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는 아주 방대한 역사책이다. 서양 언어로는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번역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해 전부터 훌륭한 번역본이 완역되어 나와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현재 민음사에서 나온 개정판을 보면 전6권에 무려 5,400쪽을 자랑하는데, 이는 저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민음사 판본으로 전6권에 4,150쪽이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동서문화사 판본으로 전3권에 2,019쪽인 사정과 비교해 보더라도 단연 압도적이다.

 

이 방대한 역사책은 총 13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기 본기』가 12장, 『사기 표』가 10장, 『사기 서』가 8장, 『사기 세가』가 30장, 가장 유명한 『사기 열전』이 70장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 게 특색이다. 이 가운데 본기는 주로 황제들의 전기를 다루고, 세가는 제후들의 전기를 다루고, 열전은 이름난 정치가나 장군들 혹은 선비들이나 책략가들을 다룬다. 표는 각 시대의 연표를 기록하고, 서는 제도와 문화(의례, 음악, 책력)를 다룬다. 인물 전기로만 따진다면 모두 112장인 셈인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단지 50명의 영웅들을 다루는 데 비해『사기』가 얼마만큼 더 풍부하고도 방대한 인물들을 다룬 저술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12장의 전기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무래도 중국 최고의 스타(?) 황제였던 '진시황'에 얽힌 이야기들을 담은 부분들이다. 『사기 본기』에 실린 <진시황 본기>와 『사기 열전』에 실린 <이사 열전>, <몽염 열전>, <백기·왕전 열전>이 진시황 시대의 역사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진시황에 얽힌 이야기가 『사기』 중에서도 유독 흥미로운 까닭은 간단하다. 진시황이 그토록 강력한 카리스마로 중국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경우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만 과정 속에서 <분서갱유>와 <지록위마>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야말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숱한 영웅들 중에서도 가장 우뚝한 인물들인 카이사르, 브루투스, 안토니우스에 얽힌 이야기인 <브루투스, 너 마저!>에 필적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서갱유>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진시황이 대제국을 통일한 이후 선비들의 '정부 비판'을 강제로 틀어막기 위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훌륭한 책들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부에 비판적인 학자들을 한꺼번에 생매장한 '언론 탄압'의 상징적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일부나마 인용하면 이렇다.

 

"내가 전에 천하의 책에서 쓸모없는 것을 거두어 모두 없애 버렸다. 문학과 방술을 하는 선비를 무더기로 부른 것은 태평성대를 일으키고자 함이요, 방사(신선의 술법을 닦는 도사)를 부른 것은 배워 익혀 기이한 약을 구하게 하려 함이다. 지금 들으니 방사 한중이 떠나서는 보고하지 않고, 서불 등은 온갖 방도를 썼는데도 끝내 불사약을 얻지 못하고 한갓 간사한 이익만 챙긴다는 보고가 날마다 들려온다.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많은 것을 내렸으나 이제는 나를 비방함으로써 나의 부덕함을 더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유생들에 대해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해서 물어보도록 하니 어떤 자는 요사스러운 말로써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에 어사를 보내 유생들을 심문했다. 유생들이 서로를 고발하니 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460여 명이었다. 그들 모두를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에 경고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변경으로 유배시켰다.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가 간언하여 말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으나 먼 곳의 백성들은 아직 따르지 않고 있으며, 유생들은 모두 암송하여 공자를 본받고 있는데, 지금 황상께서 법을 엄격하게 하여 그들을 옭아매니, 신은 천하가 안정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황상께서 이 점을 살펴 주십시오."

 

그러자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상군에 파견하여 몽염을 감시하게 했다.(242∼243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이 짧은 이야기 하나만 하더라도 진나라가 일찍 붕괴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방금 살펴봤듯이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는 올곧은 인물이었는데도 황제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 만으로 미움을 받아 변방으로 쫒겨나고 만다. 이런 부자간의 갈등이 결국 진나라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멸망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시황이 순행을 나섰다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을 때 크나큰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소에게 후일을 맡긴다'는 진시황의 친필 유서가 환관 조고의 농간으로 조작되고, 무능한 막내아들 호해가 '2세 황제'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 보자.

 

평원진에 도착했는데 병이 났다. …… 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옥새를 찍은 조서를 써서 공자 부소에게 보내 일렀다.

 

장례에 참석하고 함양에 안장하라.

 

그러고는 편지를 밀봉하여 중거부령 조고의 관부에 놓아 둔 채 사자에게 주지 않앗다.

 

7월 병인일에 시황제가 사구의 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죽었기 때문에 여러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다. 관을 온량거溫凉車 속에 안치하고 예전에 총애를 받던 환관이 참승이 되어 도착하는 곳마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렸으며, 모든 신하가 전과 다름없이 나랏일을 아뢰었다. 환관이 온량거 안에 있다가 보고된 일을 결재했다. 공자 호해와 조고 및 총애를 받던 환관 대여섯 명만이 황제가 죽은 것을 알았다. …… 조고는 곧 공자 호해, 승상 이사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진시황이 공자 부소에게 내린 밀봉 서찰을 뜯어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유조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바꾼 후, 공자 호해를 태자를 삼았다. 그러고는 다시 서찰을 만들어 공자 부소와 몽염에게 주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자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일은 전부 「이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다.(247∼248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열두 살에 황제에 오른 호해는 환관 조고를 낭중령으로 삼아 나랏일을 좌지우지하게 했다. 조고는 온갖 감언이설로 이세 황제에 아첨하면서 진시황 시절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숱한 대신들과 관리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체포, 감금하고 도륙했다. 이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세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진나라를 통째로 주무르기 시작한 조고는 진나라 통일의 일등공신인 이사마저 제거한 끝에 기어코 황제 자리를 넘보기에 이른다. 이때 등장하는 이야기가 저 유명한 <지록위마>이다. 조고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는 동서고금에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 부분은 『사기 열전』의 <이사 열전>에도 상세히 나와 있지만, 『사기 본기』의 <진시황 본기>에서도 거듭 다뤄진다.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모반을 일으키기로 하고는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되어 먼저 시험해 보려고 사슴을 끌고 와서 이세황제에게 바치며 말했다.

 

"말입니다."

 

이세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틀리지 않았소? 사슴을 말이라 하니 말이오."

 

그러고는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말이라고 대답해 조고를 따르며 아부했다. 어떤 이들은 사슴이라고 말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몰래 법을 빌려 중상모략하였다. 이후로 신하들은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258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이세 황제는 제위에 오른지 불과 3년 만에 온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그 책임을 몽땅 조고에게 돌리려 한다. 낌새를 알아챈 조고는 미리 일을 꾸며 이세 황제를 제거하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고는 이세황제 형의 아들인 자영子嬰을 후임으로 내세운다. 진나라의 3대이자 마지막 황제에 오른 자영은 이내 '망국의 주범'인 간신 조고를 붙잡아 죽이고 삼족을 처형하는 결단을 내리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진나라 말기의 어지러운 틈을 타 거병한 유방에 의해 진나라의 수도가 함락되고 자영은 끝내 항우에게 살해된다. 황제 자리에 오른지 불과 세 달도 지나지 않을 때였다.

 

진나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상은 토붕와해(土崩瓦解)라는 유명한 말을 탄생시켰다.(자세한 내용은 『사기 열전』의 <평진후·주보 열전>에 실려 있다.) 사마천은 <진시황 본기>를 마무리하면서 특별히 가생이라는 탁월한 문장가의 기나긴 글을 전부 인용해 놓았다. 나라가 어떻게 해서 어지러워지고 망국에 이르는가를 '울림 가득한 문장'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태사공(사마천)은 말한다.

 

"…… 주나라가 쇠퇴할 무렵 진나라가 일어나 서쪽 변경 지역에 도읍을 정했다. 목공 이래로 차츰 제후들을 잠식하여 마침내 시황始皇이 되었다. 시황제는 스스로 공적이 오제를 뛰어넘고 영토도 삼왕보다 넓다고 여겨서 그들과 나란해지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훌륭하다, 가생賈生이 추앙한 말이여! 그는 말한다.

 

 

진나라는 산동 제후들의 30여 군郡을 손아귀에 넣었고 나루터와 관문을 수리하고 험준한 요새에 의거해 무장한 병사를 정비하여 그곳을 수비했다. 그러나 진섭이 수졸守卒 중 어지럽게 흩어졌던 무리 수백 명을 데리고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를 쳤다. 활과 창 등 무기를 쓰지 않고 호미와 서까래와 몽둥이를 가지고 민가를 보는 대로 집어삼키며 천하를 거리낌없이 마구 돌아다녔다. ……

 

이제 진나라 이세가 자리에 오르자 천하에서 목을 빼고 그 정치를 바라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추운 자에게는 해진 짧은 옷이라도 이롭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술지게미라도 달콤하다. 따라서 천하 백성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새로운 군주에게는 오히려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고달픈 백성들에게는 인仁을 행하기가 쉽다는 말이다. 만약 이세가 평범한 임금의 품행을 품고 충신과 현인을 임용하고 나서 신하와 임금이 한마음이 되어 세상의 우환을 걱정하고, 소복을 입고서 선제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봉토를 가르고 백성들을 나누어 공신의 후예들에게 봉해 주고, 제후국을 세우고 군주를 옹립하여 천하를 예로써 다스리고, 감옥을 비우며 사형을 면제해 주고 죄인의 처와 딸을 노비로 삼는 추잡한 죄를 없애 그들을 각기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창고와 곳간을 열어서 재물과 화폐를 나누어 외롭고 곤궁한 선비들을 구제해 주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일을 줄여 백성들의 급한 일을 도와주고, 법령을 간략히 하고 형벌을 줄여 그들의 후손을 유지하게 하며, 천하의 백성들에게 모두 스스로 새롭도록 하여 태도를 고치고 행동을 닦으며 각자 몸을 삼가게 하여 모든 사람의 바람을 만족시키고 위엄 있는 인덕으로 천하와 함께했다면 천하가 모여들었을 것이다. 설령 천하 안이 모두 기뻐하며 각자 자기 처지를 편안히 여기고 즐기며, 오직 변란이 생길 것인가만을 걱정하고 교활한 백성들이 있더라도 군주를 배반할 마음이 없다면, 궤도에서 벗어난 신하도 그 지략을 꾸밀 수 없을 것이며 사납고 어지러운 간악함도 멈출 것이다. 이세는 이 방법을 행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무도한 것을 더했으며 종묘와 백성들을 훼손하고 다시 아방궁을 짓기 시작했으며, 형벌을 번잡하게 하여 사형을 엄하게 했고, 관리들의 다스림에 각박함이 심하고 상과 벌은 합당하지 않았으며, 세금의 징수에 한도가 없고 천하에 일이 많아 관리들이 관리를 할 수 없었으며, 백성들이 곤궁한데도 임금은 구휼하지 않았다. 그러자 간사함과 거짓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위아래 사람이 서로 속이고 죄를 입은 자가 많아져 거리에서 형을 받아 죽는 사람을 보게 되어, 천하가 그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군후와 공경 이하로부터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스스로 위태롭다는 마음을 품었는데 몸은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해 모두가 그 위치를 불안해했으므로 쉽게 동요되었다. 진섭이 탕왕과 무왕의 현명함을 갖추지 못하고 공후의 존귀함에 의지하지 않았는데도 대택에서 팔을 걷어붙이자 천하가 호응한 것은 백성들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선왕들은 시작과 끝의 변화를 보고서 존망의 기미를 알아 이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삼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데 힘쓸 뿐이었다. 천하에 비록 바른 길에 거스른 행동을 하는 신하가 있어도 분명 호응하는 도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정되어 있는 백성들은 함께 의를 행할 만하나 위험에 처한 백성들은 함께 그릇됨을 행하기가 쉽다." 라고 한 것은 이런 점을 말한 것이다. 귀하여 천자가 되었고 부유하여 천하를 소유했으나 몸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어서이다. 이것이 이세의 잘못인 것이다.

 

(272∼273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 * *

 

사마천의 『사기』에는 사마천이 직접 쓴 부분 말고도 후세 사람들이 가필한 부분도 더러 담겨 있다. <진시황 본기>에는 후한 시대의 유명한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글이 덧붙어 있어 흥미롭다. 사마천과 가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중략)

 

이윽고 이사와 풍거질을 죽이고 조고를 임용했다. 가슴 아프다, 이 말이여. 사람의 머리로 짐승처럼 우는 꼴이로구나. 위험하지 않았다면 죄악으로 인해 정벌되지 않았을 것이고, 죄악이 심하지 않았다면 허망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이르러서도 머무를 수 없었으며, 잔인하고 포악하여 때를 재촉했으니, 비록 지형이 유리한 나라를 차지했다 해도 오히려 국토조차 보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영은 순서를 뛰어넘어 자리를 이을 수 있었고, 옥관을 쓰고 화불華紱(아름다운 인수)을 차고, 황색 지붕의 수레를 타며, 관리들을 모두 이끌고 칠묘를 찾아뵈었다. 하찮은 사람이 적당하지 않은 지위에 올라 직무를 잘 처리하지 못해 당황하지 않음이 없었고 눈앞의 안일함만을 날마나 꾀하니, 자영은 홀로 오랫동안 생각하고 근심을 없애고 아버지와 아들이 득실을 따져 가까이로는 집안 내에서 마침내 교활한 신하를 죽임으로써 선왕을 위해 역적을 정벌했다. 조고가 죽은 다음, 빈객과 친지들이 서로의 노고를 채 위로하지도 못하고, 음식이 미처 목구멍을 내려가지도 못했으며, 술이 아직 입술을 적시지도 않았는데 초나라 병사들이 이미 관중을 도륙하고 진인眞人(유방)이 패상에 날아드니, 흰 수레에 인수를 매고 황제의 부절과 옥새를 받들어 새로운 천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정백이 두 손에 모정과 난도를 들자, 초나라 장왕이 물러나 버린 것과 같다. 강물은 터지면 다시 막을 수 없고, 물고기는 썩으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가의와 사마천은 말한 것이다. "만약 자영에게 평범한 군주의 재능이 있었고 겨우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보좌가 있었다면, 산동이 비록 어지러웠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 제사가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나라가 쇠퇴한 지 오래되자 천하는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했으니, 비록 주공 단의 재주가 있었더라도 다시는 그 간교함을 펼칠 곳이 없을 터이니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영을 [가의와 사마천이] 책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구나! 속세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키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하니 일리가 있다. 그런데 다시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 나는 「진시황 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면, 일찍이 그 결단을 탄복하고 그 의지를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삶과 죽음의 도의를 갖추었다.

 

 (279∼280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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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에톤아, 너는 큰 것을, 네 그 힘과 그토록 어린 나이에

맞지 않은 선물을 요구하는구나.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중에서

 

 * * *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뉴스들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장관 후보자 한 명을 두고 이번처럼 추악한 뉴스들로 도배된 걸 일찌기 본 적이 있었던가. 이번 사태의 본질은 명확하다. 온갖 위선과 오만과 결함 투성이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뻔뻔스런 인물을 정권의 핵심 요직에 재배치하려는 통치자의 오만이 빚어낸 요란한 소동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온갖 추악한 민낯이 만천하에 고스란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후보자는 자신의 욕심을 꺾을 줄 모른다. 통치자와 집권세력들은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식으로 더욱 절박하게 후보자 옹위에 나선다. 거역할 수 없는 민심의 흐름을 그런 보잘 것 없는 니약한 힘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심산인지 모르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소용없는 일에 헛심을 쓰면서 온갖 궤변들을 늘어놓는 군상들의 안쓰러운 몸부림이 그저 딱할 뿐이다.

 

여기서 잠시 흘러간 옛 정권들의 화려하거나 소박했던 온갖 '캐치프레이즈'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어느 정권이든 그들이 새로 출범할 때마다 잠시나마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거창한 구호 하나씩은 내걸었으니 말이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할 때는 '정의 사회 구현'을 내걸었었다. 서슬 퍼런 군부가 내세운 '정의'라는 구호가 한낱 군부 정권의 '통치의 도구'로 쓰였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0년대의 엄혹한 시절에는 정권 안보가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그 무슨 일이든 정권에 도움이 되면 그게 '정의'였고, 정권에 해가 되면 그게 '불의'였다. 정권에 항의하는 숱한 대학생들과 민주 투사들이 이 때 가장 많이 희생되었음은 새삼 되돌아볼 필요도 없다.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한다는 정부가 '정의'를 부르짖는 국민들을 '불의'로 탄압하는 일에 그토록 몰두한 시대도 없었다.

 

6.29 선언 덕분에 직선제로 뽑힌 대톨령은 노태우 씨였다. 그는 전임자의 군부 통치를 곁에서 지켜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보통 사람의 시대'를 구호로 내걸었다. 대통령 스스로 "이 사람 보통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주문 외우듯 읊었다. 정권이 심각하게 흔들릴 때마다 늘상 입밖에 내놓는 말인 즉슨 "이 사람, 믿어 주세요~" 였다. 그러는 동안 자신은 국민들을 속여 가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빼돌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못 믿을 사람이 바로 대통령 자신이었다.

 

YS 정부는 문민 정부로서는 뜻밖에도 '지방화와 세계화'를 부르짖었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나라를 절단내고 말았다. 대한민국이 하루 아침에 국제 거지로 전락한 끝에 IMF에 손을 내미는 처지로 뒤바뀌고 말았으니 말이다.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DJ 정권에서는 남북 화해와 포용을 위해 '햇볕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DJ 정부때 북한을 위해 쏟아부은 거액의 대북 지원금이 도리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도와준 꼴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표방한 건 뜻밖에도 '참여 정부'였다. 그러나 지도자의 순수하고도 열의에 찬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민들의 참여도는 역대 최악을 기록했고, 국민들로부터 한참이나 동떨어져 내내 겉돌던 '참여 정부'는 끝내 아군들한테까지 버림을 받은 끝에 탄핵 심판대에 오르는 수모까지 겪었다.

 

MB 정부는 어땠는가, '경제 살리기'와 '세계 일류 국가'를 기치로 내걸었지만, 정작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의 호주머니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스가 어떻다고요? BBK가 어떻다고요? 여러분, 이 모든 게 새빨간 거짓말인 거 아시죠?" 라고 호언장담했던 그 뻔뻔스런 얼굴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쳐다봤던가.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놀랍게도 '문화 융성'을 기치로 내걸었다. 자신의 치세 동안에 국운이 욱일승천할 줄로만 알았던 탓이다. 십상시가 온통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말이 떠도는가 싶더니 마침내 미르 재단과 K 스포츠 재단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하고, 정유라와 최순실이 온 국민들의 눈을 사로잡기 시작하더니, 통치자 자신은 구중궁궐에 유폐되는 처지로 내몰렸다가 끝내 탄핵되고 말았다. "저는 사리사욕을 위해 '한 푼의 돈'도 받은 적이 없어요."라며 눈물로 국민 앞에 거듭 호소해 봤지만 통치자의 과오를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는 국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의 국정 농단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전임 대톨령의 갑작스런 탄핵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권의 슬로건은 무엇이었던가. '국민의 정부'가 아니었던가. 지난 정권의 모든 적폐가 '나라의 진짜 주인'인 '국민'을 철저히 무시한 때문이라고 판단한 건 지극히 당연하고도 옳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권이 출범한지 얼마 지나기도 전에 '국민'들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국민의 정부'가 어느새 철벽의 '내로남불 정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에서 추진했던 거의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적폐' 아니면 '청산 대상'으로 변했고, 현 정부가 추진하는 거의 모든 일들이 '정의' 또는 '선함'으로 포장되었다.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삼아 숱한 과거사가 들춰지고 심판대에 다시 올려졌다. 5.18 민주화 운동과 세월호의 아픈 역사도 다시 불려나왔다. 가슴 아픈 과거사들 말고도 흥미 만점의 드라마적 요소를 지닌 온갖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폭넓게 재조명되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명분 하나면 충분했다. 별장 성접대 사건과 여배우의 자살 사건들이 재조명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충남 지사의 미투 사건과 경남 지사의 드루킹 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차츰 '내로남불'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권 들어 급작스럽게 확산된 '내로남불' 사상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인물은 단연 조국 수석이다. 청와대에 걸려 있다는 '春風秋霜'의 이념을 그처럼 정반대로 극대화시킨 인물도 없을 듯하니 말이다. 무릇 어느 정권에서나 정권의 존립을 위태롭게 흔드는 위기는 닥치게 마련이고, 그런 위기는 대체로 정권 실세들이나 측근들의 비리로부터 시작되는게 통례였다. 전두환 정권 때의 친동생 전경환 비리, 노태우 정권 때의 황태자 박철언 비리가 그랬고, YS 정권의 김현철, DJ 정권 시절의 삼형제(홍일, 홍업, 홍걸)가 그랬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는 친형인 노건평 씨가 전면에 나섰고, MB 정권 때까지도 나쁜 전통을 이어 받아 '만사형통'이라는 신조어를 창조했다. 박근혜 정권 때는 삶의 오랜 동반자였던 최순실이 막후의 실권자로 등장한 끝에 비선 실세의 위력을 유감없이 뽐내다 딸과 함께 몰락했다.

 

문재인 정권도 어느새 절반쯤 흘렀다. 현 정권의 실권자는 누가 뭐래도 조국 수석이다. 그에게는 문재인 정권의 가장 추악한 상징으로 굳어버린 '내로남불'의 화신이라는 측면에서도 정권의 최측근으로서의 면모에 한 점 손색이 없다. 오래도록 청와대를 지키며 정권의 최전선을 도맡아온 그는 지금도 청와대의 벽면을 보란 듯이 장식하고 있는 <춘풍추상>의 기묘한 역설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중이다. 춘풍추상의 정반대가 이제는 '내로남불'이 아니라 '조로남불'로 불려야 마땅할 지경이다. 조국 수석만큼 가장 고약한 방식으로 '정권의 표어'를 정면으로 뒤집어 엎은 인물이 우리나라 역사에 언제 또 있었던가.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어쩌면 정권의 2인자는 그 정권이 내건 기치의 지독한 패러독스를 숙명적으로 떠맡은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춘풍추상>의 역설을 가장 고약하게 실현한 인물이 이번 정권의 핵심 실세요, <내로남불>의 상징이 되어 버린 조국 수석이라는 사실은 지난 정권들의 사례에 비춰보면 그다지 크게 놀랄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면 저절로 깨닫게 되는 일이지만, 대개 치명적인 적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게 마련이다. 조국의 적은 조국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그걸 반증한다. 그가 내뱉은 숱한 말들과 그가 저지른 숱한 언행불일치의 행적들을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고 말했던 볼테르와 쇼펜하우어는 '조국의 경우' 하나만 보더라도 얼마나 예리하게 정곡을 찌른 셈인가.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 중에서

 

 

 

 

 

며칠 전 신문에 실린 만평 두 컷 때문에 쓰기 시작한 글이 너무 두서없이 길어졌다. 이 글에 등장하는 온갖 불행했던 과거 정권의 실세들을 '그 때 그 시절의 만평'으로 다시 살펴보지 못하는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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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고요가 말했다.

 

"아! 그 자신이 수양하는 데 신중하고 길게 생각하며 구족의 질서를 돈독히 하면 많은 현명한 인재들이 보좌할 것이니 가까운 데에서 먼 곳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우가 그 훌륭한 말에 절하며 말했다.

 

"옳소."

 

고요가 말했다.

 

"아! 인재를 알아볼 수 있으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가 말했다.

 

"아! 완전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요제도 어려워하셨소.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은 지혜로운 일이므로 [지혜가 있으면] 인재를 관리로 임명할 수 있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므로, [은혜가 있으면]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오. 지혜로울 수 있고 은혜로울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환두를 근심하겠으며, 무엇 때문에 유묘를 내쫓았겠으며, 무엇 때문에 교묘한 말과 꾸미는 얼굴빛으로 아첨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겠소?"

 

고요가 말했다.

 

"옳습니다. 아! 또한 일을 행할 때에는 아홉 가지 덕이 있어야 하며 말을 할 때에도 덕이 있어야 합니다."

 

이어 말했다.

 

"일에 종사하기 시작하면 관대하면서도 근엄하고, 온유하면서도 주관이 뚜렷하고, 선량하면서도 공손하고,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경건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굳세고, 곧으면서도 따스하고,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고, 과단성 있으면서도 성실하고, 고집스러우면서도 의리에 맞아야 합니다. 이 아홉 가지 떳떳한 덕행을 밝히면 길할 것입니다. 날마다 이들 중 세 가지 덕을 실천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공경한 자세로 분발하면 가문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날마다 이들 중 여섯 가지 덕을 공손히 실행하면 분명히 나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덕과 여섯 가지 덕을 합하여 널리 베풀어 아홉 가지 덕을 모두 실천한다면, 뛰어난 인재가 관직에 있게 되어 모든 관리가 엄숙하고 신중할 것이니, 사람들을 간사하고 음란하며 기묘한 꾀를 부리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직위의 적임자가 아닌데도 관직을 차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천하의 일을 어지럽힌다고 하는 것입니다."(83∼85쪽)

 

 - 사마천, 『사기 본기』, <하 본기> 중에서

 

(나의 생각)

 

참으로 명쾌하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 * *

 

당시에 하나라의 걸왕이 포악한 정치를 하고 방탕함에 빠져서 제후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탕이 즉시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통솔하니 이윤도 탕을 따라 나갔다. 탕은 직접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하고 나서 마침내 걸왕까지 정벌하고자 했다. 탕이 말했다.

"여러분은 모두 와서 내 말 좀 들으시오. 나처럼 형편없는 사람이 함부로 난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니오. 하 왕조는 죄가 많고 내가 그대들의 원망을 들었기에 나는 하늘이 두려워 감히 정벌하지 않을 수 없소. 지금 하나라가 죄가 많아 하늘이 그를 처단하라고 명하셨소. 지금 여러분 가운데에는 '우리 군주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 내 농사를 버려두고 전쟁에 참여하였으니 무슨 정사를 한단 말인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또 여러분 중에는 '하나라 걸왕이 죄가 있다는데 무슨 죄인가?'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하나라 왕은 백성들이 농사짓는 데 쓸 힘을 모조리 못 쓰게 하고, 하나라의 재물을 모조리 빼앗아 백성들은 거의가 게을러지고 화목하지 않게 되었소. 그래서 '이 태양은 언제쯤 사라질까? 나와 너와 함께 없어져 버리리라!'라고 말하게 되었소. 하나라 왕의 덕이 이와 같으니, 지금 내가 반드시 가야만 하오. "(100∼101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은 본기>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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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사이에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갈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아베 총리는 주한 일본 대사를 새로운 인물로 교체할 모양인데, 조만간 부임할 신임 대사의 프로필이 새삼 화제다. 그의 장인이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이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서의 신임 대사의 경력 보다는 그의 장인에 얽힌 이야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가면의 고백』, 『금각사』, 『우국(憂國)』 등을 쓴 미시마 유키오야말로 세계 대전에서 참패한 이후 극도로 억눌려 있던 '극우 일본'을 갑자기 깨어나게(?) 만든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한국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었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쓴 『우국(憂國)』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신경숙 작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이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마저 '자신도 모르게' 그의 글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겠는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는 솜씨로 말이다. 명백한 표절조차 순순히 인정하지 못했던 낯부끄러운 여류 작가의 '이중의 과실'을 여기서 새삼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일본이 점차 팽창하는 제국으로 변모하던 쇼와(재위 1926∼1989)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0대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20대와 30대에 일찌감치 일본 문단의 최정상에 올랐다. 40대에 이미 두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불과 45세의 한창 나이에 느닷없이(!)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일본 사람들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 속에 몰아 넣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래 탐미주의의 극치로 평가받는 『금각사』와 같은 걸작을 남긴 천재 작가가 하루 아침에 (아베보다도 더 아베스러운) 꼴사나운 모습으로 '일본 자위대'를 향하여 '깨어나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할복 자살로 삶을 마감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느닷없는 행동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미시마 유키오의 극단적인 할복 자살에 얽힌 전후 사정들을 들여다 보기 전에, 그의 문학적인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의 갑작스런 우경화와 충격적인 자살이 그만큼 더 충격적으로 느껴질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세출의 걸작인 『금각사』를 발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문학 청년이었다. 그 무렵까지도 그는 31세의 노총각이었다. 금각사를 발표하고 2년이 지난 1958년에 결혼할 때 주례를 맡은 인물은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였다. 그런데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설국』의 작가로 귀착되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가 그보다 앞서 세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올랐다가 아깝게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다니자키는 1958년에는 펄 벅의 추천으로 노벨상 후보에 처음 올랐고, 1963년과 1964년에는 최종 후보까지 올라 수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수상에 실패했다.(1964년에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에게 밀려났다.) 결국 1965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 1968년에 가와바타에게 노벨상이 돌아가자 "다니자키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문학상은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지 5년 후인 1970년에 비극적인 자살로 마감했는데,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불과 2년 뒤인 1972년에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하고 만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해인 1965년과 2년 후인 1967년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의 문학 천재들은 모두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나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노벨상을 수상했고, 결혼식때 주례와 신랑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다시 미시마의 죽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자살은 당시에도 세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차제에 다시 한번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그의 죽음이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부활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어렴풋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966년 민병대 "방패의 모임(楯の會)'를 결성, 우익 정치 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방패회는 무장 투쟁 훈련을 했다. 이는 이후 일본의 신우익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시마는 1968년에 <문화방위론>을 간행했다. 이는 무질서할 정도로 자유롭게 전개되어 왔던 일본 문화의 정신과 '미의 총람자(總攬者)'로서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물질 문명의 더러움으로부터 구해내고, 또한 공산주의의 손으로부터 지키려면 무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  1969년 우익 운동가 에토 고사부로의 자결에 큰 영향을 받아 1970년 11월 25일 방패의 모임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우수 자위대원 표창'을 명목으로 들어가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과 면담하던 중에 가지고 간 일본도로 위협해 인질로 잡은 뒤 부하 8명을 부상하게 했다. 총감의 방 앞 발코니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향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 헌법 개정을 요구, 자위대의 쿠데타를 촉구하는 '이치가야 연설'을 한 뒤 약 5분 후 모리타 마사카쓰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출처 :위키백과)

 

미시마의 자살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일본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내면에 끈끈히 흐르는 '침략 본성'이 어떻게 일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극우 본성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음은 누구라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그의 자살 이후에 새로운 우익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그 흐름이 오늘날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자민당 정권에까지 깊숙히 스며있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그러니 미시마의 자살이 어찌 한낱 '극우 사상에 심취된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로 간단히 치부될 수 있겠으며, 그의 맏사위가 차제에 신임 주한 일본 대사로 부임하는 일이 어찌 우연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이미 49년 전에 죽은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을 둘러싸고 오늘날의 우리가 그의 죽음을 너무 과장해서 새삼 돌이켜 보고 예민하게 재해석할 필요는 없다. 또한 그의 죽음보다 14년이나 앞서서 발표된 『금각사』라는 걸작 소설 속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극우 사상의 씨앗들'을 새삼 꼬치꼬치 찾아내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을 지도 모른다. 굳이 맹자나 순자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인간에게는 누구한테나 타인을 지배하려는 나쁜 욕망이 내재되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 결합하게 되면 더욱 맹렬하게 불타 올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은 어느 시대에나 능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각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건축물이 되었고, 그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한해 수백 만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이 건축물이 지어진 해가 공교롭게도 1397년이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해보다도 딱 1년이 앞섰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이 소설 속에 미국과 맞서 싸우던 '군국주의 일본'이 자주 등장하고, 금각사가 실제로 '방화범'에 의해 완전히 전소된 때가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 정확히 7일이 지난 때였고, 작품 속의 주인공이 한국전쟁 때문에 금각사를 불태우려는 결심을 더욱 앞당겼다는 사실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 금각사(출처 : 위키백과)

 

 

6월 25일, 한국에 동란이 발발했다. 세계가 확실히 몰락하고 파멸하리라는 내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서둘러야 한다.(342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제9장>

 

 

소설 『금각사』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 극우주의 아베 정권을 강력하게 이어주는 뚜렷한 연결고리들은 그런 사소한 우연 속에 숨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웃 국가에 대한 악랄한 식민 지배뿐 아니라, 가장 추악한 범죄인 2차 대전 당시의 끔찍한 만행들까지도 뉘우치지 못하고, 도리어 멀쩡한 평화 헌법을 개정하지 못해 저토록 안달하는 아베 정권의 추악함은 어쩌면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훨씬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욕망하지만 차지하지 못하고, 행위하지 못하고, 지배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해코지 본성' 또는 '파괴 본성'이 아닐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를 완성한 이후로 죽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에 급속도로 '우경화'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숙아로 태어난 미시마는 어려서부터 육체적인 열등감에 몹시 시달렸던 탓에 12세까지도 할머니 밑에서 양육되었으며, 또래 소년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거나, 혹은 조모가 지정해 준 이웃집 여자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런 열등감이 얼마나 지독했겠는가. 그가 마침내 그런 열등감을 극복한 계기가 『금각사』를 연재하는 동안에 병행했던 '육체미 운동'이었다.

 

 

"이러한 열등감을 30년이나 짊어지고 온 것이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로 어리석게 여겨진다."

 

미시마가 육체미 운동에 열중하여 하루하루 근육이 붙어나가는 동안 『금각사』의 주인공인 미조구치 또한 '말더듬이'이자 '행위 불능자'(그는 대학교에 다니는 건강한 청년이었지만 '동정'을 떼는 데 여러 번 실패한다.)에서 차츰 벗어나 마침내 '미의 화신'인 금각사를 불태우는 대담한 행위를 열망하기에 이른다.

 

과거의 육체적인 열등감으로부터 탈피한 작가 미시마와 금각에 방화하여 행위의 세계로 뛰어든 미조구치는,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는 마지막 문구에 공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미시마는 『금각사』에 '개인의 소설'이라는 별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면의 테마'에 중점을 두고 『금각사』를 평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다. 젊은 시절 특유의 어두운 고뇌와, 그 고뇌를 극복하며 성장하려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이 작품의 곳곳에 숨겨져 있다.(401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작품 해설> 불후의 명작 《금각사》의 테마는 무엇인가 

 

 

 소설 『금각사』는 명백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며,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개인의 소설'이라는 사실이 새삼 우리에게 크게 부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금각사』를 읽는 독자가 오늘날 '아베 정권'으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들의 추악한 본성을 소설 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고, 그러한 재발견이야말로 미시마 유키오가 그토록 치열하게 그려내고자 애썼던 『금각사』 방화범의 행위와 극우파 아베 정권의 폭주를 연결시켜주는 '비밀 통로의 발견'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 방화범에 얽힌 실화'를 자신의 '고백 소설'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자료 조사에 매달린 기간만 무려 5년이었다. 그는 방화범의 이야기 속에 자신을 투영시키기 위해 일부러 '수기 소설' 내지 '고백 소설'의 형식을 취했으며, 바로 그 점이 독자들을 강력하게 몰입하도록 만든다.(특정한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끝끝내 그 대상을 파괴하고야 만다는 이야기가 '수기' 형태로 쓰였다는 점에서 소설 『금각사』는 언뜻 『롤리타』를 연상시키키도 한다. 롤리타에 집착한 주인공 험버트의 수기 속에 작가 나보코프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겹쳐져 있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롤리타』는 『금각사』보다 1년 앞선 1955년에 출간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조구치가 '말더듬이'라는 육체적 결함 때문에 겪는 극심한 열등감은 차츰 '아름다움을 향한 구애의 좌절'로 이어진다. 자신의 이상형이나 마찬가지였던 우이코를 만나러 새벽녘에 골목길에서 숨어 기다렸다가 막상 마주치고 나자 입도 뻥긋 못하고 망신만 당한 게 대표적이다. 그런 좌절들은 나중에 성인이 된 뒤로도 줄곧 이어진다. 대학 동창생인 가시와기가 거듭 여친들을 소개해 주지만 미조구치는 거듭 '행위의 문턱'에서 좌절을 겪는다.

 

가시와기는 나를 인생으로 재촉해주는 친절 또는 악의를 내가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말한 바와 같다. 중학교 시절에 선배의 단검 칼집에 흠을 냈던 나는, 인생의 밝은 표면에 대한 무자격을 이미 내 자신 위에 명확히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시와기는 뒷면에서 인생에 도달하는 어두운 샛길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친구였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 보이면서도,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꿔 우리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이라 해도 좋았다.(180∼181쪽)

 

 

인식이나 욕구가 행위로 이어지지 못하는 극단적인 좌절감은 마침내 '금각사'로 전이된다. 금각사야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줄곧 '완벽한 미의 화신'이자 '우이코의 물질화된 대상'이었음에도 그는 금각사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줄곧 바라만 본다. 오매불망 '금각사와의 합일(合一)'을 꿈꾸던 그는 금각사 주지로부터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한 일을 계기로 학업마저 포기한 끝에 출분((出奔)하고, 금각사를 불태우기로 마음 먹는다.

 

문득 나는 가시와기가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들이 갑자기 잔학해지는 것은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했던 그 말이.

……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276∼277쪽)

 

 

"내가 인생에서 최초로 부닥친 난관은 아름다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회상한 〈나〉는 2차 대전 중의 종말관 속에서 '금각사와 함께 불에 타 죽는 생의 결정적 순간'을 바랬지만 전쟁은 허망한 패망으로 끝나고, 전후의 절망과 고독 속에 살아가야만 한다. 주인공 미조구치의 이런 정신 편력이야말로 '먼 훗날 극우의 상징'이 된 미시마의 정신 편력에 다름 아니다. '극우'란 무엇일까. 결국 '화창한 봄날' 같은 따사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상태도 포함하는 개념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의 참화와 함께 불타오르는 금각을 보지 못하고 절망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좌절감이야말로 오늘날 '극우 일본'의 상징이 된 아베의 어두운 내면의 일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극우가 극단에 이르러 결국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한 게 결국 '금각사에 대한 방화'이고, 자위대에 무단 침입하여 '자위대여, 무장하라'고 외쳤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고, 미우나 고우나 이웃으로 서로 공생하며 살아온 이웃나라를 다시금 힘으로 짓밟으려는 '아베의 폭주'가 아닐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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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8-18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란 일본 작가는 70년대에 나온 부도덕 교육강좌란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시니컬한 그의 독설에 맘에 들어 그에 대해 알아보니 지위대에 무력 봉기를 선동하다 할복 자살을 한 극우 인사란 것을 알게되고 그에 대해 관심을 끈 기억이 나네요ㅡ.ㅡ

oren 2019-08-18 23:40   좋아요 0 | URL
<부도덕 교육강좌>라는 책도 있었군요!
그런데 목차를 찾아 보니 참 꺼림칙한 내용들이 많네요...
아베스러운 치졸한 것들도 많고요...
* * *
남에게 폐를 끼치고 죽어라··28
친구를 배신하라··76
약자를 괴롭혀라··82
자만심을 가져라··89
약속을 지키지 마라··106
“죽여버려!”라고 소리쳐라··112
죄는 남에게 덮어씌워라··129
은혜는 잊어라··159
남의 불행을 기뻐하라··165
악덕을 많이 쌓아라··171
죽은 뒤에 험담하라··215
끝이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405

미미 2020-05-0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출판하셔도 될만큼 훌륭한 글입니다. 덕분에 놀라운 사실들을 알았네요. 최근에 어찌어찌해서 배우게 된 일본 작가들이 마침 저렇게 연관되어져 있다는 것도 신기하구요. 역시 더 찾아보고 공부할것이 많구나 결론 내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글 올려주세요. 틈틈히 oren님의 다른 리뷰들도 읽어볼께요!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 니체

 

 * * *

 

어느날 갑자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핫이슈로 떠오른 한일 간의 갈등을 통해 새롭고도 뚜렷하게 목도하는 현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의 과잉'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삼키는 게 과연 얼마만큼 가치있는 일인지를 우리는 너무 쉽게 불문에 부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번 사태의 원인 제공 책임은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간악무도한 '아베 일당'에게 따지고 묻는 게 맞다. 그는 태생적으로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고약한 피를 지닌 극우 이데올로기로 찌든 인물이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 크게 확산된 혐한 분위기마저도 아베 정권 출범 이후에 두드러졌다는 분석도 있는 걸 보면 그가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이 얼마만큼 작위적인 것인지를 새삼 돌아볼 필요도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태생적인 성향과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한국 때리기에 유난히 골몰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이토록 치졸하고도 무모한 도발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본의 경제 보복을 둘러싼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이러다간 우발적인 무력 충돌까지도 우려된다'는 식으로까지 무분별하게 확산된 건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방심과 과잉 대응이 단단히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는 반복하기도 지겨운 레토릭이 되어 버린 죽창가와 의병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언급부터 과잉이었다. 그런 말들을 재빨리 꺼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이번 사태에 대해 최일선을 떠맡은 고위급 핵심 당사자들이었다. 그 정도의 수사로도 부족했는지 곧바로 성웅 이순신의 12척의 배가 소환되었고 신흥무관학교와 헤이그 밀사 파견까지도 뉴스에 오르내렸다. 기야 한미일 군사동맹의 중요한 고리 가운데 하나인 지소미아 파기가 검토 단계를 넘어 실행 압박에까지 이르렀고, 올림픽 보이콧 문제와 도쿄 여행 금지 구역 선포가 언급되는가 싶더니, 마침내 'No Japan' 깃발이 서울 한복판을 삽시간에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이토록 무분별한 '과잉 대응'이 어디에 있는가.

 

이토록 무책임하고도 자극적인 대응이야말로 우리의 지혜 부족과 경박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소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죽창가가 지배계층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끝내 맥없이 쓰러지고 만 민초들의 최후의 저항을 상징하고, 의병 운동조차 국가적인 대재앙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조정과 관군 부족 때문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초들의 항일 구국 운동이었음을 왜 모르는가. 신흥무관학교나 헤이그 밀사 파견 또한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나 간절한 노력을 상징하는 아픈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토록 아픈 과거의 역사가 왜 하필 이런 시점에 빠짐없이 다시 불려나와야 하는가. 국민들의 삶이 정부의 거듭된 외교적 무능과 경제 실정 등으로 하루하루 나락에 빠져드는 데도 정부에서는 스스로 수습할 능력이나 대책이 없어 애꿎은 국민들을 '한일 경제 전쟁의 최일선'으로 가열차게 내모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왜인가.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단 이틀 만에 75조원이나 사라지고, 원화의 가치가 수년래 최저치로 급격하게 추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일본의 경제 침공'에 놀라 허둥대며 다급하게 죽창가와 의병과 이순신의 12척부터 호출한 무능한 지배층의 언급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정말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정부라면 '일본의 경제 침략'을 맞아 황급하게 '의병'부터 찾을 게 아니라 튼튼한 관군부터 내세워 수비를 단단히 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도모할 게 아니라 일본의 불의와 우리나라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공식 외교 특사들을 내세워야 마땅한 게 아닌가. 지금의 우리나라가 나라마저 빼앗겼던 100년 전의 그토록 나약하고 가련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지소미아 파기도 그렇다.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 갈등 때문에 일본이 치졸한 경제 보복으로 나온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우리가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격렬하게 항의하고 상대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거사 갈등의 경제 보복 무기화에 맞대응해 우리가 경제 문제를 안보 문제로까지 확대시킨다면 국제적인 '아베 비난 여론'이 순식간에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한미일 안보동맹이 크게 흔들리는 마당에, 한일 사이의 과거사 갈등과 경제 보복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안보 협정까지 끌여들여 우리의 유일한 군사동맹국인 미국까지 자극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일본에 보복하기 위해서라면 미국과의 관계는 이럴 때 적당히 훼손시켜도 좋단 말인가. 이런 일이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울 한복판에 내걸린 '일본 보이콧 깃발'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켜켜이 쌓인 과거의 앙금들 때문에 이 사단이 났는데, 정부와 여당이든 지자체든 국민이든 어느 누구라도 하루 빨리 이 갈등을 슬기롭게 치유하고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모두에게 '최선'이 아닌가. 모든 정책 목표는 마땅히 거기에 맞춰져야 올바른 일 아닌가. 도대체 중구청장은 '무엇을 위해' 그런 깃발을 서울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 우득부득 내걸어야 했는가. 집권당의 '반일 캠페인'에 더욱 큰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반일 무드가 나부끼는 깃발 덕분에 더욱 드높아지면 문제 해결이 더욱 앞당겨지는가.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며 생업에 몰두하는 서울 시민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일본의 지자체 공무원들은 급감한 방일 관광객 때문에 항공 노선 감축에 나선 국내 항공사까지 직접 찾아와서 '노선 유지'를 간곡히 당부하는 마당에, 어떻게 중구청장의 머리 속에는 그런 상식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일 무드 고취'에만 그토록 정신이 팔려 있는가. 이런 마인드라면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의 입국부터 미리 막아야 옳은 일 아닌가.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일본과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도쿄를 여행 금지 구역으로 검토해야 된다는 주장이나 올림픽 보이콧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옳다는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어떻게 꾀를 내도 죽을 꾀만 낸다는 말인가. '일본 경제 침략 특별 대책 위원회'라는 곳에서는 마치 한일 사이의 온갖 잠재된 갈등 요소를 이번 기회에 최대한으로 부각시키고 극대화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인 것처럼 활동하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여행객만이 아님은 새삼 물어볼 필요가 없다. 정말로 도쿄의 방사능 오염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가 미리 나설 필요조차도 없다. 다른 선진국들이 어련히 알아서 그런 문제점을 제기하고 조치를 취할까. 때는 이때다, 마침 잘 됐다 하고 우리나라가 떡 하니 도쿄를 여행금지구역으로 정말로(!) 설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멀쩡한 이웃나라의 수도까지도 자국 국민들의 여행을 통째로 금지시키는 나라가 등장했다고 얼마나 비웃겠는가. 설마, 이번 참에 정부에서 '도쿄 여행 금지 조치'를 내리게 된다면 눈치 빠르고 똑똑한 우리 국민들은 미리 알아서 '도쿄'뿐만 아니라 일본까지도 여행금지 국가로 찰떡같이 알아 듣고 거국적으로 일본 여행을 기피할 줄 기대했는가. 

 

엊그제는 우리가 그토록 가슴 절절히 불러 왔던 애국가마저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한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인물이니 전혀 근거없는 문제 제기는 아닌 셈이다. 그 문제는 과거에도 이미 충분히 다뤄졌고, 가슴 절절한 애국심을 고취시킨 애국가의 기나긴 역사에 비춰봐서도 그걸 새삼스럽게 부정할 까닭이 없다는 쪽으로 정리된 터였다. 그런데도 왜 하필 이럴 때 애국가가 또다시 문제인가. 아무리 일본과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쳐도 수천만 동포들에게 그토록 가슴 뜨거운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애국가마저 '친일'이라는 이름 앞에 간단히 내동댕이쳐져야 한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고 버려야 할 하찮은 가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친일이 그토록 문제가 된다면 같은 우리 민족에게 탱크와 총칼로 무참히 짓밟고 수백 만의 생명까지 앗아간 북한에게는 왜 그토록 너그러운가. 일제의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최악의 만행을 저지르고 전국토를 잿더미로 바꾼 걸로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철책 너머로 무시무시한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연거푸 쏘아대는 북한을 무턱대고 감싸고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는 '친북파'들은 도대체 어떤 형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다는 말인가.

 

애국가를 지은 작곡가의 친일 행위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는 거기에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 마땅하고, 한번 친일 행위를 했으면 영원히 그에 상승하는 대접을 받아도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 사람이 가슴 절절한 애국심으로 애써 지어 만들었고 지금까지 물경 수억 명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토록 눈물겹게 불러온 애국가마저 부정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무분별하게 과거에 매몰되고 집착하고 떠받드는 자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친일이 그토록 중차대한 흠결이라면 친일 행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던 조상을 둔 후손들은 지금이라도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고,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해야 옳은 일 아닌가. 또한 독립 유공자나 전쟁 유공자의 후손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이 부여되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은 전사들의 고귀한 희생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제발 정신들을 좀 차리자. 과거의 역사는 영광스러운 것도 있을 수 있고,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역사도 있을 수 있다. 영광스러운 역사는 그에 마땅한 만큼 기리면 된다.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역사는 그에 마땅한 만큼 반성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바탕으로 삼으면 족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과거사에 집착하고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만큼 침식당하고 억눌리기 때문이다. '역사의 과잉'은 어쩌면 철학의 빈곤으로부터 느닷없이 끌려나온 부끄러운 사생아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와 미래의 삶이 중요하다면 '역사의 과잉'은 그만큼 절제될 필요가 있다.

 

반일 열기가 한여름 폭염만큼이나 뜨거운 이 때 이토록 고리타분한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반시대적 고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가 지닌 무게를 그에 합당한 만큼 지혜롭게 다루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침식하지 않도록 슬기롭게 다루는 문제에서 니체만큼 깊게 천착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 * *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또 승리의 여신처럼 현기증이나 두려움 없이 한 지점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름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결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 보라. 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생성만을 봐야 할 형벌을 받았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밎지 못할 것이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을 볼 것이며 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망각이 내재한다.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속하듯이.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되새김질로만,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292∼293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성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가장 거칠고 끔찍한 삶의 재난이나 자신의 악한 행위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와중이나 그 직후에도 평상시의 건강과 일종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천성의 뿌리가 강할수록, 그가 과거로부터 습득하거나 갈취하는 것은 더 많아진다.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천성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특성은 역사적 의미가 너무 무성해서 유해한 영향을 끼질 수 있는 한계가 그 천성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 천성은 자기 것이든 가장 낯선 것이든 과거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집어삼켜서 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 천성은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망각할 줄 안다.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평은 닫혀 완전하며, 동일한 인간의 저편에 열정, 학습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이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293∼294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이제 여기서 각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관찰을 제시할 것이다. 한 개인이 가진 역사적 지식과 감각은 아주 제한적이고 그의 지평은 알프스 골짜기의 주민처럼 매우 협소하며, 그는 얼마든지 부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모든 경험에서 최초의 경험자라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ㅡ 모든 부당함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으며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반면 그의 바로 옆에는 그보다 훨씬 더 정의롭고 학식 있는 사람이 병약하고 쇠약한 상태로 있다. 그것은 그의 지평에 보이는 선들이 불안하게 항상 이동하기 때문이며, 그는 훨씬 더 부드러운 자신의 정의와 진리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와 억센 의지와 욕망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 우리는 동물을 본다. 동물은 완전히 비역사적이며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지평 속에 산다. 그러나 동물은 적어도 권태와 왜곡이 없는 생활 속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정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고 더 원초적인 능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올바르고 건강하고 위대한 것,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그 안에 놓여 있는 한 그렇다.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 안에서 삶은 스스로 생성되고, 이 분위기의 파괴와 더불어 다시 사라진다. 인간이 사유하고 숙고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결합하면서 저 비역사적인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그리고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인간이 먼저 비역사적인 것의 안개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제 비유는 제쳐두고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자. 여자나 위대한 사상에 대한 격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그의 세계는 그에게 얼마나 달라졌는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자신이 맹목적이라 느끼고, 옆의 낯선 사람의 말을 들어도 그는 그저 둔탁하고 무의미한 음향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가 지각할 수 있다 한다 해도, 마치 모든 감각으로 동시에 포착하듯이 가까이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지각하지는 못하며, 화려한 색채를 느끼지도 못하고, 미세한 음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지각하지는 못한다. 모든 가치 평가는 변했고, 가치가 없어졌다. 그는 이제 느낄 수조차 없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것을 이제 소중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문한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낯선 말과 낯선 의견을 지닌 바보였는가 하고. 그는 자신의 기억이 지치지 않고 하나의 원을 돌지만 너무 약하고 너무 피곤해 이 원 밖으로 한 걸음도 뛰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상태이며, 과거에 대해서는 편협하고 배은망덕하며, 위험에 대해 맹목적이고 경고에 귀를 막는 것이며, 밤과 망각의 죽은 바다에서 생동하는 작은 소용돌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ㅡ 철저하게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이지만 ㅡ 부당한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행위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비역사적인 상태에서 먼저 갈망하고 추구하지 않고는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그림을, 어떤 장군도 승리를, 어떤 민족도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행위자는, 괴테의 표현에 따르면, 양심이 없는데, 마찬가지로 그는 아는 것도 없다. 그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그는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 그가 아는 유일한 권리는 이제 생겨나야 할 것의 권리다. 그렇게 모든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사랑받아 마땅한 정도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 최고의 행위는 그처럼 사랑의 충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행위의 가치가 다른 면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294∼296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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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모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는 이런 비역사적 분위기를 수많은 사례들 속에서 건조시켜서 나중에 흡입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마 인식하는 존재로서 초역사적인 관점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니부어가 언젠가 역사적 고찰의 가능한 결과로서 이런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적이 있다. "명철하고 면밀하게 이해한다면 역사는 적어도 한 가지 일에 쓸모가 있다. 우리 인류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인물의 경우에도, 우연히 그들이 눈이 형식을 받아들여 이 눈을 통해 보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볼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강제적인 것은 그들의 의식의 강도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다. 이를 확실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주어진 형태에 최고의 열정을 불어넣는 하나의 강력한 정신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 관점을 초역사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을 가진 사람은 역사와 함께 살아가고 역사와 협력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았다면 그는 모든 사건의 유일한 조건, 즉 행위자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맹목성과 부당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런 관점은 초역사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모든 사건의 유일한 조건, 즉 행위자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맹목성과 부당성을 인식함으로써 더 살고 싶은 유혹과 역사에 함께 참여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병으로부터도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인간에게나 어떤 체험에서, 그리스인에게서든 터키인에게서든, 또는 1세기나 19세기의 어느 시간에서든,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자신의 친지들에게 그들이 지난 10년 또는 20년을 다시 한번 살고 싶기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은 그들 중 누가 저 초역사적 관점의 모법이 되는지를 쉽게 인식할 것이다. 그들이 모두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있지만, 왜 아닌지에 대한 이유를 각기 다르게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 20년은 더 좋아질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근거를 댈 것이다. 그들은 데이비드 흄이 이렇게 조롱했던 사람들이다.

 

최초의 힘찬 흐름이 줄 수 없었던 것을

인생의 찌꺼기로부터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296∼298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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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라고 너희는 물을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신은 너희가 저 목표를 향한 유랑을 처음 시작할 때 너희에게 신탁을 전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그것은 어려운 신탁이다. 저 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감추지도 선포하지도 않고, 단지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스인들도 몇 세기 동안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에, 다시 말해 낯선 것과 과거의 것,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남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며 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들의 "교양"은 오히려 오랫동안 셈족과 바빌론, 리디아, 이집트의 형식과 개념들이 뒤섞인 카오스였으며, 그들의 종교는 전 오리엔트 신들의 투쟁이었다. 이는 지금 "독일의 교양"과 종교가 모든 외국들과 전체의 전(前) 시대들이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는 카오스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문화는 저 아폴론의 신탁 덕분에 집합체는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차차 카오스를 조작하는 법을 배웠다. 즉 그들은 델포이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고 거짓-욕구를 사멸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자신을 소유했다. 그들은 전체 오리엔트의 유산을 잔뜩 짊어진 상속인이나 아류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과의 힘든 투쟁 끝에 저 신탁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속받은 유산을 불리고 키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며 모든 미래의 문화 민족의 선구자며 모범이 되었다.(387∼388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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