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은 물론 '됩니다.' 입니다만,

실제로 작업을 해 보니 그 과정이 무척이나 힘이 드네요.

 

물론 대본을 새로 쓸 필요는 전혀 없는데,

텍스트에는 없었던 '알맞은 영상'을 새로 마련하는 게 진짜 일이네요.

 

게다가 거기에 알맞는 배경 음악도 찾아 넣어야 되고요.

실험삼아 작업을 해 보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웬만하면 포기하시는 게 나을 듯하네요.

 

알라딘 서재에 어울리는 글과 유튜브 동영상에 알맞는 영상물은

비록 일맥상통하는 면은 있지만 곧바로' 변환'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두 플랫폼의 성격 자체도 상당히 다른 면이 많고요.

 

저도 유튜브 초보이고, 아직까지 동영상 카메라도 없이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있는데,

알라딘 서재글을 유튜브化 하는 문제로 고민 중인 분들은 참고하세요~

 

알라딘 서재글 ☞ https://blog.aladin.co.kr/oren/10636948

유튜브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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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평범한 독자들도 '전세계'를 상대로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해 '방송'으로 전달하는 시대가 됐다. 유튜브에서 '책'을 이야기하는 북튜버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홀로 생활하며, '9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이나 고쳐 쓴 책'을 가지고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던 시절에 비하면 그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북튜버들이 '출판업계'는 물론 TV, 라디오, 신문에서까지 주목을 받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소식을 나는 최근에서야 겨우 주워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름난 북튜버들의 영상은 거의 보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을 흉내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열흘 동안에는 심심풀이 삼아 '여행 사진들'을 끌어 모아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다. 나에겐 아직까지 유튜버에게 필요한 변변한 '장비' 하나 없으니까. 그러니 우선 유튜브에 '동영상'을 만들어 올릴 수 있는 방법이란, 기껏해야 과거에 찍은 사진들을 100장 혹은 140장씩 끌어 모아 3초당 1컷씩 보여주는 식으로 '어거지 동영상'을 만들 수밖에.

 

책을 이야기하는 동영상을 작정하고 만들자면 각종 장비와 기술이 필요하다. 동영상 카메라, 마이크,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 영상 편집 기술 등등은 기본이다. 물론 핸드폰 카메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무리해서 동영상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래도 혹시 '사진' 으로나마 조잡한 동영상 하나쯤은 만들어 볼 수 없을까 싶어 이리 저리 궁리하다가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찍어 두었던 '책 사진'을 활용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얼른 컴퓨터를 뒤져보니 책 사진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았다.내가 언제 이토록 많은 책 사진들을 찍었을까 싶었다. 그만큼 책을 '이미지화'하는 데 평소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봤다. 책 사진 만으로도 '북튜버' 비스무리한 흉내를 내 볼 수는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 가지 난제는 있었다. 책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마이크'가 없으니 하고 싶은 말들은 모조리 '텍스트'로 전달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북튜버 동영상이랍시고 기껏 만든다는 게 들리는 건 배경음악 뿐이요, 보이는 건 책 사진과 설명글 뿐이라면 너무 이상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만들어도 과연 독자들이 시청자들이 좋게 봐 줄까. 뭐, 상관 없다. 어차피 나에겐 나만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그런데, 100장 가까운 사진들을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 동영상을 만들자니, 각각의 사진들에 대한 설명글을 만드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소위 '대본'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작성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건 글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특히, 제한된 공간에 '압축적으로' 사진을 설명하는 두세 줄짜리 텍스트를 만드는 건 그냥 줄줄 써내려가는 글쓰기와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더군다나 동영상은 한 번 만들어 올리면 '수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니 쉽게 고쳐쓰는 글쓰기보다 얼마나 더 고역인가.

 

아무튼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유튜브에서 소개하고픈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한 번 만들어 밨다. 동영상 속에는 언젠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동영상 제작 때문에 새로 찍은 사진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말이다. 어쨌든 극히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직접 만들어 봤다는 사실이 내겐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책 소개 동영상'을 만들 수 있는 날이 올 테니.

 

(제가 만든 유튜브 영상입니다.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Rzav5oH5Q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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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1-13 0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대단하십니다.
투자된 시간을 생각하면 어마어마 하네요. 11분 26초 동영상 제작 시간 더하기 저 책 읽으시는데 투자하신 시간을 생각하면 보는 사람이 다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알라디너에게는 친숙한 노트, 손글씨라 더 반갑기도 하고, 월든을 제일 먼저 꼽으신 것도 웬지 oren 님이시라면 그러셨을 것 같기도 하고요.
새로 책을 구입하기보다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책 제목처럼 잃어버린 시간를 찾아가는 방법이 될수도 있겠다고, 혼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밑의 자막도 도움이 많이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oren 2019-11-13 12:09   좋아요 0 | URL
hnine 님께서 격하게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동영상 만든 보람도 느끼고요.^^

유튜브 동영상들을 보면 ‘혼자 힘으로‘ 어떻게 그토록 훌륭한 영상들을 만들어 내는지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유튜버들은 사실상 ‘1인 방송국‘이나 마찬가지인데,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기획, 탐사 보도, 뛰어난 영상 편집 실력, 기발한 아이디어 등등이 조합되어, 기존의 방송국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영역으로 발빠르게 침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더군요.

저같은 경우야 완전 쌩초보니 이런 광경들을 멀치감치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하는 구경꾼 같은 기분이지만, 뭔가 대단히 활발한 에너지가 유튜브를 춤추게 만들고 있구나 싶은 느낌은 듭니다. 고요한 절간 같은 알라딘과는 너무나 판이하기도 하고요.

앞으로 유튜브에서도 책 소개를 할려고 마음 먹고는 있는데, 이런 영상 하나를 만드는 데도 엄청나게 품이 드니 뭔가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도 없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글을 쓰는 게 훨씬 쉽겠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나마 텍스트 만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이미지나 영상으로 좀 더 풍부하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다시 한번 재독하면서 영상화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페크pek0501 2019-11-13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영상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책이 너무 잘생겨서 보는 것만으로 좋은데, 음악까지 멋지고.
더 멋진 것은 오렌 님의 자막... 11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세계 책의 날의 유래도 알게 되고, 위대한 작가 둘이 죽은 날이 동일한 날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정보가 풍성합니다.
혹시 유튜브에서 활동하시게 되면 알려 주십시오. 오디오북처럼 애청하겠습니다.
이 많은 정보를 혼자만 소유한다는 건 아까운 일이라 사료되는 바, 한 권의 책으로 묶어도 좋은 것 같습니다.

oren 2019-11-13 14:34   좋아요 1 | URL
페크 님께서는 소위 ‘풀 영상‘을 다 봐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맨 처음엔 책이나 노트 한 컷마다 설명글을 두 줄 혹은 세 줄씩 자세하게 넣어봤더니, 자막을 제때 빠르게 소화하기가 힘든 어려움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원래의 대본‘을 절반 수준으로 전면 개고를 하게 됐답니다. 그런데도 한 컷당 4초 혹은 5초 정도로 노출시켜도 자막을 소화하기 벅찬 문제가 있더군요. 그래서 좀 더 과감하게 ‘한 컷당 7초씩‘ 배분되도록 다시 제작했더랬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자막을 소화하면서도 책 구경까지 하는 데 큰 무리가 없겠다 싶었으니까요.

배경음악도 원래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을 넣었다가,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다시 바꾸는 과정을 거쳤는데, 영상과 배경음악이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왠지 조금은 겉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아무튼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면 좀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주저없이 올렸는데, 페크 님께서 열렬히 시청해 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stella.K 2019-11-13 1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한 걸음이 어딥니까? 남의 아흔 아홉 걸음 보다 나의 한 걸음이 더 가치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북튜버신데 된다면이란 가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설명을 읽으니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는데요? 이것도 페이퍼 쓰는 것만큼이나 쉬워진다면
저도 페이퍼 안 쓰고 그냥 말로 하겠습니다. 저는 기계와는 영 친하지가 않아서
아마도 이번 생은 못하지 싶습니다.ㅠ
영상 정말 근사합니다. 선곡도 탁월하신 것 같고.
언젠가 꼭 정식 북튜버가 되시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oren 2019-11-13 15:34   좋아요 2 | URL
그 한 걸음이 어딥니까? 남의 아흔 아홉 걸음 보다 나의 한 걸음이 더 가치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 저는 스텔라 님의 이 댓글을 보고 『돈키호테』의 산초가 했던 말인 줄 알았습니다. 산초는 정말로 스텔라 님처럼 ‘똑 부러지게 & 핵심을‘ 말하거든요. ㅎㅎ

저는 유튜브에 거의 관심이 없다가, 얼마 전쯤에 등산을 함께 했던 선배들로부터 ‘유튜브‘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더랬습니다. 여행과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하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취미 삼아 & 꾸준히‘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래서 무턱대고 아무런 장비 하나 없이 ‘동영상‘을 벌써 다섯 개나 만들어 올리고 있답니다. 완전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말이지요.

그런데도 ‘인사치레‘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Good! Good! 하는 반응을 보여주셔서 계속 시도해볼 참입니다. 알라디너 분들의 호의적인 반응도 큰 힘이 되구요. 암튼 삐약삐약 우는 햇병아리한테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11-14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이건 반칙입니다 !!!! 우직함이 묻어납니다 ㅎㅎㅎㅎ

oren 2019-11-14 15:35   좋아요 0 | URL
제가 ‘우직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는 합니다. ㅎㅎㅎㅎ

오랫동안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조차 없애 버리고, 몇 년 전부터는 오로지 알라딘에서만 주구장창 글을 쓰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도 우직하든, 미련하든, 둘 중의 하나는 해당되겠지요.

조금조금씩 동영상 편집 기술을 익혀서 마침내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하고 올리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저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튜브 때문에 알라딘마저 헌 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알라딘이야말로 저에게는 ‘디지털 세계의 고향 마을‘ 같은 곳이거든요.^^

페넬로페 2019-11-17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시 봐도 대단합니다.
동영상뿐만 아니라 그동안 읽어오신 책과 독서노트에서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을 느낍니다.
이 동영상을 도서관에서 하는 클래식 독서동아리 톡방에 공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11-17 13:06   좋아요 1 | URL
우와~~ 제가 만든 동영상이 드디어 ‘카톡방‘에서 공유되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님.

사실 저로서는 그저 좋아하는 책들을 꾸준히 읽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어왔을 뿐인데, 변변찮은 제 리뷰와 페이퍼에 대해서 많은 알라디너분들께서 적극적으로 공감해주셔셔, 제가 읽은 책들을 유튜브에도 공개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책‘이라는 사물은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을 읽은 사람이 ‘실제 이상으로‘ 훌륭해 보이는 묘한 속성을 지닌 탓이기도 할 꺼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이 동영상의 후속작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읽기]를 올렸는데, 글로 쓰는 것보다, 동영상 제작이 엄청나게 힘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페넬로페 님도 『오뒷세이아』는 읽으셨을 테니 나중에 『율리시스』에도 한 번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그 책의 제 18장 제목이 ‘페넬로페‘ 거든요.^^

CREBBP 2019-11-18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말로 표현 못하게 훌륭하십니다.

TV로도 뉴스 제외하고는 거의 유튜브만 제가 봤을 때, 유튜버가 하는 고민들은 비슷비슷해보입니다. 소위 해당 장르에서 네임드가 되지 않으면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 라는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음악선택에서부터 편집 등등 컨텐츠 외에도 여러가지가 필요하니까 영상 하나 만드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다음 번엔 오렌님 목소리로 자막을 읽어주시기를 기대해볼께요

저도 블로그를 하면서 늘 느끼는게, 이 내용들을 누가 꼼꼼히 읽을 것도 아니고.. 짧게 요약하고 ~어요 체로 바꾼 다음 유튜브로 내보내면 조금 더 책을 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ㅊ 힘들죠.. 영상이며 음악이며 편집이며 이런걸 생각하다가는 책읽을 시간이 없어질 거 같아요.. 그래도 언젠가 시간이 아주아주 펑펑 남아도는데 정말로 할 일이 없다 싶으면 시도해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리뷰 블로그 쓰는 일의 동기부여로 삼고 있어요.


oren 2019-11-18 12:14   좋아요 0 | URL
너무 격하게 공감해 주셔서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튜브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약육강식‘이고, ‘승자독식‘에 가까운 ‘정글‘ 같은 곳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CREBBP 님 말씀처럼 이미 상당한 지명도와 권위까지 확보한 유명 유튜버의 경우는 밀림에 나타나자 말자, 수많은 힘 없는 사용자들이 머리를 조아리다시피 우루루 몰려가 ‘찬양‘하는 형국처럼 느껴지고, 일반 유튜버들도 ‘수많은 무리들‘을 거느린 파워 유튜버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소소한 영상으로도‘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니까 말이지요. 그들은 컨텐츠 제작에서도 비용을 아끼지 않을 수 있으니,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 경향이 심화될 가능성도 많고요.

사정이 그렇더라도, 유튜브의 매력은 분명 있는 듯합니다. 유튜브 입장에서도 ‘양질의 컨텐츠를 보유한 새로운 사람들‘을 유튜브로 꾸준히 유입시키는 게 매우 중요한 정책 방향일 테고, 그 때문에 소위 ‘스타트 업 유튜버들‘한테 나름대로 ‘성장 기회‘를 주기 위해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모습도 보이는 것 같으니까요. 결국 ‘길게 보면‘ 컨텐츠의 싸움이고, snowball 만들기 전략이 중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CREBBP 님 말씀처럼, 대다수의 일반 유튜버로서는 ‘동영상‘ 하나 제작하는 것도 엄청 힘에 벅찬 게 사실입니다.(저는 아직까지도 동영상 카메라조차 갖추지 않아서, 동영상 촬영은 물론 촬영한 동영상을 직접 편집해본 경험도 전무하지만요.) 저도 CREBBP 님 말씀처럼 알라딘 서재에 올린 글을 ‘그대로‘ 동영상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굳이 경어체로 바꿀 필요도 없이요.(<걸어서 세상 속으로> 스타일처럼요.) 그런데, 막상 텍스트로 만든 걸 ‘동영상‘으로 바꾼다는 게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여러가지 난점들이 있더라구요. 텍스트는 충분하고도 길이가 긴데, 그에 걸맞는 영상을 어떤 식으로 확보하느냐가 가장 큰 난점 같아요. 영상 속에 책이라든가, 텍스트의 이미지화라든가, 관련 이미지의 노출 등으로 메꾸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듯해서요. 내용에 맞는 BGM 선곡도 굉장히 신경쓰이는 문제고요.)
 

 

"호머(Homer), 초서(Chaucer), 그리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달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 마이크 아이스너

 

 * * *

 

때는 바야흐로 유튜브의 시대인가 보다. 여러 해 전부터 네이버 블로그도 접고, 오로지 알라딘 서재만 주구장창 이용했던 나조차도 유튜브를 기웃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영상 매체가 '압도적인 힘'으로 책을 밀어내고, 독서인구를 끊임없이 쪼그라들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대세임을 이제는 솔직히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영상물이 책을 끝없이 밀어내는 흐름 속에서 책과 유튜브는 과연 어떤 식으로 공존할까. 책 속에 담긴 눈에 보이지 않는 깊디깊은 생각들을 다양한 이미지와 목소리와 결합해서? 혹은 텍스트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는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영상으로 꾸며서?

 

물론 책과 영상과의 결합이 영영 이질적인 조합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TV, 책을 말하다」 혹은 「TV 문학관」과 같은 프로그램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으니까. 또한 소설과 영화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니던가. 『오만과 편견』이나 『안나 카레니나』만 하더라도 '영상'부터 떠올리는 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작가들이나 교수들이 책을 주제로 삼아 텍스트가 아니라 직접 말로서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인문학 강좌'들은 얼마나 많은가.

 

요며칠 동안 유튜브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란 사실들이 참으로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는 내가 만약 '북튜버'로 활동하게 된다면 꼭 이야기하고 싶은 '책들'에 대해서도 이미 적잖은 '유튜버'들이 나름대로 뚜렷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책들은 가령,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사마천의 『사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등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래도 내가 꼭 얘기하고 싶은 책들이 빠짐없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든가, 몽테뉴의 『몽테뉴 수상록』, 혹은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나 『황폐한 집』, 혹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같은 특출난(?) 책들까지 '유튜브 동영상'들에 몽땅 점령당하고 만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그런데, 이런 책들을 과연 유튜브 동영상으로 만들 수나 있을까? 설사 그런 영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걸 읽어 줄 유트브 독자들은 또 얼마나 될까?)

 

아무튼, <책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책인 호메로스의 두 걸작시만 하더라도 어느새 '유튜브 동영상'에서 수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당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놀랍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800년 전에 쓰여진 눈 먼 음유시인의 <전쟁 이야기>가 이토록 급변하는 현대 문명에서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야기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함과 동시에, 책 속에 쓰여진 훌륭한 이야기는 결코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웅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메로스의 두 걸작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흔히 최초의 문학으로 간주된다. 이 두 작품은 모든 유럽 문학의 '근원이자 원천'이며, 새로운 사상의 대로로 향하는 '대문'이다. 합쳐서 2만 8천 행에 이르는 두 서사시는 그 전과 후의 수백 년 기간을 통틀어 '이 놀라운 업적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전혀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호메로스의 재능은 그리스에서 아주 초기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테네인들은 마치 오늘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가 성서를 대하듯이, 무슬림이 코란을 대하듯이 그의 작품을 대했다.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에서 『일리아스』의 구절을 인용했다.(190∼191쪽)

그리스에서 호메로스의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대략 기원전 300년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스라엘에서 히브리 성서(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약성서)는 기원전 200년경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230쪽) 


성서보다 먼저 쓰여졌고, 숱한 고대의 비극작가들이 즐겨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 삼았으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토록 자주 읽고 암송했으며,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중세의 몽테뉴의 손에서도 좀처럼 떠나지 않았고, 20세기 최고의 소설가인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줬던 호메로스의 작품들이 유튜브 세상에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 것인지를 관찰하는 것도 몹시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점들에 관해서는 『호메로스와 테레비』라는 몹시도 기이한 제목의 책을 쓴 데이비드 덴비의 견해가 '유튜브 혁명'과 관련하여 특별히 참고할 만하다.(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진 못했지만, 피터 왓슨이 쓴 『생각의 역사』만 살펴 봐도 그의 생각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초 대학 교육 관련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서 레빈은 1929년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제임스 프리먼 클라크라는 사람이 이런 불평을 하는 대목을 제시했다. "우리가 공부에 흥미를 느끼도록 애쓰는 교수는 없었다. 『일리아드』가 무슨 늪지대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 발이 푹푹 빠지면서 호메로스를 그저 읽어내는 게 과제였다. ······ 이 불후의 서사시가 담고 있는 영광과 찬란함과 부드러움과 매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6음부 운율의 리듬에 대해서도 아무 설명이 없었다."(1110쪽)

문화 전쟁에 대해 가장 독특한 반응을 보인 책은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1943∼ )의 걸작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Great Books』이다. 《뉴욕》매거진 영화평론가이자 《뉴요커》객원편집위원인 덴비는 1961년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해 교양과목 두 강좌를 들었는데 제목은 '문학 인문학'과 '현대문명'이었다. 1991년 가을 덴비는 컬럼비아대로 돌아가서 똑같은 강의를 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강의는 얼마나 변했으며, 지금은 어떤 식으로 가르치는지, 1990년대 학번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은 또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를 알아보고픈 호기심에서였다. 그가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것은 1969년부터였다. 물론 여전히 평론 일을 좋아하지만 '스펙터클의 사회'에 이골이 나기도 한 터였다. 변화무쌍하고 간접적인 미디어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미디어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정보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이 되었다. 일단 그럴 듯한 것 같다가도 바로 흩어져버린다. ······ 누구의 정보도 확고하지 않다. 미국인들이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데 원인이 있다. 남들처럼 나도 지쳤지만 그래도 뭔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미디어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의 틀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재미는 넘치지만 뭔가 몹시 불만스러운 상태 말이다. "덴비는 우리를 자신이 좋아하는 위대한 책들(호메로스, 플라톤, 베르길리우스, 성서, 단테, 루소, 셰익스피어, 데이비드 흄, 존 스튜어트 밀, 조셉 콘래드, 드 보부아르, 버지니아 울프) 곁으로 데려가면서 관심 없는 작가들(갈릴레오, 괴테, 다윈, 프로이트, 아렌트, 하버마스)은 무시한다. 그의 저서는 위대한 책들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유명하다. 고전을 영화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하고, 아들 맥스가 오래된 목소리의 가치를 모른 채 겉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는 없는 미디어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그는 소수민족 출신 학생들이 왕왕 필독서 목록이 '백인 유럽인' 일색으로 짜인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당혹감과 서글픔 같은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그의 논지는 이런 것이다. 백인 학생이든 흑인 학생이든 라틴계든 아시아계든 '독서 습관이 제대로 붙은 상태로 대학에 들어온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과거와 명목상의 연계 이상의 것을 가진 학생은 거의 없다. '백인 학생 대다수가, 흑인이나 황인종보다 우수하다고 하는 서구의 지적 전통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호메로스, 단테, 보카치오, 루소, 마르크스의 세계는 이제 아주 낯설고 지금 우리와는 다르다 등등. 이어 덴비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위대한 책 강좌를 많은 학생들은 대단히 불편하게 생각한다. 요즘 분위기에 맞지 않고, 수강생의 게으름이 들통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동적인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사실상 학부 커리큘럼에서 가장 급진적인 강좌다." 덴비는 학생 때 읽었고, 책을 쓰면서 다시 공부한 '위대한 책들'이 사람마다 다른, 독특한 해석이 가능하며, 문화적 우파가 원하는 식의 해석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학생들은 '고전이 우리가 사랑을 할 때, 고통을 받을 때, 그리고 지식을 추구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단계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은 서구의 정전은 서구의 정전을 공격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도] 전통적인 '백인' 문화를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다고 손해 볼 일은 없다."

덴비가 보기에 진짜 위협은 미디어다.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영상과 음향의 홍수에 그저 맥을 놓고 있다. 그런 속에서는 현재를 제외한 모든 순간은 이상하고 핏기 없고 죽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현대 세계는 뭐가 잘못 돼도 단단히 잘못 됐다고 그는 말한다. 1961년 대학에 들어갔을 때 팝의 열정은 뭔가 해방적인 분위기를 주었고, 답답한 교실에 신선한 공기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는 시들해졌고, 팝은 순응과 안락감을 대표하는 분야가 되고 말았다. 전통적인 고급문화가 그 낯섦과 난해함 때문에 오히려 학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충격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다."(1122∼1124쪽)

 

'덴비의 생각'을 들어 보면 우리는 뭔가 부정적인 동시에 약간은 희망적인 몇 가지 결론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첫째, 진짜 위협은 미디어다. 둘째, '위대한 책들'은 사람마다 다른 독특한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셋째,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다.

 

한때 'TV 안보기 시민모임'이 우리나라에서도 발족한 적이 있었다. 이 모임의 선행 모델은 미국의 'TV 끄기 네트워크'였다고 한다. 문명의 총아인 TV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수동화시키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설 수 있는 사고능력을 마비시키는 데 있다. 사람들은 TV를 보면서 그저 자신을 내맡긴다.

 

‘TV 끄기 네트워크’ 베스피 총재는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일들은 의식적인 힘과 노력을 요구하지만 TV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의학·보건단체 10곳은 TV 시청을 “인간이 깨어나서 하는 가장 정지된 행동”이라고도 규정했다. 과학자들은 TV가 뇌에 미묘한 이완감과 편안함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계속 TV를 켜고 싶게 만드는 과정이 약물 중독과 매우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책은 정반대다. 책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든다. 맹목적인 TV 시청은 결국 책에 적대적이며 우리들의 삶과 문화에서 깊이를 앗아간다.

 

그런데도 왜 유튜브는 날로 번창하는가. 사람들은 그저 입으로 던져넣기만 하면 되는 과자처럼 본능적으로 '영상물'을 좋아하기 마련이고, 영상물의 소비가 과거처럼 TV가 자리잡은 '거실'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느새 우리들의 손바닥까지 바싹 옮겨 왔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유튜브 레볼루션』이라는 책을 쓴 현직 '유튜브 최고 비즈니스 책임자'인 로버트 킨슬은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요약했다.

 

콘텐츠의 무료 유통, 안정적인 수익 창출의 기회, 카메라의 진화 이 세 가지 요인이 창의적 인재로 무장한 새로운 공급라인을 생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런 한편으로, 개인용 스크린의 확산은 새로운 수요의 물꼬를 텄다. 모바일은 우리가 영상을 시청하는 방식을 예컨대 책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바꿔놓았다. 폭넓은 선택권과 접근성으로 사람들 사이에는 같은 영상과 프로그램을 즐기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기성세대가 잘 모르는 크리에이터들이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쟁은 진열대나 케이블 상품을 두고 벌어지지 않는다. '시청자의 시간'이 경쟁의 대상이다. 광고주, 방송사, 신문사, 웹사이트, 콘텐츠 창작자, 앱 등이 모두 시청자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다. 관심을 얻어내야 상품이나 서비스, 또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구매를 유도하는 광고를 시청자에게 판매할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시청자의 관심이 곧 '화폐 가치'가 되는 것이다.

관심이 디지털 시대의 화폐라면, 모든 기업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바로 영상 시청이다. 영상 시청은 인간이 여가를 보내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다. 미국인은 하루에 평균 다섯 시간을 무언가를 시청하는 데 쓴다.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을 소비하는 건 딱 두 가지, 일과 잠뿐이다.

 

 - 로버트 킨슬, 『유튜브 레볼루션』 중에서

 

 

일과 잠 말고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활동이 바로 무언가를 시청하는 시간이고, 그 무엇인가를 공급하는 주체는 어느새 독점적인 지위를 누려왔던 수많은 미디어 기업으로부터 개인의 영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에도 무덤덤한 채 계속 책을 붙들고 알라딘 서재에만 기웃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 알라딘 서재가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지금처럼 번창할 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일단 뭐라도 해 보자는 다급한(?) 심정으로 동영상 컨텐츠부터 뚝딱 만들어 봤다. 당장에는 '유튜버'에게 필수적인 각종 장비들이 하나도 없으니 '사진으로 동영상 만들기' 작업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유튜브를 이러저리 둘러 봤더니 생각보다 여러 장비들이 필요한 것 같다. 동영상에 적합한 카메라, 마이크, 조명, 영상 편집 프로그램 등등. 나로서는 뭐하나 딱히 갖춰진 게 없다. 심지어 유튜브 관련 책조차 단 한 권 사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지냈길래 이토록 유튜브에 무관심할 수 있었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 *

 

책을 해설하는 '동영상'을 직접 만드는 일은 단단히 마음먹고 작업에 능숙해 지기 전까지는 적잖은 준비 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노후화된 컴퓨터의 업그레이드부터,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배우는 것까지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일단은 연습 삼아 무작정 '여행 사진 동영상'부터 만들어 봤다. 유튜브를 시작해 보라는 말을 듣고 유튜브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벌써 닷새는 지난 듯하다. 무료 배경음악 하나 다운받는 데도 한두 시간씩 휙휙 사라진다.

 

 

 

 

 

지난 주말에 열일 제쳐두고 동영상을 두 개씩이나 만들어 올리고 나니 문득 '삐악삐악 우는 게 너무 늦었소'라고 말했던 『돈키호테』의 산초가 생각난다. 구독자 수가 고작 26명에 불과한 햇병아리 신세라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고맙게도 산초에게 다음과 같은 대화도 따로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나리.」산초가 말했다. 혀에 종기가 나도 닭은 꼬꼬댁 울어야 하고, 오늘이 너의 날이면 내일은 나의 날이라지 않습니까요. …… 오늘 쓰러진 자 내일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침대에 있기만을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새로운 싸움을 위해 다시 기운을 차릴 생각도 없이 맥 빠져 있지 마시라는 겁니다요.」(806∼809쪽)

 

 - 『돈키호테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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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11-04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겨울 서점 말고는 북튜버는 못보겟더라구용 ㅋㅋ 뭐랄까 북튜브 보는 시간에 책을 읽자! 모드가 된달까 ㅎ

oren 2019-11-04 20:17   좋아요 1 | URL
저도 겨울서점 채널은 언뜻 본 듯합니다.
공장쟝님 말씀대로 ‘알아두더라도 별로 쓸모가 없는‘ 북튜버들도 범람하고 있는 느낌도 들더군요.^^

공쟝쟝 2019-11-04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별별 콘텐츠가 범람하는 유튭 세계에서 양질의 콘텐츠로 정화작용 해주길 바라며 구독 버튼 누르러다녀올게요 ㅋ

oren 2019-11-04 20:20   좋아요 1 | URL
유튜브 세계에서는 ‘구독 버튼‘ 하나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듯하더군요.
제 친구 한 녀석은 유튜브 채널 개설한지 6개월 되었다는데(구독자 274명),
구독자가 한 명만 빠져나가도 밤에 잠이 잘 안 올 정도로 예민할 때도 있다고 하더군요.
암튼 햇병아리인데도 구독까지 눌러주시겠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11-04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클래식마니아 이신가봐요? 동영상에 bgm이 클라식입니다 ㅎ 이거 만드는데도 시간 엄청 잡아먹었을 듯 합니다! 잘 읽고 보고 갑니다^^

oren 2019-11-04 20:52   좋아요 1 | URL
동영상 두 개 만들면서, BGM으로 차이코프스키의 <봄의 소리 왈츠>랑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쓸 생각을 미리 떠올렸더랬습니다.^^

어쨌든, 비엔나에 가서는 빈 무지크페라인 음악공연 티켓도 현장 구매를 하고,
빈 슈타츠 오퍼에서의 음악공연 티켓은 한국에서 미리 사전예약을 하기도 했고,
빈 외곽에 있는 음악가 묘지까지도 일부러 꽃을 사 들고 가서 헌화할 정도쯤 좋아합니다.^^

그런데, 막상 원하는 BGM은 빤히 있는데, 그 음원을 어디서 어떻게 무료로 다운 받는지를 아는 데는 1시간 이상씩이나 걸리더군요. 정작 동영상으로 만드는 데는 각각 한두 시간 남짓 걸렸던 듯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11-04 21:59   좋아요 0 | URL
유튜버도 사진이나 글이나 음악에 대한 저작권을 알아보고 해야겠더라구요 만약 유튜브를 한다면 그런게 엄청 귀찮을 듯 싶습니다 ㅎㅎ

oren 2019-11-04 22:1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인물사진에는 초상권 문제도 걸려 있고요.
유튜브 강좌를 5주 동안 들은 제 선배 얘기에 따르면,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그대로 영상으로 녹화해서 테스트 삼아 올렸는데도,
유튜브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하더라구요. 저작권이 있는 음악이니 ‘해명‘을 하라고요.
상업 목적이 아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이다, 해서 해명은 됐지만,
구글의 인공지능 기능이 새삼 대단한 것 같다고 혀를 내두르더군요.

hnine 2019-11-05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영상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제가 최근에 다녀온 곳이라 체코 편은 특히 더 반가왔고요.
요즘은 검색을 youtube로 할 정도이니 안올라와 있는 테마가 거의 없을 듯 합니다. 그래도 같은 주제에 대해서라도 나는 나만의 내용을 담을테니까 같지는 않다고 봐요.
만드시느라 힘드셨지만 재미도, 보람도 있으실 것 같아요.

oren 2019-11-05 10:02   좋아요 0 | URL
hnine 님 반갑습니다.^^ 님께서도 최근에 체코를 다녀오셨군요. 5년 전에 제가 갔을 때만 하더라도, 거기에 한국 사람들이 그토록 많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람들이 많겠지요?

동영상을 만들고, 유튜브에 올리고 나서 보람이 있었던 게 ‘벌써‘ 두 번이나 있었어요. 한 번은 지난 일요일에 호수공원을 산책하다가 <17일 동안의 유럽 여행>을 함께 했던 분을 만났는데, 그 분한테 영상을 보여드린 일입니다. 무려 17일 동안이나 네 명이서 함께 여행을 하고도, 사진조차 제대로 공유하지 못했었거든요.

두 번째는 지난주에 2박 3일을 함께 등산했던 친구 한 명이 대뜸 ˝동유럽을 가봐야 겠군.˝ 하는 멘트를 날려준 일이에요. 그 친구와는 히말라야도 함께 다녀왔는데, 주구장창 산만 찾아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그 친구는 히말라야만 세 번 갔다왔으니까요.) 정말 보람이 느껴지더군요. 제 영상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는 거니까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동안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몇몇 친숙한 철학자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철학자들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한결 가뿐하게 도와주는 특급 도우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철학자들은 마치 어두컴컴한 지옥을 여행하는 단테에게 끊임없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준 베르길리우스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

 

총 13권이라는 어마어마한 길이로 구성된 대작 가운데 고작 4권밖에는 읽지 못한 독자가, 마치 수십 년에 걸쳐 정교하게 축조된 고딕 양식의 거대한 대성당 안을 둘러볼 때처럼, 그 건축물이 간직한 독특한 구조와 벽면에 새겨진 오래된 벽화들과 여러 조각품들에 얽힌 배경 지식과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짐작하지도 못한 채 고개만 쳐들고 두리번거리며 지나친다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싶다.

 

그런데도 잠깐씩, 이토록 복잡한 건축물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으로 프루스트의 빽빽한 문장들을 헤쳐 나가면서도 어디선가 예전에 한번쯤 마주친 듯한 인상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몇몇 철학자들 때문인데, 내게는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과 같은 인물들이 바로 그런 철학자들처럼 여겨진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베르그송(1859∼1941)은 프루스트(1871∼1922)와는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그는 1892년에 프루스트의 사촌누이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으며 프루스트도 그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우선, 베르그송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처음으로 새로운 철학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인데, 마침 그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이 직접 영역했던 책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담겨 있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가령 내가 [앞으로] 살 도시를 처음으로 산책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나에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나는 매일 같은 집들을 보며, 또 그것들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을 끊임없이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몇 해 동안 느낀 인상을 돌이켜 보면, 그 속에서 일어난 독특하며 설명할 수 없고, 특히 표현할 길 없는 변화에 놀란다.122) 내가 계속 지각했고 나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그려지던 그 대상들이 결국에는 나로부터 나의 의식적 존재의 무엇인가를 빌린 것처럼 보인다. 나처럼 그것들도 살았고, 나처럼 그것들도 늙었다.(166쪽)

122)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가령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커서 가 볼 경우이다. 그 길이, 그 집이 그렇게 좁고 작았던가 하고 놀라게 된다. 이 경우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쉽사리 말로 표현되지만, 그 느낌의 차이는 사실 단지 좁다든지 작다든지 하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무한히 복잡한 감정의 복합체이다. 이것이 가령 20대에(키가 다 자란 다음) 살던 곳을 40대 정도에 가보는 경우라면 훨씬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분명히 느낌의 차이는 있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그 집, 그 동네에 관한 인상이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이처럼 '질적인 시간과 양적인 시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한 베르그송의 철학은 곧바로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닮았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상상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을 예견이나 한 듯이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170쪽)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베르그송이 이 논문을 발표한 해는 1889년이었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으로 출간한 해는 1913년이었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소설 속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거명하고,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들을 은연중에 자주 드러낸 점들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사촌누이와 결혼한 매형이자 당대 프랑스 지성계에서도 가장 우뚝한 인물로 인정받던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 자체가 굳이 '시간에 관한 소설'임을 따로 고려하지 않더라도, 프루스트는 이미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간' 말고도 '지속'이라는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 단어를 끊임없이 자주 불러내고 있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특히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깊이 연구되었다고도 알려져 있으며, 국내 번역본의 작품 해설에서도 그런 영향의 일단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내적 자아, 심층자아와 내적 지속에 대한 그의 이론은, 외적 조형미의 부각에 힘쓰던 문학으로 하여금 자기 내부의 무의식 세계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여 상징주의의 개화와 함께 내면문학의 붐을 촉진시켰고, 그의 직관주의는 방대한 반지성적 경향의 움직임을 태동하게 하였는데, 그 대표가 시인 페리(Charles Peguy)였다. 문학비평에서도 티보데(Thibaudet)를 통하여 그의 형향이 뚜렷이 드러났으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프루스트(Proust)에 대한 영향이라고 하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그의 지속을 가리키고 있고, 끊일 줄 모르고 무한히 계속되는 그의 문장은, 끊임없이 생동하는 내면세계의 지속을 포용하는 문장으로서 베르그송적인 문체를 대변하고 있다.(750쪽) 

 

 

베르그송의 철학이 프루스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그치고, 다시 프루스트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으면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철학자들' 혹은 '작가와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런 작품들이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하는지를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꽃핀 처녀들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 슬프게도 더없이 싱싱한 꽃 속에서도 우리는 지극히 미세한 점을 알아볼 수 있으니, 이 점은 정통한 정신에게 오늘 꽃핀 육체마저도 건조하고 열매를 맺어 씨앗이라는 예정된 불변의 형태가 되리라는 걸 벌써부터 그려 보인다. 아침 바다를 감미롭게 부풀리며, 조수가 밀려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토록 고요한 바다이기에 움직이지 않아, 그린 듯 보이는 잔물결과도 흡사한 코를 우리는 기쁘게 쫓아간다. 인간의 얼굴은 우리가 바라보는 동안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눈으로 지각하기에는 얼굴 변화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들 곁에서는 소녀들의 어머니나 아주머니만 보아도 그들 모습이 관통한 거리를 충분히 측정할 수 있으며, 내면의 인력 작용에 따라 대개는 끔찍한 형태로 바뀌는 그 모습은, 삼십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눈매가 처지고 얼굴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 더 이상 빛을 받지 못한다. 자기 종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줄로 믿고 있던 사람들 안에 감추어진 유대인 애국주의나 그리스도교인의 유전적 특징처럼 그렇게도 깊숙이 피할 수 없는 채로, 난 알베르틴이나 로즈몽드와 앙드레의 장미 꽃송이 아래서 그녀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상황을 위해 보존한 듯한 커다란 코나 튀어나온 입, 통통한 몸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테지만, 실은 무대 뒤에 있어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어떤 상황의 부름을 받아 개인 자체를 앞선 본성에서 갑자기 발생한,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드레퓌스주의나 교권주의, 또는 민족적이고 봉건적인 영웅주의 같은 것들이다. 개인은 이러한 본성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본성이라고 여기는 것을 개인적인 동기와 구별하지도 못한 채 생각하고 살고 진화하고 확고히 하며 또는 죽어간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연계 법칙에 의존하므로, 우리 정신은 어느 은화식물이나 이런저런 벼과 식물마냥 우리 스스로 선택한 줄로만 여기는 여러 특징들을 미리 소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차적 원인을(유대인 혈통이나 프랑스 가문 등) 인식하지 못하고 이차적 관념만을 포착하는데, 실은 이 일차 원인이 이차 원인을 필연적으로 생산해 냈으며, 그것이 때가 오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어떤 관념은 심사숙고의 결과처럼 보이며, 또 다른 관념은 건강상 부주의의 결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콩과식물이 종자로부터 그 형태를 이어받듯이, 실은 우리도 우리 가족으로부터 사는 데 필요한 관념이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이어받는다.

 

마치 모종관 하나에서 꽃들이 저마다 다른 시기에 무르익어 가듯, 나는 발베크 해변의 노부인들에게서 언젠가는 내 친구들도 닮을 그 단단한 씨앗과 무른 덩이줄기를 보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때는 꽃들의 계절이었으니. ……(411­∼41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이 짧은 구절을 읽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잇따라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느낌을 받고는 몹시 놀랐다.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때로는 극히 느린 움직임으로 포착한 미세한 떨림들의 연속처럼 느껴지는데, 이 대목에서는 마치 오늘날의 카메라 기술이 자주 보여주듯이, 긴 시간 동안의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매우 빠르게 재생시킨 듯한 느낌을 준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불과 1초 혹은 2초만에 빠르게 지나가고, 태양과 별들이 뜨고 지는 것도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것처럼 만들어진 영상을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도 자주 목격하고 있을 정도다.

 

꽃핀 풍경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꽃들이 다 스러지고 난 다음의 그늘진 풍경들은 얼마나 또 서늘하고 쓸쓸한가! 시인들은 또 얼마나 자주 꽃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던가! 또한 꽃들이 '사랑'과 자연스레 연결될 때 '꽃이 피고 지는 일'은 얼마나 상징적인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폭풍의 언덕』이었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던 그 황량한 워더링 하이츠와 그 언덕에서도 어김없이 피어났던 히스 꽃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토록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싱그럽게 피어났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미친 듯한 사랑은 또 얼마나 광기어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던가.

 

두 번째로 떠오른 작품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한까지 밀어부친 소설 『율리시스』였다. 제임스 조이스 또한 '꽃'을 '애정'과 결코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들은 그 난해한 책 속에서도 '후우드 언덕'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호우드 언덕에서 주인공인 블룸과 몰리가 '사랑의 절정'에 다다른 장면은 얼마나 농밀하면서도 해독하기 쉬웠던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간신히 다시 찾은 그 부분을 여기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포도주가 그의 입천장에서 맴돌다가 꿀꺽 넘어갔다. 버건디 포도를 기계에 넣고 짜는 것이다. 그건 태양열이지. 마치 비밀의 촉감이 내게 기억을 되살려 주는 듯. 그의 감각에 감촉되어 촉촉하게 기억났다. 호우드 언덕의 야생 고사리 아래 숨겨진 채 우리들 아래 잠자는 만(灣) : 하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하늘, 라이온 곶(串) 옆의 자색의 만(灣). 드럼레크 곁에는 녹색. 서턴 쪽으론 황록색. 바다 밑의 들판, 희미한 갈색의 선(線)들, 매몰된 도시. 그녀는 나의 코트를 베개 삼아 머리를 괴고 있었지. 헤더 숲속의 가위 벌레가 그녀의 목덜미 밑에 있던 나의 손을 간질이고, 이러다가 저를 뒹굴게 하겠어요. 오 얼마나 근사하랴! 연고(軟膏)로 차고 부드러워진 그녀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며, 애무했다: 내게 쏟은 그녀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줄 몰랐지. 황홀한 채 나는 그녀 위에 덮쳐 누워 있었지. 풍만하게 벌린 풍만한 입술,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냠. 따뜻하게 씹혀진 시드케이크(씨 과자)를 그녀는 나의 입에다 살며시 넣어 주었지. 메스꺼운 과육을 그녀의 입은 따뜻한 신 침과 얼버무렸다. 환희: 나는 그걸 먹었지: 환희. 싱싱한 생기. 뾰족하니 내게 내민 그녀의 입술. 부드럽고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고무 젤리 같은 입술. 그녀의 눈은 꽃이었어, 저를 안아 줘요, 욕망에 찬 눈. 자갈이 굴렀다. 그녀는 잠자코 누워 있었지. 산양 한 마리. 아무도 없고. 만병초 꽃 우거진 호우드 언덕에 한 마리 암 산양이 발 디딤을 든든히 하면서 걷고 있었다. 까치밥나무 열매(똥)를 떨어뜨리며. 고사리 숲 아래 가려져 따뜻하게 안긴 채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녀 위에 마구 덮쳐 누워, 그녀에게 키스했다: 눈, 그녀의 입술, 혈관이 뛰는 그녀의 뻗친 목, 얇은 망사의 블라우스 속에 부푼 여인의 앞가슴, 그녀의 위로 솟은 도톰한 젖꼭지에. 뜨거운 혀를 나는 그녀에게 내밀었지.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 나는 키스 받았지. 몸을 온통 맡기며 그녀는 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었지. 키스를 받고,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144쪽)

 

* 몰리에게 한 구애가 절정을 이루는, 호우드 언덕에서의 블룸의 숨가쁜 기억(제18장, 몰리의 최후의 독백 참조). 무성한 만병초꽃과 고사리 숲에는 어느 관광객이 꽂아 놓은 '블룸을 방해하지 말라(No disturbing Bloom)'라는 푯말이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8장 더블린 시 한복판(레스트리고니언즈)> 중에서

 

 

만병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호우드 언덕의 추억은 '역자의 주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율리시스』에서도 가장 유명한 제18장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이번에는 블룸이 아닌 몰리의 회상을 통해서. 그 부분을 최대한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몰리의 독백은 Yes에서 시작해서 Yes로 끝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이다. <생각의 나무> 판본으로는 1,217쪽에서 1,283쪽까지 아주 길게 펼쳐져 있다. 독백에는 쉼표와 마침표가 단 하나도 없다.)

 

그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가능한 한 그이를 흥분시키기 위해 앞가슴이 터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유방이 막 통통하게 살찌기 시작하고 있었지 전 피곤해요 하고 나는 말했지 우리들은 전나무 동굴 위에 누워 있었지 황량한 곳이었어 세상에서 제일 높은 바위임에 틀림없을 거야 회랑이랑 포곽(砲郭) 및 저 무시무시한 바위들 그리고 고드름인지 뭔지는 모르나 늘어져서 사다리를 이루고 있는 성 미가엘 동굴 진흙이 온통 내 구두를 더럽히고 원숭이가 죽으면 저 길을 통해 바다 밑으로 해서 아프리카까지 가는 것임에 틀림없어요 저 멀리 배들은 마치 나뭇조각 같았어 그것은 몰타를 향해 지나가는 보트였지 그렇지 바다와 하늘 누구든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어요 그곳에 누워 영원토록 말이야 그이는 옷 위로 유방을 애무했어 남자들이란 그런 짓을 좋아하지요 거기가 동그랗기 때문이야 나는 그이에게 기대고 있었어 하얀 밀짚모자를 쓰고 너무 새것이 되어서 조금 햇볕을 쬘 양으로 말이야 내 얼굴은 왼쪽에서 보는 것이 제일 예쁘지 나는 블라우스를 그와 헤어지는 날을 위해서 터놓았어 살이 다 들여다뵈는 셔츠를 그이는 입고 있었지 나는 그의 가슴이 분홍빛임을 볼 수 있었어요 그이는 한동안 자기 것을 내 것에다 터치시키려고 했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도록 두지는 않았어 정말 후련해졌어 처음에 그는 몹시 당황했지 두려운 것은 폐병인지도 모르는데다가 혹시 임신될지도 모르잖아 저 늙은 하녀 아이네스가 내게 가르쳐줬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나는 나중에 바나나를 가지고 시험해 보았지 그러나 그것이 부러지지 않을까 그리하여 어딘가 몸속에 토막이 남아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왜냐하면 한떄 의사들이 여자의 몸에서 무엇을 꺼낸 적이 있었으니까 고놈의 것이 수년 동안 석탄염에 덮인 채 그곳에 숨어 있다나 남자들이란 자기들이 나온 곳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어서 죽고 못 살지 그들은 결코 속 깊이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일을 다 치러 버리거든 다음번까지 그렇지 왜냐하면 거기는 참 근사한 너무나 부드러운 기분이 들지 그동안 내내 정말로 보드라운 감촉 어떻게 하여 우리들은 끝나 버렸는지도 몰라 그래 오 그렇고 말고 나는 그이 것을 내 손수건에다 빼게 했지 나는 흥분하지 않은 척 하려 하고 있었지만 내 두 다리를 벌렸지 그가 내 패티코트 속을 터치하지 못하도록 했어 나는 옆이 벌어지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어 그이에게서 억지로 생명을 짜냈던 거야 처음엔 그이를 간질이고 있었지 나는 호텔에 있던 그놈의 개를 흥분시키는 것을 좋아했어 르르스스트 그르르릉 그이는 눈을 감고 그리고 새 한 마리가 우리들의 아래쪽을 날고 있었지 그이는 부끄러워했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 아침의 기분처럼 그이가 좋았어 내가 그런 식으로 그이를 덮쳤을 때 그이는 약간 얼굴을 붉혔지 내가 그이의 단추를 풀고 그것을 꺼내 살갗을 벗겼을 때 그 끝이 일종의 눈(眼) 모양을 하고 있었어 남자들은 안쪽으로 아랫배 밑까지 단추 투성이야 내 사랑 몰리 하고 그는 나를 불렀지 그이의 이름은 무엇이더라 잭 조 아니야 해리 멀비였어. 그래 그이는 해군 중위였다고 생각해 금발인 편이었지 명랑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어 그렇게 나는 저 뭐라고 하는 것을 더듬었지 어떠한 것이든 뭐뭐라고 했어 그이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있었지 되돌아온다고 했어 맙소사 나에게는 바로 어제 일같이 생각돼 그런데 만일 그이와 결혼했더라면 그이는 나에게 그걸 해주었을 거야 그이와 약속했지 그래 진심으로 나는 그이에게 거리낌 없이 시켜 드리겠다고 약속했어 지금 같아서는 붙들어 매지 않고 말이야 아마 그이는 죽었는지 전사했든지 그렇잖으면 해군 대령이나 제독이 되었을 거야 벌써 20년이 가까웠어 만일 내가 전나무 계곡이라고 말하면 그이는 이내 알 거야 만일 그이가 뒤쪽으로 와서 살며시 눈을 가리고 누군지 알아 맞춰 봐요 해도 나는 알아맞출 거야 그이는 아직도 젊어요 40쯤 되었으니까 아마 블랙 워터의 어떤 처녀와 결혼했을 거야 그리고 아주 변해 버렸을 테지 남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하지 그들은 여자들이 지닌 성미의 절반도 갖지 못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내가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과 무슨 짓을 했는지 그이가 그녀에 관한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게다가 환히 밝은 대낮에 온 세상이 다 보는 데서 크로니클 신문에다 그에 관한 기사를 사람들이 실어도 좋다고 말할 테지 후에 나는 약간 거칠어졌지 당시 나는 배너디 형제 상점의 비스킷 넣은 흰 종이 봉지에다 바람을 불어넣어 터뜨렸지 어쩌면 그렇게 꽝하고 터질까 온갖 노란 도요새와 비둘기들이 울고 있었어 우리들이 언덕 복판을 넘어 똑같은 길을 되돌아올 때 낡은 산지기의 집과 유태인 묘지 곁을 지나면서 묘비에 새겨진 헤브라의 문자를 읽는 체했지 나는 그이의 피스톨을 쏴보고 싶었지만 그이는 갖고 있지 않노라고 말했어 그이는 무엇으로 내 기분을 맞출 수 있을지 알지 못했어 언제나 뾰족한 삼각모를 쓰고 있었는데 똑바로 고쳐 줘도 이내 삐뚤게 쓰고 말았지 H M S 칼립소 호(號) 나는 모자를 흔들었어 저 늙은 주교는 꽤 기다란 설교를 재단에서 했었어 여인의 보다 높은 임무에 관해서 최근 자전거를 타거나 뾰족한 삼각모를 쓰고 다니는 소녀들 그리고 새로운 여성 블루머즈에 관해서 말씀이야 하느님 저이에게 지각(知覺)을 그리고 저에게 더 많은 돈을 주옵소서 사람들은 그이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블룸이라니 그게 내 이름이 될 줄이야 나는 결코 생각지 못했어 당시에 그와 같은 이름으로 주문(注文)을 써 보내기도 했어 그런데 내가 그이와 결혼 뒤로 조시는 이따금 말하곤 했지 M 블룸 너는 꽃처럼 아름답게(bloomimg) 보여 라고 ……(626∼627쪽)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18장 침실(페넬로페)>

 

 

우리의 성격이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핋연적으로 - 프루스트가 말한 대로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상태로' -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진화심리학자들이나 뇌신경과학자들의 주장과 놀랍도록 닮아 있어서 특히 놀랍다. 『빈 서판』과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쓴 스티븐 핑커야말로 이런 프루스트의 주장들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온 주역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앙리 베르그송이 1907년에 발표한 『칭조적 진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두뇌의 운동기작은, 거의 모든 기억을 무의식 속에 억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식 속에서 현재 상황을 조명하고 행동이 준비되는 것을 도와 결국에는 유용한 일을 낳을 수 있는 것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잉여의 기억들은 기껏해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몰래 통과할 뿐이다. 그것들은 무의식의 전달자로서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우리 뒤에서 이끌고 가는 것을 알도록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대한 명백한 생각을 갖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모호하게 과거가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성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출생 이후부터 살아온 역사를 응축한 것이고, 심지어 출생 이전의 역사를 응축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생 이전의 성향들도 더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과거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고 의지하고 행위하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 영혼의 만곡(彎曲)을 포함하는 과거 전체와 더불어서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비록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표상으로 된다 하더라도, 전체가 그 추진력에 의해 그리고 경향의 형태로 남김없이 우리에게 나타난다.(24∼26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이 밖에도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는 동안에 다른 여러 책들이 아주 잠깐씩 떠오르다가 이내 다른 책들과 자리바꿈을 하는 걸 느꼈지만, 내게 떠오른 나머지 몇 권의 책들과 그 작품 속에 담겼던 문장들까지 일일이 찾아 인용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크다. 오랫만에 찾아본 '몰리의 독백'을 너무 길게 인용하느라 어느새 조금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담긴 7편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프루스트는 이 작품으로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편이 끝나고 이어지는 <제3편>인 <게르망트 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꽃핀 소녀들의 그늘'을 좀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동시에,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과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담긴 생각들을 거의 동시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두서없는 글을 끝맺고 싶다.

 

가져온 음식을 다 먹고 나면 우리는 '탑이여, 경계하라', '누가 먼저 웃나' 같은 놀이를 했는데, 지금까지는 따분하고 유치하게만 보이던 그 놀이를 이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소녀들의 얼굴을 아직 붉게 물들이고 , 또 내게선 이미 벗어난 그 젊음의 여명이 그녀들 앞에 놓인 모든 걸 환하게 비추면서, 어느 프리미티프 화가가 물 흐르는 듯한 화폭처럼 그녀들 삶에서 가장 하찮고 세세한 부분까지 금빛 배경 속에서 뚜렷이 드러냈다. 소녀들의 얼굴은 대부분 어렴풋한 붉은 빛 여명에 섞여 확실한 특징들이 아직 솟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몇 해가 지나서야 분명해질 그 구별되지 않는 윤곽 아래로 매혹적인 빛깔만이 보일 뿐이었다. 지금의 윤곽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었으며, 그저 자연이, 가족 가운데 고인이 된 분에게 추모 인사를 드리는 정도의 일시적인 유사성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우리 몸이 어떤 놀라움도 약속하지 않는 부동성 속에 고정되는 순간은 너무도 빨리 오는 법이어서 그때 가면 한여름에도 벌써 죽은 잎이 보이는 나무들처럼 아직은 젊은 얼굴 둘레에 머리칼이 빠지고 희끗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희망을 상실한다. 이 찬란한 아침은 그토록 짧기에 우리는 소중한 밀가루 반죽마냥 아직 만들어지는 중인 살갗을 가진 어린 소녀들만을 특히 사랑한다. 소녀들은 매 순간 그녀들을 지배하는 일시적인 인상들로 응고된 유연한 물질의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소녀들 저마다가 차례차례로 솔직하고 완벽하며 그러나 덧없는 표현으로 주조되어 쾌활함과 진지한 젊음, 응석과 놀람을 담고 있는 작은 조각상인 듯하다. 그러나 가소성(可塑性) 덕분에 우리는 한 소녀가 보여 주는 상냥한 배려에 다양한 모습과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런 상냥함은 성숙한 여인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 여인들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며, 또는 우리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아 뭔가 따분하게도 획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냥함 자체도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얼굴에 유연한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여, 생존경쟁이 영원히 투사의 얼굴 또는 종교적 황홀에 사로잡힌 얼굴로 만들고 굳어지게 한다. 어떤 얼굴은 ㅡ 남편이 아내를 복종하게 하는 그 지속적인 지배력 탓에 ㅡ 여성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병사의 얼굴로 보이며, 어떤 얼굴은 어머니가 자식들 때문에 날마다 견디어 온 희생이 새겨져 사도(使徒)의 얼굴로 보인다. 또 어떤 얼굴은 수년간의 항해와 폭풍우가 늙은 뱃사공을 연상시켜 단지 복장에서만 여성이란 성별이 드러난다. 물론 우리에 대한 한 여인의 관심은 우리가 그 여인을 사랑할 때면 그녀 곁에서 보내는 시간들에 새로운 매력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에게 연달아 다른 여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쾌활하든 쾌활하지 않든 여인의 겉모습은 항상 똑같다. 그러나 청소년기는 완전한 응고가 진행되기 전이라, 소녀들 곁에 있을 때면 그 불안정한 대립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희하는 형태가 주는 광경에 상쾌함을 느끼게 되고, 이 대립은 우리가 바다 앞에서 관조하듯, 자연의 기본 원소들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434∼43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나의 생각)

 

프루스트가 여느 과학자 못지 않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녔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유년기의 최대 매력'에 대해서는 앙리 베르그송이 지적한 다음의 구절들을 함께 살펴볼 만하다.

 

그러나 분열의 진정한 심층적 원인은 생명이 자신 안에 보유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생명은 경향이며 경향의 본질은 다발의 형태로 발달하는 것인데, 생명은 단지 커진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의 약동을 공유한 채로 갈라지는 방향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찰할 때 성격이라는 특수한 경향의 전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기만 해도 어린 시절의 인격이 비록 불가분적이지만 다양한 인물들을 그 안에 결합하고 있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발생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전체가 혼합되어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약속으로 충만한 불확실성이야말로 유년기의 최대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상호침투하는 인격들은 성장하면서 양립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 각자는 하나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있으며 또한 끊임없이 많은 것을 버리고 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거쳐가는 길은 우리 자신이 처음에 그러했던 상태, 또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는 상태들 전체의 잔해들로 덮여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결코 그러한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성장하면서 분기된 다양한 경향들을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따로따로 진화하는 종들의 분기하는 계열들을 그 경향들과 함께 창조한다.(161∼16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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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중에서

 

 * * *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 보면 자칫 '길'을 잃기 쉽다. 우리의 의식이 끊임없이 불쑥불쑥 끼어드는 '딴 생각' 때문에 옆길로 새듯이, 꼭 그처럼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이런 불규칙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묘사가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이나 풍경 혹은 장소에 대한 묘사를 할 때도 그렇고,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개할 때도 방식은 마찬가지다.

 

화자의 눈 앞에 놓인 '어떤 장면'을 이야기하다가도 그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이야기가 불쑥 작가의 의식에 떠오르면 그에 대한 생각을 죄다 쏟아붓고 난 다음에 또다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식이다. 그러니 프루스트가 그려내는 '의식의 미로'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확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독자들은 순식간에 길을 잃고 만다. 우리의 의식이 눈 앞의 현실을 좇다가도 순식간에 머나먼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공간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듯이, 프루스트의 의식도 우리와 똑같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 담긴 기억들이 우리와 현저히 다를 뿐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화가의 그림들과 음악가의 작품들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빼곡히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림들을 아주 좋아했고, 음악과 독서 또한 그의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그는 프랑스 사교계를 자주 드나든 덕분에 수많은 귀족 계급과 브루주아 계급의 유명 인사들을 알고 있었다.(소설 속에서 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인물이 게르망트 공작과 공작 부인이었고, 브루주아를 대표하는 인물이 스완과 스완 부인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결국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서전적 소설로도 읽힌다. 작품 속 주인공인 화자는 숱한 그림들과 음악과 문학 작품들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작가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그가 작품 속에 끝없이 펼쳐 놓은 문장들은 화자의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드러내는 작가 노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작가가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치고 덧보태고 가다듬은 문장들이 결국 그 자체로 소설이 되었다고나 할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동안에 독자들이 체험하는 고통은 주로 두 가지에 연유하는 듯하다. 하나는 프루스트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 때때로 너무나 고차방정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가 전달하려는 생각의 구조와 그 구조물 속에 담긴 내용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움켜쥐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은 절대로 프루스트가 고의적으로 의도한 게 아니다. 실상은 독자들이 작가의 의식 속으로 정확하게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프루스트가 일부러 안개처럼 희뿌연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갈 때도 없지는 않지만 그럴 땐 도리어 독자들이 아주 쉽게 작가의 의식을 따라잡을 때가 많다.

 

독자들이 훨씬 더 자주 고통을 느끼는 때는 끝없는 미세회로 같은 '프루스트의 길'을 따라가다가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방황할 때이다. 이런 경험은 꼭 프루스트의 책을 읽을 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경험은 있기 마련이다. 가령,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자주' 길을 잃고 방황한다.(굳이 이런 책들의 예시 목록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놓은 지도는 너무나 선명해서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를 확대해 보더라도 계단처럼 울퉁불퉁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지만,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의식은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진 지도가 매번 흐릿하거나 애매모호하게 그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가가 그려놓은 고화질의 선명한 지도만을 믿고 무턱대로 따라가다가, 불현듯 작가와 차츰 동떨어져 나홀로 걷기 시작한 지점을 발견하며, 작가와의 뜻하지 않은 결별이 과연 어디서부터였는지를 되찾기 시작하고, 어렵사리 그 지점을 다시 찾는 순간 비로소 안도하며,  멈춰세웠던 작가를 다시 앞장세우며 가던 길을 계속 걷게 된다.

 

<총7편/13권>으로 구성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1부 스완 부인의 주변>과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1부에서는 첫사랑 질베르트와의 사랑을 다루고, 2부에서는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과의 사랑을 다룬다. 질베르트와의 첫사랑이 그 사랑을 경험하는 화자와 질베르트의 나이에 딱 어울릴 정도로 철없고 순수하면서도 막연하고 가슴 아픈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알베르틴과의 두 번째 사랑은 첫사랑에서의 실패를 겪은 탓인지 화자가 탐색하고 찾고자 애쓰는 대상(소녀)에 대한 극도로 세심한 관찰과 신중한 접근이 뚜렷한 특징을 이룬다. 화자는 마치 박물학자나 곤충학자와 같은 모습을 띤다.

 

화자가 알베르틴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은 550쪽에 달하는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제4권)에서도 250쪽에 가서야 겨우 등장한다. 나는 <제4권>을 읽는 동안 알베르틴이 과연 언제쯤이나 등장할까 궁금해서 가끔씩 조바심을 낼 정도였는데, 무려 250쪽에 와서야 비로소 그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생루는 동시에르에 돌아가야 했다. …… 나는 어떤 특별한 사랑도 하지 않은 채 텅 빈 상태로 사방에서 ㅡ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자신이 반한 대상을 찾아 나서듯이 ㅡ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찾고 만나는 그런 젊음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 (250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렇게 밑자락을 깔고 나서도 프루스트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프루스트의 생각이 한참이나 옆길로 새다가 겨우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면 비로소 좀 더 구체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나는 그저 혼자서 그랜드 호텔 앞을 서성이며 할머니를 보러 갈 시간만을 기다렸는데, 그때 방파제 거의 끝 쪽에서 특이한 얼룩 하나가 움직이는 듯, 그 모습이나 행동이 발베크에서 늘 보아 오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대여섯 소녀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마치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날아든 한 무리 갈매기 떼가 해변에서 서로 보조를 맞추며 ㅡ 뒤처진 새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른 새들을 쫓아가면서 ㅡ 산책하는 것 같았는데, 그 산책 목적도 새의 정령인 소녀들에게는 분명했겠지만, 그녀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듯 보이는 해수욕객들에게는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이 낯선 소녀들 가운데 한 소녀는 손으로 자전거를 앞으로 밀고, 또 다른 두 명은 골프 '클럽'을 들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은 발베크의 다른 소녀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는데, 물론 발베크 소녀들 가운데서도 스포츠에 빠진 이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특별한 옷차림을 하지는 않았다.(251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 소녀들이 비로소 화자의 눈앞에 좀 더 뚜렷하게 다가오기 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까. 여기서 얼마란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 프루스트의 문장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내 소녀들이 나와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소녀들은 제각기 완전히 다른 유형이었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조금 전부터야 바라보았을 뿐인 데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으므로, 그때까지 나는 소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개별화하지 못했다.(25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여기서 프루스트는 다시 무리지어 움직이는 소녀들의 모습을 무려 다섯 쪽이나 더 할애하여 충분히 길게 설명한 다음 비로소 화자인 내가 '그 소녀'와 '눈길'을 마주치는 장면을 묘사한다.

 

자전거를 밀던 그 뺨이 통통한 갈색 피부 소녀 옆을 지나다가 나는 한순간 그녀의 웃음기 머금은 곁눈질과 마주쳤는데, 그것은 이 작은 부족의 삶을 가둔 비인간적인 세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념 따위는 들어갈 자리가 없는 접근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에서 온 시선이었다.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채로 이마까지 낮게 폴로 모자를 눌러쓴 그 소녀는, 자기 눈에서 발산된 검은 광선이 나와 마주쳤던 스 순간에 과연 나를 보기나 했을까? 만일 보았다면, 난 그녀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까? 그녀는 어떤 우주의 내부로부터 나를 구별했을까? 내게는 이를 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는데, 마치 망원경 덕분에 이웃하는 별자리의 몇몇 특징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 별자리에 인간이 살며 그 인간들이 우리를 보고, 이런 전망이 그들 마음속에 어떤 관념을 일으킨다고 결론짓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만일 우리가 이런저런 소녀의 눈빛이 동그랗게 반짝이는 운모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그녀 삶에 대해 알려 하거나 그 삶을 우리와 연관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짝이는 원반형 물체에서 발산되는 빛이, 단지 원반의 물질적 구성에만 달린 게 아니라, 우리는 모르지만 빛을 발하는 그 존재는 아는 사람들이나 장소들에 관해 ㅡ 내게는 페르시아 낙원의 요정들보다 더 매혹적인 그 작은 요정이 페달을 밟으며 들과 숲을 지나 나를 끌고 갔을 지도 모르는 경마장 잔디밭이나 오솔길 모래밭과 같은 ㅡ 간직하고 있는 관념의 검은 그림자들이며, 또한 그녀가 곧 돌아가려는 집의 그림자이며, 그녀가 구상하거나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이미 구상해 놓은 계획들의 그림자이며, 특히 그녀의 욕망이나 호감과 혐오감 그리고 막연하지만 부단한 의지임을 느낀다. 자전거 타는 소녀의 두 눈에 담긴 것을 소유하지 않고는 그녀 역시 소유할 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따라서 그녀 삶 전체가 내게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고 느껴졌기에 고통스러운 욕망이었으며, 그러나 이제껏 내 삶이었던 것이 돌연 내 삶이기를 그치고 내가 채워주기를 열망하는, 내 앞에 펼쳐진 작은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졌기에 황홀한 욕망이었다. 또 소녀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욕망은 자아의 연장이자 자아의 증식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행복이란 걸 내게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사이에 어떤 공통된 습관도 ㅡ 어떤 공통된 관념도 ㅡ 없다는 점이 내가 그녀들과 사귀고 그녀들 마음에 들게 하는 걸 더욱 어렵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쩌면 또한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과 내가 알고 있거나 소유하는 요소들 중 단 하나도 소녀들의 성격이나 행동을 구성하는 데 들어 있지 않다는 인식 덕분에 내 마음속에는 포만감에 이어 삶에 대한 심한 갈증이 일었는데, ㅡ 마치 메마른 땅이 애타게 물을 기다리듯 ㅡ 이제껏 내 영혼은 이 목마름을 채워 줄 한 방울의 물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더욱더 탐욕스럽게 천천히 음미하면서 완전히 그 물을 빨아들이게 될 것이었다.(259∼260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렇게 짧은 눈길을 서로 마주친 알베르틴과 화자는 여기서 또 '얼마나' 더 지나고 나서야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될까.(여기서 '얼마나'라고 표현한 건 매번 문장의 길이를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하라.) 조금 뒤에서 결국 확인하게 되겠지만, 화자와 알베르틴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여기서부터 무려 120쪽이나(!)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다른 특별한 얘기가 많이 끼어들어서 그렇다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화자는 끊임없이 '그 소녀들'의 무리를 생각하고, 또 가끔은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기도 한다. 다음 장면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엘스티르를 별장 쪽으로 끌고 갔을 때, 난 갑자기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길 끝에서 ㅡ 나처럼 연약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수성과 지성이 과도한 자에게는 없는, 나의 기질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거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생명력이 단지 비현실적이고 악마적인 표현으로 객관화되었다는 듯이 ㅡ 다른 어떤 것과도 혼동할 수 없는 정수(精髓)의 몇 방울 얼룩이, 자포동물 소녀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별들이 몇 개 나타났다. 그녀들은 나를 보지 못한 기색이었지만, 아마도 나에 대해 냉소적인 판단을 할 게 틀림없었다. 그녀들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 불가피하다고 느끼면서, 또 엘스티르가 나를 부르리라고 예상하면서, 난 마치 파도를 받아 넘기려는 해수욕객처럼 등을 돌렸다. 나는 갑자기 길을 멈추고는, 나의 저명한 동반자가 계속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고 뒤에 쳐져서는, 그 순간 우리가 지나가던 골동품 가게 진열창에 갑자기 흥미를 느끼기라도 한 듯 몸을 기울였다. 소녀들에게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척해 보이는 게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엘스티르가 날 소개하기 위해 부를 때, 놀란 것이 아니라 짐짓 놀라는 척해 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일종의 묻는 듯한 눈길로, ㅡ 이 경우 우리는 각자 서툰 배우이며 또는 상대방이 훌륭한 관상학자이기에 ㅡ 또 손가락으로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당신이 부른 사람이 바로 난가요?" 라고 물으면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소개되느라 옛 도자기 감상을 방해받았다는 듯 짜증이 묻어나는 걸 냉정하게 감추고는, 복종과 온순함으로 머리를 굽히고 재빨리 달려가리라는 걸 나는 이미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진열창을 주시하면서 엘스티르가 소리 높여 부르는 내 이름이 마치 우리가 기다리는, 별로 위험하지 않은 공처럼 날 때릴 순간을 기다렸다. 소녀들을 소개받는다는 확실성이 그 결과로서 소녀들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녀들을 알게 되는 기쁨을 피할 수 없게 된 지금 그 기쁨은 압축되고 축소되어, 생루와 이야기하거나 할머니와 저녁 식사를 하거나, 근교에서 즐기는 소풍의 기쁨보다 더 하찮게 생각되었고, 틀림없이 역사 기념물 같은 것엔 관심도 없을 그녀들과의 친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풍도 소홀히 해서 후회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내가 맛보게 될 기쁨을 작아지게 한 것은 실현이 임박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비일관성이었다. 정수역학(靜水力學)의 법칙과도 같은 정확한 법칙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우리가 형성하는 이미지를 쌓아 올리다가 사건이 임박해지면 그 순서를 전복시킨다고 한다. 엘스티르가 나를 부르려고 했다. 소녀들을 알게 되는 장면을 해변이나 내 방에서 몇 번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이런 방식은 전혀 아니었다. 지금 일어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전혀 대비하지 못한 다른 사건이었다. 나는 내 욕망도 목적도 알아보지 못했다. 엘스티르와 외출한 게 거의 후회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전에 내가 느낄 거라고 믿었던 기쁨이 줄어든 것은 이제는 그 무엇도 내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는 확실성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기쁨이 이런 확실성의 압박에서 벗어나 탄력적인 힘 덕분에 본래 높이를 되찾은 것은,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결심한 순간,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소녀들과 함께 멈춰 서 있는 엘스티르가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엘스티르 옆에 가장 가까이 있던 소녀의 얼굴은 통통하고 눈빛이 반짝거려, 조금이라도 하늘이 보이게 틈을 남겨 둔 케이크같았다. 그녀의 눈은 고정되어 있어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어 마치 강풍이 부는 날, 대기가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무척 빠르게 창공을 지나가는 모습을 인지할 때와도 같았다. 한순간 그녀의 눈길이 내 눈길과 마주쳤는데, 흡사 폭풍우가 치는 날, 조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에 다가가 구름을 만지고 앞지르는 하늘의 나그네들인 듯했다. 하지만 나그네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멀리 날아가는 법. 이처럼 우리 눈길도 한순간 마주쳤지만, 작자 자기 앞에 있는 천상의 대륙이 미래에 대해 어떤 약속과 위협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길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확히 내 눈길에 들어온 순간, 구름이 가볍게 그녀의 눈길을 가렸다. 이처럼 맑은 밤, 바람이 실어 온 달은 구름 밑을 지나 잠시 그 빛을 가리다가 빠르게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엘스티르는 나를 부르지도 않은 채, 이미 소녀들 옆을 떠났다. 소녀들은 지름길로 들어섰고, 그는 내게로 왔다. 모든 게 어긋났다.(354∼35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나의 생각)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하늘이 보이게 틈을 남겨 둔 케이크 같았다'는 표현이나 '구름을 만지고 앞지르는 하늘의 나그네들'은 얼마나 시적인가! '공처럼 날 때릴 순간을 기다렸다'는 표현은 얼마나 멋지고 재치있는가! '그녀의 눈길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확히 내 눈길에 들어온 순간, 구름이 가볍게 그녀의 눈길을 가렸다.'라는 표현은 마치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싯구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녀들을 소개받을 절호의 기회를 바로 코 앞에서 놓쳐버린 화자는 여기서부터 5쪽 뒤에서 이렇게 불평한다. "그 소녀들을 소개받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런 화자의 말에 엘스티르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그럼,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나?" 결국 '결정적 순간'을 앞에 두고 짐짓 딴청을 부린 화자나, 그런 화자의 꿍꿍이를 훤히 꿰고 있었던 엘스티르나 헛탕을 치는 데 서로 일조한 건 매한가지였던 셈이다.

 

아무튼, 유명한 화가이자 '그 소녀들'을 잘 아는 엘스티르는 화자의 간청을 받고 '작은 낮 모임'을 주선해 준다. 엘스티르의 집에서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만났을까? 여기서도 독자들은 '한없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어떤 정경들'을 참을성 있게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프루스트는 어쨌든 최대한으로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드는 데 특별한 재주를 지닌 인물임을 우리가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엘스티르가 조금 멀리 앉아 있는 알베르틴에게 날 소개하려고 오라고 했을 때, 나는 커피 에클레르를 먹고 난 후였고, 방금 소개받은 노신사가 단춧구멍에 꽂은 장미꽃을 칭찬해주었으므로 그분에게 꽃을 드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또 노신사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노르망디의 몇몇 장날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음에 소개받은 사람이 내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거나, 내 눈에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이 기쁨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호텔에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이런 점에서 기쁨은 사진과 흡사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찍은 사진은 음화(陰畵)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출입이 '금지되었던' 그 내면의 암실을 나중에 우리가 집에 돌아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라야 현상할 수 있다.

 

이처럼 기쁨의 인식이 내게서 몇 시간 지체되었다면, 이 소개의 중요성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소개받는 순간, 우리는 몇 주 전부터 탐색해 온 미래의 기쁨에 대해 유효한 '통행증'을 갑자기 얻었다고 느끼지만 실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런 통행증의 취득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탐색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동시에 ㅡ 우리를기쁨으로 채워줄 수 있는 ㅡ 우리 상상력으로 변형된 존재, 결코 알 수 없다는 불안한 두려움으로 확대된 그런 존재의 실존에도 종지부를 찍는다. 소개하는 사람 입에서 우리 이름이 울리는 순간, 특히 엘스티르가 지금 하듯이 칭찬으로 그 이름을 에워쌀 때는 ㅡ 마치 요정 이야기에서 요정이 누군가에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라고 명령할 떄와 흡사한 이런 성사 의식의 순간에는 ㅡ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기를 열망하던 존재는 사라져 버린다. 우선 어떻게 그녀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ㅡ 미지의 여인이 우리 이름을 듣고 우리라는 인간을 보면서 나타내야 하는 관심으로 ㅡ 우리가 찾고 있는 의식적인 시선이나 알 수 없는 상념이 어제만 해도 무한한 곳에 위치했던 눈길 속에서(방황하는 다양한 우리 시선이 초점을 잘못 맞추어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눈길에서) 기적적으로 단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어 마치 환하게 웃는 거울에서처럼 그 눈길 속에 그려졌는데? …… (379∼381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화자의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은 <제2편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에서도 무려 250쪽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지만, 이처럼 한없이 더디게만 다가설 수 있다. 어쨌든 그녀의 존재는 <제5편 갇힌 여인>과 <제6편 사라진 알베르틴>에서 끊임없이 환기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이런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은 콩브레의 산사나무 아래서 질베르트에게 첫눈에 반했던 사랑과는 달리 산호초와도 같은 미분화된 그룹에서 개별화로 넘어가는 긴 결정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스탕달에 따르면 평범한 한 존재가 상상적인 것의 조명을 받으며 예외적인 특별한 존재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어떤 우연이, 즉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나 결핍이 필요하다. 이처럼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도 두 번의 실패를 통해 공고해진다.(542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이 어떤 실패와 고통을 겪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문장들의 밀림을 헤쳐나가야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1,000쪽 내지는 2,000쪽 정도쯤? 그러니 그런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차츰 살펴보기로 하고, 역자의 친절한 작품 해설을 통해 훨씬 더 빠른 지름길로 빠져나가 보자.

 

프루스트에게는 이런 연인의 거부가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으로 대체되면서 사랑의 조건이 성립되고, 그리하여 사랑의 대상은 더 이상 쾌락의 대상이 아닌 탐색과 고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욕망과 동일시하거나, 대상도 목적도 없는 탐색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대신하며, 사랑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 질투에 의해 현존한다.

 

이처럼 프루스트적인 사랑이 '대상 없는 탐색' 또는 주제의 내면에서 야기되는 거대한 '질투'의 울림으로 정의된다면, 그것은 레비나스의 말처럼 프루스트의 사랑이 결코 합일을 이룰 수 없는 타자의 이타성을 체험하는 질투와 고통의 담론임을 말해 준다. 타자의 세계는 나 없이 생겨난 것이며 그러나 이 배제됨이 내 사랑을 존속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부터 계속 빠져나갈 때에만, 그리하여 그의 부재나 결핍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 한에서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완전한 소유는 사랑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사랑과 고통을 통해서만 무지에서 성숙으로, 오인에서 진실로 나아갈 수 있으며 『갇힌 여인』과 『사라진 알베르틴』의 그 긴 고통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화자는 드디어 글쓰기를 통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만 존재의 해체와 소멸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충실과 망각을 보충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쾌락의 직접적인 추구가 아닌 상상의 매개에 의해 타자와의 합일이라는 그 불가능한 꿈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543∼544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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