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을 읽다 보면 '권력의 기묘한 속성'을 자주 엿보게 된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악행이나 천인공노할 음모나 온갖 감언이설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일단 권력을 잡고 나면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어디에 내다버렸는지, 그때부터는 단지 권력자의 타고난 본성에 따라 권력이 행사되고 유지될 뿐이다. 권력이 피지배자들을 위해 올바르게 견제되면서 행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금 당장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시진핑, 아베, 김정은이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백성들의 삶과 얼마나 유리되어 행사되는가.

 

권력자들은 대개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데만 몰두한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모른 채 임기(?)를 마감한다. 마약과도 같은 권력에 끝없이 탐닉하고 집착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한 가지 깨닫는 게 있다. 권력자들로부터 언제나 개무시를 당하게 마련인 '개돼지'들이 '뜬 구름 위의 권력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기 본기』에 등장하는 여태후와 효문황제는 서로 성씨도 다르고, 권력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제위를 이어받은 경우인데, 두 사람의 권력 사용 방식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놀랍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이 죽고 나자 효혜제가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다. 효혜제는 여덟 명이나 되는 유방의 아들 가운데 둘째였다. 그런데 효혜제가 태자로 있는 동안에 고조의 셋째 아들인 여의에게 태자 자리를 빼앗길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고조가 여의를 낳아준 척 부인을 몹시 총애했기 때문이다. 고조가 죽고 효혜제가 제위에 오르자 황제의 어머니인 여후는 기어이 척 부인의 아들 여의를 불러들여 독살한다. 그리고 늘상 눈엣가시로만 여겨왔던 척부인을 '사람 돼지'로 만들어 역사에 길이 자신의 이름을 빛낸다.

 

태후는 끝내 척 부인의 손과 발을 절단 내고 눈알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 살게 하며 '사람 돼지'라고 이름 불렀다. 며칠이 지나 혜제를 불러서 '사람 돼지'를 구경하게 했다. 효혜제는 보고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가 척 부인임을 알고 큰 소리로 울었고, 이 일 때문에 병이 나 1년이 지나도록 일어날 수 없었다. [혜제는] 다른 사람을 보내 태후에게 간청해 말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결국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혜제는 이날부터 술을 마시고 음란한 즐거움에 빠져 정사를 듣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병까지 생겼다.(385∼386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여태후 본기> 중에서

 

 

효혜제가 젊은 나이인 스물셋에 죽고 나자 드디어 '여씨 천하'가 되었다. 황제의 어머니인 여태후가 권력을 틀어쥐고 여씨 집안 사람들 중심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태후는 실권을 장악한 후 8년 동안 '고황후'로 불리며 나라를 다스렸다. 그녀가 죽자 유씨들이 다시 '여씨 일족'을 몰아냈다. 그리하여 다시 유씨 가문이 황제를 잇게 되었으니, 고조 유방의 아들들 가운데 어진 마음과 덕망을 갖춘 넷째 아들 유항이 효문제로 등극했다.

 

효문제가 황제가 되어 다스린 23년 동안은 그의 아들인 효경제 시대와 함께 '문경지치'라고 불릴 정도로 태평성대였다. 두 황제가 오로지 백성들만 바라보며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효문제가 취임 첫 해에 펼친 개혁 과제는 '적폐 청산'이 아니라 악명 높은 '연좌제'부터 폐지한 일이었다.

 

"법이란 다스림의 바른 도이며 포악함을 금지해 선한 사람으로 이끄는 것이다. 지금 법을 어긴 후 이미 죄를 처벌받았는데도 죄 없는 부모나 아내, 자식이나 형제가 연좌되어 잡혀서 함께 벌을 받고 있다. 이를 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법을 의논해 보라."

 

담당 관원들이 모두 말했다.

 

"백성들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 금지한 것입니다. 친족까지 연좌해 벌을 받게 하는 것은 그 마음을 무겁게 해 그들이 법을 범하면 이를 엄중히 처벌하려는 것으로 시행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전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듣건대 법이 바르면 백성들은 충성스럽고, 형벌이 합당하면 백성들이 순종한다고 하오. 게다가 백성을 다스려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사람이 관리이거늘, 인도하지도 못하고 또 바르지 않은 법으로 죄를 다스린다면, 도리어 백성들에게 해가 되고 난폭한 짓을 하는 것이오. 어떻게 하면 이를 막을 수 있는가? 또한 짐은 연좌제의 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깊이 생각해 보시오."(415쪽)

 

 - 사마천,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효문제의 눈부신 치적은 날이 갈수록 빛났다. 백성들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과감하고도 훌륭한 덕치의 연속이었다. 집권 13년차에는 (오늘날까지 경극의 주제로도 널리 공연되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제나라의 태창령 순우공이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자 죄수를 관장하는 관원들이 그를 체포해 장안으로 이송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태창공은 아들은 없고 딸만 다섯이었다. 태창공이 막 체포되어 가려고 할 즈음에 딸들에게 욕을 하면서 말했다.

 

"자식을 낳아도 남자를 낳지 못했으니 급박한 일을 당해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러나 막내딸 제영은 절로 마음이 상해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 장안에 와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소첩의 아버지는 관리가 된 후 제나라 땅에서는 모두 아버지를 청렴하고 공정하다고 칭찬했으나 지금 법을 어겨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을 받은 자는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어서, 비록 잘못된 행실을 고쳐 스스로 새사람이 되려 해도 할 수 있는 길이 없어 마음 아프옵니다. 소첩이 죄인의 몸으로 관아의 노비가 되어 아버지의 죄를 갚겠으니 아버지가 스스로 새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시길 원하옵니다."

 

글을 천자에게 올리니 천자는 그 마음을 슬프고 가련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대체로 듣건대 유우씨 때에는 죄를 지으면 의관에 그림을 그리고 특이한 복장을 입게 해 치욕으로 삼게 했을 뿐인데도 백성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들었다. 무슨 까닭에서 그랬겠는가? 지극하게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법은 육형肉形이 셋이나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짐의 덕이 각박하고 밝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짐은 참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 교화의 방법이 순수하지 못해 어리석은 백성들이 죄로 빠져드는구나. 『시』에 말하기를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했다.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도 않고 형벌을 먼저 가하니, 간혹 잘못을 고쳐 선을 실천하려 해도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짐은 이 점을 참으로 가련하게 생각하노라.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 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대단히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부덕한 것인가. 어찌 이것이 백성의 부모 된 자의 뜻에 걸맞은 것이겠는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

 

(425∼427쪽)

 

 - 사마천,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황제가 자리에 오른 지 23년째가 되었으나 궁실과 동산, 개, 말, 의복, 거마에 늘어난 것이 없었고, 생활에 불편함이 있으면 즉시 법령을 느슨하게 해 백성들을 이롭게 했다고 한다. 그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는 다음의 인용문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황제는 항상 수수한 옷을 입었다. 또한 총애하던 신 부인에게 옷을 땅에 끌리지 않게 하고 휘장을 수놓지 못하게 해 마음이 돈후하고 소박한 것을 나타냄으로써 천하의 모범이 되게 했다. 또한 패릉覇陵(문제의 능묘)을 지을 때, 모두 와가瓦器를 사용하게 하고 금, 은, 구리, 주석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하고 분묘를 높이 올리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비용을 줄이고 백성을 번잡하게 하지 않으려 함이다. …… 신하들 중 원앙 같은 이들은 진언할 때마다 칼로 써는 것 같았지만 황제는 한결같이 관대하게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 신하들 중 장무 등은 뇌물을 받거나 금돈을 주다가 발각되었는데도 황제는 오히려 왕실 창고에서 금돈을 꺼내 그들에게 내려 그 마음을 부끄럽게 했을 뿐, 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넘기지 않았다. 오로지 덕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힘썼으니, 이 때문에 전국은 재물이 넉넉하고 번영했으며 예의가 일어났다.(432∼433쪽)

 

 - 사마천,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23년 동안의 덕치 끝에 세상을 떠날 때 그토록 어진 황제가 남긴 조서는 과연 남달랐다.

 

짐이 듣건대 천하 만물 중 싹이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한다. 죽음이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자연스러운 규율이니, 어찌 유달리 슬퍼할 수 있으리오! 지금 처한 시대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 있음을 기리고 죽음을 미워해, 장례를 후하게 치러 가업을 무너뜨리고 상 치르는 일을 중시하여 산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 나는 정말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노라. 게다가 짐은 본래 부덕해 백성들을 돕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떠남에 더구나 복상을 중시해 오랜 기간 상기喪期를 지키게 하고, 추위와 더위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하고, 백성들의 아버지와 자식을 슬프게 하고, 어른과 아이의 뜻을 상하게 하고, 그들의 먹을거리에 손실을 입히고,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중단하게 한다면, 내 부덕함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이니 천하에 무슨 말을 하리오! 짐이 종묘를 손에 넣고 보전하며 미천한 몸으로 천하의 군왕 자리에 의탁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그사이 천지의 신령과 사직의 복에 힘입어 온 나라가 편안하고 전란이 없었노라. 짐은 본래 영민하지 못해 그릇된 행실로 선제가 남기신 덕을 욕되게 할까 봐 늘 두려워했으며, 세월이 지날수록 끝이 좋지 못할까 걱정했다. 지금 비로소 다행히 타고난 수명을 다하고 고묘高廟에서 공양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짐이 명철하지 않은데도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이 어찌 슬퍼할 수 있으리오. 그러니 천하의 관리와 백성들은 이 조령을 받고 나서 사흘만 상례를 치르고 모두 상복을 벗으라.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제사와 음주와 고기 먹는 일을 금지하지 말라! 장사 지내는 일에 참가하거나 복을 하는 자들도 전부 맨발을 드러내지 말라! 질대絰帶는 세 치를 넘지 말고 수레와 무기를 늘어놓지 말며 백성들 가운데서 남녀를 뽑아 궁궐에서 곡하게 하지도 말라. 궁 안에서 상을 치르는 자들도 모두 아침저녁 각 열다섯 번씩만 곡소리를 내고 예가 끝나면 그만두라. 아침저녁으로 곡을 할 때가 아니면 제멋대로 곡하지 말라. …… 이 명령 가운데 있지 않은 다른 것들은 모두 이 명령에 의거해 처리하라! 천하에 널리 포고해 백성들에게 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그리고 패릉의 산천은 원래 모습을 따라야지 고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부인 이하에서 소사少使(황제의 후궁은 부인 밑에 미인美人, 양인良人, 팔자八字, 칠자七字, 장사長使, 소사가 있음)까지는 그 집으로 돌려보내라.

 

(433∼434쪽)

 

 -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나의 생각)

 

『사기 본기』의 <효문 본기>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효경 본기>에는 효경제의 무덤에 관한 무척 흥미로운 주석이 붙어 있어 눈길을 끈다.

 

"최근 발굴 작업 도중에 토용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왜냐하면 그 숫자가 진시황의 병마용 숫자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도 생매장되는 순장殉葬 습관까지 있었으니, 효문제가 죽으면서 내린 조서가 얼마나 절절히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쓰여진 것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효문제에 얽힌 미담들은 일일이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토록 마음씨가 어진 황제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의 일대기를 다 읽고 나면 사마천이 그를 칭송하는 말이 도리어 부족해 보일 정도다.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어진 정치가 이루어진다.' 또 '선한 사람이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야 난폭한 정치를 없애고 사형을 제거할 수 있다.'라고 했다. 진실로 옳은 말이구나! 한나라가 일어나 효문황제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이 되니 덕이 지극히 성대해졌다. 점차 역법을 고치고, 의복의 색깔을 바꾸고, 봉토를 쌓아 지내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나, 문제의 겸손하고 사양하는 정치는 오늘날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아, 어찌 어질지 않다고 하겠는가!"(436∼437쪽)

 

 - 『사기 본기』, <효문 본기> 중에서

 

 

이런 글을 읽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 오면 우리나라의 갑갑한 정치 현실 때문에 너무 서글퍼진다. 새로운 법무장관 후보자는 자신과 가족들을 둘러싼 숱한 의혹들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도, 거의 매일같이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만이 '검찰 개혁의 적임자'라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버티고 있다. 이미 10여 건의 고소·고발까지 검찰에 접수되어 중앙지검 특수부까지 나서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는데도 그는 오늘도 여전히 '포기는 없다'고 외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집념이 그토록 끈질긴가? 그게 정녕 '검찰 개혁'을 위한 진정어린 호소가 맞는가? 그게 혹시 권력을 향한 끈질긴 욕망의 다른 표현은 아닌가? 설사 그렇게 해서라도 기어코 법무장관에 잠시 동안 올라앉는다고 치자. 과연 그렇게 잡은 권력이 얼마만큼 떳떳하고 올바르게 행사될 수 있을까? 혹여나 그가 지난날에 저질러온 숱한 과오를 덮는데 그런 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될 가능성이 없을 거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그 숱한 '언행불일치' 만으로는 부족하여 아직도 새로운 업적을 기어코 더 쌓아 올려야만 만족하겠다면 그렇게 하라. 예로부터 권력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무모한 일도 서슴치 않고 저질러 왔었으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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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현명하지 않은데 어찌 복이 있겠는가!
분서갱유와 지록위마
천하의 근심은 토붕에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간축객서[諫逐客書]를 빗대어 '간축국서'라는 제목을 달아봤다.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법무장관 후보자인 조국 전 수석을 이제는 과감하게 물리치고 보다 널리 새로운 인재를 구하라는 철없이 순진한(?) 바램으로 써 본 글이다.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중국 진시황 시대에 활약했던 승상 이사가 쓴 명문장이다. 왕에게 올리는 건의를 담은 서간문 형식의 상서上書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역사는 『사기 본기』에 나오는 「진시황 본기」와 『사기 열전』에 나오는 「이사 열전」을 꼽을 만하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스타(!) 황제였던 진시황 시대의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상세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 말고도 '진시황 시대'를 빛낸 인물은 여럿 있지만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를 빼놓을 수 없다. 저 유명한 <분서갱유>와 <지록위마>의 고사가 이들 두 사람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사는 무명 시절 한비자와 함께 순자荀子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훗날 진시황을 도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나중에 진시황이 순행 도중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환관 조고'의 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어리석은 막내아들 호해(2세 황제)에게 황제 자리가 넘어가는 음모에 가담함으로써 진나라가 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2세 황제의 짧은 치세 동안에 환관 조고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끝내 자신의 집안사람들까지 몰살당하는 멸문지화를 입고 말았다.

 

이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동안에 '네 차례' 탄식한 일로도 유명하다. 처음엔 변소에서 사는 쥐와 창고 속에서 사는 쥐의 다른 환경을 보고 탄식했고, 두 번째로는 승상이라는 귀한 신분이 되었을 때 탄식했고, 세 번째로는 진시황이 남긴 조서를 고칠 때 탄식했고, 마지막에는 오형五刑을 받을 때 탄식했다.

 

이 가운데 그가 맨 처음으로 탄식했을 때의 일은 지금 들어봐도 귀가 쫑긋해 진다. 여러모로 오늘날 우리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 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661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이런 고사를 읽고 나서도 새로운 법무장관 후보자가 언급했다는 그 유명한 '붕어, 개구리, 가재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큰 집에서 살며 돈과 지위와 권세를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온갖 치졸하고 부끄러운 짓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버젓이 저지르는 행태를 떠올리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쥐 얘기는 이쯤 하자. 때려잡고 싶은 쥐들이 설쳐댄 게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사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마침내 진나라로 떠났다. 이때 그가 스승에게 남긴 작별 인사는 이러했다.

 

"저는 때를 얻으면 꾸물대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만승의 제후들이 바야흐로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는 때여서 유세가들이 정치를 도맡고 있습니다. 또 진나라 왕은 천하를 집어삼키고 제帝라고 일컬으며 다스리려 합니다. 이는 지위나 관직이 없는 선비가 능력을 펼칠 때이며 유세가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 하여 억지로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낮은 자리와 곤궁한 처지로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영리를 미워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의탁하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닐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쪽 진나라 왕에게 유세하려고 합니다."(661∼662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그가 순자에게 고한 이런 '출사표'야말로 현실 정치 참여를 오래 전부터 열망하고 역설했던 조국 전 수석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듯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서울대 교수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민정수석에서 법무장관으로 또다시 자리를 옮기려는 행태를 두고 세간에서 폴리페서라는 비판이 일자, 자신은 '앙가주망'일 뿐이라고 역설했지만 그게 어느새 '조가주망'으로 조롱받는 형국이니, 그가 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 비판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게 생겼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니 말이다.

 

이사가 진나라를 찾아가 승상 여불위를 만난 뒤 그는 진나라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장사長史라는 벼슬을 얻었다. 그가 떠맡은 역할은 이랬다. '제후국의 명망 있는 사람들 중 뇌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에게는 많은 선물을 보내 결탁하고,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예리한 칼로 찔러 죽였다.'

 

때마침 이웃나라의 유세객이 찾아와서 진나라를 교란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그 일 때문에 진나라 왕족과 대신들은 외부에서 영입된(?) 빈객들을 모두 내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이사도 '축출 대상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 때 이사는 저 유명한 「간축객서()」를 써서 자신이 탄핵당할 위기를 도리어 승진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사의 문장은 흔히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와 비교될 만큼 명문으로 인정받는다. 그의 재능과 모략과 지혜를 음미해 볼 수 있으므로 비록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소 길게 인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신이 듣건대 관리들이 빈객을 내쫓을 것을 논의하고 있다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 목공은 인재를 구하여 서쪽으로는 융에서 유여를 데려왔고, 동쪽으로는 완에서 백리해를 얻었으며, 송에서 건숙을 맞이하였고, 진나라에서 비표와 공손지를 오게 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목공은 이들을 중용하여 스무 나라를 병합하고 드디어 서융에서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

 

이러한 사실을 보면 빈객이 어찌 진나라를 저버린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이 네 군주가 일찍이 빈객을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선비를 멀리하여 등용하지 않았다면 진나라는 부유하고 이로운 실익이 없고 강대하다는 명성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곤륜산의 이름난 옥을 손에 넣고, 수씨氏의 진주와 화씨氏의 구슬을 가졌으며, 명월주를 차고 명검 태아阿를 지니고, 섬리離의 준마를 타며, 취봉鳳의 기를 세우고 영타의 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보물은 하나도 진나라에서 나지 않는데 폐하께서 그것들을 좋아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는 것이라야 한다면 야광주로 조정을 꾸밀 수 없고, 코뿔소 뿔이나 상아로 만든 물건을 가지고 즐길 수 없을 것입니다. 정나라와 위衛나라의 미인은 후궁에 들어올 수 없고, 결제騠라는 준마가 바깥 마구간을 채울 수 없으며, 강남의 금과 주석은 쓸 수 없고, 서촉의 단청으로 채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후궁을 장식하고 희첩을 꾸며너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반드시 진나라에서 난 것이라야 된다면 완주의 비녀, 부기의 귀걸이, 아호縞의 옷, 금수의 장식도 폐하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세상의 풍속에 따라 우아하고 아름답게 차린 조나라의 여인은 폐하 곁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물동이를 치고 부缶를 두드리며 箏을 퉁기고 넓적다리를 치면서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참다운 진나라의 음악입니다. 정鄭, 衛, 상간間, 昭, 虞, 武, 象은 다른 나라의 음악입니다. 지금 물동이를 치며 부를 두들기는 것을 버리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며, 쟁을 퉁기는 것을 물리치고 소와 우의 음악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당장 마음을 즐겁게 하고 보기에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을 뽑아 쓰는 데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인물의 사람됨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고 굽은지 곧은지를 말하지 않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물리치고 빈객이면 내쫓으려 합니다. 그런즉 여색이나 음악이나 주옥은 소중히 여기되 사람은 가벼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에 군림하며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신이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인구가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도 용감하다."라고 합니다. 태산은 흙 한 줌도 양보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으므로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왕은 어떠한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아야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는 사방의 구분이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의 차별이 없으며, 사계절이 조화되어 아름답고, 귀신은 복을 내립니다. 이것이 오제와 삼왕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는 백성을 버려 적국을 이롭게 하고 빈객을 물리쳐 제후를 도와 공적을 세우게 하고, 천하의 선비를 물러나 감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며 발을 묶어 진나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도적에게 군사를 빌려 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대체로 진나라에서 나지 않은 물건 가운데 보배로운 것이 많으며,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인재 가운데 충성스러운 인물이 많습니다. 지금 빈객을 내쫓아 적국을 이롭게 하고 나라 밖으로 제후들에게 원한을 사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기를 바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664∼667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진나라 왕은 이사의 계책을 받아들였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뒤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승상 이사는 지나치게 권력을 추종한 끝에 '분서갱유'라는 전대미문의 악랄한 언론 탄압 정책을 건의하고 실행하는데 앞장섰고, 2세 황제 때에는 환관 조고와 권력 다툼을 벌인 끝에 결국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마천은 승상 이사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가 이사를 엄하게 꾸짖는 까닭은 간단하다. 당대 최고로 뛰어난 두뇌와 게책으로 무장한 그가 백성들의 삶에는 아랑곳 없이 오로지 진시황 곁에서 온갖 권모술수로 권력과 출세만을 추구한 끝에 결국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고 나라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이사는 여염집에서 태어나 제후들에게 유세하다가 진나라로 들어가서 진나라 왕을 섬겼다. 열국 사이에 틈이 생긴 기회를 타서 시황제를 도와 마침내 진나라의 제업을 이루게 했다. 이사는 삼공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높은 자리에 등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는 육경의 근본 뜻을 잘 알면서도 공명정대하게 정치를 하여 군주의 결점을 메워 주려 힘쓰지 않고 높은 작위와 봉록을 누리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주에게 아첨하고 좇으며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기만 했다. 조칙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였으며, 조고의 간사한 의견을 따라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제위에 오르게 했다. 제후들이 이미 뒤돌아선 뒤에야 비로소 군주에게 충고하려 했으니 때가 너무 늦었구나! 세상 사람은 모두 이사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오형을 받고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세속의 말과는 다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사의 공은 주공이나 소공과 어깨를 겨룰 만하였을 것이다."(698쪽)

 

 - 사마천, 『사기 열전_1』 , <이사 열전>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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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에톤아, 너는 큰 것을, 네 그 힘과 그토록 어린 나이에

맞지 않은 선물을 요구하는구나.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중에서

 

 * * *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뉴스들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장관 후보자 한 명을 두고 이번처럼 추악한 뉴스들로 도배된 걸 일찌기 본 적이 있었던가. 이번 사태의 본질은 명확하다. 온갖 위선과 오만과 결함 투성이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뻔뻔스런 인물을 정권의 핵심 요직에 재배치하려는 통치자의 오만이 빚어낸 요란한 소동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온갖 추악한 민낯이 만천하에 고스란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후보자는 자신의 욕심을 꺾을 줄 모른다. 통치자와 집권세력들은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식으로 더욱 절박하게 후보자 옹위에 나선다. 거역할 수 없는 민심의 흐름을 그런 보잘 것 없는 니약한 힘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심산인지 모르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소용없는 일에 헛심을 쓰면서 온갖 궤변들을 늘어놓는 군상들의 안쓰러운 몸부림이 그저 딱할 뿐이다.

 

여기서 잠시 흘러간 옛 정권들의 화려하거나 소박했던 온갖 '캐치프레이즈'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어느 정권이든 그들이 새로 출범할 때마다 잠시나마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거창한 구호 하나씩은 내걸었으니 말이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할 때는 '정의 사회 구현'을 내걸었었다. 서슬 퍼런 군부가 내세운 '정의'라는 구호가 한낱 군부 정권의 '통치의 도구'로 쓰였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0년대의 엄혹한 시절에는 정권 안보가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그 무슨 일이든 정권에 도움이 되면 그게 '정의'였고, 정권에 해가 되면 그게 '불의'였다. 정권에 항의하는 숱한 대학생들과 민주 투사들이 이 때 가장 많이 희생되었음은 새삼 되돌아볼 필요도 없다.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한다는 정부가 '정의'를 부르짖는 국민들을 '불의'로 탄압하는 일에 그토록 몰두한 시대도 없었다.

 

6.29 선언 덕분에 직선제로 뽑힌 대톨령은 노태우 씨였다. 그는 전임자의 군부 통치를 곁에서 지켜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보통 사람의 시대'를 구호로 내걸었다. 대통령 스스로 "이 사람 보통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주문 외우듯 읊었다. 정권이 심각하게 흔들릴 때마다 늘상 입밖에 내놓는 말인 즉슨 "이 사람, 믿어 주세요~" 였다. 그러는 동안 자신은 국민들을 속여 가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빼돌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못 믿을 사람이 바로 대통령 자신이었다.

 

YS 정부는 문민 정부로서는 뜻밖에도 '지방화와 세계화'를 부르짖었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나라를 절단내고 말았다. 대한민국이 하루 아침에 국제 거지로 전락한 끝에 IMF에 손을 내미는 처지로 뒤바뀌고 말았으니 말이다.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DJ 정권에서는 남북 화해와 포용을 위해 '햇볕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DJ 정부때 북한을 위해 쏟아부은 거액의 대북 지원금이 도리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도와준 꼴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표방한 건 뜻밖에도 '참여 정부'였다. 그러나 지도자의 순수하고도 열의에 찬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민들의 참여도는 역대 최악을 기록했고, 국민들로부터 한참이나 동떨어져 내내 겉돌던 '참여 정부'는 끝내 아군들한테까지 버림을 받은 끝에 탄핵 심판대에 오르는 수모까지 겪었다.

 

MB 정부는 어땠는가, '경제 살리기'와 '세계 일류 국가'를 기치로 내걸었지만, 정작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의 호주머니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스가 어떻다고요? BBK가 어떻다고요? 여러분, 이 모든 게 새빨간 거짓말인 거 아시죠?" 라고 호언장담했던 그 뻔뻔스런 얼굴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쳐다봤던가.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놀랍게도 '문화 융성'을 기치로 내걸었다. 자신의 치세 동안에 국운이 욱일승천할 줄로만 알았던 탓이다. 십상시가 온통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말이 떠도는가 싶더니 마침내 미르 재단과 K 스포츠 재단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하고, 정유라와 최순실이 온 국민들의 눈을 사로잡기 시작하더니, 통치자 자신은 구중궁궐에 유폐되는 처지로 내몰렸다가 끝내 탄핵되고 말았다. "저는 사리사욕을 위해 '한 푼의 돈'도 받은 적이 없어요."라며 눈물로 국민 앞에 거듭 호소해 봤지만 통치자의 과오를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는 국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의 국정 농단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전임 대톨령의 갑작스런 탄핵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권의 슬로건은 무엇이었던가. '국민의 정부'가 아니었던가. 지난 정권의 모든 적폐가 '나라의 진짜 주인'인 '국민'을 철저히 무시한 때문이라고 판단한 건 지극히 당연하고도 옳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권이 출범한지 얼마 지나기도 전에 '국민'들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국민의 정부'가 어느새 철벽의 '내로남불 정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에서 추진했던 거의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적폐' 아니면 '청산 대상'으로 변했고, 현 정부가 추진하는 거의 모든 일들이 '정의' 또는 '선함'으로 포장되었다.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삼아 숱한 과거사가 들춰지고 심판대에 다시 올려졌다. 5.18 민주화 운동과 세월호의 아픈 역사도 다시 불려나왔다. 가슴 아픈 과거사들 말고도 흥미 만점의 드라마적 요소를 지닌 온갖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폭넓게 재조명되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명분 하나면 충분했다. 별장 성접대 사건과 여배우의 자살 사건들이 재조명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충남 지사의 미투 사건과 경남 지사의 드루킹 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차츰 '내로남불'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권 들어 급작스럽게 확산된 '내로남불' 사상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인물은 단연 조국 수석이다. 청와대에 걸려 있다는 '春風秋霜'의 이념을 그처럼 정반대로 극대화시킨 인물도 없을 듯하니 말이다. 무릇 어느 정권에서나 정권의 존립을 위태롭게 흔드는 위기는 닥치게 마련이고, 그런 위기는 대체로 정권 실세들이나 측근들의 비리로부터 시작되는게 통례였다. 전두환 정권 때의 친동생 전경환 비리, 노태우 정권 때의 황태자 박철언 비리가 그랬고, YS 정권의 김현철, DJ 정권 시절의 삼형제(홍일, 홍업, 홍걸)가 그랬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는 친형인 노건평 씨가 전면에 나섰고, MB 정권 때까지도 나쁜 전통을 이어 받아 '만사형통'이라는 신조어를 창조했다. 박근혜 정권 때는 삶의 오랜 동반자였던 최순실이 막후의 실권자로 등장한 끝에 비선 실세의 위력을 유감없이 뽐내다 딸과 함께 몰락했다.

 

문재인 정권도 어느새 절반쯤 흘렀다. 현 정권의 실권자는 누가 뭐래도 조국 수석이다. 그에게는 문재인 정권의 가장 추악한 상징으로 굳어버린 '내로남불'의 화신이라는 측면에서도 정권의 최측근으로서의 면모에 한 점 손색이 없다. 오래도록 청와대를 지키며 정권의 최전선을 도맡아온 그는 지금도 청와대의 벽면을 보란 듯이 장식하고 있는 <춘풍추상>의 기묘한 역설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중이다. 춘풍추상의 정반대가 이제는 '내로남불'이 아니라 '조로남불'로 불려야 마땅할 지경이다. 조국 수석만큼 가장 고약한 방식으로 '정권의 표어'를 정면으로 뒤집어 엎은 인물이 우리나라 역사에 언제 또 있었던가.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어쩌면 정권의 2인자는 그 정권이 내건 기치의 지독한 패러독스를 숙명적으로 떠맡은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춘풍추상>의 역설을 가장 고약하게 실현한 인물이 이번 정권의 핵심 실세요, <내로남불>의 상징이 되어 버린 조국 수석이라는 사실은 지난 정권들의 사례에 비춰보면 그다지 크게 놀랄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면 저절로 깨닫게 되는 일이지만, 대개 치명적인 적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게 마련이다. 조국의 적은 조국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그걸 반증한다. 그가 내뱉은 숱한 말들과 그가 저지른 숱한 언행불일치의 행적들을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고 말했던 볼테르와 쇼펜하우어는 '조국의 경우' 하나만 보더라도 얼마나 예리하게 정곡을 찌른 셈인가.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 중에서

 

 

 

 

 

며칠 전 신문에 실린 만평 두 컷 때문에 쓰기 시작한 글이 너무 두서없이 길어졌다. 이 글에 등장하는 온갖 불행했던 과거 정권의 실세들을 '그 때 그 시절의 만평'으로 다시 살펴보지 못하는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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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고요가 말했다.

 

"아! 그 자신이 수양하는 데 신중하고 길게 생각하며 구족의 질서를 돈독히 하면 많은 현명한 인재들이 보좌할 것이니 가까운 데에서 먼 곳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우가 그 훌륭한 말에 절하며 말했다.

 

"옳소."

 

고요가 말했다.

 

"아! 인재를 알아볼 수 있으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가 말했다.

 

"아! 완전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요제도 어려워하셨소.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은 지혜로운 일이므로 [지혜가 있으면] 인재를 관리로 임명할 수 있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므로, [은혜가 있으면]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오. 지혜로울 수 있고 은혜로울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환두를 근심하겠으며, 무엇 때문에 유묘를 내쫓았겠으며, 무엇 때문에 교묘한 말과 꾸미는 얼굴빛으로 아첨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겠소?"

 

고요가 말했다.

 

"옳습니다. 아! 또한 일을 행할 때에는 아홉 가지 덕이 있어야 하며 말을 할 때에도 덕이 있어야 합니다."

 

이어 말했다.

 

"일에 종사하기 시작하면 관대하면서도 근엄하고, 온유하면서도 주관이 뚜렷하고, 선량하면서도 공손하고,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경건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굳세고, 곧으면서도 따스하고,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고, 과단성 있으면서도 성실하고, 고집스러우면서도 의리에 맞아야 합니다. 이 아홉 가지 떳떳한 덕행을 밝히면 길할 것입니다. 날마다 이들 중 세 가지 덕을 실천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공경한 자세로 분발하면 가문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날마다 이들 중 여섯 가지 덕을 공손히 실행하면 분명히 나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덕과 여섯 가지 덕을 합하여 널리 베풀어 아홉 가지 덕을 모두 실천한다면, 뛰어난 인재가 관직에 있게 되어 모든 관리가 엄숙하고 신중할 것이니, 사람들을 간사하고 음란하며 기묘한 꾀를 부리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직위의 적임자가 아닌데도 관직을 차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천하의 일을 어지럽힌다고 하는 것입니다."(83∼85쪽)

 

 - 사마천, 『사기 본기』, <하 본기> 중에서

 

(나의 생각)

 

참으로 명쾌하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 * *

 

당시에 하나라의 걸왕이 포악한 정치를 하고 방탕함에 빠져서 제후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탕이 즉시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통솔하니 이윤도 탕을 따라 나갔다. 탕은 직접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하고 나서 마침내 걸왕까지 정벌하고자 했다. 탕이 말했다.

"여러분은 모두 와서 내 말 좀 들으시오. 나처럼 형편없는 사람이 함부로 난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니오. 하 왕조는 죄가 많고 내가 그대들의 원망을 들었기에 나는 하늘이 두려워 감히 정벌하지 않을 수 없소. 지금 하나라가 죄가 많아 하늘이 그를 처단하라고 명하셨소. 지금 여러분 가운데에는 '우리 군주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 내 농사를 버려두고 전쟁에 참여하였으니 무슨 정사를 한단 말인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또 여러분 중에는 '하나라 걸왕이 죄가 있다는데 무슨 죄인가?'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하나라 왕은 백성들이 농사짓는 데 쓸 힘을 모조리 못 쓰게 하고, 하나라의 재물을 모조리 빼앗아 백성들은 거의가 게을러지고 화목하지 않게 되었소. 그래서 '이 태양은 언제쯤 사라질까? 나와 너와 함께 없어져 버리리라!'라고 말하게 되었소. 하나라 왕의 덕이 이와 같으니, 지금 내가 반드시 가야만 하오. "(100∼101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은 본기>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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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사이에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갈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아베 총리는 주한 일본 대사를 새로운 인물로 교체할 모양인데, 조만간 부임할 신임 대사의 프로필이 새삼 화제다. 그의 장인이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이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서의 신임 대사의 경력 보다는 그의 장인에 얽힌 이야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가면의 고백』, 『금각사』, 『우국(憂國)』 등을 쓴 미시마 유키오야말로 세계 대전에서 참패한 이후 극도로 억눌려 있던 '극우 일본'을 갑자기 깨어나게(?) 만든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한국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었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쓴 『우국(憂國)』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신경숙 작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이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마저 '자신도 모르게' 그의 글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겠는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는 솜씨로 말이다. 명백한 표절조차 순순히 인정하지 못했던 낯부끄러운 여류 작가의 '이중의 과실'을 여기서 새삼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일본이 점차 팽창하는 제국으로 변모하던 쇼와(재위 1926∼1989)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0대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20대와 30대에 일찌감치 일본 문단의 최정상에 올랐다. 40대에 이미 두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불과 45세의 한창 나이에 느닷없이(!)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일본 사람들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 속에 몰아 넣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래 탐미주의의 극치로 평가받는 『금각사』와 같은 걸작을 남긴 천재 작가가 하루 아침에 (아베보다도 더 아베스러운) 꼴사나운 모습으로 '일본 자위대'를 향하여 '깨어나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할복 자살로 삶을 마감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느닷없는 행동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미시마 유키오의 극단적인 할복 자살에 얽힌 전후 사정들을 들여다 보기 전에, 그의 문학적인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의 갑작스런 우경화와 충격적인 자살이 그만큼 더 충격적으로 느껴질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세출의 걸작인 『금각사』를 발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문학 청년이었다. 그 무렵까지도 그는 31세의 노총각이었다. 금각사를 발표하고 2년이 지난 1958년에 결혼할 때 주례를 맡은 인물은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였다. 그런데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설국』의 작가로 귀착되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가 그보다 앞서 세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올랐다가 아깝게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다니자키는 1958년에는 펄 벅의 추천으로 노벨상 후보에 처음 올랐고, 1963년과 1964년에는 최종 후보까지 올라 수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수상에 실패했다.(1964년에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에게 밀려났다.) 결국 1965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 1968년에 가와바타에게 노벨상이 돌아가자 "다니자키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문학상은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지 5년 후인 1970년에 비극적인 자살로 마감했는데,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불과 2년 뒤인 1972년에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하고 만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해인 1965년과 2년 후인 1967년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의 문학 천재들은 모두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나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노벨상을 수상했고, 결혼식때 주례와 신랑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다시 미시마의 죽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자살은 당시에도 세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차제에 다시 한번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그의 죽음이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부활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어렴풋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966년 민병대 "방패의 모임(楯の會)'를 결성, 우익 정치 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방패회는 무장 투쟁 훈련을 했다. 이는 이후 일본의 신우익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시마는 1968년에 <문화방위론>을 간행했다. 이는 무질서할 정도로 자유롭게 전개되어 왔던 일본 문화의 정신과 '미의 총람자(總攬者)'로서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물질 문명의 더러움으로부터 구해내고, 또한 공산주의의 손으로부터 지키려면 무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  1969년 우익 운동가 에토 고사부로의 자결에 큰 영향을 받아 1970년 11월 25일 방패의 모임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우수 자위대원 표창'을 명목으로 들어가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과 면담하던 중에 가지고 간 일본도로 위협해 인질로 잡은 뒤 부하 8명을 부상하게 했다. 총감의 방 앞 발코니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향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 헌법 개정을 요구, 자위대의 쿠데타를 촉구하는 '이치가야 연설'을 한 뒤 약 5분 후 모리타 마사카쓰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출처 :위키백과)

 

미시마의 자살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일본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내면에 끈끈히 흐르는 '침략 본성'이 어떻게 일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극우 본성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음은 누구라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그의 자살 이후에 새로운 우익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그 흐름이 오늘날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자민당 정권에까지 깊숙히 스며있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그러니 미시마의 자살이 어찌 한낱 '극우 사상에 심취된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로 간단히 치부될 수 있겠으며, 그의 맏사위가 차제에 신임 주한 일본 대사로 부임하는 일이 어찌 우연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이미 49년 전에 죽은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을 둘러싸고 오늘날의 우리가 그의 죽음을 너무 과장해서 새삼 돌이켜 보고 예민하게 재해석할 필요는 없다. 또한 그의 죽음보다 14년이나 앞서서 발표된 『금각사』라는 걸작 소설 속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극우 사상의 씨앗들'을 새삼 꼬치꼬치 찾아내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을 지도 모른다. 굳이 맹자나 순자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인간에게는 누구한테나 타인을 지배하려는 나쁜 욕망이 내재되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 결합하게 되면 더욱 맹렬하게 불타 올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은 어느 시대에나 능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각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건축물이 되었고, 그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한해 수백 만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이 건축물이 지어진 해가 공교롭게도 1397년이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해보다도 딱 1년이 앞섰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이 소설 속에 미국과 맞서 싸우던 '군국주의 일본'이 자주 등장하고, 금각사가 실제로 '방화범'에 의해 완전히 전소된 때가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 정확히 7일이 지난 때였고, 작품 속의 주인공이 한국전쟁 때문에 금각사를 불태우려는 결심을 더욱 앞당겼다는 사실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 금각사(출처 : 위키백과)

 

 

6월 25일, 한국에 동란이 발발했다. 세계가 확실히 몰락하고 파멸하리라는 내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서둘러야 한다.(342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제9장>

 

 

소설 『금각사』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 극우주의 아베 정권을 강력하게 이어주는 뚜렷한 연결고리들은 그런 사소한 우연 속에 숨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웃 국가에 대한 악랄한 식민 지배뿐 아니라, 가장 추악한 범죄인 2차 대전 당시의 끔찍한 만행들까지도 뉘우치지 못하고, 도리어 멀쩡한 평화 헌법을 개정하지 못해 저토록 안달하는 아베 정권의 추악함은 어쩌면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훨씬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욕망하지만 차지하지 못하고, 행위하지 못하고, 지배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해코지 본성' 또는 '파괴 본성'이 아닐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를 완성한 이후로 죽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에 급속도로 '우경화'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숙아로 태어난 미시마는 어려서부터 육체적인 열등감에 몹시 시달렸던 탓에 12세까지도 할머니 밑에서 양육되었으며, 또래 소년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거나, 혹은 조모가 지정해 준 이웃집 여자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런 열등감이 얼마나 지독했겠는가. 그가 마침내 그런 열등감을 극복한 계기가 『금각사』를 연재하는 동안에 병행했던 '육체미 운동'이었다.

 

 

"이러한 열등감을 30년이나 짊어지고 온 것이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로 어리석게 여겨진다."

 

미시마가 육체미 운동에 열중하여 하루하루 근육이 붙어나가는 동안 『금각사』의 주인공인 미조구치 또한 '말더듬이'이자 '행위 불능자'(그는 대학교에 다니는 건강한 청년이었지만 '동정'을 떼는 데 여러 번 실패한다.)에서 차츰 벗어나 마침내 '미의 화신'인 금각사를 불태우는 대담한 행위를 열망하기에 이른다.

 

과거의 육체적인 열등감으로부터 탈피한 작가 미시마와 금각에 방화하여 행위의 세계로 뛰어든 미조구치는,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는 마지막 문구에 공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미시마는 『금각사』에 '개인의 소설'이라는 별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면의 테마'에 중점을 두고 『금각사』를 평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다. 젊은 시절 특유의 어두운 고뇌와, 그 고뇌를 극복하며 성장하려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이 작품의 곳곳에 숨겨져 있다.(401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작품 해설> 불후의 명작 《금각사》의 테마는 무엇인가 

 

 

 소설 『금각사』는 명백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며,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개인의 소설'이라는 사실이 새삼 우리에게 크게 부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금각사』를 읽는 독자가 오늘날 '아베 정권'으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들의 추악한 본성을 소설 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고, 그러한 재발견이야말로 미시마 유키오가 그토록 치열하게 그려내고자 애썼던 『금각사』 방화범의 행위와 극우파 아베 정권의 폭주를 연결시켜주는 '비밀 통로의 발견'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 방화범에 얽힌 실화'를 자신의 '고백 소설'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자료 조사에 매달린 기간만 무려 5년이었다. 그는 방화범의 이야기 속에 자신을 투영시키기 위해 일부러 '수기 소설' 내지 '고백 소설'의 형식을 취했으며, 바로 그 점이 독자들을 강력하게 몰입하도록 만든다.(특정한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끝끝내 그 대상을 파괴하고야 만다는 이야기가 '수기' 형태로 쓰였다는 점에서 소설 『금각사』는 언뜻 『롤리타』를 연상시키키도 한다. 롤리타에 집착한 주인공 험버트의 수기 속에 작가 나보코프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겹쳐져 있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롤리타』는 『금각사』보다 1년 앞선 1955년에 출간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조구치가 '말더듬이'라는 육체적 결함 때문에 겪는 극심한 열등감은 차츰 '아름다움을 향한 구애의 좌절'로 이어진다. 자신의 이상형이나 마찬가지였던 우이코를 만나러 새벽녘에 골목길에서 숨어 기다렸다가 막상 마주치고 나자 입도 뻥긋 못하고 망신만 당한 게 대표적이다. 그런 좌절들은 나중에 성인이 된 뒤로도 줄곧 이어진다. 대학 동창생인 가시와기가 거듭 여친들을 소개해 주지만 미조구치는 거듭 '행위의 문턱'에서 좌절을 겪는다.

 

가시와기는 나를 인생으로 재촉해주는 친절 또는 악의를 내가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말한 바와 같다. 중학교 시절에 선배의 단검 칼집에 흠을 냈던 나는, 인생의 밝은 표면에 대한 무자격을 이미 내 자신 위에 명확히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시와기는 뒷면에서 인생에 도달하는 어두운 샛길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친구였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 보이면서도,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꿔 우리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이라 해도 좋았다.(180∼181쪽)

 

 

인식이나 욕구가 행위로 이어지지 못하는 극단적인 좌절감은 마침내 '금각사'로 전이된다. 금각사야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줄곧 '완벽한 미의 화신'이자 '우이코의 물질화된 대상'이었음에도 그는 금각사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줄곧 바라만 본다. 오매불망 '금각사와의 합일(合一)'을 꿈꾸던 그는 금각사 주지로부터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한 일을 계기로 학업마저 포기한 끝에 출분((出奔)하고, 금각사를 불태우기로 마음 먹는다.

 

문득 나는 가시와기가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들이 갑자기 잔학해지는 것은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했던 그 말이.

……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276∼277쪽)

 

 

"내가 인생에서 최초로 부닥친 난관은 아름다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회상한 〈나〉는 2차 대전 중의 종말관 속에서 '금각사와 함께 불에 타 죽는 생의 결정적 순간'을 바랬지만 전쟁은 허망한 패망으로 끝나고, 전후의 절망과 고독 속에 살아가야만 한다. 주인공 미조구치의 이런 정신 편력이야말로 '먼 훗날 극우의 상징'이 된 미시마의 정신 편력에 다름 아니다. '극우'란 무엇일까. 결국 '화창한 봄날' 같은 따사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상태도 포함하는 개념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의 참화와 함께 불타오르는 금각을 보지 못하고 절망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좌절감이야말로 오늘날 '극우 일본'의 상징이 된 아베의 어두운 내면의 일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극우가 극단에 이르러 결국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한 게 결국 '금각사에 대한 방화'이고, 자위대에 무단 침입하여 '자위대여, 무장하라'고 외쳤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고, 미우나 고우나 이웃으로 서로 공생하며 살아온 이웃나라를 다시금 힘으로 짓밟으려는 '아베의 폭주'가 아닐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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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8-18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란 일본 작가는 70년대에 나온 부도덕 교육강좌란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시니컬한 그의 독설에 맘에 들어 그에 대해 알아보니 지위대에 무력 봉기를 선동하다 할복 자살을 한 극우 인사란 것을 알게되고 그에 대해 관심을 끈 기억이 나네요ㅡ.ㅡ

oren 2019-08-18 23:40   좋아요 0 | URL
<부도덕 교육강좌>라는 책도 있었군요!
그런데 목차를 찾아 보니 참 꺼림칙한 내용들이 많네요...
아베스러운 치졸한 것들도 많고요...
* * *
남에게 폐를 끼치고 죽어라··28
친구를 배신하라··76
약자를 괴롭혀라··82
자만심을 가져라··89
약속을 지키지 마라··106
“죽여버려!”라고 소리쳐라··112
죄는 남에게 덮어씌워라··129
은혜는 잊어라··159
남의 불행을 기뻐하라··165
악덕을 많이 쌓아라··171
죽은 뒤에 험담하라··215
끝이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405

미미 2020-05-0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출판하셔도 될만큼 훌륭한 글입니다. 덕분에 놀라운 사실들을 알았네요. 최근에 어찌어찌해서 배우게 된 일본 작가들이 마침 저렇게 연관되어져 있다는 것도 신기하구요. 역시 더 찾아보고 공부할것이 많구나 결론 내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글 올려주세요. 틈틈히 oren님의 다른 리뷰들도 읽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