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대와 명성이 높아진 갈레리우스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그해 겨울을 니코메디아 궁정에서 지냈는데,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두 황제의 비밀 회담의 대상이었다. 경험 많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관용 정책을 계속 시행하고 싶어했다. 그는 궁정이나 군대에서 그리스도교인에게는 직책을 주지 않는다는 정책에 기꺼이 동의했지만, 저 현혹된 광신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잔인할뿐더러 위험하다고 매우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마침내 갈레리우스 황제는 그로부터 행정과 군사의 소수 고위 관리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회의가 소집되어 주요 문제가 제기되었고, 야심 많은 신하들은 갈레리우스가 끈질기게 요구하는 폭력 시행을 열변으로 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을 쉽사리 감지했다. 아마도 신하들은 그리스도교 파멸이라는 안건에 대해 황제의 자부심, 신앙, 두려움에 영합하는 모든 주제를 강조했으리라 추정된다. 아마도 그리스도교라는 독립적 집단이 속주 중심부에서 존속하고 확장하는 한, 제국을 구하는 위대한 사업은 달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로마의 신들과 제도를 부정하는 그리스도교인은 별개의 공화국을 형성하여, 아직 군사적 힘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미 자체의 법률과 행정관에 의해 통치되고 공공 재산을 확보하고 있다고 그럴듯하게 단정지었다. 또한 모든 구역들이 주교들의 빈번한 회합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주교들의 칙령에 대해서는 수많은 부유한 신자들도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논의가, 내켜하지 않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새로운 박해 방침을 결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671∼672쪽)

 

(나의 생각)

 

인류 최대의 종교로 발전한 그리스도교가 한때는 몇몇 로마 황제들의 손아귀에서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는 사실을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책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 * *

 

황제들의 의향은 마침내 그리스도교인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침울한 겨울 내내 수없이 열렸던 비밀 회의의 결과를 근심스레 기다리고 있었다. 테르미날리아 축제일인 2월 23일이 그리스도교 발전에서 경계선을 긋는 날로 지정되었다. 이날 동이 틀 무렵, 여러 명의 장군, 군 장교, 징세관 들을 거느린 민정 총독이 시내에서 가장 번화하고 아름다운 곳에 있는 니코메디아 중앙 교회로 갔다. 그들은 교회 출입문을 순식간에 파괴하고는 성소로 돌진했다. 예배에 쓰이는 성물을 찾지 못한 그들은 성서 몇 권을 불태우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행정관들은 수많은 근위병과 선발 부대를 거느리고 요새 도시를 파괴할 온갖 무기들을 갖추고 전투 태세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그칠 새 없는 공격으로 인해, 궁정을 넘어 우뚝 솟아서 오랫동안 이교도들의 분노와 질투를 자극했던 신성한 교회가 삽시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바로 다음 날 전면적인 박해 칙령이 공포되었다. 여전히 유혈 박해에 반대 입장을 취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갈레리우스 황제의 격노를 누그러뜨리려고 했지만, 그는 희생 제물 공양을 거부하는 자는 모조리 불태워 죽이도록 명했는데, 관강하게 거부한 그리스도교인에게 가해진 처벌은 충분히 가혹하고도 효과적이었다. 제국 내 전 지역의 교회를 뿌리까지 파괴하고, 예배 목적으로 비밀 집회를 여는 자는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제 맹목적인 박해 열풍을 이끄는 비열한 역할을 맡게 된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특성을 부지런히 연구했다.(672∼673쪽)

 

 

 * *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처음 공인되었던 박해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필자는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구체적인 수난과 죽음을 기술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삼갔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나 락탄티우스의 규탄서(『박해자들의 죽음』)나 고대 순교자전에서 무시무시하고 진저리나는 장면들을 수집하여, 고문대와 채찍, 쇠갈고리와 불로 달궈진 침대, 화염과 강철, 잔인한 야수들과 더더욱 잔인한 사형 집행인 등이 인체에 고통을 가하는 온갖 고문 장면들로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처참한 장면들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한 성자들의 죽음을 지연시키거나 승리를 기리고 유물을 찾아내는 수많은 광경과 기적들을 더한다면 더욱 활기가 넘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것들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글로 옮겨야 할지를 결정 내릴 수가 없었다. 교회 역사가들 중 가장 신중한 에우세비우스도 교회의 영광과 연결되는 것은 기술하고 치욕스러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감추었다고 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자백은 한 가지 의문, 즉 역사의 근본 법칙들 중 하나를 공공연히 어긴 역사가가 다른 원칙들은 엄격히 준수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연스럽게 제기한다. 그리고 당대의 역사가들 중 경솔한 면은 적었지만 궁정에서의 처세술은 누구보다 능숙했던 에우세비우스의 인물됨을 고려하면, 이런 의심은 더욱 근거가 있다 하겠다. 몇몇 특별한 경우, 이를테면 행정관들이 이해관계나 원한 같은 사사로운 동기로 격노하거나, 순교자들이 열정에 휩싸여 신중함과 품위를 잊은 채 제단을 엎어 버리거나 황제에게 저주를 퍼붓고 법정에서 재판관을 때린 경우에, 온갖 잔인무도한 고문들이 일편단심인 희생자들에게 가해졌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687∼688쪽)

 

 

 * * *

 

추방과 투옥, 고통과 고문에 관한 애매모호한 서술은 교묘한 웅변가들의 붓놀림으로 너무도 손쉽게 과장되거나 부드러워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당연히 더 명확하고 확실한 종류의 사실들을 조사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동료들과 후대 황제들의 칙령의 결과로 죽음을 맞게 된 순교자가 정확히 몇 명인가 하는 사실이 궁금해진다. 최근의 순교담들은 무차별적인 박해로 전체 군대와 도시가 단 한 번에 스러졌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더 이전 작가들은 복음 신앙을 피로써 지킨 정확한 신자 수를 확인하지도 않고, 단지 산만하게 비극적 어조로 비난과 욕설을 쏟아내는 것에 만족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단 아홉 명의 주교만이 사형에 처해졌다고 집계되어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순교자에 대한 그의 상세한 계산에 따르면, 겨우 아흔두 명의 그리스도교인만이 순교자의 영예를 얻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주교들의 신앙적 열성과 용기의 정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자인 아홉 명으로부터 유용한 추정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후자는 대단히 중요하고 타당한 결론을 입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로마 속주들의 분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동방 제국의 16분의 1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심이었든지 아니면 위장된 자비심이었든지 간에 신자들의 피로 손을 더럽히지 않은 총독들이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인 팔레스타인에서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의 통치하에 놓여 있던 동방 세계의 전체 순교자 중 적어도 16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가 배출되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면 전체 순교자수는 대략 1500명 정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숫자를 10년의 박해 기간으로 나누면, 매년 150명의 순교자가 나오는 셈이다. 이탈리아, 아프리카, 아마도 에스파냐의 속주들에 동일한 비율을 적용해 보면, 그곳에서는 박해 시작 2∼3년 후부터 박해 법률의 엄중한 시행이 유보되거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한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대략 2000명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이전의 어느 박해 시기보다 더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많았고 적들도 더욱 격분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아니므로, 이 온당하고도 개연성 있는 수치 계산은 그리스도교를 세상에 전도하려는 목적으로 목숨을 바친 초기 성인과 순교자의 수를 어느 정도 추정 가능하게 한다.(689∼690쪽)

 

(나의 생각)

 

『로마제국 쇠망사』 에 담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온갖 세심한 사료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지없이 꼼꼼하게 검토했을 게 분명한 이 불세출의 역사가가 일부러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역사를 축소하거나 과장했다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 * *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우울한 진상을 밝히는 것으로 이 장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즉 순교의 주제에 관해 역사가 기록해 두었거나 종교적 목적으로 위장된 이야기들을 아무런 주저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해도,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회 내부의 불화 과정에서 서로에게 가한 고통이 광신적인 이교도에게 당한 박해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뒤에 이어진 '무지의 시대' 동안, 로마 시의 주교들은 라틴 교회(서방 교회)의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까지 지배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들이 설립했고, 오랫동안 이성의 미약한 노력을 무시해 온 미신 조직은 마침내 12·∼16세기에 종교 개혁가라는 대중적 성격을 취한 용감한 광신자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사기 행위를 획득했던 제국을 그때부터는 무력으로 지켜 나갔다. 즉 평화와 자비의 조직이 추방, 전쟁, 대량 학살, 이단 심문소의 건설 등으로 순식간에 오욕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가들이 신앙의 자유와 시민의 사랑으로 기운을 얻자, 가톨릭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성직자의 이해관계와 연결시키고 화염과 무력으로써 영적 감시의 공포를 강화시켜 갔다. 네덜란드에서만 카를 5세의 지배하에 1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처형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엄청난 숫자는 그로티우스가 증언하고 있다. 천재이자 학자인 그는 종파들이 다투는 광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중용을 지켰고, 인쇄술의 발명으로 정보의 교류가 손쉬워지고 검열의 위험도 증대된 때에, 시대와 조국에 관한 연대기를 써서 남겼다. 그로티우스의 권위를 믿는다면, 단일 속주 단일 통치 기간에 처형된 신교도의 수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3세기의 통치 기간 중 발생한 초기 순교자의 수를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 리 없다는 가정이 증거의 가치보다 우세하거나, 그로티우스가 종교 개혁가들의 공적과 수난을 과장했다는 과오가 입증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그렇다면 쉽사리 믿는 고대인들이 남긴 미심쩍고 불완전한 기록들은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보호 아래에서, 그들의 자비로운 군주에게 패한 동료 황제들이나 무시할 만한 선대 황제들이 그리스도교인에게 가했던 박해를 기록하는 독점적 특권을 누린 궁정 주교(에우세비우스)와 격렬한 웅변가(락탄티우스)를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690∼69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이토록 단순한 수치 하나만으로도 에드워드 기번은 '일반 사람들의 그릇된 상식 혹은 통념'을 얼마나 통렬하게 무너뜨리고 마는가. 버지니아 울프의 말대로, 기번과 함께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기번은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들을 균형 감각을 잘 갖추어 가며 볼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는 압축하고 저기서는 확장한다. 그는 순서와 사건을 바꾸어 놓고, 강조하고, 생략하기도 한다…… 우리는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목마에 올라타 몇 시간이고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다가 어느 순간 목마가 땅을 떠났음을, 날개 달린 준마를 타고 있음을 알고 퍼뜩 놀란다. 큰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나니 아래로 유럽이 펼쳐진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간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

 

 

*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비천()한 데서부터 승진하여, 황제 누메리아누스의 친위 대장()이 되고, 황제가 암살된 후, 284년에 군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다. 제국을 동서로 구분하여 다스리고, 286년 자기는 동방의 정제로 취임, 갈레리우스를 부제로 한 후, 또 서방에는 정제 막시미아누스,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두어 통치케 했는데, 이로써 제국의 4분치제도()가 성립되었다. 수도를 니코메디아에 두고, 군사() 경제상 중요한 동방을 직할하면서, 전 제국을 통치했다. 동양풍의 의례를 채용하여 군주의 존엄()을 높이고, 전제 군주 정치의 실현을 계획, 황제 예배를 성행케 함과 동시에 갈레리우스의 권면을 수납하여, 303년 기독교의 최후적인 박해를 했다. 그 해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치정 20년 기념제()를 개최하고, 305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 제국을 부제에게 물려준 후, 달마티아의 살로네(Salonae)에서 여생을 보냈다.(출처:네이버 백과)

 

 

 * 갈레리우스(재위 305∼311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제국의 동부를 다스리는 카이사르에 임명되었으며,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298년 페르시아와 우세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리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책()하여 그리스도교의 대박해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서 물러난 뒤 서부의 통치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즈와 함께 정식 황제가 되어 동부를 통치하였다. 309년 병을 얻은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게 되었다.(출처:네이버 백과)

 

 

* 에우세비우스

 

팔레스티나의 비자유인으로 출생. 313년 이래 카이사레아의 주교였다. 스승 팜필로스의 이름을 따서 에우세비우스 팜필리라고도 부른다. 젊어서부터 팜필로스가 세운 신학교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같은 이름의 니코메디아의 주교와 함께 콘스탄티누스 1세의 궁정에 출입하며,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아리우스설()에 공명하는 등 교회의 정통적 교리와 다른 견해도 가졌지만 성서학() ·호교학() ·교회사() ·교의신학() 등 당시 신학의 전 영역에 걸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사도(使)시대부터의 교회 역사를 쓴 대표작 《교회사 Ekklesiastike Historia》(10권)가 있다. 또 그의 《연대기 Chronicon》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의 저작에 기초를 두어, 초대 교회 때부터 325년까지에 이르는 세계사 개요와 연표를 다루었는데, 그리스어 원본은 단편()밖에 전하지 않으나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역 및 아르메니아어역이 있다. 이 밖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박해사실을 쓴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과 호교론서인 《히에로클레스 반박문》 등 다수가 있다.(출처:네이버 백과)

 

 

락탄티우스(240?∼320?)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 출생. 니코메디아(현재의 이즈미트)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300년경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신학 저술에 전념하였다.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될 무렵 콘스탄티누스1세의 초빙을 받고 트리어로 가서 궁정신학자가 되어 황제의 종교정책수행을 돕고, 대제의 맏아들 크리스푸스도 지도하였다. 주요저서에는 《신학체계》 《하느님의 진노에 대하여》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

 

 * 그로티우스(1583∼1645)

 

네덜란드의 법학자로서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네덜란드의 부르주아 혁명기의 사람으로서 라이든 대학에서 수학했다. 로테르담 시장으로 재직중 종교투쟁으로 인해 종신금고 및 재산몰수의 형을 받고(1618) 프랑스로 탈출(1620), 그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스웨덴의 주프랑스대사가 되었다.

1645년 네덜란드에 귀국. 부르주아적 자연법 이론을 설명하고, 법과 국가는 지상적인 것이지 천상적인 기원에 의하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의 의견의 일치에 의해 국가가 성립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중세의 신학 및 스콜라학으로부터 국가 및 법을 해방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의 저작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 1625) 3권에서 자연법적 국제법을 체계화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출처:네이버 백과)

 

 

 * *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9-04-23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내부의 적과 싸우는 내전이 더 치열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갈리아 원정기」와 「내전기」를 비교하면 더 잘 다가온다 생각됩니다. 서로를 더 잘 알기에, 역사에 정통으로 남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발전사에서 외부의 적, 적그리스도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초기에는 로마제국, 제국의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이교도라는 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oren님 덕분에 초기 기독교회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개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04-23 09:55   좋아요 1 | URL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그리스도교도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온갖 핍박과 박해를 받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에 대해 무척이나 배타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다신교를 수용하는 입장이었고, 광범위한 제국의 영토 내에서 무수한 신전들이 조상 대대로 다양한 신들을 모시고 경배해 왔었는데, 그걸 모조리 우상 숭배로 치부하고 한사코 부정했으니까 말이지요. 초기의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종교 문제로 붙잡혀 갔을 때 ‘제단에 향을 피우는 행위‘만 인정하더라도 풀려나고 방면되었다는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에겐 실소를 자아내는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탄압 대상‘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였던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3 10:04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한국 기독교사 초기 신해박해부터 병인박해에 이루어진 탄압의 이유가 제사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조상공경이라 하여 허용하지만, 과거에는 이와 달라 대규모 순교자가 나왔다는 사건 속에서 내용과 형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9-04-23 11:40   좋아요 1 | URL
초기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은 이유 중에는 ‘조상에 대한 제의 거부‘뿐만 아니라 온갖 다양한 ‘조상전래의 수호신‘에 대한 거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흥미로운 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경우도 있었고, 그걸 끝끝내 참지 못하고 끈질기게 박해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제들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졌던 셈이지요. 또한 황제들 주변 인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박해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했고요. 그리스도교가 전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수도 없이 반복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이웃나라 일본은 다신교에 대한 전통과 집착이 워낙 강한 탓인지 기독교의 교세가 아직까지도 너무 미미해서 놀랍더군요.^^
 

 

(밑줄긋기)

 

이번에는 갈레리우스의 맹렬한 공격이 페르시아군 진영에 혼란과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약간의 저항 끝에 끔찍한 대량학살이 벌어졌고 대혼란 속 부상당한 왕은(나르세스는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메디아 사막을 향해 달아났다. 정복자는 나르세스와 태수들의 호화로운 천막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용감한 로마군이 그들의 우아한 사치품들을 보고 얼마나 촌스러운 무지를 드러냈는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어떤 병사가 진주가 가득 든 반짝거리는 가죽 주머니 하나를 차지했다. 그는 주머니는 조심스럽게 간직했지만, 내용물은 던져 버렸다. 아무 쓸 데도 없는 물건은 값도 전혀 안 나가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나르세스가 입은 손실은 훨씬 더 애처로웠다. 군대를 따라왔던 여러 아내와 누이들, 자녀들이 이 패배로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비록 성품은 알렉산데르 대왕과 거의 닮은 점이 없었지만, 이번 승리 후에는 다리우스 왕의 가족에게 보여 주었던 저 마케도니아 왕의 관대한 행동을 본받았다. 나르세스의 아내와 아이들을 폭행과 약탈을 당하지 않도록 안전한 장소로 옮겨 놓은 다음, 각자의 나이, 성별, 왕족으로서의 신분에 따라, 관대한 적이라면 당연히 취해야 할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우했다.

 

동방 세계가 걱정스럽게 이 대전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시리아에 강력한 감시 부대를 집결시켜 놓고 먼 후방에서 로마군 위력의 근원을 과시하면서 앞으로의 비상 사태에 대비해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은 삼가고 있었다. 승전보를 듣자 곧 그는 자신이 직접 조언을 하여 갈레리우스의 오만을 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국경 지대를 향해 짐짓 생색을 내면서 진격해 갔다. (…)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페르시아 대왕의 사신을 접견한 것도 이 도시에서였다. 나르세스는 최근의 패배로 위력, 아니 적어도 그 기세가 꺾여 있었으며, 로마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즉시 강화 조약을 맺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신하 아파르반을 파견하면서 강화 조약을 교섭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정복자가 강요하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수락하도록 일임했다. 아파르반은 회담을 시작하면서, 가족에 대한 관대한 처우에 감사한다는 왕의 뜻을 전하고 그 고귀한 포로들을 석방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나르세스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갈레리우스의 무용을 찬양하면서, 자기 종족의 모든 군주들보다 뛰어난 페르시아 왕에게 승리한 갈레리우스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르시아의 대의명분은 여전히 정당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번 분쟁을 두 황제의 결정에 일임한다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하면서, 번영의 절정에 있는 두 황제가 운명의 변화무쌍함을 염두에 두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아파르반은 발언을 마무리하면서, 동방의 우회를 예로 들어 로마와 페르시아 두 나라는 세계의 두 눈과 같아서 어느 한 쪽이 뽑히면 세계는 불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과연 페르시아인다운 일이로다." 갈레리우스는 분노로 온몸을 떨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운명의 변화무쌍함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짐에게 태연하게 중용의 미덕을 강론하다니 과연 페르시아인다운 일이로다. 저 불운한 발레리아누스 황제께 그들이 어떤 온건함을 베풀었는지 상기하도록 하라. 그들은 그분을 속여서 패배시키고 오만무례하게 대했도다. 그들은 그분이 생을 마칠 때까지 수치스러운 포로 신세로 억류했다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시신을 영원히 모욕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여기서 말투를 부드럽게 하면서, 굴복하여 엎드린 적을 다시 짓밟는 것은 결코 로마인의 관습이 아니며, 이번 경우에도 페르시아의 가치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위엄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그는 아파르반을 물러가도록 하면서도 나르세스가 곧 황제들의 자비로 항구적인 평화와 처자식의 송환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조건을 통보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455∼457쪽)

 

 

 

 * * *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부하 장군들의 빈틈없는 경계로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안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유프라테스 강의 방어를 위해서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몸소 행군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 그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에데사 성벽 부근에서 페르시아의 왕과 충돌했는데, 결국 샤푸르 왕에게 패하여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 엄청난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희미한 단서를 참조해 볼 때, 이 로마 황제가 연달아 수많은 경솔한 행동과 과실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재난을 자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페르시아 군을 정면 돌파하려던 로마군의 격렬한 시도는 완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월등한 병력으로 로마군 진영을 포위한 샤푸르 왕은 기아와 질병이 갈수록 맹위를 떨쳐 자신의 승리를 확실히 굳혀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다. 머지않아 로마군 내부에서는 변덕스러운 불평분자들이 이 모든 재난의 원인이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있다고 비난을 하게 되었고, 불온한 소요 사태를 일으켜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군은 치욕스럽게도 퇴각을 허가받기 위해 막대한 양의 금을 내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이 우세하다고 확신한 페르시아 왕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사신들을 억류한 다음 전투 대형을 갖춰 로마군의 방벽 바로 아래까지 진격하여 로마 황제와의 직접 협상을 주장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자신의 생명과 위엄을 적의 신의에 내밭겨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회담은 예상했던 대로 끝을 맺었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고 겁에 질린 그의 군대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322∼323쪽)

 

 

 * * *

 

 

흔히 증오나 아첨을 표현하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 역사의 목소리는 대체로 샤푸르가 정복자의 권리를 오만하게 남용했다고 비난한다. 황제의 자주색 의복을 입은 채 사슬에 묶인 발레리아누스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몰락한 귀인의 모습으로 군중 앞에 내세워진 데다 페르시아 왕은 말에 올라탈 때면 이 로마 황제의 목을 발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동맹국들이 그에게 운명이 변화무쌍함을 명심하고 로마가 국력을 되찾을지 모르니 고귀한 신분의 포로들을 모욕의 대상이 아닌 평화를 위한 볼모로 삼으로고 거듭 충고했지만, 샤푸르는 여전히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발레리아누스가 수치심과 비통함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사망하자, 샤푸르는 시체의 피부 속에 짚을 채워 넣어 인간의 형상과 흡사하게 만든 후 이것을 페르시아의 가장 유명한 신전에 오랫동안 보존하도록 했다. 이것은 허영심에 찬 로마인들이 세우곤 했던 놋쇠와 대리석으로 만든 가공의 전승 기념물보다 훨씬 더 실감나는 승리의 기념물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교훈적이며 감상적이지만 그 진실성에 의문이 제기된 적은 매우 드물었다.(326쪽)

 

 

 * 갈레리우스(재위 305∼311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제국의 동부를 다스리는 카이사르에 임명되었으며,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298년 페르시아와 우세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리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책()하여 그리스도교의 대박해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서 물러난 뒤 서부의 통치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즈와 함께 정식 황제가 되어 동부를 통치하였다. 309년 병을 얻은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게 되었다.

 

 

* 나르세스

 

나르세스는 즉위 후, 로마에 빼앗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탈환에 착수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양자 갈레리우스의 치세였다. 이윽고 8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군은 296년에 아르메니아에서 독립한 티리다테스를 왕위로부터 추방했다. 297년에는 로마에서 티리다테스를 돕기위해 갈레리우스가 출진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3번의 교전 뒤 패배하여 로마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2만 5천의 군사를 다시 일으켜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결국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인의 도움으로 나르세스의 군대에 피해를 입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수복했다. 나르세스는 초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도 크테시폰을 빼았기고 후궁과 아내 및 자손들을 인질로 잡혔다. 동시에 티리다테스는 다시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복위했다. 이윽고 로마는 니시비스를 가르지르는 선을 중심으로 아르메니아와 크테시폰을 교환하는 것을 제안했다. 나르세스는 승낙했으며 이후 40여년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 발레리우스(재위 253∼260년)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에게 서부 지역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의 침략 위협이 있는 동부 지역을 담당하였다.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가 시리아를 침략하여 안티오키아(지금의 터키 안타키아)까지 넘보자 발레리아누스는 이를 물리치려 출정하였다. 그러나 에데사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260년 처형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 황제에 이어 그리스도교 박해정책을 펴서 교회의 재산을 압수하고 집회를 금지하였다. 또 그리스도교를 처벌하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발레리아누스의 재위 기간에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주교 식스투스 2세, 타라고나의 투루투어스 등이 처형되었다.

 

 

* 샤푸르 1세(재위 241∼272년)

 

사산왕조의 창건자 아르다쉬르 1세의 아들이다. 전왕()의 만년부터 계속된 로마와의 싸움에서 로마의 세력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몰아내고 아르메니아를 정복하였으며 시리아에도 침입하였다. 260년 에데사 부근의 전투에서 로마의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고 이 승리를 나크시 에 로스탐(이란 남부의 유적지)의 암벽에 조각하였다. 또 군데샤푸르의 대도시를 수사 부근에 건설하는 한편, 로마군의 포로들을 사역하여 슈스타르 부근의 카륜강()을 막고 유명한 농경용의 관개공사를 완성하였다. 그는 한때 마니교를 비호하기도 했으나 뒤에는 조로아스터를 신봉하였다.(출처 : 네이버 백과)

 

 

<페르시아 왕에게 굴욕당하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밑줄긋기)

 

제위 공백으로 인한 어떠한 소란도 발생하지 않았다. 포부가 큰 장군들의 야심은 서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견제되었고, 동생 누메리아누스와 현장에 없던 형 카리누스가 함께 만장일치로 로마 황제로 승인되었다. 국민들은 카루스의 후계자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페르시아인들이 냉정을 되찾을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수사와 에크바타나의 궁전까지 칼을 들고 진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병력과 기강 면에서는 우세했지만 당시 로마군은 가장 절망적인 미신에 사로잡혀 당황하고 있었다. 카루스 황제의 죽음에 대한 억측을 막기 위해 실행된 모든 술책에도 여론을 불식시키기는 불가능했다. 여론의 힘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옛 사람들은 벼락을 맞았던 장소들이나 사람들을 특별히 신에게 헌납된 것으로 여겼다. 티그리스 강을 로마 군대의 운명적인 한계로 정해 주었던 어느 신탁이 상기되었다. 카루스의 운명과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에 놀란 군대는 젊은 누메리아누스에게 신들의 의지에 복종하여 자신들을 이처럼 불길한 전쟁터에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큰 소리로 요구했다. 이 나약한 황제는 그들의 완강한 편견을 불식시킬 수 없었고, 페르시아인들은 승승장구하던 적의 돌연한 퇴각에 놀랐다.(417∼41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최고 통치자의 갑작스런 병사(病死)나 암살 혹은 탄핵 등으로 인해, 갑작스럽고도 운 좋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경우를 떠올려 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 * *

 

 

전대 황제의 불가사의한 죽음에 대한 정보는 머지않아 페르시아의 변경에서 로마로 전해졌고, 속주들뿐만 아니라 원로원도 카루스의 두 아들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러나 이 운 좋은 젊은이들은 옥좌를 차지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인 양 손쉽게 해 주는 출신 가문이나 재능에 있어서는 전혀 우월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민 신분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았으며, 아버지의 등극으로 일거에 왕자의 신분으로 올라선 데 불과했다. 그리고 그 후 대략 16개월 만에 일어난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들은 광대한 제국이라는 뜻밖의 유산을 받았다. 이처럼 급속한 영달을 침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미덕과 사려분별이 필요했다. 그런데 형인 카리누스는 이 두 자질이 일반적인 경우보다도 더 부족했다. 그는 갈리아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용기를 드러냈지만, 로마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수도의 향락에 빠져 행운을 남용했을 뿐이다. 나약하지만 잔인했고, 쾌락에 탐닉했지만 심미안은 부족했다. 게다가 허영심에는 영향을 받기가 몹시 쉬웠지만, 국민의 평가에는 무관심했다. 불과 몇 달 만에 연달아 아홉 명의 처와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더욱이 그들 대부분은 임신 상태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합법적인 바람기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과 로마의 최고 명문가들에 불명예를 안겨 준 온갖 부정한 욕망에 탐닉할 여유까지 가졌다. 카리누스는 이전의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기억하거나 현재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모두 집념 어린 증오심을 가지고 대했다. 그는 아버지가 미숙한 젊음을 이끌어 주도록 그의 주변에 두었던 친구들과 조언자들을 모조리 추방하거나 처형했다. 또한 몹시 비열한 복수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잠재해 있던 황제로서의 위엄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던 학우들과 친구들을 박해했다. 카리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에 대해서는 거만하고 제왕다운 태도를 즐겨 취하고, 종종 그들의 재산을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해 줄 계획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쓰레기 같은 자들을 자신의 총신, 심지어는 대신으로도 발탁했다. 궁전뿐 아니라 심지어 황제의 식탁에까지도 가수, 무희, 창녀를 비롯하여 그 밖의 모든 잡다한 악덕과 우행의 추종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문지기 가운데 한 사람에게 수도의 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또 카리누스는 자신이 처형한 근위대장의 자리에 방종한 쾌락의 추종자 가운데 한 명을 대신 앉힌 적도 있었다. 똑같이 아니 심지어는 좀 더 파렴치한 또 다른 총신에게는 집정관직을 부여하기도 했다. 위조 기술이 보기 드물게 뛰어났던 심복 비서관 한 사람은 황제의 승낙을 얻어 서류에 대신 서명함으로써 게으른 황제를 지루한 임무에서 구해 주었다고도 한다.(418∼41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어떤 경우이든 관계없이 갑작스럽게 '국가 최고의 지도자'로 올라서게 되는 경우는 역사에서 그리 드물지 않다.(지금 현재의 남북한의 최고 통치자들 역시 '준비가 덜 된 상태로' 갑작스레 무대에 데뷔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다.) 그러나 그런 직위에 오른 사람이 '급속한 영달을 침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미덕과 사려분별이 필요'하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풍부한 인물이 어떻게 우연히 찾아온 그런 기회를 기가 막히게 활용했는지, 혹은 그와 반대로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 그런 기회를 틈타(?) 국가와 국민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폐혜를 끼쳤는지는 숱한 지난 날의 역사만 살펴 봐도 충분하다. 

 

 

* 카루스(재위 282∼283년)

 

276년 프로부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가 되었다. 프로부스가 죽은 뒤, 군인들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뒤, 두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삼았다. 다른 부족들이 도나우강과 판노니아 지역을 침범하자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프로부스가 계획하였던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실현하기 위하여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카리누스는 로마에 남게 하여 서부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283년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러 티크리스강 유역까지 진격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장악하고, 주변 지역까지 압박하였다. 그러나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던 날에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질병에 걸렸다는 설과 벼락에 맞았다는 설, 훈족과 벌인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또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데 반대한 군대에서 암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가 뒤를 이어 공동황제가 되었다.(출처:네이버 백과)

 

 

* 카리누스(재위 283∼285년)

 

카루스의 장남이다. 282년 카이사르(부황제) 칭호를 받았다. 283년 아버지가 죽은 뒤, 동생 누메리아누스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카리누스는 서부 지역을, 누메리아누스는 동부 지역을 통치하였다. 284년 아버지 카루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여 경기를 벌였다. 또 게르만족이 라인 지방을 침범하자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같은 해 누메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285년 봄, 베네치아의 총독 아우렐리우스 율리아누스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자, 베로나 부근에서 그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285년 6월 모이시아에서 누메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던 중 마르구스 강변에서 살해당하였다. 황제로서 통치하는 동안 악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다.(출처:네이버 백과)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밑줄긋기)

 

데키우스는 격렬한 전란 속에서 분투하는 동시에,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침착하고 신중하게 안토니누스 시대 이래로 위대한 로마의 쇠퇴를 그처럼 급속도로 재촉한 보다 총체적인 원인들을 고찰하고 있었다. 그는 곧 공공의 미덕, 예로부터 전해 온 원칙 및 풍속 그리고 짓밟힌 법의 위엄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로마의 위대성을 항구적인 기반 위에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처럼 숭고하지만 달성하기는 어려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유명무실했던 감찰관직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했다. 이 직책은 원래 형태 그대로 유지되는 동안에는 국가의 존속에 크게 기여했었으나, 역대 황제들이 그 권리를 침해하면서 점차로 등한시되어 왔다. 군주의 호의로 권한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오직 국민의 존경만이 권위를 수여한다는 것을 깨달은 데키우스는 감찰관의 인선을 원로원의 공정한 투표에 맡겼다. 만장일치의 투표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호로 발레리아누스가 이 영예로운 직위의 최적임자로 선포되었다. 그는 나중에는 황제가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데키우스 군대의 요직에 복무하고 있었다. 원로원의 결정이 황제에게 전달되자 곧 그는 진중에서 대회의를 소집하고 감찰관 내정자를 임명하기에 앞서, 그에게 이 고귀한 직책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관해 알려 주었다. 황제는 이 뛰어난 신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축하하오, 발레리아누스. 원로원과 로마 공화국의 전적인 찬성을 얻었음을 축하하오! 인류의 검열관이자 우리 풍습의 심판관인 이 직위를 수락하기 바라오. 원로원 의원직을 계속 수행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가려내고, 기사 계급에게 옛날의 영광을 되돌려 주며, 국고 세입을 개선하되 국민의 부담을 경감해 주기 바라오. 가지각색의 수많은 시민들을 질서정연하게 계층별로 분류하고 로마의 군사력, 재정, 덕목, 자원을 정확하게 살피도록 하시오. 그대의 결정 사항은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군대, 궁정, 재판관들, 그리고 제국의 고관들 모두가 그대의 직권에 복속될 것이오. 집정관, 수도의 장관, 대제사장, 그리고 베스타 성전의 수석 성처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을 것이오. 엄격한 처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소수의 사람들조차도 로마 감찰관의 존중을 받기를 간절히 열망할 것이오.

 

 

(…) 국민의 마음 속에 자리한 명예와 미덕에 대한 예리한 감각, 여론에 대한 깊은 존중심, 그리고 국가의 풍속을 위하여 싸울 수 있게 해 주는 일련의 유용한 선입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러한 공직자가 자신의 권위를 유익하게, 심지어 효과적으로 행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소멸된 시대에, 감찰관의 재판권은 한낱 공허한 겉치레로 전락하거나 성가신 압제의 불공정한 도구로 전환될 것이 틀림없었다.(295∼297쪽)

 

(나의 생각)

 

특별감찰관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도 도입된 바 있다. 에드워드 기번의 지적대로, '한낱 공허한 겉치레로 전락한 셈'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적폐 투성이였던 전임 정권에서조차 형식적으로나마 임명되고 운영되었던 '특별감찰관' 제도가 새로운 정권에서는 유명무실해진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된지 무려 2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어찌 된 셈인지 감감무소식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따지는 사람조차도 구경하기 힘들다. 에드워드 기번의 언급은 이번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킨 새로운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도 새삼 상기시킨다. 기번의 말대로, '국민의 마음 속에 자리한 명예와 미덕에 대한 예리한 감각, 여론에 대한 깊은 존중심' 등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인물을 억지로 그 자리에 끌어앉히려는 모습이 너무 역력해 보이기 때문이다.

 

 

 * * *

 

 

인류의 총체적인 재난 가운데서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 냉담한 철학자에게는 오두막에서 옥좌로 다시 옥좌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이 급속하고 끊임없는 변천 과정이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타의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황제들이 옹립되어 권력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그들의 신하와 지지자들 모두에게 똑같이 파멸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군대에게는 즉각적으로 이 치명적인 옹립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피폐한 국민들로부터 쥐어 짜낸 막대한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품이 아무리 고결하고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탈취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빈번하게 약탈과 잔혹 행위를 자행할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필연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몰락할 때면, 휘하 부대와 속주들도 여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일리리쿰에서 황제를 사칭하고 나섰던 인게누우스를 진압한 후 갈리에누스가 대신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보낸 매우 잔인한 내용의 명령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온순한 듯하지만 사실은 냉혹한 이 군주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기를 들고 나섰던 자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네. 전투를 통해서만이라도 그 정도 효과는 거둘 수 있었을 것이네. 모든 연령대의 남성은 절멸시켜야만 하며, 다만 어린아이와 노인을 처형할 때는 짐의 평판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게. 짐에 대항하여,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이며 수많은 군주들의 아버지이자 형제인 짐에 대항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입 밖에 냈거나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자들은 모두 죽여 버리게. 인게누우스가 황제인 양 행동했던 사람임을 잊지 말고 그를 찢어 죽여 잘게 조각내도록 하게. 짐이 그대에게 짐의 손으로 친히 글을 써 보내는 것은 그대에게 짐의 감정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네.

 

국가의 공식적인 군사력이 사적인 싸움에 소모되고 있는 동안 무방비 상태의 속주들은 온갖 침략자들에게 노출되어 있었다.(332∼333쪽)

 

(나의 생각)

 

전임 대통령이 탄핵된 끝에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권 교체 이후로 나날이 심화되는 정파간의 싸움 때문에 국민들은 너무나 피곤하다. 싸움이 가열될수록 국가의 공식적인 권력을 '사적인 싸움'에 동원하는 듯한 느낌도 떨치기 어렵다. 극심한 정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임을 뻔히 알 텐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휘두르는 데만 골몰할 뿐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다.

 

 

 * * *

 

 

아우렐리아누스의 통치 기간은 불과 4년 9개월가량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순간이 기억할 만한 업적들로 충만했다. 그는 고트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응징했으며 갈리아와 에스파냐, 브리나티아를 테트리쿠스의 손아귀에서 탈환했다. 나아가 유린당한 제국의 폐허 위에 제노비아가 건설한 동방의 저 오만한 군주국까지 멸망시켰다.

 

그의 군대가 이처럼 연이어 성과를 올렸던 것은 규율에 관해서라면 아주 사소한 조항까지도 신경을 썼던 아우렐리아누스의 엄격한 태도 덕분이었다.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군대 규정이 휘하 하급 장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보낸 매우 간결한 한 통의 편지에 열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 장교에게 군단 참모장교가 되고 또한 목숨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이 규정들을 실행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도박과 음주, 점술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휘하 병사들이 절도 있고, 검소하며, 근면하기를 원했다. 갑옷은 항상 빛이 날 정도로 손질해 두어야 하고 무기는 예리하게 갈아 두며 군복과 군마는 즉시 사욯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했다. 병영 내에서는 금욕과 금주를 실행해야 하며 곡물 경작지에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양이나 닭 한 마리 혹은 포도 한 송이조차 훔쳐서는 안 되었다. 또 지주들에게 소금이나 기름, 목재를 무리하게 요구해서도 안 되었다. 황제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의 급여만으로도 그대들이 생활하기엔 충분하다. 재물은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모으는 것이지 지역 주민들의 눈물로부터 모으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실례만으로도 아우렐리아누스가 엄격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무자비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병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묵고 있던 집주인의 아내를 유혹하여 농락한 일이 있었다. 유죄를 선고받은 이 비열한 병사는 좌우에서 억지로 끌어당겨 휘어진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묶였고, 묶인 두 나무 사이가 갑자기 절단되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이런 몇 가지 본보기는 병사들을 깜짝 놀라게 하여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처벌은 끔찍한 것이었지만, 그 때문인지 똑같은 위반 행위에 대해 한 번 이상 처벌을 가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의 품행이야말로 이러한 군율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따라서 불온했던 군대도 군율 준수가 몸에 배고 통솔자로서도 손색이 없는 이 지배자를 두려워하게 되었다.(352∼35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중에서

 

(나의 생각)

 

우리나라 공직자들의 규율을 까마득한 옛날 '로마 군대'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지 '기강 해이 문제'야말로 그 조직이 얼마나 건강한가 병들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임에는 틀림없다.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기강이 바로 잡히지 않고는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전 국민들의 생활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경우에 '기강 해이'가 얼마나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

Shooting Date/Time 2019-04-16 오후 5:07:50

 

 

 

 - 사랑하는 연인들이 많군요 ♬♬

 

 

 

 - 알 수 없는 친구들이 많아요♬

 

 

 

 - 그대여 우리 이제 손잡아요 ♬

 

 

 

 - 좋아요♬♬

 

 

 

 - 봄바람 휘날리며~

 

 

 

 -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퍼질 이 거리를~

 

 

 

 - 둘이 걸어요♬

Shooting Date/Time 2019-04-16 오후 6:07:48

 

 

 

 - 개나리도 좋아요 ♬ 벚꽃도 좋아요 ♬

 

 

 

- 따스한 봄 햇살도 좋아요 ♬

Shooting Date/Time 2019-04-16 오후 6:17:38

 

 

 -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무네요 ♬

Shooting Date/Time 2019-04-16 오후 6:20:5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9-04-17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7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4-20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예술입니다. 계절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셨네요.

oren 2019-04-21 12:26   좋아요 0 | URL
언제쯤 만개할까 궁금해 하던 차에, 마침 이 날이 절정이더군요.

평일인데도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나왔던지,
그 사람들이 어찌 그리 귀신같이 ‘오늘이 절정‘인 줄 알았는지,
저도 때마침 운 좋게 이 날에 저 꽃들을 만날 수 있었는지,
그런 생각들을 하니 여러모로 기분좋은 날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