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전후를 살피도록 풍부한 판별력을 부여하신 분이,
그런 능력과 존엄한 이성을 주었을 땐,
사용도 못해본 채 곰팡이가 생기도록
하시려 함은 확실히 아니렷다.

<햄릿> 4막 4장, 36-39

 

 * * *

 

이제는 지겨울 만하지만, 그래도 또다시 유튜브 이야기를 쓰고 싶다.

 

책들을 소개해서 올리는 '북튜버들'이 어떤 책을 올리는가를 대략적으로나마 관찰해 보니, 크게 두세 가지 분파로 분류할 수 있을 듯했다. 첫째는 이름난 서양 문학 고전파, 둘째는 소위 자기계발서(성공 노하우, 돈 버는 법, 부동산 등 재테크 서적 안내), 셋째는 힐링파(감성적인 시나 에세이 위주의 소개) 등이었다.

 

동서양의 이름난 고전을 소개해 주는 채널들 가운데서는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나 사마천의 <사기>뿐 아니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을 소개하는 분들도 눈에 띄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작품> 등을 소개하는 채널도 살필 수 있었다.

 

한 가지 특별한 예외라면, 인류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받는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무명의 독자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컨텐츠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해당 분야의 전문 교수나 문학평론가 등이 참여하여 제작한 'TV 방송용 컨텐츠' 말고는 정말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옳커니! 여기가 '사각지대'구나, 싶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는 동안에 미리 수집해 둔 100장에 가까운 '사진이나 그림'들을 이용해서 '동영상 컨텐츠'를 하나 만들어 보기로 했다. 기존의 자료에 새로 추가할 내용도 거의 없었고(심지어 헨리5세, 헨리8세, 리처드 2세, 리처드 3세 등의 이미지까지 두루 확보되어 있었다!), 영상물에 얹을 컨텐츠도 별로 새로 보탤 게 없었다.

 

해당 이미지에 알맞은 '간략한 해설'만 덧붙이면 되는데, 그걸 최대한 압축하는 데만 힘이 들었을 뿐이다. 가끔씩 니체가 했던 말들을 찾아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아주 그럴싸' 했다. 배경음악은 둘 가운데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잔잔한 쪽으로' 결말을 보았다. 셰익스피어야말로 영국이 자랑하는 대문호이니, 그에 걸맞게 영국의 국민 작곡가인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써서 만들었더니, 영상물과 겉도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리어 왕>이나 <오셀로> 혹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얘기하는데 어찌 <위풍당당 행진곡>이 어울리겠는가.)

 

두 번째로는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배경음악으로 넣고 만들어 봤는데, 이 또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분위기가 너무 강렬하여, 템페스트 이외의 다른 작품들에 해당하는 영상이 지나갈 땐 음악이 약간씩 겉도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행진곡'보다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훨씬 더 낫겠다 싶어, 결국 베토벤의 곡으로 결말을 봤다.

 

다 만들고 나서 '업로드'한 뒤에 영상물을 틀어 보니,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을 코멘트에 담은 게 아닌가 싶은 후회가 뒤따랐다.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만 해도 무려 37편이나 되는데, 일반 독자들이 과연 구석 구석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까지 해설한다고 해서 얼마나 피부에 와 닿는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나, 작품이 쓰여진 배경 지식까지 설명하느라 괜히 쓸 데 없이 다른 고전들을 지나치게 자주 거명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고작 10분 남짓한 영상인 데다가, 거기에 무려 스무 편 이상의 작품에 대한 설명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속에 굳이 셰익스피어 작품과 연관된 다른 책들까지 소개하는 과욕을 부렸으니, 일반 독자들 입장에서는 셰익스피어를 더 알아보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먹지나 않을까 도리어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가 이 짧은 영상에서 들먹거린 고전이 과연 몇 권이나 될까 싶어 다시 한번 찬찬이 세어 보니, 무려 열 권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만 해도 벌써 숨이 차오르는데,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책들을 거기다가 잔뜩 덧보탰으니, 일반 독자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을 게 불보듯 뻔하다.

 

(이 영상물에서 언급된 또다른 책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올라누스>와 관련이 있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의 출처와 관련이 있다.

T.S. 엘리엇, <황무지>, <코리올라누스>와 관련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들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특히 <코리올라누스>와 관련이 있다.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_셰익스피어 편>, 셰익스피어의 인물평과 관련이 있다.

니체, <선악의 저편>, <햄릿>과 관련이 있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햄릿>과 관련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오셀로>와 관련이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 <루크리스의 능욕>과 관련이 있다.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루크리스의 능욕>과 관련이 있다.

파스퇴르나크, <닥터 지바고>, <로미오와 줄리엣> 설명에 동원되었다.

헤럴드 불름, <교양인의 책읽기>, <햄릿>과 관련이 있다,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헨리 4세>에 등장하는 '폴스타프'와 관련이 있다.

 

이렇게, '동영상 카메라 한 대' 없이 꾸역꾸역 유튜브 영상물을 어거지로 만들어 내고는 있지만, 구독자는 생각보다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구독버튼 하나 누르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알라딘 서재에서 2003년부터 활동해 왔지만 내 서재를 즐겨찿기 등록한 서재인이 무려(!) 1,321명에 달하는데, 유튜브에서 내 채널을 구독하겠다는 사람은 고작 40명에 불과하다. 구독자를 100명 혹은 1,000명 모으는 일이 이렇게나 힘이 들 줄은 차마 몰랐다! 그런데, 구독자를 수만 혹은 수십 만씩이나 거느린 괴물들은 도대체 무슨 재주를 타고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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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2019-11-23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상물 틀(framework)에 영상물을 텍스트물로 차원 축소해서 보여주는 건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동영상이 대세인 초영상 시대에 말이죠. 영상적 틀에 동영상 없는 텍스트물은 기존 텍스트물과 크게 다르지 않아, 호흡 짧고 지극히 감각적이고 자극-반응적인 요즘 세대들한테는 잘 먹히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유튜브 채널에선 동영상을 보여줘야 구독자가 늘어날 것입니다. oren 님이 직접 출연하거나 대타를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초기 단계로서 목소리만 넣어주는 것도 방법이죠. 목소리 또한 대역을 쓰는 것도 괜찮고요. 직접 출연하지 않고 동영상+목소리 혹은 정지 영상 텍스트물+목소리 형식도 잘만 만들면 구독자를 꽤 많이 늘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① 호흡이 무척 짧다. ② 무척 감각적이다. ③ 무척 자극-반응적이다. ④ 생각이 피상적이고 충동적이다. ⑤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유튜브 시청자층 분포에서 ①~④의 부류가 가장 많다는 것입니다. 책/독서 영상 시청자층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나름 생각 깊고 점잖은 독서층도 영상물로 감각이 이동하면 대부분 ①~④의 속성을 가장 주된 속성으로 드러내게 돼 있다는 것이죠. 해서 이런 영상 세대들한테 oren 님은 책/독서 영상물을 어떻게 제작해 올린 것인가 전략적으로 고심해야 할 것입니다.

한데 셰익스피어(쉐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Henry VIII』가 상당 부분 셰익스피어가 아닌 다른 작가가(혹은 다른 작가들이) 썼다는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이라는데요. 최근 체코의 Petr Plecháč라는 수리언어학자 · 문헌학자 · 문학 연구자가 그 사실을 인공지능(AI)의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 기법을 써서 구체적으로 밝혀냈다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 인터넷 주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Machine learning has revealed exactly how much of a Shakespeare play was written by someone else
https://www.technologyreview.com/s/614742/machine-learning-has-revealed-exactly-how-much-of-a-shakespeare-play-was-written-by-someone/

Relative contributions of Shakespeare and Fletcher in Henry VIII: An Analysis Based on Most Frequent Words and Most Frequent Rhythmic Patterns
https://arxiv.org/abs/1911.05652

oren 2019-11-25 21:51   좋아요 1 | URL
우선, 귀중한 조언 남겨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군요.

제가 지금까지 시도하는 동영상물은 사실 ‘어거지 동영상‘일 뿐인 게 사실입니다. 핑계입니다만, 저는 아직 ‘동영상 카메라‘와 마이크 등 기본적인 장비조차 없이, 기존에 찍어 놓은 사진들을 이용해서 억지로 동영상화 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동영상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절름발이식의 이상한 동영상물이 만들어지게 되었고요. 이 부분이 어색하다는 건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저 스스로도 절감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안 그래도 어제 친한 선배분과 넌지시 얘기를 나눠봤더랬습니다. 유튜브에 ‘보이스 없는 동영상‘을 올리는 중인데, 보이스의 중요성, 발음의 정확성, 억양의 변화 등등이 얼마만큼 중요하냐 하는 식으로 좀 물어봤더랬지요. 그분은 메인 TV의 보도본부 기자를 오래도록 했던 분이어서 도움이 되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선배는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면서 컨텐츠의 진정성만 있으면 극복되는 문제고, ‘니 정도의 발음이나 설명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더군요. ‘니가 무슨 메인 TV 방송하고 경쟁할 것도 아니고‘ 하면서요.

어젯밤에는 또다른 친구한테 한번 물어봤더랬지요. 그 친구는 예전에 같은 회사에 다녔던 동기인데, ‘홍보담당 임원‘을 오래 했고, 마침 올해 4월부터 경제 전문 유튜브 채널을 운용 중이고, 다양한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태에 있는 친구죠.

그 친구왈, 지금 하고 있는 ‘절름발이식 동영상‘을 도대체 왜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설마 그런 방식이 유튜브 세계에서 통하리라고 믿고 시도해 보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빨리 ‘제대로 된 동영상, 말하자면 니 얼굴과 목소리가 담긴 생생한 동영상을 만들어라, 지금과 같은 동영상은 아무도 안 본다, 요즘 젊은이들은 핸드폰은 주머니에 집어 넣고 이어폰으로 듣기만 한다, 심지어 영상을 꺼도 음악이나 음성은 나오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유로‘로 제공하는 서비스도 확산 중이다, 등등 많은 조언을 해 주더군요. 솔직히 뜨끔했습니다. 구차한 변명으로 얼버무렸지만, 조만간 동영상 카메라 하나 갖춰서 진짜 동영상을 만들어 보겠다, 그런데 지금은 ‘본업‘이 뻔히 있는데. 동영상 카메라에 마이크까지 새로 갖춰서 ‘방송 녹화하는 꼴‘을 보이다가 집안에서 들키면 곤란하지 싶다, 이런저런 테스트 내지는 연습을 몰래몰래 좀 더 해보다가, 도저히 못 참겠으면(사실 지금 무지 답답한 것도 사실이거든요. 스틸컷 50장 내지 100장을 어거지 동영상으로 만들면, 컷당 5초 혹은 10초씩 강제 배분을 하는 데다가, 강약이나 완급조절도 어렵고, 기승전결식 구조도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때 본격적으로 만들어 보겠다, 그러면서 얼버무렸지요.

아무튼, 제 친구의 결론인즉, 유튜브 시장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질 게 불보듯 뻔한 상황‘이니, 너무 머뭇거리지 말고, 이왕에 시작할 거면 지금처럼 장난삼아 쪼물딱거리지 말고,남들처럼 제대로 얼굴 내밀고 프로페셔널하게 덤벼 보라고 하더군요. 저는 ‘본업‘을 그만두면 맹렬하게 한번 매달리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지금은 솔직히 어정쩡한 상태다, 그런데 결국은 북튜브를 하지 않을까 싶다, 책 읽는 게 즐겁고, (비록 글로 쓰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내가 책을 읽고 나서 깨닫고 느꼈던 점들을 남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의 하나로 유튜브를 선택한다면, 그것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 라는 식으로 얘기했더랬습니다.

아무리 유튜브가 펄펄 끓는 시장이라고 해도, 팬티도 안 입고 수영장으로 냅다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하면서 고민은 해보고 있답니다. 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곰곰 생각해 보니, ‘영상 컨텐츠의 핵심 경쟁력‘이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은 영상 컨텐츠의 무엇에 그토록 열광하는지를 심사숙고해 봐야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핸리 8세>의 작가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는 설은 예전부터 있어 왔던 ‘오래된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전예원 세계문학선> 신정옥 번역본(1999년)에서도 그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고요. 아무튼 유익한 정보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 *

이 극은 과연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냐 아니냐가 의문이다. 셰익스피어의 것이 아니면 누가 썼는가? 다른 작가와의 합작이면 누구와 함께 썼는가. 쓴 사람은 두 사람인가 아니면 세 사람의 합작인가.

무려 23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5막 17장으로 압축하여 극화한 <헨리 8세>는 셰익스피어의 만년의 작품인데 집필자 문제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다.

그 중에서도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설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연구가인 제임스 스페딩이 주장하는 합작설이다. 그는 <잰틀맨 매거진>지에 ˝누가 셰익스피어의 <헨리 8세>를 썼는가?˝ 라는 글에서 시의 형태와 운률 등의 분석에 의한 증명을 하며 셰익스피어와 존 플레쳐의 합작이라는 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운률의 검증에 의해 작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듯하지만 그것으로 작가를 결정함은 위험스럽기 그지없다. 스페딩은 <헨리 8세> 중 많은 유명한 대사를 플레쳐가 썼다고 했다. 그 많은 아름다운 대사를 셰익스피어 작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겐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맥스웰이나 틸랴드는 셰익스피어 그리고 후배작가들 플레쳐와 필립 매신져가 합작했다는 것이다. 또 한 설로는 셰익스피어와 무관한 것으로 플레쳐와 매신져의 합작이라는 설도 있다. 합작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시형의 특이성 외에도 연극이 에피소드 식으로 전개되어 전체의 통일이 없다는 점, 또 유명한 대사가 너무도 수려하여 셰익스피어다운 독특한 동력이 없다는 점, 인물의 묘사에도 일관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일찍이 그러한 점을 고려하여서인지 커모드는 <헨리 8세>를 ‘에피소드의 극˝이라 평한 바 있다.

이들 설이 확실한 증거로서는 미약하여 이설도 분분한 <헨리 8세>의 작가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결론을 내리기 어려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셰익스피어가 단독으로 집필하였다는 설이 지배적이고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

- 신정옥 번역, 『헨리 8세』, <작품해설> 중에서
 

 

결론은 물론 '됩니다.' 입니다만,

실제로 작업을 해 보니 그 과정이 무척이나 힘이 드네요.

 

물론 대본을 새로 쓸 필요는 전혀 없는데,

텍스트에는 없었던 '알맞은 영상'을 새로 마련하는 게 진짜 일이네요.

 

게다가 거기에 알맞는 배경 음악도 찾아 넣어야 되고요.

실험삼아 작업을 해 보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웬만하면 포기하시는 게 나을 듯하네요.

 

알라딘 서재에 어울리는 글과 유튜브 동영상에 알맞는 영상물은

비록 일맥상통하는 면은 있지만 곧바로' 변환'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두 플랫폼의 성격 자체도 상당히 다른 면이 많고요.

 

저도 유튜브 초보이고, 아직까지 동영상 카메라도 없이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있는데,

알라딘 서재글을 유튜브化 하는 문제로 고민 중인 분들은 참고하세요~

 

알라딘 서재글 ☞ https://blog.aladin.co.kr/oren/10636948

유튜브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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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평범한 독자들도 '전세계'를 상대로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해 '방송'으로 전달하는 시대가 됐다. 유튜브에서 '책'을 이야기하는 북튜버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홀로 생활하며, '9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이나 고쳐 쓴 책'을 가지고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던 시절에 비하면 그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북튜버들이 '출판업계'는 물론 TV, 라디오, 신문에서까지 주목을 받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소식을 나는 최근에서야 겨우 주워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름난 북튜버들의 영상은 거의 보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을 흉내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열흘 동안에는 심심풀이 삼아 '여행 사진들'을 끌어 모아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다. 나에겐 아직까지 유튜버에게 필요한 변변한 '장비' 하나 없으니까. 그러니 우선 유튜브에 '동영상'을 만들어 올릴 수 있는 방법이란, 기껏해야 과거에 찍은 사진들을 100장 혹은 140장씩 끌어 모아 3초당 1컷씩 보여주는 식으로 '어거지 동영상'을 만들 수밖에.

 

책을 이야기하는 동영상을 작정하고 만들자면 각종 장비와 기술이 필요하다. 동영상 카메라, 마이크,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 영상 편집 기술 등등은 기본이다. 물론 핸드폰 카메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무리해서 동영상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래도 혹시 '사진' 으로나마 조잡한 동영상 하나쯤은 만들어 볼 수 없을까 싶어 이리 저리 궁리하다가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찍어 두었던 '책 사진'을 활용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얼른 컴퓨터를 뒤져보니 책 사진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았다.내가 언제 이토록 많은 책 사진들을 찍었을까 싶었다. 그만큼 책을 '이미지화'하는 데 평소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봤다. 책 사진 만으로도 '북튜버' 비스무리한 흉내를 내 볼 수는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 가지 난제는 있었다. 책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마이크'가 없으니 하고 싶은 말들은 모조리 '텍스트'로 전달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북튜버 동영상이랍시고 기껏 만든다는 게 들리는 건 배경음악 뿐이요, 보이는 건 책 사진과 설명글 뿐이라면 너무 이상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만들어도 과연 독자들이 시청자들이 좋게 봐 줄까. 뭐, 상관 없다. 어차피 나에겐 나만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그런데, 100장 가까운 사진들을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 동영상을 만들자니, 각각의 사진들에 대한 설명글을 만드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소위 '대본'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작성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건 글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특히, 제한된 공간에 '압축적으로' 사진을 설명하는 두세 줄짜리 텍스트를 만드는 건 그냥 줄줄 써내려가는 글쓰기와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더군다나 동영상은 한 번 만들어 올리면 '수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니 쉽게 고쳐쓰는 글쓰기보다 얼마나 더 고역인가.

 

아무튼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유튜브에서 소개하고픈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한 번 만들어 밨다. 동영상 속에는 언젠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동영상 제작 때문에 새로 찍은 사진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말이다. 어쨌든 극히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직접 만들어 봤다는 사실이 내겐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책 소개 동영상'을 만들 수 있는 날이 올 테니.

 

(제가 만든 유튜브 영상입니다.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Rzav5oH5Q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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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1-13 0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대단하십니다.
투자된 시간을 생각하면 어마어마 하네요. 11분 26초 동영상 제작 시간 더하기 저 책 읽으시는데 투자하신 시간을 생각하면 보는 사람이 다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알라디너에게는 친숙한 노트, 손글씨라 더 반갑기도 하고, 월든을 제일 먼저 꼽으신 것도 웬지 oren 님이시라면 그러셨을 것 같기도 하고요.
새로 책을 구입하기보다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책 제목처럼 잃어버린 시간를 찾아가는 방법이 될수도 있겠다고, 혼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밑의 자막도 도움이 많이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oren 2019-11-13 12:09   좋아요 0 | URL
hnine 님께서 격하게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동영상 만든 보람도 느끼고요.^^

유튜브 동영상들을 보면 ‘혼자 힘으로‘ 어떻게 그토록 훌륭한 영상들을 만들어 내는지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유튜버들은 사실상 ‘1인 방송국‘이나 마찬가지인데,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기획, 탐사 보도, 뛰어난 영상 편집 실력, 기발한 아이디어 등등이 조합되어, 기존의 방송국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영역으로 발빠르게 침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더군요.

저같은 경우야 완전 쌩초보니 이런 광경들을 멀치감치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하는 구경꾼 같은 기분이지만, 뭔가 대단히 활발한 에너지가 유튜브를 춤추게 만들고 있구나 싶은 느낌은 듭니다. 고요한 절간 같은 알라딘과는 너무나 판이하기도 하고요.

앞으로 유튜브에서도 책 소개를 할려고 마음 먹고는 있는데, 이런 영상 하나를 만드는 데도 엄청나게 품이 드니 뭔가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도 없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글을 쓰는 게 훨씬 쉽겠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나마 텍스트 만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이미지나 영상으로 좀 더 풍부하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다시 한번 재독하면서 영상화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페크(pek0501) 2019-11-13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영상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책이 너무 잘생겨서 보는 것만으로 좋은데, 음악까지 멋지고.
더 멋진 것은 오렌 님의 자막... 11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세계 책의 날의 유래도 알게 되고, 위대한 작가 둘이 죽은 날이 동일한 날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정보가 풍성합니다.
혹시 유튜브에서 활동하시게 되면 알려 주십시오. 오디오북처럼 애청하겠습니다.
이 많은 정보를 혼자만 소유한다는 건 아까운 일이라 사료되는 바, 한 권의 책으로 묶어도 좋은 것 같습니다.

oren 2019-11-13 14:34   좋아요 1 | URL
페크 님께서는 소위 ‘풀 영상‘을 다 봐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맨 처음엔 책이나 노트 한 컷마다 설명글을 두 줄 혹은 세 줄씩 자세하게 넣어봤더니, 자막을 제때 빠르게 소화하기가 힘든 어려움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원래의 대본‘을 절반 수준으로 전면 개고를 하게 됐답니다. 그런데도 한 컷당 4초 혹은 5초 정도로 노출시켜도 자막을 소화하기 벅찬 문제가 있더군요. 그래서 좀 더 과감하게 ‘한 컷당 7초씩‘ 배분되도록 다시 제작했더랬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자막을 소화하면서도 책 구경까지 하는 데 큰 무리가 없겠다 싶었으니까요.

배경음악도 원래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을 넣었다가,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다시 바꾸는 과정을 거쳤는데, 영상과 배경음악이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왠지 조금은 겉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아무튼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면 좀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주저없이 올렸는데, 페크 님께서 열렬히 시청해 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stella.K 2019-11-13 1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한 걸음이 어딥니까? 남의 아흔 아홉 걸음 보다 나의 한 걸음이 더 가치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북튜버신데 된다면이란 가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설명을 읽으니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는데요? 이것도 페이퍼 쓰는 것만큼이나 쉬워진다면
저도 페이퍼 안 쓰고 그냥 말로 하겠습니다. 저는 기계와는 영 친하지가 않아서
아마도 이번 생은 못하지 싶습니다.ㅠ
영상 정말 근사합니다. 선곡도 탁월하신 것 같고.
언젠가 꼭 정식 북튜버가 되시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oren 2019-11-13 15:34   좋아요 2 | URL
그 한 걸음이 어딥니까? 남의 아흔 아홉 걸음 보다 나의 한 걸음이 더 가치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 저는 스텔라 님의 이 댓글을 보고 『돈키호테』의 산초가 했던 말인 줄 알았습니다. 산초는 정말로 스텔라 님처럼 ‘똑 부러지게 & 핵심을‘ 말하거든요. ㅎㅎ

저는 유튜브에 거의 관심이 없다가, 얼마 전쯤에 등산을 함께 했던 선배들로부터 ‘유튜브‘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더랬습니다. 여행과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하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취미 삼아 & 꾸준히‘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래서 무턱대고 아무런 장비 하나 없이 ‘동영상‘을 벌써 다섯 개나 만들어 올리고 있답니다. 완전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말이지요.

그런데도 ‘인사치레‘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Good! Good! 하는 반응을 보여주셔서 계속 시도해볼 참입니다. 알라디너 분들의 호의적인 반응도 큰 힘이 되구요. 암튼 삐약삐약 우는 햇병아리한테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11-14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이건 반칙입니다 !!!! 우직함이 묻어납니다 ㅎㅎㅎㅎ

oren 2019-11-14 15:35   좋아요 0 | URL
제가 ‘우직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는 합니다. ㅎㅎㅎㅎ

오랫동안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조차 없애 버리고, 몇 년 전부터는 오로지 알라딘에서만 주구장창 글을 쓰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도 우직하든, 미련하든, 둘 중의 하나는 해당되겠지요.

조금조금씩 동영상 편집 기술을 익혀서 마침내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하고 올리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저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튜브 때문에 알라딘마저 헌 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알라딘이야말로 저에게는 ‘디지털 세계의 고향 마을‘ 같은 곳이거든요.^^

페넬로페 2019-11-17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시 봐도 대단합니다.
동영상뿐만 아니라 그동안 읽어오신 책과 독서노트에서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을 느낍니다.
이 동영상을 도서관에서 하는 클래식 독서동아리 톡방에 공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11-17 13:06   좋아요 1 | URL
우와~~ 제가 만든 동영상이 드디어 ‘카톡방‘에서 공유되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님.

사실 저로서는 그저 좋아하는 책들을 꾸준히 읽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어왔을 뿐인데, 변변찮은 제 리뷰와 페이퍼에 대해서 많은 알라디너분들께서 적극적으로 공감해주셔셔, 제가 읽은 책들을 유튜브에도 공개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책‘이라는 사물은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을 읽은 사람이 ‘실제 이상으로‘ 훌륭해 보이는 묘한 속성을 지닌 탓이기도 할 꺼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이 동영상의 후속작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읽기]를 올렸는데, 글로 쓰는 것보다, 동영상 제작이 엄청나게 힘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페넬로페 님도 『오뒷세이아』는 읽으셨을 테니 나중에 『율리시스』에도 한 번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그 책의 제 18장 제목이 ‘페넬로페‘ 거든요.^^

CREBBP 2019-11-18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말로 표현 못하게 훌륭하십니다.

TV로도 뉴스 제외하고는 거의 유튜브만 제가 봤을 때, 유튜버가 하는 고민들은 비슷비슷해보입니다. 소위 해당 장르에서 네임드가 되지 않으면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 라는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음악선택에서부터 편집 등등 컨텐츠 외에도 여러가지가 필요하니까 영상 하나 만드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다음 번엔 오렌님 목소리로 자막을 읽어주시기를 기대해볼께요

저도 블로그를 하면서 늘 느끼는게, 이 내용들을 누가 꼼꼼히 읽을 것도 아니고.. 짧게 요약하고 ~어요 체로 바꾼 다음 유튜브로 내보내면 조금 더 책을 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ㅊ 힘들죠.. 영상이며 음악이며 편집이며 이런걸 생각하다가는 책읽을 시간이 없어질 거 같아요.. 그래도 언젠가 시간이 아주아주 펑펑 남아도는데 정말로 할 일이 없다 싶으면 시도해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리뷰 블로그 쓰는 일의 동기부여로 삼고 있어요.


oren 2019-11-18 12:14   좋아요 0 | URL
너무 격하게 공감해 주셔서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튜브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약육강식‘이고, ‘승자독식‘에 가까운 ‘정글‘ 같은 곳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CREBBP 님 말씀처럼 이미 상당한 지명도와 권위까지 확보한 유명 유튜버의 경우는 밀림에 나타나자 말자, 수많은 힘 없는 사용자들이 머리를 조아리다시피 우루루 몰려가 ‘찬양‘하는 형국처럼 느껴지고, 일반 유튜버들도 ‘수많은 무리들‘을 거느린 파워 유튜버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소소한 영상으로도‘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니까 말이지요. 그들은 컨텐츠 제작에서도 비용을 아끼지 않을 수 있으니,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 경향이 심화될 가능성도 많고요.

사정이 그렇더라도, 유튜브의 매력은 분명 있는 듯합니다. 유튜브 입장에서도 ‘양질의 컨텐츠를 보유한 새로운 사람들‘을 유튜브로 꾸준히 유입시키는 게 매우 중요한 정책 방향일 테고, 그 때문에 소위 ‘스타트 업 유튜버들‘한테 나름대로 ‘성장 기회‘를 주기 위해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모습도 보이는 것 같으니까요. 결국 ‘길게 보면‘ 컨텐츠의 싸움이고, snowball 만들기 전략이 중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CREBBP 님 말씀처럼, 대다수의 일반 유튜버로서는 ‘동영상‘ 하나 제작하는 것도 엄청 힘에 벅찬 게 사실입니다.(저는 아직까지도 동영상 카메라조차 갖추지 않아서, 동영상 촬영은 물론 촬영한 동영상을 직접 편집해본 경험도 전무하지만요.) 저도 CREBBP 님 말씀처럼 알라딘 서재에 올린 글을 ‘그대로‘ 동영상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굳이 경어체로 바꿀 필요도 없이요.(<걸어서 세상 속으로> 스타일처럼요.) 그런데, 막상 텍스트로 만든 걸 ‘동영상‘으로 바꾼다는 게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여러가지 난점들이 있더라구요. 텍스트는 충분하고도 길이가 긴데, 그에 걸맞는 영상을 어떤 식으로 확보하느냐가 가장 큰 난점 같아요. 영상 속에 책이라든가, 텍스트의 이미지화라든가, 관련 이미지의 노출 등으로 메꾸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듯해서요. 내용에 맞는 BGM 선곡도 굉장히 신경쓰이는 문제고요.)
 

 

"호머(Homer), 초서(Chaucer), 그리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달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 마이크 아이스너

 

 * * *

 

때는 바야흐로 유튜브의 시대인가 보다. 여러 해 전부터 네이버 블로그도 접고, 오로지 알라딘 서재만 주구장창 이용했던 나조차도 유튜브를 기웃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영상 매체가 '압도적인 힘'으로 책을 밀어내고, 독서인구를 끊임없이 쪼그라들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대세임을 이제는 솔직히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영상물이 책을 끝없이 밀어내는 흐름 속에서 책과 유튜브는 과연 어떤 식으로 공존할까. 책 속에 담긴 눈에 보이지 않는 깊디깊은 생각들을 다양한 이미지와 목소리와 결합해서? 혹은 텍스트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는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영상으로 꾸며서?

 

물론 책과 영상과의 결합이 영영 이질적인 조합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TV, 책을 말하다」 혹은 「TV 문학관」과 같은 프로그램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으니까. 또한 소설과 영화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오만과 편견』이나 『안나 카레니나』만 하더라도 '영상'부터 떠올리는 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작가들이나 교수들이 책을 주제로 삼아 텍스트가 아니라 직접 말로서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인문학 강좌'들은 얼마나 많은가.

 

요며칠 동안 유튜브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란 사실들이 참으로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는 내가 만약 '북튜버'로 활동하게 된다면 꼭 이야기하고 싶은 '책들'에 대해서도 이미 적잖은 '유튜버'들이 나름대로 뚜렷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책들은 가령,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사마천의 『사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등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래도 내가 꼭 얘기하고 싶은 책들이 빠짐없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든가, 몽테뉴의 『몽테뉴 수상록』, 혹은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나 『황폐한 집』, 혹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같은 특출난(?) 책들까지 '유튜브 동영상'들에 몽땅 점령당하고 만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그런데, 이런 책들을 과연 유튜브 동영상으로 만들 수나 있을까? 설사 그런 영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걸 읽어 줄 유트브 독자들은 또 얼마나 될까?)

 

아무튼, <책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책인 호메로스의 두 걸작시만 하더라도 어느새 '유튜브 동영상'에서 수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당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놀랍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800년 전에 쓰여진 눈 먼 음유시인의 <전쟁 이야기>가 이토록 급변하는 현대 문명에서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야기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함과 동시에, 책 속에 쓰여진 훌륭한 이야기는 결코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웅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메로스의 두 걸작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흔히 최초의 문학으로 간주된다. 이 두 작품은 모든 유럽 문학의 '근원이자 원천'이며, 새로운 사상의 대로로 향하는 '대문'이다. 합쳐서 2만 8천 행에 이르는 두 서사시는 그 전과 후의 수백 년 기간을 통틀어 '이 놀라운 업적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전혀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호메로스의 재능은 그리스에서 아주 초기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테네인들은 마치 오늘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가 성서를 대하듯이, 무슬림이 코란을 대하듯이 그의 작품을 대했다.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에서 『일리아스』의 구절을 인용했다.(190∼191쪽)

그리스에서 호메로스의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대략 기원전 300년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스라엘에서 히브리 성서(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약성서)는 기원전 200년경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230쪽) 


성서보다 먼저 쓰여졌고, 숱한 고대의 비극작가들이 즐겨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 삼았으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토록 자주 읽고 암송했으며,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중세의 몽테뉴의 손에서도 좀처럼 떠나지 않았고, 20세기 최고의 소설가인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줬던 호메로스의 작품들이 유튜브 세상에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 것인지를 관찰하는 것도 몹시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점들에 관해서는 『호메로스와 테레비』라는 몹시도 기이한 제목의 책을 쓴 데이비드 덴비의 견해가 '유튜브 혁명'과 관련하여 특별히 참고할 만하다.(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진 못했지만, 피터 왓슨이 쓴 『생각의 역사』만 살펴 봐도 그의 생각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초 대학 교육 관련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서 레빈은 1929년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제임스 프리먼 클라크라는 사람이 이런 불평을 하는 대목을 제시했다. "우리가 공부에 흥미를 느끼도록 애쓰는 교수는 없었다. 『일리아드』가 무슨 늪지대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 발이 푹푹 빠지면서 호메로스를 그저 읽어내는 게 과제였다. ······ 이 불후의 서사시가 담고 있는 영광과 찬란함과 부드러움과 매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6음부 운율의 리듬에 대해서도 아무 설명이 없었다."(1110쪽)

문화 전쟁에 대해 가장 독특한 반응을 보인 책은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1943∼ )의 걸작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Great Books』이다. 《뉴욕》매거진 영화평론가이자 《뉴요커》객원편집위원인 덴비는 1961년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해 교양과목 두 강좌를 들었는데 제목은 '문학 인문학'과 '현대문명'이었다. 1991년 가을 덴비는 컬럼비아대로 돌아가서 똑같은 강의를 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강의는 얼마나 변했으며, 지금은 어떤 식으로 가르치는지, 1990년대 학번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은 또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를 알아보고픈 호기심에서였다. 그가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것은 1969년부터였다. 물론 여전히 평론 일을 좋아하지만 '스펙터클의 사회'에 이골이 나기도 한 터였다. 변화무쌍하고 간접적인 미디어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미디어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정보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이 되었다. 일단 그럴 듯한 것 같다가도 바로 흩어져버린다. ······ 누구의 정보도 확고하지 않다. 미국인들이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데 원인이 있다. 남들처럼 나도 지쳤지만 그래도 뭔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미디어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의 틀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재미는 넘치지만 뭔가 몹시 불만스러운 상태 말이다. "덴비는 우리를 자신이 좋아하는 위대한 책들(호메로스, 플라톤, 베르길리우스, 성서, 단테, 루소, 셰익스피어, 데이비드 흄, 존 스튜어트 밀, 조셉 콘래드, 드 보부아르, 버지니아 울프) 곁으로 데려가면서 관심 없는 작가들(갈릴레오, 괴테, 다윈, 프로이트, 아렌트, 하버마스)은 무시한다. 그의 저서는 위대한 책들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유명하다. 고전을 영화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하고, 아들 맥스가 오래된 목소리의 가치를 모른 채 겉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는 없는 미디어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그는 소수민족 출신 학생들이 왕왕 필독서 목록이 '백인 유럽인' 일색으로 짜인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당혹감과 서글픔 같은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그의 논지는 이런 것이다. 백인 학생이든 흑인 학생이든 라틴계든 아시아계든 '독서 습관이 제대로 붙은 상태로 대학에 들어온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과거와 명목상의 연계 이상의 것을 가진 학생은 거의 없다. '백인 학생 대다수가, 흑인이나 황인종보다 우수하다고 하는 서구의 지적 전통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호메로스, 단테, 보카치오, 루소, 마르크스의 세계는 이제 아주 낯설고 지금 우리와는 다르다 등등. 이어 덴비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위대한 책 강좌를 많은 학생들은 대단히 불편하게 생각한다. 요즘 분위기에 맞지 않고, 수강생의 게으름이 들통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동적인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사실상 학부 커리큘럼에서 가장 급진적인 강좌다." 덴비는 학생 때 읽었고, 책을 쓰면서 다시 공부한 '위대한 책들'이 사람마다 다른, 독특한 해석이 가능하며, 문화적 우파가 원하는 식의 해석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학생들은 '고전이 우리가 사랑을 할 때, 고통을 받을 때, 그리고 지식을 추구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단계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은 서구의 정전은 서구의 정전을 공격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도] 전통적인 '백인' 문화를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다고 손해 볼 일은 없다."

덴비가 보기에 진짜 위협은 미디어다.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영상과 음향의 홍수에 그저 맥을 놓고 있다. 그런 속에서는 현재를 제외한 모든 순간은 이상하고 핏기 없고 죽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현대 세계는 뭐가 잘못 돼도 단단히 잘못 됐다고 그는 말한다. 1961년 대학에 들어갔을 때 팝의 열정은 뭔가 해방적인 분위기를 주었고, 답답한 교실에 신선한 공기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는 시들해졌고, 팝은 순응과 안락감을 대표하는 분야가 되고 말았다. 전통적인 고급문화가 그 낯섦과 난해함 때문에 오히려 학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충격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다."(1122∼1124쪽)

 

'덴비의 생각'을 들어 보면 우리는 뭔가 부정적인 동시에 약간은 희망적인 몇 가지 결론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첫째, 진짜 위협은 미디어다. 둘째, '위대한 책들'은 사람마다 다른 독특한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셋째,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다.

 

한때 'TV 안보기 시민모임'이 우리나라에서도 발족한 적이 있었다. 이 모임의 선행 모델은 미국의 'TV 끄기 네트워크'였다고 한다. 문명의 총아인 TV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수동화시키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설 수 있는 사고능력을 마비시키는 데 있다. 사람들은 TV를 보면서 그저 자신을 내맡긴다.

 

‘TV 끄기 네트워크’ 베스피 총재는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일들은 의식적인 힘과 노력을 요구하지만 TV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의학·보건단체 10곳은 TV 시청을 “인간이 깨어나서 하는 가장 정지된 행동”이라고도 규정했다. 과학자들은 TV가 뇌에 미묘한 이완감과 편안함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계속 TV를 켜고 싶게 만드는 과정이 약물 중독과 매우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책은 정반대다. 책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든다. 맹목적인 TV 시청은 결국 책에 적대적이며 우리들의 삶과 문화에서 깊이를 앗아간다.

 

그런데도 왜 유튜브는 날로 번창하는가. 사람들은 그저 입으로 던져넣기만 하면 되는 과자처럼 본능적으로 '영상물'을 좋아하기 마련이고, 영상물의 소비가 과거처럼 TV가 자리잡은 '거실'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느새 우리들의 손바닥까지 바싹 옮겨 왔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유튜브 레볼루션』이라는 책을 쓴 현직 '유튜브 최고 비즈니스 책임자'인 로버트 킨슬은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요약했다.

 

콘텐츠의 무료 유통, 안정적인 수익 창출의 기회, 카메라의 진화 이 세 가지 요인이 창의적 인재로 무장한 새로운 공급라인을 생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런 한편으로, 개인용 스크린의 확산은 새로운 수요의 물꼬를 텄다. 모바일은 우리가 영상을 시청하는 방식을 예컨대 책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바꿔놓았다. 폭넓은 선택권과 접근성으로 사람들 사이에는 같은 영상과 프로그램을 즐기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기성세대가 잘 모르는 크리에이터들이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쟁은 진열대나 케이블 상품을 두고 벌어지지 않는다. '시청자의 시간'이 경쟁의 대상이다. 광고주, 방송사, 신문사, 웹사이트, 콘텐츠 창작자, 앱 등이 모두 시청자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다. 관심을 얻어내야 상품이나 서비스, 또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구매를 유도하는 광고를 시청자에게 판매할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시청자의 관심이 곧 '화폐 가치'가 되는 것이다.

관심이 디지털 시대의 화폐라면, 모든 기업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바로 영상 시청이다. 영상 시청은 인간이 여가를 보내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다. 미국인은 하루에 평균 다섯 시간을 무언가를 시청하는 데 쓴다.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을 소비하는 건 딱 두 가지, 일과 잠뿐이다.

 

 - 로버트 킨슬, 『유튜브 레볼루션』 중에서

 

 

일과 잠 말고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활동이 바로 무언가를 시청하는 시간이고, 그 무엇인가를 공급하는 주체는 어느새 독점적인 지위를 누려왔던 수많은 미디어 기업으로부터 개인의 영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에도 무덤덤한 채 계속 책을 붙들고 알라딘 서재에만 기웃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 알라딘 서재가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지금처럼 번창할 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일단 뭐라도 해 보자는 다급한(?) 심정으로 동영상 컨텐츠부터 뚝딱 만들어 봤다. 당장에는 '유튜버'에게 필수적인 각종 장비들이 하나도 없으니 '사진으로 동영상 만들기' 작업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유튜브를 이러저리 둘러 봤더니 생각보다 여러 장비들이 필요한 것 같다. 동영상에 적합한 카메라, 마이크, 조명, 영상 편집 프로그램 등등. 나로서는 뭐하나 딱히 갖춰진 게 없다. 심지어 유튜브 관련 책조차 단 한 권 사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지냈길래 이토록 유튜브에 무관심할 수 있었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 *

 

책을 해설하는 '동영상'을 직접 만드는 일은 단단히 마음먹고 작업에 능숙해 지기 전까지는 적잖은 준비 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노후화된 컴퓨터의 업그레이드부터,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배우는 것까지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일단은 연습 삼아 무작정 '여행 사진 동영상'부터 만들어 봤다. 유튜브를 시작해 보라는 말을 듣고 유튜브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벌써 닷새는 지난 듯하다. 무료 배경음악 하나 다운받는 데도 한두 시간씩 휙휙 사라진다.

 

 

 

 

 

지난 주말에 열일 제쳐두고 동영상을 두 개씩이나 만들어 올리고 나니 문득 '삐악삐악 우는 게 너무 늦었소'라고 말했던 『돈키호테』의 산초가 생각난다. 구독자 수가 고작 26명에 불과한 햇병아리 신세라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고맙게도 산초에게 다음과 같은 대화도 따로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나리.」산초가 말했다. 혀에 종기가 나도 닭은 꼬꼬댁 울어야 하고, 오늘이 너의 날이면 내일은 나의 날이라지 않습니까요. …… 오늘 쓰러진 자 내일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침대에 있기만을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새로운 싸움을 위해 다시 기운을 차릴 생각도 없이 맥 빠져 있지 마시라는 겁니다요.」(806∼809쪽)

 

 - 『돈키호테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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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11-04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겨울 서점 말고는 북튜버는 못보겟더라구용 ㅋㅋ 뭐랄까 북튜브 보는 시간에 책을 읽자! 모드가 된달까 ㅎ

oren 2019-11-04 20:17   좋아요 1 | URL
저도 겨울서점 채널은 언뜻 본 듯합니다.
공장쟝님 말씀대로 ‘알아두더라도 별로 쓸모가 없는‘ 북튜버들도 범람하고 있는 느낌도 들더군요.^^

공쟝쟝 2019-11-04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별별 콘텐츠가 범람하는 유튭 세계에서 양질의 콘텐츠로 정화작용 해주길 바라며 구독 버튼 누르러다녀올게요 ㅋ

oren 2019-11-04 20:20   좋아요 1 | URL
유튜브 세계에서는 ‘구독 버튼‘ 하나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듯하더군요.
제 친구 한 녀석은 유튜브 채널 개설한지 6개월 되었다는데(구독자 274명),
구독자가 한 명만 빠져나가도 밤에 잠이 잘 안 올 정도로 예민할 때도 있다고 하더군요.
암튼 햇병아리인데도 구독까지 눌러주시겠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11-04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클래식마니아 이신가봐요? 동영상에 bgm이 클라식입니다 ㅎ 이거 만드는데도 시간 엄청 잡아먹었을 듯 합니다! 잘 읽고 보고 갑니다^^

oren 2019-11-04 20:52   좋아요 1 | URL
동영상 두 개 만들면서, BGM으로 차이코프스키의 <봄의 소리 왈츠>랑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쓸 생각을 미리 떠올렸더랬습니다.^^

어쨌든, 비엔나에 가서는 빈 무지크페라인 음악공연 티켓도 현장 구매를 하고,
빈 슈타츠 오퍼에서의 음악공연 티켓은 한국에서 미리 사전예약을 하기도 했고,
빈 외곽에 있는 음악가 묘지까지도 일부러 꽃을 사 들고 가서 헌화할 정도쯤 좋아합니다.^^

그런데, 막상 원하는 BGM은 빤히 있는데, 그 음원을 어디서 어떻게 무료로 다운 받는지를 아는 데는 1시간 이상씩이나 걸리더군요. 정작 동영상으로 만드는 데는 각각 한두 시간 남짓 걸렸던 듯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11-04 21:59   좋아요 0 | URL
유튜버도 사진이나 글이나 음악에 대한 저작권을 알아보고 해야겠더라구요 만약 유튜브를 한다면 그런게 엄청 귀찮을 듯 싶습니다 ㅎㅎ

oren 2019-11-04 22:1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인물사진에는 초상권 문제도 걸려 있고요.
유튜브 강좌를 5주 동안 들은 제 선배 얘기에 따르면,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그대로 영상으로 녹화해서 테스트 삼아 올렸는데도,
유튜브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하더라구요. 저작권이 있는 음악이니 ‘해명‘을 하라고요.
상업 목적이 아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이다, 해서 해명은 됐지만,
구글의 인공지능 기능이 새삼 대단한 것 같다고 혀를 내두르더군요.

hnine 2019-11-05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영상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제가 최근에 다녀온 곳이라 체코 편은 특히 더 반가왔고요.
요즘은 검색을 youtube로 할 정도이니 안올라와 있는 테마가 거의 없을 듯 합니다. 그래도 같은 주제에 대해서라도 나는 나만의 내용을 담을테니까 같지는 않다고 봐요.
만드시느라 힘드셨지만 재미도, 보람도 있으실 것 같아요.

oren 2019-11-05 10:02   좋아요 0 | URL
hnine 님 반갑습니다.^^ 님께서도 최근에 체코를 다녀오셨군요. 5년 전에 제가 갔을 때만 하더라도, 거기에 한국 사람들이 그토록 많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람들이 많겠지요?

동영상을 만들고, 유튜브에 올리고 나서 보람이 있었던 게 ‘벌써‘ 두 번이나 있었어요. 한 번은 지난 일요일에 호수공원을 산책하다가 <17일 동안의 유럽 여행>을 함께 했던 분을 만났는데, 그 분한테 영상을 보여드린 일입니다. 무려 17일 동안이나 네 명이서 함께 여행을 하고도, 사진조차 제대로 공유하지 못했었거든요.

두 번째는 지난주에 2박 3일을 함께 등산했던 친구 한 명이 대뜸 ˝동유럽을 가봐야 겠군.˝ 하는 멘트를 날려준 일이에요. 그 친구와는 히말라야도 함께 다녀왔는데, 주구장창 산만 찾아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그 친구는 히말라야만 세 번 갔다왔으니까요.) 정말 보람이 느껴지더군요. 제 영상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는 거니까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동안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몇몇 친숙한 철학자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철학자들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한결 가뿐하게 도와주는 특급 도우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철학자들은 마치 어두컴컴한 지옥을 여행하는 단테에게 끊임없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준 베르길리우스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

 

총 13권이라는 어마어마한 길이로 구성된 대작 가운데 고작 4권밖에는 읽지 못한 독자가, 마치 수십 년에 걸쳐 정교하게 축조된 고딕 양식의 거대한 대성당 안을 둘러볼 때처럼, 그 건축물이 간직한 독특한 구조와 벽면에 새겨진 오래된 벽화들과 여러 조각품들에 얽힌 배경 지식과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짐작하지도 못한 채 고개만 쳐들고 두리번거리며 지나친다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싶다.

 

그런데도 잠깐씩, 이토록 복잡한 건축물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으로 프루스트의 빽빽한 문장들을 헤쳐 나가면서도 어디선가 예전에 한번쯤 마주친 듯한 인상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몇몇 철학자들 때문인데, 내게는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과 같은 인물들이 바로 그런 철학자들처럼 여겨진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베르그송(1859∼1941)은 프루스트(1871∼1922)와는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그는 1892년에 프루스트의 사촌누이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으며 프루스트도 그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우선, 베르그송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처음으로 새로운 철학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인데, 마침 그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이 직접 영역했던 책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담겨 있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가령 내가 [앞으로] 살 도시를 처음으로 산책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나에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나는 매일 같은 집들을 보며, 또 그것들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을 끊임없이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몇 해 동안 느낀 인상을 돌이켜 보면, 그 속에서 일어난 독특하며 설명할 수 없고, 특히 표현할 길 없는 변화에 놀란다.122) 내가 계속 지각했고 나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그려지던 그 대상들이 결국에는 나로부터 나의 의식적 존재의 무엇인가를 빌린 것처럼 보인다. 나처럼 그것들도 살았고, 나처럼 그것들도 늙었다.(166쪽)

122)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가령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커서 가 볼 경우이다. 그 길이, 그 집이 그렇게 좁고 작았던가 하고 놀라게 된다. 이 경우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쉽사리 말로 표현되지만, 그 느낌의 차이는 사실 단지 좁다든지 작다든지 하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무한히 복잡한 감정의 복합체이다. 이것이 가령 20대에(키가 다 자란 다음) 살던 곳을 40대 정도에 가보는 경우라면 훨씬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분명히 느낌의 차이는 있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그 집, 그 동네에 관한 인상이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이처럼 '질적인 시간과 양적인 시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한 베르그송의 철학은 곧바로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닮았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상상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을 예견이나 한 듯이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170쪽)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베르그송이 이 논문을 발표한 해는 1889년이었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으로 출간한 해는 1913년이었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소설 속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거명하고,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들을 은연중에 자주 드러낸 점들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사촌누이와 결혼한 매형이자 당대 프랑스 지성계에서도 가장 우뚝한 인물로 인정받던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 자체가 굳이 '시간에 관한 소설'임을 따로 고려하지 않더라도, 프루스트는 이미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간' 말고도 '지속'이라는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 단어를 끊임없이 자주 불러내고 있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특히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깊이 연구되었다고도 알려져 있으며, 국내 번역본의 작품 해설에서도 그런 영향의 일단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내적 자아, 심층자아와 내적 지속에 대한 그의 이론은, 외적 조형미의 부각에 힘쓰던 문학으로 하여금 자기 내부의 무의식 세계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여 상징주의의 개화와 함께 내면문학의 붐을 촉진시켰고, 그의 직관주의는 방대한 반지성적 경향의 움직임을 태동하게 하였는데, 그 대표가 시인 페리(Charles Peguy)였다. 문학비평에서도 티보데(Thibaudet)를 통하여 그의 형향이 뚜렷이 드러났으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프루스트(Proust)에 대한 영향이라고 하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그의 지속을 가리키고 있고, 끊일 줄 모르고 무한히 계속되는 그의 문장은, 끊임없이 생동하는 내면세계의 지속을 포용하는 문장으로서 베르그송적인 문체를 대변하고 있다.(750쪽) 

 

 

베르그송의 철학이 프루스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그치고, 다시 프루스트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으면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철학자들' 혹은 '작가와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런 작품들이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하는지를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꽃핀 처녀들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 슬프게도 더없이 싱싱한 꽃 속에서도 우리는 지극히 미세한 점을 알아볼 수 있으니, 이 점은 정통한 정신에게 오늘 꽃핀 육체마저도 건조하고 열매를 맺어 씨앗이라는 예정된 불변의 형태가 되리라는 걸 벌써부터 그려 보인다. 아침 바다를 감미롭게 부풀리며, 조수가 밀려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토록 고요한 바다이기에 움직이지 않아, 그린 듯 보이는 잔물결과도 흡사한 코를 우리는 기쁘게 쫓아간다. 인간의 얼굴은 우리가 바라보는 동안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눈으로 지각하기에는 얼굴 변화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들 곁에서는 소녀들의 어머니나 아주머니만 보아도 그들 모습이 관통한 거리를 충분히 측정할 수 있으며, 내면의 인력 작용에 따라 대개는 끔찍한 형태로 바뀌는 그 모습은, 삼십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눈매가 처지고 얼굴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 더 이상 빛을 받지 못한다. 자기 종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줄로 믿고 있던 사람들 안에 감추어진 유대인 애국주의나 그리스도교인의 유전적 특징처럼 그렇게도 깊숙이 피할 수 없는 채로, 난 알베르틴이나 로즈몽드와 앙드레의 장미 꽃송이 아래서 그녀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상황을 위해 보존한 듯한 커다란 코나 튀어나온 입, 통통한 몸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테지만, 실은 무대 뒤에 있어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어떤 상황의 부름을 받아 개인 자체를 앞선 본성에서 갑자기 발생한,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드레퓌스주의나 교권주의, 또는 민족적이고 봉건적인 영웅주의 같은 것들이다. 개인은 이러한 본성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본성이라고 여기는 것을 개인적인 동기와 구별하지도 못한 채 생각하고 살고 진화하고 확고히 하며 또는 죽어간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연계 법칙에 의존하므로, 우리 정신은 어느 은화식물이나 이런저런 벼과 식물마냥 우리 스스로 선택한 줄로만 여기는 여러 특징들을 미리 소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차적 원인을(유대인 혈통이나 프랑스 가문 등) 인식하지 못하고 이차적 관념만을 포착하는데, 실은 이 일차 원인이 이차 원인을 필연적으로 생산해 냈으며, 그것이 때가 오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어떤 관념은 심사숙고의 결과처럼 보이며, 또 다른 관념은 건강상 부주의의 결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콩과식물이 종자로부터 그 형태를 이어받듯이, 실은 우리도 우리 가족으로부터 사는 데 필요한 관념이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이어받는다.

 

마치 모종관 하나에서 꽃들이 저마다 다른 시기에 무르익어 가듯, 나는 발베크 해변의 노부인들에게서 언젠가는 내 친구들도 닮을 그 단단한 씨앗과 무른 덩이줄기를 보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때는 꽃들의 계절이었으니. ……(411­∼41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이 짧은 구절을 읽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잇따라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느낌을 받고는 몹시 놀랐다.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때로는 극히 느린 움직임으로 포착한 미세한 떨림들의 연속처럼 느껴지는데, 이 대목에서는 마치 오늘날의 카메라 기술이 자주 보여주듯이, 긴 시간 동안의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매우 빠르게 재생시킨 듯한 느낌을 준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불과 1초 혹은 2초만에 빠르게 지나가고, 태양과 별들이 뜨고 지는 것도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것처럼 만들어진 영상을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도 자주 목격하고 있을 정도다.

 

꽃핀 풍경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꽃들이 다 스러지고 난 다음의 그늘진 풍경들은 얼마나 또 서늘하고 쓸쓸한가! 시인들은 또 얼마나 자주 꽃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던가! 또한 꽃들이 '사랑'과 자연스레 연결될 때 '꽃이 피고 지는 일'은 얼마나 상징적인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폭풍의 언덕』이었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던 그 황량한 워더링 하이츠와 그 언덕에서도 어김없이 피어났던 히스 꽃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토록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싱그럽게 피어났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미친 듯한 사랑은 또 얼마나 광기어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던가.

 

두 번째로 떠오른 작품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한까지 밀어부친 소설 『율리시스』였다. 제임스 조이스 또한 '꽃'을 '애정'과 결코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들은 그 난해한 책 속에서도 '후우드 언덕'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호우드 언덕에서 주인공인 블룸과 몰리가 '사랑의 절정'에 다다른 장면은 얼마나 농밀하면서도 해독하기 쉬웠던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간신히 다시 찾은 그 부분을 여기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포도주가 그의 입천장에서 맴돌다가 꿀꺽 넘어갔다. 버건디 포도를 기계에 넣고 짜는 것이다. 그건 태양열이지. 마치 비밀의 촉감이 내게 기억을 되살려 주는 듯. 그의 감각에 감촉되어 촉촉하게 기억났다. 호우드 언덕의 야생 고사리 아래 숨겨진 채 우리들 아래 잠자는 만(灣) : 하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하늘, 라이온 곶(串) 옆의 자색의 만(灣). 드럼레크 곁에는 녹색. 서턴 쪽으론 황록색. 바다 밑의 들판, 희미한 갈색의 선(線)들, 매몰된 도시. 그녀는 나의 코트를 베개 삼아 머리를 괴고 있었지. 헤더 숲속의 가위 벌레가 그녀의 목덜미 밑에 있던 나의 손을 간질이고, 이러다가 저를 뒹굴게 하겠어요. 오 얼마나 근사하랴! 연고(軟膏)로 차고 부드러워진 그녀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며, 애무했다: 내게 쏟은 그녀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줄 몰랐지. 황홀한 채 나는 그녀 위에 덮쳐 누워 있었지. 풍만하게 벌린 풍만한 입술,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냠. 따뜻하게 씹혀진 시드케이크(씨 과자)를 그녀는 나의 입에다 살며시 넣어 주었지. 메스꺼운 과육을 그녀의 입은 따뜻한 신 침과 얼버무렸다. 환희: 나는 그걸 먹었지: 환희. 싱싱한 생기. 뾰족하니 내게 내민 그녀의 입술. 부드럽고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고무 젤리 같은 입술. 그녀의 눈은 꽃이었어, 저를 안아 줘요, 욕망에 찬 눈. 자갈이 굴렀다. 그녀는 잠자코 누워 있었지. 산양 한 마리. 아무도 없고. 만병초 꽃 우거진 호우드 언덕에 한 마리 암 산양이 발 디딤을 든든히 하면서 걷고 있었다. 까치밥나무 열매(똥)를 떨어뜨리며. 고사리 숲 아래 가려져 따뜻하게 안긴 채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녀 위에 마구 덮쳐 누워, 그녀에게 키스했다: 눈, 그녀의 입술, 혈관이 뛰는 그녀의 뻗친 목, 얇은 망사의 블라우스 속에 부푼 여인의 앞가슴, 그녀의 위로 솟은 도톰한 젖꼭지에. 뜨거운 혀를 나는 그녀에게 내밀었지.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 나는 키스 받았지. 몸을 온통 맡기며 그녀는 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었지. 키스를 받고,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144쪽)

 

* 몰리에게 한 구애가 절정을 이루는, 호우드 언덕에서의 블룸의 숨가쁜 기억(제18장, 몰리의 최후의 독백 참조). 무성한 만병초꽃과 고사리 숲에는 어느 관광객이 꽂아 놓은 '블룸을 방해하지 말라(No disturbing Bloom)'라는 푯말이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8장 더블린 시 한복판(레스트리고니언즈)> 중에서

 

 

만병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호우드 언덕의 추억은 '역자의 주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율리시스』에서도 가장 유명한 제18장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이번에는 블룸이 아닌 몰리의 회상을 통해서. 그 부분을 최대한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몰리의 독백은 Yes에서 시작해서 Yes로 끝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이다. <생각의 나무> 판본으로는 1,217쪽에서 1,283쪽까지 아주 길게 펼쳐져 있다. 독백에는 쉼표와 마침표가 단 하나도 없다.)

 

그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가능한 한 그이를 흥분시키기 위해 앞가슴이 터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유방이 막 통통하게 살찌기 시작하고 있었지 전 피곤해요 하고 나는 말했지 우리들은 전나무 동굴 위에 누워 있었지 황량한 곳이었어 세상에서 제일 높은 바위임에 틀림없을 거야 회랑이랑 포곽(砲郭) 및 저 무시무시한 바위들 그리고 고드름인지 뭔지는 모르나 늘어져서 사다리를 이루고 있는 성 미가엘 동굴 진흙이 온통 내 구두를 더럽히고 원숭이가 죽으면 저 길을 통해 바다 밑으로 해서 아프리카까지 가는 것임에 틀림없어요 저 멀리 배들은 마치 나뭇조각 같았어 그것은 몰타를 향해 지나가는 보트였지 그렇지 바다와 하늘 누구든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어요 그곳에 누워 영원토록 말이야 그이는 옷 위로 유방을 애무했어 남자들이란 그런 짓을 좋아하지요 거기가 동그랗기 때문이야 나는 그이에게 기대고 있었어 하얀 밀짚모자를 쓰고 너무 새것이 되어서 조금 햇볕을 쬘 양으로 말이야 내 얼굴은 왼쪽에서 보는 것이 제일 예쁘지 나는 블라우스를 그와 헤어지는 날을 위해서 터놓았어 살이 다 들여다뵈는 셔츠를 그이는 입고 있었지 나는 그의 가슴이 분홍빛임을 볼 수 있었어요 그이는 한동안 자기 것을 내 것에다 터치시키려고 했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도록 두지는 않았어 정말 후련해졌어 처음에 그는 몹시 당황했지 두려운 것은 폐병인지도 모르는데다가 혹시 임신될지도 모르잖아 저 늙은 하녀 아이네스가 내게 가르쳐줬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나는 나중에 바나나를 가지고 시험해 보았지 그러나 그것이 부러지지 않을까 그리하여 어딘가 몸속에 토막이 남아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왜냐하면 한떄 의사들이 여자의 몸에서 무엇을 꺼낸 적이 있었으니까 고놈의 것이 수년 동안 석탄염에 덮인 채 그곳에 숨어 있다나 남자들이란 자기들이 나온 곳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어서 죽고 못 살지 그들은 결코 속 깊이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일을 다 치러 버리거든 다음번까지 그렇지 왜냐하면 거기는 참 근사한 너무나 부드러운 기분이 들지 그동안 내내 정말로 보드라운 감촉 어떻게 하여 우리들은 끝나 버렸는지도 몰라 그래 오 그렇고 말고 나는 그이 것을 내 손수건에다 빼게 했지 나는 흥분하지 않은 척 하려 하고 있었지만 내 두 다리를 벌렸지 그가 내 패티코트 속을 터치하지 못하도록 했어 나는 옆이 벌어지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어 그이에게서 억지로 생명을 짜냈던 거야 처음엔 그이를 간질이고 있었지 나는 호텔에 있던 그놈의 개를 흥분시키는 것을 좋아했어 르르스스트 그르르릉 그이는 눈을 감고 그리고 새 한 마리가 우리들의 아래쪽을 날고 있었지 그이는 부끄러워했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 아침의 기분처럼 그이가 좋았어 내가 그런 식으로 그이를 덮쳤을 때 그이는 약간 얼굴을 붉혔지 내가 그이의 단추를 풀고 그것을 꺼내 살갗을 벗겼을 때 그 끝이 일종의 눈(眼) 모양을 하고 있었어 남자들은 안쪽으로 아랫배 밑까지 단추 투성이야 내 사랑 몰리 하고 그는 나를 불렀지 그이의 이름은 무엇이더라 잭 조 아니야 해리 멀비였어. 그래 그이는 해군 중위였다고 생각해 금발인 편이었지 명랑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어 그렇게 나는 저 뭐라고 하는 것을 더듬었지 어떠한 것이든 뭐뭐라고 했어 그이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있었지 되돌아온다고 했어 맙소사 나에게는 바로 어제 일같이 생각돼 그런데 만일 그이와 결혼했더라면 그이는 나에게 그걸 해주었을 거야 그이와 약속했지 그래 진심으로 나는 그이에게 거리낌 없이 시켜 드리겠다고 약속했어 지금 같아서는 붙들어 매지 않고 말이야 아마 그이는 죽었는지 전사했든지 그렇잖으면 해군 대령이나 제독이 되었을 거야 벌써 20년이 가까웠어 만일 내가 전나무 계곡이라고 말하면 그이는 이내 알 거야 만일 그이가 뒤쪽으로 와서 살며시 눈을 가리고 누군지 알아 맞춰 봐요 해도 나는 알아맞출 거야 그이는 아직도 젊어요 40쯤 되었으니까 아마 블랙 워터의 어떤 처녀와 결혼했을 거야 그리고 아주 변해 버렸을 테지 남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하지 그들은 여자들이 지닌 성미의 절반도 갖지 못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내가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과 무슨 짓을 했는지 그이가 그녀에 관한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게다가 환히 밝은 대낮에 온 세상이 다 보는 데서 크로니클 신문에다 그에 관한 기사를 사람들이 실어도 좋다고 말할 테지 후에 나는 약간 거칠어졌지 당시 나는 배너디 형제 상점의 비스킷 넣은 흰 종이 봉지에다 바람을 불어넣어 터뜨렸지 어쩌면 그렇게 꽝하고 터질까 온갖 노란 도요새와 비둘기들이 울고 있었어 우리들이 언덕 복판을 넘어 똑같은 길을 되돌아올 때 낡은 산지기의 집과 유태인 묘지 곁을 지나면서 묘비에 새겨진 헤브라의 문자를 읽는 체했지 나는 그이의 피스톨을 쏴보고 싶었지만 그이는 갖고 있지 않노라고 말했어 그이는 무엇으로 내 기분을 맞출 수 있을지 알지 못했어 언제나 뾰족한 삼각모를 쓰고 있었는데 똑바로 고쳐 줘도 이내 삐뚤게 쓰고 말았지 H M S 칼립소 호(號) 나는 모자를 흔들었어 저 늙은 주교는 꽤 기다란 설교를 재단에서 했었어 여인의 보다 높은 임무에 관해서 최근 자전거를 타거나 뾰족한 삼각모를 쓰고 다니는 소녀들 그리고 새로운 여성 블루머즈에 관해서 말씀이야 하느님 저이에게 지각(知覺)을 그리고 저에게 더 많은 돈을 주옵소서 사람들은 그이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블룸이라니 그게 내 이름이 될 줄이야 나는 결코 생각지 못했어 당시에 그와 같은 이름으로 주문(注文)을 써 보내기도 했어 그런데 내가 그이와 결혼 뒤로 조시는 이따금 말하곤 했지 M 블룸 너는 꽃처럼 아름답게(bloomimg) 보여 라고 ……(626∼627쪽)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18장 침실(페넬로페)>

 

 

우리의 성격이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핋연적으로 - 프루스트가 말한 대로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상태로' -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진화심리학자들이나 뇌신경과학자들의 주장과 놀랍도록 닮아 있어서 특히 놀랍다. 『빈 서판』과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쓴 스티븐 핑커야말로 이런 프루스트의 주장들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온 주역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앙리 베르그송이 1907년에 발표한 『칭조적 진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두뇌의 운동기작은, 거의 모든 기억을 무의식 속에 억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식 속에서 현재 상황을 조명하고 행동이 준비되는 것을 도와 결국에는 유용한 일을 낳을 수 있는 것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잉여의 기억들은 기껏해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몰래 통과할 뿐이다. 그것들은 무의식의 전달자로서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우리 뒤에서 이끌고 가는 것을 알도록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대한 명백한 생각을 갖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모호하게 과거가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성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출생 이후부터 살아온 역사를 응축한 것이고, 심지어 출생 이전의 역사를 응축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생 이전의 성향들도 더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과거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고 의지하고 행위하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 영혼의 만곡(彎曲)을 포함하는 과거 전체와 더불어서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비록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표상으로 된다 하더라도, 전체가 그 추진력에 의해 그리고 경향의 형태로 남김없이 우리에게 나타난다.(24∼26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이 밖에도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는 동안에 다른 여러 책들이 아주 잠깐씩 떠오르다가 이내 다른 책들과 자리바꿈을 하는 걸 느꼈지만, 내게 떠오른 나머지 몇 권의 책들과 그 작품 속에 담겼던 문장들까지 일일이 찾아 인용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크다. 오랫만에 찾아본 '몰리의 독백'을 너무 길게 인용하느라 어느새 조금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담긴 7편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프루스트는 이 작품으로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편이 끝나고 이어지는 <제3편>인 <게르망트 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꽃핀 소녀들의 그늘'을 좀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과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담긴 생각들을 거의 동시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두서없는 글을 끝맺고 싶다.

 

가져온 음식을 다 먹고 나면 우리는 '탑이여, 경계하라', '누가 먼저 웃나' 같은 놀이를 했는데, 지금까지는 따분하고 유치하게만 보이던 그 놀이를 이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소녀들의 얼굴을 아직 붉게 물들이고 , 또 내게선 이미 벗어난 그 젊음의 여명이 그녀들 앞에 놓인 모든 걸 환하게 비추면서, 어느 프리미티프 화가가 물 흐르는 듯한 화폭처럼 그녀들 삶에서 가장 하찮고 세세한 부분까지 금빛 배경 속에서 뚜렷이 드러냈다. 소녀들의 얼굴은 대부분 어렴풋한 붉은 빛 여명에 섞여 확실한 특징들이 아직 솟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몇 해가 지나서야 분명해질 그 구별되지 않는 윤곽 아래로 매혹적인 빛깔만이 보일 뿐이었다. 지금의 윤곽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었으며, 그저 자연이, 가족 가운데 고인이 된 분에게 추모 인사를 드리는 정도의 일시적인 유사성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우리 몸이 어떤 놀라움도 약속하지 않는 부동성 속에 고정되는 순간은 너무도 빨리 오는 법이어서 그때 가면 한여름에도 벌써 죽은 잎이 보이는 나무들처럼 아직은 젊은 얼굴 둘레에 머리칼이 빠지고 희끗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희망을 상실한다. 이 찬란한 아침은 그토록 짧기에 우리는 소중한 밀가루 반죽마냥 아직 만들어지는 중인 살갗을 가진 어린 소녀들만을 특히 사랑한다. 소녀들은 매 순간 그녀들을 지배하는 일시적인 인상들로 응고된 유연한 물질의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소녀들 저마다가 차례차례로 솔직하고 완벽하며 그러나 덧없는 표현으로 주조되어 쾌활함과 진지한 젊음, 응석과 놀람을 담고 있는 작은 조각상인 듯하다. 그러나 가소성(可塑性) 덕분에 우리는 한 소녀가 보여 주는 상냥한 배려에 다양한 모습과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런 상냥함은 성숙한 여인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 여인들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며, 또는 우리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아 뭔가 따분하게도 획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냥함 자체도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얼굴에 유연한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여, 생존경쟁이 영원히 투사의 얼굴 또는 종교적 황홀에 사로잡힌 얼굴로 만들고 굳어지게 한다. 어떤 얼굴은 ㅡ 남편이 아내를 복종하게 하는 그 지속적인 지배력 탓에 ㅡ 여성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병사의 얼굴로 보이며, 어떤 얼굴은 어머니가 자식들 때문에 날마다 견디어 온 희생이 새겨져 사도(使徒)의 얼굴로 보인다. 또 어떤 얼굴은 수년간의 항해와 폭풍우가 늙은 뱃사공을 연상시켜 단지 복장에서만 여성이란 성별이 드러난다. 물론 우리에 대한 한 여인의 관심은 우리가 그 여인을 사랑할 때면 그녀 곁에서 보내는 시간들에 새로운 매력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에게 연달아 다른 여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쾌활하든 쾌활하지 않든 여인의 겉모습은 항상 똑같다. 그러나 청소년기는 완전한 응고가 진행되기 전이라, 소녀들 곁에 있을 때면 그 불안정한 대립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희하는 형태가 주는 광경에 상쾌함을 느끼게 되고, 이 대립은 우리가 바다 앞에서 관조하듯, 자연의 기본 원소들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434∼43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나의 생각)

 

프루스트가 여느 과학자 못지 않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녔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유년기의 최대 매력'에 대해서는 앙리 베르그송이 지적한 다음의 구절들을 함께 살펴볼 만하다.

 

그러나 분열의 진정한 심층적 원인은 생명이 자신 안에 보유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생명은 경향이며 경향의 본질은 다발의 형태로 발달하는 것인데, 생명은 단지 커진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의 약동을 공유한 채로 갈라지는 방향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찰할 때 성격이라는 특수한 경향의 전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기만 해도 어린 시절의 인격이 비록 불가분적이지만 다양한 인물들을 그 안에 결합하고 있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발생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전체가 혼합되어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약속으로 충만한 불확실성이야말로 유년기의 최대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상호침투하는 인격들은 성장하면서 양립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 각자는 하나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있으며 또한 끊임없이 많은 것을 버리고 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거쳐가는 길은 우리 자신이 처음에 그러했던 상태, 또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는 상태들 전체의 잔해들로 덮여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결코 그러한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성장하면서 분기된 다양한 경향들을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따로따로 진화하는 종들의 분기하는 계열들을 그 경향들과 함께 창조한다.(161∼16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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