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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프롤로그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순식간에 일명 ‘듣보잡’ 작가가 되어버렸던 미시마 유키오. 그래도 이 사건으로 인해 일문학의 매우 중요한 한 작가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책과 친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를 알게 됐으니 말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매우 일본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소수의 작품만으로도 일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작가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 중에서 <금각사>는 단연 으뜸이지 않을까?
사실 내가 <금각사>를 읽었던 건 2008년 남대문 방화사건 직후였다. 토론 주제도서이기도 했지만, 시사적 이슈에 부합하는 타이밍이 절묘했다. 정말 감명 깊게 읽었고, 이후 지인들에게 최고의 소설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다. (그래서 <금각사>를 읽은 분들이 꽤 된다!)
그리고 저번 달 독서 모임 주제 도서로 다시 올라와 3번 읽게 되었다. 이번에 보니, 이전에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남천참묘의 공안’이 <금각사>의 주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메타포임을 다시금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전에도 이 부분을 <금각사> 이해를 위한 하나의 논제로 생각하고 있긴 했었지만, 그리 깊게 생각하고 정리하지 못했다. 도처에 넘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더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가시와키와 미조구치가 보여주는 세계관의 대립도 한몫했다.
그런데 3번째 읽으면서, 나는 왜 작가가 남천참묘의 공안을 전체 플롯 구조에 적절하게 숨겨놨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공안의 내용은 미시마 유키오가 <금각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미(美)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적 답변이었다.
다음에 정리한 내용은 내 마지막 추론에 대한 근거라 할 수 있겠다.
1
이 소설에서 남천참묘의 공안은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에 각각 3번에 걸쳐 나온다. 그런데 이는, 주인공이 금각사를 방화할 수밖에 없는 심경의 변화를 미학적 입장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금각사와 각 인물들 간에 얽힌 거대한 복합적 구조물로써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미학적 입장이 무엇인지 이 부분을 테마로 작품을 음미하는 것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대라면 바로 미(아름다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남천참묘의 공안은 소설 속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라 할 수 있겠다.
2
1945년 8월 15일 패전일. 천황의 안전을 기원하고 전몰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긴 독경이 끝난 후 미조구치를 비롯한 절의 승려들은 노사의 방으로 불려가 강화를 듣는다.(p70) 노사가 선택한 공안(公案)은 무문관 제14칙의 남천참묘였다. 남천참묘란 벽암록에도 제63칙 ‘남천참묘아’, 제64칙 ‘조주두재초혜’의 둘로 나와 있다. 예로부터 난해하기로 소문난 공안이다.
<남천참묘의 공안>
절간 승려들이 모두 나와서 풀베기를 하고 있을 때, 이 한적한 산 속 절간에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 신기한 느낌에 모두가 달려들어 이것을 사로잡았으나 그만 동서 양당의 다툼이 벌어졌다. 양당은 서로가 이 새끼 고양이를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다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남천 스님은 당장에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풀 베는 낫을 들이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면 살려 줄 것이고, 구하지 못하면 즉각 베어 버리겠다.” 중들은 대답이 없었다. 남천 스님은 새끼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수제자인 조주가 돌아왔다. 남천 스님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고는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조주는 곧바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올린 채 나가 버렸다. 남천 스님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아 오늘 네가 있어 주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도 목숨을 건졌을 텐데.” |
그 제1. 노사의 해석 (p71)
남천 스님이 고양이를 벤 것은 자아의 미망을 끊어 망념과 망상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정한 실천으로 고양이의 목을 자르고, 일체의 모순과 대립 그리고 자타의 확집을 끊은 것이다. 이것을 살인도라 일컫는다면, 조주의 그것은 활인검이다. 흙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신발을 무한한 관용에 의하여 올려놓음으로 해서 보살도를 실천한 것이다. (노사는 이렇게 설명하고는 일본의 패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이 없이 강화를 끝마쳤다. 어째서 패전한 이날에 특별히 이 공안을 선택한 것인지 전혀 몰랐다.)
그 제2. 가시와키의 해석 (pp152-153)
(가시와키가 미조구치에게 퉁소를 준 답례로 금각사의 꽃을 꺾어다 줄 것을 원하자, 미조구치는 꽃을 꺾어 가시와키의 하숙집을 찾아간다. 대화를 하는 중에 미조구치는 이 남천참묘의 공안에 대한 가시와키의 해석을 유도한다.)
그 공안은 말이야, 그건 사람의 일생에 갖가지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 몇 번이고 나타나는 거지. 그건 기분 나쁜 공안이야. 인생의 전환점에서 마주칠 때마다 똑같은 공안이 모습도 의미도 바뀌어 있거든. 남천 스님이 베어버린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지. 그 고양이는 아름다웠단 말야, 알아?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지. 눈은 금빛에 털에는 윤기가 흘렀고, 그 작고 부드러운 몸에 이 세상의 모든 향락과 미가 용수철처럼 구부려진 채 간직되어 있었지. 고양이가 미의 결정체였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간과하고 있지. 바로 나를 제외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 고양이는 느닷없이 숲 속에서 뛰쳐나와 마치 고의적인 듯이 상냥하고 교활한 눈빛을 반짝이다가 붙잡혔지. 왜냐하면 미는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미라는 것은 충치와도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하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더 이상 아픔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치과의사에게 뽑아 달라고 하지.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정말로 같은 것일까?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 외부 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놈이 존재하는 근거는 뭘까? 그 근거는 나의 내부에 있었을까? 하여튼, 나에게서 뽑혀 나와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이놈은 이건 분명 별개의 것이지. 결코 그것이 아니야.’ 알겠나? 미란 그런 거야. 그러니까 고양이를 벤 것은 마치 아픈 충치를 빼내서 미를 척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것이 최후의 해결책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미의 뿌리는 근절되지 않았고 설령 고양이는 죽었어도 고양이의 아름다움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토록 해결이 안이했던 것을 풍자해서, 조주는 그 머리에 신발을 올려놓았지. 그는 말하자면, 충치의 아픔을 참는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중략> 나는 다시 되물었다.
미조구치: 그러면 너는 어느 쪽이냐? 남천 스님쪽이냐 조주냐?
가시와키: 글쎄, 어느 쪽일까. 지금으로서는 내가 남천이고 네가 조주지만 언젠가는 네가 남천이 되고 내가 조주가 될지도 몰라. 이 공안은 그야말로 ‘고양이 눈처럼’ 변하니까. (결국 미조구치는 남천이 되어 금각사를 불태우게 된다.)
그 제3. 가시와키의 심화된 해석;
인식 vs 행동 (조주의 행위에 대한 해석) (pp226-227)
(녹원사로 빌린 돈을 받으러 온 가시와키는 묘한 웃음을 흘리는 미조구치의 이상한 환대에 불편하게 반응하면서 미조구치의 방으로 안내된다. 거기서 가시와키는 미조구치에게 핵심적인 몇 가지 말을 하는 중 다시 남천참묘의 해석에 대한 부분을 들먹이면서 미조구치가 앞으로 행하게 될 방화의 예언적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다. 가시와키가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인식이라는 말에 대해서 미조구치는 강하게 반발하며,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행위라고 말한다. 그 말에 대한 반응이 바로 남천참묘의 변화된 해석이다. pp226-227)
“언젠가 말했던 남천참묘의 그 고양이 말이야. 비길데 없이 아름다운 그 고양이 말이야. 양쪽 중들이 다툰 것은 각자의 인식 속에서 고양이를 보호하여, 기르고, 편히 쉬게끔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남천 스님은 행위자니까, 단숨에 고양이를 베어 버렸지. 나중에 온 조주는 자신의 신발을 머리 위에 올렸지. 조주가 하려던 말은 이거야. 역시 그는 미가 인식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개개의 인식, 각각의 인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인식이란 인간의 바다이기도 하고, 인간의 벌판이기도 하며 인간 일반의 존재양식이지. 그는 그것을 말하려 했다고 생각해. 너는 이제 와서 남천이 되겠다는 거니? 미적인 것,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 그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인식에 위탁된 나머지 부분, 잉여 부분의 환영이야. 네가 말하는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의 환영’이야. 인식에 있어서 미는 결코 위안이 아니라구. 여자이고 아내이기도 하겠지만 위안은 아니야. 하지만 결코 위안이 아니면서 미적인 것과 인식과의 결혼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지. 덧없는 물거품과도 같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지만 무언가가 생겨나지. 세상에서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그거야.”
이 말에 주인공 미조구치는 드디어 말한다. “미는······미적인 것은 이미 나에게는 원수야.” (p227)
에필로그
결국, 남천참묘 공안의 해석으로부터 주인공 미조구치는 인식가에서 행동가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조구치는 가시와키의 말대로 인식자, 줄곧 조주의 역할자였다. 하지만 여자와의 관계에까지 간섭하고 있는 ‘금각의 존재(=미의 화신)’로 인해 미조구치는 지치고 점점 변해간다. 급기야 “미는······미적인 것은 이미 나에게는 원수야.” (p227)라고까지 말한다. 이로부터 미조구치는 행동가인 남천의 역할 쪽으로 급선회한다. 남천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양이를 죽였듯, 미조구치는 자신에게 있어 절대 미인 금각을 방화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안다. 미조구치가 금각을 불태웠을지언정 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가시와키가 공안의 해석(조주의 행위)으로부터 나온 ‘미는 충치같은 거야’라는 말이 작가 미시마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해주고 싶어 했던 ‘미의 본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덧]
토론회에서 오고간 얘기들을 듣고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아무도 이 공안을 주목하지 않아 좀 아쉬웠다.
그리고 알라딘이고 예스고 무슨 리뷰를 보던지 간에 이 작품에서 이 공안을 언급한 리뷰를 본 적이 없다. 사실 봤다면 애써 쓰는 수고를 덜었을 것이다. 물론 <금각사>를 보는 시각을 여럿이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부분 언급이 없어 리뷰로 남겨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