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중에서

 

 * * *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 보면 자칫 '길'을 잃기 쉽다. 우리의 의식이 끊임없이 불쑥불쑥 끼어드는 '딴 생각' 때문에 옆길로 새듯이, 꼭 그처럼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이런 불규칙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묘사가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이나 풍경 혹은 장소에 대한 묘사를 할 때도 그렇고,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개할 때도 방식은 마찬가지다.

 

화자의 눈 앞에 놓인 '어떤 장면'을 이야기하다가도 그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이야기가 불쑥 작가의 의식에 떠오르면 그에 대한 생각을 죄다 쏟아붓고 난 다음에 또다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식이다. 그러니 프루스트가 그려내는 '의식의 미로'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확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독자들은 순식간에 길을 잃고 만다. 우리의 의식이 눈 앞의 현실을 좇다가도 순식간에 머나먼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공간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듯이, 프루스트의 의식도 우리와 똑같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 담긴 기억들이 우리와 현저히 다를 뿐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화가의 그림들과 음악가의 작품들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빼곡히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림들을 아주 좋아했고, 음악과 독서 또한 그의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그는 프랑스 사교계를 자주 드나든 덕분에 수많은 귀족 계급과 브루주아 계급의 유명 인사들을 알고 있었다.(소설 속에서 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인물이 게르망트 공작과 공작 부인이었고, 브루주아를 대표하는 인물이 스완과 스완 부인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결국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서전적 소설로도 읽힌다. 작품 속 주인공인 화자는 숱한 그림들과 음악과 문학 작품들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작가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그가 작품 속에 끝없이 펼쳐 놓은 문장들은 화자의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드러내는 작가 노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작가가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치고 덧보태고 가다듬은 문장들이 결국 그 자체로 소설이 되었다고나 할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동안에 독자들이 체험하는 고통은 주로 두 가지에 연유하는 듯하다. 하나는 프루스트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 때때로 너무나 고차방정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가 전달하려는 생각의 구조와 그 구조물 속에 담긴 내용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움켜쥐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은 절대로 프루스트가 고의적으로 의도한 게 아니다. 실상은 독자들이 작가의 의식 속으로 정확하게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프루스트가 일부러 안개처럼 희뿌연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갈 때도 없지는 않지만 그럴 땐 도리어 독자들이 아주 쉽게 작가의 의식을 따라잡을 때가 많다.

 

독자들이 훨씬 더 자주 고통을 느끼는 때는 끝없는 미세회로 같은 '프루스트의 길'을 따라가다가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방황할 때이다. 이런 경험은 꼭 프루스트의 책을 읽을 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경험은 있기 마련이다. 가령,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자주' 길을 잃고 방황한다.(굳이 이런 책들의 예시 목록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놓은 지도는 너무나 선명해서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를 확대해 보더라도 계단처럼 울퉁불퉁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지만,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의식은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진 지도가 매번 흐릿하거나 애매모호하게 그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가가 그려놓은 고화질의 선명한 지도만을 믿고 무턱대로 따라가다가, 불현듯 작가와 차츰 동떨어져 나홀로 걷기 시작한 지점을 발견하며, 작가와의 뜻하지 않은 결별이 과연 어디서부터였는지를 되찾기 시작하고, 어렵사리 그 지점을 다시 찾는 순간 비로소 안도하며,  멈춰세웠던 작가를 다시 앞장세우며 가던 길을 계속 걷게 된다.

 

<총7편/13권>으로 구성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1부 스완 부인의 주변>과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1부에서는 첫사랑 질베르트와의 사랑을 다루고, 2부에서는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과의 사랑을 다룬다. 질베르트와의 첫사랑이 그 사랑을 경험하는 화자와 질베르트의 나이에 딱 어울릴 정도로 철없고 순수하면서도 막연하고 가슴 아픈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알베르틴과의 두 번째 사랑은 첫사랑에서의 실패를 겪은 탓인지 화자가 탐색하고 찾고자 애쓰는 대상(소녀)에 대한 극도로 세심한 관찰과 신중한 접근이 뚜렷한 특징을 이룬다. 화자는 마치 박물학자나 곤충학자와 같은 모습을 띤다.

 

화자가 알베르틴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은 550쪽에 달하는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제4권)에서도 250쪽에 가서야 겨우 등장한다. 나는 <제4권>을 읽는 동안 알베르틴이 과연 언제쯤이나 등장할까 궁금해서 가끔씩 조바심을 낼 정도였는데, 무려 250쪽에 와서야 비로소 그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생루는 동시에르에 돌아가야 했다. …… 나는 어떤 특별한 사랑도 하지 않은 채 텅 빈 상태로 사방에서 ㅡ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자신이 반한 대상을 찾아 나서듯이 ㅡ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찾고 만나는 그런 젊음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 (250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렇게 밑자락을 깔고 나서도 프루스트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프루스트의 생각이 한참이나 옆길로 새다가 겨우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면 비로소 좀 더 구체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나는 그저 혼자서 그랜드 호텔 앞을 서성이며 할머니를 보러 갈 시간만을 기다렸는데, 그때 방파제 거의 끝 쪽에서 특이한 얼룩 하나가 움직이는 듯, 그 모습이나 행동이 발베크에서 늘 보아 오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대여섯 소녀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마치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날아든 한 무리 갈매기 떼가 해변에서 서로 보조를 맞추며 ㅡ 뒤처진 새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른 새들을 쫓아가면서 ㅡ 산책하는 것 같았는데, 그 산책 목적도 새의 정령인 소녀들에게는 분명했겠지만, 그녀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듯 보이는 해수욕객들에게는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이 낯선 소녀들 가운데 한 소녀는 손으로 자전거를 앞으로 밀고, 또 다른 두 명은 골프 '클럽'을 들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은 발베크의 다른 소녀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는데, 물론 발베크 소녀들 가운데서도 스포츠에 빠진 이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특별한 옷차림을 하지는 않았다.(251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 소녀들이 비로소 화자의 눈앞에 좀 더 뚜렷하게 다가오기 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까. 여기서 얼마란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 프루스트의 문장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내 소녀들이 나와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소녀들은 제각기 완전히 다른 유형이었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조금 전부터야 바라보았을 뿐인 데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으므로, 그때까지 나는 소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개별화하지 못했다.(25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여기서 프루스트는 다시 무리지어 움직이는 소녀들의 모습을 무려 다섯 쪽이나 더 할애하여 충분히 길게 설명한 다음 비로소 화자인 내가 '그 소녀'와 '눈길'을 마주치는 장면을 묘사한다.

 

자전거를 밀던 그 뺨이 통통한 갈색 피부 소녀 옆을 지나다가 나는 한순간 그녀의 웃음기 머금은 곁눈질과 마주쳤는데, 그것은 이 작은 부족의 삶을 가둔 비인간적인 세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념 따위는 들어갈 자리가 없는 접근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에서 온 시선이었다.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채로 이마까지 낮게 폴로 모자를 눌러쓴 그 소녀는, 자기 눈에서 발산된 검은 광선이 나와 마주쳤던 스 순간에 과연 나를 보기나 했을까? 만일 보았다면, 난 그녀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까? 그녀는 어떤 우주의 내부로부터 나를 구별했을까? 내게는 이를 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는데, 마치 망원경 덕분에 이웃하는 별자리의 몇몇 특징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 별자리에 인간이 살며 그 인간들이 우리를 보고, 이런 전망이 그들 마음속에 어떤 관념을 일으킨다고 결론짓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만일 우리가 이런저런 소녀의 눈빛이 동그랗게 반짝이는 운모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그녀 삶에 대해 알려 하거나 그 삶을 우리와 연관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짝이는 원반형 물체에서 발산되는 빛이, 단지 원반의 물질적 구성에만 달린 게 아니라, 우리는 모르지만 빛을 발하는 그 존재는 아는 사람들이나 장소들에 관해 ㅡ 내게는 페르시아 낙원의 요정들보다 더 매혹적인 그 작은 요정이 페달을 밟으며 들과 숲을 지나 나를 끌고 갔을 지도 모르는 경마장 잔디밭이나 오솔길 모래밭과 같은 ㅡ 간직하고 있는 관념의 검은 그림자들이며, 또한 그녀가 곧 돌아가려는 집의 그림자이며, 그녀가 구상하거나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이미 구상해 놓은 계획들의 그림자이며, 특히 그녀의 욕망이나 호감과 혐오감 그리고 막연하지만 부단한 의지임을 느낀다. 자전거 타는 소녀의 두 눈에 담긴 것을 소유하지 않고는 그녀 역시 소유할 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따라서 그녀 삶 전체가 내게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고 느껴졌기에 고통스러운 욕망이었으며, 그러나 이제껏 내 삶이었던 것이 돌연 내 삶이기를 그치고 내가 채워주기를 열망하는, 내 앞에 펼쳐진 작은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졌기에 황홀한 욕망이었다. 또 소녀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욕망은 자아의 연장이자 자아의 증식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행복이란 걸 내게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사이에 어떤 공통된 습관도 ㅡ 어떤 공통된 관념도 ㅡ 없다는 점이 내가 그녀들과 사귀고 그녀들 마음에 들게 하는 걸 더욱 어렵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쩌면 또한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과 내가 알고 있거나 소유하는 요소들 중 단 하나도 소녀들의 성격이나 행동을 구성하는 데 들어 있지 않다는 인식 덕분에 내 마음속에는 포만감에 이어 삶에 대한 심한 갈증이 일었는데, ㅡ 마치 메마른 땅이 애타게 물을 기다리듯 ㅡ 이제껏 내 영혼은 이 목마름을 채워 줄 한 방울의 물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더욱더 탐욕스럽게 천천히 음미하면서 완전히 그 물을 빨아들이게 될 것이었다.(259∼260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렇게 짧은 눈길을 서로 마주친 알베르틴과 화자는 여기서 또 '얼마나' 더 지나고 나서야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될까.(여기서 '얼마나'라고 표현한 건 매번 문장의 길이를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하라.) 조금 뒤에서 결국 확인하게 되겠지만, 화자와 알베르틴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여기서부터 무려 120쪽이나(!)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다른 특별한 얘기가 많이 끼어들어서 그렇다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화자는 끊임없이 '그 소녀들'의 무리를 생각하고, 또 가끔은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기도 한다. 다음 장면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엘스티르를 별장 쪽으로 끌고 갔을 때, 난 갑자기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길 끝에서 ㅡ 나처럼 연약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수성과 지성이 과도한 자에게는 없는, 나의 기질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거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생명력이 단지 비현실적이고 악마적인 표현으로 객관화되었다는 듯이 ㅡ 다른 어떤 것과도 혼동할 수 없는 정수(精髓)의 몇 방울 얼룩이, 자포동물 소녀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별들이 몇 개 나타났다. 그녀들은 나를 보지 못한 기색이었지만, 아마도 나에 대해 냉소적인 판단을 할 게 틀림없었다. 그녀들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 불가피하다고 느끼면서, 또 엘스티르가 나를 부르리라고 예상하면서, 난 마치 파도를 받아 넘기려는 해수욕객처럼 등을 돌렸다. 나는 갑자기 길을 멈추고는, 나의 저명한 동반자가 계속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고 뒤에 쳐져서는, 그 순간 우리가 지나가던 골동품 가게 진열창에 갑자기 흥미를 느끼기라도 한 듯 몸을 기울였다. 소녀들에게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척해 보이는 게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엘스티르가 날 소개하기 위해 부를 때, 놀란 것이 아니라 짐짓 놀라는 척해 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일종의 묻는 듯한 눈길로, ㅡ 이 경우 우리는 각자 서툰 배우이며 또는 상대방이 훌륭한 관상학자이기에 ㅡ 또 손가락으로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당신이 부른 사람이 바로 난가요?" 라고 물으면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소개되느라 옛 도자기 감상을 방해받았다는 듯 짜증이 묻어나는 걸 냉정하게 감추고는, 복종과 온순함으로 머리를 굽히고 재빨리 달려가리라는 걸 나는 이미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진열창을 주시하면서 엘스티르가 소리 높여 부르는 내 이름이 마치 우리가 기다리는, 별로 위험하지 않은 공처럼 날 때릴 순간을 기다렸다. 소녀들을 소개받는다는 확실성이 그 결과로서 소녀들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녀들을 알게 되는 기쁨을 피할 수 없게 된 지금 그 기쁨은 압축되고 축소되어, 생루와 이야기하거나 할머니와 저녁 식사를 하거나, 근교에서 즐기는 소풍의 기쁨보다 더 하찮게 생각되었고, 틀림없이 역사 기념물 같은 것엔 관심도 없을 그녀들과의 친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풍도 소홀히 해서 후회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내가 맛보게 될 기쁨을 작아지게 한 것은 실현이 임박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비일관성이었다. 정수역학(靜水力學)의 법칙과도 같은 정확한 법칙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우리가 형성하는 이미지를 쌓아 올리다가 사건이 임박해지면 그 순서를 전복시킨다고 한다. 엘스티르가 나를 부르려고 했다. 소녀들을 알게 되는 장면을 해변이나 내 방에서 몇 번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이런 방식은 전혀 아니었다. 지금 일어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전혀 대비하지 못한 다른 사건이었다. 나는 내 욕망도 목적도 알아보지 못했다. 엘스티르와 외출한 게 거의 후회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전에 내가 느낄 거라고 믿었던 기쁨이 줄어든 것은 이제는 그 무엇도 내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는 확실성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기쁨이 이런 확실성의 압박에서 벗어나 탄력적인 힘 덕분에 본래 높이를 되찾은 것은,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결심한 순간,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소녀들과 함께 멈춰 서 있는 엘스티르가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엘스티르 옆에 가장 가까이 있던 소녀의 얼굴은 통통하고 눈빛이 반짝거려, 조금이라도 하늘이 보이게 틈을 남겨 둔 케이크같았다. 그녀의 눈은 고정되어 있어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어 마치 강풍이 부는 날, 대기가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무척 빠르게 창공을 지나가는 모습을 인지할 때와도 같았다. 한순간 그녀의 눈길이 내 눈길과 마주쳤는데, 흡사 폭풍우가 치는 날, 조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에 다가가 구름을 만지고 앞지르는 하늘의 나그네들인 듯했다. 하지만 나그네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멀리 날아가는 법. 이처럼 우리 눈길도 한순간 마주쳤지만, 작자 자기 앞에 있는 천상의 대륙이 미래에 대해 어떤 약속과 위협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길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확히 내 눈길에 들어온 순간, 구름이 가볍게 그녀의 눈길을 가렸다. 이처럼 맑은 밤, 바람이 실어 온 달은 구름 밑을 지나 잠시 그 빛을 가리다가 빠르게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엘스티르는 나를 부르지도 않은 채, 이미 소녀들 옆을 떠났다. 소녀들은 지름길로 들어섰고, 그는 내게로 왔다. 모든 게 어긋났다.(354∼35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나의 생각)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하늘이 보이게 틈을 남겨 둔 케이크 같았다'는 표현이나 '구름을 만지고 앞지르는 하늘의 나그네들'은 얼마나 시적인가! '공처럼 날 때릴 순간을 기다렸다'는 표현은 얼마나 멋지고 재치있는가! '그녀의 눈길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확히 내 눈길에 들어온 순간, 구름이 가볍게 그녀의 눈길을 가렸다.'라는 표현은 마치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싯구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녀들을 소개받을 절호의 기회를 바로 코 앞에서 놓쳐버린 화자는 여기서부터 5쪽 뒤에서 이렇게 불평한다. "그 소녀들을 소개받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런 화자의 말에 엘스티르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그럼,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나?" 결국 '결정적 순간'을 앞에 두고 짐짓 딴청을 부린 화자나, 그런 화자의 꿍꿍이를 훤히 꿰고 있었던 엘스티르나 헛탕을 치는 데 서로 일조한 건 매한가지였던 셈이다.

 

아무튼, 유명한 화가이자 '그 소녀들'을 잘 아는 엘스티르는 화자의 간청을 받고 '작은 낮 모임'을 주선해 준다. 엘스티르의 집에서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만났을까? 여기서도 독자들은 '한없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어떤 정경들'을 참을성 있게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프루스트는 어쨌든 최대한으로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드는 데 특별한 재주를 지닌 인물임을 우리가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엘스티르가 조금 멀리 앉아 있는 알베르틴에게 날 소개하려고 오라고 했을 때, 나는 커피 에클레르를 먹고 난 후였고, 방금 소개받은 노신사가 단춧구멍에 꽂은 장미꽃을 칭찬해주었으므로 그분에게 꽃을 드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또 노신사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노르망디의 몇몇 장날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음에 소개받은 사람이 내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거나, 내 눈에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이 기쁨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호텔에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이런 점에서 기쁨은 사진과 흡사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찍은 사진은 음화(陰畵)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출입이 '금지되었던' 그 내면의 암실을 나중에 우리가 집에 돌아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라야 현상할 수 있다.

 

이처럼 기쁨의 인식이 내게서 몇 시간 지체되었다면, 이 소개의 중요성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소개받는 순간, 우리는 몇 주 전부터 탐색해 온 미래의 기쁨에 대해 유효한 '통행증'을 갑자기 얻었다고 느끼지만 실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런 통행증의 취득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탐색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동시에 ㅡ 우리를기쁨으로 채워줄 수 있는 ㅡ 우리 상상력으로 변형된 존재, 결코 알 수 없다는 불안한 두려움으로 확대된 그런 존재의 실존에도 종지부를 찍는다. 소개하는 사람 입에서 우리 이름이 울리는 순간, 특히 엘스티르가 지금 하듯이 칭찬으로 그 이름을 에워쌀 때는 ㅡ 마치 요정 이야기에서 요정이 누군가에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라고 명령할 떄와 흡사한 이런 성사 의식의 순간에는 ㅡ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기를 열망하던 존재는 사라져 버린다. 우선 어떻게 그녀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ㅡ 미지의 여인이 우리 이름을 듣고 우리라는 인간을 보면서 나타내야 하는 관심으로 ㅡ 우리가 찾고 있는 의식적인 시선이나 알 수 없는 상념이 어제만 해도 무한한 곳에 위치했던 눈길 속에서(방황하는 다양한 우리 시선이 초점을 잘못 맞추어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눈길에서) 기적적으로 단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어 마치 환하게 웃는 거울에서처럼 그 눈길 속에 그려졌는데? …… (379∼381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화자의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은 <제2편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에서도 무려 250쪽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지만, 이처럼 한없이 더디게만 다가설 수 있다. 어쨌든 그녀의 존재는 <제5편 갇힌 여인>과 <제6편 사라진 알베르틴>에서 끊임없이 환기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이런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은 콩브레의 산사나무 아래서 질베르트에게 첫눈에 반했던 사랑과는 달리 산호초와도 같은 미분화된 그룹에서 개별화로 넘어가는 긴 결정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스탕달에 따르면 평범한 한 존재가 상상적인 것의 조명을 받으며 예외적인 특별한 존재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어떤 우연이, 즉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나 결핍이 필요하다. 이처럼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도 두 번의 실패를 통해 공고해진다.(542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이 어떤 실패와 고통을 겪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문장들의 밀림을 헤쳐나가야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1,000쪽 내지는 2,000쪽 정도쯤? 그러니 그런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차츰 살펴보기로 하고, 역자의 친절한 작품 해설을 통해 훨씬 더 빠른 지름길로 빠져나가 보자.

 

프루스트에게는 이런 연인의 거부가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으로 대체되면서 사랑의 조건이 성립되고, 그리하여 사랑의 대상은 더 이상 쾌락의 대상이 아닌 탐색과 고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욕망과 동일시하거나, 대상도 목적도 없는 탐색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대신하며, 사랑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 질투에 의해 현존한다.

 

이처럼 프루스트적인 사랑이 '대상 없는 탐색' 또는 주제의 내면에서 야기되는 거대한 '질투'의 울림으로 정의된다면, 그것은 레비나스의 말처럼 프루스트의 사랑이 결코 합일을 이룰 수 없는 타자의 이타성을 체험하는 질투와 고통의 담론임을 말해 준다. 타자의 세계는 나 없이 생겨난 것이며 그러나 이 배제됨이 내 사랑을 존속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부터 계속 빠져나갈 때에만, 그리하여 그의 부재나 결핍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 한에서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완전한 소유는 사랑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사랑과 고통을 통해서만 무지에서 성숙으로, 오인에서 진실로 나아갈 수 있으며 『갇힌 여인』과 『사라진 알베르틴』의 그 긴 고통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화자는 드디어 글쓰기를 통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만 존재의 해체와 소멸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충실과 망각을 보충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쾌락의 직접적인 추구가 아닌 상상의 매개에 의해 타자와의 합일이라는 그 불가능한 꿈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543∼544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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