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직무는 강제가 가장 적은 직무이다. 예지가 자기 힘에 맞춰서 욕망을 조절해 주는 자들에게는 그 예지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일까! 그보다 더 유용한 지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 한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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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혹은 책 구매에도 엄연히 '순위'가 있다는 걸 늘상 잊지 않도록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다그치기도 하는, 그런 곳이 다 있을까? 정말 있다. 바로 이곳 알라딘이다. 잊을 만하면 '결코 잊지는 말라'고 애써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게 상술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 '순위표'를 들여다보며 즐거워하거나 혹은 실망한다. 설마 거기에 분노하는 사람들까지야 없으리라 믿고 하는 얘기다.
'책읽기'를 둘러싼 (알라딘 내에서의) 제반 활동에 대한 '종합 명세서'는 아무래도 연말이 가장 알찬(?) 듯하다. 그렇다고 제 생일에 슬며시 내미는 중간 명세서가 그리 허접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말이 되기도 전에 뜬금없이 펼쳐보게 된 '중간 정산 내역'이 무려 16개 항목에 이른다. 그 가운데 내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항목 몇 가지만 '나'를 기준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싶다.
① 599권, 247,178페이지
대략 2003년에 알라딘에 둥지를 튼 셈 치고는 그리 많은 책을 산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사들인 책을 모조리 다 읽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름대로는 책을 사는 데 꽤나 신중한 편이어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잡이로 사들인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평균 쪽수가 412쪽에 이르는 점도 그리 기분나쁜 수치는 아니고.
② 8,380,120원, 7,530번째
책을 사들인 금액이 '많다'는 생각은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늘 적으면 적었지 많다는 쪽으로는 좀처럼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 책에 대해 지출하는 비용이라 여긴다. 그러니 저 금액에 대해서 내가 무슨 특별한 느낌이 들 리 있을까. 그런데 7,530번째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묘한 감정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1번째(전국 수석?)일 테고, 또 분명 어느 누군가는 100,000번째일 텐데, 각자 자신의 '순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궁금하다. 나는? 글쎄? 이 순위가 하필이면 왜 학력고사때 받아든 실망스러웠던 전국 석차와 비슷할까?
③ 50대, 1,494번째
나는 아직까지도 '50대'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책 구매 금액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노년의 주름살
우리의 심령은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보다 더 번거로운 폐단, 불완전과 질병에 매이기 쉬운 것 같다. 어리석고 노쇠한 자존심과 진력이 나는 잔소리, 사귈 수 없는 가시 돋친 성미, 미신, 그리고 사용할 기회도 없는데 재간에 관한 꼴같잖은 걱정 따위 말고도 더 많은 시기심과 부정과 악의를 발견한다. 노년은 우리의 이마보다도 정신에 더 주름살을 붙여 준다. 그리고 늙어 가며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심령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사람은 그 전체가 성장과 쇠퇴로 향해 간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④ 일산동구, 563번째
연령대별 분석에 뒤이어 지역별 분석까지 내놓으니 마치 '지역별 투표 성향'을 보는 듯하다. 어쨌든 내가 사는 동네라고 해서 다른 동네와 특별히 다를 건 없지 싶다.
⑤ 북플 마니아
북플 마니아에 대해서는 대체로 '신뢰도'를 매우 낮게 평가하는 입장이어서 뭐라 말하기 곤란한데, 유독 생명과학/심리학/정신분석학/뇌과학 분야에서 '한 손' 안에 든다고 한다. 내가 저런 분야의 책을 그토록 열심히 읽었었나 싶다.
⑥ 80세까지 1,590권
이번에 알게 된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다. 나는 대략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1,000권의 책도 읽기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굳이 자세히 따져보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보다도 '독서 의욕'이 차츰 떨어질 테고, 언젠가는 눈도 침침해 질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계속 책을 읽는다면 무려 1,59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고도 기쁘다. 아직도 늦지 않았구나, 앞으로 죽기 전까지 '이름만 들었던' 숱한 명저들을 차례차례 섭렵해보자, 이런 생각부터 앞선다. 알라딘이 아니라면 쉽게 내밀 수 없는 '잔존 독서량 예측'이 아닐 수 없다 싶다. 결론은 매번 뻔한 데도 이렇게 불쑥 내미는 명세서가 매번 궁금하니 나 원 참...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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