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것을 계속 생존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 즉 기념비적 역사의 저 어려운 횃불 경주가 그들에게서 벌어지리라고 누가 추측이나 했겠는가?

 

 - 니체, 『반시대적 고찰 』,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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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낯익은 인물들을 만나면 괜스레 반갑다. 그런 인물을 마주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낯익은 고대의 인물'을 다시 만날 때면 너무나 반가워 손이라도 덥석 마주잡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가끔씩은 그런 인물이 그저 반갑기만 할 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 이끌며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할 정도로 친근하게 다가설 만큼은 못 되는 인물들도 있다. 그런 인물들은 대개 내가 그동안 그의 '이름'만 자주 들었을 뿐, 여태까지도 그가 쓴 작품이나 그의 생애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고찰해 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귀에 익은 인물들을 수없이 마주쳐도 여전히 낯설기만 했던 경험을 가장 절실하게 느낀 때는 아마도 몽테뉴의 수상록을 맨처음으로 읽을 때였지 싶다. 그 책을 통해 만나는 인물들 가운데 우리에게 전혀 낯선 인물들은 의외로 드물다. 그처럼 비범한 인물의 입술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 그보다도 덜 비범할 턱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몽테뉴를 처음 만난 때는 겨우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으니 그가 내세웠던 수많은 인물들의 '위대성'을 내가 어찌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있었겠냐 싶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몽테뉴는 '인용의 대가'다. 그처럼 뛰어난 인용술을 나는 달리 어떤 인물이나 책에서도 결코 다시 발견할 수 있을 성싶지 않다.

 

 인용의 기술이란 것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몽테뉴가 그 기술을 최고도로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몽테뉴 자신의 글과 인용이 어찌나 서로를 주해하고 서로를 비추고 서로를 보강해주는지, 그 인용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들어내고 싶지 않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 이 기술은 특별히 감명 깊었던 문장들, 구절들, 대목들을 소리를 내서든 혹은 내지 않고서든 자주 외워야만 습득할 수 있다. 감히 말하자면 임기응변으로, 전날 혹은 그 순간 우연히 집어 든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맞닥뜨린 문장을 인용하면, 왠지 모르게 깁고 덧댄 천처럼, 천박한 장식처럼 드러난다.”

 - 발레리 라르보,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호 아래』

 

어쨌든 몽테뉴가 여기저기서 그토록 자주 끌어오는 인물들이 내겐 영 어색하게 다가왔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시골, 1980년 겨울'을 고전이나 몇 권 붙잡고 씨름하던 때이니 설사 내가 그런 인물들을 안다고 한들 얼마나 잘 알았겠는가 싶다. 몽테뉴는 마치 내게, 내 친구가 그의 이름을 너무나 자주 들먹여 그에 대해서라면 언젠가 한 번은 꼭 만나보고 싶은 정도가 된, 그렇지만 정작 그런 친구를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런 인물들을 내게 쉴 새 없이 소개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내가 그런 인물들에 대해 그저 마지 못해 알겠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 언젠가 그런 인물들을 다시 만날 때가 되면 그들에게 힘차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요청하고 싶을 정도로 반길 줄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 때 마주쳤던 여러 비범한 인물들 가운데 내게 가장 궁금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키케로였다. 몽테뉴는 그 책에서 키케로를 정말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인용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심사가 한결같은 색조를 띤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어떨 땐 그 인물에 대해 극도로 칭송하지만 또 어느 땐 그 인물이 지녔던 흠결을 지나치게 부풀려 말하면서 그를 깎아내리기에 바쁜 모습마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키케로에게 우리가 온전히 다가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하다. 키케로를 읽기 위해 나는 그가 쓴 변론집(『카틸리나 탄핵』,『아르키아스 변호』)까지도 읽는 용기를 내봤지만 그는 여전히 저만큼 멀찍이 떨어진 채로 서 있을 뿐 내게 그다지 친근한 눈길을 주지는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키케로의 변론이 담긴 그 책(동서문화사판)의 말미에는 친절하게도 역자가 쓴『키케로의 생애와 사상』이 무려 200쪽에 가까운 분량으로 실려 있어서 그를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 해설만 읽어보더라도 그가 '로마 공화정 말기'뿐만 아니라 '서유럽 정신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다. 아울러 그가 로마 공화정 시절 당대 최고의 정치가로 활약할 만큼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저술에 얼마나 많은 정열을 쏟았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서구의 지성사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던 게 분명한 인물이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페트라르카와 마키아벨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특히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러다 보니 그의 영향이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까지도 이어지게 되었단다. 이쯤에서 '키케로가 볼테르에게 끼친 영향'을 책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자.

 

볼테르

 

프랑스 계몽주의의 중심 '볼테르의 시대'와 18세기 중엽을 품위 있게 묘사하는 활동을 펼친 문필가 볼테르는 18세기에서 키케로의 최대 칭송자이다. '키케로 없는 볼테르는 생각할 수 없고, 또 볼테르 없는 키케로는 생각할 수 없다'(라마르틴). 볼테르는 특히 키케로의 작품들 가운데 철학 관련의 책들을 숙독했다.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에서는 스토아파의 신의 섭리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투스쿨룸에서의 대화》에서는 영혼이 불사(不死)인가 불사가 아닌가에 자극을 받았다. 볼테르는 통상의 해석과 달리 키케로가 혼은 죽어야 하는 것으로 역설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의무에 대하여》는 시대를 초월해 타당한 도덕의 서술로서 그 뒤 어떤 사람도 도달할 수 없는 이론과 학설로 절찬을 받고 있다. 볼테르는 키케로를 미신에 지나지 않는 실정 종교를 거부하는 자유사상가로 간주하고 있다. 또 카틸리나 사건을 둘러싼 키케로의 대처를, 이 프랑스 계몽기에 지나치다고 비난하는 저작이 몇 개 나타났는데 볼테르는 로마의 구제자로서 키케로를 옹호했다.

 

볼테르는 이신론자(理神論者)인데 이 사상을 그대로 책으로 펴내면 투옥되거나 추방될 위험이 있으므로, 키케로에게 보내는 메니우스의 편지ㅡ때마참 바티칸의 도서관에서 러시아의 후작이 발견해 그것을 볼테르가 러시아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했다는 형식ㅡ라는 치장하에서 공개한 것도 알려져 있다. 또한 볼테르를 궁정으로 초청한 둑일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도 대단한 키케로 팬이었다.

 

 - M.아우렐리우스/키케로, 『아우렐리우스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키케로의 생애와 사상》중에서

 

그런데 이쯤에서 내게 문제가 되는 인물은 오히려 볼테르였다. 볼테르 또한 내게는 이름만 귀에 익을 뿐 한번도 그의 작품을 찾아 읽은 적이 없어서 '소문으로만 들어서 아는 인물'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엄청난 작품들을 써낸 천재 작가였고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정말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8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동안 수많은 비극작품을 써서 크게 성공했고 드높은 명성을 떨쳤다. 일찌기 24세 때 비극『오이디푸스』가 대성공을 거뒀고, 『햄릿』의 모작인『에리필』,『카이사르의 죽음』, 『메로페』,『오레스테스』, 『미노스의 법』등을 늙은 나이가 되도록 줄기차게 써냈다. 그의 창작열은 70대와 80대에 접어들고도 도무지 식을 줄 몰랐다. 그가 쓴 작품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지는 다음 인용문이 증명한다.

 

볼테르는 84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유럽 지성계의 왕관 없는 제왕이었고, 계몽 시대의 우뚝한 지도자였으며, 프랑스 혁명에 의해 붕괴된 구체제의 기반을 가장 맹렬하게 파괴한 자로 평가되었다. 극작가, 시인, 역사가, 이야기꾼, 재담가, 신문사 특파원, 논쟁가, 화려한 성격의 소유자 등으로 엄청난 명성을 거두었다. 그의 창작 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1만 4천 통의 편지와, 2천 건 이상의 책과 팸플릿을 남겼다. 하지만 사흘 만에 써냈다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농담의 책으로 유명하다. 그가 써낸 무수한 냉소적 작품들도 이 단 한 편의 아이러니를 당하지 못한다.

 

『캉디드』는 후대의 소설들이 즐겨 취하는 성장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령 『적과 흑』도 성장소설이며 『마의 산』은 좀 더 심화되고 확대된 형태의 성장소설이다. 캉디드가 받은 교육은 아주 폭력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볼테르가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최선이라고 볼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은 "우리의 정원을 가꾸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위악적인 아이러니가 넘치는 걸작을 읽고서 볼테르가 조롱의 대가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버나드 쇼처럼 재치가 넘치지만 동시에 쇼처럼 인간의 정신의 해방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용감하게 싸우는 전사였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방금 확인했듯이 그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라는 작품을 '사흘 만에 써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책 속에서 내게 '낯익은 인물들'을 불쑥 다시 만난 건 정말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인물들을 볼테르의 안내에 따라 전세계를 다 돌아다니다시피 하다가 무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까지 이끌려가서 만난 건 더욱 놀라웠다. 어느 누가 그토록 아름다운 섬에서, 볼테르의 말에 따르면 그토록 고리타분한 인물들을 만날 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군다나 '키케로 없는 볼테르는 생각할 수 없고, 또 볼테르 없는 키케로는 생각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키케로'에 대한 혹독한 인물평까지 들을 줄이야...

 

비록 볼테르는『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인류를 빛낸 위대한 작가들을 그다운 솜씨로 거침없이 깎아내렸지만 그의 말엔 '고전을 경멸하는 듯한 인물들에 대한 우회적인 공격'을 포함하는 '묘한 아이러니'가 깔려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짐짓 칭찬하는 듯하다가도 결국 '자신의 취향'이 아님을 내비친 호라티우스만 해도 그렇다. 그는 무려 78세 때『호라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작품을 썼을 정도로 그에 대한 열렬한 애독자였다.

 

후세 사람들로부터 '볼테르의 고백록'이라 불릴 만큼 작가 개인이 실제로 겪은 경험담이 다채롭게 녹아 있는 작품이 바로『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사생아 캉디드는 영주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 죄로 하루 아침에 '엉덩이를 발길로 차여' 툰더텐트론크 성에서 내쫓긴다. 그때부터 그는 '성 안에서' 가정교사이자 철학자 팡글로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순진무구한 낙관주의'가 어딘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어리석은 철학임을 차츰 깨닫게 된다. 그러나 캉디드의 '인생유전'을 통해 불합리와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을 풍자하는 볼테르의 이야기는 묘하게도 그리 과격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늘 '어린아이 같은 캉디드의 어깨 너머로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가 볼테르 특유의 아이러니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그만큼 그의 작품을 읽는 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볼테르가 '키케로'를 포함해서 우리의 귀에 익숙한 인물들에 대해 늘어놓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농담'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짓자.

 

그들은 식탁에 앉았다. 훌륭한 식사가 끝나자 그들은 서재로 들어갔다. 캉디드는 멋진 장정을 한 호메로스의 저서를 보고 주인의 높은 취향을 찬양했다.

 

「이게 바로 독일 최고의 철학자 팡글로스 박사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책입니다.」

 

그러자 포코쿠란테가 쌀쌀맞게 말했다.

 

「나는 그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그 책이 재미있다고 해서 나도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너무도 지루했습니다. 전투장면은 다 비슷비슷하고 게다가 그런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여러 신들이 계속 개입을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결정적 역할도 못하지요. 헬레네는 전쟁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작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요. 게다가 모두들 계속 트로이를 포위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도 못하지요. 나는 학자들에게 그들도 나처럼 이 책이 지루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진실한 사람들은 모두 내게 솔직하게 대답하더군요. 너무 지겨워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고대의 걸작이니까 서재에는 꼭 갖춰 놓아야 한다고 말이지요. 내다 팔 수 없는 녹슨 메달처럼 말입니다.」

 

「각하께서는 베르길리우스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캉디드가 물었다.

 

「물론 『아이네이스』의 제2, 4, 6권은 뛰어납니다. 그러나 독실한 주인공 아이네아스와 힘센 클로안투스, 충실한 친구 아카테스, 키 작은 아스카니우스, 어리석은 라티누스 왕, 속물인 아마타 왕후, 그리고 개성 없는 라비니아 공주와 같은 인물들은 정말이지 너무도 무미건조하고 불쾌합니다. 그보다는 타소가 나아요. 심지어는 아리오스토의 지루한 이야기도 그보다는 나을 겁니다.」

 

「의원님, 호라티우스를 감명 깊게 읽으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의 격언들은 꽤 괜찮아요. 사교계 인사가 참고할 만해요. 힘찬 시구로 압축되어 있어서 기억하기도 쉽고. 하지만 브룬두시움 여행기나 형편없는 식사에 대한 묘사나 푸필루스인가 뭔가 하는 작자와 또 다른 한 작자 사이에 오간 상스러운 말다툼은 시원찮더군요. 호라티우스의 표현대로 푸필루스의 말은 <상스러운 독설로 가득 차> 있고, 상대편의 말은 <식초에 절인> 것 같더구먼요. ······ 어리석은 자들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라면 무엇이든지 높게 평가하죠. 하지만 내 독서는 나만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내 취향에 맞는 것만 좋아합니다.

 

절대로 자기 스스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배워온 캉디드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러나 마르틴은 포코쿠란테의 사고방식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서가를 살펴보던 캉디드가 탄성을 질렀다.

 

「아! 여기 키케로의 책이 있네요. 이 위대한 인물의 작품은 암만 읽어도 안 질리시지요?」

 

그 사람 책은 절대 안 읽어요. 그 사람이 라비리우스나 클루엔티우스를 위해 변호한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내가 판결해야 할 소송만 해도 너무 많아요. 그 사람의 철학책에는 좀 관심을 가졌어요. 하지만 그가 모든 것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을 안 뒤로 그것도 그만두었어요.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그 사람만큼은 알고 있거든요. 무지를 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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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에 대한 추억......

키케로는 왜 몽테뉴에게 밉보였을까?

『키케로의 의무론』에 대하여...

『일리아스』와『오뒷세이아』에 관한 기나긴 이야기

트로이아 전쟁과 헬레네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

최초의 로마인의 인생 역정을 다룬 로마 건국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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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이런 연설을 들을 수 있을까?
    from Value Investing 2016-11-03 11:23 
    이게 나라냐 싶은 생각을 잠시라도 떨치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한 나날의 연속이다. 책 조차 읽기 싫을 정도로 도무지 뉴스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어렵사리 옛 고전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고대 로마시대의 명연설문'에 이르러서야 겨우 글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다시금 만난 글이 로마 공화정 말기 최고의 웅변가인 키케로의 '카틸리나 탄핵' 연설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키케로의 연설이 행해졌던 날로부터 무려 2,000년도 더 시간이 흘렀는데도
 
 
 

 

우리는 남의 실수에 대해 얼마나 관대해야 좋을까. 남의 실수 때문에 내가 어떤 심적이거나 물질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거기에 대해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 일일까. 무릇 모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따른 대처는 '각자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라 너무나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남의 실수'에 대해 내가 마땅히 혹은 당연히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고려할 만한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만든다. 우선 당장 실수를 저지른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도 따져볼 만한 요소가 어디 한둘이 아니다. 더군다나 어떤 한 사람의 실수에 따라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수십 명이나 수백 명 혹은 심지어 수억 명에 이를 수도 있으니 우리가 '실수'에 대해 어떤 성급한 일반론을 이야기하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실수'로 인해 아무도 예기치 못한 엄청난 파장을 낳을 때도 많은 듯하다. 각종 대형사고들이나 참사들도 따지고 보면 사소한 부주의나 실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근래에 온 국민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 물질적 고통을 주었던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등도 따지고 보면 '실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수로 인해 세계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힌 참사들 가운데 우리는 쉽게 체르노빌 원전 사고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같은 대참사에 대해 우리가 온전히 '당국자의 실수'에게만 전적인 책임을 묻긴 어렵지만 어쨌든 '실수'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쩌면 실수를 매일 매일 경험하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밥을 먹다가도, 물을 마시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우리는 그만 나도 모르게 깜빡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심지어 업무를 보거나 연애를 할 때도 실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찾아든다. 스포츠 경기만 보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실수'를 목도하는가. 어떤 경기에서든 실수는 통제하기 어려운 난제로 항상 등장한다. 축구든 야구든 골프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어떤 실수들은 정말로 치명적이어서 단 한 순간의 미세한 실수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시간 동안의 숱한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 때도 많다.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의 경우는 어떤가. 사소한 실수 하나가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할 때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실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지어낸 가장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인 《오이디푸스 왕》도 좋은 사례다. 그가 '운명의 삼거리'에서 조금만 더 이성을 차렸더라면 자신의 친부를 살해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엄청난 비극의 연속은 더이상 없었을 것이다.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던 일에 대해 결국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 경우에는 그 댓가가 너무나 혹독하다는 측면에서라도 새삼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오이디푸스 

오오, 삼거리여, 그리고 후미진 골짜기여,
너희들은 내 손에서 내 자신의 피인 내 아버지의
피를 마셨으니,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그 뒤 또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오오, 결혼이여, 결혼이여, 너는 나를 낳고는 다시
네 자식에게 자식들을 낳아줌으로써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 사이에, 그리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의 혈연을 맺어주었으니,
이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가장 더러운 치욕이로다.

 - 《오이디푸스 왕》1398∼1408행

 

 

지난주 금요일 밤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피아니스트가 저질러서는 안 될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클래식 연주 역사상 유례가 드문 '대참사'로 불러도 좋을 만큼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윤디 리가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다가 그만 악보를 까먹고 제멋대로 내달리다가 결국 오케스트라 연주마저 멈춰 세우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에 이런 망측한 일도 내 눈앞에서 벌어질 수 있구나 싶었다. 음악 연주에서 연주가들이 악보와 다르게 혹은 엇박자로 연주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미 '쇼팽 스페셜리스트'로서 명성이 확고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본인이 수도 없이 연주했을 바로 그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그것도 겨우 1악장 중간 부분에 이르러 오케스트라 연주와 완전히 빗나가면서 엉뚱한 악보 위를 내달린 끝에 협주 자체가 멈춰 버렸다면 이건 여간 심각한 실수가 아니다.

 

 

 

클래식 공연 도중에 벌어지는 이런 저런 실수들은 사례가 너무 많아서 새삼 나열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윤디 리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법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뒤에 정작 그보다 더 볼썽사나운 실수들을 거기에 덧보탬으로써 기어코 희귀한 헤프닝을 대참사로 격상시키고 말았다. 우선 그 무엇보다도 명백한 자신의 실수를 괜스레 남의 탓으로 전가하려는 듯한 애매한 행동부터가 보기에 참 딱했다. 자신의 실수로 연주가 멈춰버린 순간 그는 돌연 왼손을 치켜올리며 오케스트라 지휘자한테 뭔가를 어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협연을 맡았던 시드니 심포니의 지휘자가 더욱 당황해 하던 모습까지 지켜봐야 하는 관객들은 황당한 처지에 더해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도 마저 목격해야 했던 셈이다.

 

1830년 가을 바르샤바의 한 연주장에서 고국 폴란드를 떠나는 청년 피아니스트 프레데릭 쇼팽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였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단조 op.11'은 서정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쇼팽의 대표적인 피아노 협주곡이다. 예민한 감성과 꿈으로 가득했던 쇼팽이 스무살에 작곡한 곡이었다. 그 유명한 연주곡 덕분에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게 바로 윤디 리였고, 그가 유명해진 무대가 바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렸던 '쇼팽 피아노 콩쿠르'였다. 그는 5년 마다 열리는 바로 그 콩쿠르에서 불과 열여덟 살에 최연소로 우승을 차지한 인물이다. 그러니만큼 그동안 그가 보여줬던 놀라운 명연주들을 이번에 아주 생생한 감동으로 직접 느껴보고자 했던 관객들에게는 이번 연주 자체만으로도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는데 결국 그보다 더 꼴사나운 모습마저 기어코 보고 만 셈이 되었다.

 

 

 

최근에 한국인 피아니스트 조성진 군이 바로 그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바로 거기서 윤디 리는 최연소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었다. 2000년에 열린 쇼팽 콩쿠르에서 불과 18세의 나이로 우승했던 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어느덧 거장 피아니스트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런 '위치'와 '예우'가 이번 연주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향한 이해하기 힘든 제스쳐를 낳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나만의 억측일까.

 

어쨌든 피아노 협주곡 연주가 끝나고 짧게 주어진 인터미션 시간엔 온통 '윤디리의 공연 실수'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채워지면서 바쁘게 지나갔다. 엉망진창이 된 윤디의 연주는 인터미션이 끝난 뒤 말끔히 치워진 피아노와 함께 과거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2부에 연주된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은 지휘자의 경쾌한 몸놀림과 함께 아주 매끄럽게 이어졌고 멋진 휘날레는 관객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마저 안겨주었다. 윤디 리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그렇게 잠시나마 묻혀지는 듯했다.

 

그런데, 연주가 모두 끝난 뒤에 예정되어 있었던 '윤디리 팬 사인회'가 갑자기 취소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렇게 연주를 망치고 나서 어느 연주자가  '팬 사인회'에 당당히 얼굴을 디밀 수 있을까. 그런데 아마도 이 즈음부터 관객들이 슬슬 '본전 생각'에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오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이미 연주회 이전부터 윤디 리의 음반을 구입했던 사람들이나 아주 멀리서 불원천리하고 이 연주회를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 또한 만만치 않은 티켓 가격을 지불한 터라  '윤디 리의 실수' 때문에 빚어진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런 '형편없는 엉터리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들은 끝까지 '뜨거운 박수'로 윤디 리와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아낌없이 격려하지 않았던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윤디 리는 연주가 끝난 뒤 마지 못해 겨우 두 번 더 얼굴을 내밀고 난 뒤에 서둘러 '앵콜 연주'도 없이 연주장을 떠나고 말았으니 많은 관객들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고 하더라도 누가 뭐라 나무랄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기막힌 반전'은 연주가 끝나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엉뚱한 데서 일어났다. 관객들이 초겨울 같은 쌀쌀한 날씨 탓에 총총 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르는 동안 정작 '실수'를 저지른 당사자는 다른 일로 바빴던 모양이다. 이미 윤디 리의 '서울 공연 대참사'가 슬슬 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통해 장안의 화제로 이어질 바로 그 무렵, 윤디 리는 정말 뜬금없이 다음과 같은 놀라운 모습으로 바로 그 인터넷 공간에 놀라운 코멘트를 불쑥 남겼던 것이다.

 

 

 

마침 다음날이 '할로윈 데이'였던 모양이다. 그날 밤 공연으로 너무나 놀라고 실망했던 '한국 관객'들은 도무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넘어 분노를 표시한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미 윤디 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결코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오명을 '예술의 전당'에 뚜렷이 새긴 터였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이건 너무 아니다 싶다. 그가 저지른 '실수'는 관대하게 인정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그 이후에 자신의 실수에 대처하는 모습들은 실망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윤디 리의 열렬한 팬들 가운데에는 이번 '서울 공연 참사' 때문에 벌써부터 '윤디 리 연주 음반'까지 불태우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마저 생겨나는 모양이다. 나는 어디 변변한 CDP조차 없으니 불태울 만한 CD는 더더구나 장만해 놓을 턱이 없어 그런 고민까지 할 필요조차 없다지만 윤디 리를 향한 수많은 팬들의 뜨거운 애정이 실망을 넘어 분노로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일 정도로 이번 사고의 여파가 커지는 듯하다. 

 

(내가 클래식 감상을 위해 장만해 놓은 건 고작 쓸 만한 'PC용 스피커'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동안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구던 '윤디 리 서울 공연 참사' 소식도 결국 조용히 가라앉을 게 틀림없다. 뒤늦은 건지 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서야 다행스런 소식도 들린다. 윤디 리가 '서울 공연에서의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표명했다는 소식이다. 공연에 실망한 관객들이 '환불 소동'까지 빚은 데 적잖이 놀랐음에 틀림없고, 본인으로서도 그냥 뭉개고 넘어가기는 힘들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실수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을 포함해서 그 실수를 둘러싼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는 좀 어렵다. 그런데 '실수'가 벌이지고 나면 정작 중요해지는 지점은 '누가 어떤 실수를 했느냐'에서 실수한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로 금세 옮겨가는 듯하다. 이미 수많은 사례들이 그걸 충분히 증명했다고 본다.

 

실수와 신뢰

펩시사의 회장인 크레이그 웨더는 "사람들은 실수를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들의 신뢰를 망가뜨린다면 그들로부터 신뢰를 다시 얻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뢰를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라고 말한 바 있다. 노르만 슈바르츠코프 장군은 이에 대해 더욱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지휘란 전략과 신뢰를 견고하게 혼합시켜 놓은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전략을 포기하라."

 - 『위대한 기업의 조건』 中에서

 

윤디 리는 이미 15년 전에 '쇼팽 콩쿠르'를 통해서 전세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번엔 '상상하기 힘든 실수'를 통해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부디 이번 실수를 교훈 삼아 미래엔 더 많은 사람들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놀라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된 것도 어찌보면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든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에 빛나는 조성진 군 덕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비록 조성진 군은 아직 한참 어리지만 왠지 윤디 리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지는 않을 듯하다. 지금보다 더더욱 훌륭한 연주로 우리를 지금보다 훨씬 더 놀라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쇼팽 콩쿠르 우승자 두 사람 때문에 실망도 크고 기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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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4 0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건도 극적이고 서술도 극적이고 해서 한달음에 읽었네요.
그런 기막힌 일이 있었군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저 또한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고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두렵군요.
독자들한테 던지는 ‘메시지’가 가슴 깊이 파고듭니다.

oren 2015-11-04 10:28   좋아요 0 | URL
제 예상보다는 훨씬 더 빨리 사과 표명이 이뤄진 듯해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요.
그래도 이번 일은 윤디 리에게는 씻기 어려운 깊은 내상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싶어요.
아직도 인터넷에는 그의 `실수보다 더 나쁜 대처방식`에 대한 다양한 글들이 계속 올라오네요.
`천재 피아니스트 윤디 리, 그대는 아직 멀었다` 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102_0010388584&cID=10701&pID=10700

살리미 2015-11-04 0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 공연을 실제로 보셨군요. 정말 대참사입니다. 뒤늦게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다행이지만요. 중요한건 어떤 실수를 했냐보다는 실수에 대처하는 자세라는 점 깊이 공감합니다.

oren 2015-11-04 10:30   좋아요 0 | URL
대가들은 자신의 실수를 멋지게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었죠. 그것도 방금 엄청난 실수가 벌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말이지요.. `곧바로 사과하고 다시 반전을 이뤄내는 능력`도 정말 중요하다 싶어요...

[그장소] 2015-11-04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세술이란 것은 다 없애야 할지도 몰라요.
진짜 감동을 위해..왔는데..격이 떨어지더라도..
(자신을 낮춤이 왜 격이떨어짐인지..모르지만)
그 늘...그렇듯 알량한 처세술..갖은 계산들..이
진심을 말아 먹어요.

oren 2015-11-04 10:42   좋아요 1 | URL
윤디 리와 조성진 둘 모두 `쇼팽 콩쿠르 우승`을 차지할 때 연주했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최근에만 열 번 이상은 들어본 듯한데, 정작 가장 기대가 컸던 윤디 리 서울 공연에서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느낄 줄은 차마 몰랐어요. 윤디의 연주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처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무슨 `학예 발표회`에 끌려나온 학생의 연주를 듣는 것 마냥 몹시도 지루하고 맥이 빠지고 말았어요... 그래놓고도 윤디 리는 청중들에게 아무런 사과 제스쳐 하나 남기지 못하고 그 연주장을 빠져나가기 급급했던 듯해요. 그래놓고 다시금 sns를 통해 `자신의 놀라운 모습`을 기어코 만천하에 거리낌없이 다 드러냈으니...ㅠㅠ

[그장소] 2015-11-04 12:21   좋아요 1 | URL
음..자신을 쇼팽으로 착각하는가...흠..
그 엉킨 연주시간동안 ㅡ대체 그의 머릿 속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손가락...이제 더는 싫어...이 압박감..따위 ㅡ 조성진 ㅡ눌러 주겠어.하는 ..뭔가 달라야 하는
기대부응심리에 스스로 튕겨 나간 건가? 그러곤 이미 망가진거...하고..막..나가버린..걸 회사차원에서 수습...그런걸까요ㅡ?!
 
<금각사>에 있어서 ‘남천참묘의 공안’이 갖는 의미



yamoo 님께서 이번에 소설 『금각사』를 무려(?) 세 번째로 읽고 나서 쓰신 '남천참묘의 공안'이라는 글 내용이 한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비록 그 소설을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yamoo 님께서 올려주신 흥미로운 글들을 읽으니 마치 그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금방이라도 제 눈 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그런데 저는 yamoo 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제가 최근에 읽었던) 막스 베버의 글 내용 가운데 일부가 희미하게 겹쳐 떠올라 약간은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막스 베버 또한 '근대적 인간의 삶'을 바로 '행위와 체념'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쌍'에 입각해서 접근했는데 바로 그 부분이 우연하게도 yamoo 님의 글 내용과 갑작스레 어떤 연관을 맺게 된 모양이니까 말이지요. 더군다나 베버가 그렇게 꿰뚫어 본 내용 가운데 일부는 그 유명한 '괴테의 걸작 소설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어서 yamoo 님의 글과 일말의 '선택적 친화력'을 지닌 듯한 느낌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yamoo 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막스 베버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신 기억도 새삼 떠오르고 해서 이렇게 무턱대고(?) 먼댓글 형식으로나마 제가 떠올린 그 부분을 '밑줄긋기' 하듯이 올려 볼까 합니다.

 * * *

 

베버에 따르면 칼뱅주의자들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행위에 의해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스스로 창조하는데, 이는 괴테가 『잠언과 성찰』에서 한 다음과 같은 격언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안 되고, 행위를 통해서나 가능하다. 네 의무를 이행하도록 애써라.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 그런데 너의 의무는 무엇인가? 일상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 베버는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 칼뱅주의는 다른 어떤 신앙 형태보다 사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이 역시 수동적인 관조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에 칼뱅주의 윤리의 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괴테의 명제가 적용되었다. "행위하는 자는 언제나 비양심적이다. 양심을 가진 자는 관망하는 자뿐이다." 결국 베버는 칼뱅주의의 행위윤리와 괴테의 행위윤리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존재함을 확인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인의 인격 및 근대의 문화와 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대한 베버의 논리 전개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즉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마지막 부분에서 '행위'(Tat, Handeln)를 '체념'(Entsagen)과 결합하고 있다. 체념이란 개인의 삶을 전문적 직업노동에 한정하며 다방면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행위와 체념은 근대인의 특성이자 숙명으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이다. 베버가 보기에 이 둘의 관계는 괴테의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와 희곡 『파우스트』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근대적 직업노동이 일종의 금욕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전문 노동에 한정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다방면에 걸친 삶을 살려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치 있는 행위를 위한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 되며, 따라서 '행위'와 '체념'은 오늘날 불가피하게 서로를 조건 짓고 제약한다. 시민계층적 생활양식의 이러한 금욕주의적 기조─이 생활양식이 무(無)양식이 아니라 어떻게든 양식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기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는 이미 괴테도 그 삶의 지혜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통해 그리고 희곡의 주인공 파우스트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괴테에게 이러한 인식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의 시대로부터 체념 어린 작별을 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가 되풀이될 수 없듯이, 그러한 시대 역시 우리의 문화 발전 과정에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 반면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에서 나와 직업 생활 영역으로 이행함으로써 세속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또 공장제·기계제 생산의 기술적·경제적 전제 조건과 결부된 저 근대적 경제질서의 강력한 우주를 건설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그 추진력에 편입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 비단 직접적으로 경제적 영리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아마도 그 마지막 톤의 화석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규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5)

35) Max Wever,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P. 203[364∼365쪽]

 


베버에 따르면 행위는 각 개인이 세계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정립하고 이 세계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전제한다. 그는 이러한 의지와 능력을 인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인격은 불가피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한정적이고 일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바로 괴테가 그의 문학 작품에서 형상화한 내용이다. 이처럼 베버의 인격 개념과 괴테의 인격 개념은 본질적으로 '선택적 친화력'을 보여준다. 선택적 친화력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밖에도 베버는 1917년의 강연 '직업으로서의 과학'(Wissenschaft als Beruf)에서 괴테같이 위대한 예술가의 경우에도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한 시도는 예술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행위와 체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예술가의 인격도 이 행위와 체념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베버에게 괴테가 가지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 방금 언급한 ─ '선택적 친화력'(Wahlverwandtschaften)이라는 개념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인식 과제를 "일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앙과 직업윤리 사이에 과연 그리고 어떤 점에서 특정한 '선택적 친화력'이 인식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경우 종교적 이념이 생활양식의 하부구조를 구성한다. 사실 일견 하등의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 이 범주 사이에 이처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진술일 따름이다. 인간의 문화적 삶에서는 내적·정신적 요소들과 외적·물질적 요소들 사이에 아주 다양한 관계가 성립한다. 즉 저해하는 관계, 중립적인 관계 또는 정초하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방적 관계나 상호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이처럼 경험적으로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다양한 양태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역사적 개연성에 대한 방법론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베버가 도입한 것이 바로 '선택적 친화력'인 것이다.

 

선택적 친화력이란 개념이 처음 사용된 곳은 화학이다. 화학자들은 이 개념으로 원소들 사이의 결합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다가 1809년에 출간된 괴테의 소설 『선택적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에 의해 인간 세계에 적용되었다. 베버는 바로 이것을 역사적 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사유에 도입했던 것이다.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옮긴이 해제 <종교 ·경제 ·인간 ·근대>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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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직무는 강제가 가장 적은 직무이다. 예지가 자기 힘에 맞춰서 욕망을 조절해 주는 자들에게는 그 예지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일까! 그보다 더 유용한 지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 한다.

 - 몽테뉴

 

 * * *

책읽기 혹은 책 구매에도 엄연히 '순위'가 있다는 걸 늘상 잊지 않도록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다그치기도 하는, 그런 곳이 다 있을까? 정말 있다. 바로 이곳 알라딘이다. 잊을 만하면 '결코 잊지는 말라'고 애써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게 상술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 '순위표'를 들여다보며 즐거워하거나 혹은 실망한다. 설마 거기에 분노하는 사람들까지야 없으리라 믿고 하는 얘기다.

'책읽기'를 둘러싼 (알라딘 내에서의) 제반 활동에 대한 '종합 명세서'는 아무래도 연말이 가장 알찬(?) 듯하다. 그렇다고 제 생일에 슬며시 내미는 중간 명세서가 그리 허접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말이 되기도 전에 뜬금없이 펼쳐보게 된 '중간 정산 내역'이 무려 16개 항목에 이른다. 그 가운데 내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항목 몇 가지만 '나'를 기준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싶다.

①  599권, 247,178페이지

 

대략 2003년에 알라딘에 둥지를 튼 셈 치고는 그리 많은 책을 산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사들인 책을 모조리 다 읽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름대로는 책을 사는 데 꽤나 신중한 편이어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잡이로 사들인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평균 쪽수가 412쪽에 이르는 점도 그리 기분나쁜 수치는 아니고.

 

 

② 8,380,120원, 7,530번째




책을 사들인 금액이 '많다'는 생각은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늘 적으면 적었지 많다는 쪽으로는 좀처럼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 책에 대해 지출하는 비용이라 여긴다. 그러니 저 금액에 대해서 내가 무슨 특별한 느낌이 들 리 있을까. 그런데 7,530번째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묘한 감정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1번째(전국 수석?)일 테고, 또 분명 어느 누군가는 100,000번째일 텐데, 각자 자신의 '순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궁금하다. 나는? 글쎄? 이 순위가 하필이면 왜 학력고사때 받아든 실망스러웠던 전국 석차와 비슷할까?


③ 50대, 1,494번째


나는 아직까지도 '50대'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책 구매 금액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노년의 주름살

우리의 심령은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보다 더 번거로운 폐단, 불완전과 질병에 매이기 쉬운 것 같다. 어리석고 노쇠한 자존심과 진력이 나는 잔소리, 사귈 수 없는 가시 돋친 성미, 미신, 그리고 사용할 기회도 없는데 재간에 관한 꼴같잖은 걱정 따위 말고도 더 많은 시기심과 부정과 악의를 발견한다. 노년은 우리의 이마보다도 정신에 더 주름살을 붙여 준다. 그리고 늙어 가며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심령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사람은 그 전체가 성장과 쇠퇴로 향해 간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④ 일산동구, 563번째


연령대별 분석에 뒤이어 지역별 분석까지 내놓으니 마치 '지역별 투표 성향'을 보는 듯하다. 어쨌든 내가 사는 동네라고 해서 다른 동네와 특별히 다를 건 없지 싶다.



⑤ 북플 마니아


북플 마니아에 대해서는 대체로 '신뢰도'를 매우 낮게 평가하는 입장이어서 뭐라 말하기 곤란한데, 유독 생명과학/심리학/정신분석학/뇌과학 분야에서 '한 손' 안에 든다고 한다. 내가 저런 분야의 책을 그토록 열심히 읽었었나 싶다.

 


⑥ 80세까지 1,590권


이번에 알게 된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다. 나는 대략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1,000권의 책도 읽기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굳이 자세히 따져보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보다도 '독서 의욕'이 차츰 떨어질 테고, 언젠가는 눈도 침침해 질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계속 책을 읽는다면 무려 1,59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고도 기쁘다. 아직도 늦지 않았구나, 앞으로 죽기 전까지 '이름만 들었던' 숱한 명저들을 차례차례 섭렵해보자, 이런 생각부터 앞선다. 알라딘이 아니라면 쉽게 내밀 수 없는 '잔존 독서량 예측'이 아닐 수 없다 싶다. 결론은 매번 뻔한 데도 이렇게 불쑥 내미는 명세서가 매번 궁금하니 나 원 참...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중에서

 

http://www.aladin.co.kr/events/eventbook.aspx?pn=150701_16th_records&custno=64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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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7-03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분석이십니다. 80세까지 쭈욱! 같이 읽어요^^

oren 2015-07-03 08:44   좋아요 1 | URL
보물선 님의 `명세서`는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님께서 80세까지 쭈욱 `지금처럼` 읽으시면 아마 100층도 쉽게 넘길 듯해요! 화이팅입니다.

2015-07-03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3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8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8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오오, 필멸의 존재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되돌아오는

이 지하 세계를 다스리시는 신들이시여. 거짓말과

애매모호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고

또 그대들이 허락해주신다면, 내가 이리로 내려온 것은

어두운 타르타라를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고, 메두사 같은 괴물의,

뱀들이 친친 감고 있는 세 개의 목에 사슬을 채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리로 온 것은 아내 때문입니다. 발에 밟힌 독사가

그녀에게 독을 퍼뜨려 그녀의 꽃다운 청춘을 앗아갔으니까요.

나는 참고 견딜 수 있기를 바랐고, 아닌 게 아니라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하나 아모르가 이겼습니다.

그분은 여기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상계(上界)에서는

잘 알려진 신이지요. 아마 여기서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옛날의 납치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아모르는 그대들도 맺어주었습니다. 공포로 가득 찬 이 장소들과,

이 거대한 카오스와, 이 광대한 침묵의 왕국의 이름으로 청하옵건대,

너무 일찍 풀린 에우뤼디케의 운명의 실을 다시 짜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대들에게 귀속됩니다. 잠시 지상에서

머문다 해도 머지않아 우리는 한곳으로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는 이곳으로 향하고,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거처이니

그대들이 인간의 종족을 가장 오랫동안 통치합니다.

그녀도 명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그대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내 아내에게 그런 특혜를 거절한다면 나는 단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죽게 되니 그대들은 기뻐하실런지요!"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 * *

 

어느날 느닷없이 뻥 터져나온 '신경숙 표절 사건'도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난 듯하다. 그동안 내가 이 사건을 바라보며 떠올린 '낱말들'만 여기에 주욱 나열하더라도 아마 몇 줄은 족히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나는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여러 글들을 틈날 때마다 제법 열심히 찾아 읽었다. 물론 내가 온갖 다양한 매체에 올라온 글들을 '심각한 이해당사자'가 된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살핀 건 아니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멀찍이 떨어져 이번 사건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구경꾼'의 심정일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번 일을 바라보며 떠올렸던 낱말들이라고 해봐야 다른 대다수 사람들의 마릿속에 떠오른 그것들과 그리 다를 리는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더럽고, 치사하고, 짜증나고, 한심스럽고, 참담하고, 어이없는' 그런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들, 가령 거짓말, 사기, 속임수, 분개, 오만, 몰염치... 와 같은 단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도 결국 그 오랜 유래를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숭이에서 진화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유달리 남의 흉내를 내는 데 타고난 소질을 발휘한다. 모방 본능은 사람의 본성 가운데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뿌리깊은 본능이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글쟁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몽테뉴가 이미 오래 전에 '인류의 모방 본능'에 대해 유난히 깊은 관심을 쏟은 끝에 그 점에 대해 아주 많은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 놓았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건 없다.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짐승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짐승이다. 과연 외부에 나타난 모습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서, 그것은 원숭이일 것이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사실 몽테뉴보다 조금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문학의 기원 또한 '모방'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명백히 밝혀 놓았을 정도이다. 훌륭한 역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인류 역사 발전의 근원적인 힘을 결국 '모방'에서 찾을 정도였다. 그러니 도대체 참을 수 없는 뿌리깊은 욕망인 '모방 본능'을 그 누가 무작정 탓할 수가 있겠는가.

 

모방한다는 것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중에서 


그런데 다른 일도 흔히 그렇지만 '본능' 또한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하긴 인간의 욕망 가운데 타고난 본능대로 몸을 움직일 경우 대략 낭패를 보지 않을 욕망이 과연 얼마쯤이나 있을까마는.

 

어쨌든 우리 모두는 결국 필멸의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결국 '어두컴컴한 지하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떠올리기조차 싫어하는 그 지하세계를 자발적으로 애써 찾아간 인물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문학 역사상' 아주 걸출한 주인공들 가운데 아주 가끔씩 나타났다. 굳이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가 쓴 위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이었던 오뒷세우스나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그런 인물들의 '중차대한 임무'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그들의 절박한 얘기조차 우리들 가슴에는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오르페우스이다. 노래 하나로 온 우주를 감동시켰다는 전설의 가인 오르페우스만큼 '절절한 심정'으로 지하세계를 자발적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인물이 또 있었을까.

 

물의 요정들을 데리고 풀밭을 거닐다가 뱀 이빨에 복사뼈를 물려 꽃다운 나이에 덜컥 딴 세상 사람이 되고 만 아내 에우뤼디케의 신랑이 바로 전설의 가인(佳人) 오르페우스였다. 아내를 잃고 살아갈 의욕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린 오르페우스에게 남겨진 일이란 오로지 '저세상 끝까지 다 뒤져서라도' 기어코 아내를 다시 찾아내는 일뿐이었다.

 

에우뤼디케를 데려오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부분)
장 레스투(Jean Restout), 18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그가 저승에 당도하자말자 '사랑스럽지 못한 왕국'을 다스리는 명부의 신들에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히는 대목이 자못 인상적이다. '거짓말과 애매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자신은 바로 아내 때문에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마다않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도대체 얼마나 '거짓말과 애매한 말'이 많았으면, 그래서 지하 세계의 신들조차도 허구헌 날 지겹도록 들어야만 했을 지 모를 바로 그 '거짓말과 애매한 말'을 자신은 결코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부터 먼저 꺼내는 오르페우스를 보라.

 

'말만 하면 곧바로 시가 되는 바람에' 수입이 좋은 변호사 직업조차 포기할 만큼 타고난 시인이었던 오비디우스조차도 '남을 속이는 거짓말'이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의 입에서 떨어지기 힘든 지를 결코 모르지 않았다. 오르페우스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아내인 에우뤼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찾아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혹여 '거짓말과 애매한 말'이 끼어들어 (신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망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조바심을 내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신화에서 현실로 돌아오자. 신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는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될 존재'임엔 다르지 않다. 그리고 누구라도 살아가는 동안 얼마쯤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그게 심각한 거짓말이든 사소한 거짓말이든 별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그 거짓말을 얼마쯤 할 수밖에 없을 당시의 '상황'이 문제가 되는 듯하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속담을 꺼낼 필요까지도 없다. 백주대낮에,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자신이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도 남들이 전부 바보가 되어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이 결국 그렇게 풀리고 나면 그 자신은 아마도 평생을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심지어는 죽고 난 이후까지도 '영원히'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자주 거짓말쟁이들의 말을 듣고 살아야 할까. 그건 아마도 '허황된 환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오만과 허영'이 그런 거짓말을 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종용하기 마련일 테고 끝내 사람들은 나약하게도 거짓말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명망있던 사람들이 '거짓말' 때문에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줄기세포 가짜 논문으로 온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립 서울대 박사와 숨겨놓은 아들을 두고 유전자 검사까지 자청했던 전직 검찰총장은 '그날 이후'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행방조차 묘연할 정도이다.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은 결코 있지도 않았던 모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우매한 거짓말쟁이,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높은 신분인 체하고 기품 있는 체하는 난봉꾼(coxcomb)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은 갈채를 받고 있다는 공상에서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의 허영은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속아 넘어갈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황된 환상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큰 감탄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료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보이고 있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들을 본다고 그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나약함과 우매함 때문에 자신의 눈을 내부로 돌리지도 못하고, 또한 만약 진실이 알려진다면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멸스런 인간으로 보일 것인지 그들의 양심이 말해 줄 그런 경멸스런 관점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중에서

 

경제학자보다는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훨씬 더 명망이 높았던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도덕 감정'에 대해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인물이다 .'인간의 유래와 진화'에 대해 불멸의 업적을 남긴 찰스 다윈조차도 그에게 한 수 배웠을 정도이다. 그런 아담 스미스가 '수치심'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형태로 끝없이 타오를 '보복의 화염'을 놓쳤을 리는 만무하다.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

가장 그럴 듯한 상류사회의 모든 화려한 허식 속에서도, 돈에 매수된 고위 인사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비열한 아첨 속에서도, 일반 민중들의 어리석지만 천진난만한 환호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정복과 전쟁에서의 승리로 교만해진 가운데서도, 내심에서 은밀하게 솟아나는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은 그를 휩싸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예가 사방팔방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그 자신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둡고 추악한 불명예가 그를 바짝 뒤쫓고 있으며 언제라도 그를 덮치려고 하는 것처럼 느낀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중에서

 

어쨌든 '거짓말과 애매한 말'로 남을 속이는 '배반과 기만'은 참으로 몹쓸 악덕이다. 그에 따른 악영향 또한 너무 광범위하다. 그래서 자연히 '치욕'이라는 관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핑커 또한 인간 심리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거짓말쟁이를 구별하는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에게 치명적으로 나쁜 것이었던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


 - 아담스미스, 『도덕감정론』 중에서


 

오래 전에 진작 내려졌어야 마땅할 어느 작가의 작품에 대한 '표절 확진 판정'이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을 끌고 나서도 여전히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그 작가는 도대체 너무나도 뻔한 사실을 두고도 그토록 애써 '진실'을 감춘 채 앞뒤조차 맞지 않는 거짓말을 태연히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거짓말쟁이들을 넓은 아량(?)으로 계속 용서해줘야 할까.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가짜'에 대한 판별이 이토록 어리숙하고 흐리멍덩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현애살수(懸崖撒水)라는 말이 있다. 벼랑(崖)에 매달려(懸) 잡고 있는 손(手)을 놓는다(撒)는 뜻이다. 찾아보니 송(宋)나라 야부도천(冶父道川) 선사의 게송(偈頌)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사람이 어떻게 '붙잡은 나뭇가지'를 손에서 놓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방하착(放下着)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꾸로 '단축'하고 만다. 마치 흉내내기를 몹시도 좋아하는 원숭이가 호리병 속에 담긴 먹이를 손에 움켜쥔 채 '아침이 될 때까지' 손을 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알제리 농부에게 붙잡히는 꼴과도 닮았다. 스스로도 표절한 사실조차 모른다고 발뺌을 하는 작가를 보니 자꾸만 흉내내기를 몹시도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손에 움켜쥔 먹이는 끝내 놓치기 싫어하는 우리의 머나먼 옛 조상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느낌을 좀처럼 떨쳐내기 어렵다.

 

원숭이의 욕심

수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을 내버리는 방식은 원숭이의 욕심을 연상시킨다. 알제리의 카바일 족(주로 알제리 북부의 해안 산악 지대에 사는 부족-역자주) 농부가 호리병을 나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놓고 그 안에 약간의 쌀을 넣어두었다. 호리병의 주둥이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다. 원숭이는 밤에 나무로 와서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쥔다. 쌀을 쥐고 있어서 손이 빠지질 않지만 원숭이에겐 쌀을 놓고 손을 뺄 지혜가 없다. 그렇게 해서 원숭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거기에 서 있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


 - 새뮤얼 스마일즈,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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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무거워질까 두려워 끝내 이 글에 담아내지 못한 책 속 구절들)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트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737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손에 든 무기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
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유감이오, 친애하는 선생. 정말 유감이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건 원칙의 문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오.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당신은 정말 멋진 소장품들을 갖고 있소. 그러니 이번엔 솔직하게 당신이 속았다는 걸 인정해야 하오. 난 작품의 진위 문제에 대해 타협 같은 건 하지 않소. 속임수와 거짓된 가치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확실성이 있다면 걸작의 그것 아니겠소. 우리는 온갖 위조범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야 하오. 내게 예술작품이란 신성한 거요. 나에게 작품의 진위는 종교라고 할까 ······. 당신의 반 고흐 작품은 가짜요. 그 불행한 천재는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배반을 맛보았소. 적어도 사후에는 우리가 그를 배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잖소."

"말 다했소?"

 

"놀라운 일이오. 당신처럼 명망 있는 사람이 내게 그런 조작에 공범이 되어달라고 하다니······."

 - 로맹 가리,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가짜>  중에서

 

 

오만(傲慢)한 사람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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