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소개합니다.

 

『돈키호테』는 흔히 '비교의 대상이 없는, 세계 최고의 장편소설'이라고 불리고 있지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지금껏 쓰여진 그토록 많은 소설들을 모조리 제치고 당당히 세계 최고의 소설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 걸까요?

 

그 이유들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가 몇몇 인물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면,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부터 가장 먼저 불러내야 마땅하지 싶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지요.

 

전 세계를 뒤집어 봐도 『돈키호테』보다 더 숭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소이다.

 

현대 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마담 보바리』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또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나는 『돈키호테』 속에서 나의 근원을 발견했소이다.

 

『대중의 반역』,『돈키호테 성찰』을 쓴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또 무슨 말을 남겼을까요?

 

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이지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인문학계의 찰스 다윈'으로 불린 르네 지라르는 더욱 자극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나 그 일부를 쓴 것이라고 말이지요. 밀란 쿤데라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지요. "모든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든 세르반테스의 자손들"이라고 말이지요.

 

예일대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강의하다 작년에 타계한 해럴드 블룸 또한 이 불후의 걸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남겨놓았습니다.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사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돈 키호테』에서는 끊이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손길이 닿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두 사람이 대화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척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 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돈키호테』는 실로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작품인데도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시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작품이 유발하는 '웃음'이 참으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몹시 특별합니다. 또다른 문학평론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돈키호테』는 아주 유머러스한 소설이다. 이 책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스페인의 펠리페 3세가 지방 순찰을 나갔다가 길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어떤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왕은 말했다. "저 남자는 미쳤거나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을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큰 소리로 웃고, 어떤 독자는 빙그레 웃고, 어떤 독자는 겉으로 웃고, 또 어떤 독자는 속으로 웃는다. 그리고 어떤 독자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기이한 감정 상태로 읽는다. 세르반테스의 유머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그렇습니다.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불리면서도 정작 이 작품이 유발하는 '웃음'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몹시 특별한 책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웃음 연구'의 권위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말을 살펴볼 필요도 있을 듯합니다.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이 공상과 망상의 정신이 추구한 웃음의 깊이는 얼마나 심오한가.˝
- 앙리 베르그송, 『웃음』중에서
 

 

그렇습니다. 중세에 유행했던 기사 소설에 미친 끝에 스스로 늙은 말 한 필을 이끌고 편력 기사가 되어 모험을 떠나고, 풍차를 거인으로 오해하고 달려들어 싸우다가 만신창이가 되는 등 온갖 기발한 모험을 끝없이 펼치는 이 용감무쌍하고도 초라한 몰골의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를 우리는 단순히 미치광이로만 취급할 수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조금 더 뒤에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이 걸작을 써낸 작가 세르반테스에 대해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이 소설을 쓴 세르반테스는 비록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대학 과정을 밟은 적도 없고, 『돈키호테』1부를 출판(1605년)한 58세 때까지 참으로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20대 초반에 그는 '스페인 법'을 어긴 일이 있었는데, 별로 중대하지도 않은 죄목으로 중벌에 처해지자 고향 마드리드를 떠나 이탈리아로 도망쳤고, 거기서 2년 동안 고위급 사제의 시종이자 수행원으로 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되지요.

 

그가 참전한 전쟁은 저 유명한 '레판토 해전'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투르크 군대와 용감무쌍하게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어 왼손을 잃게 되면서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지요. 그런 후에도 그는 5년 동안이나 더 군대에 몸을 담았습니다. 마침내 명예롭게 전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그는 그만 태풍에 휩쓸려 터키 해적의 습격을 받은 끝에 알제로 끌려가 그리스인 해적에게 양도되어 5년 동안이나 포로로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말지요. 포로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네 번의 탈출 시도가 모두 실패했지만 교회 수사의 도움으로 몸값을 치르고 극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전역 후 취직한 직장에서 맡은 일도 <무적함대>에 식량을 납입하고 조달하는 일이었다고 하지요. 그 일을 하면서도 그는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는 등 늘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돈키호테』를 구상한 것도 감옥에서였다고 하지요. 체납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던 50세 때 하필 징수한 돈을 예금해 둔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세비야에서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이토록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58세 때 내놓은 소설이 바로『돈키호테』였습니다. 1부의 원제목은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였지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68세 나이에 또다시 『돈키호테』 2부를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그 책의 원제목은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였지요.

 

그런데 어떤 작품이든지 전작이 빅히트를 치고 나서 그 다음에 후속편이 나오면 대개 그 후속편은 전작 만큼의 감동을 주기 어려운 게 일반상식이지요. 그렇지만 늘상 예외없는 법칙은 없듯이 『돈키호테』또한 그런 통념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불후의 걸작이 되었지요.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속편을 얼마나 훌륭하게 썼는지를 알게 되면 돈키호테의 전편만 읽고 소설 『돈키호테』를 다 읽었다고 말하는게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인지도 알게 됩니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여기서 잠시 (작가의 말도 들어볼겸) 소설 『돈키호테』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보지요. 

 

「그런데 혹시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 작가가 후속편을 약속하고 있소?」 

 

「그럼요.」삼손이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책이 나올 것인지 안 나올 것인지 우리도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이런 사정인 데다 <속편은 절대로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어서 후속편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들 생각하지요. 토성보다 목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돈키호테 같은 짓을 더 보여 다오. 돈키호테는 돌진하고 산초 판사는 말하라,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것으로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긴 하지만요.」

 

「작가는 어쩔 생각이라 하오?」

 

「그가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즉시, 다시 칭찬을 얻겠다는 뜻에서라기보다 그에 따를 이익 때문에 인쇄로 넘기겠지요.」

 

 - 『돈키호테 2』 <4. 산초 판사가 학사 삼손 카라스코의 의문을 풀어 주고 질문에 대답한 내용, 그리고 알아 두고 이야기할 만한 다른 일들에 대하여> 중에서

 

 작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2부를 얼마나 긴밀하고도 흥미롭게 1부와 서로 엮어 놓았는지를 알게 되면 독자들은 누구라도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돈키호테』의 이야기 속으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 볼까요? 우선,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도대체 왜 그토록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모험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스페인 라만차의 어느 마을에 사는 알론소 키하노라는 쉰을 넘긴 시골 노인네였습니다. 그는 이달고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기사도 소설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며 탐독을 하다가 그만 미치게 되어 스스로 편력기사를 자처하게 되지요. 그리고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바로잡고 약한 자들을 돕는다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모험에 나서게 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기사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돈키호테 데 라만차로 고치고, 이웃 마을의 촌부 알돈사를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의 공주이자 귀부인으로 격상시키고, 낡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비쩍 마른 말인 로시난테에 올라 길을 나서게 되지요.

 

첫 번째 출정에서는 객줏집 주인에게서 기사 서품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요. 기사로서 갖추어야 할 준비사항들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었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그는 어설픈 기사 흉내를 내다가 상인들에게 우롱 당하고 심한 매질을 당하게 되지요. 만신창이가 되어 땅바닥에 뒹구는 돈키호테를 발견한 이웃 사람이 겨우 구출하여 집으로 데려오게 됩니다. 이로써 사흘간의 첫 출정은 끝나지요.

 

돈키호테가 집에서 몸을 추스르는 사이에 참으로 안타까운 대참극이 하나 벌어집니다. '책' 때문에 '돈키호테 삼촌'이 너무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한 조카딸이 마을 신부에게 '서재 검열'을 요청했고, 그 검열에 참여한 신부와 이발사와 가정부와 조카딸이 주인장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책들을 '화형'에 처하고 사건이 벌어졌으니까요.

 

그 때 불길 속으로 사라진 책들이 과연 어떤 작품들이었는지, 그 눈물겨운 화형식이 얼마나 흥미롭게 진행되었는지만 살펴 보더라도 돈키호테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또한 작가 세르반테스가 얼마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는지를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지요. 아무튼 그 엄숙한 검열과 화형식에 관한 이야기는 무려 11쪽 분량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그 때 살아남은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마디스 데 가울라』였지요.

 

그 책은 스페인 기사 소설의 대표작인데,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도 포함될 정도로 걸작인 데다가, 소설 『돈키호테』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책이기도 하지요. 돈키호테는 바로 그 책을 전범으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요. 아무튼 그 때 화형식에 처해진 책들의 목록은 『장미의 이름』을 쓴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에도 등장할 만큼 무척 인상적입니다.

 

자신의 서재가 '엄숙한 검열'을 당한 끝에 애지중지하던 책들은 물론 서재까지 통째로 사라졌는데도 돈키호테는 태연스레 그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어떤 현자의 마법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조카딸의 대답에 응당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도리어 한 술 더 뜨는 반응까지 보이지요.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깨어나기 싫을 뿐 아니라, 일부러라도 그런 상황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을 정도였지요.

 

이렇게 해서 돈키호테가 다시 '편력 기사의 모험'을 떠나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하는데, 바로 여기서 '서양 문학의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하니 그가 바로 '산초 판사'이지요.

 

이 기간 동안 돈키호테는 이웃에 사는 착한 ㅡ 이러한 표현을 가난한 사람에게 붙일 수 있다면 말이다 ㅡ 그러나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한 농부에게 간청했다. 돈키호테의 간절한 부탁과 설득과 약속으로 결국 이 가엾은 자는 돈키호테의 종자가 되어 집을 나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돈키호테가 그에게 한 여러 가지 약속들 중 하나는, 만약 그가 기꺼이 자기를 따라나서 준다면 모험으로 아무리 못해도 어떤 섬을 얻게 되었을 때 그 섬을 다스리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약속에 끌려 산초 판사는 마누라와 자식을 버리고 자기 이웃의 종자가 될 것을 승낙했다.

 

그다음 돈키호테는 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팔고 어떤 것은 저당 잡히며 모든 것을 헐값에 처분하여 적지 않은 돈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친구에게 방패 하나를 빌리고 부서진 투구도 최대한 잘 손질했다. …… 모든 준비가 끝나자 산초 판사는 처자식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돈키호테는 가정부와 조카딸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어느 날 밤 아무도 모르게 그곳을 떠났다. 그날 밤 얼마나 걸었던지 새벽녘이 되었을 때에는 누가 그들을 찾아 뒤쫓아 온다 해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산초 판사는 자루와 술통을 당나귀에 매달고 그 위에 앉아서 주인이 약속한 섬의 통치자가 되리라는 강한 희망에 사로잡힌 채 족장처럼 우쭐대며 가고 있었다. 돈키호테는 처음 길을 떠났을 때의 그 방향과 그 길로 우연히 다시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바로 몬티엘 들판으로, 이번에는 지난 번보다 훨씬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아침나절이라 햇살이 비스듬하고 뜨겁지 않아 그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산초 판사가 주인에게 말했다.

 

「편력 기사 나리, 제게 약속한 섬 이야기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요. 아무리 큰 섬이라도 전 문제없이 다스릴 수 있거든요.

 

 - 『돈키호테 1』, <7. 우리의 착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두 번째로 집을 나서는 이야기>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와 모험을 함께 하는 동안 '섬 이야기'를 수백 번도 더 끄집어 내지요. 왜냐하면 그는 돈키호테와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그가 돈키호테와 함께 '편력 기사의 종자'로 따라다니며 온갖 곤욕을 다 치르면서도 결코 '동행'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오로지 '섬을 다스릴 부푼 희망'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돈키호테의 속편에서 (공작 부부의 농간에 의해) 진짜로 그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꿈이 헛되다는 걸 절감하고 도리어 '평범했던 옛날'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게 되지요.

 

주변 사람들이 한사코 만류하는데도 섬의 통치자에서 기어코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산초의 이야기가 더욱 재미있는 건, 애시당초에 작가가 돈키호테의 전편을 쓸 때만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작가의 구상에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지요. 『돈키호테 1』이 너무나 빅히트를 치는 바람에 돈키호테의 속편을 내세우는 짝퉁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자 세르반테스는 결국 『돈키호테 2』를 썼는데, 나중에 쓴 이야기가 어쩌면 그토록 긴밀하게 『돈키호테 1』과 호응하는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무튼 작가는 산초의 이야기를 통해 '능력 밖의 거창한 꿈'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고 허황된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지요.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와 함께 나선 '두 번째 모험'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소설『돈키호테』를 상징하는 <풍차 모험> 이지요. 풍차를 보자말자 대뜸 거인으로 오인하고 덤벼들었다가 로시난테와 함께 크게 다친 돈키호테는 산초의 '제발 정신 차리라'는 충고를 듣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지요. 두 사람은 도전하는 모험마다 거의 매번 만신창이가 되도록 부서지고 깨어지기만 할 뿐인데도 결코 모험을 멈추지 않지요. 그 어떤 터무니 없는 상황에서도 결코 현실을 잊지 않는 산초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겁 많고 순박하기 그지 없는 현실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지요. 그 반면 돈키호테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늘 집중하지요. 군사, 행정, 법, 자유, 평등, 인류애, 문학, 통치, 철학 등에 관한 돈키호테의 놀라운 견해들은 이상주의적인 휴머니스트로서 나무랄 데가 없지요. 이렇듯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온갖 문제들에 관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끝없는 충돌과 대화 속에는 그 어떤 훌륭한 금언집이나 속담집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유쾌한 해학이 가득 담겨 있지요.

 

돈키호테의 두 번째 모험은 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좌절되고, 돈키호테는 우리에 갇히고 소달구지에 실린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지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 번째 모험 이야기는 전편이 출판되고도 무려 10년이나 더 지난 1615년에서야 다시 이어지게 되지요.

 

그런데 속편 돈키호테가 전편 돈키호테보다 훨씬 더 뛰어나면서도 재미있는 까닭은 앞에서도 미리 말씀드렸듯이,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전편에서 겪은 일들이 이미 책으로 출판되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지요. 소위 현대문학에서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이미 돈키호테에서 진작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던 셈이지요. 돈키호테 1편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인 공작 부부가 주변 사람들과 미리 짜고 이 두 주인공을 골탕 먹이려고 '진짜 마법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얘기야말로 배꼽을 잡는 유머의 또다른 핵심이지요.

 

기사 신분의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속아 넘어가) 마법에 걸려 농사꾼 아낙네로 변모했다는 못 생긴 둘시네아 공주를 만나는 이야기, 산초 판사가 공작 부부의 농간으로 마침내 오랫동안 꿈꾸었던 섬의 통치자가 되어 훌륭한 통치술을 발휘하는 이야기, 자신을 편력 기사로 착각하는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끈질긴 추적에 나섰던 삼손 카라스코 학사가 <하얀 달의 기사>로 분장한 끝에 돈키호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편력 기사로서의 모험에 종지부를 찍게 만드는 이야기, 초라한 몰골로 집으로 되돌아온 돈키호테가 마침내 꿈을 잃은 자로서 우울증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그저 단순한 우스개 모험 소설을 뛰어 넘어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자극하지요.

 

특히, 마지막 임종을 앞둔 돈키호테에게 어서 일어나 편력 기사의 모험을 다시 떠나자며 오열하는 산초 판사의 모습을 보노라면, 돈키호테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용감한 모험들도 결국은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감정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무모하리만치 용감하게 모험을 떠났다가 실패로 귀결된 그 두 사람의 여정이야말로 자신들의 꿈을 행동으로 옮겼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산초 판사의 모습 속에는 어느덧 피동적으로 편력 기사의 모험에 마지 못해 따라 나섰던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었던 인물이 어느새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망상에 빠진 이상주의자였던 돈키호테에게 동화되고 감화된 나머지, 스스로가 주체적인 인물로 우뚝 성장해 돈키호테처럼 과감한 모험에 나설 채비가 갖춰진 성숙한 인간 유형도 엿볼 수 있지요.

 

작품 『돈키호테』는 오늘날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버금가는 탁월한 모험소설로 대접받고 있지요. 사람들은 늘 오뒷세우스나 돈키호테가 겪은 영웅적인 모험담을 마음 속으로 꿈꾸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인물 속에 머무르고 말지요. 또한 사람들은 누군가가 우리 대신 나서서 사회 도처에 만연한 불의를 돈키호테처럼 속시원히 용감하게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그 임무가 자신들한테 떠맡겨지는 건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회피하기에 급급하지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어찌보면 바로 그런 인간 내면에 도사린 기묘한 이중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지요. 많은 독자들이 『돈키호테』를 읽으며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기이한 감정 상태에 빠지는 이유 또한 우리들의 내면 상태가 끊임없이 그 두 인물 사이를 드나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키호테』가 마음의 모험담으로 읽히는 이유 또한 그런 까닭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으로 소설 『돈키호테』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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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9-14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러운 글 잘 읽고 갑니다^^

oren 2020-09-14 20:33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발자크의 대표작 『고리오 영감』을 소개합니다.

 

"나폴레옹이 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펜으로 정복하겠다." 이 말은 젊의 시절의 발자크가 나폴레옹의 초상화 밑에다 연필로 써 넣은 다짐이라고 하지요. 이런 결심에 걸맞게 그는 20여 년 동안 작품을 쓰고, 쓰고, 또 쓰다가 결국 51세에 과로로 죽고 말았다고 하지요. 그는 하루에 열네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을 일했다고 하는데, 20여 년 동안에 쓴 작품이 총 350권이 넘는다고 합니다.

 

발자크는 당대의 프랑스 사회에 대하여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 싶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내 머릿속에 19세기의 사회가 들어 있소"

 

1834년에 발자크가 한스카 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소설을 통해 완벽하게 그려내려는 큰 뜻을 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연애를 하느라 엄청난 정력을 소진했고, 별 사업수완도 없으면서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느라 굉장히 많은 빚을 진 채 평생을 경제적 압박 속에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돈 문제'에 특출난 관심을 보인 작가였습니다. 발자크 이전에는 그 어떤 작가들도 그처럼 돈의 세계를 잘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까지도 현대 경제경영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지요.

 

그는 경제적인 궁핍 때문에 '집필 환경'이 몹시 열악했지만 자신의 구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 희극』이라는 거대한 벽화 속에 「풍속 연구」,「철학적 연구」,「분석적 연구」라는 세 계열에 걸쳐서 무려 137편의 소설을 채우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당초의 계획을 완수하지는 못했으나 무려 91편에 달하는 작품들을 써냈습니다.

 

'한 세대의 살아 있는 벽화의 연속성'을 소설로 그려내고자 열망했던 작가는 마침내 '인물 재등장 기법'이라는 독창적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이 기법을 평생 동안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희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도대체 얼마쯤이나 될까요? 대략 2,000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세익스피어가 37편의 희곡 작품을 통해 대략 1,100명의 인물을 창작했다고 하는데 발자크는 그보다 한 술 더 뜬 셈이었지요. 그런데 애당초 발자크가 구상했던 인물은 무려 4,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 작가의 머리속이 어떻게 구성되었길래 그 많은 인물들을 창작하고 소설에 녹여낼 생각을 했는지 기가 막힐 정도이지요.

 

발자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인간 희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를 세다가 세월 다 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이 애쓴 결과만 보더라도 흥미롭습니다.

『인간 희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개 2,000여 명이 된다. 그 가운데에서 460명이 75편의 작품들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한편 75편 가운데에서 36편의 소설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또한 18편은 파리와 지방을, 21편은 파리를 완전히 벗어나서 지방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무대로 삼고 있다. 또한 460명 가운데 167명은 직업이 없다. 이들 중에서 55명은 귀족 출신이거나 신사이며, 62명은 귀족 출신의 부인들이고, 나머지 50명은 부르주아 출신 부인들이다. 다른 293명의 직업은 다양하다. 공무원, 법률가, 군인, 교회에 관계하는 사람, 사업가, 예술가 등이다.(400-401쪽)

 

프랑스 문학에서 발자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문학사가들의 관심사일 뿐 평범한 독자들한테까지 흥미로운 주제는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작가들로부터 실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그는 몇몇 저명한 작가들로부터 '엉터리 작가'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며, 프루스트와 같은 작가로부터는 심지어 프랑스어를 더럽힌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저질 작가'라는 오명을 씌운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살아 남았습니다.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미리 밝혔던 '나를 공평하게 평가하는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조국에서 홀대받은 그는 도리어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독일, 헝가리에서 훨씬 더 나은 평가와 존경을 받습니다. 발자크만큼 예리하고도 능숙하게, 객관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떠오르는 부르주아 사회'를 그려낸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줄곧 예술가적 신념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발가벗겨서 독자들에게 당차게 들이댔고, 그런 진실성과 역사성이 끊임없이 독자들을 매혹시켰습니다.

 

문학계의 나폴레옹이 되려고 했던 그는 어쨌든 '고상한 문학 풍조'에 반기를 들고 '혁명'을 꾀했으나 '황제'에 오를 만큼의 위엄과는 사뭇 동떨어진 인물이었습니다. 무한히 샘솟는 풍요로운 상상력 때문에 '작품의 구성이나 플롯의 정연한 전개'는 너무나 쉽게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였고, 지나치게 꾸며내고 과장하는 습관 탓에 '자제력'을 발휘하여 우아하고 재치있는 솜씨를 부려야 마땅할 장면에서도 허풍을 치고 속임수를 부린다는 점 때문에 '그는 남에게 학자나 철학가의 인상을 보이려고 하는 순간에 구역질나는 사기꾼이 된다'(플로베르)는 혹평까지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없었더라면 도대체 누가 당대의 사회를 구성했던 인물들을 그토록 익살맞고 재치있으면서도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낼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는 '소설을 쓴 셰익스피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묘사의 달인'이었습니다.

 

발자크는 작가 자신이 남들로부터 '연구 대상'이 될 만큼 흥미로운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글쓰는 일 말고도 수많은 사업을 벌였지만 판판이 망하고 큰 빚을 졌습니다. 그 때문에 평생 '돈 문제'에 시달렸지요.그는 '돈' 때문에라도 끊임없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열정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하게 살았던 작가도 드물었습니다. 걸출한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남긴 많은 평전 가운데서도 『발자크 평전』이 유독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 또한 그의 삶이 그만큼 특출난 때문이었습니다. 작가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고리오 영감』얘기로 넘어 가지요. 

 

『고리오 영감』은 '고전 작품'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돈키호테』를 읽을 때처럼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로 희극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이 소설의 주된 흥미는 '인생의 출구'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늙은 '고리오 영감'과 '인생의 입구'에서 점점 사회 한가운데로 깊숙하게 진입하는 전도유망한 '라스티냐크 학생' 사이의 선명한 대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과부 보케르가 운영하는 파리의 고급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하지요. 이들 말고도 그 하숙집엔 하숙인이 다섯이나 더 있습니다. 그들은 장차 어떤 식으로든 고리오 영감과 라스티냐크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하숙생들보다 훨씬 더 결정적으로 고리오 영감과 라스티냐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은 바로 고리오 영감이 애지중지 키워서 귀족사회로 편입시킨 두 딸이지요.

 

발자크는 이 소설을 쓸 때 '창작 노트'에 미리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하지요.

 

"의리 있는 사나이, 하숙집, 6백 프랑의 연금, 5만 프랑의 연금을 가진 딸들을 위해 스스로 한푼 없는 빈털터리가 된 남자, 개처럼 죽어가는 그 모습"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은 비교적 단촐하고, 장소 또한 파리의 어느 골목 하숙집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좁습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몹시 재미있으면서도 불멸의 고전으로 올라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건 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발자크 특유의 놀라운 입담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당시의 사회상'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 아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이지요. 특히 '돈 문제'에 관한 한 그만큼 생생하게 그려낼 작가는 찾기 어렵지요.

 

고리오 영감이 두 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퍼붓는 모습은 자못 감동적입니다. 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꼭 닮았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온갖 고생을 다 겪은 끝에 제면업자로 크게 성공해서 번 상당한 재산을 두 딸의 결혼지참금으로 다 쏟아 붓지요. 자신의 노후대책이라고 해봐야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연금이 고작이었습니다. 두 딸을 시집 보내고 아내와 사별한 그는 변변한 가구조차 없는 하숙방에서 생활하는 외롭고 불쌍한 노인입니다. 그런 그에게 화려한 몸치장을 한 젊은 귀부인이 가끔씩 몰래 드나들지요. 같은 하숙집에 사는 하숙생들은 그 노인네가 '돈'을 주고 그 여자들을 불러들인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야 밝혀지지만 그녀들은 파리 사교계에서도 알아주는 백작 부인과 은행가의 부인이자 영감의 사랑하는 두 딸이었습니다. 그녀들은 화려한 대저택에 살고 있지만 남편 말고 따로 사귀는 정부(情夫)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요. 딸들은 자신의 정부가 떠안은 거액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친정 아버지인 고리오 영감에게 끊임없이 손을 벌립니다. 영감은 그런 두 딸을 위해 은식기마저 우그러뜨려 내다팔아 돈을 보태주고 종신연금을 저당잡혀 도와주지요.

 

딸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희생하고 아낌없이 내주는 부성애(父性愛)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고리오 영감은 끝내 빈털털이 신세가 되어 '두 딸 조차 외면한 상태로' 쓸쓸하게 죽게 되지만 아주 잠깐 딸들을 원망할 뿐이지요. 두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 못지않게 감동적이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리어 왕은 자신의 권력과 영지를 아양 떠는 두 딸에게 내주고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막내딸 코델리아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매몰차게 대하지요. 그런데 막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두 딸은 이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내쫒지만 정작 막내딸 코델리아는 불쌍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두 딸에게 버림받아 황야에 버려지다시피 한 리어 왕은 일견 고리오 영감과 닮았습니다.

 

그러나 리어 왕의 비극이 막내딸 코델리아의 죽음에 이르러 절정과 동시에 파국에 이르렀다면, 고리오 영감은 스스로 아낌없이 두 딸들을 위해 도움을 주면서도, 그런 도움을 줄 능력이 고갈되는 걸 도리어 안타까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딸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워 한다는 점에서 리어 왕 보다는 훨씬 덜 비극적입니다. 그러나 두 딸들이 '파리 사교계'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났던 '익숙한 패턴'에 따라 '파멸'로 치닫는 동안, 고리오 영감의 삶 또한 서서히 막바지에 이르는데, 이 과정에서 두 딸이 끝내 아버지의 마지막 간절한 소원인 '죽기 전에 꼭 한 번' 두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을 끝끝내 외면한다는 점에서는 비정하기만 합니다.

 

백작 부인과 남작 부인인 두 딸이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인 '죽기 전에 꼭 한 번 봤으면'하는 희망조차도 외면한 이유 또한 너무나 사소하면서도 어이없는 이유들일 뿐이었습니다. 큰 딸은 정부(情夫)와 함께 저지른 대형 사고가 들통나는 바람에 남편으로부터 '외부인 접견 금지'를 당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딸은 자신의 크나큰 목표였던 '더 큰 사교모임'에 진출하기 위해 기필코 그날 밤 초대장을 받은 '무도회'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리오 영감과 두 딸과의 관계가 이 소설의 밑바닥을 흐르는 주조저음(主調低音)이라면, 시골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인 라스티냐크는 이제 막 인생의 출발점에 서서 꿈에 부풀어 '파리 생활'을 배우느라 몹시 바쁜 학생이라는 점에서 고리오 영감과는 사뭇 대조적인 울림을 줍니다. 시골에서 얼마 안 되는 밭뙈기를 붙이는 부모님이 보내 주는 빠듯한 돈으로는 보케르 아줌마에게 하숙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지요. 훗날의 '성공'을 위해 지금 당장은 밤을 새워서라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지만 '파리 사교계'의 화려한 모습을 슬쩍 엿보게 된 이 청년은 그만 마음이 세차게 흔들려 곧장 그리로 뛰어들고픈 충동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라스티냐크는 온갖 수소문을 다해 집안의 친척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파리의 부유한 주택가에 사는 먼 친척인 '자작 부인'에게 찾아가지요. 그는 대저택에 출입할 때 마땅히 타고 가야 할 '이륜 마차'는 커녕, 마부에게 줄 몇 푼 안 되는 '택시비'마저도 아껴야 할 형편입니다. 사교계에 드나들 때 갖춰야 할 맞춤복이나 구두나 장갑을 마련할 비용은 꿈도 꾸기 어려웠지요. 그래서 그는 고향의 부모님 앞으로 '눈물 겨운' 편지를 씁니다. 이유는 제발 묻지 마시고 최대한으로 돈을 마련해서 보내주시라고 말이지요. 나중에 기필코 성공해서 꼭 보답하겠다는 철석같은 약속을 덧붙이면서 말이지요.

 

마침내 어머니와 두 누이동생으로부터 쥐어짜낸 거금 1,550프랑이 그의 주머니에 미끄러져 떨어지자 그가 보인 반응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발자크의 천재적 재능은 바로 이런 곳에서 유감없이 빛나지요.

 

그의 내부에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즉 그는 모든 것을 원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제멋대로 모든 것을 갈망했다. 그는 쾌활하고 너그러우며 감정이 풍부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날개가 없던 새가 크게 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뼈다귀 하나를 훔쳐낸 개처럼, 돈 없는 이 학생은 한 가닥의 쾌락을 꽉 붙잡았다. ……

 

파리 전부가 그의 것이었다. 모든 게 빛나고 번쩍이며 이글거리면서 불타는 나이이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간에 젊은 사람 아니고는 아무도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힘이 넘쳐흐르는 나이!  빛과 격렬한 격정마저도 모든 기쁨을 열 배로 만들어줄 수 있는 나이! 센 강 왼쪽 언덕배기와 생 자크 거리로부터 생 페르 거리 사이를 지나다녀 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 파리 여성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사랑을 구걸하려고 달려올 텐데!> (133∼134쪽)

 

청년 라스티냐크가 '인생의 출발점'에서 겪는 고뇌와 방황은 시골에서 도회지로 '청운의 꿈'을 안고 진학했던 많은 일반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젊은 날의 초상'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읽었으니까요. 시골에서 한 해 동안 땀흘려 농사 지어서 버는 돈이라는 건 전세계 어디에서나 늘 액수가 빤하지요. 그런 사정을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4년간 등록금 전액 면제'를 받고 대학을 다녔어도 '비밀 과외'를 해서라도 하숙비를 보태야만 했지요. 그런데 촌놈이 대도시 서울에 올라와 보니 과연 서울은 거대하고도 휘황찬란했었습니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상경한 첫날 저녁에 대뜸 '명동'으로 '시내 구경'을 나갔는데 롯데쇼핑센터에서 번쩍거리는 휘황찬란한 불빛만 봐도 정신이 아득했고, 명동 일대의 고층 빌딩들을 쳐다보느라 고개를 한참이나 뒤로 젖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가끔씩 영화를 보러 시내의 개봉관을 찾을라치면 초대형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돌비 사운드 시스템에 넋이 나갈 정도였지요. 어쩌다 시내에서 직접 보게 된 여배우들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잠시 과외를 했던 중학생 녀석의 집도 마침 커다란 대문에 정원이 딸린 저택이었습니다. 아이를 가르칠 때마다 항상 귀한 과일을 내주시던 학생의 어머님은 TV 연속극에서나 봐왔던 사모님 같았었지요. 80년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그 집안이 아직도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재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소설 속의 또다른 주인공인 라스티냐크도 시골에서 상경하여 '파리 생활'을 익히느라 몹시 바빴습니다. 그가 머무는 하숙집엔 수백만 프랑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가능성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처녀인 빅토린 양도 있었지요. 그녀는 평소에 은근히 라스티냐크에게 호감어린 눈길을 자주 보내온 터였습니다. 보케르 아줌마네 하숙집에서 지내는 가장 독특한 인물인 보트랭이 어느 날 라스티냐크에게 '은밀한 거래'를 제안합니다. 빅토린 양이 '수백만 프랑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그녀의 오빠를 제거해 줄 테니 나중에 그녀와 결혼해서 갑부가 되고 나면 자신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었지요. 라스티냐크는 보트랭의 제안에 몹시 마음이 흔들리지만 용케 자신의 신념이나 도덕관념을 지켜내면서 보트랭의 제안에 굴복하지 않고 견뎌냅니다. 보트랭이 제안의 말미에 라스티냐크에게 '한 수' 가르치는 기분으로 들려주는 '세상 사는 이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인간이란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 어느 한쪽이지. 단 푸아레라고 불릴 때는 전무이지. 그런 놈은 빈대 새끼처럼 짓이겨 놓지. 그야말로 납작해져 냄새를 풍기겠지. 하지만 인간도 자네를 닮은 경우에는 하나님이지. 이젠 인간 가죽을 쓴 기계가 아니고 아름다운 감정이 약동하는 하나의 무대라네. 그리고 나는 그런 감정으로만 살고 있네. 하지만 감정은 사상 속에 있는 세계가 아닐까? 고리오 영감을 보게나. 그의 두 딸은 노인에게 우주 전체이지. 그녀들은 실이지. 그 실로 노인은 만물에 파고들 수가 있지. 자, 그런데, 인간을 깊이 파고들어 가본 내겐 단 하나의 현실적 감정만이 존재하네. 즉 남자와 남자 사이의 우정이지. 」

 

보트랭의 '인생 강의'는 여러 날에 걸쳐 라스티냐크를 계속 흔들어 댑니다. 파리에서 출세하는 법,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는 사정, 파리 사회를 이루는 계층 구조, 파리에 도사린 온갖 지옥 같은 함정들까지도 보트랭은 훤히 꿰고 있지요. 라스티냐크가 뛰어들고 싶은 백 가지 직업에서 재빨리 성공하는 사람이 열 명쯤 있다면 바로 그 사람들을 '도둑놈'으로 부른다는 말까지, 그의 강의는 참으로 친절한 데가 있었습니다.

 

이제 자네가 결론을 끌어내 보게! 인생이란 지금까지 얘기한 그대로야.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 …… 나는 세상을 알고 있네.(149쪽)

 

다시 고리오 영감 이야기로 되돌아 오지요. 두 딸을 아낌없이 도와주다가 끝내 완전한 빈털털이가 된 노인의 장례를 치를 인물은 이제 라스티냐크 밖에는 없었습니다. 고리오 영감은 일가친척도 없이 해가 질 무렵에서야 간신히 페르 라셰즈의 묘지에 안장되지요. 아주 헐값으로 사들인 극빈자용 관을 덮으려고 흙을 몇 삽 퍼서 던지던 두 명의 매장꾼이 라스티냐크에게 돈을 요구했지만, 학생의 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지요. 하숙집에서 영구차가 떠날 때부터 동행했던 사람이라고는 하숙집 심부름꾼인 크리스토프 밖에 없었지요. 라스티냐크는 그에게 일 프랑을 빌려 매장꾼에게 건네줍니다. 그는 너무나 슬퍼서 발작을 일으킬 정도가 되었지요. 그가 고리오 영감을 매장한 후 어둑어둑해진 묘지의 언덕에 올라 센 강의 두 기슭을 따라서 꾸불꾸불 누워 있는, 등불들이 빛나기 시작하는 파리를 내려다보면서 하는 말이 이 소설의 결말입니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제가 오래 전에 대학을 다니던 무렵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습니다. 1학년이었는지 2학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하여튼 이맘때처럼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시골 고향에서 낮에는 농사일을 거들고 밤에는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맘껏 술을 마시며 놀던 방학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상경하기 위해 하루 온종일 걸리는 버스를 탔었더랬지요.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눈을 떠 보니 어느새 거대한 도시가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한강을 따라 온갖 불빛들이 거대한 띠를 이루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시골 고향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저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몸을 고쳐 앉았습니다.

 

"여기가 바로 서울이군,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군."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그때 속으로 떠올린 혼잣말 속에는 분명 '서울과 나와의 대결'이라는 뜻도 아예 없지는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다가 그토록 오래 전에 제가 직접 경험했던 젊은 날의 희미한 기억과 풍경과 다짐들을 되살려낼 줄 그 누가 알았을까요.

 

이것으로 『고리오 영감』에 대한 작품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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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인 『황폐한 집』을 소개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이지요. 그런데 작가가 남긴 여러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가장 널리 읽히는 경우는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합니다. 당장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런 사정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토마스 만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의 대표작이 『마의 산』이라고 해서 토마스 만의 독자들이 그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으리라고 짐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이 훌륭한 소설이 찰스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덜 읽힌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가볍게 받아들여야 옳지 싶습니다. 비록 이 작품이 지닌 훌륭한 가치에 비해 독자들의 독서 열정이 지나칠 정도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좀처럼 떨치기 어렵더라도 말이지요.

 

찰스 디킨스의 주된 특징은 '유머와 위트와 재치와 긍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싶습니다. 문학의 역사에서 이런 특징이 극에 달했던 작가는 누가 뭐래도 셰익스피어였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찰스 디킨스는 자주 셰익스피어에 비견되지요.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셰익스피어가 넘치는 열정과 문재(文才)를 시로 마음껏 발산했다면, 소설가이면서도 배우에 대한 열정과 기질이 넘쳤던 디킨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샘솟는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풀어냈지요.

 

그가 『황폐한 집』에서 은연 중에 발설했던 다음 대화는 바로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으흠! 셰익스피어처럼 말씀을 잘하시는데요!"

 

심지어 그는 소설 속에서조차 시인처럼 '반복되는 후렴'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등장 인물의 대화 속이든 전경이나 배경 묘사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등 뒤로는 늘상 셰익스피어가 엿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며, 때로는 그 너머로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도 있습니다. 가령 『황폐한 집』에서 주인공 격인 에스더 서머슨 양이 마침내 자신의 생모로 밝혀진 데들록 부인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가 그렇습니다.  

 

"어머니, 이미 결심하셨나요?"

 

"결심했어. 난 지금까지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더하고, 자존심에 자존심을 더하고, 경멸에 경멸을 더하고, 자만에 자만을 더하고, 큰 허영에 더욱 큰 허영을 덧칠하며 살아왔어. 할 수 있다면 이 위기도 잘 극복해 죽을 때까지 무사할지도 몰라. 난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체스니 월드가 이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듯이. 하지만 난 언제까지나 그 안을 걸을 거야. 내가 걸을 길은 오직 하나, 단 하나밖에 없단다."

 

찰스 디킨스는 남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가 어릴 때 겪었던 감정인 부모에게 버림받아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절망감과 굴욕감은 그에게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비록 그 체험이 작가에게 기필코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과 향상심과 출세욕을 심어주긴 했지만 말이죠.

 

'이런 생각이 가져오는 비통함과 굴욕감이 내 성격 전체에 스며들어 버려서 나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칭송받고 행복해진 지금까지도 가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나는 내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겼다는 사실, 아니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홀로 외롭게 그 시절을 헤매다가 돌아온다.'

 

바로 이런 작가의 경험 때문에 그가 쓴 작품에는 유독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 『위대한 유산』의 핍,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데이비드, 『어려운 시절』의 루이자, 『황폐한 집』의 에스더 서머슨, 에이더 클레어, 리처드 카스톤, 부랑아 조 등이 대표적이지요.

 

몹시도 아픈 과거를 지닌 작가를 과거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킨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였습니다. 주인공이 세상에 막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어엿한 작가로 성공할 때까지의 온갖 삶의 기억들을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애환'을 가득 담아 그려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자전적 소설이야말로 작가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의 사랑하는 자식' 같은 작품이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야말로 작가를 끊임없이 붙들고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뚜렷이 결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대작인『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끝낸 작가는 곧이어 『황폐한 집』(1852∼1853)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 비판에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디킨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이보다 나중에 쓰여진 『어려운 시절』(1854년),  『리틀 도릿』(1855∼1857)과 『우리 서로의 친구』(1864∼1865) 등과 함께 묶여 '사회 비판'을 다룬 작품군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단연 뛰어난 작품이 바로 『황폐한 집』이지요.

 

사실 디킨스는 알고 보면 20대에 쓴 초기 작품인 『픽윅 페이퍼스』에서부터 일찌감치 '사회정의'를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였지요. 이러한 디킨스의 작품 경향으로부터 자못 강렬한 인상을 받은 버나드 쇼는 『리틀 도릿』에 대해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칼 마르크스는 『리틀 도릿』을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다고 하지요. 칼 마르크스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다시『황폐한 집』으로 되돌아 오지요.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얼핏 손에 빤히 잡히는 쉬운 주제들만을 다루지는 않지요. 디킨스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폐해가 개별 현상으로서 언급되고, 사회악의 책임이 특정한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반면,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황폐한 집』에서는 각종 사회 제도나 조직 자체가 사회악의 근원으로 다뤄집니다.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상류층에 대한 조롱과 풍자와 비난이 이 작품 곳곳에 담겨 있지만 그 방식이 대체로 모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건 마치 런던을 가득 덮고 있는 안개와 진창을 바라보는 것과 닮아 있지요. 

 

어디를 둘러봐도 안개다. 템스 강 상류에도 안개가 푸른 섬과 목장 사이를 흘러간다. 강 하류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에서는 수없이 정박한 배들 사이와 이 커다란(그리고 더러운) 도시의 지저분한 강기슭을 더러운 안개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지나간다. 에섹스 주 늪지 위도 안개요, 켄트 주 구릉 위도 안개다. 안개는 석탄을 운송하는 범선 상갑판 주방으로도 스멀스멀 들어 오고, 커다란 배 돛대 위에도 잠들어 있으며, 삭구 안을 돌아다니고, 거룻배도 작은 뱃전에도 웅숭그리고 있다. 그리니치 해군병원 병실 난로 옆에서 콜록거리는 노병의 눈과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공연히 성질난 선장이 비좁은 자기 방에서 피워대는 오후의 담뱃대와 재떨이에 기어들어 가고, 갑판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수습 선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매몰차게 꼬집는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난간 너머로 하늘에 낮게 깔린 안개를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도 안개가 자욱해서 이들은 마치 열기구에 올라타 구름 속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11∼12쪽)

 

안개가 가장 자욱하고 거리가 가장 진흙으로 범벅이 된 곳에 링컨 법조원의 대법관 법정이 자리잡고 있지요. 거기가 바로 소설의 주무대입니다. 해롭기 그지없는 늙은 무뢰한이나 다름없는 이 법정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길게 이어지지요.  

 

오늘 같은 오후에야말로 대법관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ㅡ이 법정에 자리 잡고 앉아 안개처럼 몽롱한 후광에 싸이고 하늘거리는 붉은 천과 커튼에 둘러싸인 채, 요란한 구레나룻을 기른 거구이면서도 목소리는 개미만 한 변호사의 끝없이 장황한 설명을 들으면서,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붕의 들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수십 명에 이르는 대법관 법정 판사들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듯이ㅡ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 중 수천 단계 째의 일에 막연히 매달리고, 막히기 쉬운 판례에서 서로 꼬투리를 잡고, 소소한 전문적 법률 사항에 무릎까지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산양 털이나 말 털로 만든 가발을 뒤집어쓰고는 그것으로 법률 조문의 벽을 깨부수겠다고 무모하게 머리를 갖다 박고, 연극배우 뺨치게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공명정대한 태도를 꾸며내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사건에 관계된 온갖 사무변호사는ㅡ그중에는 부모님 대부터 담당하던 일을 맡은 사람도 두서넛 있고 모두 그 사건으로 이미 부를 쌓았지만ㅡ서기 책상과 칙선변호사 비단 법복 사이에 놓인 매트 깔린 기다란 변호사석에 앉아(그러나 이 우물 바닥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저마다 눈 앞에 소장, 답변서, 재항변서, 제2답변서, 강제명령서, 선서진술서, 소송쟁점서, 법원 주사가 읽을 심사보고서, 법원 주사의 보고서, 그 밖의 온갖 값비싼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있어야 한다. 다 꺼져가는 촛불이 법정을 어두침침하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안에 낮게 깔린 안개가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버티는 것만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색유리가 끼워진 창문들이 색채를 잃고 대낮의 햇빛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의 문외한들이 입구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내부의 올빼미 같은 광경을 보고 또 천이 깔린 윗자리에서 천장까지 우울하게 울리는 멍청한 변설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윗자리에서는 대법관이 햇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들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가발 쓴 법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안개에 파묻혀 있다! 바로 여기가 대법관 법정이다. 이 법정을 위해 나라 곳곳에 다 쓰러져가는 집과 황폐한 땅이 존재한다. …… (12∼13쪽)

 

소설 『황폐한 집』의 <제1장_대법관 법정>은 오로지 '런던의 안개'와 그 가운데 자리잡은 '대법관 법정'을 묘사하는 데 온전히 할애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두 단락은 제1장 전체 분량에 비하면 고작 1/8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주' 부분이 자못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셈인데, 디킨스의 여느 작품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무게 와 깊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총 67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여러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대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술술 읽힌다는 평가'를 받는 디킨스의 여느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소설이지요. 음악에 비유하자면 제1주제와 제2주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부차 주제(題)들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여러 악장들 속에서 때로는 단조로, 때로는 장조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되고 전개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서로 낯설게만 들리는 여러 소소한 이야기들이 차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다가 나중에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장중한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내달릴 때에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에 휩싸이게 되지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런던 대법관 법정과 그 주변, 레스터 데들록 경과 데들록 부인이 살고 있는 링컨셔의 대저택, 잔다이스 씨가 살고 있는 '황폐한 집' 등입니다. 공간이 생각보다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의 방대한 규모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많습니다. 제1의 주인공은 에스더 서머슨 양이지요. 소설의 절반 정도는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두 장 혹은 세 장쯤 이어지고 나면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바꿔 두 장 혹은 세 장 정도 분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합니다.(이런 방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가 극대화된 작품으로는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작품에서는 매 장마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장의 제목으로 달려 있는데, 바로 그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나서서 이야기를 이끌지요. 윌리엄 포크너는 바로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 전개방식을 모방한 셈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에스더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어릴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대모의 손에서 자란 에스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채  '복종과 극기와 부지런함'을 강요받으며 자랍니다. 열네 살 때 대모마저 사망하면서 외톨이 신세가 된 에스더는 예기치 못한 후원자의 손길 덕분에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잔다이스 씨의 '황폐한 집'으로 이주해서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되고, 점차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되지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전개는 에스더 서머슨 양의 주변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맴돌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벌써 수십 년째 해결될 기미조차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거기에 더해 상류 사회를 대변하는 레스터 데들록 집안의 거대한 저택에 머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태집니다.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인물들은 대법관 법정 주변에 가장 많이 모여 있지요. 대서인, 문방구점 주인, 변호사, 하숙인 등등이 저마다 자기 직분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한참이나 읽어도 여전히 '안개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에스더 서머슨 양의 이야기가 이제 막 흥미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겠구나 싶으면 어김없이 거기서 이야기는 중단되고,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로 뒤바뀌고 마는데, 그들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을 때 끊임없이 '화자'가 뒤바뀌면서 '이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당혹감을 맛보는 경우와 몹시 닮았지요. 이런 수법이야말로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교묘한 이야기 전달 방식'의 핵심 장치이지요.

 

자욱한 안개 속에 휩싸인 사람은 자주 길을 잃게 마련이고, 여기 저기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에 적이 놀라기 마련입니다. 또한 안개 속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앞으로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지요. 『황폐한 집』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들이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장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새로운 배경과 인물들이 끝없이 펼쳐지기만 할 뿐 좀처럼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처음부터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어떤 인물들이 어떤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한참 후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그 사람이 불쑥 다시 나타났을 때 왜 그 사람이 거기서 다시 나타났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장치들이 잔뜩 숨겨져 있지요.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과 특징과 해당 쪽수를 함께 적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기나긴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마도 백 명 가까이는 될 듯한데, 나중에 이야기 전개가 차츰 '안개가 걷히듯'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때쯤이면,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거나, 혹은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에스더 서머슨 양과 데들록 부인 혹은 잔다이스 씨와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나지요.

 

에스더의 이야기와 전지적 작가의 이야기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끌다가 마침내 서로 맞닿는 지점은 언제쯤일까요. 그 해답을 찾을 때쯤이면 이 소설은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다가가 있을 테지요. '미모와 자존심과 야심과 교만한 고집'으로 똘똘뭉친 데들록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장' 딸랑 남기고 느닷없이 가출한 사실이 발견되고, 그 소식을 들은 잔다이스 씨가 한밤중에 에스더 서머슨 양을 깨우는 장면이 '마침내'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려 1,000쪽에 가까운 소설이 바로 여기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데, 이 극적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하기 위한 연결 다리는 866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됩니다.

 

『황폐한 집』을 읽고 나면 작가로서의 찰스 디킨스가 얼마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됩니다. 그가 꾸며내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놀랍고 초정밀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치밀하고도 교묘합니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여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그만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하게 되지요. 찰스 디킨스가 도스토옙스키의 스승으로 불리우고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디킨스는 오로지 소설만 쓴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할 주간지도 20년이나 계속해서 발행했고, 잡지에 게재되는 원고를 일일이 검토했고, 자신의 소설뿐만 아니라 잡지 기사도 직접 작성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 곳곳에서 열리는 강연과 사교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했습니다. 그가 남긴 편지만 하더라도 한 권이 700쪽이 넘는 스물두 권짜리로 간행되어 있다고 합니다.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을 보고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던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아직도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지요. 그가 20대 중반에 '불꽃처럼' 드높은 명성을 얻은 끝에 그 인기를 한평생 동안 누리게 만들어 주었던 출세작인 『픽윅 클럽 여행기』만 하더라도 올해 들어서야 겨우 번역되어 나왔으니까 말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버나드 쇼가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격찬했고, 그 자본론의 저자인 칼 마르크스가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던 <리틀 도릿>이나 <우리 서로의 친구>, <니콜라스 니클비>, <마틴 처즐위트>, <돔비와 아들> 같은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우리말 번역본을 찾기가 힘든 형편이지요. 사실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그의 대표작인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에 이르는 네 작품만 하더라도 다 읽기에도 벅찬 게 사실이지요.

 

마침 올해는 찰스 디킨스 사후 1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더군요. 소설계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이 탁월한 이야기꾼의 작품들이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게 번역되어 나오고, 그의 작품들을 찾는 독자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의 사후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그의 또다른 대표작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소개할 수 있기를 바라며 『황폐한 집』에 대한 작품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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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20-08-16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틀 도릿‘은 ‘작은 도릿‘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네 권짜리라 강의에서 다루기 어려운 게 흠이에요..

oren 2020-08-16 22:1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번역본을 뒤늦게 발견했더랬습니다.
로쟈 님 말씀마따나 네 권짜리라 정말 진입장벽이 높다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

 - 셰익스피어, 『햄릿』 중에서

 

 * * *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마음」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이지요. 그가 사망한지 벌써 100년도 더 지났지만 그의 명성이나 위상이 흔들린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작품은 중고생들의 교과서를 통해 세대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읽혀졌고, 그의 얼굴은 1,000엔 권 지폐를 가장 오랫동안 장식했습니다. 도대체 이 작가는 무슨 이유로 이토록 일본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을까요?

 

그는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문부성이 서양 문물을 직접 배워오도록 영국으로 파견한 국비 유학생의 원년 멤버였습니다. 비록 신경쇠약으로 중도에 귀국하기는 했지만 그때의 유학 경험은 작가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었지요. 나쓰메는 유학 시절에 이미 선진 문물을 모방하고 뒤따라가기 바쁜 조국의 모습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터였습니다. 그는 일본이 피상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나머지 서양에 대한 정신적인 예속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일본 학계는 그의 논설과 강연을 이내 '문명 비판'이라는 층위로 격상시켰고 그는 점차 국민적 지식인으로 떠올랐지요.

 

국민 작가라는 칭호는 자연스레 정치적인 이념과 결부되기 마련이었습니다. 민족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 혹은 국가적 신념과 결부된 나쓰메의 작품들은 차츰 '소세키 신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지요. 일본인들은 어느 공동체든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나쓰메의 문학 작품들 속에서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열도가 러일 전쟁의 승리에 한껏 들떠 있던 바로 그 즈음 처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년)로 뜻밖의 성공을 거둔 나쓰메는 그 직후 잇따라『도련님』과 『풀베개』 등을 써냈고,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 교수라는 명예로운 자리마저 가볍게 내던지고 《아사히 신문》에 소속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좀 더 원대한 포부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었지요. 창작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목표를 구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스스로 맹세했네. …… 단지 엄청나게 격변하는 요즈음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만큼 나의 감화를 받고, 내가 얼마만큼 사회적 존재가 되어 다음 세대 청년들의 삶과 피가 되어 존속할 수 있을지 부딪쳐 보고 싶다네.

 

한 자루의 붓을 들고 낡은 세상을 뜯어고치고 자신이 꿈꾸는 멋진 세상을 그려보고픈 당찬 포부가 그대로 묻어나는 이런 출사표야말로 나쓰메의 본심이었습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일본인들의 자의식을 일깨우고 그들로 하여금 서양 문명을 극복하도록 부단히 독려했습니다. 비록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이 총칼을 들고 서양과 직접적인 전쟁에 나선 적은 없었지만 문화 전쟁에서는 늘 그들에게 뒤처져 있다는 열패감이 그를 지배했고, 그는 문학을 통해서라도 서양에 대적할 정신적인 힘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1914년에 발표된 『마음』은 여러 다른 인기작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작품이지요. 왜냐하면 나쓰메 문학의 본령은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라는 상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고,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 특유의 시대적 불안과 문화적 소외감이 등장 인물들을 통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작가가 이상화하고 싶었던 인물들의 성격적 특징들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이상적인 성격적 특질들을 『마음』을 바탕으로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꾸준히 용맹 정진하고, 추호도 비겁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금욕적이면서도 도의적이고, 향상심을 잃지 않고 맹진하는 인간 유형. 이런 유형은 작중 인물인 '선생님'을 통해 자신의 더 나은 미래를 암중 모색하는 '나'에게서는 아직까지 쉽사리 발견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도 성격과 자질은 충분히 갖춰졌지만 여전히 실현되지는 못합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언제나 선생님보다 앞서 있었지만 끝내 '사랑 때문에' 자결로 생을 마감한 K의 경우가 바로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격적 특질들을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K의 안타까운 죽음이 선생님의 삶을 끊임없이 압박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로 보여집니다. 작가가 『마음』을 통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부단히 일깨우고 호소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두 사람의 '참을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에 있었던 듯싶습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쓰고 본명을 밝히지는 않겠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의식해서 삼간다기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글을 쓸 때도 그런 마음은 같다. 어색한 이니셜 따위는 도무지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16쪽)

 

이렇게 시작되는 『마음』의 전체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화자인 '나'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는 생기발랄한 학생입니다. '나'는 여름방학때 친구들과 함께 놀러간 가마쿠라의 해수욕장에서 우연히 어떤 중년 남자를 알게 되지요. 그저 막연한 호기심 때문에 그를 관찰하던 나는 며칠 후부터 그와 함께 해수욕을 즐길 정도로 가까워집니다. '나'는 나중에 도쿄에 돌아와서도 선생님 댁을 다시 찾게 되지요.

 

선생님은 이렇다할 직업도 없이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도쿄의 주택가에서 조용하고 단촐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대체로 비사교적인 데다가 사람들에게 냉담한 편이지요. 그의 일상에서 주목할 만한 유일한 특징이 하나 있다면 매달 어김없이 정해진 날짜에 조시가야 묘지에 성묘를 간다는 점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그 묘지의 주인공을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소설속 주인공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오는 것조차 거북해 하지요.

 

선생님은 처음부터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 가엾은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경고를 보냈던 것이다. 남이 반가워하는 것에 응하지 않는 선생님은 남을 경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경멸한 것 같다.(24∼25쪽)

 

선생님의 마음은 도무지 오리무중입니다. '나'는 선생님의 부인으로부터 '학생이었을 때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왜 지금과 같은 성격으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대학생일 때 겪었던 친한 친구의 갑작스런 변사가 한 원인이 아닐까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이지요.

 

주인공인 '나'는 도쿄에서 학업을 마치고 잠시 고향에서 지내기 위해 낙향합니다. 더군다나 아버님은 최근에 신장병으로 쓰러진 적이 있는데 병세가 위중했습니다. 병환 중에도 아버지는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아주 꼼꼼히 읽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메이지 천황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아버지의 병세도 갑자기 악화됩니다.

 

그 무렵 신문은 사실 시골 사람들이 날마다 기다릴 만한 기사로 가득했다. 나는 아버지 머리맡에 앉아 꼼꼼하게 읽었다, 읽을 시간이 없을 때는 슬쩍 내 방으로 가져와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나는 군복을 입은 노기 대장과 궁녀 같은 차림을 한 부인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132쪽)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멀리 타향에 나가 있는 형과 매형이 불려오고, 하루하루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어느날 선생님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습니다. 양복 입은 사람만 봐도 개가 짖는 곳에서는 전보 한 통조차 대사건이었지요. 전보에는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올 수 없겠느냐고 간단히 쓰여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부탁에 응할 수 없다는 상세한 설명을 담은 긴 편지를 보내지만 그 후로 별다른 답장을 받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병환이 마지막 일격을 앞둔 시점에 뜻밖에도 선생님으로부터 매우 두툼한 편지가 등기로 배달됩니다. 그 편지에는 뜻밖에도 자신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장이 들어있었지요. 주인공은 만사를 제쳐두고 황급히 도쿄행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품안에서 다시 꺼내 찬찬히 읽기 시작한 편지는 결국 '선생님의 유서'였지요. 거기엔 자신의 지나온 과거가 소상히 담겨 있었지요.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왜 지금에서야 죽기로 결심했는지 하나도 숨김없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수천만 명이나 되는 일본인 중에 오직 자네에게만 내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네. 자네는 진실하니까, 자네는 진실하게 인생 자체에서 살아 있는 교훈을 얻고 싶다고 했으니까.

 

나는 어두운 인간 세상의 모습을 기탄없이 자네에게 보여주겠네.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되네. 어두운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그 안에서 자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붙잡게. 내가 어둡다고 한 것은 물론 윤리적으로 어둡다는 것이야.(151쪽)

 

 

편지 내용은 길게 이어집니다. 선생님은 스무살도 안 되어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부모를 잃고 나서 한동안 숙부가 자신을 살뜰하게 보살펴 주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야 도리어 숙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인간 부류를 통째로 불신하게 되지요.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한 그는 고향을 영영 떠나 홀로 도쿄에서 대학을 다닙니다. 적당한 하숙집을 물색하던 그는 청일전쟁때 전사한 남편 때문에 마땅한 수입이 없던 아주머니의 집으로 들어가지요. 그 집에는 학교에 다니던 하숙집 아주머니의 외동딸과 하녀까지, 여자 셋이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다다미 여덟 장이 깔린 널찍한 하숙방으로 이사한 뒤로 조금도 불편한 점 없이 학교에 다니던 그는 이내 한 집안 식구처럼 그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주인 아주머니와 아가씨와도 곧잘 차를 함께 마시며 담소를 나눌 정도가 되면서 선생님은 차츰 하숙집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지요. 그런데 하필 그 무렵 그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을 중대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같은 고향 출신이자 같은 대학에 다니던 K라는 친구가 부모와 갈등 끝에 의절하다시피 하면서 오갈데 없는 처지로 내몰리자 그 친구를 하숙집으로 데려온 것이지요. 그게 바로 운명적인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남몰래 아주머니의 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가 어느새 아주머니로부터 자신의 딸을 '빨리 치워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들었던 그로서는 K가 자신의 연애 경쟁 상대가 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K는 태생부터 스님의 아들이었던 데다가 보통의 승려보다 훨씬 승려다운 성격을 지녔고, 스스로도 장차 종교적인 방면이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려는 고상한 인품을 지닌 친구였으니까요.

 

K는 악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끊임없이 정진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머리속엔 온통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과묵하면서도 사교에 서투른 그런 친구를 보다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바로 그의 친구였고, 하숙집 아주머니와 아가씨였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는 전혀 엉뚱한 데서 문제를 일으키지요. 선생님의 눈에 비친 K의 행동들은 차츰 의심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제 영락없이 오셀로의 처지로 내몰리지요. 질투심에 사로잡혀 결백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그 오셀로 말입니다. 다음 대목만 읽으면 인간의 정념 중에서 가장 지독하다는 질투심이 이제 막 독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눈앞에서 선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어느 날 나는 간다에 볼일이 있어 귀가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늦어졌다네. 잰걸음으로 대문 앞까지 와서 격자문을 드르륵 열었지. 그와 동시에 나는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었네. 목소리는 분명히 K의 방에서 들리는 것 같았지. …… 나는 들어와 바로 격자문을 닫았네. 그러자 아가씨의 소리도 금방 그치더군. 나는 그때부터 하이칼라여서 벗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상화를 신고 있었는데, 내가 허리를 굽히고 구두끈을 푸는 동안 K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군.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지.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평소처럼 K의 방을 지나가려고 장지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 두 사람이 앉아 있더군. K는 여느 때처럼 이제 오나, 라고 말했지. 아가씨도 앉은 채 "오셨어요?" 하고 인사하더군.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그 간단한 인사가 내게는 좀 딱딱하게 들렸네. 내 고막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어조로 울렸지.(205쪽)

 

이때부터 급작스럽게 조성된 선생님과 K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는 늦여름에서 이듬해 봄에 이르기까지 숨막힐 정도로 길게 이어집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지요. 의심은 의심을 낳고 한번 불타오르기 시작한 질투심은 꺼질 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무턱대고 K를 추궁할 수도, 그와 담판을 벌일 수도 없었지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친구에게 털어놓거나 아주머니에게 고백하고도 싶지만 끝내 결행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날엔가 K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하숙집의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는 얘기였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숙집 안주인과 아가씨에게까지 직접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상황이 진척된 게 아니라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연인을 한순간에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선생님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K를 경계하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그가 아가씨를 포기하도록 잔인한 말까지도 서슴치 않지요. "정신적으로 향상심이 없는 인간은 쓰레기다."라는 K의 평소 지론까지 곁들이며서 말이지요.

 

교묘한 방법으로 K를 궁지로 몰던 선생님은 마침내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칠 계획에 착수합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요청하지요. 아주머니도 시원스럽게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합니다. 당사자의 의견은 확인할 필요도 없다면서.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K는 자신의 방에서 자살하고 말지요. 그가 친구에게 남긴 유서에는 아가씨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단지 "의지와 실천력이 박약해서 도저히 살아갈 희망이 없다'는 고백만 있었을 뿐이고, 친구에게는 도리어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준 후의에 감사를 표한다는 내용까지 덧붙이고 있었지요.

 

사건은 원만하게 수습되지만, 자신의 비열한 행동 때문에 친구가 세상을 등졌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힌 선생님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친구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밝히지 못합니다. K의 자살에 대해서라면 그 어떤 내막조차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하숙집 아가씨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선생님과 결혼하지요. 결혼 이후 아내와 함께 할 때마다 언제나 그 두 사람 사이에 K의 죽음이 개입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선생님은 뿌리 깊은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결혼할 때 아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둘이서 K의 묘에 다녀오자는 말을 꺼내더군. 나는 까닭도 없이 그저 가슴이 철렁했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냐고 물었지. 아내는 둘이서 묘를 찾아가면 K가 무척 기뻐할 거라고 하더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는데 왜 그런 얼굴을 하느냐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지.

 

아내가 바란 대로 둘이서 조시가야에 갔네. 나는 K의 새 묘석에 물을 끼얹어 깨끗하게 씻어주었지. 아내는 묘 앞에 향을 피우고 꽃을 꽂았지.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합장을 했네. 아내는 필시 나와 결혼한 전말을 알리면 K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나는 속으로 그저 내가 잘못했다고 되풀이할 뿐이었네.(262쪽)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건 그저 외관에 그칠 뿐이고,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매달 한 번씩 친구의 묘소를 찾을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한편 숙부로부터 당한 배신감 때문에 인간들을 경멸했던 자신이 바로 그런 경멸의 대상이 된 점을 깨닫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런 불행한 삶을 하루하루 이어오던 그는 메이지 천황의 병사 소식과 노기 장군의 순사(殉死) 보도를 접하고 마침내 자신도 죽기로 결심하지요. 그가 낙향해 있는 '나'에게 전보를 보낸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네. 그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천황으로 시작되어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군. 메이지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우리가 그 후에 살아남는 건 결국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내 가슴을 쳤네. 나는 분명히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지. 아내는 웃으며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갑자기 나에게 그럼 순사라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놀리더군.(271쪽)

 

나쓰메의 소설에 깊이 매료된 일본 독자들은 아마도 이런 대목에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공감과 감동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역사 의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정반대의 묘한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앞서 등장했던 '나'의 아버지도 병환 중에 들려온 천황의 붕어 소식에 충격을 받고 급작스레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 무렵에 배달된 선생님의 편지 속 내용에서 그런 모습이 거듭 반복되기 때문이지요. 기억의 밑바닥에서 가라앉은 채 썩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순사(殉死)라는 말이 선생님과 강하게 결부된 모습은 다음 대목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지났지. 천황의 장례식이 치러진 날 밤 나는 여느 때처럼 서재에 앉아 예포 소리를 들었네. 나에게는 그것이 메이지 시대가 영원히 사라졌음을 알리는 소리로 들렸지. 나중에 생각하니 노기 대장이 영원히 떠난 것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네. 나는 호외를 들고 무심코 아내에게 순사다, 순사다, 하고 말했지.

 

나는 신문에서 노기 대장이 죽기 전에 써서 남긴 글을 읽었네. 세이난 전쟁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이래 사죄하기 위해 죽자, 죽자, 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의미의 구절을 보았을 때 나는 무심코 손가락을 꼽아 노기 씨가 죽을 각오로 살아온 세월을 헤아려 보았지. 세이난 전쟁은 1877년에 일어났으니 1912년까지 35년의 거리가 있네. 노기 씨는 그 35년간 죽자, 죽자, 하면서 죽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야. 나는 그런 사람에게 그때까지 살아온 35년이 고통스러울지, 아니면 칼로 배를 찌른 한순간이 더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했네.(272∼273쪽)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선생님은 죽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일이 '인간을 아는 일'에 헛수고는 아닐 거라며, 모든 것을 자네 가슴에 묻어두라는 부탁을 끝으로 편지를 맺지요.

 

이 작품은 독자에 따라 읽는 방법이 다양할 수 있지만, 대체로 '선생님'과 'K'라는 두 젊은이의 내면에 자리잡은 이기심과 윤리 의식 사이의 맹렬한 투쟁, 그리고 친구의 죽음으로 빚어진 뿌리깊은 죄의식이 압권인 소설입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사이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삼각관계에서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책략들을 동원하는 일은 자연스런 현상이지요. 또한 경쟁자가 있든 없든, 그 과정이 조용하거나 떠들썩하거나 관계없이, 구애 과정은 언제나 자연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렬한 본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런 싸움에서 돌연 패배한 친구의 급작스런 자살이 행복을 구가해야 마땅할 나머지 두 사람마저 끝내 비극으로 몰아간다는 이야기는 너무 암울하지요.

 

그런데, 소설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부분에 등장하는 천황의 죽음과 노기 대장의 순사 이야기는 너무 낡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봉건적 군신 관계를 상징하는 '순사' 풍습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아버지와 '선생님'의 자살 동기에 동시에 드리워져 있지요. K의 죽음만 순수할 뿐 나머지 두 사람의 죽음엔 마치 충군애국의 이념이나 명예를 위한 자기희생의 색깔이 너무 짙게 채색된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천황과 선생님과 아버지의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는 생각이야말로 군사부 일체라는 케케묵은 충효사상의 재현일 테니까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마음』은 정진, 자활, 맹진, 금욕, 도의, 향상심 등으로 대표되는 K의 덕목들을 적잖이 강조합니다. 그는 그토록 권장할 만한 훌륭한 성품들을 두루 지녔으면서도 끝내 실연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도 의연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지요. 선생님 또한 자신의 삶에 그 어떤 오점 하나라도 남길 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로 자신의 비겁함과 죄과를 참회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들을 주목해서 살펴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나쓰메는 메이지 천황의 죽음 이후에 쓴 『마음』을 통해서 비로소 오래 전부터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마음 속의 다짐 일부를 마침내 실현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다음 세대 청년들의 삶과 피가 되어 존속할 수 있을지 부딪쳐 보겠노라'던 그 다짐 말입니다.

 

이것으로 마음에 대한 작품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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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8-09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마음이 이렇게 번역본이 많은 줄 몰랐어요.
이게 영화로도 만들어졌군요.
또 이걸 어떻게 편집하셨습니까?
영화와 함께 오렌님 얘기 들으니 좋으네요.^^

근데 오렌님은 알라딘 TV에 올리지 않으시나봐요.
알라딘 TV에서 못 보겠던데...
제가 못 찾는 걸까요?

oren 2020-08-09 18:22   좋아요 2 | URL
<마음>의 번역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저는 판매량 상위 12개 판본만 링크해 둔 것이고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일본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지금까지 팔린 책의 부수가 1,700만 부라고 들었어요.
아마도 나쓰메의 모든 작품들이 지금껏 팔린 부수는 수억 부에 이를 듯해요.
나쓰메 또한 워낙에 다작 작가이니까 말이죠.

알라딘 TV에 영상을 올리시는 분들은 아마도 자기 고유의 채널이 없어서
알라딘 TV라는 채널에 얹혀 사는, 쉽게 말하자면 ‘임차인‘ 비슷한 셈이지요.
저야 제 채널이 버젓이 있는데,
굳이 남의 집이나 마찬가지인 알라딘 TV에 제 영상을 올릴 까닭이 없지요.
유튜브에서는 자기 자신의 채널을 만드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고,
채널 성격에 따라 한 사람이 여러 브랜드 채널을 개설할 수도 있답니다.

2020-08-14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6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지 오웰의 대표작인 『1984』를 소개합니다.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완성한 『1984』는 너무나 정치색이 짙은 소설이어서 일반적인 문학 작품과는 사뭇 동떨어진 느낌을 줍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의도한 정치적 신념이 예술적 목적을 압도한다고나 할까요? 『1984』는 그만큼 암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우리가 이미 지나온 바 있는 '1984년의 세계'에 대해 얼마쯤 안도해도 좋을 만큼 디스토피아적입니다.

 

조지 오웰은 영국이 지배하던 식민지 인도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창 시절 영국의 이튼 스쿨을 다녔으나, 졸업 후에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버마로 건너가 경찰에서 5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는 '버마 시절'을 겪으며 영국의 식민 지배 가치관을 거부했으며,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 혹은 사회주의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는 1930년대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에도 공화파로 참전했는데, 그 때의 경험으로 그는 '전체주의 정치사상'에 대하여 깊은 혐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1945년에 발표한 『동물농장』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일약 유명해진 터였습니다. 그보다 4년 뒤에 발표한 『1984』는 앞선 작품보다 훨씬 더 나아갔습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일상이 낱낱이 감시되고, 사상 경찰에 의해 생각할 수 있는 자유마저 통제됩니다.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인 오세아니아에선 심지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욕마저 통제합니다. 체제에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구금되고, 가혹한 고문을 거쳐 결국 사회에서 '증발'되고 말지요.

 

소설 『1984』에서 그려진 암울한 모습들은 과거에 일당 독재와 비밀 경찰을 통해 끔찍한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많은 공산권 국가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구 소련, 동독, 동유럽 공산 국가들과 구 소련 연방을 이뤘던 여러 공산국가들이 대표적이지요. 구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1984』에 그려진 암울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 국가요, 3대에 걸쳐 절대 권력이 세습되고 잔학한 통치가 이뤄지는 북한입니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이 어쩌면 이토록 오늘날의 북한의 모습과 쏙 빼닮았는지 경이로울 지경이지요.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외부 당원입니다. 서른 아홉 살인 그는 1930년경에 지어진 승리 맨션 7층에 홀로 살고 있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어디에든 거대한 컬러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복도 한쪽 끝 벽에도 걸려 있고, 엘리베이터 맞은편 벽에도 붙어 있습니다. 포스터에서는 언제나 커다란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지요.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글과 함께 말이지요. 또한 윈스턴이 생활하는 곳곳엔 어디서나 '텔레스크린'이 그를 감시합니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수행합니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하지요. 

 

소설의 배경인 1984년의 런던은 전체주의 초국가인 오세아니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윈스턴은 300미터나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웅장한 건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의 일터는 진리부였습니다. 그 건물의 전면에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우아한 필체로 쓰여 있었지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런던에는 외형과 규모가 진리부와 비슷한 건물이 세 동이나 더 있었고, 이 건물들에는 모든 정부기관이 들어 있었습니다. 보도 · 연예 · 교육 및 예술을 관장하는 진리부(眞理部),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부(平和部),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愛情部),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풍요부(豊饒部)가 그것이었지요. 이 이름들은 신어로 각각 '진부', '평부', '애부', '풍부'라고 불렀는데, 가장 끔찍한 곳은 허울좋은 명칭이 붙은 애정부였습니다. 

 

윈스턴이 텔레스크린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사각지대에서 시도하는 최초의 반항은 '일기'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일기 쓰기는 불법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발각될 경우 사형 아니면 적어도 강제노동 25년 형의 선고를 받을 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단력이 필요한 중대 행위'였으니까요. 그가 서툴게 쓴 글씨는 '1984년 4월 4일'이었습니다. 일기 쓰기를 통해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체제에 맞설 수 있는 방법과 행동들을 탐색하기 시작하지요. 

 

윈스턴은 진리부의 기록국에서 일하고 있지요. 정정이 필요한 논문이나 뉴스 기사들을 수정해서 '과거를 날조'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습니다. 정정된 기사들을 바탕으로 신문을 다시 인쇄하고, 원래의 신문을 폐기하고 정정된 기사가 실린 새 신문을 신문철에 꽂습니다. 이같은 과정은 신문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 정기간행물, 팸플릿, 포스터, 전단, 영화, 녹음테이프, 만화, 사진 등 그 모든 것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근무시간 도중에도 틈틈이 '이 분 증오(Two Minutes Hate)'를 통해 체제 전복을 도모했던 반역자인 골드스타인을 향해 극도의 집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출함으로써 '체제 수호'를 위한 정신 교육에 동원됩니다. 반역자들에 대한 증오가 절정에 달할 때면 으레 빅 브라더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나지요. 그들 가운데 누군가 "나의 구세주여!'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기록국 사무실에서 진행된 '이 분 증오' 활동 시간에 윈스턴이 만난 인상적인 사람이 둘 있었습니다. 복도를 오가며 자주 얼굴을 마주친 여자는 창작국에서 근무하는 스물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습니다. 윈스턴은 행동이 민첩하고 대담해 보이는 그녀가 처음부터 싫었습니다. 윈스턴은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싫어했지요. '고집스럽게 당에 충성하는 사람들, 슬로건을 곧이곧대로 신봉하는 사람들, 아마추어 스파이들, 이단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여자들, 그것도 젊은 여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오브라이언'이라는 내부 당원이었습니다. 뭔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은밀한 직위에 있는 남자였지요. 그가 오브라이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정치적인 신조가 불완전하리라는 은밀한 믿음, 아니 단순히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텔레스크린이 없는 데서' 단 둘이 만날 수만 있다면, 한번쯤 말을 걸어봄직한 사람이었지요.

 

윈스턴은 그날 오전 중에 있었던 '이 분 증오' 시간에 일어났던 여러 풍경들을 떠올리면서도 무의식중에 계속 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큼직한 대문자로 보기 좋게 다음과 같이 똑같은 글을 되풀이해서 일기장에 적어 넣었습니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이렇게 무의식중에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된 윈스턴 스미스의 '반체제 의식'은 뜻밖의 일로 한층 탄력을 받게 됩니다. 사무실 복도에서 가끔씩 마주치던 검은 머리의 대담한 여자(줄리아)가 어느 날 자신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려 쓰러지는 그 짧은 틈을 이용해 자신의 손에 몰래 '종이쪽지'를 건네 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쪽지엔 놀랍게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지요. 사실 윈스턴은 기혼자였지만 아내 캐서린과 헤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당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대신, 아이가 없다면 차라리 별거를 하라고 권했지요. 당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조차 통제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란 글로 인해 살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른 윈스턴은 '온갖 현실적 제약과 난관'을 뚫고 감시의 눈을 피해 그녀와의 밀회를 즐깁니다. 누구보다도 열성 당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던 그녀에 대해 오랫동안 사상 경찰이나 스파이단의 정보원으로까지 오해했던 윈스턴은 그녀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되지요.

 

 

"당신 얼굴에 쓰여 있는 걸 봤어요. 그래서 기회를 노렸죠. 저는 얼굴만 보고도 당의 충복이 아닌 사람을 금방 알아맞힐 수 있어요. 당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놈들'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윈스턴과 줄리아의 밀회는 점점 더 위험한 국면으로 빠져듭니다. 둘만이 밀회를 즐길 수 있는 방을 빌리기에 이른 것이지요. 둘은 그것이 미친 짓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것은 '일부러 무덤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지요. 윈스턴과 줄리아는 채링턴 씨의 상점 2층에 있는 방에서 더 자주 밀회를 즐겼고, 두 사람은 거기서 사카린 대신 설탕을, 싸구려 커피 대신 진짜 커피를, 흑딸기 이파리가 아닌 진짜 홍차를 즐겼으며, 줄리아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향수까지 뿌렸습니다. 거기서만큼은 당의 동지가 아니라 진짜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윈스턴에게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왔습니다. 오브라이언에게서 기대했던 메시지가 온 것이지요.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부름에 응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겼지만, 이제는 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라고 여겼습니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오브라이언을 만나러 내부당원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찾아가고, 방문객을 맞은 오브라이언은 텔레스크린을 미리 끄는 친절까지 베풀지요. 윈스턴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방문 동기를 말합니다..

 

오브라이언은 와인을 대접하며 그들을 냉담하게 환영합니다. "자, 건강에 좋은 것이니 마십시다. 우리의 지도자,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을 위해!" 라고. 그리고는 골드스타인이 쓴 '그 책'을 보내 줄테니 읽고 다시 돌려달라고 말합니다. 얼마 후 윈스턴은 '그 책'을 은밀한 방법을 통해 전달받습니다.

 

책의 제목은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였습니다. 소설에서는 윈스턴이 줄리아에게 이 책을 읽어준다는 설정으로 무려 43쪽에 걸쳐 책 내용이 아주 길게 이어집니다. 윈스턴이 먼저 펼친 [제3장, 전쟁은 평화]에서는 '전쟁의 본질'을 다루고, [제1장, 무지는 힘]에서는 '계급투쟁의 본질'을 다루는데, [조지 오웰이 쓴 정치철학 강의]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내용이 체계적이면서도 깊이 있고 논리정연합니다. 반체제 인사인 골드스타인이 쓴 그 책의 내용이야말로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년의 역사적인 배경과 정치·경제적인 제반 환경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어서 소설 『1984』를 한층 더 깊숙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끄는 훌륭한 교재가 되는 셈이지요.

 

채링턴 씨의 2층 방에서 밀회를 즐기던 윈스턴과 줄리아는 끝내 그곳에서 사상 경찰에게 체포되고 맙니다. 방을 선뜻 빌려줬던 채링턴 영감은 나중에 알고 보니 서른다섯 살쯤 된, 빈틈없고 냉정한 얼굴의 소유자로 드러나지요.

 

소설의 제3부는 거의 전부가 감방 안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윈스턴의 이야기뿐입니다. 반역죄를 저지른 정치범이자 사상범인 윈스턴에게 가해지는 모진 고문은 뜻밖에도 오브라이언의 몫이었습니다. 애정부에서 그를 만난 건 이미 관례적인 예비 심문에서 주먹과 곤봉과 쇠몽둥이와 구둣발질에 만신창이가 된 이후였지요. 오브라이언의 전기 고문은 마치 '학생과 선생 사이처럼' 진행됩니다. 윈스턴은 과거에 일어난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부정을 강요하는 오브라이언의 심문에 대해 완강히 거절합니다. 그건 당에 반항하는 일이었지요. 오브라이언이 새삼 당의 슬로건을 상기시킵니다.

 

그렇습니다. 당이 현재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모든 과거는 당의 뜻대로 조작되고, 날조되고, 바뀌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과거를 지배하는 일이니까요. 오브라이언은 '네 개의 손가락'을 윈스턴에게 펼쳐 보이면서 그게 '다섯 개'라고 대답하도록 끈질기게 강요합니다. 당이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라고 말하면 결국 '다섯 개'가 맞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윈스턴은 전기 고문의 다이얼이 최대치에 이를 때까지도 '다섯 개'라는 대답을 선뜻 내놓지 못합니다. 그게 네 개인데 어떻게 다섯 개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식으로 오브라이언의 고문은 계속됩니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자못 친절한 태도로 윈스턴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눕니다. 온갖 사상범들을 잔인하게 고문할 게 아니라 간단히 없애버리면 그만일 텐데, 왜 당국은 그토록 힘들여서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는지, 당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는지, 우리는 왜 권력을 원하는지 등에 관한 '고문실의 대화' 속에는 오웰의 예리하고도 깊이 있는 통찰들이 담겨 있지요.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점차 '당에 대한 이해와 수용' 쪽으로 기울지만 끝내 감정적인 벽을 넘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오브라이언에게 '빅 브라더를 증오한다'고 고백하고 '마지막으로 밟아야 할 단계'인 공포의 101호실로 끌려가지요. 거기서 가장 끔찍한 공포와 전율을 마주한 그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순간에 줄리아마저 배신합니다. 모진 고문과 세뇌교육 끝에 정상적인 사고 능력까지 망가진 채 석방된 윈스턴은 과거 반체제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체스넛트리 카페에서 술로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애정부로 돌아가 모든 죄를 고백하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듭니다. 그리고는 총살을 당하지요.

 

소설 『1984』는 고도로 정보화된 미래 사회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나 경고를 담은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소설에 담긴 '고도로 억압되고 통제된 감시 사회'는 과거의 숱한 공산권 국가들뿐 아니라, 2020년 현재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북한 정권의 가공할 만한 지배 체제를 거듭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이지요. 오웰이 상상했던 1984년의 공포스런 정치 체제는 다행히 1980년대 후반에 진행된 소련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급격히 줄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일부 국가들의 암담한 현실은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게다가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는 통치자가 핵무기 버튼까지 움켜쥔 채 전세계를 상대로 거대한 게임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현실에서 지켜보게 될 줄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조작과 날조, 감시와 통제, 억압과 처벌로 유지되는 끔찍한 사회를 차츰 견디다 못한 주인공 윈스턴이 오랫동안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어 왔던 오브라이언으로부터 도리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끝내 제거되는 이야기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윈스턴이 '반체제 혁명을 꿈꾼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줄리아마저 고문 과정에서 끝내 배신하고, 석방된 이후에 우연히 서로 조우했을 때조차 이내 서로 냉랭하게 돌아서는 모습은 너무 황량하고도 서늘합니다. "그런 일이 닥치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죠."라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서 온전히 다 사라지기도 전에 텔레스크린에서는 마치 그들 두 사람을 비웃는 듯한 음악이 흘러 나옵내다.

 

울창한 밤나무 아래

나 그대를 팔고, 그대 나를 팔았네…….

 

물론 가장 진한 아이러니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오브라이언을 만나기를 갈망했고, 그로부터 온갖 고문과 심문을 당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선생님에게 배우는 학생처럼' 사상 교육을 받은 윈스턴이 마침내 죽는 순간에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완전한 파멸과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을까요. 가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드는 소설의 맨 끝줄을 온전히 다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의 맨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갔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기나긴 여운이 남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인용하면서 작품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 안을 떠나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지내온 유랑의 삶이여! …… 그러나 잘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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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8-01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의 북리뷰 기다렸었어요!!!^^

oren 2020-08-01 12:26   좋아요 0 | URL
라로 님, 반갑습니다.^^
북리뷰는 꾸준히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 채널에 올리고 있는데,
매번 알라딘에 올리지는 못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