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소양이 남달랐던 스티븐 핑커답게 그는 진화심리학 측면에서 간통의 심리를 설명하면서도 그걸 문학작품과 절묘하게 연결지어 설명하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간통을 저지른 여자들이 비소를 먹는다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서 몸을 던지는 경우는 (소위 『간통 소설』의 대명사격인)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나 감행할 만한 일이지 결코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걸 스티븐 핑커는 소설 속의 여주인공 이름을 1도 꺼내지 않고 저토록 재치있게 설명한 셈이었습니다. 이왕 스티븐 핑커를 끌여들였으니 그의 얘기를 조금만 더 들어보지요.
여자들은 남편보다 애인을 고를 때 외모와 힘을 더 중시한다고 보고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외모는 유전자의 품질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여자들은 불륜 관계를 맺을 때 일반적으로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남자를 고르는데,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자질들은 거의 틀림없이 유전이 되는 것들이다.(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은 첫 번째 동기인 자원 얻어내기에도 도움이 된다.) 우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여자는 또한 결혼 시장에서의 거래 능력을 테스트할 수도 있다. 이것은 차후에 직면할 그런 거래의 전주곡이 되거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먼은 성관계와 관련된 성차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가 어떤 면에서 우수하거나 남편을 보완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관계를 하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간통을 한다고 요약한다.(737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중에서
스티븐 핑커의 지나치게 과학적인(?) 주장으로부터 '간통 같은 독서'와 관련해서 무슨 좋은 시사점을 얻으려는 자체가 다소 무리한 시도이긴 합니다. 그러나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지요. 그의 말에 따르면 '불륜 관계'를 맺을 때 '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말이지요.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어디선가 분명히 읽은 듯한' 대목들을 가끔씩 마주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늘 먼저 읽었던 책의 '바로 그 대목'을 기필코 찾아내고픈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히고 마는데, 바로 그 '은밀한 간통 현장'을 찾아내지 못할 때마다 느끼는 억누르기 힘든 안타까움의 정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더랬습니다.
무릇 어떤 책을 읽든지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겹쳐 떠올리는 경험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들게 마련인데, 아무래도 문학작품을 읽을 때 보다는 철학책이나 역사책을 읽는 동안에 좀 더 자주 발생하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에서는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다른 작품과의 교감의 증거를 일부러 교묘하게 숨기는 반면, 역사책이나 철학책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지금부터는 몇몇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름난 작가들이 얼마나 자주 다른 작가들로부터 얻어낸 이야기를 자기 자신의 이야기인 양 자신의 책을 장식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게 가장 알맞은 재료를 보여주는 작가는 몽테뉴입니다. 이 인물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법관 생활에서 은퇴한 후 몽테뉴 성에 틀어박혀 죽을 때까지 책에 파묻혀 지낸 덕분에 책에 담긴 별의별 세상 이야기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재치 넘치는 탁월한 문장력까지 겸비한 덕분에 『수상록』이라는 멋진 책까지 썼습니다.
그의 책 속에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뿐 아니라 가끔씩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직접 보고 겪었던 이야기들까지 맛깔스럽게 버무려놓았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까지가 전해 들은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창작품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남의 얘기를 자신의 것인 양 몰래 훔쳐오는 게 아니라 '인용의 대가' 답게 적재적소에 고대의 이름난 시인들이나 철학자들의 문장들을 원문 그대로 옮겨와 자신의 이야기에 꼭 들어맞게 재배치하는 기가 막힌 재주를 보여줍니다.
그가 좋아했던 고대의 작가와 작품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단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플루타르코스였습니다. 그 역사가가 쓴 『영웅전』과 『윤리론집』 은 몽테뉴가 가장 즐겨 읽는 애독서였습니다. 몽테뉴는『 수상록』 곳곳에서 플루타르코스를 거듭 칭송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별도의 장을 마련해서 그를 칭송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이 인물들에 대해서 품는 친밀감과, 그들이 내 노령기에 그리고 순수히 그들에게서 약탈해 온 재료로 엮어 내는 내 작품에게 주는 도움 때문에 , 나는 그들의 영광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변호> 중에서
몽테뉴는 다른 책들로부터 얻은 지식이 아무리 많더라도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얘기를 중세말의 시대 상황에 딱 들어맞는 '불씨 이야기'를 통해 후세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현대의 독자들은 그의 비유만 들어봐도 전기가 없던 암흑 같은 중세말의 사회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참으로 몽테뉴 다운 절묘한 비유라는 생각부터 듭니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불이 필요해서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가서는, 거기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서 쬐다가 얻어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배 속에 음식을 잔뜩 채워 보았자, 그것이 소화가 안 되고 우리 속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또 우리들을 더 키워 주고 힘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학식이 많아서 경험이 없이도 그렇게 위대한 장수가 되었던 루쿨루스는 우리들의 방식으로 지식을 섭취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너무 심하게 남의 팔에 매달려 다니다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마저 없애고 만다. 내가 죽음의 공포에 대비할 생각을 가지면? 나는 겨우 세네카의 사상에서 꺼내올 뿐이다. 내가 자신이나 또는 남을 위해서 위안의 말을 찾아보고 싶으면? 나는 그 말을 키케로에게서 빌려온다. 사람들이 나를 그 지식으로 단련시켜 주었던들, 나는 그것을 자신에게서 찾아 가졌을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학식이 있음을 자랑함에 대하여> 중에서
방금 몽테뉴가 들려주었던 '불씨 이야기'가 몽테뉴로부터 처음으로 탄생한 재치 있는 비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까지는 결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몽테뉴 수상록』보다 무려 1,500년 전쯤에 쓰여진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이라는 책이 일부나마 발췌 번역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력(智力)은 병처럼 채울 필요가 없는 것이 오히려 목재와 같다고나 할까. 그것은 단지 나무에 불을 붙여 독립적으로 생각하도록 자극을 주고 진리를 탐구하려는 열망을 창출하면 되는 것이기에 말이네.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서 불씨를 얻어 큰불을 지피고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며 머무른다고 상상해 보게. 그것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강의를 듣고 이득을 얻으려고 왔는데, 그가 강의에서 그 자신과 그의 사고를 계발하기 위해 불씨를 지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강의 내용을 즐기며 황홀경에 빠져 앉아 있는 거나 같은 것이지. 말하자면 그는 강의 내용으로 그에게 전달된 의견의 형태로 밝고 벌겋게 달아오른 불을 얻지만, 그의 마음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곰팡냄새와 암흑을 뜨거운 철학의 열기로 없애거나 추방하지는 못하는 것이네.(24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철학자들의 강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중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대표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도 몽테뉴의 『수상록』에 담긴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 있는데, 만약에 어떤 독자가 『몽테뉴 수상록』 하나만 읽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건너뛰고 말았다면, 그 사람은 필시 몽테뉴의 책에 담긴 이야기가 오롯이 몽테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해도 결코 그를 탓할 순 없을 테지요. 그럼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속 문장부터 살펴볼까요?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
이제 분노(thymos)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욕망(epithymia)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덜 창피하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분노는 어느 정도 이성에 귀를 기울이긴 하지만 그것을 잘못 알아듣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달려 나가 지시와는 다르게 행하는 실수를 범하는 성급한 하인들처럼. 혹은 개들이 친한 사람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소리만 나면 짖는 것처럼 말이다. …… 결국 분노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을 따르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더 창피한 것이다. 분노에 대해 자제력 없는 사람은 욕망에 지는 것이지 이성에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본성적인 욕구를 따르는 것을 보다 쉽게 용서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욕망들에 따르는 것은 더 쉽게, 또 공통적일수록 더 쉽게 용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노와 화를 잘 내는 성질은 지나침에 대한 욕망, 필수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보다 더 본성적이다. 마치 자기 아버지를 때린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 즉 "이 사람도 자기 아버지를 때렸고, 그렇게 맞은 사람도 그의 아버지를 때렸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식을 가리키면서 "얘도 어른이 되면 나를 때릴 겁니다. 우리 집안 내력이니까요"라고 변명하는 사람의 경우가 보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또 아들에 의해 끌려 나가다 문간에서 자신도 자기 아버지를 거기까지만 끌고 갔으니 거기에서 멈추라고 명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251∼252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6장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중에서
자, 이제 다시 몽테뉴의 책으로 건너가 볼까요?
여기까지가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
제 아비를 때리고 있던 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기 집 습관이라고 하였다. 그 아비는 그 조부를 그렇게 때렸고, 그 조부는 그 증조부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애도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때릴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거리에서 아비를 잡아당기며 끌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문 앞에 와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를 거기까지밖에는 끌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들들이 습관적으로 버릇이 되어서, 그 가정에서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였다.(127쪽)
- 몽테뉴,『몽테뉴 수상록』「습관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받은 법을 쉽사리 변경하지 않음에 대하여」중에서
몽테뉴의 책 속에 담긴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들 가운데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건 '발이 아픈 구두 이야기' 입니다. 몽테뉴가 들려주는 이야기부터 먼저 들어보지요.
옛말에 나오듯,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⑵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그대 가정의 평화로운 질서를 꾸며 보이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가. 아마도 그 살림을 유지하기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⑵ 플루타르코스의 이야기, 한 로마인이 예쁜 아이까지 낳아 준 미모의 아내를 내쫓았다고 친구들이 책망하자 "이 구두는 새롭고 예쁘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문에 내 발이 벗겨진 것을 그대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네"라고 대답하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허영에 대하여> 중에서
『몽테뉴 수상록』에 딸린 간단한 주석만 살펴보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로마인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평범한 인물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좀 더 알고나면 고대 로마의 영웅들 가운데 한 사람이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로마인의 이름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였으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50인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개선)
아이밀리우스의 첫 번째 아내는 집정관을 지냈던 마소의 딸 파피리아였다. 아이밀리우스는 파피리아와 꽤 오랫동안 살다가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이밀리우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스키피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파울루스가 무엇 때문에 이혼을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내와 이혼한 다른 로마인들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로마인이 이혼한 사람에게 물었다.
"부인이 정숙하지 않아서요? 아름답지 않아서? 아니면 자식을 못 낳았소?"
그러자 이혼한 로마인은 자신의 신발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 신발은 멋지지 않소? 새것 아니오? 그러나 이것이 내 발 어디를 아프게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단 말이오. 뚜렷한 허물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남들은 알 수 없는 성격과 습관 차이가 쌓이고 쌓여 이혼하는 부부들도 있는 법이오."
아이밀리우스는 파피리아와 이혼한 뒤 두 번째 아내를 맞았다. 그리고 전처가 낳은 두 아들은 로마에서 가장 귀하고 훌륭한 가문에 양자로 보냈다. 큰아들은 다섯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고, 둘째 아들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집안 양자가 되어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둘째 아들은 소(소) 스키피오라고 불리는 인물인데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멸망시킨 인물이지요. 그는 키케로가 쓴 『우정에 대하여』와 『노년에 대하여』라는 책에도 주연급으로 등장할 만큼 유명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문학 작품의 사례를 통해 '간통 같은 독서'의 일면을 들여다볼 차례입니다. 앞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플로베르와 톨스토이는 '간통 문학'의 대표작을 쓴 작가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문학적 연관성을 갖는 작가이지요. 많은 문학 전공자들이『마담 보바리』(1857년)와 『안나 카레니나』(1873년)를 두고 숱한 비교 분석을 했을 테고요. 그렇다면 혹시 톨스토이가 쓴『전쟁과 평화』(1869년) 속에도『마담 보바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요? 톨스토이가 워낙에 플로베르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하니까 말이지요. 작가들 사이에 일어났던 '내밀한 교감'을 어찌 일반 독자가 시시콜콜 다 알아챌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마담 보바리』의 다음 대목을 읽으면 두 작가 사이의 '간통 현장'을 목격한 듯한 짜릿한 흥분을 억누르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톨스토이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차 장면'에 영향을 받아서 『전쟁과 평화』의 일부를 썼을까요?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구상한 것은 1856년이었습니다. 플로베르가 5년 동안의 분투 끝에 마침내 『마담 보바리』를 탈고한 게 그해 봄이었습니다. 그러니 두 작가가 교감했을 개연성은 그만큼 컸던 셈이지요. 이쯤에서 『마담 보바리』의 명장면 속으로 곧장 들어가 보지요.
(영화 『마담 보바리』의 한 장면)
파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 걸요
성당 앞 광장에는 어린애가 하나 놀고 있었다.
「마차 한 대만 불러다오!」
어린애는 카트르 방 거리로 총알처럼 뛰어갔다. 그러자 그들은 한동안 얼굴을 마주한 채 어색한 기분이 되어 서 있었다.
「아, ……레옹! ……. 정말 …… 몰라요 …… 어쩌면 좋아요 ……!」
그녀는 선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건 아주 못할 짓이에요, 알아요?」
「뭐가 어때서요?」하고 서기는 되물었다. 「파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 걸요!」
그러자 이 한마디 말이 거역할 수 없는 논거인 양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353∼354쪽)
뒤이어 마차가 나타나고, 레옹과 엠마는 그 유명한 '마차 안에서의 한낮의 질주'를 벌이지요. 사실 방금 인용한 문장 보다는 곧이어 이어지는 장면이 훨씬 더 압권입니다.
「가시더라도 북쪽 문으로 나가주세요!」하고 아직도 문간에 서 있던 성당지기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부활, 최후의 심판, 낙원, 다윗왕, 그리고 지옥불 속의 저주받은 자들을 보실 수 있으니까요」
「나리, 어디로 모실깝쇼?」하고 마부가 물었다.
「아무데라도 좋아!」하고 레옹은 엠마를 마차 안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355쪽)
* 강조한 부분은 번역문을 따랐다. 곧 있을 '엠마와 레옹의 마차 안에서의 정사(情事)'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마차는 달리기 시작하지요. '그후로도 오랫동안' 계속 달리지요. 마부가 멈출 때마다, 마차 안에서는 "계속 가요!" 라는 대답만 들려옵니다. 마차가 세 번째로 멈추었을 때도 마부는 "그냥 가라니까! 라는 더 거센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목마름과 피로와 근심으로 거의 울상이 되어' 마차를 몰았습니다. 마차의 질주 장면을 원문 그대로 설명하자면 아마도 이 영상이 5분 이상은 넉넉하게 늘어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마차는 이쯤에서 세우고 다시 『전쟁과 평화』의 배경인 러시아의 어느 한적한 시골로 옮겨가보지요.
여기서 등장하는 니꼴라이는 여주인공 나탸샤의 오빠이자 '로스토프 노백작 집안'의 맏아들이지요. 그는 순박한 다혈질의 청년인데, 군대에 입대한 뒤 '도시 생활'을 겪고 나서는 차츰 '도회지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심지어 그는 '유부녀'를 능수능란하게 유혹할 정도로 점점 더 까진(?) 모습을 보여주지요. 이 점이 바로 '파리 물을 먹은 레옹'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레옹 또한 엠마를 처음 만났을 땐 순진하기 그지 없었으나 '파리 생활'을 겪은 뒤 3년 만에 나타난 모습에선 어느새 '선수'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시골마을 용빌로 돌아가야 할 유부녀인 보바리 부인을 한낮에 '마차'에 태울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지요.
이제부턴 톨스토이가 묘사하는 '니콜라이의 유부녀 유혹 장면'으로 시선을 옮겨 보지요.
서울에서는 보통인데...
까쩨리나 뻬뜨로브나가 왈츠와 에꼬쎄즈를 타기 시작하고 댄스가 시작되자 니꼴라이는 그의 민첩한 동작으로 더욱더 이곳의 상류 사회를 매료시키고 말았다. 그는 독특하고 분방한 댄스로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니꼴라이 자신도 이날 밤의 자기 춤솜씨에 약간 놀랐다. 그는 모스크바에서는 이렇게 추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이와 같이 너무나 분방한 춤 태도는 버릇없는 악취미라고까지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을 무엇인가 기발한 것으로, 서울에서는 보통인데 시골에 사는 자기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밤새도록 니꼴라이는 현의 어느 관리의 아내이자 파란 눈의 살이 찐 귀여운 금발 미인에게 가장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남의 아내는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신멋이 든 젊은이들의 순진한 신념으로, 니꼴라이는 이 부인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남편에 대해서도 마음을 터놓고, 그러면서도 속에 무엇인가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 즉 니꼴라이와 그 남편의 아내는 서로 마음이 잘 맞을 것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말로는 하지 않지만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 그러나 파티가 끝날 무렵에 아내 얼굴이 점점 빨갛게 상기되어 생기를 띠어 가자 남편의 얼굴은 더욱더 침울하고 창백해졌다.(1293-1294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Ⅱ』
독서를 통해 많은 작가들이 서로 몰래 주고받은 교감의 현장들을 발견하는 일은 놀랍도록 짜릿한 쾌감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때때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책들 사이에 벌어졌을 간통에 대한 의심이 구체적인 물증 확보로까지 연결되지 않을 땐 아쉬움을 달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험들이 자꾸만 새로운 책을 찾아 읽도록 부추기는 원동력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영상을 시청하시는 독자들께서도 눈 먼 보르헤스가 적극 권장했다는 '간통 같은 독서'를 자주 체험해 보시길 바라며 이번 영상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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