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 파스칼

 

 

파스칼(1623∼1662)

 

파스칼은 인류 역사상 아주 기이한 천재였다. 수학과 과학의 천재였으면서도 산문의 대가였고, 비범한 심리학자이면서도 신에 목말라 했던 고통받는 영혼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는 일종의 실패한 성인에 가까웠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수학보다 신을 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훨씬 더 위대할 수도 있었던 자신의 삶을 망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기독교를 옹호할 목적으로 쓴 방대한 노트들은 오늘날 인간의 존재 조건을 갈파한 철학책으로만 유용할 뿐 기독교도들의 바이블로는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열두 살 때 혼자 힘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32번 명제를 풀어냈다. 혼자 원과 선을 그리며 놀다가 찾아낸 것이었고, 수학을 배운 적도 없을 때였다. 열일곱 살에는 아르키메데스 이래의 대업적이라고 격찬받은 『원추곡선론』을 발표했고, 열여덟 살에는 계산기를 발명하여 오늘날 컴퓨터로 이어지는 원천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는 또 노름꾼들의 주사위 던지기를 보면서 거기서 자극을 받아 확률 이론을 만들어냈다.

 

순수 기하학에서부터 실용 과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탐구심을 보였던 파스칼에게는 두 개의 큰 장애가 있었다. 건강 문제와 회심(回心)이 그것이다. 어려서부터 허약했던 파스칼은 열여덟 살에 이름 모를 중병을 앓은 이후로 평생 동안 평안한 날이 없었다. 건강 문제가 외적 장애였다면 그의 회심은 내적 장애에 가까웠다. 신의 부름에 더 충실한 삶을 위해 억누를 길 없었던 학문과 연구를 포기하고 종교에 맹렬하게 매달렸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에 대한 혐오와 신의 침묵에 고뇌하던 파스칼은 1654년 11월의 어느 밤에 뜨거운 감격과 환희 속에서 신의 은총을 느낀다. 이날 밤 그가 양피지에 적어 넣은 기록은 이랬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복종……>. 파스칼은 이듬해 수도원인 포르루아얄을 찾아가 2주 동안 기도와 명상에 잠기지만 <고독한 은사(隱士)>로 숨어들지는 않았다.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포르루아얄에 머물 때 그곳에서 숨어 지내던 아르노를 만나면서 그는 장세니스트들의 변호를 위해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파스칼은 교회에 소속된 성직자나 신학자도 아니면서 당대의 첨예한 신학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 계기는 1656년에 『한 공작에게 부친 아르노의 두 번째 편지』가 불신앙, 이단, 교황과 사제들에 대한 모욕 등으로 이단 선고를 받은 때문이었다. 이때 파스칼은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아르노와 장세니스트들을 옹호하기 위한 일련의 글을 발표한다. 이 편지들이 『팡세』에 담겨 있는 『프로뱅시알』(한 지방인에게 부치는 편지)이다. 당시 장세니즘(얀센주의)은 로마 교황청에 밀착한 예수회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얀센주의는 카톨릭 내에서도 일종의 청교도적인 입장에서 신의 은총과 예정설과 금욕주의를 강조한 데 비해 예수회는 지나치게 이완된 교리를 주장한 때문이었다.

 

예수회와 장세니스트와의 대립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좁은 의미의 교리적인 대립이라기 보다는 전통적으로 있어온 상이한 두 경향 사이의 갈등이었기 때문이다. 예수회가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좀 더 근대화된 유연한 입장을 표방한 데 반해 장세니스트들은 초기 신앙의 순수성과 엄격성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갈등은 1640년에 출판된 얀센의 유작 『아우구스티누스』 때문에 폭발했다. 이 책에 담겼다는 <다섯 명제>가 교황에 의해서 이단선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얀센의 친구였던 생 시랑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이 포르루아얄 수도원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반발했고, 그 중심 인물은 소르본의 신학 교수 아르노였다. 파스칼은 바로 이들 장세니스트들과 아르노를 옹호하기 위해 방대한 편지를 썼던 것이다.

 

『팡세』에 합본된 『프로뱅시알』은 60쪽 분량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파스칼이 1년여에 걸쳐 무려 18편의 서한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거기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속에 등장하는 황제파 수도사들과 교황파 수도사들의 불꽃 튀는 이단 논쟁을 연상시킬 정도의 격렬함과 치밀한 논리들이 담겨 있으며, 갈릴레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할지도 모를 위험 속에서도 끝끝내 낡은 우주 체계를 무너뜨리고 지동설을 외칠 때의 옹골차면서도 결연한 모습이 느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파스칼이 남긴 최고의 명문장들은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한 방대한 저작의 준비 노트들의 묶음인) 『팡세』보다는 『프로뱅시알』을 더 우위로 꼽는다.

 

문제 제기의 교묘한 방식, 적의 허위와 기만을 파헤치고 그 정체를 폭로하는 치밀한 논리, 일격에 위장된 권위와 허세를 무너뜨리는 신랄한 풍자와 야유, 그런가 하면 진지하고 심도 있는 신학적 논의 등, 『프로뱅시알』은 가히 사상과 문학과 설득술의 보고이다.(539쪽)

 

 - 블레즈 파스칼, 이환 번역, 『팡세』, <인간 실존의 위대한 증언> 중에서

 

 

예수회와의 격렬한 신학 논쟁 싸움의 선두에 섰던 파스칼은 보다 큰 싸움을 준비한다.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을 깨닫게 하고 신의 은총과 함께 하는 축복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거대한 저작을 집필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파스칼이 장세니스트들의 총본산이 된 포르루아얄에 은거하지 않은 진정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파스칼은 경건하고 금욕적인 삶에 집중하면서 <기독교 호교론>을 위한 준비에 몰두한다. 그러나 파스칼이 구상했던 대작은 미완에 그치고 만다. 그는 불과 39세에 일찍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가 필생의 대작으로 구상했던 작품은 결국 파스칼이 죽은 후 발견된 유고들을 모은 단장(短章)들의 묶음집 형태로 출간되었다. 1669년의 포르루아얄 판(版) 이래 『팡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 작품은 수많은 단장(短章)들을 파편처럼 모아 편찬한 탓에 뚜렷한 체계가 없는 데다가 미완성인 채로 쓰다 만 짧은 메모 형태의 문장들이 너무 많다는 결정적인 하자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더군다나 오랜 세월 동안 연구자들의 끈질긴 연구 덕분에 이런 저런 방식의 체계와 분류에 따라 무질서한 단장들은 차츰 뚜렷한 체계를 얻게 되었다. 그 체계는 크게 2부로 나뉜다. 제1부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이다. 제2부는 <신 있는 인간의 복됨>이다. 그 중간에 이질적인 양자를 접합하기 위한 연결 부분은 <인간학에서 신학으로의 이행>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은 『팡세』의 제1부를 가장 깊이 공감하며 읽게 된다. <인간학>이야말로 누구에게나 공통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인간 존재의 온갖 본질적인 문제들이 총망라된다. 인간의 삶에 근원적으로 내재된 <헛됨>, <비참>, <권태>, <허영> 등등이 여지없이 해부되고 비판받는다. 파스칼은 특유의 금욕주의적 경향과 아주 우울하면서도 심각한 태도로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줄기차게 강조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의 거대함, 영원의 무한한 흐름, 신의 전지전능함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실로 너무나 하찮은 존재이며 끔찍할 정도로 비참하다. 왕과 같은 고귀한 신분의 인물이라도 자신의 '비참한 존재 조건'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위락을 찾기 바쁘다. 한시라도 자신의 궁극적인 존재 조건을 잊지 않으면 그 자신을 어떻게 스스로 견딜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인간이 고안해 낸 온갖 재미난 오락거리들, 가령 사냥, 공놀이, 춤, 도박 등등도 결국은 자신의 비참한 존재 조건을 잠시나마 잊고 다른 데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마련된 장치일 뿐이라고 본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른 채 감옥에 갇힌 죄수에 불과하므로.

 

파스칼이 펼치는 <인간학>은 놀라울 만큼 예리하다. 그가 비판하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은 당대 특유의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주체적이고 근대적인 교양인들' 때문에 더더욱 강조된 듯하다. 기나긴 중세의 영적 억압으로부터 이제 막 풀려난 유럽인들이 바야흐로 도래한 '인간의 시대'를 만끽하면서 자유분방한 인간적 삶을 즐기려는 풍조가 얼마나 만연했겠는가. 파스칼의 <인간학>이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감각 보다 훨씬 더 우울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그 무렵의 까닭없이 명랑한(?) 시대 풍조에 대한 파스칼의 저항심이 한몫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파스칼이 살던 무렵의 시대 풍조가 그토록 과거와 달랐던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는 바로 몽테뉴(1533~1592)였다. 그 사람만큼 '종교적 맹신에서 벗어난 인간다운 삶'을 강조한 인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파스칼 또한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미 몽테뉴로부터 '인간학'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흡수한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한 온갖 다양한 심리들까지도 자유자재로 풀어헤치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팡세』에 담긴 많은 문장들이 『몽테뉴 수상록』으로부터 직접 인용된 건 그 때문이다. 『팡세』에서 인용된 <몽테뉴 수상록> 속의 고전 작가들은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테렌티우스, 세네카, 타키투스 정도로 그치지는 않는다. 몽테뉴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였던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도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이었던 페르세우스 대왕과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장식했던 피루스에 얽힌 이야기, 스파르타의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던 에파메이논다스 등등이 그들이다.

 

인간의 비참을 삶의 모든 층위에서 예리하게 추적한 파스칼은 '인간의 비참'으로부터 놀라운 반전을 이끌어낸다. 인간이 비참하다는 걸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짐승들은 비참하지만 결코 자신들의 비참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을 자연적인 상태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짐승들과 달리 '참을 수 없는 비참'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인간의 위대는 바로 이 비참의 의식 때문이다. 인간의 비참을 가장 크게 인식할 수 있는 인물의 극단적인 사례는 바로 <폐위된 왕>이다. 평민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결코 불행으로 여기지 않았을 불행을 왕위에서 추락한 왕은 얼마나 자주 자신의 비참을 떠올릴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2년 전에 탄핵된 전임 대통령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을 지배했던 통치자의 딸이었고, 오랫동안 집권 여당의 대표였으며, 한때 광신에 가까운 열렬한 지지자들로 둘러싸였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종신형에 가까운 중형을 선고받고 차가운 감방에서 기약없는 나날을 보내는 일만큼 비참한 경우가 어디에 있겠는가?(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그녀를 역성들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말이다.) 파스칼이 <폐위된 왕>의 가장 훌륭한 사례로 든 인물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마케도니아 최후의 왕 페르세우스였는데, 그 왕의 사례를 읽으면서 탄핵 재판을 받는 순간까지도 끝끝내 거짓과 위선과 뻔뻔함으로 일관했던 전직 여성 대통령을 떠올리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http://blog.aladin.co.kr/oren/8992966)

 

이처럼 인간은 비참과 위대가 한꺼번에 뒤섞인 존재이면서, 경멸과 존경의 대상이고, 모순과 역설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혼란스러운 존재이다. 이런 인간을 그 누가 구제할 것인가? 파스칼은 온 인류의 지혜가 갈구하며 찾으려 했던 '최고선'들을 찾아서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뒤쫓아 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피론의 회의주의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인간의 비참에, 그와 반대인 독단론과 금욕주의는 인간의 위대에 의지함으로써 도리어 모순만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 위대를 밝히기 위해 진술한 모든 것은, 다른 편에서는 비참을 결론짓기 위한 논리로서 이용될>(단장 237) 뿐이다. <인간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비참하고,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이 되는>(단장 237) 데 문제가 있다. 여기서 파스칼은 철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자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인간은 애초에 창조되었을 때 원래 위대한 상태에 있었고 신의 위엄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타락한 끝에 낙원에서 추방되면서 추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원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파스칼의 <인간학>이 <신학>으로 넘어갈 때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내기' 이론을 다룬 대목이다. 사람들이 경험과 이성적 사고로써 확인할 수 있는 한도까지는 기꺼이 동행하지만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디뎌 '신앙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특별한 수단이 필요하다. 인간적 사고에서 초월적인 사고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 증명>이 필수적인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아닐 수 없다. 파스칼은 먼저 불신자의 입장을 수긍한다. 종교는 완전히 명료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이성은 신의 본질은 물론 존재 여부도 결코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이성으로 판가름할 수 없는 선택이 문제가 될 때 선택 자체를 보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 선택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배에 올라타 있다.>고. 우리는 이미 삶의 바다를 항해하는 베에 올라타 있기 때문에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이 우리의 판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가장 기본적인 이해득실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자고 제안한다. 무신론과 유신론 중에 어느 편이 우리에게 더 <수지맞는> 장사인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파스칼은 마침내 자신이 수학의 세계에 도입한 확률론까지 동원하여 결론짓는다. <신이 있다>는 주장을 선택하는 게 압도적으로 이롭다고.

 

이토록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인간학>을 마무리짓고 <신학>으로 넘어가면 급작스레 뒤바뀌는 글의 분위기가 독자들을 당혹시킨다. 파스칼은 어느새 '전지전능한 신 앞에 무릎꿇은 가엾은 어린 양'으로 변모한다. 인간 이성의 한계와 신의 전지전능함과 신의 은총의 기쁨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크리스찬의 '신앙 고백'에 가까운 글로 변한다는 얘기다. 종교가 따로 없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독자들이 읽기에는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되는 내용들이 아닐 수 없다. <구약>에 등장하는 온갖 예언자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신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메시아의 출현은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왔으며,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죄를 짓게 되었고, 예수의 수많은 기적들이 유일신의 존재를 확고하게 증명하고, 다른 종교들의 허위성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파스칼은 신을 증거하고 신과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중보자(仲保者) 예수 그리스도에 주목한다.

 

이어지는 <신학 또는 인류 구속의 역사> 또한 기독교를 믿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독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랍비의 교리>, <모세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예언> 등등이 '숨은 신'의 원리와 '표징'으로 설명되는데 무신론자들에게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또한 성경에서 인용한 수많은 문장들과 뒤섞인 단장(短章)들은 불완전하고 함축된 문장들이 너무 많아 기본적인 수준의 독해마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런 대목들을 읽으면 자꾸만 엉뚱한 상상이 파고든다. 파스칼이 구상했던 방대한 저작이 실제로 완성되엇더라면 아마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상상 말이다.

 

파스칼의 『팡세』는 방대한 노트들의 무질서한 묶음에 가깝기 때문에 유려한 문장들로 빛나는 논리정연하고도 심오한 철학 사상을 오롯이 느끼기엔 여러모로 한계를 지닌 작품이 분명하다. 그러나 『팡세』에는 몽테뉴처럼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솔직담백한 인간 유형 대신 끊임없이 확실함과 영원불변을 찾으려 애쓰는 나약한 인간 유형의 몸부림이 최대한으로 담겨 있다. 그는 몽테뉴를 몹시 좋아했지만 그의 회의주의 철학과 무신론적 종교관에 대해서는 몹시 싫어했다. 몽테뉴에게 철철 넘쳐흐르는 익살과 유머와 재치는 파스칼에게는 전율과 공포와 절망으로 뒤바뀐다.

 

몽테뉴. 몽테뉴의 좋은 점은 단지 어렵게 터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나쁜 점은 ㅡ 그의 품행은 제외하고 ㅡ 순식간에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너무 수다를 떨고 자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고 그에게 경고해 주었더라면.

 

몽테뉴. 몽테뉴의 결점은 크다. 음란한 말들. 구르네 양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쉽게 믿는 고지식한 사람, 곧 눈 없는 사람. 무지한 사람, 곡선형구적법(曲線形求積法), 더 큰 세계. 고의적 살인과 죽음에 관한 그의 의견. 그는 구원에 대한 무관심을 불어넣는다. 두려움도 뉘우침도 없이. 그의 책은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반드시 이에 구애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항상 믿음에서 이탈하지 않게 할 의무는 누구에게나 있다. 생애의 어떤 국면에서 그가 다소 자유롭고 향락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전적으로 이교도적인 생각은 묵과할 수 없다.(508쪽)

 

 

비록 단장(短章)들의 무질서한 나열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파스칼의 문장들 속엔 니체도 부러워할 정도로 기지에 번뜩이는 날카로운 통찰들이 가득하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문장 하나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파스칼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서도 『팡세』에서 상세히 다룰 정도로 기독교의 교리와 성서학에 두루 정통했는데, 먼 훗날 <안티 크리스트>라는 작품을 남길 정도로 철저히 반기독교적인 철학자였던 니체가 파스칼의 문장에 매료되었던 사실은 생각할수록 '기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니체는 파스칼의 문장에 매료된 것일 뿐 그의 호교론마저 좋아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파스칼의 신앙

 

원시 그리스도교가 요구했고 드물지 않게 이르렀던 그 신앙, 여러 철학 학파들의 수세기에 걸친 긴 논쟁을 과거에도 당시에도 경험하고, 더욱이 로마제국이 베푼 관용의 교육을 받았던, 회의적이고 남국의 자유정신의 세계의 한가운데 나타났던 신앙 ㅡ 이 신앙은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인물이나 그 밖에 북부의 정신적 야만인들이 그들의 신과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왔던 저 순진하고 거친 신민(臣民)의 신앙이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이성의 지속적인 자살과 끔찍할 정도로 유사해 보이는 저 파스칼의 신앙이며, ㅡ 이것은 단 한 번에, 일격에 죽일 수 없는 끈질기게 장수하는 벌레 같은 이성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에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6절

 

<기독교 호교론>을 쓰기 위한 방대한 노트들이 하나의 완결된 작품 속에 녹아들지 못한 탓에 끝내 900여개가 넘는 짧은 문장들을 단속적으로 끊어 읽어야 하는 일은 조금 괴롭다. 또한 몽테뉴와 니체에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유쾌하고 긍정적인 문장들 대신 몹시도 염세적이고 절망적인 파스칼의 문장들을 읽는 일은 조금 우울하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근원에 도사린 부조리와 비참과 불합리와 비극들에 대한 통찰들 만큼은 세 철학자들 사이에 뚜렷한 견해 차이가 없다. 비록 파스칼이 몽테뉴와 니체와는 완전히 정반대편의 입장에서 인간을 관찰하고 바라봤더라도 말이다.

 

파스칼의 『팡세』 속에서 발견되는 숱한 명언들은 첨단 과학의 급속한 발전 덕분에 구약성서에 담긴 창조론이 더이상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받기 어려워진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인간의 본성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팡세』를 읽는 동안에 자주 경험하는 놀라운 일 하나는 오늘날의 TV 뉴스를 장식하는 여러 핵심 인물들이 책 속에 자주 어른거린다는 점이다. 그 이름도 해괴한 버닝썬이라는 술집에서 빚어진 사소한 폭행 사건 하나 때문에 이제는 온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 하루 아침에 저 높은 그들만의 별세계에서 가장 낮은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만, 괴물처럼 추악한 몰골의 한류 스타 연예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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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Reader 2019-03-24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This review essay, I think, is one of the most erudite and brilliant writings I‘ve ever read in this town of Aladin. It gives so many insights and reflections on human nature deep in my mind, especially on both aspects of the sublime and the tragic. I really like your essays. Keep up the good work, Sir~!

oren 2019-03-24 15:19   좋아요 0 | URL
Nice to meet you. Thank you for your impressive comments.
 

 

(밑줄긋기)

 

국가에 있어서 평화는 백성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것같이, 교회의 평화는 교회의 재산인 진리와 교회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보배로운 것을 보호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 한 국가 안에 적이 침범하여 약탈하는 것을 보고도 평안을 어지럽힐까 두려워 이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평화를 거역하는 일이 되는 것같이(평화란 오로지 재산의 안전을 위해 정당하고 유익한 것이므로 일단 평화가 재산의 상실을 방임할 때는 부당하고 유해한 것이 되며, 오히려 이것을 지킬 수 있는 전쟁이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 있어서도 진리가 원수에 의해 공격당하고 신도들의 마음에서 진리를 앗아가 오류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한다면, 이때 평화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과연 교회에 봉사하는 일인가, 교회를 배반하는 일인가? 교회를 지키는 일인가, 파멸시키는 일인가? 진리가 다스리는 평화를 어지럽히는 것이 죄라면, 진리가 파괴될 때 평화 속에 머물러 있는 것도 죄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평화가 정당한 때가 있고 전쟁의 때가 정당한 때가 있다. 그렇기에 <평화의 때가 있고 전쟁의 때가 있다>(『전도서』 3장 8절)고 적혀 있으며, 이것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바로 진리의 이익이다. 결코 진리의 때와 오류의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느님의 진리는 영원하리라>(『시편』 116장 2절)고 적혀 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면서(『요한』 14장 27절) 한편 전쟁을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마태』 10장 34절). 결코 진리와 허위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447∼448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제4편, 『프로뱅시알』을 위한 수기>

 

 

(나의 생각)

 

수천 년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지극히 상식적인 이 얘기가 왜 유독 우리에게만 새삼스럽게 들릴까? 북한 때문에? 보수와 진보의 이념 갈등 때문에?  왜 진보 정권만 들어서면 이 불변의 진리가 어김없이 흔들리는가? 결국 '평화 만능 주의'가 빚어낸 웃지 못할 희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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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인간의 헛됨을 완전히 알고 싶은 사람은 사랑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그 원인은 이른바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코르네유)이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하찮은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온 땅과 왕들과 군대와 전세계를 뒤흔든다.(65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제2편, 헛됨> 중에서

 

(나의 생각)

 

이 대목을 읽는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버닝썬, 승리, 정준영, 유리홀딩스 등등이 떠오를까?

비록 그들이 단톡방에서 키득거리며 주고받은 동영상 속 인물들을 피해자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고,

추악한 괴물로 추락한 그들 가해자들과 피해 여성들 사이에 그 무슨 당치도 않는 '사랑'이 있었겠냐만,

그들이 온 땅과 왕들(한류스타들)과 경찰과 전세계를 뒤흔든 것도 사실이니까.

 

 

 * * *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망에 관하여. 자존심은 우리의 비참이나 실수와 같은 것들 가운데서도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차지한다. 우리는 기꺼이 목숨이라도 버린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해주기만 한다면.

 

허영 : 도박, 사냥, 방문, 연극, 명성의 거짓된 영속.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제2편, 헛됨> 중에서

 

(나의 생각)

 

이 대목을 읽는 데도 승리, 정준영이 거듭 떠오른다.

허구헌 날 아우성치는 팬들의 환호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들에게 허영 말고 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허영 : 해외원정 도박, 해외원정 성매매 알선, 한류 스타라는 명성의 거짓된 영속.

 

 

 * * *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상것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찬양해 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제2편, 헛됨> 중에서

 

(나의 생각)

 

그래, 맞는 말이야. 허영이 늘 문제지... 불타는 태양(버닝썬), 빅토리(승리) 등등

파스칼이 했던 말이 썩어 문드러진 오늘날의 한국 연예계의 추악한 민낯에 이토록 꼭 들어맞을 줄이야.

 

 

 * * *

 

 

당신이 자기들에게 별로 존경을 표시하지 않는 것을 불평하면서 자기들을 존경하는 지체 높은 사람들의 예를 늘어놓는 사람들을 당신은 만나본 일이 없는가. 이에 대해 나라면 대답할 것이다. <그 사람들을 탄복시킨 당신의 진가를 보여주시오. 그럼 나도 존경하리다>.(67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제2편, 헛됨> 중에서

 

(나의 생각)

 

그래서 그들은 사무총장도 아니고, 대학총장도 아닌, 어마무시한 '경찰총장'을 끌어들인 거로군.

 

 

 * * *

 

 

자애심과 인간적 자아(自我)의 본질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이 대상이 결함과 비참으로 가득 찬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는 위대하기를 원하지만 못난 자신을 본다. 그는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한 자신을 본다. 그는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불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을 본다. 그는 뭇 사람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결함이 그들의 혐오와 경멸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듯 궁지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의롭지 못하고 가장 죄악적인 정념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진실을 말살해 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그 자체로써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진실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타인의 결함을 타인에게나 자기에게나 숨기기에 온갖 주의를 기울이며 타인이 이 결함을 그에게 보여주거나 그들 자신이 보는 것을 참지 못한다.(68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제2편, 헛됨> 중에서

 

(나의 생각)

 

아아... '위대한 개츠비' 가 괜히 '승리'와 결합한 게 아니었군.

 

 

 * * *

 

 

불의.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다른 방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80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제3편, 비참> 중에서

 

 

 

불의. 오만이 필연과 결부될 때 그것은 극도의 불의가 된다.(87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제3편, 비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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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pxhqm 2019-03-17 1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타는 태양(버닝썬) 빅토리(승리) 이 부분에서 웃음이 터졌네요 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oren 2019-03-17 16:05   좋아요 0 | URL
네...^^

겨울호랑이 2019-03-17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은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과 생각을 전해주는 책임을 oren님 글을 통해 깊이 느끼게 됩니다^^:)

oren 2019-03-17 16:04   좋아요 1 | URL
네.. 고전을 읽으면서 작금의 현실들을 비춰 보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페크(pek0501) 2019-03-19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문을 보니 민음사의 <팡세>, 66~67쪽의 허영에 대한 글을 읽고 웃었던 생각이 납니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저도 팡세를 읽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 댓글을 쓰는지 모릅니다.ㅋ

oren 2019-03-19 21:10   좋아요 1 | URL
파스칼의 『팡세』는 아주 유명한 책이지만 너무 호교론에 치우친 책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제게는 썩 구미에 당기는 책은 아니겠다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더랬지요. 그래서 페크 님꼐서 그동안 여러 차례 인용해 주시던 파스칼의 문장들을 보고도 그다지 강렬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더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까(아직 절반도 못 읽었지만요..) 뜻밖에도 ‘인간 존재의 조건‘을 둘러싼 재미있고 날카로운 통찰들을 아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더군요. 몽테뉴를 많이 인용하는 것도 흥미롭고,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담긴 주장들과 유사한 이야기들도 많고요.(물론 몽테뉴를 그토록 자주 인용하면서도 그의 무신론에 가까운 입장에 대해서는 한사코 비판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영 못마땅하긴 하더군요.)
 

 

(밑줄긋기)

 

어떤 왕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자기만은 이것을 모를 수도 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미움을 사기 때문에. 그런데 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왕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자기를 해치면서까지 왕의 이익을 도모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불행은 분명히 신분이 높을수록 더 크고 더 일반적이다. 그러나 신분이 낮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항상 이익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은 영원한 환각일 뿐이다. 서로를 속이고 피차 아첨하기만 한다. 우리에 대해 우리의 면전에서 마치 우리가 없을 때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사이의 결합이란 오직 이 상호 기만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만약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친구가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설사 그가 진실되게 사사로운 감정 없이 말하였다 해도 존속할 우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 안에서나 타인에게나 위장이고 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그는 타인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피한다. 정의와 이치에서 이토록 동떨어진 이 모든 성향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천성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71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중에서

 

 

(나의 생각)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작년 여름에 뜬 블룸버그 통신의 그 기사마저도 여태까지 '보고'가 안 된 건 아닐까?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연설 덕분에(?) 이제는 삼척동자까지도 훤히 알게 된 그 유명한 뉴스 말이다.

또한 철 지난 외신 보도를 부각시킨 것만으로도 그토록 발끈한 게 다 '진실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던 걸까.

파스칼의 이토록 날카로운 글 한 대목을 읽으니 갑자기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 * *

 

 

진실에 대한 혐오에는 갖가지 정도가 있다. 그러나 이 혐오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은 확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애심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책망해야만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갖가지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표현을 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릇된 조심성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결함을 축소시켜야 하고 이것을 변명하는 척해야 하며 칭찬과 함께 사랑과 존경의 표시를 섞어야 한다. 이 모든 것으로도 이 약이 자애심에 쓰디쓴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자애심은 가능한 한 그 최소량을 취하되 항상 불쾌감을 가지며 또 왕왕 이 약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해 남모를 원한을 품는다.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이익을 얻게 될 때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를 대해 준다. 진실을 혐오하기에 진실을 덮어주고 아첨받기를 바라기에 아첨하며 속임당하기를 바라기에 속인다.

 

출세의 길을 여는 행운의 각 단계마다 우리를 진실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면 유리해지고 반감을 사면 불리해지는 그런 인물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더욱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70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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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 푸시킨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라고 흔히들 말한다네.

그건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 아닐까.

푸시킨의 운문소설 한 편 읽고 드디어 나도 따라

운문으로 감히 서평글을 쓰려 하다니 말일세.

 

운문이라곤 오십줄이 넘도록 여태 쓴 게 없는데도?

그래도 수업시간에 졸진 않았다네, 특히 국어 시간엔.

그러니 시인들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네, 진달래꽃 김소월도

광야의 이육사도 별 헤는 밤 윤동주도 가슴으로 외웠었지.

 

단지 내가 못 해 본 건 다짜고짜 운문시를 종이 위에 써보는 일.

호메로스도, 오비디우스도, 고대 그리스의 이름난 비극 시인들도

모두들 이야기를 운문시로 읊었다네, 뮤즈의 힘을 빌어.

그러나 뮤즈와 사귄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무대뽀로 운문을 짓는다네.

 

그러니 용서하시게, 운율도 모르는 사람이 에멜무지로 글줄을 읊더라도.

초입부터 말 많으니 내 글이 어딜 가려나, 이제부터 슬슬 달려볼 때 되었네.

여기서 소개할 작품은 그 이름도 특출난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네.

이래저래 한두 번쯤 들어는 봤을 테지만, 다 읽은 이 많지는 않을 그런 작품.

 

나 역시도 이 작품은 귀로만 들었다네, 클래식을 틀어주는 FM을 통해서지.

차이코프스키가 만든 3막극 오페라는 본 적 한 번 없지만 음악은 들었거든.

오페라의 스토리도 모르고 귀로 듣는 음악은 감동조차 약하더군.

풋치니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토스카》도 안 보고 들은 셈이지.

 

『예브게니 오네긴』은 공들여 만든 작품이라네, 7년 세월 바쳤으니.

작가도 기존 형식에 없었던 운문소설의 가치를 새삼 강조했다네,

<지금 내가 쓰는 것은 운문소설일세. 그 차이란 엄청난 것이지!> 하고.

그러니 아무리 무대뽀라지만, 어설픈 흉내라도 쥐어짜볼 참이라네.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다네, 등장 인물도 두 손가락이면 충분하다네.

남자 주인공인 예브게니 오네긴은 시인을 꿈꾸지만 별 직업이 없다네.

운이 좋았던 건 친척 아저씨가 일찍 죽고 그의 유산 상속인이 된 것.

시골의 영지에서 한가로이 책이나 읽으며 산보나 즐기는 신세였다네.

 

어느 날 이웃 지주이자 시인 지망생인 렌스끼를 만난 게 사건의 단초라네.

렌스끼는 이웃에 사는 올가와 애인 사이였고, 올가에겐 참한 언니도 있었다네.

렌스키는 오네긴을 꼬드겼네. 시골 자매가 사는 집에서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그때 만난 시골 처녀 따찌야나는 첫 눈에 그만 오네긴에게 반하고 말았다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무대뽀가 휘갈기는 엉터리 운문은 그만 집어 치우고,

지금 당장 푸시킨의 멋진 싯구절부터 좍좍 인용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래도 소설의 스토리가 아주 간략 하거니와, 그 이야기부터 마무리하세.

오네긴을 만나자 말자 부푼 가슴 억누르지 못한 따찌야나는 편지를 쓴다네.

 

그대의 신비한 시선에 애간장을 태웠고

제 영혼에선 그대의 음성 울려 퍼졌죠

벌써 오래 전부터…… 아니, 그건 꿈이 아니었어요!

그대가 들어오신 바로 그 순간 저는 알았어요.

얼굴은 달아오르고 온몸이 마비되어

저는 속으로 말했어요, 바로 저분이다!

그렇죠, 제가 들은 건 그대의 음성이었죠.

 

그녀의 편지는 전부 다 펼치기엔 너무 길다네, 무려 80줄이나 되니까.

아,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오네긴은 이 처녀의 사랑을 거절하고 만다네.

혹여나 순진한 처녀와 결혼까지 이르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까 걱정되어.

가슴에 멍이 든 따찌야나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 속에 빠진다네.

 

오네긴은 그 처녀를 잊지만, 그녀는 오매불망 오네긴 생각뿐이었다네.

기회를 엿보던 렌스끼가 영명축일 빌미삼아 친구와 함께 그 자매를 찾는다네.

거기서 사소한 일로 화가 치민 오네긴이 언니는 제쳐두고 올가한테 치근대고,

그 꼴을 참을 수 없었던 렌스끼는 불같이 화를 내고 결투를 신청한다네.

 

권총에 실린 총알이 렌스끼의 가슴을 꿰뚫으니, 애통하구나 젊은 청춘이여.

올가는 시름 잊고 창기병 만나 시집가네, 불쌍한 따찌야나는 마음 둘 곳 없다네.

세월이 좀 더 흘러 따찌야나는 모스끄바 사교계로 진출한다네, 시집은 가야 하니.

운 좋게도 그녀는 공작 부인이 되었다네. 퇴역 장군 만나서 그의 마음 사로잡아.

 

운명의 여신은 하릴없는 오네긴을 모스끄바로 데려가네, 따찌야나가 있는 그곳으로.

얄궂게도 에로스의 화살은 오네긴을 맞혔다네, 몰라보게 달라진 따찌야나 보고 나서.

 

<설마, 설마 저 여성이?

그런데 닮았어……. 아니야…….

이럴 수가! 그 촌구석에서>라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오네긴이 당할 차례, 그녀는 그를 보고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다네.

 

그렇다! 오들 오들 떨지도 않았고

핏기를 잃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심지어 입술을 깨물지도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살펴보아도

오네긴은 전에 알았던 따찌야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와 얘기를 풀어 나가고 싶었지만

영…… 되지가 않았다. 그녀가 물어 왔다.

여기 온 지는 오래 되었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

혹시 전에 살던 곳에서 올라왔는지?

그러더니 남편에게 피곤한

시선을 돌리고는 미끄러지듯 가버렸다…….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이제는 오네긴 차례, 의혹의 여지없이 그 남자는 어린애처럼 따찌야나를 사랑했다.

밤이고 낮이고 사무치는 연모의 정에 괴로울 뿐, 아무리 발버둥처도 뾰족한 수는 없다.

오네긴은 나날이 수척해져 환자처럼 변했고, 남들은 입을 모아 <온천>을 가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은 게 낫겠다고 버틴다, 그리곤 편지를 쓴다, 허약한 손으로.

 

내 생명이 다해 간다는 건 나도 압니다.

그러나 이 목숨이나마 부지하려면

아침마다 오늘도 당신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겸허한 간원 속에서

당신의 엄격한 시선이

무슨 비열한 간계라도 발견할까 두렵습니다.

당신의 격노한 질책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랑의 갈망으로 열에 들떠 괴로워하는 것이.

끊임없이 이성으로 끓는 피를 억제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당신이 알아주신다면.

 

그러나,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는다, 기다려봐도. 하루 이틀 사흘~ (송창식의 노래가?)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차갑기 한량 없다. 딱 마주치는데 서릿발 같은 모습!

 

도대체 곤혹은, 동정의 빛은 어디에 있는가?

눈물 자국은 어디 있는가……? 없다, 없다!

그 얼굴에는 분노의 흔적밖에 안 보인다…….

 

희망을 잃은 그는 이제 서재 속으로 침잠한다. 다시 한 번 세상과 연을 끊고.

그는 또다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기번, 루소, 만초니, 헤르더, 샹포르, 스탈 부인, 비샤, 타소

 

그래서? 눈은 글자를 읽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거의 미쳐 가는 듯했고, 그랬으면 진짜 시인이 될 뻔했다고, 작가는 농을 한다.

<우둔한 내 제자 하나도 최면술의 힘을 빌어 러시아 시 작법을 터득할 뻔했다.> 라면서.

해골 같은 모습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 간 곳은 그래도 여전히 공작 부인의 저택뿐.

 

평상복 차림의 공작 부인이 창백한 모습으로 혼자 앉아 있다. 무슨 편지 같은 걸 읽으며.

 

아, 이 짧은 순간에 그녀의 말없는 고뇌를

알아차리지 못할 자 누구냐!

지금의 공작 부인에게서 예전의 따냐,

그 불쌍한 따냐를 못 알아볼 자 누구냐!

미칠 듯한 연민에 가슴이 아파

오네긴은 그녀의 발 아래 몸을 던졌다.

……

오네긴 님, 저는 그때 더 젊었고

아마 더 예뻤을 겁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죠?

당신의 가슴속에서 제가 찾은 게 무엇이었죠?

어떤 대답이었죠? 단지 냉혹함뿐이었죠.

그렇지 않았나요? 당신에게는 수줍은 소녀의

사랑이 전혀 새로운 게 아니었죠?

……

그러나 당신을 탓할 맘은 없어요. 그 끔찍했던 순간에

당신은 고결하게 처신한 겁니다.

……

저는 결혼했습니다. 그러니 부탁입니다,

제발 절 그냥 내버려두세요.

당신의 가슴속에 자존심과

순수한 명예심이 있다는 걸 전 압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감춰서 뭐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몸,

영원히 그이에게 성실할 겁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그녀는 떠나갔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서 있던 그의 앞에

따찌야나의 남편이 나타난다, 참으로 입장 곤란하게시리.

이 곤란한 장면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참으로 친절을 베푸신다.

이쯤에서 독자 곁을 떠나겠노라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면서...

 

그러면 독자여, 나의 주인공이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한 이 시점에서

그를 떠나기로 하자.

오랫동안……  아니 영원히. 그의 뒤만 좇아

우리는 꽤나 오랫동안

세상을 헤맨 셈이다. 이제 뭍에

다다른 것을 축하하자, 만세!

진작에 도착했어야 했다!(안 그런가?)

 

자, 어떠신가? 친애하는 벗님들이여. 무대뽀가 써내려 온 엉터리 운문 서평이?

푸시킨의 저 뛰어난 운문 소설이 엉터리 서평가의 운문을 만나 엉망이 되었다고?

사실을 말하자면, 푸시킨의 소설에도 '잡담'만 풍성할 뿐, 뾰족한 수는 없다네.

헐거운 구성, 미약한 주인공, 불분명한 주제가 이 작품의 특징으로 꼽힐 정도니.

 

그런데도 왜? 도대체 왜 이 작품이 그토록 드높은 평가를 받느냐고?

그건 이 작품이 <소설로부터 자유로운 소설>이기 때문이라더군. 이게 무슨 소리냐고?

푸시킨은 시의 리듬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던 거라네.

그는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소설가였기 때문이라네.  그런 예는 예로부터 있었다네.

 

셰익스피어의 그 많은 희곡들도 9할이 시였다네, 오로지 시로만 쓴 설화시도 있었다네.

푸시킨이 좋아했던 바이런의 설화시 「돈 후안」도 그렇다는군, 읽어 보진 않았지만.

푸시킨의 위대성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했다는 거지, 변변한 소설조차 없던 때에

이토록 유례없는 비범한 운문소설을 써냈으니, 그것도 기존의 모든 관례를 파괴하면서.

 

작가는 『예브게니 오네긴』 속에서 '전통적인 화자'로만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네.

때로는 등장 인물로, 때로는 푸시킨 자신으로, 때로는 소설의 저자로, 무시로 넘나든다네.

 

그는 오네긴의 친구이자 ㅡ

<번잡한 세상사에 작별을 고한 내가 / 그(오네긴)와 친교를 맺은 건 그 즈음의 일>

따찌야나와 매우 가까운 소설 속의 인물로 ㅡ

<따찌야나, 사랑스런 따찌야나! / 너와 함께 나도 지금 눈물을 흘리누나>

푸시킨 자신으로 돌아가 자신의 유배 생활에 대한 회한에 젖기도 하고 ㅡ

<자유의 순간이 내게도 오려나? / 어서 오려무나, 자유여!>

작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한다네 ㅡ

<내가 리쩨이의 정원에서 /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던 시절 ……>

 

그러니 알고 보면 『예브게니 오네긴』의 진짜 주인공은 화자인 푸시킨이라네.

등장 인물들은 어찌보면 순전히 문학에 관한 화자의 관념을 실현시키는 도구일 뿐이지.

낭만주의에 대한 푸시킨의 관념은 시인 지망생인 렌스끼를 통해서 나타난다네.

그가 오네긴의 총에 맞아 죽기 전에 쓰는 시는 낭만주의에 대한 패러디의 절정이라네.

 

서서히 흐르는 레테의 강물이

젊은 시인의 추억을 삼켜 버리고

세상은 나를 잊겠지. 그러나 그대,

아름다운 처녀여, 그대만은

청춘의 무덤을 찾아와 눈물 흘리며

회상하겠지, 그는 나를 사랑했노라고,

폭풍 같은 생애의 슬픈 새벽을

나 한 사람에게 바쳤노라고!

 

<청춘의 무덤>, <폭풍 같은 생애>, <슬픈 새벽> 등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낭만주의의 언어인데,

그게 바로 렌스끼가 소설의 중간에서 총에 맞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하는 격이라네.

소설 속의 화자는 렌스끼의 시를 두고 <이렇게 그는 침침하고 맥없이 썼다>라고 혹평한다네.

그게 바로 낭만주의와 시에 대한 대한 푸시킨의 입장이라네. 이 작품으로 시와 작별했으니.

 

<세월은 엄정한 산문으로 나를 기울게 한다>는 작품 속 고백이야말로 자신에게 한 말이라네.

렌스끼는 젊은 시절의 푸시킨 자신어었던 셈인 거지. 눈 밝은 독자들은 알게 된다네

이 소설에는 논평하고 회상하고 사색하고 조롱하고 진지하게 탐구하는 시인이 있다는 걸.

그래서 이 소설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평을 듣는다네.

 

어찌어찌 쓰다보니 여기까지 왔건만, 끝끝내 이 서평은 졸작 되고 마는구나.

어느새 사라진 게 운율만이 아니구나. 늘어놓은 글줄들은 벗어 놓은 바지 꼴.

꼬락서니 보아하니 운문 서평은 글렀구나,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흡족한데 하나 없네.

아이고 아이고(I GO), 나는야 가야 하네, 어설픈 산문 끄적이던 그 자리로 가야 하네.

 

서럽고도 서러워라, 뮤즈 여신 못 사귄 탓에 운문 서평 엉망됐네.

늦은 나이에 재미 붙인 훌륭한 서책 중엔 이름난  서사시도 많았건만

거기서 배운 지식도 실전으로 들어가니 말짱 꽝인 줄 몰랐구나.

노래하소서, 뮤즈의 여신이여. 운문 서평도 못쓰는 알리디너의 분노를.

 

독자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던 그 이름난 서책들이여.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여,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여,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여, 에우리피데스의 <토로이의 여인들>이여.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며 <구름>이며 <새들>이여,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여.

 

오비디우스의 위트와 파토스여, 루크레티우스 철학시의 심오함이여.

단테의 질서정연함이여, 셰익스피어의 현란함과 무궁무진함이여.

에머슨의 심오함이여, 엘리엇의 난해함이여. 참으로 애석하구나.

그들을 읽은 수고가 이토록 헛되이 운문 서평글 하나로써 다 무너지다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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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3-15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운문 서평에 큰 박수를 쳐 드립니다. 멋지십니다. 이런 실험적 리뷰를 다 쓰시고...
재밌게 읽었어요. 운문 덕분이겠지요. 무슨 운명의 장난이 둘이 만날 때 한 쪽에서만 열정이 있답니까.
이걸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해야 하나요? 결국 인연이 되려면 타이밍이 중요한 것.
잘 보고 갑니다. 재밌습니다.

oren 2019-03-15 23:48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사랑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부르는 게지요.
운문으로 소설도 쓰는데, 까짓꺼 서평글로 못 쓸 게 어디 있겠나 싶어서 끄적거려 봤는데,
푸시킨이 <7년의 낮과 밤>을 갈고 닦은 걸작품을 ‘7시간‘도 안 걸려 서평글로 매조지하니,
작가한테 참 미안하다 싶은 생각도 많이 들긴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