어 있다. 


요즘처럼 이렇게 마음이 바특거릴 땐,
다른 책 읽는 것보다 예전의 나의 흔적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래는 2005년 어느 날의 내 마음의 풍경이다.  

 

 평화로운 풍경(2)

 

골목을 지나다가 꼬마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노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인다. 해묵은 시멘트 바닥이 여기저기 갈라지고 뜯겨나가 누덕누덕한 그 위에서 아이들은 곰실거리며 조고만 손으로 장난을 치거나 깔깔 웃는다. 배냇머리칼이 햇살에 노랗게 나폴거리고 귀여운 곰이 그려진 옷을 입고, 인형같이 조그만 신발을 신은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서 곰살맞게 노는 모습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켜준다.

해맑은 웃음을 웃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그 애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저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좋은 세상이 되어야 겠고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2005.ㅊㅁ 

 

 

그 전날 '평화로운 풍경'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렸고 이 날도 연이어 평화로운 풍경을 옛날의 나는 읊고 있다. 기억을 들추어 보면 그 당시 내 삶이란 것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퍽퍽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그 즈음의 다른 페이퍼에서 보듯이-3시간밖에 못 잤다거나, 저녁밥 먹을 시간도 없이 하루에 10간도 넘는 강의를 소화해내느라 목은 쉬어 빠지고 기력이 탈진했다는 이야기, 어렴풋이 기억나기론 아마 저 날도 종종거리며 수업 다니는 도중에 본 골목 풍경이었을 것이다- 내 육신과 마음은 조악한 현실에 무참히 뭉개지고 있었는데 평화의 단상을 읊조리는 내가 새삼 기특하다.  매의 눈을 가졌다면 저 걱정없어 뵈는 단상의 배경엔 평화롭고 아늑한 삶에 기갈들린 나의 안쓰러운 욕구가 배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다시 보니까 그 시절의 아픔까지도 평화로워 보인다.  평화를 노래해서 평화롭다기 보다 지금에서 저 글을 보는 나는 세월이 지나니 진심으로 평화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면 '오늘'도 보이지 않는 방으로 숨겨질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어느 미래에 나이가 더 든 나는
마흔 다섯의 나를 되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큰 일을 겪었군. 그때 내 맘이 많이 아팠지, 라든가 
흠  공연한 일에 화를 내었군...하면서 
어쨌거나 지나고보니 그마저도 평화롭군.
할지도 모른다.20110310ㅁ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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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1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1-03-1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도 모를 저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쓰시는 님의 마음씀이 참 예뻐요.
저도 그런 맘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땡큐^*^

진주 2011-03-15 10:58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그런 얘기 아닌데^^;;
 
그 누구를 위해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았다
강은교 / 동화출판사 / 1995년 2월
절판


사랑法

떠나고 싶은 者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者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時間은
沈默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者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者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강은교-17쪽

양수리에 가서

가을이면
양수리에 닿고 싶어라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양수리에 가면
강르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장 차갑고
가장 순결한
물과 물이 만나
그저 뼈끝까지 가난하기만한
물과 물이 만나
외로운 이불 서로 덮어주며
서러운 따스함 하나를 이루어
다둑다둑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난한 것을
왜 그저 외롭다고만 하랴
외로운 것을
왜 그저 서럽다고만 하랴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헐벗은 가을나무들
제 유언을 풀 듯
조용히 물그림자 비추어
스스로 깊어지는 혼자 외로움
거울같이 전신으로 대면하고 있으니

가을이면
양수리에 가고 싶어라
어디선가 나뉘였던
물과 물이 합하여
물빛 가을이불 더욱 풍성해지고
가을나무 물그림자
마침내 이불 덮어 추위롭지 않으니

홀로 서 있다 하여
어찌 외롭다 하랴
하늘 아래 헐벗었다 하여
어찌 가난하다고만 하랴

-김승희-41쪽

비망록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문정희-109쪽

너를 우한 노래 9

산은
산만큼의
말줄임표

침묵 속에서
차고 빛나는
하나의 정신으로 남기 위하여

나는
나의 사랑만한
말줄임표

-신달자-145쪽

너를 위한 노래 10

문 잠긴 방에도
새벽 오듯

창 없는 감옥에도
봄 오듯

눈감고 있는 내게
너 온다.

빛의 속도로
어둠을 뚫고.

-신달자
-146쪽

입술자죽

따귀 맞아 부르튼
조 귀싸대기에
오오 입맞춤한 입술자죽
요 이쁜 꽃잎
씀바귀꽃 피었다

삶은 쓰거워도
소태맛이어도
사랑은 피어나고
웃음도 고와라
눈물겨워 아름다워라.

-유안진-153쪽

편지 쓰기

네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발견하고 사랑하며
편지를 쓰는 일은
목숨의 한 조각을
떼어 주는 행위

글씨마다 혼을 담아
멀리 띄워 보내면
받는 이의 웃음소리
가까이 들려오네

바쁜 세상에
숨차게 쫒겨 살며
무관심의 벽으로
얼굴을 가리지 말고
때로는 조용히
편지를 써야 하리

미루고 미루다
나도 어느 날은 모르고
죽은 이에게 편지를 썼네

끝내 오지 않을 그의 답을
꿈에서도 받고 싶었지만
내 편지 기다리던 그는
이 세상에 없어
커다란 뉘우침의 흰 꽃만
그의 영전에 바쳤네

편지를 쓰는 일은
쪼개진 심장을 드러내 놓고
부르는 노래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하여
때로는 편지를 써야 하리

四季의 바람과 햇빛을
가득히 담아
마음에 개켜 둔 이야기 꺼내
아주 짧게라도
편지를 써야 하리
살아 있는 동안은-

이해인-186쪽

바람 부는 날

또 한 번 천지는
흔들리누나

꽃잎은 펑펑
눈처럼 쏟아지고

고꾸라질 듯 고꾸라질 듯
내 영혼 흐느끼느니

알고 싶구나
愛人아

바람 부는 날은 그 마음에도
아픈 금이 그이는가.

-허영자-213쪽

봄 한나절

마음도 달뜨는
봄 한나절에는

쓴냉이 쓴물조차
짙어 스며오르고

초록 아래 진초록
겹쳐 피어나듯이

그리움 머언 그리움
울음처럼 복받쳐라.

-허영자-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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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현재까지 알려진 바 일곱 명의 여성을 살해, 암매장한 강호순의 뉴스가 연일 나온다. 현장검증을 나온 그는 모자 두 개나 쓰고 입까지 올라오는 점프로 얼굴은 거의 다 가렸다. 흉악범의 인권보호를 위해 얼굴을 가리는 것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피해자의 고통 보다 그 따위 흉악범의 인권이 대수냐며 얼굴을 공개하라는 분노가 거세어지면서 마침내 인터넷과 티비 뉴스에서 얼굴이 공개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법에는 사형제가 있지만 문민정부 이후 10년 이상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적으로는 사형제가 사라진 나라에 든다는 뉴스를 작년 연초에 들었다. 온 나라를 경악케 하는 이런 흉악범 뉴스가 보도되자 범죄자의 인권과 함께 흉악범에 대한 사형제 폐지에 대한 의견도 다시 논란거리로 들썩인다. 찬반은 여전히 갈리고 있다. 영화로도 나왔으며, 내가 가진 책 2007년 2월 5일에 이미 초판 161쇄를 찍어 낸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을 읽으며 사형제 존립과 폐지에 대해 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짐승보다 무섭고 잔인한 희대의 살인마들을 살려둘 가치가 있느냐는 사형제를 지지하는 쪽의 의견을  이 책 중에서 '서울구치소소장'이라는 사람이 대표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형제 폐지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중략)....저로서는, 좀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선 교도소 예산 문제가 생겨요. 사형수 일인당 일계호인데, 그럼 교도관들 더 늘려야 해요. 그 비용을 누가 다 감당합니까? 그리고 이건 극단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사건의 피해자들, 결국 자기네 세금 내서 자기네 가족 죽인 놈들 먹여살리란 말밖에 더 됩니까?"-p253
 
   

한편으론 일리는 있지만, 이렇게 다분히 이기적인 잣대로 과연 인간이 인간을 죽일 권리란 있는 것일까.  


소설로 민감하고 중대한 사안을 풀어 씀으로써, 죄 지은 것들은 무조건 죽여야 돼!,를 외치는 목소리 대신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케 하는 시도가 무척 좋았다. 그리고 공지영 작가의 미덕인 '쉽고, 빨려 들어가는 글쓰기'도 좋았다. 작가는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취재하고 탈고하기까지 숱한 밤을 새었겠지만 이 책을 들고 이삼일을 골머리 앓았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흡입력 있다. 나는 현학적이거나 화려한 문체보다는 쉽게 쓸 수 있는 재주가 더 비상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눈물 한 됫박씩 흘리는 최루성 장치가 눈물 마를만 하면 나타나곤 하기 때문에 책 다 읽고 나면 왠지 가슴이 후련해지는 소득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공지영 작가의 책을 읽으면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을 느낀다. 사건을 엮어나가는 얽개가 촘촘하지 못하다. 이 책에서 정윤수의 블루노트와 문유정의 이야기를 병행하는 구성은 신선했지만 이야기 구성은 영화도 못 보고 책 내용 소문도 전혀 들은 바 없는 나일지라도 이야기 초입에 벌써 어떻게 전개되고 절정- 위기- 결말의 코스를 밟을지 뻔히 보였다고 할까. 제발이지 나를 영악한 독자로 만들지 말란 말이다 ㅠㅠ  

 
소설마다 반드시 반전이 있으란 법은 없지만 틀에 박힌 듯, 진부한, 식상한...따위의 소감은 비록 내가 질금질금 눈물은 훔쳤지만 어쩔 수없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걸러지지 않은 편견도 마음에 안 든다. 종교에 대한 편견들. 사람마다 편견은 다 있다 치자. 그러면, 다 아우를 수 없다면, 최소한 작중 인물이라도 내세워 작가가 하는 그런 대사들이 작가의 편견만은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글쓰는 실력을 더 돋우든가 해야 할 것이다. (초베스트셀러 작가한테 이런 말 하면 나더러 미친X이라고 하겠지만)소설 쓰는 실력의 문제이거나 퇴고하는 시간이 턱없이 짧았거나의 문제다.

2009.2.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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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2-1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공지영 소설은 그래서 손이 잘 안 가는데
베스트셀러 작가란게 참 그래요.
전 이 작품을 영화로 봤어요.
책 읽어봐야 실망할거고 영화는 그나마 이나영이 좋아서 봤다고 해야하려나?
근데 그냥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었다뿐이지
내용도 별로 없더라구요.
사형반대라면 그만한 논리와 설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고.
이게 인정이나 눈물에 호소한다고 될 일은 아니잖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다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그나마 전 눈물도 안 나오고 허탈한 웃음 밖엔 안 나오더라구요.
그리고 영화가 대박인 허 참 거...

진주 2011-02-13 16:25   좋아요 0 | URL
이나영이 그 커다란 눈망울로 연기했다면 완전 최루탄이겠는걸요^^;
지난 번에 책 정리할 때 공지영의 책들도 다 보내려고 하다가 대중들이 그렇게나 사랑해마지 않는(그..그러니까..사랑하니까 많이 사본다는 전제 하에) 공지영의 작품인데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라도 읽어서 알아보자 싶어서 남겨뒀었죠. 그래서 공지영 책들을 읽는 게 올해 내 숙제인데...흠냐..숙제는 없었던 걸로..
옛날에 공지영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화가 나서 운전대 잡았다는 사실을 잊을 뻔 한 적이 가끔 있었어요. 그때 제가 공지영을 별로 안 좋아했던 건 문장력이니 글쓰기 실력의 문제라기 보다 사고방식이 저와 맞지 않다고 봐야겠죠...

 
도시농부 올빼미의 텃밭 가이드 - 텃밭 다섯 평을 오십 평처럼 써먹는 비법
유다경 글 그림 사진 / 시골생활(도솔)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 것도 모르고 8평 정도의 텃밭농사를 덤볐다가 실패한 재작년의 경험을 떠올리며 유다경 씨의 『 도시농부 올빼미의 텃밭 가이드』를 보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 호미 한 번 쥐어본 적 없다는 점과 첫 해 농사가 실패에 가까웠다는 점이 저자와 나의 공통점이라면 실패 이후 텃밭을 묵혀버렸던 나와 다르게 그녀는 실패한 것을 공부하고 극복하고 보완하여 다음 해에 또 도전하고 다시 도전하여 7년차 베테랑 텃밭지기가 되었다는 것은 차이점이다.   

 

책도 어찌나 재미나게 썼는지 손에서 책 놓기가 싫을 정도였다. 내가 한 해 동안 텃밭을 가꾸며 궁금했던 것과 몰라서 엉뚱하게 했던 부분들을 꼭꼭 찝어서 원인 따위를 설명해주고 자기가 체득한 노하우가 담긴 대책, 방법을 알려줘서 연신 '아하!' '오호라!'하며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냈다. 내용도 알차고 전직 방송작가답게 이런 종류의 책이 주는 건조함 대신 손수 그린 귀여운 삽화와 말랑말랑한 문장력도 좋았고, 내용에 꼭 필요한 현장의 사진까지 꼼꼼하게 실려있어서 놀랍다. 알고보니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어서 날마다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7년간의 블로그질 82.8기가의 방대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편집한 것이란다.    

 

보통 텃밭 가꾸는 것을 전업농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는 그 둘은 다른 존재라고 말한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전업농은 효과적으로 수익을 내기 위해 소품종 대량생산을 하지만 텃밭은 식탁을 풍성하게 꾸밀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가 맞고, 텃밭은 수확만 늘이는 것이 주목적으로 두지 않고 여가를 풍성하게, 몸과 마음의 수양도 겸할 수 있다. 여유롭게 취미로 텃밭을 가꾼다고 해서 가볍게 생각하면 약간 어려움이 올 것이다. 텃밭을 가꾸면서 내가 느낀 것은 '자연의 경이로움'인데 손바닥만한 텃밭에서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니 겪어본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씨를 뿌리고 싹이 돋는 것을 보는 긍정적인 경이로움과 장마 후 무서운 세력으로 뻗어나가는 잡초와의 한 판 승부는 뼈저리는 경이로움이다. 내가 텃밭에 두손두발 다 들고 물러났던 이유도 왕성한 번식력의 잡초 때문이다. 진작에 이 책을 탐독하고 텃밭을 시작했더라면 풀과 전쟁에서 내가 이겼을 텐데.  

 

농사 짓는 어르신께 물어봐도 그분들의 건성으로 해주시는 대답(물론 그분들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셔도 우리한테는 건성으로 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분들한테는 세부설명을 당연지사의 일이라 설명하지 않고 건너뛰는데 농사짓는 것을 본데없이 자란 왕초보 텃밭지기한테는 무슨 말인지 알수가없다)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적도 많고, 일일이 물어보기도 힘들다. 책이나 인터넷에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이 책 한 권이면 흙 고르기부터 시작해서 씨앗고르는 방법, 밭을 갈고 이랑과 두둑만드는 방법, 심을 작물의 계획짜기, 파종, 솎아주고 김매고 북주고 순지르며 작물 기르는 방법, 거름주기, 텃밭에서 기르는 각종 작물들의 재배법까지 꼭 필요한 정보들이 세세히 알려주는 친절한 네비게이션처럼 한 해 농사를 안내해준다. 더구나 농사 지은 것을 버리지 않고 말리고 장아찌 만드는 등의 갈무리 방법과 음식으로 만들어 식탁에 올리는 것까지 사진과 함께 설명해줘서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참 좋은 실용서이다. 20110212ㅌㅂㅊㅁ.

 올빼미화원 블로그 blog.naver.com/manwha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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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2-13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나오기 전부터 이분의 글을 종종 읽어오고 있었는데 책 나왔다는 것만 알고 아직 읽어보진 못했어요. 텃밭 가꾸기에 관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분의 사는 얘기도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책에는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진주 2011-02-13 16:31   좋아요 0 | URL
저만 몰랐지 꽤 유명한 분이신가보네요!
이 책도 텃밭 가꾸기에 대한 정보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살짝 살짝 비추는 그녀의 내면세계가 참 이뻤어요.

서두에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이렇게 써놨더라구요^^

홀로 있는 텃밭은 외롭다.
외로운 것이 좋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움직임 속에서
머리는 깨끗해지고 마음은 여백을 찾는다.
아무 잡념없는 무년무상의 경지에서
흙을 만지면서 한 시간 넘게 명상을 한다.
새소리, 바람소리, 풀잎소리뿐.
침묵의 세계에서 비로소 마음은 서서히 차오르고
땀에 젖은 몸과 함께 가득 찬 마음을 갖고
밭을 떠난다.

라로 2011-02-13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찾던 종류의 책인데 값이 만만치 않군요!! 일단 보관함에 넣어줘야겠어요,,,적립금 쌓이면 사야지,,^^;; 진주님은 아시는 책의 종류도 참 다양하셔요~.

진주 2011-02-13 16:34   좋아요 0 | URL
책이 굉장히 두꺼워요. 크기도 크고요. 저도 처음엔 가격 땜에 후덜덜했는데 농사를 짓기로 했다면 이 정도 투자는 손해는 아닐 듯 싶어요.

찾으면 길이 있다고, 제가 필요한 분야를 뒤베다 보니 이 책을 만났네요ㅎ


혜덕화 2011-02-1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부터 우리집 처사도 농사 지으러 주말엔 나갈거라는데,
이 책 사서 읽으라고 줘야겠어요.
정말 다양한 책을 읽으시는군요.^^

진주 2011-02-21 09:33   좋아요 0 | URL
부군께서 텃밭을 가꾸시겠다고 나선다니 저한테는 참 기묘한 풍경이군요! 우리집에서는 상상 못할 일이라서요. 남편이 시골 출신이라 텃밭 농사 걱정도 안 하고 시작했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일도 전혀 못하고 흙 만지는 거 끔찍하게 싫어하더만요.생전 처음하는 저보다 곡괭이질 더 못하고 말예요.남편은 9살까지만 시골에서 살아봐서 일 전혀 안 했다고 하는 걸 나중에 들었네요 ㅎㅎㅎㅎ

다양한 책을 읽는 건 정말 아닌데..ㅎㅎ
10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는 책도 있더라구요. 저는 3~4권의 다른 분야의 책은 섞어 읽으려고 노력할 뿐이예요. 너무 편협해지지 않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시도했는데 그것도 결국은 내 좋아하는 위주이다 보니 편협함에서 벗어니간 힘들군요. 정치, 경제, 과학, 추리소설류는 손도 못 대고요, 소설류 별로 안 좋아해요. 특히 일본소설 손이 안 가죠.
 
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소설은 몽매해집니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해서 끌고 나가는 그런 전략이 있어야만 내가 원하고자 하는 문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바다의 기별』「 회상」中 (p140~141)  
   

 김훈이 20대 초반에 처음 읽던『난중일기』가『칼의 노래』로 태어나는데 37년이 걸렸다고 한다. 오랜 세월 김훈의 독에서 곰삭혀 잘 익어 만들어진 『칼의 노래』를 '나'라는 독자는 그때 하룻밤 지새며 쥔 자리에서 다 읽었었다. 원래는 단박에 읽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가속도 붙어 저절로 읽혀나가는 숨을 어디쯤에서 끊어야 할지 몰라 내달린 끝에 이미 잠은 달아나 버렸고 정체 모를 전율을 내 속에 개켜 넣으며 희뿌윰한 새벽에 앉았었다.  

내가 정체 모르겠다고 했던 그 전율의 실체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이 이번 책 읽기의 소득이다. 에세이『바다의 기별』을 통해 칼의 노래를 포함한 여러 작품들을 집필하게 된 배경 뿐만 아니라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고달프리만큼의 진지함을 읽었다. '꽃은 피었다'가 '꽃이 피었다'로 고쳐지기까지 며칠의 시간과 담배 한 갑이 필요했다. 대단한 작가니까, 또 문학하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았으니까 입으로 글이 쏟아지듯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을녀(갑남을녀)의 생각은 빗나갔고 역시 글을 짓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런 작업임을 보았다. 

더우기 그는 아직도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글을 쓴다니 더욱 고될 수밖에.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나는 컴퓨터를 다룰 수가 없지만,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연필로 글을 쓸 때,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작동되는 내 몸의 힘이 원고지 위에 펼쳐지면서 문장은 하나씩 태어난다. 살아 있는 몸의 육체감, 육체의 현재성이 없이는 나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글은 육체가 아니지만, 글쓰기는 온전한 육체노동인 것이다. 『바다의 기별』「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中 (p110~111)  
   

나는 컴퓨터 워드기능을 전적으로 이용하는 부류이지만, 하루에 한 시간씩은 손으로 책 쓰기를 진행하고 있어서 '육체노동'이라는 표현에 공감한다. 필사본 성경을 가보로 물려주겠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꼬박 앉아서 글자를 쓰자니 무척이나 힘들다.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완필할 수 있을지, 자신 없다. 오른손 새끼손가락부터 어깨와 목줄기가 아프고 욕심을 더 내서 무리하게 쓰고나면 눈도 침침하고 골반이며 복사뼈까지 온 몸이 아파 벌렁 드러눕는다. 김훈이 쓰는 연필과 내가 사용하는 필기구의 차이도 있겠고 자신의 사유를 풀어내는 글쓰기와 (가능한)정확하게 베끼려는 작업에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손에 필기구를 잡고 종이에 글을 쓰는 작업은 녹록찮은 육체노동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육체노동도 행복으로 여기니 그는 천상 작가이다. 한 손으로 활을 쥐고 손으로 줄을 문질러서 소리를 뽑아내고 다른 한 손으로 줄을 통째로 쥐었다 폈다 눌렀다 풀었다 하면서 소리를 내는 해금연주에 매료되는 것도, '오치균이 손가락으로 물감을 으깰 때 재료가 육체와 섞이는 그 확실한 행복감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그림 그리는 화가의 작업에서 각별한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육체노동에 대한 동질성이 기저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몸을 던져 문지르는 작업이고 연필심이 닳듯이 그의 몸이 닳은 후에 가까스로 태어난 것이 작품이다.  

김훈의 소설을 읽을 때, '에세이가 더 근사하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의 소설에 성이 안 찬다고 말하기엔 내 역량이 부족할 뿐더러 작품도 많이 접하지 못한 조악한 처지이니 소설을 폄하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소설이란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하고 탄력있는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사건의 유기적인 배열' 즉 구성보다 사물의 내면 묘사라든가 문체에 더 마음이 끌렸던 건 사실이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벼루어 놓은 듯 단아하고 그러면서도 그의 사유는 담담하다. 내가 막연히 에세이를 기대하게 되었던 건 아마도 이 담담함 때문이 아닐까. 그의 나이 60, 귀가 열린다는 이순에 펴낸 이 에세이집은 더욱 담담하여 만추의 하늘같다. 나는 수필 읽기를 좋아하지만 쓰는 입장에선 수필만큼 어려운 갈래도 없을 것이다. 김훈의 작품은 시보다는 산문에 강하고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다의 기별』을 곁에 두고 자주 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20110208ㅎㅂㅁ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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