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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ㅡ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여기에 적절한 만큼만 다루겠다 : 왜냐하면 이 문제를 다루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ㅡ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들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내 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ㅡ 나 자신에 의해서도. ㅡ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삶에서 '악의'는 거의 입증되지 않는다 ; 문학적 '악의'에 대해서도 나는 그 어떤 경우도 말할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순수한 바보는 너무도 많이 들어 있다 ······ 누군가가 내 책 한 권을 손에 든다는 것,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한 존경 표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ㅡ 그가 그런 표시를 하기 위해 신발조차 벗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ㅡ 장화는 말할 것도 없고 ······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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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

 

그래서 더 나는 설명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ㅡ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가장 단적인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책이 자주 일어나거나 아니면 드물게라도 일어나는 경험의 가능성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는 경험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치자 ㅡ 일련의 새로운 경험들에 대해 처음으로 말하고 있다고 치자 ㅡ 이런 경우에는 전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청각적 착각이 인다 ······ 이것이 결국 내 평균적인 경험이며, 원한다면 내 경험의 독창적인 면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에 대해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믿던 자가 했던 일은, 나에게서 자기의 상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ㅡ 나와는 반대되는 것을, 이를테면 '이상주의자'를 만들어내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 내게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자는 내가 도대체 고려할 만한 대상이라는 점을 부정해버렸다. ㅡ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인간 유형에 대한 명칭이며, '현대'인, '선한' 자, 그리스도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ㅡ 도덕의 파괴자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면, 아주 숙고할 만한 말이 된다. 그런데 거의 모든 곳에서 그 말의 가치가 차라투스트라의 형상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순진하게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반은 '성자'고 반은 '천재'인, 좀더 고급한 인간의 '이상적'인 유형으로서 말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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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일까?

 

'페미니즘'에 대한 깊이있는 책들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글을 읽으니 쉽게 댓글을 달기가 어렵군요. 그나마 탕기 님의 글 속에서 제게 익숙한 철학자들의 이름이나마 겨우 몇몇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이 글을 읽는 데 일말의 위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은 아닐 듯합니다. 그 두 사람의 철학자들 가운데 좀 더 후대의 사람이 쓴 한 권의 책을 통해 - 좀 더 정확하게는 그 책 가운데 특히 <제7장, 우리의 덕>을 통해 - '페미니즘'에 대한 그 철학자의 깊디깊은 생각들을 민낯으로 생생하게 만나봤던 기억을 이쯤에서 한 번쯤 되살려 보는 일은, 이 글이 제게 주는 또다른 뜻밖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긴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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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

 

이질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정신의 힘은 새로운 것을 낡은 것에 동화시키거나 다양한 것을 단순화시키거나 완전히 모순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강한 경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이질적인 것이거나 '외부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에서 특정한 특징이나 윤곽선을 제멋대로 더 강하게 강조하거나 드러내거나 자기에 맞게 왜곡한다. 이 경우 정신의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동화시키고 새로운 사물들을 낡은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 ㅡ 즉 성장시키는 데 있다.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성장의 느낌, 힘이 커졌다는 느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것과 상반되는 듯한 정신의 충동이 이러한 동일한 의지에 봉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알고자 하지 않거나 임의로 단절하고자 하는 갑작스럽게 솟구쳐오는 결정을 하고 스스로의 창문을 닫아버리며 이러저러한 사물을 내적으로 부정하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알 수 있을 만한 많은 것에 대해 일종의 방어 상태에 들어가고 어둠과 폐쇄된 지평에 대해 만족하며 무지를 긍정하고 시인한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은 그 정신의 동화하는 힘의 정도에 따라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ㅡ 실로 '정신'은 위(胃)와 가장 비슷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때때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정신의 의지가 속해 있으며, 아마 이 의지는 사정이 이러이러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러이러하다고 여겨질 뿐이라는 경솔한 추측을 하면서 온갖 불확실성과 애매성을 즐거워하고 일부러 한쪽 구석의 비좁은 은밀함을, 너무 지나치게 가까운 것을, 표면적인 것을,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의치가 바뀐 것이나 미화된 것을 기뻐하며 스스로 즐거워하고, 이러한 모든 힘을 자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스스로 즐거워한다. 다른 정신을 기만하고 스스로를 다른 정신 앞에서 위장하려는 정신이 문제가 없지 않지만 기꺼이 응하는 것, 창조하고 형성하고 변형할 수 있는 힘의 저 끊임없는 압력과 충동이 마침내 여기에 속한다 : 정신은 여기에서 자신의 가면의 다양성과 교활함을 즐기며, 여기에서 안정감을 즐긴다. ㅡ 바로 자신의 프로테우스적 기술로 정신은 가장 잘 방어하고 은폐한다! ㅡ 가장에의, 단순화에의, 가면에의, 외투에의, 간단히 말해 표면에의 ㅡ 왜냐하면 모든 표면은 외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에 대항하여 사물을 깊이 있게 다양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인식하는 사람의 저 숭고한 경향은 맞서 나간다 : 이것이야말로 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인데, 용감한 사상가는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충분히 단련시켜 예리하게 했고, 엄격한 훈련과 엄격한 말에도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그는 "내 정신의 성향에는 어떤 잔인한 것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 ㅡ 덕이 있는 사람들이나 친절한 사람들이 그가 그러한 말을 하지 못하게 말리면 좋았을 것인데! 만일 잔인함 대신 '지나친 성실성'이라는 말을 뒤에서 떠들어대고 소문이 나고 평판이 있다면, 실로 이것은 우리에게는 - 우리 자유로운, 지극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ㅡ 좀더 점잖은 평가로 들릴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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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인간이라는 무서운 근본 텍스트

 

성실성, 진리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인식을 위한 희생, 진실한 인간의 영웅주의 같은 아름답고 반짝거리고 소리 나는 축제의 언어가 있다. ㅡ 여기에는 한 사람의 마음을 자부심에 부풀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은자(隱者)이며 실험용 동물인 우리,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은자의 양심에 걸맞는 극도의 비밀스러움으로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즉 이와 같이 위엄 있고 호사스러운 말도 무의식적인 인간의 허영심에서 나온 해묵은 거짓 장식과 잡동사니, 거짓 금가루에 속하는 것뿐이며, 그렇게 아첨하는 색깔과 덧칠 아래에서도 자연적 인간homo natura이라는 무서운 근본 텍스트는 다시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즉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려 번역하는 것, 지금까지 자연적 인간이라는 저 영원한 근본 텍스트 위에 서툴게 써넣고 그려놓은 공허하고 몽상적인 많은 해석과 부차적인 의미를 극복하는 것, 오늘날 인간이 이미 학문의 훈련으로 엄격하게 단련되어 두려움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눈과 막힌 오디세우스의 귀를 가지고 오랫동안 "너는 그 이상의 것이다! 너는 더 높은 존재다! 너는 다른 혈통을 지녔다!"고 인간에게 피리로 속삭였던 낡은 형이상학적 새잡이의 유혹의 방식에 귀를 막고 다른 자연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후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앞에 서 있게 만드는 것, ㅡ 이것은 생소하고 미친 과제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는 하나의 과제인 것이다. 누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왜 우리는 이러한 미치광이 같은 과제를 선택했단 말인가? 또는 달리 묻는다면 "도대체 왜 인식이 있다는 말인가?" ㅡ 누구나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내몰려도, 백 번이고 스스로에게 이미 그렇게 물어보았던 우리는 더 이상 좋은 대답을 찾지 못했고, 찾지 못하고 있다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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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

 

배운다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생리학자가 알고 있듯이, 온갖 영양을 섭취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유지'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저에는, 훨씬 '그 밑바닥에는' 물론 가르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으며 정신적 숙명의 화강암이 있고 미리 결정되고 선별된 물음에 대한 미리 결정된 결단과 대답의 화강암이 있다. 중요한 문제가 대두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불변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 문제에 대해 사상가는 배워서 고칠 수 없고, 단지 끝까지 다 배울 수 있을 뿐이다. ㅡ 단지 이러한 남녀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서 '확실한 것'을 마지막으로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바로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아마 우리는 그것을 앞으로 자신의 '신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후에 ㅡ 우리는 그 신념 안에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발자취를, 우리 자신이기도 한 문제에 이르는 이정표를 보게 될 뿐이며 ㅡ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커다란 어리석음에 이르는, 우리의 정신적인 숙명에 이르는, 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ㅡ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행했던 이러한 대단히 점잖은 태도를 감안해서 아마 내가 '여성 자체'에 대해 몇 가지 진리를 숨김없이 말하는 것을 이미 허락해주었으리라 믿는다 : 더욱이 그것이 단지 ㅡ 나의 진리일 뿐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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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진보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 그리고 그 때문에 '여성 자체'를 남성들은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학문성과 자기 폭로의 이러한 서툰 시도가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 여성에게는 현학적인 것, 천박한 것, 학교 선생 같은 것, 하찮은 오만, 하찮은 무절제와 불손함이 많이 숨어 있다. ㅡ 여성이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를 살펴보라! ㅡ 이러한 것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잘 억제되고 제어되어왔다. 만일 '여성에게서의 영원히 권태로운 것이 ㅡ 여성에게 이것은 풍부하게 있다! ㅡ 과감하게 밖으로 나오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일 여성이 우아하고 장난스럽고 근심을 없애주고 마음의 짐을 벗어나게 하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현명함과 기교를, 만일 여성이 유쾌한 욕구를 처리하는 섬세한 솜씨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성스러운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맹세코 말하는데, 지금은 이미 경악하게 하는 여성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으며, 여성이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의학적인 확실함으로 들이닥치게 된다. 여성이 이와 같이 학문적으로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니겠는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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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만일 어떤 여성이 바로 롤랑Roland 부인이나 드 스탈 부인 또는 조르주 상드George Sand를 끌여들여, 그것으로 인해 '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ㅡ 악취미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고라도 ㅡ 이는 본능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위에 언명된 사람들은 세 명의 우스꽝스러운 여성 자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해방과 여성의 자기 예찬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최상의 반증이 될 뿐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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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 딸들에게 주고 싶은 한 마디 말

 

부엌에서의 어리석음. 요리사로서의 여성. 가족과 가장의 섭생을 배려하는 데 끔찍할 정도의 무신경함! 여성은 음식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요리사가 되고자 한다! 만일 여성이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수천 년 간 요리사로 활동을 해왔으니 최대의 생리학적 사실들을 발견하고 의술도 획득했어야 할 것이다! 서투른 요리사로 인해 ㅡ 부엌에서 이성이 완벽하게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발전은 가장 오랫동안 저지되었고, 가장 심하게 해를 입어왔다 :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정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 더 나이가 든 딸들에게 주고 싶은 한 마디 말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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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지 않도록

 

이제까지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어떤 높은 곳에서 그들에게 잘못 내려온 새처럼 취급되어왔다 : 좀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거칠고 경이로우며 감미롭고 영혼이 넘치는 어떤 것으로, ㅡ 그러나 달아나지 않도록 가두어두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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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 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 이러한 위험한 장소에서 스스로 천박하다는 것을 ㅡ 본능에서의 천박함을! ㅡ 드러내는 사상가는 대체로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내고 폭로된 것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 아마 그는 미래의 삶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근본 문제에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도 깊이가 있고, 엄격하고 혹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것들과 쉽게 바꾸는 호의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로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ㅡ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찍이 이러한 아시아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자이며 제자였던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엄격해지고 간략히 말해 동양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필연적이며, 논리적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던가 : 이에 관해 우리는 스스로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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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어느 시대에도 우리 시대만큼 나약한 성이 남성에게 이렇게 존경을 받은 적은 없다. 이것은 노인에 대한 불경(不敬)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경향과 근본 취향에 속하는 것이다 ㅡ : 이러한 존경이 바로 다시 악용되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않는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은 원하게 되고 요구하는 것을 배우게 되며, 마침내 저 당연히 치러지는 존경을 거의 모욕으로 느끼고, 그리하여 권리를 위한 투쟁, 아니 실로 투쟁 자체를 선호하고자 한다 : 어쩄든 여성은 수치심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에 부가적으로 덧붙인다면, 여성은 또한 취향도 잃어가고 있다. 여성은 남성을 두려워하는 것을 잊고 있다 :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은 잊는' 여성은 자신의 가장 여성적인 본능을 포기하는 것이다. 남성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더 명확하게 말해 남성 안에 있는 남성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남성이 크게 육성되지 않게 될 때, 여성이 과감하게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니와 또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여성이 퇴화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 : 우리는 이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여성이 이와 같이 새로운 권리를 자기 것으로 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며 '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놀라울 만큼 명확하게 반대의 일이 실현된다 : 여성이 퇴보해가는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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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게 격분하며 주워 모으고 있는 것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에서 여성의 영향력은 여성의 권리와 요구가 증대한 것에 비례하여 감소되어왔다. 그리고 '여성 해방'이란 (천박한 남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여성 자신에 의해 요구되고 촉진되는 한, 이와 같이 가장 여성적인 본능이 더욱 약화되고 둔화되는 현저한 증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행실이 바른 여성이라면 ㅡ 더구나 영민한 여성이기도 하는데 ㅡ 근본적으로 부끄러워했을 어리석음이, 거의 남성적인 어리석음이 있다. 그 대신 여성은 어떤 기반에서 가장 확실하게 승리하게 될 것인지를 맡는 후각을 상실해가고 있다. 여성 특유의 무술 연습을 게을리 하고 있다. 전에는 예의 바르고 섬세하고 꽤 겸허함도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남성 앞에서 자제력을 잃고 아마 '책에까지' 손대고 있다. 여성 안에 감추어진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과 영원히 필연적인 여성적인 것을 믿는 남성의 믿음에 대해 고결한 듯한 불손한 태도로 반대 행동을 하고 있다. 여성은 훨씬 섬세하고 놀라울 정도로 사납고 때로는 마음에 드는 애완 동물처럼 양육되고 보살핌을 받고 보호되고 아낌을 받아야 한다는 남성들의 생각을, 여성은 힘껏 수다를 떨면서 그 말을 끝내 버리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 질서  속에서 여성의 지위 자체가 지니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온갖 노예적인 것과 노비적인 것을 어색하게 격분하며 주워 모으고 있는 것이다 (마치 노예 제도가 모든 고도의 문화, 문화 상승의 조건이 아니고 그 반증인 것처럼) : ㅡ 이 모든 것이 만약 여성적인 본능의 파괴와 탈여성화가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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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최초이자 최후의 천직

 

사람들은 거의 어디에서나 온갖 종류의 음악 가운데 병적이고 가장 위험한 음악으로 (우리 독일의 최신 음악으로) 여성의 신경을 망쳐놓고 그녀들을 매일 더 신경질적으로 만들며 강한 아이를 낳는다는 여성의 최초이자 최후의 천직을 무력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여성들을 일반적으로 더욱 '교화'하려고 하며, 이른바 '나약한 성'을 문화를 통해 강하게 만들고자 한다 : 마치 인간의 '교화'와 허약화 ㅡ 즉 의지력을 허약하게 하는 것, 분열시키는 것, 병약하게 만드는 것은 항상 서로 보조를 같이했다는 사실과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들(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그러했는데)은 바로 자신의 의지력 덕분에 ㅡ 학교 선생들의 덕택이 아니라 ㅡ 남성들을 능가하는 자신의 힘과 우월함을 자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능한 한 절실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여성에게서 존경과 때로는 공포마저 일으키는 것, 그것은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그녀의 자연이며, 이러한 것으로는 진정하게 맹수같이 교활한 유연함과, 장갑 아래 숨겨진 호랑이 발톱, 이기주의의 단순함, 교육시키기 어려운 속성과 내적인 야성, 욕망과 덕성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 폭넓은 것, 방황하는 것이 있다 ······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고양이인 '여성'에게 동정을 갖게 하는 것은, 여성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더 고통스러워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사랑이 필요하고 환멸을 느끼도록 선고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남성은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여성 앞에 서 있었으며 언제나 한 발은 이미 황홀해하며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비극에 넣고 있었다 ㅡ . 뭐라고? 이것으로 이제 끝내려 한다고? 여성의 매력 상실이 일어나려고 한다고? 여성의 무료화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오 유럽이여! 유럽이여! 너에게는 언제나 가장 매력 있었으며 너를 거듭 위험에 빠뜨리려는 뿔 달린 동물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너의 낡은 우화가 다시 한번 '역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ㅡ 다시 한번 엄청난 어리석음이 너를 지배하게 될 수도 있으며, 너를 운반해갈지도 모른다! 그 어리석음 아래에는 어떤 신도 숨어 있지 않다. 그렇다! 단 하나의 '이념', '현대적 이념' 만이 숨어 있을 뿐이다!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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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단순히 여성혐오주의자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

 

근대의 민주주의는 인간들의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근대의 제1세대와 1960년대 이후 제2세대 페미니즘은 제도적·정치적으로 억압된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성운동의 역효과는 고유한 성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고, 여성성에 기반 하지 않은 남성성과의 인위적인 동일화로 인해 여성만이 가진 내밀한 고유성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니체는 페미니즘이 지닌 이러한 단점을 근대 민주주의가 초래한 병폐로 보고 이것을 비판한다. 양성의 동일한 사회적 활동이 양성의 무화로 퇴락하는 것을 니체는 경계한다. 성의 차이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그 생존을 그치게 되고, 긴장감이 부재하는 양성의 관계는 위버멘쉬의 탄생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니체는 초기 페미니즘의 동일화 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현대 제3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니체가 제기했던 이러한 인식을 수용하고, 여성성이 파괴되지 않는 양성의 평등을 위해 니체를 재평가한다. 생물학적 양성의 존속이유는 2세의 출산이다. 여성성과 여성의 몸은 2세의 출산과 육아에 관한 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여성성은 늘 생명을 의식하며, 그러므로 미래를 의식하는 성향이다. 이에 비해 남성성은 2세의 출산에 관한 한 보조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또한 여성성이 지니는 고유한 장점을 결핍으로 파악하고, 이를 인위적인 남성성과의 동일화운동으로 없애려한 페미니즘의 경향은 니체가 볼 때 여성성을 죽이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니체를 과거의 페미니스트들처럼 단순히 여성혐오주의자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여성은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 구조에서 여성들의 고유성들은 쉽게 파괴되고 무시되곤 한다. 자연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반인간적인 발상이다. 이렇게 단순화된 평등론이 함의하는 위험을 이미 니체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며 그 경고가 현대 사회의 여성 운동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 정영수, 『니체와 페미니즘』, 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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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3-06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문제이군요. 판단을 유보하는 어리석은 독자가 되고 싶진 않지만, 니체와 페미니즘 양쪽 모두 주장과 사상의 온도가 대단히 높아서, 자칫하면 살갗들이 한쪽으로 완전히 붙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입니다. Oren 님께서 정성 들여 인용해주신 니체의 모든 구절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니체에게서 느껴지는 `의지`에의 전투적인 강조... 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조금 엇나가긴 햇는데, 여하튼 그런 강한 확신이 아직까지 저의 빈약한 마음에는 와닿지 않은 까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다 역량 부족이겠지요.

니체가 반발하는 `단순화된 평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하지만 저도 무척 공감합니다. 제 글이 좀 길고 중구난방인이긴 했습니다만(솔직히 너무 쓸데없이 길게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언급했듯이 저는 인간은 차등적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우생학의 기본 전제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니체가 반발하는 `인위성`이라는 걸 제도로 도입하는 (이걸 일본의 한 젊은 철학자는 `역사의 도박장`에 카드를 들고 들어가는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과정을 통해서 그 차등을 상보해줄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인간인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모두 `단순화된 평등`이라는 안위성을 추구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정영수 씨의 글에 전부는 공감할 수가 없고요. 하지만 그분의 글이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표적에 대해서는 알고 있고 그것에 한해 생각해보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페미니즘을 읽으며 극복해야 했던 어떤 부정적 이미지들? 그런 것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주고 계시거든요. 저 사상도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서, 사실 갈필을 잡기가 힘듭니다.

Oren 님의 인용문들을 이면지에 낙서해가면서 천천히 곱씹어봤습니다. 니체를 경외하고 있는 덕분에, 어쩌면 왜곡될 소지가 있는 부분들을 (아마도) 꿋꿋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같고요. 공감할 수 없는 글이라 할지라도 밀어내지 않는, 순전한 호기심이 있는 것도 다행인 듯도 합니다. 여하튼, 한편으로는 니체가 20세기 들어 진행된 `여성현대예술가`들의 진일보와 20세기 중반부터 급속도로 퍼진 (제3 운동을 포함한) 페미니즘을 봤다면 어떤 의견을 내놓았을까 상상해봤습니다. 같은 말을 했겠지요? 니체는 역사의 변화를 예견했었을까요? 혹시 이 부분과 관련된 인용 구절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음. 정영수 씨의 글에서 느껴지는 의견 차는 조금 거칠게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야전과 영원』이라는 텍스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역사의 제도는 인위적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할 필연성을 부정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자연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라는 인용 구절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사에 `자연적인 것`이라는 건, 제가 생각하기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인위`로 적응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타적 유전자』라는 매트 리들리의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가장 위대한 텍스트인 성문법과 그 휘하 콘텍스트들이 만든 것이고, 그런 것들이 사회 속에 하나의 거대한 습관으로 남아 `자연스러운 것처럼` 길들여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프랑스 법철학자인 르장드르의 고증을 여러 차례 살펴보고 푸코의 이로를 따라가면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됐거든요. 확실히 대학 시절과는 다른 시각인 것 같아요. 저는 당분간은 그쪽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옳았는지는 또 다른 의견을 계속 읽어가면서 판단하게 되겠군요.

공감이 다 되진 않으면서도 곱씹고 이면지에 옮겨 적게 되는 것은, 니체만의 마력인 것 같습니다. 정말 `마력`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딱히 표현할 길이 없어요! 다행이도 제게는 두 쪽 다 낯섭니다. 니체도 낯설고, 페미니즘이 말하는 성정치학, 특히 새로운 언어의 도입 같은 부분은 정말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는 `남자`라는 젠더로 길들여져온 청년이니까요. 하지만 니체도 그렇고 페니미즘도 그렇고, 저 첨예한 부분에 겁 먹지 않고 계속 서 있어야 <인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저만의 답이 나올까요? Oren 님처럼 많은 걸 읽고 또 많은 경험을 하고 시간의 축적을 `축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있는 어른이 된다면, 그때는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하지만 설레는 것보다는 그 모습이 두렵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래도 저는 피하지 않는 독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댓글을 달 때마다 너무 두서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날씨 정말 좋았습니다. 황사가 다행이도 약해서 오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들어왔는데, Oren 님께서는 가족분들과 즐거운 주말 보내셨는지요? 다음 한 주도 저는 버거운 주제와 씨름하고 늘 실패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겠지요. 고비 때마다 인용해주신 구절들에서 번개 같은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몰래 구절을 훔쳐가기도 합니다. 늘 좋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oren 2016-03-06 23:54   좋아요 1 | URL
저도 두서없이 `니체의 말들`을 매우 길게(그렇지만 나름대로는 `맥락`이 이어지는 방향으로) 인용했습니다만, 니체의 사상들을 아무런 비판이나 저항도 없이 수용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주장은 매번 `인류 전체`를 걸고 `기존의 도덕과 가치체계` 자체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니체는 `계급`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듯한 모습도 거리낌없이 보여줄 정도니까요.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짖은 `평등`에 대해서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폄훼할 정도였지요.(그 때문에 루소와 볼테르가 몇 번씩이나 불려나와 혼쭐이 납니다. 그와 반대로 나폴레옹은 매번 극도로 존경을 받고요.ㅎㅎ)

어쨌든 그는 모든 `왜소화`와 `후퇴`와 `퇴화`와 `삶의 위축`등 `삶을 위혐하는 경향들`에 결연히 반대를 부르짖었는데, `조건없는 평등`이나` 민주주의 운동`이나 `여성해방 운동`이나 심지어 `진보`를 내세우는 거의 모든 철학들이 결국은 `노예 도덕`일 뿐이라며 비판할 정도였으니, 탕기 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은 차등적 존재`라는 생각쯤은 니체에겐 `귀족주의`나 `지배자 도덕`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재고할 필요조차도 없을 만한 기본 토대였겠지요.

니체는 아마도 역사의 다양한 변화 방향들을 얼마쯤은 예견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는 문헌학자였으니만큼 특히나 고대 헬레니즘의 문화와 철학에는 아주 정통할 정도로 `과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담은 현재의 현대성 문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비판했으며, 결국 자신이 제기한 인류 도덕의 근본 문제들이 해결책을 모색하게 될 새로운 무대인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용의주도했으니까 말이지요.

비록 니체가 `서양 형이상학의 종결자`라는 궁극적 위치까지 넘볼 정도로 높이 평가된 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이미 우리에겐 까마득한 옛날이었을 뿐인 과거를 `현재`로 삼아 철학을 했던 인물인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니만큼 그의 철학들이 우리들의 `현재`에 얼마만큼의 울림을 주는지는 각자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태도`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자주 해 봅니다. 그는 늘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예민한 귀`를 가진 `극소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그것도 무려 `백 년 후에나` 겨우 제대로 읽히게 될 글들을 쓰고 있노라고 자주 주장했는데,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오해 또한 이해보다 더욱 커질 여지도 얼마든지 많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더군다나 그가 남긴 책들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과제가 오죽이나 힘든 일일까 싶은, 그런 생각도 가끔은 듭니다.

탕기 님께서 뜻밖에도 너무 긴 댓글을 남겨주셔서, 제 글도 그냥 하는 수 없이, 이쯔네거 아무런 두서없이 맺어야겠다 싶습니다. 내내 즐거운 시간 만드시길요~
 
5년의 독서 : 읽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탕기 님의 기나긴 글을 읽고 나서 공감을 표시하는 따뜻한(?) 댓글 한 줄이라도 쓰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마땅한 표현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네요. 그나마 님의 글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발견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미약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식의 뜬금없는 먼댓글을 쓸 수도 없었겠지요.(니체가 마침『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다섯 손가락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점잖치 못한 일이다. 스스로를 먼저 입증시켜야만 하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란 표현을, 하필이면 어제 오후에 펼쳐진 그 화려했던 '창밖의 폭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찾아 읽지 못했더라면 말이지요...)

 

아무튼 기나긴 글 쓰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5년 후, 10년 후에 좀 더 높은 곳에서 뒤돌아 보게 될 '야트막한 언덕 위의 작은 이정표' 하나쯤 미리 세워두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싶습니다. 주제넘은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지만, 어쨌든 지치지 않는 '성실성'을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 * *

 

초보자이며 어린아이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고급한 인간류는 '직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 여유를 갖고, 서두르지 않으며, '준비 완료'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않는다. ㅡ 30세라는 나이는 고급 문화라는 의미에서는 초보자이며 어린아이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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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

 

사람들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이 세 가지 과제가 목표로 하는 것은 모두 고급 문화이다.보는 법을 배우는 것 ㅡ 이것은 눈으로 하여금 평정에, 인내에, 그리고 자신에게-다가오게-놔두는 일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성을 위한 첫 번째 준비 교육이다 : 특정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격리하는 본능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비철학적 용어로 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바로 그럴 능력이다. 비정신적인 것, 천박한 것은 모두 특정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나온다 ㅡ 사람들은 반응해야만 하며, 개개의 자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당위가 벌써 병이고 하강이며 쇠진의 징후이다. ㅡ 비철학적인 조잡함이 '악덕'이라고 칭하는 것은 거의 전부 반응하지 못하는 생리적 무능력일 뿐이다. 보는-법을-배웠다가 응용되는 경우 : 배우는 자로서 사람들은 대체로 서둘지 않게 되고 불신하게 되며 저항하게 된다. 사람들은 적의 어린 평정 상태에서 모든 종류의 낯설고 새로운 것을 자기에게 다가오게 한다. ㅡ 그리고 그것에서 손을 뒤로 뺀다. 모든 문을 열어 개방하는 것, 온갖 사소한 사실 앞에서도 엎드리는 것,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물들 안으로-들어가고, 그-안에-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요약하자면 유명한 근대적 '객관성'이라는 것은 나쁜 취향이며 전형적인 저속함이다.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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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 : 이것에 대해 우리의 학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대학에서조차, 심지어는 철학을 진정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마저 이론과 실천과 직업으로서의 논리가 사멸해가기 시작한다. 독일 책들을 읽어보라 : 그 책들은 생각하는 데에는 기술과 교과 계획과 뛰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ㅡ 우리가 춤을 배우려고 하듯 생각하는 것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이 춤의 일종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희미하게라도 상기시켜주지 않는다······ 정신의 가벼운 발이 모든 근육으로 옮기는 그 정교한 전율을 지금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독일인이 누가 있단 말인가! ㅡ 정신적인 동작의 뻣뻣한 무례함, 파악할 때의 굼뜬 손 ㅡ 이것이 독일적이다. 외국인들이 대체적인 독일적 본성이라고 혼동할 정도로 독일적이다. 독일인은 뉘앙스를 타진할 손가락이 없다······ 독일인들이 그들의 철학자들을, 그리고 특히 위대한 칸트라고 하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 중에서 가장 기형적인 개념의 불구자를 참아왔다는 사실이 독일적 온화함에 대해 알게 해준다. ㅡ 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든 고급 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다리를 가지고 춤출 수 있지만, 개념들과 말을 가지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 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도 말해야 할까? ㅡ 사람들이 이런 글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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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과 칼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사슬' 안에서, 우리의 '칼' 사이에서 춤추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또 때때로 우리는 그러한 상황 아래 이를 갈며 우리 운명의 모든 비밀스러운 가혹함에 견디기 어려워 하는 것도 대단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한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6장 우리 학자들>, 제2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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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 속에서 지루해하기에는 수백 배나 너무 짧지 않은가?

 

성실함, 만일 이것이 우리 자유정신이 벗어날 수 없는 덕목이라고 한다면 ㅡ 그러면 우리는 모든 악의와 사랑으로 이것을 위한 작업을 해보고자 하며, 단지 우리에게 남겨진 우리의 덕 안에서 지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완성'해보고자 한다 : 그 덕의 광채가 언젠가 금빛으로 빛나는 푸르면서 조소하는 듯한 저녁 노을처럼 이렇게 늙어가는 문화와 그 희미하고 침울한 진지함 위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성실함이 어느 날 피로에 지쳐 한숨을 내쉬고 손발을 내뻗으며 우리 자신을 너무 가혹하다고 느끼고, 마치 기분 좋은 악덕처럼 더 낫고 더 편하고 더 부드러운 것을 지니고 싶어해도, 우리는 엄격한 태도로 남아 있자, 마지막 스토아주의자들인 우리는! 그리고 이 덕을 돕기 위해 우리 안에 오직 악마성으로 가지고 있던 것만을 보내도록 하자 ㅡ 졸렬하고 우연한 것에 대한 우리의 구토도, 우리의 '금지된 것을 향한 갈망'도, 우리 모험가의 용기도, 우리의 교활하고 까다로운 호기심도, 탐욕스럽게 미래의 모든 나라를 찾아 배회하며 열광하는 우리의 가장 섬세하게 위장된 정신적인 힘에의 의지와 세계 극복을 향한 의지도 보내도록 하자 ㅡ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악마를 데리고 우리의 '신'을 도우러 가자! 아마 우리는 이것 때문에 오해받고 혼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들의 '성실함'ㅡ이것은 그들의 악마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령 그 사람의 말이 옳다고 해도 말이다! 모든 신은 지금까지 이와 같이 신성화(神聖化)되어 개명된 악마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를 인도하는 정신은 어떻게 불리길 원할까? (이것은 이름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신을 숨기고 있는가? 우리의 성실함, 우리 자유정신은, ㅡ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허영, 우리의 화려한 장식, 우리의 한계, 우리의 어리석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모든 미덕은 어리석음이 되고, 모든 어리석음은 미덕이 되는 경향이 있다. '성스러울 정도로 어리석다' 고 러시아 사람들은 말하는데, ㅡ 우리는 성실에서 벗어나 마침내 성자나 권태로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인생은 그 속에서 지루해하기에는 수백 배나 너무 짧지 않은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6장 우리 학자들>, 제2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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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2-2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정말 따뜻한 댓글입니다. Oren님과 댓글을 나누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항상 마음을 채워주셨지요. 저는 달아주신 인용구를 이면지에 적고, 펜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며칠을 생각하곤 합니다. 이런 말은 오만일 수 있겠지만, 좀 거칠게 포괄해보자면, 절반 정도 이해하면 ˝이런 인용구를 적어주신 의도를 알겠다. 대단한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보다 이해가 점점 깊어지면 그때는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밭을 갈러` 갑니다. ^^

니체는 너무 진합니다. 너무 진해서, 다른 글들과 같은 날에 읽기 힘들어요. 저는 두어권의 책을 나란히 읽곤 해서, 니체를 인용구로든 아니면 서재에 꽂힌 제목으로든 읽기라도 하면 도대체 다른 책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다행이도 `새벽`이라는 시간이 따로 있으니, 니체를 영접할(?) 기회는 매일 있는 셈이긴 하지만요. 저는 첫 번째 인용구에서 `니체적 따뜻함`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위안을 얻었습니다. 저의 나이가 딱 초보자이자 아이의 수준이라고 거의 늘 (오만할 때를 제외하면)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어쩌면 저는 매번 실패하면서도 니체가 `고급 문화`라고 부르는 어떤 특이한, Oren님께서 문학의 특수성을 말씀하실 적에 사용하셨던 그 `특수`라는 영역으로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그런 제게 니체는 성실함으로 그걸 `완성`해보자고 격려하고, 스토아적인 엄격함을 주문하는군요. 살이 떨리는 말입니다... 언제가 되야 저는 이 나태함과 정신적 병약함과 게으름과 객기와 분노와, 이런 것들을 물릴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편지 삼아 이 글의 먼댓글로 오늘 하루 동안의 생각을 적으려고 했지만, 제게는 짧은 글은 알라딘 서재에 올리지 않은 정언명령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절거리는 글을 훌륭한 인용구 밑에 감히 끼워넣어봤습니다. 계속 니체의 인용구를 복기하겠습니다. Oren님의 공감과 조언, 가르침에는 항상 감사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앞으로도 저의 졸문(?)들에 거울을 비춰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oren 2016-03-01 12:40   좋아요 0 | URL
탕기 님께서 남겨놓으신 긴 댓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군요. 그런데 어떤 부분은 제겐 너무 과분하게만 느껴져 읽기가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탕기 님의 예민한 감수성과 특유의 진솔함과 단단한 결심들이 동시에 느껴져 다시금 저를 편안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해주기도 하네요.

탕기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니체는 정말 심연처럼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철학자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사실, 그의 내면은 너무나도 깊어서 어떨 땐 정말 `이 사람이 과연 인간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조차 있으니까 말이지요. 저는 니체를 만나기 전까지는 `쇼펜하우어`를 `인류의 천재 중의 천재 철학자`로 여겨 마음 깊이 존숭해 마지 않았는데, 니체를 읽으면서부터 적잖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스스로 `우리의 스승!, 우리의 성자!`라는 극존칭을 써가면서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도, 금세 태도를 돌변하여 `스승의 결함`을 마구 들춰내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펼치는데 엄청난 열을 올리니까 말이지요. 하기야, 그가 저돌적인 힘으로 밀어붙여 쓰러뜨리지 못할 `인물이나 사상`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기나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저 그런 일도 `당연지사`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할 일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어쨌든 니체라는 `심연`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전 준비`가 따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마치 `젊은 처녀와 청년들만` 골라 잡아 먹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기 위해 다이달로스가 지어 놓은 미궁을 향해 바다 건너 크레타 섬으로 찾아가는 테세우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시커먼 동굴의 입구를 주저없이 들어설 엄청난 용기뿐만 아니라, 마침내 괴물과 싸우고 난 뒤에 무사히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기 위하여 `아리아드네 공주`의 실타레마저도 미리 준비하는 세심함마저 필요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안도와 기쁨으로, 괴물 퀴클롭스의 동굴 속에 갇힌 오뒷세우스가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 마침내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와 `아무도 아니`였던 자가 바로 `나`였다고 큰 소리로 다시 외칠 수 있을 테니까요.(`퀴클롭스`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그림들도 많습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7136954)

어쨌든 저는 용케도 니체를 마침내 지금에서야 마주치게 된 걸 여간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젊을 때` 읽기에는 가슴을 너무 격동시킬 만큼 문장이 벅찬 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수많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마구 쏟아낼 때마다 거기에 거침없이 함께 딸려나오는 수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과 음악가들조차도, 독자가 그들에 대해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그의 깊디깊은 생각을 올바로 부여잡지 못하고 금세 격랑에 휩쓸려 어디론가 떠내려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어쩄든 니체는 숱한 철학자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온갖 분야의 대가들을 끊임없이 우리 앞에 불러낸 뒤에, 열변을 토하면서 끊임없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독자들을 다그치는 데 조금도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까요.

니체의 책 속에서 아직도 여전히 낯선 인물들을 자주 만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낯익은 인물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사실이 제겐 얼마나 위안과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여러 음악가들과 그들이 지어낸 작품들(가령, 베토벤,모차르트,멘델스존,슈만,쇼팽,리스트, 그리고 특히 바그너와 그의 여러 작품들), 고대의 시인과 역사가들(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소포클레스 등 3대 비극시인과 특히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 투키디데스, 타키투스 등), 여러 문학 작가들(단테,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몽테뉴, 볼테르, 빅토르 위고, 스탕달, 괴테, 심지어 에머슨까지도!), 그리고 심지어 생물학자 다윈 까지도 이제는 마음 편히 만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제 댓글이 너무나도 길어졌군요. 댓글이 얼마나 길어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끝으로, `한 사람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던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댓글을 마무리해야 겠다 싶습니다. 오뒷세우스도 나우시카아 공주에 연연했더라면 결코 페넬로페를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했을 때처럼, 그렇게 삶과 이별해야 한다. ㅡ 연연해 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 니체, 『선악의 저편』)

* * *

독립성에 대한 시험

사람들은 자신이 독립할 수 있고 명령할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적당한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그 시험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놀이 가운데 가장 위험한 놀이일지라도, 그리고 결국 다른 심판관 앞에서가 아니라, 증인인 우리 자신 앞에서 행해지는 시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시험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 모든 사람은 감옥이며 또한 후미진 구석의 모퉁이다. 조국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대단히 위기에 처해 있고 도움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 물론 승리에 찬 조국에서 자신의 마음을 떼어놓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동정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우연히 보아왔던 보다 높은 인간의 기이한 고통과 고립무원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한 학문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 그것이 겉으로는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귀중한 발굴물로 한 사람을 유혹할지라도 말이다. 자기 자신의 해방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더욱더 많은 것을 자기 아래로 내려다보기 위해 언제나 더 창공 높이 날아오르는 새처럼 탐욕적으로 멀고 낯선 세계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 그것은 비상하는 자의 위험이다. 우리 자신의 유덕함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며, 전체적으로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의 `손님을 후대하는 친절`처럼 어떤 개별적인 덕의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고귀한 품성을 지닌 사람과 풍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소모적이고 거의 무관심하게 자기 자신을 대하며 편견 없는 덕을 악덕에 이를 때까지 밀고 나가는데, 이는 위험 중의 위험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존할 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가장 강한 독립성에 대한 시험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41절

단발머리 2016-03-01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이해하는 건 제 수준에는 많이 어렵지만, 감상은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니체는 어려워 미뤄두고만 있는데, oren님 글을 통해 한 줄, 두 줄이라도 읽게되니 참 좋습니다. ㅎㅎ

oren 2016-03-01 12:5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 반갑습니다. 저도 가끔씩 단발머리 님과 같은 경험을 하며 즐거울 때가 있답니다. 제가 한 번도 읽을 생각을 못해봤거나, 혹은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하는 작품들 속의 문장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 말이지요. 그런 스치듯 만나는 인연들이 쌓여서 결국엔 나도 모르게 그 작가를 향해 조금씩조금씩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 때조차도 있게 마련이거든요. ㅎㅎ
 
번역 : 정신의 요람

 

탕기 님께서는 '번역 공부'까지도 일부러 따로 하시는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탕기 님의 이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마주치게 된  '시 번역은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대목을 접하고 나서야 마침내(?)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제게도 약간이나마 '덧붙일 말들'이 몇몇 떠오르는 걸 느낍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정도가 약간이나마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시는 '번역' 뿐만 아니라 애시당초에  '창작' 부터가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는 듯싶고, 특히나 범속한 사람들에게는 '접근 금지' 팻말부터 먼저 제대로 확인해 보고 나서 발을 내디뎌야 하는 몹시도 특수한 영역일지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제가 덧붙일 댓글은 사실상 거의 '인용'일 뿐이어서, 예전에 미리 갈무리해 둔 내용을 이렇게 '먼댓글 형식'으로 덧붙여 봅니다.)

 

 * * *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위대하고 참다운 시인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 독일에서 대단히 증가하고 있는 평범한 시인이나 엉터리 시인이나 우화작가 등 어리석은 무리들은 문제삼고 있지 않다. 이러한 무리들의 귀에는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다음과 같이 외쳐 주어야 한다.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Mediocribus esse poétis

Non homines, non Di, non concessere columnae                  ────호라티우스, 《시론》

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이 자기들과 타인의 시간과 종이를 얼마나 망쳐 놓으며,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가 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을 참다운 걸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한 작품들로 대중의 교양을 억제한다. 따라서 천재의 좋은 영향을 정면으로 방해하고,좋은 취미를 점점 해쳐서 시대의 진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비평이나 풍자를 할 때는 용서나 동정을 하지 말고, 평범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가해서, 그들이 졸작을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는 데에 여가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시인들의 졸렬한 작품은 온화한 시신인 아폴론까지도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게 할 정도로 격노하게 한다. 나는 평범한 시가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권,  <51. 시에 대하여>

 

 * * *

 

졸렬한 시인보다 더 자신을 가진 자는 없다

 

나는 무척이나 시가를 좋아한다. 남의 작품은 어지간히 알아본다. 그러나 사실 내가 시가를 써 보려면 어린아이 장난이 되어 버려, 스스로 참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은 다른 데서는 아무 데서라도 어리석은 수작을 할 수 있지만 시가에서는 못한다.

 

신들도 인간도

작품을 붙이는 기둥도

시인들의 평범함은 용서되지 않는다.                                  (호라티우스)

 

우리 출판사 사옥 앞에 이 격언이 붙어 있어서, 그 많은 사이비 시인들이 작품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진실로 졸렬한 시인보다 더 자신을 가진 자는 없다.    (마르티알리스)

 

어째서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는가? 선대(先代) 디오니시우스는 자기 재주 중에도 시짓는 것을 가장 자랑삼았다. 올림픽 경기 때에 그는 화려하기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한 수레들을 가지고 제왕답게 금박을 하고 수를 놓은 천막에 깃발을 날리며, 시인들과 음악가들을 시켜서 자기 시를 제출케 하였다. 그의 시가 낭독될 때에 처음에는 그 운율이 우아하고 탁월한 데서 민중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 작품의 변변찬은 내용을 감식하게 되자, 그들은 처음에는 경멸하다가 점점 그 판단이 명확해지자, 금세 화를 내며 달려나가 그 깃발을 모두 쓰러뜨리고 찢어 내팽개쳤다. 수레도 역시 경기에서 아무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부하들을 실어왔던 배는 시칠리아로 귀환하지 못하고 폭풍우에 밀려서 타렌토의 해안에 가서 부서졌다. 민중들은 이것이 확실히 신들이 그들과 같이 이 못된 시에 분개한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난파에서 겨우 살아난 뱃사람까지도 이 민중들의 의견에 가담하였다.

 

그의 죽음을 예언한 신탁도 역시 어느 면에서 백성들에게 찬동하는 것 같았다. 그 신탁에는 디오니시우스가 자기보다 우수한 자들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에, 그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고 실려 있었다. 이것을 그는 자기보다 우세하던 카르타고 인들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이 예언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여러 번 승리할 기회를 저버리며 조절해 갔다. 그러나 그는 잘못 해석했다. 왜냐하면 신은 그가 아테네에서 자기보다 우수한 비극 시인들에 경쟁해서 《레네이아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상연시키고, 매수행위(買受行爲)와 부정으로 승리를 거두는 때를 그 시기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승리 뒤에 그는 갑자기 죽었다. 얼마간은 그가 이때 느낀 과도한 기쁨 때문이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제2권, <17. 교만에 대하여> 중에서

 

 ** *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그러나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도 신도 서점(書店)의 진열창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향연에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진한 향유가 나오거나, 사르디니아산(産) 꿀을 친 양귀비 종자가 나오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 없이도 향연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영혼에 쾌감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격검(擊劍)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연병장에서 무기에 손대지 않으며, 구기나 원반 던지기나 굴렁쇠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관중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그런데도 시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시를 씁니다. 하긴 왜 못 쓰겠습니까? 그는 완전한 자유민일 뿐 아니라 재산상으로도 기사 등급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품행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니 말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호라티우스/詩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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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나쁜 시인이기 때문에...

 

호메로스는 어떻게 모든 시인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을까? 그가 그만큼 더 많이 관조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나쁜 시인이기 때문에 시에 관해 그토록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미적 현상은 단순하다. 단지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유희를 바라보고 항상 정령의 무리들에 둘러싸여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져보라. 그러면 시인이 될 것이다. 단지 스스로 변신하여 다른 사람의 몸과 영혼으로 말하려는 충동을 느껴보라. 그러면 극작가가 될 것이다.

 

-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8장

 

  * * *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는 물론 감미로워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웃는 자와 더불어 웃고, 우는 자와 더불어 우는 법입니다. 그대가 나를 울리고자 한다면 먼저 그대 자신이 고통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텔레포스여 그리고 펠레우스여, 그대의 불행이 나를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대가 남이 시키는 말만 서투르게 늘어놓는다면 나는 하품과 웃음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비장한 말은 슬픈 얼굴에 어울리고, 위협적인 말은 성난 얼굴에 어울립니다. 그리고 변덕스런 말은 익살스런 얼굴에 어울리고, 진지한 말은 엄숙한 얼굴에 어울립니다. 자연은 그때그때의 경험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격동시키키도 하며, 무거운 근심으로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하고, 불안으로 마음 조이게도 합니다. 그런 연후에 영혼의 감동을 바깥으로 표출시키는데 이때 혀가 그 통역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 화자의 말이 그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든 로마 인들은 교양의 유무를 막론하고 폭소를 터뜨릴 것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호라티우스/詩學> 중에서 

 

 * * *

 

시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플라톤

플라톤은 시와 예술에 관해 따로 책을 쓴 적이 없고 주로 『이온 Ion』과 『파이드로스 Phaidros』와 『국가』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다. 시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잡하다. 먼저 나온 두 대화편에서 그는 시인들을 칭찬하고 있으나 『국가』에서는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며 가차없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고 있다. 시인들에 대한 그의 칭찬은 모호하고 유보적인 반면 비판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렀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플라톤/詩論>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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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2-24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범속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아끼지 않는` 독자 축에 들겠군요.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혹평을 하겠으나, 나이가 어려 예의 상 이렇게 서재에 숨어 지냅니다.

부모님께서 수 십 년 동안 국어교사를 하셨기에
가끔 시인 등단한 제자분들께서 감사의 뜻으로 시집 한 권씩을 보내주곤 합니다.
저도 창작의 문외한은 아니라... 시집을 읽으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죠. 심지어 교수를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 현대문학 교수의 지적대로, 등단의 방법은 무수합니다.
문학상은 `다음 수상자`가 대체로 그 해에 이미 정해지기 마련이고요.
우리나라의 문인 수가 공식 협회에 등록된 것만 하더라도 만 명은 넘는다고 하죠?
교수는 지난 문학사의 반 세기를 놓고 `정지용` 외에는 남을 만한 시인이 없다고까지 역설하더군요.

문단의 벽은 낮아지고, 독자의 수준은 떨어지며, 그리하여 기억될 만한 가치 없는 것들이 회자됩니다.
저는 이런 출판과 독서의 문화를 곱씹을 때마다 현기증이 납니다.

모든 건 독자의 몫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독자에게 실천의 몫이 남은 건 분명합니다.
저도 Oren님 말씀처럼 문학은 특수한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방법은 물론이고 작가의 자질에 있어서도요.

많은 공감할 수 있는 인용문들입니다. 이면지에 몇 줄 적어 훔쳐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p.s 여담이지만, Oren님의 인용 실천을 보고 있으면 문헌학에 매달렸던 젊은 시절의 니체가 떠오릅니다. 그 실천의 방법을 저도 배워봐야겠습니다.^^

oren 2016-02-25 12:31   좋아요 0 | URL
탕기 님께서 남겨주신 댓글을 읽어보니 어느 정도 짐작은 갑니다만, 제가 그 쪽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게 너무나도 없어서 뭐라 댓글을 달기조차 어렵군요. 시인들이나 시 작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제 고향에도 집안 어르신 가운데 한 분이 오래 전에 이름난 시인으로 활동하셨던 덕분에, 그 분의 시비뿐만 아니라 시문학공원까지 두루 마련되어 있는 형편인데도, 저는 어쨌든 `시`나 `문학` 쪽으로는 거의 한발짝도 내밀어본 기억이 없답니다.) 아무튼 유익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아, 참, `젊은 시절의 니체`를 말씀해 주셨는데, 어쨌든 그 철학자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놀라운 발상`과 경이로울 정도로 다채로우면서도 격동을 불러 일으키는 힘찬 문장들 때문에 더욱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사상`으로 보나 `문장`으로 보나 초인(超人)다운 기질을 타고난 듯해요. 숱한 인류의 걸출한 인물들을 순식간에 납작하게 구겨서 간단히 쓰레기통에 휙~ 집어 던지고야 마는 거인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요? 결국 인류를 왜소하게 만드는 데 앞장서 왔을 뿐인 온갖 엉터리 `인물과 사상들`에 대해 가차없이 통쾌한 주먹을 날리는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과연 언제, 누구로부터 그런 우렁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아찔한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비로그인 2016-02-24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눈 호강을 하네요. 탕기님의 댓글까지 평론가 수준의 경지까지 보여주시니 ... ;^^

oren 2016-02-25 12:29   좋아요 0 | URL
시인 님께서 몸소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댓글을 남겨주시니 제가 조금은 머쓱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시를 쓸 수 있는 재능은 오랜 세월 동안에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겨우 허용된 매우 특별한 능력이었던 만큼, 시인 님께서도 앞으로 훌륭한 시들을 많이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yamoo 2016-02-26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오렌 님은 고전 인용의 달인이십니다! 정말 적재 적소에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고전의 인용! 배인화시인 님처럼 항상 눈호강 합니다~^^

oren 2016-02-26 14:27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하는 대목들이 늘 적재적소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생뚱맞거나 뜬금없을 때도 결코 적지 않을 테지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밑줄긋기)

 

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인간성을 자랑하게 되는 최근의 시대에도 '사납고 잔인한 동물'에 대한 공포와 공포의 미신이 많이 남아 있어, 그것을 극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좀더 인간적인 시대의 긍지를 이룬다. 그래서 명백한 진리마저도 저 사납지만, 결국 죽어버린 동물을 도와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는 추측 때문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여러 세기 동안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있다. 나는 아마도 그러한 진리가 나에게서 살그머니 빠져나가게 하는 그러한 일을 감행하고자 한다 : 다른 사람들은 그 진리를 다시 잡아, 그것에 '경건한 사유방식이라는 우유'를 충분히 마시게 하고 마침내 조용히 잊혀진 채 그것이 전에 있었던 낡은 구석에 뉘여놓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예를 들어 비극에 관해 고금의 철학자들이 사육해왔던 그러한 뻔뻔하고 비대한 오류가 더 이상 고결한 듯 주제넘은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마침내 인내를 저버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더 높은 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잔인함이 정신화되고 심화된 데 바탕을 둔 것이다. ㅡ 이것이 내 명제이다. '사나운 동물'은 전혀 죽지 않았으며 살아 있고 번성하며, 스스로를 단지 ㅡ 신성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비극이라는 고통스러운 쾌락을 만드는 것은 잔인함이다. 이른바 비극적 동정에서 근본적으로는 심지어 가장 높고 가장 섬세한 형이상학의 전율에 이르기까지 모든 숭고함 속에서 쾌감으로 작용하는 것은, 감미로움을 오직 거기에 혼합되어 있는 잔인함의 요소에서 얹은 것이다. 투기장에서의 로마인, 십자가의 황홀함 속에 있는 그리스도교인, 화형이나 투우를 보고 있는 스페인, 비극으로 돌진하는 오늘날의 일본인, 피비린내 나는 혁명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파리 변두리의 노동자, 의지가 풀린 채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참으면서 보고 있는' 바그너광 여자들 ㅡ 이 모든 이가 즐기고 비밀스러운 욕정에 휩싸여 마시려고 노력하는 것은 '잔인함'이라는 위대한 마녀의 약초술이다. 이 경우 우리는 물론 잔인성이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어리석은 심리학을 추방해야만 한다 : 자기 자신의 고통,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것에도 풍부한, 넘칠 정도의 풍부한 즐거움이 있다. ㅡ 그리고 페니키아인이나 금욕주의자에게서처럼, 오직 인간이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자기 부정이나 자기 훼손을 하도록, 또는 일반적으로 관능과 육체를 부정하고 참회하도록, 청교도적인 참회의 발작, 양심의 해부, 파스칼적인 지성을 희생하도록 설득되는 경우 그는 자신의 잔인함에 의해 자기 자신을 향한 저 위험한 잔인성의 전율에 은밀히 유혹되고 앞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인식하는 사람 자신도 정신의 성향에 반하여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마음에서 원하는 소망에 거슬리면서까지 인식하는 것을ㅡ즉 스스로가 긍정하고 사랑하고 숭배하고 싶어하는데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ㅡ스스로의 정신에 강요함으로써 잔인함의 예술가와 변용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그렇게 깊이 철저하게 파고들어 생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가상과 표면적인 것을 향하고자 하는 정신의 근본 의지에 대한 폭력이며 고통을 주고자 함이다.ㅡ이미 모든 인식의 의욕에는 한 방울의 잔인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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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오늘날까지도 지상에서 인간이나 민족의 생활 속에 장엄, 진지함, 비밀스러움, 음울한 색조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찍이 지상 모든 곳에서 약속하고 저당 잡히고 서약을 할 때 얼마간의 공포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 과거가, 가장 오래 지속되고 깊이가 있으며 냉혹한 과거가, 우리가 '진지'해 질 때, 우리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우리 안에서 용솟음쳐 오른다. 인간이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가장 소름끼치는 희생과 저당(첫 아이를 바치는 희생도 여기에 속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신체 훼손(예를 들면 거세), 모든 종교 의례 가운데 가장 잔인한 의식 형태(모든 종교는 그 가장 깊은 근거에서 잔인성의 체계다) ㅡ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 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금욕주의 전체가 이에 속한다 : 몇 개의 관념들은 지워질 수 없고 눈앞에 있는 것, 잊을 수 없는 '고정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러한 '고정 관념들'을 통해 신경과 지성의 전 조직에 최면을 걸기 위한 것이다. ㅡ 금욕주의적 절차와 생활 형식들은 이 관념들을 그 외의 모든 관념과의 경합에서 떼어내어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인류가 '기억에 남겨둔 것'이 나쁘면 나쁠수록, 인류의 관습의 모습은 더욱 무섭게 된다. 특히 형법의 냉혹함은 인류가 망각을 극복하고, 사회적 공동 생활의 몇몇 원시적 요건들을 순간적으로 감정과 욕망의 노예가 된 이러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 이 독일인들은 자신의 천민적 근본 본능과 그에 뒤따르는 야수같이 거친 언행을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 무서운 수단을 사용하여 기억하게 만들었다 : 예를 들면 돌로 쳐 죽이는 형별(ㅡ이미 전설이 되어 있듯이 맷돌을 죄인의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수레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형벌의 영역에서 독일의 천재가 가장 독자적인 창의성과 특이성을 발휘한), 말뚝으로 꿰뚫어 죽이는 형벌, 말로 찢어발기거나 밟아 죽게 만드는 형벌, 범인을 기름이나 포도주로 삶는 형벌(14세기나 15세기에도 행해졌다), 가슴에서 살점을 저며내는 형벌, 그리고 또 범죄자에게 꿀을 발라 이글대는 태양 아래 파리떼가 우글거리게 놓아 두는 형벌 등 고대 독일의 형벌을 생각해보라. 그러한 모습이나 전례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사회 생활의 편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약속했던 일에 관해 대여섯 가지의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 속에 담게 된 것이다. ㅡ 그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기억 덕분에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이르렀다! ㅡ 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 불리는 이러한 음울한 일 전체,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 : 이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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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

 

이러한 계약 관계를 눈앞에 생생히 그려본다는 것은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으로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관계를 만들고 승인했던 고대 인류에 대해 많은 의혹과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이 이루어지게 된다.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하는 자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가 냉혹함, 잔인함, 고통을 찾아내는 발굴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채무자는 자신이 되갚을 것이라는 약속에 신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신이 한 약속의 진지함과 성스러움을 보증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상환을 의무나 책임으로 자신의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계약의 효력은 그가 상환하지 못할 경우 채권자에게 그가 그 외에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그밖에 그의 권한에 있는 것을, 예를 들면 자신의 육체나 자신의 아내, 혹은 자신의 자유, 또는 자신의 생명 역시 저당 잡히는 것이다(혹은 특정한 종교적 전제가 있는 곳에서는 심지어 자신의 축복이나 영혼의 구원까지도, 마침내는 무덤 속의 평안까지도 저당 잡히는 것이다 : 이렇듯 이집트에서는 채무자의 시체는 무덤 속에서도 채권자 앞에서는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ㅡ 바로 이집트인에게서도 이러한 안식은 물론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특히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에 온갖 종류의 능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채 액수에 적합해 보이는 크기만큼 그의 육체에서 살로 도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 ㅡ 오래전부터 곳곳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지 하나하나와 신체의 각 부분을 정확하게, 부분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게, 합법적으로 가격을 산정해왔다. 로마의 12표법이 그러한 경우 채권자가 잘라낼 수 있는 분량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좀더 많이, 또는 좀더 적게 잘라낼지라도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선포했을 때, 나는 이것을 이미 좀더 자유롭고 좀 더 크게 계산하고 있는, 로마의 법률관을 나타내는 증거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이 배상 형식 전체의 논리를 명료하게 해본다면, 이는 충분히 기묘하다. 등가는 다음과 같이 주어졌다. 즉 손해에 대해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대신 (즉 금전이나 토지, 어떤 종류의 소유물로 보상을 받는 대신) 채권자에게는 배상이나 보상으로 일종의 쾌감을 누릴 권한이 주어졌다. ㅡ 이는 자신의 권력을 무력한 자에게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쾌감이기도 하며, "악을 저지르는 즐거움을 위해 악을 저지른다"는 육욕적 쾌락이기도 하고 폭행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즐김은 채권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천할수록 더 높게 평가되며, 채권자는 그것을 좀더 높은 신분에 있는 자가 맛보는 좋은 한 입의 음식, 아니 그 맛보기로 가볍게 여길 수 있었다.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일종의 지배권에 참여한다 : 그리하여 마침내 그 또한 한 인간을 '아래에 있는 존재'로 경멸하고 학대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ㅡ아니면 최소한 실제의 형벌권, 형벌 집행권이 이미 '당국'에 넘어갔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경멸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보는 우월감을 한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보상이란 즉 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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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숭이도 시인하게 될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근본 명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영역, 즉 채무법이다. ㅡ 그 개념 세계의 발단은 지상에서의 모든 대사건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오랫동안 피로 물들었다. 저 세계는 근본적으로 피와 고문이라는 어떤 냄새를 단 한 번도 완전하게 씻어버린 적이 없지 않은가라고 덧붙여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심지어 늙은 칸트에게서도 그런 적이 없다 : 정언명법에는 잔인함의 냄새가 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죄와 고통'이라는 저 무섭고 아마도 풀어버릴 수 없게 된 관념의 결합이 처음으로 고정되었다. 다시 한번 물어보건대, 고통은 어느 정도까지 '부채'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일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최고로 만족을 주는 정도까지이며, 피해자가 손해에 대한 불쾌감을 함께 염두에 두면서, 손해를 이상한 반대의 쾌감과 바꾸는 정도까지이다 :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ㅡ 이것은 진정한 축제였으며, 이미 말했듯이, 채권자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위배되면 될수록 더 높은 값을 지닌 어떤 것이었다. 이것은 추측하여 말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지하에 파묻힌 일들을 밝히는 작업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복수'라는 개념을 그 와중에 서툴게 사용하는 사람은, 통찰을 좀더 쉽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덮어버리고 모호하게 할 뿐이다. 어느 정도까지 잔인함이 고대인의 성대한 축제의 환락을 이루고 있었는지, 그들의 거의 모든 환락의 구성 요소로 뒤섞여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성을 향안 욕망이 얼마나 소박하고 순진하게 나타났는지, 바로 '사심 없는 악의' (또는 스피노자의 말로 하자면, 악의 있는 동정)를 그들은 얼마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인 속성으로 여겼고 ㅡ 따라서 양심을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긍정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이러한 사실을 온 힘을 다해 생각해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잘 길들여진 가축(말하자면 현대인, 말하자면 우리)의 섬세한 감각에, 더욱이 그 위선에 거스르는 일이다. 좀더 깊이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아마 오늘날에도 역시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이러한 축제의 환락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선악의 저편》229절에서(그 전에 《아침놀》18절, 77절, 113절에서) 나는 고급 문화의 역사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그리고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심지어 역사를 형성하기까지 하는) 잔인함이 점점 더 정신화되고 '신성화'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어쨌든 사형, 고문, 이단자의 처형 없이는 가장 큰 규모의 제후의 결혼식이나 민족 축제를 생각할 수 없었고, 또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악의나 잔인한 조롱을 쏟아낼 수 있었던 사람 없이는 귀족적 가정 생활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ㅡ 공작부인의 궁정에서 읽히고 있는 《돈키호테Don Quixote》를 떠올려보라 :우리는 오늘날 《돈키호테》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혀에 쓰디쓴 맛을 느끼며 거의 고문 당하는 듯한 가책을 갖는데, 이는 저작자나 동시대인에게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며 이해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ㅡ 그들은 이것을 책 가운데 가장 명랑한 책으로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읽었으며, 이 책을 읽고 거의 죽도록 웃었다).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ㅡ 이것은 하나의 냉혹한 명제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아마 이미 원숭이도 시인하게 될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근본 명제이다 : 왜냐하면 원숭이는 기이한 잔인함을 생각해냄으로써 인간을 이미 충분하게 예고하고 있으며, 마치 인간의 '서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고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함 없는 축제란 없다 :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긴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ㅡ 그리고 실로 형벌에서도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ㅡ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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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 역시 잔인함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간식을 바칠 줄 몰랐다는 것

 

덧붙이자면, 나는 이러한 사상으로 삶의 권태라는 시끄럽고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물방아에 우리의 염세주의자들이 새로운 물줄기를 대는 데 도와줄 의도가 전혀 없다. 반대로 인류가 자신의 잔인함을 아직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때가 염세주의자들이 존재하는 현재보다 지상에서의 삶이 더 명랑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야만 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수치가 커져가는 상황에 따라 인간을 뒤덮고 있는 하늘의 어둠은 점점 더 확산되었다. 피로에 지친 염세주의적 눈길,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불신, 삶에 대한 구토에서 나오는 얼음같이 찬 부정 ㅡ 이러한 것들은 인류의 최악의 시대를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다 : 이러한 것들은 늪이 존재할 때, 그에 속하는 늪의 식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히려 세상에 알려진다. ㅡ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덕분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모든 본능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병적인 유약화와 도덕화에 대한 것이다. '천사'(여기에서는 더 가혹한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가 되는 도중에 인간은 저 상한 위와 설태가 낀 혓바닥을 양육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동물적인 즐거움이나 순진함을 역겨워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무미건조해졌다. ㅡ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앞에서 때때로 코를 쥐고 서서, 교황 이노센트 3세와 함께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혐오하는 것의 목록을 만든다['불결한 생식(生殖), 모태에서의 구역질 나는 양육, 인간을 발육시키는 물질의 더러움, 지독한 악취, 침의 분비와 오줌과 대변의 배설']. 고통이 언제나 생존에 반대되는 논증 가운데 첫번째 논증으로, 생존의 최악의 의문부호로 활보해야만 하는 오늘날, 이와는 반대로 판단했던 시대를 떠올려보는 것이 좋으리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없이는 지낼 수가 없었으며, 그 안에서 최고의 매력을, 삶에 이르는 진정한 유혹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ㅡ유약한 사람에게는 유혹의 말이 되겠지만ㅡ고통은 오늘날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 게다가 아마도 잔인함에 대한 쾌감 역시 사실은 사라질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다만 이 쾌감은 오늘날 고통이 더 심하다는 사정에 비추어 승화되고 섬세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번역되어 드러나고, 그것들에게서는 가장 섬세하고 위선적인 양심에까지도 아무런 혐의를 일으키지 않을 만큼 오직 안심할 만한 명칭으로만 장식된 채 드러나야 할 것이다('비극적 연민'이란 그러한 한 명칭이며, '십자가에 대한 향수'라는 것도 또 하나의 다른 명칭이다).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 그러나 고통 속으로 비밀스러운 구원 장치 전체를 집어넣어 해석한 그리스도교에게도, 모든 고통을 방관자의 입장이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의 입장에서 해석할 줄 알았던 고대의 소박한 인간에게도 그러한 무의미한 고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숨겨지고 알려지지 않으며 목도되지 않은 고통을 세상에서 처리하고 이를 솔직히 부정할 수 있기 위해서, 당시의 인간들은 거의 신과 모든 높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는 중간 존재들을, 즉 숨겨진 곳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도 보며, 흥미 있는 고통스러운 광경을 쉽게 놓치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발명할 필요까지 있었다. 그러한 발명 덕분에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시의 '재난'을 정당화하는 술책에 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 다른 보조적인 발명(예를 들어 수수께끼로서의 삶이라든다 인식 문제로서의 삶)이 필요할 것이다. "신이 그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재난은 모든 정당하다" : 선사적 감정의 논리는 이렇게 울려퍼진다. ㅡ 이것은 진정 선사적 논리였을 뿐인가? 잔인한 광경을 즐기는 친구로 생각된 신들ㅡ오, 이 태고의 관념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유럽의 인간화에도 파고들어와 있는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칼뱅이나 루터와 상의해보아도 좋다. 어쨌든 그리스인들 역시 그들 자신의 신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잔인함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간식을 바칠 줄 몰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신은 도대체 호메로스가 자신의 신들로 하여금 인간의 운명을 내려다보게 한 것은 어떤 눈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근본적으로 트로이전쟁과 그와 유사한 비극적이고 무서운 사건들은 어떤 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들은 신들을 위한 축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시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적인' 속성이 있는 한, 시인들을 위한 축제극이기도 했다…… 후에 그리스의 도덕 철학자들이 도덕적인 논쟁이나 유덕자의 영웅주의나 자기 가책을 신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 '의무를 진 헤라클레스'는 무대 위에 올려졌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목격자 없는 덕행이란 이 배우의 민족에게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유의지', 즉 선악에서 인간이 절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발명은 당시 유럽을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저 대담하고도 숙명적인 철학자의 발명이었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의 덕행에 대한 신들의 관심이 결코 고갈될 수 없다는 생각을 인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지상의 무대에서 진실로 새로운 것, 진실로 전대미문의 긴장, 갈등, 파국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완전히 결정론적으로 생각된 세계란 신들에게는 알 수 있는 세계이며, 결과적으로 곧 싫증이 나게 된다. ㅡ 이러한 신들의 친구인 철학자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그러한 결정론적인 세계를 요구하지 않은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대 인간은 모두 연극과 축제 없이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근본적으로 공개적이고 근본적으로 명백한 세계로 '관중'을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ㅡ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대단한 형벌에도 실로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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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1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 전집이 비싸서 낱권으로 사봐야 할 듯, 잘 읽고 가네요. 즐거운 밤 보내세요. *^

oren 2016-02-21 23: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책을 미리 사서 쌓아두고 읽는 성격이 아니라서 기분이 내킬 때마다 한 권씩 따로 사서 읽고 있답니다. 특히나 전집류의 책들은 괜히 한꺼번에 사 놓으면 `저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을까` 싶어서 지레 주눅도 들고, 쳐다볼 때마다 한숨만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ㅎㅎ

yamoo 2016-02-2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세상 니체 전집을 소장중이신거 같아요~ 전 너무 비싸서 구입을 못해고...결정적인 건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니체 전집을 갖고 있는지라...왠지 구매하기가 거시기한 거 같아서요..청하본도 읽을만해서 걍 아직 구입안하고 있습니다만...

요즘 니체 전집을 열독중이신가 봅니다~ 니체에 대한 페이퍼나 리뷰가 기대가 됩니다!

oren 2016-02-26 14:38   좋아요 0 | URL
니체가 쓴 작품들은 모두 `책세상 전집`으로만 선택해서 읽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전집을 다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요. 한 권씩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읽기에 가장 알맞는 책을 고르는 식이지요. 책세상 전집 가운데 여태껏 겨우 세 권만 읽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읽은 순서는 나름 괜찮은 듯싶습니다.(『차라투스트라』--->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順으로 읽고 있답니다. 앞쪽의 세 권은 읽었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예전에 한번 읽었지만,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라 이번에 다시 읽어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