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에 대한 추억......


 














30년 만에 다시 읽는 《몽테뉴 수상록》이 너무 재미있다. 오래 전에는 그의 에세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작품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채 그 책을 읽었으나,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보니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어느덧 그다지 낯설지 않게 되어 옛날에 그의 글을 읽을 때보다 여러 인물들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등장하는 무수한 고대의 유명 인물들 가운데 '그들이 쓴 작품'을 내가 직접 읽어본 경우가 그리 드물지가 않다는 건 내가 나이를 먹은 탓도 있겠지만 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몽테뉴의 글을 오래 전에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여러 인상들이 나에게 꽤나 강렬했던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몽테뉴의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그들이 남긴 작품을 내가 직접 읽어본 걸로 따지자면 대략 호머,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카이사르,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단테 정도이고, 여태까지도 몽테뉴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쓴 원작을 직접 읽어보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느껴지는 인물들은 호라티우스, 플루타르크, 루크레티우스, 페트라르카 등이다.

그런데 1,33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절반쯤 읽으면서 마주친 여러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재미나는 구절들 가운데 특히나 내게 웃음과 함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은 '몽테뉴가 키케로를 골리는' 부분이다. 사실 '수상록' 속에는 키케로가 한 말을 인용한 대목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점만 보더라도 몽테뉴가 키케로를 상당히 좋아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키케로를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해' 하며 틈만 나면 그를 자꾸만 쿡쿡 찌르고 꼬집어 주고 싶어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인 것 같다. 나는 그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그 두 인물이 직접 한 번 만나서 대포라도 한잔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사실은 몽테뉴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이겠지만) 얽힌 얄궂은 감정을 좀 풀었으면 싶은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몽테뉴가 키케로에게 일침을 가하는 따끔한 문장들을 읽으며 어딘지 모르게 '공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대리만족 비슷한 감정을 슬쩍 맛보게도 된다.

그렇지만 어쨌든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키케로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는 수많은 자식들(?)을 거느린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홉스, 몽테스키외, 볼테르, 칸트, 헤겔,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를 거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물들이 키케로와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케로의 변론' 덕분에 유명세를 탄 인물 가운데 앙리 베르크손에 얽힌 일화도 재미있다.

베르크손이 고등사범학교에 '3위'로 입학했을 때 동기생 가운데는 프랑스 사회주의를 이끈 장 조레스와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도 있었다. 입학 당시 수석은 조레스의 차지였다. 조레스와 베르크손 사이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는 베르크손의 면모를 눈앞에서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교수가 두 학생에게 한 명은 망실된 키케로의 변론을 재구성하게 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그것을 반박하게 했다. '조레스가 먼저 그의 유창한 언술로 온갖 미사여구와 비유와 이미지를 섞은 웅변을 토하며 키케로를 대신해 변론했을 때,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반론자가 일어나 아무런 웅변적 음율도 없이 차분히 상대방의 주장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는데, 그 타격점이 너무나 정확하고 그 표현의 선택이 너무나 섬세하며 폐부를 찌르는 것이어서 키케로의 대변자가 세운 대건축물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장내에는 정적이 감돌았으나, 내심으로는 모두 그 논리의 힘과 사유의 섬세함을 경탄했다'고 한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리뷰 중에서 인용)



몽테뉴의 얘기를 극히 일부만이라도 여기에 덧붙이지 않으면 이 글은 아무런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 * *

내가 빌려다 쓰는 것

나는 글을 좀 읽었다고는 하지만 기억력은 아주 약한 사람이다. ······ 그러니 내가 빌려다 쓰는 것을 가지고 내가 취급하는 문제를 빛내 볼 거리를 택할 줄 아는가를 살펴볼 일이다. 나는 어법이 서툴러서, 때로는 내 지각이 빈약하여 자신이 잘 말하지 못할 것을 남을 통하여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빌려 온 것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저울질한다. 수량으로 가치를 올릴 생각이었던들 몇 갑절은 내놓았을 것이다. 내가 차용해 온 곳은 모두가 옛날의 너무나 유명한 이름들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판단력

내 판단력은 내 스승이며 지도자로 생각하는, 그렇게 많은 다른 유명한 분들이 판단한 바의 권위에 대항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내 판단이 실수한 것으로 만족한다. 판단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내 이해력이 그 속까지 침투해 보지 못해서 피상적으로 머무르거나 또는 가짜 광채에 현혹된 것이라고 자기를 책망한다. 내 판단력은 다만 동요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해력이 박약한 바는 기꺼이 인정하며 고백한다. 내 판단력은 그것이 파악한 개념이 그 자체에 지시하는 겉모습에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허약하고 불완전하다.

그들은 단 한 편의 희극에 보카치오의 이야기 대여섯 편을 합쳐 놓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재료를 한 편에 실어 놓는 것은 자기 고유의 묘미로 작품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지할 본체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구상만으로는 우리의 흥미를 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나마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 작가를 두고 보면 일은 반대로 나타난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료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말투의 얌전하고 애교 있는 맛에 이끌린다. 그는 어디서나 재미난다.

청명하기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                                                                                       (호라티우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나는 고대의 우수한 시인들이 뽐내거나 따지고 파고드는 일을 피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스페인이나 페트라르카식의 높은 음조의 광상적 노래뿐 아니라, 다음 세기에 오는 모든 시적 작품의 장식을 이루는, 좀더 보드랍고 조심스런 익살까지도 피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명한 비평가로서 이 고대 시인들에게 흠을 잡는 이가 없고, 마르티알리스의 시구의 톡 쏘는 맛보다도 카툴루수의 풍자시에 연마되고 줄곧 상냥하고 화창하게 아름다운 맛을 비길 바 없이 감탄하지 않는 자 없다. 마르티알리스가 자신에 관해서 "그는 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작품 재료는 재주가 있는 기질이 대신된 것이다 "라고 말하듯, 내가 금방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먼저 말한 작가들은 흥분하지도 분발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감명을 준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웃음을 찾아 낸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그 다음 작가들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재주가 부족하기에 더욱 육체가 필요하게 된다, 그들은 다리로 걸어갈 만큼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타야만 한다.



 

풋내기들

그것은 마치 무도회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귀족들의 점잖은 행세를 모방할 수 없으니까, 무도 학교를 세워 가면서 배운 위험한 뜀박질이나 익살스런 동작의 색다른 잡술을 가지고 장기를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정식 무도회에서 부인들이 천연스런 걸음으로 순진한 자세와 타고난 우아미를 보여 주기만 해도 되는 것을, 몸뚱이를 비꼬아 뒤흔드는 무도회에서는 그녀들의 자태를 값싸게 보여 준다. 나도 역시 본 일이지만, 탁월한 배우들은 일상적인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용모로도 그들이 예술이 줄 수 있는 모든 쾌감을 주는 데 반해서, 풋내기들은 공부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괴상하게 입고는 우리를 웃기려고 동작을 거꾸로도 하고, 얼굴을 망측하게 찌푸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아에네이스》와 《광분하는 롤랑》을 비교해 보면 어느 경우보다도 더 잘 이해가 된다. 전자는 확고하게 날개를 활짝 펴서 높게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 짧은 거리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 못할까 봐 밭이랑마다 내려서 쉰다.




 

플루타르크와 세네카

플루타르크의 《소품집》과 세네카의 《서한집》등이 그렇다. 이 《서한집》은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문장이다. 내가 이 공부를 시작하는 데는 큰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덮어 둔다. 왜냐하면 이 문장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은 대부분의 사상이 유익하고 진실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같은 세기에 출생하였고, 둘 다 로마의 두 황제의 사부였으며, 외국에서 들어왔고, 다 부유하였고 세력도 누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철학의 진수를 온당한 방식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플루타르크는 더 고르고 꾸준하며, 세네카는 더 파동이 있고 잡다하다. 세네카는 힘들고 굳어지며 긴장해서 허약과 공포와 못된 욕망에 대항해서 도덕을 무장시킨다. 플루타르크는 이런 성질의 영향을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보조를 서두르거나 이런 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경멸하는 것 같다. 플루타르크의 사상은 플라톤적이고 순해서 시민 생활에 조화될 수 있는데, 세네카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받아서 일반의 습관과는 융화되지 않으나 내 의견으로는 개인 생활에 더 편리하고 견실하다. 세네카의 경우는 그 시대 황제들의 포학을 좀 옹호하는 것 같다. 그가 카이사르 살해범들의 장한 거사를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강제당한 판단으로 보인다. 플루타르크는 모든 면에 자유롭다. 세네카는 풍자와 재기에 충만하고, 플루타르크는 사물의 지식이 풍부하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그는 우리를 지도한다. 세네카는 우리를 밀어 보낸다.

키케로로 말하면, 그의 작품들 중 내 목적에 소용될 수 있는 것은 특히 도덕 철학을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진실을 고백한다면(사실상 이미 건방진 한계를 넘은 바에 이것을 억제할 수도 없다), 그의 글 쓰는 방식이 내게는 지루하게 보이며 다른 점도 그렇다. 서문이나 정의·구분·어원 따위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너무 긴 때문에 문장이 생기를 잃고 내용이 질식되고 있다. 한 시간 동안이라도 그를 읽는 것이 내게는 힘든 일이지만, 거기서 진짜 정수를 뽑아서 보아도 대개는 바람밖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그의 사상에 필요한 논법이나 내가 찾고 있는 요점에 직접 관계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웅변가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이니, 이런 논리학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절차는 못마땅하다. 나는 마지막 요점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이나 탐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을 분석해 갈 필요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지탱해 나를 가르쳐 줄 진실하고 견고한 이치를 찾고 있다. 문법상의 미묘한 점이라든지, 말과 논법의 교묘한 구조 같은 것은 필요없다. 나는 가장 심각한 의문점에 첫 공격을 가하는 사색을 요구한다, 그의 문장은 뚝배기 주위를 돌다가 기운이 빠진다. 그런 수작은 학교나 재판정이나, 설교단에 맞는 일이다.

나는 사람이 주의를 끌려고 포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사령처럼, "내 말 들으시오!" 하고 5번이나 고함지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이런 것 모두가 내게는 쓸데없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다. 내게는 미끼도 양념도 필요치 않다. 나는 날것으로도 잘 먹는다. 이런 준비와 서곡으로는 내 식욕이 당기게 하기는커녕 거기 물려서 입맛을 잃게 만들어 놓는다.



 

브루투스의 경우

나는 브루투스가 도덕에 관해서 쓴 저작이 소실된 것을 수백 번은 애석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실천을 잘할 줄 아는 인물의 이론을 알아두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 나는 차라리 그가 전투한 다음 날 자기 군대에게 해 준 언행보다, 전투하기 전날 자기 천막 속에서 친한 친구 하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하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그가 자기 사무실이나 방에서 하던 일을, 그가 광장이나 원로원에서 하던 일보다 더 알고 싶다.



 

키케로의 경우

키케로의 경우, 나는 그가 학문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탁월한 점이 적었다고 보는 일반의 판단을 따른다. 그는 성질이 호탕하고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처럼 생긴 뚱뚱한 농담꾼들은 흔히 그렇다. 그러나 그가 마음이 허약하고 허영된 야심을 가졌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뿐더러 나는 그가 어떻게 자기 시를 세상에 발표할 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변명해 줄 것이 없다. 시구를 잘 못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불미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그의 이름의 영광과는 당치 않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판단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의 웅변은 전혀 비겨 볼 거리가 없다. 그에게 대응할 사람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小) 키케로는 이름 하나밖에 그 부친을 닮은 점이 없었고, 아시아에서 군지휘관이었다. 어느 날 그가 베푼 연회석에 여러 손님들이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 카에스티우스라는 자가 유력자들의 공적 연석에 잘 끼어드는 식으로 식탁의 말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키케로는 자기 부하 하나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어서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생각이 딴 데 있어 대답하는 말을 잊어버리는 자가 그렇듯, 그는 다음에도 두서너 번 이것을 다시 물었다. 하인은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수고를 덜 겸, 전부터 그에게 알려 주려고 하던 터라, "이 자는 자기 웅변에 비해서 대감님 조상대에서의 웅변이 대단할 것 없다고 말하는 것을 누군가 말씀 드린 바로 그 카에스티우스입니다"라고 말했다. 키케로는 여기에 분개해서 이 가련한 카에스티우스를 잡아들이게 명령하고, 자기 앞에서 실컷 매질하게 하고 "고약하게 공손한 손님이로군" 하였다.



 

esse videatur

모든 점을 참고해 보고, 그의 웅변을 비길 바 없는 것으로 평가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웅변에 흠이 있는 것을 간과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저 위대한 브루투스도 그의 것을 '부서지고 허리 부러진' 웅변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세기와 가까운 시대의 웅변가들도 역시 그가 문장의 끝에 붙이는 기다란 시가에 다는 운을 각별히 유의해서 집어넣는 버릇을 꼬집으며, esse videatur(그런 듯싶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지적하였다. 나로서는 장단격으로 짧게 떨어지는 음절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드물기는 하지만 음절의 수를 가끔 뒤섞는 일이 있다. 나는 그의 문장에, "나로서는 늙기 전에 늙는 것보다는 늙고 나서 오래 있지 않는 편이 낫다"(키케로)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중간 것들

······ 진실로 탁월한 역사가들은 알아 둘 만한 사실을 골라 낼 능력을 가지고, 두 가지 보도 중에서 더 진실한 것을 선별할 수 있으며, 군주들의 사정이나 그들의 기분에 관해서 의향을 결론 짓고 그들에게 맞는 말을 시키고 있다. 그들이 생각에 따라 우리의 신념을 조절하는 권한을 갖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두 부류의 중간 것들은(이것이 가장 보통이지만) 모든 것을 벌여 놓는다. 그들은 우리가 씹을 것을 대신 씹어 준다.



 

풋내기들

전쟁에서 풋내기들이 위험한 지경이나 아무 잘못 없는 숫자에 몸을 던지며 큰 코를 다친 다음에야 그만두는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전투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광의 갈망과 첫 번째 승리의 희망에
유혹되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의 말

지나간 행복의 추억은 고통을 배가한다.                                                                            (단테의 시 개작)

철학이 주는 이 충고로 추억 속에다 지나간 행복만을 담아 두고, 우리가 겪은 불쾌한 일을 지워 버리라는 것은 마치 망자의 기술이 우리의 권한 안에 있는 것 같은 말이니, 다 똑같은 수작이다. 이것은 또 우리를 한층 더 못나게 만드는 충고이다.

지난날 불행의 추억은 감미롭다.                                                                                                   (키케로)

운명과 싸울 수 있게 내 손에 무기를 쥐어 주어야 하며, 인간의 모든 역경을 발밑에 유린해 버리도록 내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 주어야 할 철학이 어째서 물러빠지게 이 비겁하고도 꼴사나운 계책으로 나에게 숨을 구멍만 찾아 다니게 하려는 것인가? 기억력은 우리가 택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 준다. 참으로 무엇을 잊어버리고 싶은 욕망만큼 그것을 우리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넣은 것이란 없다. 어떤 사물을 잃어버리고 축원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길이 새겨서 잘 보존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우리의 불행을 영원한 망각 속에 매장하고, 번영하던 시절의 유쾌하고 감미롭던 추억을 환기시킴은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키케로)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원치 않는 때에도 내 추억을 간직하고, 내가 원하여도 그것을 잊지 못한다"(키케로)는 말이 진실이다. 이 충고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홀로 자기를 감히 현자라고 표명한 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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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7-2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의 수상록, 읽다 말았어요. 다른 책의 유혹에 넘어가느라고...ㅋㅋ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다 읽었지요.
30년만에 다시 읽는 책은 새로운 느낌일 것 같아요.
저도 같은 책을 시간의 간격을 길게 두고 읽은 적이 있어서 알아요.
느낌만 새로운 게 아니라 문장의 해석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지요.

같은 책을 반복해 읽으면 그것도 좋은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책을 더 사고 싶지 않을 때, 갖고 있는 책을 다시 한 번 읽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oren 2013-07-26 18:04   좋아요 0 | URL
저 한 권의 책을 다시 읽으며 '엄청난 생각들의 원천들'을 다시, 혹은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 무지 크네요.
그건 단지 나이 때문에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또다른 생각들이 많이 쌓여서 오는 것일 수도 있을 듯해요.
자꾸만 읽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게 '고전읽기의 매력'이지 싶어요.

30년 전에 읽으면서 기록해둔 '독서노트'를 뒤적거리며, 그 때 적어두었던 구절을 '다시' 마주치는 기쁨도 크고, 똑같은 번역자(손우성 님)의 글이지만 표현이 조금씩 바뀐 부분도 재미있구요.

독돌이 2015-06-1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이랑은 거리가 먼 삶을 살고있었는데요,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더니...나이가들면서 책의 소중함을 알게되네요.

지금 몽테뉴 수상록을 읽기 시작하고있는데, 제가읽고있는건 압축본인지 훨씬얇고 쉬운표현을 쓰고있어서 저같은 사람도 흥미롭게 읽어가고있습니다.

키케로 라는 이름이 자주등장하여 궁금해 검색해보다가 들어왔어요.

블로그가 달라 댓글을 달아주셔도 못읽을것같아서요...시간되시면 제 블로그와주셔서 댓글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blog.naver.com/hipey3089

좋은 글 잘읽었고, 도움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