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워라!

잘생긴 인물들이 여기에 참 많기도 하구나!

인간은 참 아름다워! 오 멋진 신세계여,

이러한 종족이 살다니.

 -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5막 1장> 중에서

 

올더스 헉슬리(1894∼1963)

 

 * * *

 

올더스 헉슬리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두루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지닌 독특한 지성의 면모를 생각하면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이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는 문학과 철학은 물론 과학과 심리학을 비롯한 온갖 학문 분야에 두루 박학다식한 인물이었고,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언제나 근본적으로 사색하고 규명하려고 평생 동안 애쓴 인물이었다.

 

그의 지성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집안의 가계도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 집안과 문학가 집안의 피를 고루 물려받았다. 더구나 그의 할아버지는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시학 교수이자 『교양과 무질서』로 유명한 매슈 아놀드의 조카딸이었고, 그녀 스스로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여류시인이었다. 올더스의 형인 줄리안 헉슬리는 저명한 생물학자이면서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복동생인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생리학자였다.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에 대해서는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의 서문에도 등장할 정도로 탁월한 생물학자였다. 그는 단테를 원어로 읽기 위해 이태리어를 배울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이후 종교계의 극단적인 반발과 반론을 최선두에서 가장 논리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반격한 중심 인물이었다. 인간의 조상이 동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대표작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훗날 헉슬리 가문을 관통하는 중요 연구 관심사가 되었으며, 올더스 헉슬리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그는 존 러스킨, 틴덜, 매슈 아놀드, 토머스 칼라일 등과도 두루 교류했다.(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틴덜은 버지니아 울프가 쓴 『댈러웨이 부인』에도 함께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는 토머스 헉슬리와 친구 사이였다.)

 

올더스 헉슬리의 아버지 레오나드 헉술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재학중에 부인 줄리아 아놀드와 만났다. 그녀는 옥스퍼드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훗날 시집을 출간하여 삼촌인 매슈 아놀드로부터 찬사들 받기도 했다. 레오나드는 시골에서 학교 교감으로 지냈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에는 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 부부의 3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올더스 헉슬리는 14세에 어머니를 잃고 큰 충격에 빠진다. 시력이 나빠져 또다른 충격을 받은 그는 각막염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다가 결국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연극·예술 비평가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작품 활동 내내 언제나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온갖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엄청난 백과사전적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초래할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작품은 『멋진 신세계』 말고도 『원숭이와 본질』 같은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동경해 마지않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를 그린 작품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섬』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 작품을 두고 그가 스스로 논평한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역사, 폴리네시아 인류학,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된 서적, 그리고 불교 경전, 약리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교육에 관한 논문들, 더불어 소설, 시, 비평, 기행문, 정치 논평, 철학자에서부터 배우, 정신병원의 환자로부터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재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토피아적 방앗간의 깔때기 속으로 곡물이 되어 들어가 이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 하나에 대한 그의 관심 분야가 이 정도로 폭이 넓었으니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관심 분야가 얼마나 다양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다.

 

온갖 분야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였고, 그런 세계가 미래에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될까.

 

포드 기원 632년으로 설정된 '멋진 신세계'의 시대 배경은 대략 2540년쯤이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이다. 인간들은 더이상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모든 인간들은 시험관에서 수정되고 조건에 맞게 배양되어 조건반사 양육을 받으며 자라난다. 소설에 맨 처음에 등장하는 회색 빌딩의 중앙 현관 위에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방패 모양의 현판에는 '공유 · 균등 · 안정'이라는 세계 국가의 표어가 달려 있다. 이 두 가지가 '신세계'를 상징한다.

 

인간들이 인공부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번거로운 자녀양육 의무가 뒤따르는 결혼제도도 사라진다. '만인은 만인을 위한 공유'가 세계 국가의 이념이다. 격정을 유발하기 마련인 '연인 관계'라는 것도 없다. 자유 연애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이고, 섹스 파트너를 오래 독점하는 연인 관계는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금기로 여겨진다. 첨단 의학의 발달 덕분에 인간의 신체는 육십이 되도록 젊음을 유지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체 처리소'로 직행한다. 죽음은 더 이상 회피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점은 양육 과정에서 세심하고 철저하게 주입식으로 교육된다. 더군다나 부모, 자녀, 친인척이 따로 없는데 그토록 죽음을 슬퍼하고 연연할 이유 자체도 이미 사라지고 없다. 미래 세계는 강력한 중앙 통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유와 균등과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미래 세계의 또다른 특징은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점이다. 전세계 인구는 20억 명으로 제한되며, 피라미드 식으로 이뤄진 각각의 계급에 필요한 인원은 철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생산되고, 조건반사 양육소에서 '각각의 계급에 가장 알맞은 정도로' 양육 받는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검증되고 정착된 시스템이다.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색 빌딩에서 시작된 미래 세계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 소장의 안내를 받는 견습생들 덕분에 '첨단 생산 시설'을 두루 살펴보는 행운이 뒤따르지만, 센터 내부의 분위기는 실험실용 플라스트와 니켈과 스산하게 빛나는 도자기류뿐이다.

 

모든 것이 살벌함을 겨루고 있었다. 거기서 근무하는 자들은 흰 작업복을 입었고 손에는 시체같이 창백한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조명은 차갑게 죽어 있었다. 유령 바로 그것이었다.(7쪽)

 

도무지 등장 인물들 사이의 대화 조차도 없을 듯한 숨막히는 세계에서도 사건들은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난다. 알파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최면교육 전문가로 근무하는 버나드 마르크스와 감정공학 대학의 감성교육 엔지니어인 헬름홀츠 왓슨은 신세계의 통치체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의 반감과 혐오를 품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일종의 과잉상태에 있으며 스스로의 개성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몰개성적인 통치 체계에 종종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한다. 그들은 서로가 공감대를 가진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차츰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버나드는 성격마저 우울하고 소심한 데다 사교성이 부족한 탓에 또래의 여자들과 제대로 사귈 기회도 갖지 못한다. 사교적이면서 발랄한 처녀인 레니나는 수줍음이 많은 버나드에게 거꾸로 대쉬하지만 그녀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돈다. 이들 커플은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해 휴가 기간 동안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함께 놀러갈 계획을 세운다. 야만인들은 고도로 문명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된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며, 오랜 옛날의 생활 습관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격리된 채 살고 있다. 안내자들을 따라 조심조심 야만인들의 풍습을 둘러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생활 습관을 지닌 '야만인들의 풍속'에 기겁을 한다. 그곳은 몹시 불결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흉측한 늙은이들도 많았고,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기우제를 올리는 기이한 원시 풍속 등 어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비록 레니나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모습일지 몰라도 예민한 감성을 지녔던 버나드는 도리어 그런 삶의 모습에 깊은 흥미를 품는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래 전에는 문명세계에 속해 있다가 언젠가 우연한 사고 때문에 거기서 정착해 살고 있는 린다라는 늙은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25년 전에 인공 부화 센터 소장이던 남자 친구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놀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는 바람에 끝내 실종 처리된 여성이었다. 베타 계급에 속했던 그녀는 거기서 존이라는 아들을 낳아 키웠지만 원주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온갖 간난고초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해 왔던 터였다. 

 

그녀는 그곳 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아들에게 문명 세계에서 지냈던 행복한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날을 꿈꾸며 아들에게 글과 노래까지 가르쳐 준다. 그때 존이 심취해서 읽은 책이 셰익스피어 전집이었다. 존은 비록 책 속의 모든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온갖 다채롭고 풍성한 감성들이 넘쳐나는 인간미 넘치는 세계를 동경하게 된다. 버나드와 레니나는 린다와 존을 설득시켜 그들을 마침내 문명 세계로 이끌고 나온다. 무료한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핍박받고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오던 존에게는 '런던으로 가겠느냐'는 버나드의 제안이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문명세계로의 이주 제안에 대해 존이 감격에 벅차 내뱉은 대답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미란다가 외쳤던 말이었다. 멋진 신세계!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존이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 여기에 있는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인가!" 그의 홍조는 갑자기 더욱 깊어졌다. 그는 레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 인조견 옷을 입고 피부는 젊음과 영양크림으로 윤기 있고, 포동포동하고 자애롭게 미소짓는 천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음성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오오, 멋진 신세계여!" (177쪽)

 

버나드와 레니나 덕분에 '야만인 보호 구역'에서 문명 세계로 끌어올려진 존과 린다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만다. 린다는 늙고 뚱뚱한 데다가 모습마저 추하게 일그러져 문명세계에서는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다. '야만인 씨'로 불리는 존도 마찬가지다. 체제 부적응자로 분류된 버나드는 언제라도 험지 아이슬란드로 전출당할 위기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런 좌천 발령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존을 활용한 실적 쌓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존은 문명 세계로 올 때부터 미모에 이끌렸던 레니나에게 차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자신도 모르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자주 중얼거리면서.)

 

촉감 영화관에서 존과 함께 데이트를 즐긴 이후로 레니나는 존이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아챈다. 자유 연애에 익숙한 레니나는 오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적당한 기회를 틈타 야만인의 방으로 먼저 찾아간다. 그러나 정작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던 존은 제발로 찾아온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도리어 밀쳐낸다. 연애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마땅할 듯한 섬세한 밀당 단계가 생략된 걸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희극적인 모습이야말로 가치관이 전도된 문명 세계와 야만인 사이에 펼쳐지는 '아이러니의 극치'다.

 

"기절할 때까지 키스해줘요. 오! 내 사랑, 안아주세요. 아늑하게 ……."

 

야만인은 그녀의 팔목을 잡더니 어깨를 잡았던 그녀의 손을 풀고 팔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밀었다.

 

"오! 아파요! 당신은 나를…… 오!"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포로 인하여 고통도 잊은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보였다 ㅡ 아니, 이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전혀 낯선 인간의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미친 듯한 분노로 경련하는 얼굴이었다.(245∼246쪽)

 

존은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잊고 행복감에 빠져들도록 도와주는 '소마'를 배급하기 위해 모여든 인조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가득 담아 외친다.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그렇게 소동을 부린 끝에 존은 버나드와 헬름홀츠와 함께 서유럽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려간다. 총통의 서재로 안내된 야만인 존은 도리어 총통을 향해 '인간다운 삶'을 역설하고, 몬드는 한편으로는 야만인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의 기복조차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정된 문명세계가 더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행복을 위해서는 예술, 과학, 종교까지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의 존재까지도. 그들 사이의 격론은 야만인 존이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칠 때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305쪽)

 

야만인은 마침내 그곳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외딴 데로 도망친다. 그러나 그곳도 끝내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다. 언론의 집요한 추격을 피하지 못한 그는 열광적인 취재 열기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가 은신처로 피난하기로 결심하면서 버나드에게 했던 말은 이랬다.

 

"나는 문명을 먹었어."

"문명이 나에게 독을 먹였어. 그래서 나는 오염되고 말았어."

 

『멋진 신세계』는 1949년에 쓰인 조지 오웰의 『1984』보다는 조금 덜 우울하다. 오웰의 작품에서 나타난 1984년의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그려져 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고도의 전체주의 지배 체제 하에서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크린을 통해 철저하게 감시받고 통제되며,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반체제 인사들은 사상 경찰들을 통해 색출되고, 혹독한 고문을 거쳐 개조되거나 끝내 흔적도 없이 제거된다. 거기엔 어떠한 자유나 방임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미래 세계는 비록 전체주의 지배 체제인 점에선 닮아 있으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끝에 도래하는 '인간 본연의 삶이 파괴된 황량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강조되기 마련인 공유와 안정 같은 가치들이 도리어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만다는 헉슬리의 경고는 미래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얻을 주제임에 틀림없다. 또한 헉슬리가 내다본 까마득한 미래 세계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시험관 아기는 어느새 보편적인 자녀 획득 방식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유전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은 질병과 노화에 대한 극복 능력을 갈수록 확대하고 있으며, 인간 생활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생명공학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첨단 과학 기술에 대한 숭배가 과도한 측면도 간과하기 어렵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출판된지 겨우 87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세상은 온갖 혁신적인 기술들로 넘쳐나는 판국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주인공들이 즐겼던 '촉감 영화관'은 현실 세계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과 같은 실감형 기술들도 앞을 다투듯 현실화되고 있다. 그러나 자율주행과 인공지능에 기반을 두고 움직이는 미래 기계 문명은 사소한 사고 하나로도 끔찍한 대혼란을 일으킬 위험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인은 만인을 위해 공유한다'는 공유 이념 또한 마냥 좋을 리만은 없다.

 

『멋진 신세계』는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된 멋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예언적 우화에 가까운 소설이다. 또한 작품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작품 속엔 작가 특유의 유쾌한 아이러니가 곳곳에 가득하다. '멋진 신세계'를 꿈꾸며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고도 문명 사회로 뛰어든 존이 도리어 그 세계를 지배하는 총통에게 대들듯이 싸우며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가치를 역설'하는 장면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홀로 독학하다시피 셰익스피어를 탐독한 그는 인간 삶의 궁극적인 본질들을 절묘하게 꿰뚫는 듯한 명대사들을 아무 때라도 주저없이 쏟아낸다. 그때마다 문명인들은 야만인 청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한다. 야만인 존은 비록 문명세계로부터 격리된 곳에서 외계인 취급을 받을 정도로 고통을 겪으며 자랐지만 셰익스피어로 상징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터득한다. 인간의 행복이란 결코 그저 얻어지는 알약 같은 것이 아니며, 행복과 고뇌와는 표리관계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끝내 문명 세계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야만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결말이 너무 비참하게 여겨졌던 탓일까. 올더스 헉슬리는 이 작품을 출간한지 14년이 흐른 뒤 이 소설의 재판본 서문에 작가의 입장을 새롭게 추가했다. 『멋진 신세계』를 처음 쓸 때만 하더라도 야만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었다고. 문명국에서 미치거나 야만국으로 컴백하거나. 그러나 다시 그 작품을 쓴다면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노라고.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세계를. 그런 작업으로도 부족했던 것일까. 작가는 1958년에 기어이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썼다. 그 작품의 이름은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였다. 인간의 주요 관심사들에 대하여 그처럼 빠짐없이 의견을 표명한 인물도 찾기 어렵다. 미래의 고도 문명 사회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한 독자들은 한번쯤 올더스 헉슬리가 창조한 '멋진 신세계'를 다녀올 필요가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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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2-15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84』는 읽었는데『멋진 신세계』는 읽지 못했어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305쪽) - 그야말로 뒤집힌 생각이네요. 우리 고정관념의 반전을 보여 주네요.


oren 2019-02-15 14:35   좋아요 1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1984』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다가올 미래‘로 그린 소설이 되어버렸지만,
『멋진 신세계』는 여전히 다가올 미래를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더 오래 살아남지 싶어요.^^
그렇다고 조지 오웰의 작품이 올더스 헉슬리보다 덜 뛰어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의 모순‘을 적나라하면서도 심오하게 파헤친 작품이나까요.

외유내강 2019-07-0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930년대에 미래를 예언한 소설이기만 하지만 과학과 기술 등의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는 예측이 딱 들어맞는거 같아요. 인간의 행복이 단순히 알약하나로 얻어지는 미래세계가 읽는사람 입장에서는 지구 밖에서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무섭게 느껴지지만 정작 내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알파나 베타 같은 사람이였다면 그게 무서운지도 모르고 훈련받은대로 만족하며 살았을꺼 같아요...모든 사람들이 회의를 품지 않는 안정된 틀 속에서 의심을 품거나 의식을 가지고 체제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듯 하거든요..어쩌면 우리 모두 점점 멋진 신세계로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를거란 생각이 듭니다.

oren 2019-07-02 18:10   좋아요 0 | URL
쓰여진지 100년 가까이 지난 소설인데도 오늘날의 여러 ‘실제 상황들‘을 날카롭게 예견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놀라운 소설임에는 분명한 듯합니다.^^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 몽테뉴

 

 * * *

 

우리가 지나온 세월을 잊어버리기는 얼마나 쉬운가.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면서 유난스러울 정도로 나이에 대한 흥미로운 단상들을 자주 내보였다. 그가 재치있는 말로 풀어 놓은 각각의 나이에 대한 느낌들은 음미할 때마다 새롭다. 그는 카메라와 같은 기막힌 물건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시대를 살았다. 그러니 자신을 그려 놓은 옛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의 변화를 깨닳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젊을 때의 한 순간을 붙들어 매는 작업이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이었을까. 초상화를 그려줄 화가부터 찾아야 했고, 예약 날짜를 잡아야 했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꼼짝도 못하고 자리를 지켜야 했을 터이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쉬울 지경이다. 더군다나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순식간에 여러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전파할 수도 있다. 수단은 도처에 널려 있다. 단체 카톡방,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페, 블로그, 인터넷 서재 등등 도처에 SNS는 넘쳐 나니까.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정은 지금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카메라는 대표적인 귀중품이었고, 사진을 찍는 데는 적잖은 돈이 들었다. 필름값 따로, 현상비 따로, 인화비 따로, 때로는 사진을 조금 더 크게 확대하는 데에도 별도의 비용이 들었다. 그러니 사진을 남기는 일은 아주 특별한 때에나 생각할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추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초상화나 사진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 특정한 장소, 특정한 음악, 특정한 음식, 특정한 사물만 있어도 우리는 단숨에 과거로 뛰어들 수 있다. 그런 사물들 가운데 책이 빠질 수는 없다. 맞아, 맞아, 바로 그 무렵에 내가 그 책을 읽었었지, 하는 느낌이야말로 그 순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강력한 사다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더군다나 그 책을 읽은 기록까지 더불어 발견한다면!

 

그런 기록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물건 하나가 바로 일기장이다. 옛날엔 노트조차 귀한 물건이어서 일기장 따로, 독서 노트 따로, 하는 식으로 여유를 부릴 계제도 아니었다. 아무튼 일기장에 담긴 독서 기록이야말로 특정한 사람들에겐 아날로그로 남겨진 최고의 기록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는 겨울호랑이 님의 글을 읽다가 홀연 '채근담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채근담을 내가 언제쯤 읽었더라,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게 너무 까마득한 과거였기 때문이다. 아마 30년은 족히 지났음에 틀림없었다. 찬찬히 따져보니 아직 40년은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채근담을 읽은 건 대학교 2학년 진학을 코앞에 둔 무렵이었다. 책 내용이 그 당시 내 마음에 얼마만큼 쏙 들어 왔던지, 한자 공부를 겸한다는 마음으로 하루에 얼마씩이라도 꼬박꼬박 일기장에 옮겨 보자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그런 마음이 아직까지도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 그런데 저 책 속에 담긴 내용은 어느새 내 기억 속에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굳은 결심마저 느껴지는 한자 또한 까마득히 낯선 글자로만 느껴진다.

어느새 내가 이토록 그때의 나 자신과 멀어졌단 말인가.

 

 

 

 

두 번째 문장을 보니 더욱 기가 막힌다.

점염, 기계, 연달, 박로, 곡근, 소광 등등이 모두 딴 세상의 낱말 같다.

도대체 언제 내가 저런 한자를 쓴 일이 있기나 했던가 싶다.

 

 

 

 

아하, 옥온주장(玉韞珠藏)이라는 말도 있었구나!

 

 

 

 

이 대목은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얼마나 다행인지!

 

 

 

 

만일 말마다 귀에 기쁘고, 일마다 귀에 쾌하면,

이는 곧 인생을 들어 짐독(鸩毒) 속에 묻음이니라.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짐독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낯설고 멀고도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짐새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새이길래 깃에 있는 독이 그토록 맹렬하단 말인가.

 

 

 

 

이날 하루는 진도가 꽤 나간 듯하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이날도 성과가 그리 나쁘진 않다. 아무튼 하루라도 건너뛰는 일은 없어야 옳다.

 

 

 

 

불궤라는 말도 다 있구나.

불궤(不匱) : 다함이 없음, 오래 지속됨.

 

 

 

 

여전히 어려운 말들로 가득하구나.

 

 

 

 

그래도 꾸준히 여기까지 이어져 온 모습만은 좋아 보인다. 어쨌든 작심삼일과는 거리가 머니까.

 

 

 

 

이날 적은 기록은 아무래도 '채근담'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고교 수업 시간에 배웠던 한시 중에 암송하고 있는 시들을 한자로 그냥 한 번 써 본 듯하다.

 

 

 

 

이 무렵에 읽었던 소설 중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도 있었다.(사진은 채근담을 기록한 일기장의 맨 뒷쪽 부분이다.) 목차 속에 천연덕스럽게 보이는 한자들이 지금은 영 낯설기만 하다.

 

아, 참. 채근담의 추억을 떠올려 준 겨울호랑이 님의 글 속엔 마침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도 끼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군복무 시절에 읽었었다. 대략 84년쯤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책의 내용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때의 독서 기록은 아마도 PX에서 구입한 노트에 적었지 싶은데(유난히 볼펜똥이 많이 나오던 볼펜도! 그래서 글씨가 번져 보인다. 그에 비하면 일기장은 얼마나 품질이 좋은지!), 1,2년 사이에 글씨체가 참 많이도 바뀌었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이제는 손글씨를 쓸 일조차 거의 없다. 이제는 글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쓴다!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오오,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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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9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으실땐 필사광이셨군요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굿뜨~☕️

oren 2019-02-09 20:46   좋아요 1 | URL
암튼 원문이 한자로 된 책을 베껴보기는 『채근담』이 처음이지 싶어요. ㅎㅎ

syo 2019-02-09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같은 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oren님은 이미 벌써 오늘날의 저를 꿀떡 씹어드실 만큼의 소양을 갖추신 상태셨군요.....

oren 2019-02-09 22:36   좋아요 0 | URL
오, 오, 오십이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모름지기 옛말에 후생이 가외라 하였으니, 그저 후생이 두려울 뿐입니다...
* * *
“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공자가 말했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 가히 두렵다. 어찌 오는 사람들이 이제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으랴.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으면, 이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될 뿐이다.)”

막시무스 2019-02-09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체가 너무 부럽습니다! 힘차고 자신감이 강해 보이네요!

oren 2019-02-09 23:3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입대 이전에 쓴 글씨들은 어딘지 모르게 초딩스러워 보여서 별로 마음에 안 들고,
입대한 뒤로 조금씩 가다듬은 글씨체는 그나마 차분한 느낌이 들어 조금 나아졌다 싶기도 합니다.^^

페크(pek0501) 2019-02-15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참 잘 쓰십니다. 필체가 좋습니다. 볼 줄 모르지만 필체에서 꼿꼿한 정신이 느껴집니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하는 형, 원칙을 중요시하는 형.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형 같습니다.
혹시 오렌 님은 의지의 사나이 이십니까? ㅋ

oren 2019-02-15 14:42   좋아요 1 | URL
그런데 페크 님께서는 아주 캐캐묵은 옛날에 써 놓은 글씨체 하나를 보고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시는 거 아닙니까? 거,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잖습니까. 지금 우린 그 옛날의 우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 * *
지금 지금 우리는
그 옛날의 우리가 아닌 것
분명 네가 알고 있는 만큼 나도 알아
단지 지금 우리는 달라졌다고 먼저
말할 자신이 없을 뿐
 
책이라는 상품

 

작가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첫 작품 출판에 얽힌 아픈 일화가 겹쳐 떠오릅니다. 소로우도 작가적 재능은 탁월했지만 (『월든』으로 대박이 나기 전까지는) 늘상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작가였고, 초판 흥행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작가님과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한 실패를 겪었던 인물이기도 하고요.

 

오로지 자신의 처녀작 집필에만 전념하기 위해 일부러 월든 호숫가로 나가 오두막을 짓고 글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소로우는 자신의 처녀작을 인쇄해 줄 출판사마저 구하지 못했고,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간신히 돈을 빌려 자비로 출판한 초판 1,000권 중에서도 4년 동안에 팔린 책이 겨우 294권에 그쳤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기증본 75권이 포함된 수치라고 하고요. 그에 비하면 작가님의 첫 소설집은 정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작가님이 번역하신 책들은 워낙에 큰 출판사에서 밀고 있는 유명한 작품들이니만큼 앞으로도 오랫동안(!) 흥행에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건투를 빕니다.^^

 

 * * *

 

얼마 전에는 한 원주민 행상이 우리 동네에서 상당히 유명한 변호사의 집에 바구니를 팔려고 왔다. 원주민은 "바구니를 사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아니요, 우리 집에는 바구니가 필요 없어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자 원주민은 "뭐라고요! 우리를 굶겨죽일 생각입니까?" 라고 소리치고는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원주민은 주위 백인들이 열심히 일하면 잘사는 걸 보고, 특히 변호사가 변론을 잘 짜내기만 하면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재물과 지위가 따르는 걸 보고 '나도 사업을 해야겠다. 바구니를 짜야겠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주민은 바구니를 짜면 자기 일을 끝낸 것이 되고 그렇다면 백인들은 당연히 바구니를 사야 하는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백인들이 살 만한 가치 있는 바구니를 만들거나, 적어도 백인들이 바구니를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살 만한 다른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나도 가늘게 쪼갠 나무로 바구니 같은 것을 엮어본 적이 있었지만, 백인에게 팔 만한 것으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102 하지만 나는 바구니를 엮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남들이 살 만한 바구니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대신 내 바구니를 굳이 팔지 않아도 괜찮은 방법을 연구했다. 사람들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며 칭찬하는 삶은 그저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에 불과하다. 그런데 다른 모든 방식의 삶을 짓밟아가며 하나의 삶만을 과대평가할 이규가 어디에 있는가?(54∼55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 달린 월든』중에서 

 

주석)

 

102. 소로우의 첫 책,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을 가리킨다. 이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소로우는 출판사에 빚진 290달러를 갚는 데 4년이나 걸렸다. 소로우는 1853년 10월 27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엉뚱하게 '출판업자'라 불리는, 내 책을 출간해준 출판사가 아직 팔리지 않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재고들을 어떻게 처분해야겠느냐고 묻는 편지를 지난 한두 해 동안 가끔 보내다가, 재고들이 차지한 공간을 그들이 급히 싸용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래서 나는 전부 여기로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책들이 속달로 오늘 도착했다. 짐마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4년 전에 먼로에게 사서 그 이후로 조금씩 값을 치렀지만 아직 완납하지 못한 1,000권 중 남은 706권이었다. 그 책들이 마침내 내게 보내졌고 이제야 내 물건들을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됐다. 그 책들을 등에 짊어진 채 층계참을 돌고 두 계단을 올라, 그것들이 원래 있었을 곳과 비슷한 공간까지 옮겼다. 290권 남짓한 책들 중 75권은 기증하고 나머지가 겨우 팔린 것이었다. 이제 나는 거의 900권에 달하는 책이 있는 서고를 갖게 됐지만, 그중 700권 이상이 내가 쓴 책이다. 저자가 자신이 기울인 노고의 열매를 지켜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 책들이 내 방 한 귀퉁이에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다. 내 오페라 옴니아(opera omnia, 모든 저작물-옮긴이)다. 내가 원작자고, 내가 머리를 짜내 빚어낸 작품이다.(일기 5:459)

 

 

 

자신의 처녀작 출판을 도와줄 곳을 찾지 못해 끝내 자비로 - 그것도 에머슨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 출판한 첫 책이 저토록 참담한 실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일기에 저런 내용을 남겨 놓는 여유를 즐겼다. 그런 내공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불후의 걸작인 『월든』이 탄생한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월든』에서 방금 인용한 문장에 잇따라 이어지는 다음 대목은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로 간 진정한 까닭'을 밝히는 부분이므로 덧붙여 인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뜻밖에도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홀로 오두막을 짓고 살게 된 진짜 이유에 대해서 너무나 자주 오해하기 때문이다.(물론 소로우가 직접적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대신에 일부러 다른 일에 빗대어 말장난처럼 표현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와 함께 호흡하는 시민들이 내게 법원의 일자리나 목사 보조 등 그 밖의 먹고살 만한 자리를 제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 힘으로 먹고살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여느 때보다 열심히 숲으로 얼굴을 돌렸다. 숲에서는 내가 그런대로 얼굴이 알려진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대로 자본금이 모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수중에 있는 빈약한 수단을 사용해서 곧바로 내 사업103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월든 호수로 간 목적은 돈을 들이지 않고 살려는 것도 아니었고 거기에서 힘들게 살려는 것도 아니었다.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개인 사업104을 하고, 상식도 없으며 계획을 해서 사업을 꾸려갈 만한 재능도 없어 어리석게는 보여도 그만큼 한심하게는 보이지 않을 일을 하는 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다.(55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 달린 월든』중에서

 

주석)

 

103. 여기에서 '사업하다'는 어떤 경제적 이득이나 생활의 향상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관심 있는 일이나 신경 써야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쓰겠다는 뜻이다. 뒷 문장에 쓰인 '개인 사업'과 맞추어 말장난한 것이다. 

 

104. 개인 사업은 1842년 파상풍으로 사망한 형에게 바친 책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을 쓰는 것을 가리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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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9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는 “신은 세부에 깃든다”란 말을 했는데 진짜 디테일에 강하신 오렌님^^ 굿밤하소서~

oren 2019-02-09 13:35   좋아요 1 | URL
시오노 나나미가 저런 고상한 말도 남겼군요.^^
저랑 그다지 큰 연관은 없는 얘기겠습니다만,
그래도 뜨거운 격려의 말씀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9 14:23   좋아요 1 | URL
늘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오렌님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oren 2019-02-09 14:27   좋아요 1 | URL
늘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9 0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oren님께서 알려주신 소로우의 일화에 오늘 페이퍼의 글까지 읽으니 한결 이해가 깊어진 것 같습니다. 소로우가 월든 숲으로 간 것이 개인 사업과 삶을 위한 것임을 알고나니, 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가톨릭의 ‘피정‘이나 불교의 ‘동안거‘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9-02-09 13:48   좋아요 2 | URL
아무리 그래도 하버드 졸업식때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할 정도로 탁월했던 젊은 청년이 ‘속세의 성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호숫가에 외딴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살면서‘ 불후의 작품을 쓰겠다고 한 걸 보면 대단한 결심과 비범한 실천력을 갖춘 인물임이 분명한데,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쓴 처녀작이 참담한 실패를 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월든』으로 승화시켰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이더군요.

처녀작을 에세이로 쓰기 전에는 랄프 왈도 에머슨으로부터 오랫동안 개인 과외 교습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작시(作詩) 훈련을 받았으나, 마침내 ‘자신의 시재(詩才)가 어느 정도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스승의 말을 듣고, 수많은 자작시들을 단칼에 모조로 불태웠다고 하고, 그 시들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는게 없다고도 합니다.
 
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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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여, 내 너에게 뛰어들리라,

패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서!

 - 버지니아 울프의 묘비명

 

버지니아 울프(1882∼1941)

 

 * * *

 

버지니아 울프는 이야기할 게 아주 많은 작가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작품들보다 자신의 생애를 둘러싼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될 정도로,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작가다. 그녀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차 대전 중에 홀연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리 오래된 작가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21세기에 와서도 그녀가 쓴 작품을 바탕으로 꾸며낸 멋진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작품의 작가, 그 작품을 읽는 독자, 그 작품의 주인공이 동시에 등장하는 매혹적인 이야기는 니콜 키드먼 주연의 『디 아워스』라는 이름으로 개봉됐고. 그 영화의 원작을 쓴 마이클 커닝햄은 그 작품으로 퓰리처 상과 펜 포크너 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녀는 21세기 들어 더욱 확산되고 있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여성이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그녀는 문학외적인 영향 보다는 문학 자체로도 커다란 업적을 남긴 탁월한 작가였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20세기 초반에 갑자기 터져 나온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프란츠 카프가(1883∼1924),  제임스 조이스(1882∼1941), T. S. 엘리엇(1888∼1965) 등으로 대표되는 쟁쟁한 거장들이 그녀와 함께 새로운 문학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녀는 19세기의 보수적인 교육 풍토 탓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학자이자 비평가였고 이름난 문필가였던 부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지적인 자극을 흠뻑 받으며 성장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집엔 당대를 대표하는 문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헉슬리도 부친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 서문에도 등장한다.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손자다. 『댈러웨이 부인』에도 찰스 다윈과 토머스 헉슬리가 잠깐 등장한다.)

 

10대와 20대에 부모를 차례로 잃은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 바네사를 따라 블룸즈버리로 이사했고, 여기서 그 유명한 블룸즈버리 그룹이 탄생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오빠의 친구들이 집으로 드나들었고,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 바네사와 함께 그들이 나누던 예술과 철학과 문학 토론 모임의 안주인 역할을 떠맡았다. 여기엔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소설가 E.M. 포스터도 끼어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에 블룸즈버리 그룹의 멤버였던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다. 그는 작가이자 잡지 편집인이자 좋은 남편이 되었고, 결혼 후 재미 삼아 시작한 <호가스 출판사>는 점차 번성하여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출판하는 등 일류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발전했다.

 

비범한 성격과 용모를 지녔을 뿐만 이나라 화가인 언니 바네사와 함께 블룸즈버리 그룹의 중심 인물이 된 그녀는 문학과 예술의 첨단 조류를 이끌면서 활기찬 삶을 살았으나 끝내 만성적인 정신 분열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30년 가까이 병약한 아내를 대신해서 살림을 떠맡고 창작을 격려해 줬던 남편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속엔 그녀만의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나는 정말로 다시 미쳐 가는 것 같아요. ……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인생을 망칠 수 없어요.>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그녀는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넣은 상태로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1941년 3월 28일이었다.

 

1925년에 발표한 『댈러웨이 부인』은 그녀의 실험 정신이 낳은 대표적 걸작이다. 이 작품은 1922년부터 오랜 시간 동안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쓴 역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대 작가들은 '쓸데없는 것들을 묘사하는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바람에 정작 가장 중요한 '인생의 진실'을 포착하는 데는 실패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삶이란 전혀 <이러한> 게 아닌 듯합니다. 여느 때 여느 마음을 잠시 살펴보세요. 마음은 갖가지 인상들을 받아들입니다 ㅡ 사소한 것, 환상적인 것, 덧없는 것, 또는 날카로운 강철로 새긴 듯한 것. 사방에서 그런 인상들은 마치 무수한 원자들의 그치지 않는 소나기처럼 밀어닥치고, 그런 소나기가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조점이 달라질 수밖에요. …… 그 가변적이고 알 수 없는, 한계가 지어져 있지 않은 영혼을, 비록 그것이 다소 상궤를 벗어나고 복잡하더라도, 가능한 한 외적이고 무관한 것과 뒤섞이지 않게끔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임무가 아닐까요.(「현대 소설론」)

 

 

<새로운 소설을 위한 새로운 형식>으로 시도한 실험적 작품은 1921년 말에 완성하고 이듬해 10월에 출간된 『제이콥의 방』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해에는 공교롭게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T.S. 엘리엇의 『황무지』 등이 동시에 출간된 해였다.(프루스트는 같은 해 11월에 사망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5년 뒤에 출간됐다.)

 

새로운 방법에 확신을 얻은 버지니아 울프는 1922년 8월에 『댈러웨이 부인』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업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을 그 작품에 집어넣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하나씩 해결책을 찾아 나갔다.

 

<나는 내 인물의 등 뒤에 아름다운 동굴을 판다. 그럼으로써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인간다움과 유머, 깊이 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는 그 동굴들이 서로 이어지고, 각기 현재의 순간에 밝은 데로 나온다는 것이다.>

 

1925년 5월에 출간된 『댈러웨이 부인』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부정적인 평가도 뒤따랐다. 3년 앞서 출간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의 비교를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제임스 조이스의 <사실주의적 활력>의 <유치한 아류>로 평가되기도 했다. 울프 또한 『율리시스』를 잘 알고 있었고, 「현대 소설론」에서 제임스 조이스를 자기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내세우며 인정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율리시스』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드름을 긁어 대는 역겨운 학부생>에 대해 느끼듯 짜증이 나고 환멸을 느낀다거나, <실패작, 천재성은 있지만 질이 낮다. 산만하고 찝찔하고 젠체하며 상스럽다>는 악평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실제로 『댈러웨이 부인』과 『율리시스』는 많이 닮았다. 무엇보다도 '의식의 흐름 기법'과 '내적 독백'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닮았다. 작품의 시공간적 구도도 닮았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의 더블린이 주무대다. 『댈러웨이 부인』은 1923년 6월 중순의 어느 하루, 런던에서의 아침부터 저녁까지가 배경이다. 『율리시스』의 남자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이 아내 몰리와의 옛 추억이 담긴 '호우드 언덕'을 자주 떠올리는 것과 『댈러웨이 부인』의 남자 주인공 피터 월시가 첫사랑 클라리사와의 추억이 담긴 '부어턴'을 자주 떠올리는 것도 닮았다.

 

『율리시스』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대한 현대판 오마주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댈러웨이 부인』에서도 뚜렷하지는 않지면 호메로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우선, 클라리사의 첫사랑인 피터 월시가 오랜 방랑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클라리사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애쓰는 점이 그렇다. 비록 남의 아내가 되어 있지만 피터의 '영원한 고향'은 언제나 클라리사한테 고정되어 있다. 이미 '댈러웨이 부인'이 된 지 오래인 클라리사도 마찬가지다. 마치 정절을 지키며 바느질로 소일하는 페넬로페처럼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를 고치며 피터 월시를 그리워한다. 클라리사는 그녀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자주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침대는 좁았고 …… 아이를 낳았는데도 여전한 처녀성이 새하얀 시트처럼 자신을 감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점들 말고도 『댈러웨이 부인』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닮은 점은 더 있다. 그 어떤 작가들보다 셰익스피어가 유난히 자주 인용된다든지, 주인공의 옛 애인이 작품 전체에서 골고루 출몰한다든지 하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그 두 작품 사이의 몇몇 유사성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과감한 문학적 시도에서 이 정도는 얼마든지 우연의 일치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율리시스』와 『댈러웨이 부인』 사이의 차이점은 유사한 점들에 비해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도 벅찰 정도이다.

 

무엇보다 『율리시스』는 작품의 규모나 방대함, 주제의 다양함에서 『댈러웨이 부인』과 비교되지 않는다. 『율리시스』에는 인간의 삶을 둘러싼 거의 모든 문제들이 총망라된 느낌이 든다. 거기엔 탄생과 죽음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종교, 역사, 음악, 정치, 의학 등 온갖 분과 학문들이 한꺼번에 마구 뒤섞여 들끓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델러웨이 부인』은 그 주제가 오로지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로 오롯이 모아져 있다. 그걸 설명하는데 쓰이는 핵심 도구들은 피터 월시와 클라리사의 사랑, 클라리사가 준비한 파티, 전쟁에서 귀환한 셉티머스의 자살 등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난해하거나 과시적인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보면 『율리시스』보다는 훨씬 읽기 쉬운 작품이다. 독자가 겪는 유일한 어려움 한 가지는 '카메라의 앵글'이 너무나 자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 간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그저 단순히 등장 인물들의 어깨 위로만 옮겨 다니지는 않는다. 옮겨 간 사람의 머릿속으로 잠입하기도 한다.(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에게서 이런 경향이 유독 두드러진다.) 그 점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충분하다. 가끔씩 카메라가 시공간을 통째로 옮겨갈 경우도 더러 있지만 그걸 따라가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댈러웨이 부인은 런던에 사는 쉰두 살의 여성이다. 최근에 심장병을 앓고 난 후로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부쩍 늙긴 했지만 영국 상류층의 부인다운 외모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그날 저녁 자신의 집에서 열릴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 속의 이야기는 클라리사의 행동 반경을 따라, 혹은 빅벤에서 매시각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런던 시내의 평온한 일상들을 비추면서 아주 차분하게 진행된다. 이런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 우리의 삶이 된다는 것처럼.

 

그런 평온 속에서도 갑자기 삶을 뒤흔드는 건 뇌리에 깊이 박힌 어느 한 때의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한때 클리라사의 삶을 송두리째 차지했던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하며 사는지? 상쾌한 아침 공기를 느끼는 순간 그녀는 곧장 30여 년 전의 과거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그때만큼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때는 다시 없었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 부어턴에서 프랑스식 유리문을 열어 젖히고 ㅡ 그 문의 경첩이 약간 삐걱대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ㅡ 활짝 열린 대기 속으로 뛰어들 때면 언제나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당시 열려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저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람보며 서 있노라면. 그때 피터 월시가 물었다. 「채소밭 가운데서 명상하는 거야?」ㅡ 그렇게 말했던가? ㅡ 「난 꽃양배추보다는 사람들이 더 좋아.」ㅡ 그렇게 말했던가?(7∼8쪽)

 

 

이렇게 갑자기 불려 나온 과거 속의 인물인 피터 월시는 한때 클라리사와 결혼할 뻔한,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남자였다. 한때는 온 세상을 개혁할 것처럼 자신감이 넘쳤고, 언제나 클라리사를 너무 감상적이라고 몰아세웠던 당당한 남자, 나중엔 결국 옥스퍼드에서 퇴학 당하고 인도로 떠난 남자, 불행한 결혼 끝에 지금은 영락하고 만 불쌍한 처지의 남자가 피터 월시였다.

 

그녀는 세인트제임스 파크에서 여전히 논쟁을 벌이면서, 그와 결혼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고 ㅡ 또 그래야 했다고 ㅡ 결론을 내리곤 했다. 왜냐하면 결혼해서 날이면 날마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약간의 방임, 약간의 독립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그런 여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터와는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 했고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그 작은 정원의 분수 곁에서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는 그와 절교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둘 다 파멸해 버렸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다. 그 슬픔을, 그 고뇌를 여러 해 동안이나 가슴에 박힌 화살처럼 지녀야 하기는 했지만.(13∼14쪽)

 

 

부어턴을 떠올리면 클라리사는 언제나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열여덟 소녀 시절을 그토록 황홀하게 수놓았던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첫사랑 피터 월시, 절친 샐리 시튼, 지금은 남편이 된 리처드 댈러웨이, 심지어 늙은 고모님까지도. 그런데 별다른 소식조차 없던 피터가 런던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그녀의 머리 속에 갑자기 떠올랐다.

 

그가 곧 돌아온다지. 유월, 아니면 칠월? 잊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하필이면 파티 준비로 정신이 없던 와중에 피터가 불쑥 클라리사를 찾아 온다. <누구지 ㅡ 대체 누가> 파티를 여는 날 아침 11시에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사람이? 오, 맙소사! 그가 이렇게 아침 일찍 예고도 없이 찾아오다니! '그를 보자 그녀는 그렇게도 놀라고, 기쁘고, 수줍고, 어리둥절했다.'

 

불행한 처지로 런던에 되돌아온 첫사랑의 남자와 클라리사의 만남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 딸아이가 불쑥 끼어드는 바람에. 그러나 불쌍한 피터 월시가 클라리사 앞에서 까닭 모르게 한바탕 눈물을 왈칵 쏟아낼 틈마저 없었던 건 아니다.( <정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억누를 수 없이 솟구치는 힘에 북받쳐서, 그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울고 또 울었다. 아무 부끄러움 없이, 소파에 앉은 채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터와의 짧은 만남 이전에 클라리사의 머릿속에 피터와 함께 떠오른 옛 친구는 샐리 시튼이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놀라운 능력을 지닌 여자 친구였다. 클라리사에게서는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재능과 개성들을 지닌 그녀. 샐리는 정말이지 사람들을 너무 자주 놀라게 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것은 샐리에 대한 감정의 순수함, 그 완전함이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감정과는 달랐다. 전혀 사심이 없고, 여자들, 막 사춘기를 지난 여자들 사이에나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편에서는 다분히 보호자 같은 감정이기도 했다. 둘만의 연맹이라도 맺은 듯한 느낌, 자신들을 갈라 놓을 무엇인가에 대한 예감(그들은 결혼을 항상 파탄으로 이야기했다)에서 생겨난 이 기사도적인 감정은 샐리보다는 주로 그녀 편에서 느끼는 것이었지만. (48∼49쪽)

 

 

샐리와 함께라면 클라리사는 심지어 이런 느낌까지 들곤 했다. <만일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이리> 그러나 그날 저녁 파티에서 다시 만난 샐리는 실제로 어땠는가. 까마득한 옛날 부어턴에서 함께 보았던 꽃양배추를 보고 '거친 청동 같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적이었던 그 소녀는?

 

이름이 뭐라고? 레이디 로시터? 도대체 레이디 로시터가 누구지?

 

「클라리사!」 아, 저 목소리! 샐리 시튼이었다! 샐리 시튼! 대체 몇 년 만인가! 그녀의 모습은 안개라도 통해 보듯 어슴푸레했다. 그녀가 아는 샐리 시튼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클라리사가 더운 물병을 손에 쥐고서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어, 이 지붕 아래! 하고 가슴 뛰며 생각하던 시절의 샐리는 저렇지 않았는데!

 

서로 얼싸안고, 당황하고, 웃어 대는 동안,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ㅡ 런던을 지나는 길이었어, 클라라 헤이든한테서 들었지. 널 만날 절호의 기회잖아! 그래서 불쑥 끼어들었어 ㅡ 초대도 안 받고 …….(223쪽)

 

 

클라리사가 그날 저녁 파티에 참석하는 손님들을 맞이할 때까지 얼마나 더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과 (남편인) 리처드 댈러웨이를 머릿속에 떠올렸는지, 혹은 파티에 초대한 사람들이 얼마만큼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지. 혹은 매시각 어김없이 울려퍼지는 빅밴의 종소리가 그날 하루 런던 시내를 오가는 뭇 사람들의 귓가에 어떤 색조로 들렸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중요한 건 삶이 클라리사와 피터와 샐리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난 바로 그 때문에 파티를 여는 거야.」 그녀는 삶을 향해 소리내어 말했다.

 

방 안에 갇혀 소파에 가만히 누워 있자니, 그처럼 명백하게 느꼈던 삶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그것은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옷자락처럼 휘감고, 화창한 모습으로, 뜨거운 숨결로, 속삭이면서, 커튼을 휘날리게 했다. 그러나 만일 피터가 그녀에게 <좋아, 좋아. 하지만 당신의 파티들은, 대체 그 파티들은 무슨 의미가 있지?> 하고 묻는다면, 그녀는 (아무도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건 하나의 봉헌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말은 한심할 만큼 막연하게 들릴 것이었다. 하지만 피터가 무슨 자격으로 인생이란 그저 단조로운 항해라고 주장할 것인가? 당신 사랑은 어떻고요? 하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대답은 뻔했다.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여자들은 도저히 이해 못한다고. 뭐 그렇다고 해두자.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떤 남자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160∼161쪽)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도 이런 것들이었다.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 사람들 사이의 고독, 서로의 눈에 비치는 그 인간적인 왜소함과 나약함 등.> 삶의 표층 아래에 도사린 온갖 모순들은 비단 주인공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레이디 브루턴의 무리한 이주 계획, 속물주의의 극치인 휴의 예법과 교양,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셉티머스에 대해 '권위'로 억압하는 닥터 훔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작중 인물 가운데 가장 불행한 인물은 클라리사의 파티가 시작되려는 바로 그 시각에 홀연 창밖으로 몸을 던진 셉티머스다. 그의 자살은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닥터 훔스의 잘못된 권위와 횡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셉티머스의 죽음으로부터 도리어 삶을 긍정하는 미학을 얻는다. 셉티머스가 전쟁 후유증으로 삶에 적응하지 못해 고통받는 모습은 클라리사와는 전혀 별개로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 또한 매시각 늙어가는 중이며, 언젠가 마주칠 죽음이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두려움에서 그녀를 벗어나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살아있는 순간들 자체를 즐기는 것 뿐이다. 흩어져 가는 순간들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살아 있는 그 순간들을 배합하는 파티는 그런 노력의 일환이자 그녀의 유일한 재능이었다.

 

이제 블라인드를 내렸다. 시계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한 점, 두 점, 석 점.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저기! 노부인이 불을 껐다! 온 집이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그러자 그 말이 떠올랐다. 태양의 열기를 더는 두려워 말라.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특별한 밤인가! 그녀는 왠지 그와 ㅡ 자살을 한 청년과 ㅡ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시계가 종을 쳤다. 납처럼 둔중한 원이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가봐야 했다. 손님들과 어울려야 했다. 샐리와 피터를 찾아야 했다.(243쪽)

 

 

『댈러웨이 부인』은 삶의 이면에 감춰진 꿈처럼 형체 없는 느낌들을 극도로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 걸작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한 번만 읽어서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충분히 음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놀랍도록 정교하게 직조해 놓은 아름다운 무늬들이 단번에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문장들 사이로 미묘하게 이어놓은 거미줄처럼 세밀한 가닥들은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칠 때만 아주 가끔씩 그 모습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는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문장들이 얼마나 섬세하며, 인물들 사이를 연결해 놓은 가느다란 거미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물방울들을 매달고 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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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8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땜에 <댈러웨이부인> 곧 지르지 않을까 싶네여 ㅎㅎ👍

oren 2019-02-08 11:26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도 분명 좋아하실 꺼에요.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 더 재미있는 신기한 소설이에요.^^

hnine 2019-02-08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댈러웨이 부인> 저는 지금 영화로 보고 있는 중이예요. youtube에서 한글 자막 제공 안되는 공짜 영화로 보다보니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oren님 이 글 읽으며 참고가 많이 되겠습니다.

oren 2019-02-08 11:42   좋아요 0 | URL
일단은, 한글 자막 안 나오는 영화를 보실 수 있는 hnine 님의 영어 실력이 부럽습니다.^^

저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동안에 그 옛날 딱 한 번 가봤던 ‘런던 시내 풍경‘이 문득 문득 떠올라서 괜스레 기분이 좋더군요. 버킹검 궁전,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폴 성당, 빅벤, 하이드 파크, 리젠트 파크, 등등.

hnine 님께서는 런던에서 직접 살아보기도 하셨으니,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주 특별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런던 시내가 주요 배경으로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으니 말이지요.

『댈러웨이 부인』은 잇따라 두 번 읽고, 리뷰까지 다 쓰고 나서도 그 여운이 오래 남더군요. 그래서 결국 『The Hours』라는 영화를 찾아봤어요. 그런데 그 영화는 생각보다 너무 우울하게 그려져 있어서 적잖이 놀랐답니다. 시종일관 무한반복처럼 흐르는 음악까지도요.
 

 

살다 보면 아주 가끔씩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아!

 

물론 대개는 그럴 때 죽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때는 정녕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지, 결코 죽음으로 뛰어들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질투심이라는 격정에 휩쓸려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졸라 죽이고야 만 오셀로에게 가장 죽고 싶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런 질문은 하나마나다. 격분에 사로잡힌 그가 아무런 죄도 없는 아내를 죽이고 난 직후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탄에 빠졌을 때다. 그는 곧장 자결한다. 그러나 그는 원래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데스데모나를 죽인 직후 로도비코(베네치아 귀족)가 자신의 행적과 인간성을 베네치아 정부에 고할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라고 말한다.

 

무엇을 줄이거나

악의로 적지도 마시오. 그러면 당신은

분별없이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을

질투를 쉽게 하진 않지만 하도록 만들면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 버린

비천한 인도인 같은 자를, 차분한 두 눈은

기분 따라 쉬 녹진 않지만 아라비아 나무가

약용 진액 흘리듯 눈물을 줄줄 쏟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 『오셀로』, 제5막 제2장 중에서

 

 

그는 함부로 질투심을 일으키는 시덥잖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갖춰야 할 용기와 위엄을 두루 지녔고, 정직성과 당당함뿐 아니라 다정다감한 감정까지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 중이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섬을 지키기 위해 용병대장 오셀로를 총독으로 파견한다. 베네치아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던 오셀로 일행은 도중에 격렬한 태풍을 만나 뿔뿔이 흩어진다. 뒤늦게 간신히 그 섬에 당도한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가 자신들보더 도리어 먼저 키프로스 해안에 무사히 도착한 걸 알고는 좋아서 까무러칠 지경이다. 그때 오셀로가 느낀 황홀감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격정적인 인물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오, 내 영혼의 기쁨이여,

폭풍 뒤에 언제나 이런 평온 깃든다면

바람은 죽음을 일으킬 때까지 불고 불어

고생하는 돛단배를 바다 언덕 저 위로

올림포스만큼 올렸다가 천국에서 지옥 가듯

다시 내리꽂아라. 난 지금 죽어도 지금이

가장 행복할 것이오, 왜냐하면 내 영혼은

절대 만족 맛봤기에 이 같은 안락이

미지의 운명 속에서도 이어질 것인지

염려하기 때문이오.

 

 - 『오셀로』, 제2막 1장 중에서

 

이 장면에서 오셀로가 느끼는 감정은 절정의 행복감이지만, 그 이면에는 벌써부터 미래에 심상찮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염려가 끼어든다. 이런 행복이 과연 '미지의 운명 속에서도 어어질 것인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결국, 오셀로는 이아고의 유혹 장면에서 너무 쉽게 질투심에 불타오르고, 전후 사정이나 자초지종을 자세히 살펴 보지도 않은 상태로, 이아고에게 휘둘린 끝에 아내인 데스데모나와 부하인 카시오 사이의 불륜을 갑자기(!) 확신한다.

 

물론 여기서 오셀로의 질투심이 빚은 비극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오셀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아고가 오셀로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사용한 트릭이 너무나 교묘하고 그 효과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도 오셀로에게는 쉽게 파멸에 이르는 또 한 가지 약점을 더 지니고 있었다. 데스데모나와 자신의 결혼이 결코 탄탄한 바탕 위에 이뤄진 게 아니고, 갑작스런 유혹으로 이뤄진 허약한 기반 위에 있다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그는 피부조차 검은 나이 많은 무어인이었고, 데스데모나는 베네치아에서도 소문난 미모를 갖춘 고관대작의 딸이었으니 말이다. 이아고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사이의 틈을 벌이기 위해 그런 점까지도 교묘히 파고든다.

 

"데스데모나가 이 무어인을 계속 오래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중략) 그도 마찬가지고. 그녀로선 격정적인 출발이었으니까 그에 걸맞은 결별을 보게 될 거야.(중략) 이 무어인들은 욕심이 변하는 자들인데(중략) 지금은 그에게 캐롭처럼 맛있는 음식도 머지 않아 땡감처럼 떫은 맛이 날 거야. 그녀는 그를 젊은 남자와 바꿔야 해. 그의 몸에 물리게 되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 테고 사람을 바꿔야만 해. 반드시."

 

이아고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나쁜 악당이지만 그만큼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은 늘상 변하게 마련이고, 그 변화는 욕망이 좌우하며,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관계처럼 서로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결합은 그 열기가 식을 경우 언젠가는 깨어지기 마련이다. 이아고는 그걸 끊임없이 강조한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여 마침내 스스로 파멸할 때까지. 이런 천하에 몹쓸 악당!!

 

 * * *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는 런던에 사는 쉰두 살의 여성이다. 그녀는 유월 중순의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그날 저녁에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날따라 그녀는 기분이 몹시 상쾌한 느낌을 받는다.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마치 바닷가의 아이들에게나 찾아오던 아침처럼 신선했다.

 

그녀의 의식은 여기서 곧장 열여덟 소녀 시절로 날아간다.(소설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래 문장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이다. 문장 사이의 도약 덕분에 '과거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기분이 든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 부어턴에서 프랑스식 유리문을 열어 젖히고 ㅡ 그 문의 경첩이 약간 삐걱대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ㅡ 활짝 열린 대기 속으로 뛰어들 때면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들곤 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당시 열여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거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노라면.(7∼8쪽)

 

 

유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에 꽃을 사러 집을 나선 클라리사가 맨 처음으로 떠올린 추억 속의 그 사람은 피터 월시였다. 한때 너무나 격정적으로 사랑했고, 벌써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와의 아픈 이별만 생각하면 가슴앓이를 겪어야만 하는 남자, 옥스퍼드를 중퇴하고 지금은 영락한 처지지만 늘 보고픈 남자가 피터였다. 

 

그가 곧 돌아온다지. 유월, 아니면 칠월? 잊어버렸다.

 

피터에 대한 추억들도 어느새 뇌리에서 사라지고 얼마쯤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클라리사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옛 친구는 샐리 시튼이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놀라운 능력을 지닌 여자 친구였다. 클라리사에게서는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재능과 개성들을 지닌 그녀. 샐리는 정말이지 사람들을 너무 자주 놀라게 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것은 샐리에 대한 감정의 순수함, 그 완전함이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감정과는 달랐다. 전혀 사심이 없고, 여자들, 막 사춘기를 지난 여자들 사이에나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편에서는 다분히 보호자 같은 감정이기도 했다. 둘만의 연맹이라도 맺은 듯한 느낌, 자신들을 갈라 놓을 무엇인가에 대한 예감(그들은 결혼을 항상 파탄으로 이야기했다)에서 생겨난 이 기사도적인 감정은 샐리보다는 주로 그녀 편에서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시절 샐리는 정말이지 겁이 없어서, 허세를 부리느라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을 감행하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테라스 난간 위를 달린다든가, 여송연을 피운다든가, 묘한, 아주 기묘한 애였어. 하지만 그 매력은 대단했지.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밤에 자기 침실에서 더운물이 든 병을 손에 든 채로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어 …….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는 거야!> 하고 소리 내어 말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48∼49쪽)

 

 

그녀가 세월의 변천에 따라 얼마만큼 많이 그녀와 멀어지고, 그 모습조차 서로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는지는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다. 소설의 말미에서 클라리사는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찾아 온 사람들을 일일이 신경쓰느라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나 마찬가지였던 옛 친구들인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과는 살가운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다. 클라리사가 피터와 샐리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말들 뿐이었다. 「하지만 가봐야 해.」 「나중에 올게. 기다려.」 이 모든 사람들이 가버릴 때까지...

 

클라리사와 샐리 사이에 언제나 함께 하리라고 믿었던 그 옛날의 특별한 감정들이 언제 연기처럼 갑자기 사라졌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다만 그 두 사람 사이에 언젠가 한 순간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라고 느꼈던 그런 순간이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아니, 그런 말들은 이제 아무 뜻도 없었다. 그 옛날 감정의 희미한 메아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흥분하여 몸이 떨리는 기분, 반쯤 취한 기분으로 머리를 빗던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머리핀을 빼어 화장대 위에 놓고 머리를 빗기 시작하니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창밖의 분홍빛 저녁노을 속에서 갈까마귀들이 퍼덕이며 날던 것도.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홀을 가로지르면서 <만일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이리> 하는 심정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느낌 ㅡ 오셀로의 느낌이었고, 그녀는 셰익스피어가 오셀로에게 불어넣었던 만큼이나 강렬하게 그런 심정을 느끼고 있다고 확신했다. 오로지 새햐얀 드레스를 입고 샐리 시튼을 만나러 저녁 식탁에 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49쪽)

 

 

 * * *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는 샐리 시튼과 남녀간의 애정 비슷한 감정을 느낄 만큼 특별한 사이였다. 싱그러운 꽃처럼 모든 게 향기롭게 피어나던 시절엔 그랬다. 그녀는 샐리 시튼 때문에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결혼까지 할 뻔했던 피터조차도 그럴 땐 그녀와 샐리 사이를 가로막는 훼방꾼일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샐리를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샐리는 벽난로 곁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음성은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이 다정한 애무처럼 들리게 했다. 이야기를 듣던 아빠도(그는 그녀에게 빌려 준 책이 테라스에서 푹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한 후로 쉬이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이런 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니!」 그래서 그들은 모두 테라스로 나가 이리저리 걸었다. 피터 월시와 조지프 브라이트코프는 줄곧 바그너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녀와 샐리는 조금 뒤에 처졌다. 그러고는 그녀의 평생 가장 황홀한 순간이 다가왔다. 꽃이 담긴 돌항아리 곁을 지날 때였다. 샐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꽃을 한 송이 꺾어 들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온 세상이 거꾸로 도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녀는 샐리와 단둘이 있었다. 선물을 받았는데, 꽁꽁 포장한 선물을 들여다보지 말고 그냥 가지고 있어,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이아몬드나 뭔가 무한히 소중한 것이 겹겹이 싸여 있었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동안 그녀는 살짝 그것을 열어 보았던가, 아니면 그 타는 듯한 광채가, 계시가, 종교적인 감정이, 뚫고 나왔던가! ㅡ 그때 조지프 노인과 피터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별을 보는 거야?」 피터가 말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화강암 벽에 얼굴을 찧은 것만 같았다! 난데 없고, 끔찍했다!(50∼51쪽)

 

 

그토록 소중한 친구였던 샐리가 언젠가부터 클라리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존재로, 또한 서로가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삶의 표층 아래에 도사린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자 삶의 아이러니다.

 

「나중에 올게요.」 그녀는 서로 악수하고 있는 옛 친구 샐리와 피터를 보며 말했다. 샐리는 뭔가 옛날 기억이 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에는 그 옛날의 매혹적인 울림이 없었고, 그녀의 눈은 예전처럼 빛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스펀지 백을 가지러 간다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복도를 내달리던 그 시절처럼. 앨렌 엣킨스는 말했었다. 「신사분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러나 모두들 그녀를 용서했다. (중략) 대담하고 무모하고 자기가 모든 일에 중심이 되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능히 그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클라리사는 뭔가 무서운 비극이 일어나리라고, 때 아닌 죽음이라든가 순교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그녀는 결혼을 했고, 그것도 커다란 단춧구멍만큼 머리가 벗어진, 맨체스터의 방적 공장 주인과 결혼을 해서, 아들을 다섯이나 두었다고 한다!(236∼237쪽)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오셀로가 했던 말을 버지니아 울프가 클라리사에게 다시 부여한 것은 생각할수록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악당 이아고가 했던 "지금은 그에게 캐롭처럼 맛있는 음식도 머지 않아 땡감처럼 떫은 맛이 날 거야." 라는 말은 클라리사와 피터와 샐리 사이의 관계에서도 절묘하게 들어맞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땡감처럼 떫은 맛은 알겠는데 캐롭은 도대체 무슨 맛이냐고? 글쎄,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기가 막힌 맛이 아닐까. 아무튼 기분이 너무 좋을 땐 꼭 '죽여준다'는 느낌이 들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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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2-02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아고의 이간질이 오셀로의 파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작품에서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아고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가짜뉴스가 생각나네요... 시대를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위대한 문호의 힘이라 생각됩니다. 글을 읽다보니, 오셀로가 향하는 곳이 베네치아에게는 비극적인 ‘파마구스타 함락‘의 아픔이 있는 키프로스라는 점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베네치아의 아픔과 오셀로의 아픔을 같이 보이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oren님 항상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9-02-02 16:59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가 『오셀로』를 쓴 때가 1601∼1604년 무렵이었는데, 이때는 벌써 오스만 투르크가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을 정도로 세력을 떨칠 때였죠. 『오셀로』의 시대 배경이 1571년에 일어난 역대급 전쟁이었던 <레판토 해전> 직전의 어느 시기, 다시 말하자면 ‘파마구스타 함락‘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조차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한창 전운이 감돌던 위태로운 시기의 어느 한 때였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키프로스 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졌던 <레판토 해전>은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참전해서 왼팔을 잃는 바람에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은 전쟁으로도 기억되는데, 문득 거기가 어디쯤인지 찾아보니 레판토는 그리스의 파트레 만 근처이며 현재는 나브팍토스라 불린다는군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7:01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제가 알기로는 레판토 해전 직전에 파마구스타가 함락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잘 못 알았나 봅니다. oren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oren 2019-02-02 17:04   좋아요 1 | URL
제 댓글이 약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군요.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순서는 겨울호랑이 말씀이 맞습니다. <레판토 해전>(1571년>이 있기 전에 ‘파마구스타 함락‘(1570년)이 일어났고, 그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어드메쯤이 『오셀로』의 시대 배경이 아닐까 하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2 17:13   좋아요 1 | URL
^^:) 네 oren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실 시대적 배경에 몇 년의 차이는 작품의 생명력에 비한다면 소소한 문제라 여겨집니다. ^^:) 세익스피어 작품 여러 곳에서 베네치아가 언급된 것을 보면, 베네치아는 지금과는 달리 강대국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oren 2019-02-02 17:32   좋아요 1 | URL
베네치아는 딱 한 번 가봤는데, 이름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정말 환상적인 도시더군요. 수많은 작가들이 베네치아(혹은 베니스)를 무대로 작품을 썼던 것도 이해할 만하고요. 나폴레옹이 거길 차지하고 앉아서 ‘유럽의 응접실‘로 불렀던 것도 그럴 듯하다 싶고요. 전 가끔씩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도 한답니다. 어딜 가나 두루 아름답고, 한때 몹시 번창했고, 세련됐고, 매혹적이고, 역사적이고, 음악적이고, 종합적으로 너무 예술적인 도시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7:39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을 듣고보니 베네치아에 꼭 가보고 싶어 집니다. 괴테도 「이탈리아 기행」에서 베네치아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 것을 보면 많은 것을 품은 도시라 여겨집니다^^:)

oren 2019-02-02 17:54   좋아요 1 | URL
문득 궁금해서 방금 알라딘 도서 검색에서 ‘베니스‘를 검색해 보니 189종의 책이 나오네요.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 말고도 아주 흥미로운 책들이 많아 보입니다.^^

<릴케의 베네치아 여행>도 있고,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작품도 보이고, 국내 작가가 쓴 <베니스에서 죽다>라는 작품도 보이네요. 심지어는 <책공장 베네치아>라는 책도 있고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8:21   좋아요 1 | URL
^^:) 이런. 이 정도면 유럽 지식인들에게 베네치아는 관광지가 아니라 순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치아는 ‘유럽 문명의 성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oren 2019-02-02 19:20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니 베네치아는 ‘복식부기의 발상지‘로도 기억할 만하네요. 『1494 베니스 회계』라는 책을 보니 문득 그 책을 번역한 분이 제게도 한 권 선물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2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두 분 대화에 낄 수가 없네요 거장이란 고래 사이에 카알 새우 등 터지는 소리! 🎶

oren 2019-02-03 12:39   좋아요 1 | URL
카알 새우는 과연 어떤 맛을 지닌 새우일까요? 너무 궁금하네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9-02-03 13:27   좋아요 1 | URL
카알 새우는 맛 옵써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