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도시를 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된 영웅‘의 이야기

 

사이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오디세우스는 귀에 밀랍을 틀어막고 자신을 돛대에 단단히 묶게 했다. 물론 사이렌들에 맞서기 위하여 고래로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그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부터 이미 사이렌들에게 유혹당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이런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온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사이렌의 노래는 무엇이든 다 뚫고 들어가니 유혹당한 자들의 격정은 사슬이나 돛대보다 더한 것이라도 깨뜨렸으리라.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얘길 들었는데도 그는 한줌의 밀랍과 한 다발 사슬을 완벽하게 믿었고 자기가 찾은 작은 도구에 대한 순진한 기쁨에 차서 사이렌들을 마주 향하여 나아갔던 것이다.

……

그리고 실제로 오디세우스가 왔을 때 그 강력한 가희(歌姬)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이 적수에게는 침묵이어야 필적할 수 있겠다고 믿었기 때문이든, 아니면 오로지 밀랍과 쇠사슬 생각뿐인 오디세우스의 얼굴에 넘치는 행복감을 보자 그들이 노래를 죄다 잊어버렸기 때문이든.

 

 - 프란츠 카프카, 「사이렌의 침묵」중에서

 

 * * *

 

음악에 '유혹당한 자들의 격정'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난관'이란 도대체 어떤 것들일까. 세상의 모든 음악들은 유혹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 음악은 애시당초 음악이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으로 한없이 깊게 파고 들어와 우리의 영혼을 마구 뒤흔드는 음악을 만날 수 있다면, 그런 감동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야 좋을까.

 

Ulysses and the Sirens.

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1891, National Gallery of Victoria(Melbourne, Australia)

 

 

오디세우스는 '귀향'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토록 견디기 힘든 '세이렌의 유혹'마저 초인적인 힘으로 이겨냈다. 한줌의 밀랍과 한 다발의 사슬에만 의지한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오디세우스보다는 훨씬 안전하다. 우리는 '세이렌의 유혹'에 맞서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거의 매일 별 탈 없이 '귀가'하는 데 성공한다. 어쩌면 세이렌의 유혹에 꼴깍 넘어감으로써 '귀가' 이후의 '진정한 안식'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이렌 자매의 유혹으로부터 살아남기 (호메로스 지음 / 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에서 인용)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겪었던 '세이렌의 유혹'이 과연 우리의 여러 감각기관 가운데 단지 '귀'에만 호소하는 것이었던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에서 말한 대로 '우리 입에서 나오는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기 전에 검은 배를 타고 이 옆을 지나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을 만큼' 세이렌 자매들은 분명 고혹적인 자태를 지녔음에 틀림없다.

 

오뒷세우스와 세이렌, 드레이퍼, 페렌스 미술관

 

 

거의 매일 안전한 귀가를 보장받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세이렌의 유혹'이라고 부를 만큼 몹시 위험하면서도 견디기 힘든 '음악의 유혹'이 있을까. 아마도 그런 유혹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힘 안 들이고 쉽게 넘어오는 것'은 우리를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유혹이 있다면 그 기회가 쉽게 날아가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몽테뉴가 말한 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희귀하고 얻기 어려운 일보다 더 우리 취미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는 그의 말에도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물에서 쾌락은 그것을 놓쳐 버릴 위험 때문에 더 증대한다."(세네카)는 말도 몽테뉴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서두가 너무 길었다고 말하기에도 한참이나 늦었다. 올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음악 연주회'를 하나씩 자세히 살펴 봤더니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물론 연주회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그들의 연주를 얼마든지 보고 들을 수는 있다. 라디오나 음반 혹은 유튜브 영상들을 통해서 그들을 만날 때면 그들은 늘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에 머물러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격한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직접 연주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 연주회 티켓 값이 비싸겠는가.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만한 연주단체와 연주가들 가운데 우리가 서울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고, 또 그들 대부분은 연주 활동을 위해 전세계의 여러 도시들을 바삐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올해 서울에 올 연주자들과 단체들 가운데 '사정만 허락한다면' 직접 공연 현장에 가서 들어보고 싶은 연주들이 대략 얼마나 될까를 헤아려 보니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많다.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안젤라 게오르규, 바이올린의 막심 벤게로프,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안네 소피 무터, 율리아 피셔, 조슈아 벨, 길 샤함, 바딤 레핀, 피아노의 손열음, 조성진, 백건우, 임동혁, 알렉산더 멜니코프,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 마리아 주앙 피레스, 교향악단 가운데 시카고 심포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파리 오케스트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등은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쉽다. 그런데 욕심만 앞세우다 보니 정말 너무 많다.

 

이들을 연주 현장에서 직접 만나기 위해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가장 큰 현실적 장애는 거의 전적으로 '비싼 티켓값'이다.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우니 그런 생각이 더욱 들 수밖에. 저 많은 공연들을 다 보려고 욕심을 내다가는 다른 많은 중요한 지출까지도 보류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돈'이 문제가 되는 건 꼭 '패닉 상황'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글머리에서 꺼내 든 '세이렌의 유혹'이니 '난관'이니 하는 말들도 결국은 다 '돈'을 문제삼기 위해 억지로 불러온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면 '세이렌의 유혹'을 굳이 마다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더구나 '귀향'은 커녕 '귀가' 걱정까지도 필요가 없는 세상임에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패닉이 대중을 장악했다: 모든 사람이 돈, 돈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어떤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타임스」가 전하는 상황에 따르면, '담보나 보증이 어떤 것이냐는 사람들의 안중에 아예 없었고, 오직 돈을 구할 방도가 없다는 것만이 문제'였다.

 

 -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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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음에 오려 붙인 이미지들은 예술의 전당에서 발행하는 잡지 <Beautiful Life> 1월호에 실린 내용들이다. 그 아래에 딸린 '설명글'들은 이번에 '공부 삼아' 여기 저기를 뒤져 보며 내 스스로 정리한 것이다. 될수 있는 한 공연 날짜 순으로 정리해 보았다. 일련번호는 따로 매기지 않았다.

 

 

 

 

클라라 주미 강은 성악을 전공한 아버지로부터 많은 훌륭한 음악적 유산들을 물려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필립 강은 동양인 최초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10년 연속 주역으로 나섰을 만큼 유명한 성악가이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종종 '부녀'가 함께 나와 '이런 저런 음악 얘기'를 들려주는 걸 들어보면 클라라 주미 강은 성격이 대단히 천진난만하고 씩씩하고 활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녀의 이번 공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인터넷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중 일부만 옮겨 본다.

 

 

이 음악회는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최고의 아티스트와 연주단체를 초청, 국내 음악계에 수준 높은 연주를 소개하는 무대인 [예술의전당 월드 프리미어 시리즈]의 일환이다.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를 모두 우승하고 작년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입상하며 거장 지휘자들과 유명 연주자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주미 강과 역사학도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오보이스트로 우뚝 선 오보이스트 조나단 켈리가 전세계에서 17~18세기 음악을 그 시대와 같이 재현해내는 데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이 관객들을 바로크 시대로 안내할 것이다.

2014년 그 감동 그대로…역시 바로크!


2014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관객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선사했던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이 이번 공연에서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J. S. 바흐와 그의 둘째 아들인 C. Ph. E. 바흐, 그리고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최고봉인 비발디의 작품들을 연주할 예정이다. 특히 클라라-주미 강이 솔로 연주를 맡은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을 비롯하여 J. S.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과 현을 위한 협주곡 d단조(악장 다니엘 게데, 클라라-주미 강), 조나단 켈리와 클라라-주미 강이 함께 연주하는 J. S. 바흐의 오보에, 바이올린, 현을 위한 협주곡 d단조, 비발디의 오보에, 바이올린, 현을 위한 협주곡 B^♭ 장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최상의 무대를 통해 마치 바로크 시대로 돌아간 듯한 섬세한 사운드와 분위기를 경험하며 바로크 음악의 정수를 느껴 볼 수 있는 특별한 무대가 될 것이다.

 

 

 

 

 

 

 

 

 

<마술피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후반부에도 잠깐 나왔던 오페라다. 모짜르트가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았기 때문에 빚 독촉에 한창 시달리던 무렵에 '흥행에 성공할 오페라'로 써낸 작품인데, 초연 극장에서 100회 넘게 공연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오페라들 중 가장 훌륭한 성적이었다. 초연된 해 12월에 결국 세상을 떠난 모짜르트가 병상에 누운 채 저녁마다 시계를 쳐다보면서, "아, 지금은 파파게노가 등장할 시간이야." 하고 중얼거렸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자라스트로’라는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불을 숭배하는 종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에서 따온 것이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도 같은 인물이다.

 

 

 

 

 

 

그동안 해외 유수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주곡을 연주하는 모습만 몇 번 봤었다. 그때마다 당차고 자신만만하게 연주하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매번 '당차다'는 느낌을 꼭 받는다. 이번 리사이틀 공연은 레퍼토리와 컨셉이 사뭇 다른 듯해서 더욱 흥미롭다.

 

 

 

 

 

 

 

세계 오페라계의 초특급 스타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아직 신혼이다. 작년 12월 29일 오스트리아 빈의 팔레 리히텐슈타인 박물관에서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새신랑은 이번에 함께 내한하는 테너 유시프 이바죠프다. 그녀는 지난 2013년 11월 전 남편 어윈 슈로트와 이혼했었다.

 

 

오페라에 전혀 관심 없던 남자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카오디오로 오페라 아리아를 듣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오페라 공연 실황 DVD를 보며 빠져들더니, 급기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 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로 오페라 공연을 보러 날아간다. 뇌쇄적인 외모와 관능적인 음색으로 무대 위에서 달리고 구르고 드러누워 노래하는 소프라노 가수 하나가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이 놀라운 반향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사람들이 '러시아의 리비에라'라고 부르는 흑해 연안의 매혹적인 도시 크라스노다르. 바로 현재 세계 최고의 인기 오페라 가수로 군림하고 있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Anna Netrebko)가 1971년 9월 18일에 태어난 곳이다.

 - [클래식 ABC] 중에서

 

 

 

(안나 네트렙코, 꽤 젋었을 때 이미지였던 듯)

 

 

 

 

 

 

 

 

 ‘21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는 막심 벤게로프. 클래식 음악방송에서 무척 자주 소개되는 인물인데 여태 실황 연주는 한 번도 못봤다. 그를 직접 만나고 나면 라디오를 통해 들을 때 훨씬 더 반갑고 생생하게 다가올 텐데...

 

 

 

 

 

 

 

 

레오니다스 카바코스는 이번 리사이틀에서 함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엔리코 파체와 함께 데카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녹음을 내놓았고 그 덕분에 2013 에코클래식상도 받았다. 엔리코 파체는 2015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마련한 <양성원 & 엔리코 파체 베토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전곡연주>에서도 무대에 올랐었다.

 

 

 

 

그녀도 이제 5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63년 6월 29일생이다.) 잘츠부르크 태생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그가 지배했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매우 인연이 깊은 연주자다. 5년 만의 내한 공연이라고 한다.

 

 

 

 

 

 

 

 

율리아 피셔는 '젊은 거장'으로 불린다. 2013년 가을에 내한해서 드레스덴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멋지게 연주한 바 있다. '고전음악 해석에 뛰어난' 피셔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무대가 될 듯하다.

 

 

 

 

 

 

 

 

알렉산더 멜니코프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후계자로 지목된 인물이며, 러시안 피아니즘의 계승자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피아니스트이다. 2009년 내한 공연때 인터뷰를 찾아 읽어 보니 그때 이미 '여섯번째 한국 방문'이란다. 어려서부터 '항공기에 대한 열정'을 지닌 덕분에 지금은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고.

 

 

 

 

 

 

리오넬 브랑기에는 1986년생 지휘자이다. 협연자 클라라 주미 강과 더불어 영 파워를 느껴볼 수 있는 무대라 여겨진다. 라벨의 <다프네스와 클로에>는 모음곡 형태가 아닌 합창이 곁들여진 전곡 연주라 기대가 크다고. 클라라 주미 강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생상스의 작품이어서 온통 프랑스 레퍼토리 일색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옛 동독의 중심 도시인 라이프찌히를 특별히 여길 수밖에 없다. 바흐, 멘델스존, 슈만, 클라라, 브람스 등 천재 음악가들이 활동한 주무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성 토마스 교회는 '음악가들의 성지'라 불릴 만하다. 2014년 여름에 라이프찌히를 방문했을 때 성 토마스 교회에 잠깐 들렀던 우리 일행은 때마침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직접 연주하는 '바흐의 오르간 연주곡'에 압도된 나머지 교회의 나무 의자에 앉아서 그 음악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었다. 이 악단을 이끌고 바흐 사후에 거의 잊혀졌던 ‘마태수난곡’을 부활시킨 인물이 바로 멘델스존이었다. 이 두 단체는 바흐와 멘델스존은 물론 거장 지휘자인 쿠르트 마주어와 리카르도 샤이를 떼놓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카펠마이스터(예술감독) 리카르도 샤이가 이번 공연때 서울에 오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는 구 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러시아 남부의 그루지아 출신으로 매우 젊고 매력적인 피아니스트이다. 빈 국립음대를 졸업한 이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콩쿠르 동메달을 따며 급부상했다. 유튜브에선 그녀의 연주가 제법 많이 올라와 있고 높은 조회수를 올리고 있다. 파보 예르비와 함께 협연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영상이 특히 인기가 높다.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 앨범 표지)

 

 

 

 

어느새 '세상이 주목하는 피아니스트'로 훌쩍 큰 조성진 군이 '쇼팽 콩쿠르 우승때 연주했던 바로 그 곡으로 고국의 무대에 선다. 웬만한 사람들은 지레 티켓 예매를 포기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2015년 겨울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뮌헨 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협연했다. 그날, 어느새 노년에 접어든 피아니스트와 지휘자가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배려하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칠순을 넘긴 피아니스트는 올해 7월엔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다시 팬들을 만난다. 늘 구도자와 같은 진지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소탈한 면모가 드러나는 듯해 그의 연주가 조금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도 든다.

 

 

 

 

 

 

 

앙드레 프레빈과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을 거쳐 지금은 샤를 뒤투아가 이끄는 영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이번 내한 공연에는 2005년 리즈 콩쿠르 지휘 부문 대상을 차지한 알렉산드르 쉘리가 지휘를 맡는다고.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부문 1등을 차지한 임지영의 협주곡 연주도 기대된다.

 

 

 

 

 

 

2015년에는 독일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한꺼번에 몰려오듯 내한 공연을 펼쳤었는데 2016년엔 양상이 조금 다른 듯하다. 사상 첫 여성 예술단장을 맡고 있는 성시연이 지휘를 맡는다. 레파토리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했다.

 

 

 

 

 

 

이반 피셔가 이끄는 부다페스트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기대가 크다. 헝가리와 폴란드와 체코는 서로 인접한 동유럽 국가들이이서 나름대로 정서가 비슷한 데가 많다. 오케스트라는 헝가리, 작품은 폴란드 출생 쇼팽과 체코 출생 드보르작이다. '보헤미안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을 어떤 빛깔로 물들일지...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할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레스의 연주도 궁금하다. 포르투갈 출신인 그녀는 사색과 시정이 넘치는 연주로 유명하다. 데뷔 초기부터 모차르트 해석으로 정평을 얻었고, 쇼팽의 음악도 장기로 손꼽힌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불교 승려 출신이고 그녀 또한 불교 신자다.

 

 

 

 

 

 

 

안젤라 게오르규는 1965년생이다. 루마니아 태생이고 어릴 때부터 오페라 무대를 꿈꿨다. 1994년 코벤트가든 로열 오페라 극장에서 게오르그 솔티의 지휘로 공연된 <라 트라비아타>에 비올레타로 출연한 것이 그녀에게는 결정적이었다. '우아하면서도 사람의 가슴을 뒤흔드는 예술가'라는 평을 들으며 마리아 칼라스에 비견될 만한 사랑을 누리는 소프라노 가수로 우뚝 섰다. 타고난 미모와 재능으로 수많은 명연을 보여왔다. 프라하 방송교향악단과 함께 오는 만큼 드보르자크의 <루살카>에 나오는 '달에게 바치는 노래'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릴지 궁금하다.

 

 

 

 

 

 

 

1965년생인 마르쿠스 슈텐츠는 작년 12월에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을 지휘했다. '현존하는 최고의 말러 지휘자'라는 평을 듣는다. 그가 10년간 수석지휘자로 있었던 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와 말러 교향곡 전곡을 녹음해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최근 읽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흥미롭다. 번스타인이 하버드에서 강의한 『노턴 렉처』는 음악가와 청중 모두 보거나 읽어야 할 명강의란다.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좋았다고 추천했다.

 

 

 

 

 

 

헤르베르트 볼룸슈테트는 1927년생이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오래도록 지휘한 것으로 나온다. 1975년에는 이 오케스트라 및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에 취임했다고 한다. 레코드 또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부르크너 스페셜리스트로도 손꼽히는 지휘자. 밤베르크 교향악단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뮌헨 필에 이어 남독일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의 하나이다. 전쟁 중에 프라하에 있었던 도이치 필하모니의 멤버가 프라하에서 탈출해 밤베르크에 모여 1945년에 출발했고, 볼프강 사발리시와 오이겐 요훔 등이 상임을 맡기도 했었다.

 

 

 

 

 

 

1933년생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는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다. 그가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작품은 1960년도 전위 음악인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위령곡(Ofiarom Hiroszimy; 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이다. 1980년에 펜데레츠키는 Solidarity로부터 1970년 반정부 혁명 때 희생된 사람을 기리기 위한 그단스크 조선소에 만들어진 조각 작품의 제막식을 위한 곡을 위탁받았다. 그는 《Lacrimosa》라는 곡을 썼고, 후에 이를 《폴란드어 레퀴엠》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그의 후기작품 중 유명한 곡이 되었다.

 

 

(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폴란드어는 Krzysztof Penderecki)

 

 

 

 

 

 

마이클 틸슨 토마스는 1944년생이고 미국 헐리우드에서 태어났다. 81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수석객원지휘자를 맡았고, 88년부터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으로 런던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에 취임했다. 1995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일하고 있으니 벌써 21년째 장기근속중이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매우 모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오케스트라로 극찬을 받고 있다. 15번의 그래미상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말러의 교향곡 1번과 임동혁 협연으로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2번을 들려줄 예정이다.

 

 

 

 

 

 

 

 

2014년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했던 다니엘 하딩이 이번에는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파리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한다. 다니엘 하딩은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33-2014)가 창단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2003년부터 이끌고 있다. 레퍼토리는 대부분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들이다.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연주한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멘델스존의 작품이다. 조슈아 벨의 협연이어서 더욱 기대된다. 그가 허름한 청바지를 입고 워싱턴의 어느 지하철 역에서 350만 불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43분 동안 멋지게 연주했을 때 '바이올린 케이스'에 쌓인 돈은 고작 32달러 17센트에 불과했었다. 오로지 다들 '바쁘니까' 그랬었다고 한다...

 

 

(조슈아 벨의 연주 모습)

 

 

 

 

 

 

 

 

 

 

2016년 빈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던 마리스 얀손스가 2016년의 마지막 달엔 서울을 찾는다. 그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함께 내한하는 공연 조합은 이번이 세 번째란다. 나는 2012년에 실황 연주를 보러 갔었다. 얀손스의 지휘를 처음 접한 이들이 흔히 '별로'라는 반응을 내비치기도 한다는데 내가 꼭 그랬다. 그런데 그의 지휘는 '여러 번 대면할수록' 진가를 느끼게 된다고 한다. 올해 공연에서는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하이든의 교향곡 100번 ‘군대’, 방대한 악기 편성으로 현란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의 협연으로 베토벤의 협주곡도 연주될 예정이다. 1943년생이니 그의 나이도 어느새 일흔 셋이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다. 1979년 우크라이나 태생. 열 살에 엄마 손에 이끌려 키예프에 있는 발레학교에 입학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 두 곳에서 연거푸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바딤 레핀은 작년 10월에 내한한 시드니 심포니 내한 공연때 협연한 적이 있었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윤디 리가 서울에 와서 대형사고를 쳤던 바로 그 교향악단과의 협주였다. 퀸엘리자베스 콩코르에서 우승했다. 바딤 레핀은 막심 벤게로프, 예브게니 키신과 함께 '러시아 신동 삼총사'로 불렸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다. 이 두 사람은 세기의 커플로도 불린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발레 <돈키호테>에서 공연하는 모습)

 

 

 

 

 

 

 

드보르작이 1900년에 작곡한 오페라다. 그는 모두 11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유명한 오페라는 《루살카》뿐이다. 다른 작품들도 훌륭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루살카》의 기본적인 얼개는 안데르센의 『인어 공주』지만, 등장인물이나 극의 분위기는 보헤미아의 민간 설화와 많이 닮았다. 드보르작 특유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들이 담겼다. 특히 1막의 <달에게 바치는 노래>는 그의 아리아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오페라여서 더욱 관심이 높을 듯하다.

 

 

 

 

자유의 투사이자 탈옥한 정치범인 친구의 도주를 도운 죄목 때문에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빠진 카바라도시는 총살 직전에 마지막으로 간수에게 부탁하여 '사랑하는 여인' 토스카에게 전해줄 '편지'를 쓸 시간을 가까스로 얻는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을 이 세상에 홀로 두고 죽어야 하는 기막힌 처지를 생각하며,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으며 '연인과의 달콤했던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부르는 노래는 '너무나 절절해서' 가슴을 마구 후벼파는 느낌이 들 정도다. 오페라 공연을 직접 보면서 듣는 아리아는 '재생'을 통해 듣는 음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토스카>에 담긴 '별은 빛나건만'은 그 차이가 얼마만큼 클 수 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해준 아리아였다.

 

별은 빛나고, 대지는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채소밭의 문이 삐걱거리며
모래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그녀가 들어와
내 품속에 몸을 맡겼다.
오! 달콤한 입맞춤, 수 없는 나른한 애무(愛撫),
나는 떨면서 베일을 벗기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틈도 아쉬워하며....
이 사랑의 꿈은 영원히 사라졌다.
시간은 흘러갔다.
절망 속에 나는 죽는다. (반복)
이제 와서 이토록 아쉬운 것일까 목숨이란!
(목숨이란!)

 

 

 

 

 

 

 

 

 

<로엔그린>은 니체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작품임에 틀림없다. 한때 바그너와 절친한 사이였던 니체는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최초의 저작인『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또한 니체는 그 책에서 바그너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 뿐만 아니라 <로엔그린>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의 뒤를 이은 독일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가 열 살이던 1874년에 처음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바그너의 음악을 반대했던 보수적인 아버지 때문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뮌헨 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예술사를 공부했으나 나중에 다시 음악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문학 작품들을 주제로 한 교향시를 많이 작곡하였다. <차라투스트라>와 <돈키호테> 등이 대표적이다.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은 프란츠 리스트의 혼외자식이었던 24살 연하의 코지마 리스트(1837~1930)였다. 두 사람이 연애하던 시절, 스위스 루체른 호수 근처에 머물던 바그너와 독일 뮌헨에 있던 코지마는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Wille)와 표상(Vorstellung)으로서의 세계에서 따온 빌(Will)과 포어슈텔(Vorstel)이라는 가명을 사용해서 서로 은밀하게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1850년 8월에 바이마르에서 <로엔그린>의 초연을 지휘했던 인물이 프란츠 리스트였다.

 

 

 

 

 

 

 

 

 

 

 

 

 

 

 

 

시카고 심포니는 거물급 음악감독이 많이 거쳐갔다. 라파엘 쿠벨릭, 프리츠 라이너, 게오르그 솔티, 다니엘 바렌보임 등. 2008년 영국 ‘그라모폰’이 세계의 주요 오케스트라에 순위를 매긴 결과, 당당히 5위에 올랐다. 2000년대 들어 뉴욕 필하모닉이 주춤하는 사이에 미국을 대표하는 악단으로 자리잡았다. 올해 창단 125주년을 맞은 이 오케스트라는 총 62회의 그래미 어워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미국 악단 특유의 압도적 에너지가 일품이며, 특히 금관파트 연주력은 ‘세계 최고’라는 찬사가 나온다.

 

이탈리아 나폴리 태생인 리카르도 무티는 1941년생이고 2020년까지 음악감독으로 계약되어 있다.  그는 너무나 이탈리아적인 마초 기질을 지닌 인물이다. 라 스칼라 오페라를 맡았을 때에도 '성격' 때문에 불화를 자주 빚었다. 지휘봉을 칼처럼 휘두르는 전쟁 사령관 스타일이 그의 특징이다. '절도 있는 비팅을 통해 음의 시작과 끝을 위압적으로 컨트롤한다'는 평을 듣는다.

 

시카고 심포니가 2013년에 처음 한국을 찾아왔을 때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인 리카르도 무티는 독감 때문에 지휘봉을 잡지 못했다. 시카고 심포니와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셈이다. 최정상급 오페라의 공연답게 협주곡은 없다. 첫날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과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이튿날은 프로코피에프의 교향곡 1번 ‘고전적’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을 연주할 예정이다. 일찌감치 공연 예약을 해 놓고 혹시나 '좀 더 좋은 자리'가 없을까 하고 기웃거리다가 용케 '동급 최강'으로 여겨지는 자리로 바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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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뀐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까지 오느라 나 나름대로는 적잖은 품이 들었다. 그런데 글 하나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애쓰다 보니 그것도 결국 '흠'으로 느껴진다. 몽테뉴의 말대로 '결핍과 풍부는 똑같이 폐단이 되고 만다'는 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다. 아무튼 이런 공연들 가운데 공짜는 하나도 없다. 언제 어떤 연주회를 골라서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재정상태'에 딜려 있다. 폐단은 결국 '돈'에도 있다.


그대는 남은 재산에 골치를 앓고
나는 가난으로 골을 싸맨다.                                                                 (테렌티우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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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끝까지 읽는 사람들도 있을까? 더군다나 '숨겨 놓은 글'까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목이 잠겨 부르짖었다. 「정말 모르겠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냥 아무도 오지 않는 거다. 나는 아무에게도 무슨 나쁜 짓을 한 적 없고, 아무도 나에게 무슨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러나 사정이 그런 건 아니다. 아무도 지금 나를 돕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자 ─── ,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어여쁘지 않을 테니. …… 」

 

 - 프란츠 카프카, 「산으로의 소풍」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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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마을은 말하자면 어떤 공동체이다. 거기선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마치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인 양 시도 때도 없이 인사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꼭 인사성이 밝은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땐 다른 사람과 코가 맞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냥 아무런 인사도 없이 불쑥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간다.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굴'을 하나씩 파고 있다. 물론 활달한 사람들은 수시로 자신의 '굴'에서 빠져 나와 남의 '굴'을 열심히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 마을의 '성곽광장'으로만 나오면 길이 모든 방향으로 다 뚫려 있어 어느 굴에든 즉시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굴'만 열심히 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바깥 세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서로 어디서 왔는지, 앞으로 그 마을에서 얼마나 더 머물 것인지, 또 언제 떠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걸 드러내 놓고 밝히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굴'을 파는 일에 몰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끔씩은 자신이 파던 '굴'에서 기어 나와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훌쩍 나타나 또다시 자신의 '굴'을 파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이 오래 전부터 해야만 했던 일들을 새까맣게 잊고 살아왔다는 것처럼.

 

카프카의 소설들을 읽으면 '똑같은 해석'을 한사코 거부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다 다르게 읽히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아주 짧은 장편(掌篇)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다음에 인용하는『공동체』는 이 소설의 거의 전부를 옮겨 왔다고 봐도 좋다. 그만큼 짧다. 아래의 글을 읽으면서 어떤 이는 '독수리 五형제'를 떠올릴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이는 '五공주'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좋다. 그런 느낌을 받는다고 한들 어느 누가 그 사람을 탓할까.

 

그때부터 우리는 같이 살고 있다, 어떤 여섯번째가 자꾸만 끼여 들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생활이리라. 그는 우리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귀찮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히 무슨 짓인가를 하는 것이다, 싫다는데도 그는 왜 밀고 들어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를 모르며 우리들한테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우리 다섯도 전에는 서로 잘 몰랐으며, 굳이 말한다면, 지금도 서로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다섯에게서 가능하고 참아지는 것이 저 여섯번째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참아지지도 않는다. 그 밖에도 우리는 다섯이며 여섯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도무지 이 끊임없이 같이 있음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우리 다섯에게도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미 같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결합은 원하지 않는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상.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여섯번째에게 가르친단 말인가. ……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밀쳐내도 그는 다시 온다.

 

- 프란츠 카프카, 『공동체』 중에서

 

그런데 내가『공동체』라는 소설 속에서 문득 '북플'을 떠올렸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북플'이 무슨 사람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게 어째서 '여섯번째'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우리 다섯'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마당에. 그냥 나만의 엉뚱한 상상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언제부턴가 '알라딘 서재'에도 '북플'이 슬며시 끼어들어 어느새 한 쪽 구석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침침한 내 눈에도 빤히 드러나 보인다. 가끔씩은 우리에게 '느슨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뭐라고? 북플이 명령을 내린다고? 그럼 당신은 이런 명령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인가?

 

"당신은 어떤 분야의 마니아인지 지금 확인하세요"

 

나도 가끔씩은 그의 명령을 따른다. 혹시라도 나 자신의 '굴'을 파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해서. 그런데 이쯤에서 '나의 불만'을 얘기하지 않으면 나는 여섯번째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셈이 된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여태까지 '나의 굴'을 파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가 알 턱이 없잖은가. 더군다나 내가 속으로만 꽁꽁 숨겨 왔던 '나의 불만'을 여기서조차 입을 다문 채 영영 드러내지 않는다면 언제 또다시 꺼낸단 말인가.

 

갑자기 너무 엉뚱한 길로 새는 기분이 들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내가 파 놓은'굴'을 가끔씩이라도 심사하고 평가할 의무감을 느낄 때가 있다. 혹은 카프카가『굴』에서 표현한 대로 '마치 감독관이 오기라도 한 듯이 그리고 감독관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듯이' 느낄 때도 있다. 이것 말고도 이유는 더 있다. 나는 어쨌든 내가 파 놓은 굴 속에 응당 쌓여 있어야 할 양식들 가운데 일부가 헛되이 새나가는 듯한 '결함'을 오랫동안 견디는 것도 힘들다.

 

굴은 어차피 자연이 가해 놓은 약점을 숱하게 지니고 있으니 내 손이 만들어놓은, 뒤늦게야, 그러나 정확하게 인지된 이 결함 또한 같이 지니고 있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이 결함이 이따금씩 혹은 어쩌면 항상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여느 때의 산책에서 내가 굴의 이 부분을 멀리한다면 그것은 주로 그것을 보는 것이 나에게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굴의 결함을, 이 결함이 이미 나의 의식 속에서 너무도 심하게 소란을 부리는 바에야, 늘 눈으로 보기까지하고 싶지는 않은 때문이다.

 

 - 프란츠 카프카, 『굴』 중에서

 

나의 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결함들은 물론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대부분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얘기까지 꺼내면 내 장광설이 너무 길어질 게 뻔하다. 오늘은 그저 굴 파는 작업에서 결코 외면하기가 쉽지 않은 존재인 '북풀'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아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북플 마니아'에 대해서만 특별히 좁혀서 말하겠다.

 

북플은 그동안 나에게 적잖은 마니아를 선물했다. 물론 고맙다. 이게 다 나로선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던 덤이라고 생각하면 마땅히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거기엔 무슨 결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당하게 굴을 팠으면 응당 저절로 굴러 떨어져 쌓여야 할 '도토리'가 보이지 않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내가 그동안 적잖이 애를 쓰며 굴을 파들어갔던 그 '광산처럼' 단단하던 벽들은 아직 조금도 뚫리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제 그만 쉽게 풀어서 '광산'을 책에 비유해서 말해 보자. 어떤 광산이든 '작품이라는 광맥'과 '저자라는 광산의 소유주'가 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떤 '광산'의 경우에는 저자와 작품이 아예 모두 '마니아'에서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또다른 경우엔 '작품'은 마니아에 어엿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저자'만 쏙 빼놓은 경우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이들 저자와 작품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마니아'에서 빠진 것인지 나는 그게 자못 궁금하다. 내가 알고 있는 저자와 작품이 함량미달이어서 그런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랫동안 굴을 파 온 경험에 비춰 생각해 보면 결국 혐의는 '북플의 결함'에 둘 수밖에 없다.

 

 

 

지금 '북플 마니아'에서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나는 <저자/아티스트> 부문에서 38명의 '광산 소유주들'과 친한 모양이다. 그런데 미리 말했다시피 나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른 몇몇 '광산 소유주들'과도 친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을 이 글에서 직접 밝혀보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북플의 결함'은 물론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느끼지 못할 성질의 것이다. 그렇지만 나한테만 느껴지는 결함이 만약에 금세 고쳐질 수 있는 문제라면 그러한 '개선'이 다른 이웃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어쨌든 그런 결함이 쉽게 고쳐진다면 누구라도 종전보다는 분명히 더 많은 '광산 소유주'들과 친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① 내가 열심히 곡괭이질을 했다고 믿는 '광산' 가운데 저자와 작품 모두 누락된 경우

 

베르길리우스   (BC70∼BC19), 『아이네이스』

몽테뉴             (1533∼1592), 『수상록』

아담 스미스      (1723∼1790), 『국부론』,『도덕감정론』 

클라우제비츠    (1780∼1831), 『전쟁론』

쇼펜하우어       (1788∼186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앙리 베르그송    (1859∼1941),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창조적 진화』

막스 베버           (1864∼1920),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케인즈               (1883∼1946),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하이데거            (1889∼1976), 『존재와 시간』 

찰스 P. 킨들버거(1910∼2003),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②    "     작품은 일부만 등재되어 있고, 작가는 누락된 경우

 

헤로도토스        (BC484∼BC425),『역사』

투키디데스        (BC460∼BC400), 『펠로폰네소스전쟁사

키케로               (BC106∼BC43), 『의무론』(『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는 등재)

벤저민 그레이엄 (1894∼1976), 『증권분석』(『현명한 투자자』는 등재)

엘빈 토플러        (1928∼       ), 『부의 미래』

 

 

    "     작가만 등재되어 있고 작품은 누락된 경우

 

찰스 다윈          (1809∼1882), 『종의 기원』,『인간의 유래』

 

어쨌든 나로서는 마땅히 내 굴 속에 이미 굴러 떨어져 있어야 할 '도토리'가 몇 개쯤 거기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서운하다. 이런 결함은 빨리 고쳐졌으면 좋겠다. 어쨌든 저쪽 한켠에 자리잡은 북플은 결코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을 테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의 굴을 파는 일을 쉽사리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굴을 파다가 가끔씩 저절로 굴러 떨어지는 '한 알의 도토리'에 나는 기꺼이 즐거워 할 테니까.

 

나는 장소를 바꾼 것이다, 윗세계를 떠나 나는 나의 굴 안으로 왔으며, 굴의 영향력을 금방 느낀다. 이곳은 새로운 힘을 주는 새로운 세계이니, 위에서는 피로감인 것이 여기서는 피로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것이다, 힘이 들어 까무러칠 듯 피곤하지만 옛집을 다시 본다는 것,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돈 작업, 얼른 모든 방들을 겉핥기로라도 살펴볼 필요성,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껏 서둘러 성곽광장으로 달려갈 필요성, 그 모든 것이 나의 피로를 소란과 열성으로 변화시키니, 마치 내가 굴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에 깊고 긴 잠을 자고 난 것만 같다.

 

 - 프란츠 카프카, 『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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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부분은 이 시각 현재 '나의 북플 마니아' 가운데 <저자/아티스트> 부분만 통째로 긁어서 옮겨붙인 것이다. 며칠 전에 '비공개글 카테고리'에 이 내역을 저장해 둔다는 것이 그만 깜빡  '실수'로 공개글에 덜컹 등록되고 말았다.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 황급히 '비공개'로 돌렸다. 아무런 설명글도 없는 보잘 것 없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짧은 노출 시간 동안에도 '좋아요'와 '댓글'로 호감을 표시해 주신 이웃분들께 감사드린다. 결국 그 분들 때문에 이런 장광설을 늘어놓게 되었다. 때로는 그런 '실수'가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할 때도 있다. 아무쪼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저자/아티스트

 

  • 손택수
  • 8번째 마니아 (10명 중, 44점)
  •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 305번째 마니아 (331명 중, 42점)
  • 어니스트 헤밍웨이
  • 40번째 마니아 (42명 중, 42점)
  • 찰스 다윈
  • 2번째 마니아 (11명 중, 349점)
  • 로맹 가리
  • 12번째 마니아 (24명 중, 68점)
  • 윌리엄 셰익스피어
  • 47번째 마니아 (57명 중, 46점)
  • 이윤기
  • 32번째 마니아 (40명 중, 45점)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 2번째 마니아 (22명 중, 438점)
  • 허먼 멜빌
  • 11번째 마니아 (18명 중, 62점)
  • 조지프 캠벨
  • 10번째 마니아 (13명 중, 48점)
  • 소포클레스
  • 1번째 마니아 (12명 중, 280점)
  • 알베르토 망겔
  • 3번째 마니아 (12명 중, 331점)
  • 스티븐 제이 굴드
  • 5번째 마니아 (12명 중, 84점)
  • 스티븐 핑커
  • 1번째 마니아 (13명 중, 1520점)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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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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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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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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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통계든 장기적으로는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마련이다. 연평균 기온이나 강수량을 1년 단위로 비교해 보라. 해마다 얼마나 편차가 클 것인가. 하지만 50년 혹은 100년 단위로 묶어서 비교해 보면 그 편차가 현저히 줄 게 틀림없다. 사람의 체온이나 혈압도 늘 오르락내리락 불안정하게 움직이게  마련이지만 조금만 길게 관찰하면 일정한 수치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책을 읽는 행위에서도 어떤 통계를 만들어 관찰하면 장기적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수렴하는 현상이 생겨날까? '나의 독서 통계'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15년의 나의 독서 통계는 뭔가 약간은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는 듯하다. 아무리 천성적으로 놀기 좋아하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고 쳐도 1년에 고작 11권의 책만 읽었을 리는 없다. 그런데 바로 아랫부분으로 내려가니 금세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경제경영> 분야의 책을 100권 읽었으며, <천병희> 저자의 책을 28권 읽었습니다" 라는 '장기적인 통계'는 뭔가 '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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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해 주신 책들은 '원전 번역'이 대부분이어서 그 분의 번역이 아니면 아예 읽을 수 없는 책들이 많다. 특히나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들과 희극 작품들에 대한 풍부한 주석이 딸린 '원전 번역'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그 분께서 번역하신 책을 즐겨 읽었지만 한 번도 '몇 권이나 읽었는지' 따로 세어본 적이 없었다. 한가한 연휴니 만큼 그 통계나 한번 확인해 볼까 싶어 주섬주섬 책들을 모아 봤다.

 

 - 우선 7권, 서양 문학뿐 아니라 철학,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과 철학 등의 뼈대를 이루는 작품들

 

 

 - 12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포클레스, 이솝, 플루타르코스, 키케로의 작품들

 

 

 - 8권,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을 원전으로 모두 완역했고 드물게 남은 희극작품도 번역했다.

 

 

 - 17권, 이 책들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이 '아니면서도'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책들과 매우 유사한 책들이다.

    똑같은 작품이지만 단지 '번역자'만 틀리는 책들도 더러 있다.

 

 

 - 왼쪽 줄과 가운데 줄로 쌓은 책들이 천병희 선생님 번역본이며 총 27권이고 나머지가 17권, 모두 44권이다.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책들을 '실몰'로 재고조사를 해 본 결과가 놀랍다. 알라딘 나의 통계와 딱 1권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럴 땐 '그녀석 참 똑똑하네. 무슨 거짓말을 못하겠네' 싶은 생각이 든다.

 

 

 * * *

 

알라딘 상품넣기를 통해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하거나 쓰신 작품을 '출시일順'으로 '舊刊은 제외'하고 정리해 봤더니 대략 44권이다. 아직도 미처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이 자꾸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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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0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특정 작가의 책을 주문하면, 그 작가 마니아 지수나 독서 통계에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2년 전에 장 자크 상뻬의 책을 알라딘 중고점에서 많이 샀는데, 그 해 제가 가장 많이 좋아했던 작가가 상뻬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 상뻬의 책을 구입해놓고 서평을 남긴 적이 없는데 그런 통계 결과가 나왔어요.

oren 2016-01-04 12:01   좋아요 0 | URL
북플에서 집계하는 `나의 독서 통계`는 도서 구매 보다는 `북플에서 읽음 표시` 여부에 따라 집계되는 듯해요.(그냥 제 추측입니다.) cyrus 님께서 말씀하신 `한해 가장 많이 좋아했던 작가` 선정은 당연히(?) 도서 구매 실적에 연동되리라 추측되고요... 반면 `작가 마니아 지수`는 `도서 구매 실적 보다는 오히려 `글 작성 실적`에 더 크게 연동되는 듯하구요.

그런데 `마니아 지수`에서 정말 허술한 건 아주 유명한 작가에 대해서 아무리 자주 글을 올려도 정작 그 인물 자체가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와 있지 않은 경우도 적잖이 있더라는 점이지요.. 그 점은 저 말고 다른 분들도 많이 느끼리라 생각합니다.(가령 제 마니아 지수 가운데 `저자/아티스트`에 들어가 보면 제가 여러 번 글을 올렸던 저자들이 적잖이 빠져 있어서 더러 서운할 때도 있더라구요. 그런 인물들 가운데는 헤로도토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등 고대의 인물들도 있고, 몽테뉴, 쇼펜하우어, 앙리 베르그송 등 철학자들도 더러 있고, 아담 스미스, 막스 베버, 케인즈 등 걸출한 경제학자들도 있답니다.ㅎㅎ)
 

 

하늘에서 내려온 드문 영혼, 빅토르 위고.

 - 샤를 보들레르

 

 * * *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틀리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우리는 무엇이든 '봐야'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봄'은 그토록 기이한 우위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나는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이 유명한 뮤지컬을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작품의 원작인 빅토르 위고의『파리의 노트르담』또한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내가 이 작품에 대해 그동안 '봤던 것'이라고 굳이 몇 가지를 내세워 봐야 그건 그만큼 더 내가 봤던 것들의 빈약함을 더할 뿐이리라. 어릴 때 동화로 읽었던 <노틀담의 곱추>만 하더라도 얼마나 이 뮤지컬과 거리가 멀었던가. 그 동화는 단지 내가 오래 전에 유럽에 처음 갔을 때 봤던 '노틀담 대성당' 앞에서 그저 자연스레 떠올린 동화책의 제목일 뿐이었다. 그나마 라디오에서 여러 차례 들었던 <대성당의 시대> 라는 그 유난히 커다란 울림으로 들렸던 노래만이 이 작품과 연관지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끈이었다.

 

그렇게나 허약한 토대로도 이런 걸작 공연을 얼마든지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어쨌든 나는 눈만 뜨고 귀만 열어 놓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허약한 관객'일 뿐이었다. 적어도 이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뮤지컬이고, 더구나 '프렌치 오리지널 내한공연'이니 만큼 작품의 수준은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 원작임에랴. 운도 따랐다. 예약할 때도 몰랐고 공연 당일까지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캐스팅'조차 나무랄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이들 배우들은 하나같이 <노트르담 드 파리>의 '전설'로 통하는 인물들이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말자 음유시인 그랭구와르 역을 맡은 리샤르 샤레스트가 홀로 나와 <대성당의 시대>를 부르는데 머리가 쭈뼛 설 만큼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직접 무대를 보면서 배우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대성당의 시대>는 그저 어쩌다가 라디오로 흘려 듣는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대와 조명, 음악과 가사, 배우의 호소력으로 가득 찬 슬픈 노래는 마치 마법처럼 순식간에 모든 걸 뒤바꿔 놓았다. 오로지 공연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놀라운 몰입감이 주는 위력은 대단했다. 마치 순식간에 나를 포함한 관객들 모두를 파리의 대성당 앞 광장 속으로 이끌고 가는 듯한 강렬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이야기는 신의 권력이 강성했던 1482년,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 생긴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라네

이름있는 예술가들은

조각을 하거나 시를 읊어

이 이야기를 전하여 후세에 길이 남게 하리

대성당의 시대가 왔네

새로운 세상 새 천 년을 맞이하며

인간은 저 높이 별에 닿아

역사를 새기네, 유리와 돌 위에


그 쌓인 돌과, 그 세월들이 흘러

한 세기를 새겨가고

인간은 그들의 손으로 세운 탑들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네

시인도 음유시인도

온 인류의 아름다운 날들을 약속하는

사랑의 노래를 불렀네.

 

<대성당의 시대> 중에서

 

 

 

 

이렇게 '시인의 노래'로 시작되는 기나긴 이야기는 오로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만 붙어 사는, 좀 더 심하게 얘기하면 대성당의 부속물로까지 여겨질 만한 여러 등장 인물들의 '삶과 사랑'을 우리 앞에 송두리째 내보인다. 그들에게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신분과 외모와 처지의 격심한 차이'들은 그들 사이에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무너져내린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일으키는 놀라운 소용돌이와 마법 같은 힘 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서로 급격히 휩쓸린다. 자신의 삶의 전부가 뒤바뀔지 몰라도 그들은 사랑의 힘을 결코 거역할 수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갈구하는 사랑 앞에서 삶의 다른 모든 측면들은 하나같이 무의미해지고 약화되고 만다.

 

이야기의 무대가 '사랑'을 빼놓고는 결코 얘기하기 어려운 프랑스의 파리, 그 속에서도 노트르담 대성당을 한가운데 두고 있다는 점만 해도 흥미로운데, 등장 인물들이 성당의 종지기 곱추, 집시 여인, 대성당의 주교, 음유시인, 파리의 근위대장 등으로 이뤄져 있다 보니 각각의 인물들이 자아내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잇따르는 수많은 장면들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같이 극적이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시대적 배경조차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흔하게 일어나던 중세이다 보니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무대 전면에 깔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분위기에 강한 역동성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요소는 '거리의 방랑자들'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앞뜰 광장에서 우두머리 클로팽이 자신의 패거리들과 함께 '은신처'를 요구하며 항거하듯 부르는 노래와 춤들은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외침이다.

 

 

우리들은 이방인, 불법체류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거리의 부랑자

오! 노트르담!

우리에게 은신처! 은신처를!

 

 

노트르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려는 집시 무리를 저지하려는 사람은 대성당의 주교 프롤로다. 그는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의 온갖 권위와 사법권을 포함하는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근위대장 페뷔스에게 집시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그 와중에 아름다운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가 등장하며 자신의 운명이 담긴 듯한 구슬프고도 매혹적인 노래 <보헤미안>을 부른다.

 

 

보헤미안, 보헤미안

내가 온 곳을 그 누가 알까

나는 거리의 여인

보헤미안, 보헤미안

내가 어디로 갈지, 그 누가 알까

보헤미안, 보헤미안

내 손금에 써 있을까?

 

<보헤미안> 중에서


 

여덟 살 때부터 에스메랄다의 보호자를 자처해 온 클로팽은 에스메랄다에게 '남자들의 음흉함'을 충고하며 조심할 것을 당부한다. '이제 너도 사랑할 나이가 된 거란다. 이젠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남긴 채. 대성당의 주교인 프롤로는 에스메랄다를 종교적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종지기 콰지모도에게 그녀를 납치해 성당안으로 데려올 것을 명령한다. 어릴 때부터 괴물처럼 못생긴 추남이자 절름발이 곱추였던 콰지모도를 입양해 '글을 읽고 쓰는 법'까지 가르쳐준 인물이 바로 프롤로였다. 콰지모도는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콰지모도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한다.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 하지만 청년 근위대장 페뷔스가 이를 제지한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페뷔스와 에스메랄다는 '내일 해가 질 무렵, 땅거미가 꺼질 때, 발 다무르 카페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페뷔스는 파리 태생의 귀족 처녀 플뢰르와 이미 약혼한 사이였지만 에스메랄다를 만나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빠져들고, 한동안 두 여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에게 어느새 마음을 빼앗긴 프롤로는 질투에 눈이 멀기 시작한다. 그랭구와르는 성당의 벽에 새겨진 '아나키아'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프롤로 주교는 그리스어로 '숙명'이라는 뜻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는 사이에 비운의 종지기는 바퀴형틀에 묶여 광장으로 끌려나온다. 죄인으로 뒤바뀐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한 모금의 물 뿐이었다.

 

 

가엾은 콰지모도를 볼쌍히 여겨주오

그의 등은 이미 지상의 모든 불행을 짋어지고 있네

그가 원하는 건 물 한 모금뿐

구경꾼들이여 이 종지기에게 자비를

콰지모도에게 물 한 모금만

물 좀 주오! 내게 물 좀 주오!

물 좀! 물 좀!

내게 물 좀 주오...

 

<물을 주오> 중에서

 

 

에스메랄다가 콰지모도에게 다가가 물을 건네주고, 콰지모도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되풀이하며 중얼거린다. 곧이어 콰지모도, 프롤로, 페뷔스는 저마다 에스메랄다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다. 제1막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노래는 프랑스에서 44주간 1위를 차지하였으며 1998년 당시 싱글앨범으로 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말

춤추는 그녀의 몸짓은

마치 비상을 위해 날개를 펼치는 새와도 같네

 

내 두 눈은 집시 여인의 치마에 머물렀네.

성모 마리아께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어느 누가 집시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런 자,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도 없네

 

오, 사탄이여! 오! 단 한 번만이라도

에스메랄다의 머리결을 쓸어넘길 수만 있다면

 

 

아름답다..

그대는 정녕 사탄의 정령이어서

나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저버리게 하려는가

내 안의 쾌락의 정념을 달구어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게 하려는가

 

숙명의 원죄를 가지고 있는

그녀를 향한 나의 욕망만이 죄가 되련가

자유의 여인이여 쾌락을 파는, 천한 여자일진대

갑자기 인류의 십자가를 지는 듯하네

 

오! 성모 마리아여! 오, 단 한 번만이라도

에스메랄다 낙원의 문을 열 수 있게 해 주오

 

 

아름답다..

남자를 유혹하는 커다란 검은 눈동자여

그대는 아직 순결한가

그대가 춤출 때 무지개 빛 치마 속으로

속세의 경이와 황홀을 보았네

 

나의 정인이여 결혼의 성전으로 가기도 전

그대에게 충실하지 못함을 용서하고

어느 누가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금동상으로 변하는 천형이라도 감수하리

 

오 플뢰르 드 리스 난 진실한 남자가 못 된다오

에스메랄다 사랑의 꽃을 꺽으러 가리니

 

<아름답다> 중에서

 

 

 

바퀴형틀에서 풀려난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성당 안으로 데려간다. '겨울엔 덜 춥고, 여름엔 덜 덥고, 피난처가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말만 해요. 나의 집은 너의 집'이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방인 에스메랄다는 처음으로 <아베마리아>를 부르며 간절히 기도한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현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프롤로는 자신이 평생 동안 지켜온 신념과 에스메랄다를 향한 정념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녀의 치명적인 매혹을 끝내 거부하지 못한 채 평생의 신념을 버린 후 겪게 될 고통을 예견하면서 괴로워한다. "네가 나를 파멸시키는구나. 네가 나를 파멸시키는구나. 너를 저주하리, 내 생이 끝날 때까지."

 

페뷔스는 에스메랄다를 만나러 가고, 프롤로는 그를 미행한다. 온통 페뷔스에게 반한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와 발 다무르 카페에서 만난다. 에스메랄다와 페뷔스가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프롤로는 마침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에스메랄다의 단도로 페뷔스를 찌르고 만다. '숙명'이 지배하는 순간이다. 곧바로 그랭구와르가 '숙명'에 대하여 노래한다. 1막은 여기서 끝난다.

 

 

숙명이여! 우리 운명의 여인이여!

숙명이여! 그대 우리의 곁을 지나갈 때

숙명이여 왕자런가 거지런가

숙명이여 여왕이런가 창녀런가

숙명이여 우리 삶과 인생이 그대 손안에 놓였구나

숙명이여! 숙명이여! 숙명이여!

 

 

 

 

2막이 열리면 다시 시인의 노래가 시대를 앞서 '세상의 변화'를 미리 알린다.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인도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목표와 신념'이 1막 보다 훨씬 더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2막의 첫 시작은 세계의 변화를 노래하는 <피렌체>다.

 

 

피렌체와 르네상스 이야기를 들려다오

브라만트와 단테의 "지옥편"을 들려다오

피렌체에서는 지구가 둥글 거라 하고

지구상에는 또 다른 대륙이 있을 거라 하네

배들은 벌써 인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대서양을 향해 떠났네

루터는 신약을 다시 쓸 것이고

우리는 분열의 시대 문턱에 서 있네

구텐베르크는 세상을 변화시켰고

뉘른베르크 인쇄소에서는 쉴 새 없이 인쇄물이 쏱아지네

인쇄된 시들과 연설문과 팜플렛

새로운 생각들이 모든 것을 바꾸리라

작은 일은 항상 큰 일들의 일부에서 오는 법

그리고 문학은 건축을 파괴시키고

성경은 종교를, 인간은 신을 파괴할 것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할 것이다

 

<피렌체> 중에서

 

 

에스메랄다가 체포되고 난 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콰지모도는 벌써 3일째 종을 울리지 않고 있다. 종은 그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데도 말이다. 콰지모도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미치고, 사랑에 번민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토록 종을 애인이자 친구로 여기며 살아왔던 콰지모도에게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전부이고 종은 이제 그녀를 위해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내가 울리는 종들은 내 사랑, 내 애인이죠

나는 종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노래 부르길 원해요

우박이 떨어져도 천둥이 쳐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동들이 울리기를 원해요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탄생을 알리는 종

죽음을 알리는 종

매일 매시 밤낮으로 울리는 종

······

이 모든 종들 중에 나를 위하여 울리는 종은 하나 없네

내가 울리는 종들은 나의 친구 나의 애인

에스메랄다가 살아 있다면 나팔소리로 울려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노라고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성당의 종들> 중에서

 

 

 

 

 

에스메랄다가 체포된 이후 부터 무대는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그녀 없는 세상'은 이제 우울하게 변하기 시작하고 침울하게 뒤바뀌고 번민으로 휩싸인다. 라 쌍테 감옥에 갇힌 그녀를 떠올리며 부르는 회상의 노래들이 애절하게 울려퍼진다. 에스메랄다를 감옥에 가둔 프롤로는 짐짓 모른 체하며 그랭구와르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는다. 클로팽도 에스메랄다를 걱정하며 두 사람의 노래에 끼어든다

 

 

당신은 신부, 나는 시인 우리들은 아내가 없잖소

신부에겐 종교, 시인에겐 시가 있지 않은가

 

너의 에스메랄다 그녀는 어디 있나

그녀 없는 파리의 거리는 슬픔 뿐이네

 

그녀를 악마로 보는 이로부터 멀리 떨여져

작은 탑 안에 홀로 있지

 

시인이여 무슨 말이냐 악마의 혀를 가졌구나

들러대지 말고 봤는지나 말하거라

 

나의 에스메랄다,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

도둑들의 궁정이 여왕을 잃었네

 

그녀는 두 날개가 잘린 가엾은 제비 같이

'라 쌍테' 감옥에 갇혀 있네

그녀를 구해내지 않으면 교수형을 선고받으리

 

더이상 말하지 말게

우리의 에스메랄다 그녀는 어디에 있나

그녀 없는 파리의 거리는 슬픔 뿐이네

그녀는 두 날개가 잘린 가엾은 제비 같구나

 

<그녀는 어디에?> 중에서

 

 

창살 많은 감옥에 갇힌 에스메랄다도 안타까운 노래로 호소한다. 도와달라고. 에스메랄다의 행방을 모르는 콰지모도 역시 그녀를 그리워한다. 자신에게 물을 주었던 그날을 회상하며... 에스메랄다는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었고, 콰지모도는 자신을 버려진 아이로 여기고 있다. 서로 다시 사랑 받을 수 있는 날들을 기다리며...

 

 

새장에 갇힌 새가 다시 날 수 있을까?

버림받은 아이들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제비처럼 봄과 함께 왔었지

집시의 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을 뛰어 다녔지

성당의 종지기, 넌 어딨니

나의 콰지모도, 넌 어디 있니

밧줄을 풀고 창살을 열어 나를 구하러 와줘

 

 

나의 에스메랄다, 그대 어디 있나요?

나를 피해 어디로 숨었나요?

그대 보이지 않은지 벌써 3일이나 되었네

그대의 멋진 기사와 여행을 떠났나요

이교도의 풍속처럼 약혼도 결혼식도 없이

혹시나 죽었을까? 기도도 왕관도 없이

 

'사람들이 나를 바퀴형틀에 매단 날'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린 영원한 친구가 되었네

우리 둘 사이에 강렬한 무언가가 생겨났지

 

새장에 갇힌 새가 다시 날 수 있을까?

버림 받은 아이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새장 속에 갇힌 새> 중에서

 

 

에스메랄다는 감옥에 갇힌 채 재판을 받는 동안에 자신이 살인죄가 아닌 상해죄로 기소된 것을 알고 페뷔스가 살아있음에 기뻐한다. 에스메랄다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페뷔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거듭 맹세하고, 프롤로는 결국 그녀에게 교수형을 선고한다. '신부가 되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두고 프롤로가 자신의 고통과 갈등을 노래하는 대목은 처절하다. 원래 사랑의 본질이 그러하니 그 어떤 강한 신념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사랑의 형이상학'을 뛰어넘을 힘은 없는 셈이다.

 

에스메랄다는 페뷔스가 자신을 구하러 와주기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근위대장은 자신의 옛 애인에게로 되돌아간다. 그에게 에스메랄다는 애초부터 하룻밤 풋사랑 같은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편 에스메랄다의 교수형 집행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새벽 5시에 프롤로 주교는 에스메랄다 앞에 불쑥 나타난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그녀를 풀어주겠다고 유혹한다. 형틀에 묶인 춘향이를 협박하는 변사또의 모습 그대로다. 동서고금에 어디 완력으로 사랑을 얻은 적이 있었던가. 그저 "예"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된다고 끈질기게 설득하지만 그녀는 끝내 "가버려" 하며 거부한다.

 

한때 체포됐던 클로팽과 집시 무리들은 콰지모도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저 다시 '은신처'일 뿐이다. 배경이 바뀌며 이제 초생달이 뜬 캄캄한 밤이 된다. 음유시인 그랭구와르는 '달'을 보며 사랑으로 고통 받는 인간의 삶을 감미로운 선율로 노래한다.

 

 

달아. 파리의 지붕 위

저 위에서 빛나는 달아

보라, 인간이 얼마나 사랑으로 번민하는지

 

아름답고 외로운 별아

아침이 오면 사라지는 별아

들어보라

너를 향해 솟아오르는 지상의 노랫소리를

불행한 한 남자의 외침을 들어라

그의 눈에는 수백만의 별들보다

그가 죽도록 사랑하는

그 여인의 눈빛이 더 밝게 빛나니

달아

 

달아

아침이 오기도 전에 저 위에서

스러지는 달아

들으라

포효하는 인간의 가슴이 고동치는 소리를

그것은 비탄하는 콰지모도의 하소연

그 한탄의 목소리가 산과 계곡을 넘어 울려 퍼져

네가 닿으려 한다

달아

 

그의 목소리가 천사의 노래 속으로 스며들어

이 이상한 세상을 살펴 주어라

달아

내 펜 끝을 비추려고 저 위에서 빛나는 달아

보라 인간이 얼마나 사랑으로 번민하는지

사랑으로

 

<달> 중에서

 

 

에스메랄다는 콰지모도의 도움으로 성당 지붕에 피신하고,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잠든 에스메랄다을 지켜보는 콰지모도는 추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세상의 불공평함'을 노래한다.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지

그는 그렇게 멋지고, 나는 이렇게 추하고

나는 그녀에게 달을 주고 싶은데

그녀는 나의 사랑을 원하지 않네

‥‥‥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지

그는 주인이고, 나는 하찮은 인간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그는 당신에게 달을 선사하겠지

‥‥‥

 

그대 뛰어난 미모에 비해

나의 추한 몰골은 모독이지요

타고난 운명으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몸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지

내 몫은 항상 그들의 몫과 다르지요

우리는 재물이 없어요

하지만 그들에겐 가슴이 있던가요?

그들은 비단금침을 감고 나왔지

사랑을 하고 전쟁에 나가지

가련한 땅 벌레들 같은 우리지만

우리의 인생이 더 아름답지요.

 

신은 누구 편인가요?

오만한 자들의 편인가요

아니면 밤낮으로

신께 기도 드리는 자들의 편인가요?

 

……

서로를 갈구하는 두 사람에게

삶은 어찌 이리도 잔인한가요

 

<불공평한 이 세상> 중에서

 

 

잠에서 깨어난 에스메랄다는 '죽고 싶지 않다'고 노래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리라 다짐한다. 파문도 없고 금기도 없는 삶을 택하리라 다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리라 다짐한다. 밤이 낮을 사랑하듯 그렇게 사랑하며 살리라 다짐한다. 그 사랑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집시 무리들은 또다시 '은신처'를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키고, 주교는 불법체류자들을 타도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 와중에 클로팽이 죽는다. 집시들의 폭동에 적극 가담한 에스메랄다는 결국 마녀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노트르담 대성당 탑 위에서 에스메랄다의 교수형 집행을 지켜보던 프롤로는 콰지모도에게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저지른 일임을 밝힌다. 그녀가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이 그녀를 죽인 이유였다고 말이다. 충복처럼 그를 따르던 콰지모도는 격분에 휩싸여 주교를 탑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인다. 성당의 종들은 댕댕댕 울리고... 교수형을 당한 에스메랄다를 발견한 노트르담의 곱추 종지기는 비탄에 빠져 절규한다. "그녀를 내게 주오. 그녀를 돌려주오. 그녀는 내 여자요. 가지 마오. 내 곁에 있어 주오. 에스메랄다!"

 

죽은 에스메랄다를 끌어안은 채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부르는 종지기의 마지막 노래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에스메랄다를 사랑했던 종지기는 끝내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녀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에스메랄다가 교수형에 처해진 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더이상 콰지모도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죄인들의 무덤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두 구의 뼈가 발견되고, 하나는 한쪽 다리가 짧아 콰지모도의 것이라 여겨졌다. 사람들이 엉켜있는 두 개의 뼈를 서로 떼어 놓으려 하자 먼지처럼 부스러졌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얼싸안은 우리의 뼈를 땅 속에서 찾으리

콰지모도가 얼마나 에스메랄다를 사랑했는지

 

어둠의 독수리여

나의 살을 뜯고 나의 피를 마셔라

죽음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하나가 될 수 있게!

 

지상의 불행으로부터 탈출하여

내 영혼이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내 사랑이 스며들게

우주의 불빛 속으로

우주의 불빛 속으로

 

춤 추어라 나의 에스메랄다

노래하라 나의 에스메랄다

춤추어요 나를 위해 조금만 더

나 죽도록 그댈 원해요

 

춤 추어요 나의 에스메랄다

노래해요 나의 에스메랄다

나 그대와 함께 떠나게 해 주오

그댈 위해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죠

 

 <춤을 춰요, 나의 에스메랄다> 중에서

 

 

 

 

중세에 벌어진 특별한 인물들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가 이토로록 절절한 호소를 담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무엇보다도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이 워낙 탁월한 점에 있겠지만, 그건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까지도 이 뮤지컬에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내가 보기엔 이 뮤지컬은 원작, 극본 및 가사, 음악, 연출, 안무, 무대디자인 등등이 특별히 훌륭하게 결합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생생하게 들려주는 프렌치 오리지널 배역 배우들의 훌륭한 노래 솜씨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여태껏 이토록 가슴에 콕콕 다가와 박히는 음악과 가사들을 그리 자주 접해보지 못했다. 이토록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제작진 모두에게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이 멋진 공연을 나중에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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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제36절 호기심> 中에서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

 

연정은 겉보기에는 별나라 같아도, 사실은 성욕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니, 이 본능이 특수화된 것이며 개체화된 것이다.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이 희곡이나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거기서는 자기보존 본능과 함께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며, 모든 동작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다) 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관찰하면, 언제나 모든 생애

 

에서 가장 젊은 시절, 즉 청춘시절 뭇사람들의 정력과 사고를 거의 절반쯤 강제로 동원한다. 또한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진리 탐구 정신이 투철한 사상가라면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즉, 그것은 결코 작은 일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그 중대성은 그것을 추구하는 경우 맞닥뜨리게 되는 진지하고 열렬한 모습에 맞먹는다.

정사의 목적은 비극으로 나타나든 희극으로 나타나든 인생의 여러 가지 목적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것이며, 누구나 끈질기게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다음 세대의 조정이라는 중대한 일이며, 다음 무대 위에 우리를 대신해 등장할 인원은 이같이 사소한 장난처럼 보이는 정사에 의해 그 존재와 양상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 미래에 인간이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성욕을 절대조건으로 삼고 있는 한편, 그들의 성격적인 특질인 본성(essentia)은 성애의 개체적인 선택을 절대조건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모든 점이 변함없이 결정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일시적인 사랑에서 가장 뜨거운 정열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모든 형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진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는 이성을 선택하는 개인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연애를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크게 보면, 다음 세대의 성립을 숙고하고 그 뒤의 무수한 세대에 대해 배려하는 진지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실 그것은 다른 정열같이 개인의 불행이나 이익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고, 앞으로 돌아올 인류의 존재와 그 특수한 양상에 관한 것으로, 이 경우 개인의 의지는 가장 높은 능력에 도달하여 자신을 종족의 의지로 돌아가게 한다.

연애란 엄숙하고도 뼈아픈 것으로, 큰 환락과 고뇌가 따르는 까닭은 종족에 관한 커다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몇천 년 전부터 수많은 예를 들어 그것을 묘사했다. 이 주제는 종족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그밖의 어떤 주제도 더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즉 개인과 종족의 관계는 물체의 표면과 물체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옛날부터 다루어온 진부한 것임에도 언제까지나 고갈되는 일이 없다.

(중략)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정사는 결국 자식을 낳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따라서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의 우여곡절은 부수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고결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은 내 주장이 지나친 실재론이라고 반박할 테지만, 이것은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등장할 인류의 외모와 성격을 정밀하게 선정하는 일은 그들의 꿈이나 공상보다 훨씬 고귀한 목적이 아닌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목적들 중에서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목적을 인정하지 못하면 사랑의 뜨거운 정열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정열이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고 극히 하찮은 일도 일단 이 목적과 관련 맺으면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연인을 위해 동분서주하거나 서둘러 접근하는 노력이나 노고는 언뜻 보아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대가보다 커보이는데,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위에서 말한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노고와 투쟁을 거쳐 현재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성적인 성격을 갖고 태어날 다음 세대의 인류다. 아니, 다음 세대의 인류는 벌써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저 사랑이라는 이름의 면밀하고도 끈기 있는 이성의 선택에서도 나타나 있다.

(중략)

이제 문제의 핵심에 대해 언급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심이 깊이 뿌리박혀 개개인에게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하고도 분명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 이외에 없다. 종족은 개체에 대해 분명 우선권을 가지며, 보다 직접적이고 큰 권한을 갖고 있다. 종족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개체는 희생되어야 하는데, 개체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쏠려 있으므로 개체에게 이런 희생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해시켜야 한다. 그렇다 해서 개체에게 자신의 이해관계로부터 떠나게 할 수는 없으므로 자연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환상을 심어주어 개체를 기만할 수밖에 없다. 이때 개체는 이 환상에 미혹되어 사실은 종족에 관한 일인데도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것처럼 오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개체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이미 자연의 무의식적인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의 눈앞에는 곧 탐스러운 환상이 나타나 이를 추구하게 된다. 이 환상이 다름아닌 본능으로, 그 대부분은 개체 의지가 아닌 종족 의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자기 이상에 맞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면 남성은 미칠 듯한 정열을 일으키며, 이 여성과 결혼했을 경우 맛볼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 환영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정열도 따지고 보면 '종족의 의지'며, 이것이 여성에 대해 스스로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보이며 그녀를 통해 자신을 유지해 나가려고 한다.

(중략)

그런데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들이 일단 그 정열을 충족시키면, 곧 미궁에서 벗어나 그처럼 열망했던 것이 얼마 안 가 실망을 안겨주는 일시적인 쾌락만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욕망에 대해 종족과 개체, 무한과 유한 같은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충족으로  종족만이 실제적 이득을 보게 되나, 개체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개체가 종족의 의지에 따르게 되어 지불한 희생은 그 자신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에 사용된 것이다. 모든 연인은 성교라는 큰일을 한 번 치르고 나면 곧 속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종족의 도구가 되게 한 환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성적 쾌락은 최대의 사기꾼"이라는 명언을 남기게 되었다.

(중략)

그러므로 종족의 영혼은 개체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보다 월등히 중요한 일을 처리한다고 자부하며, 전쟁의 불바다 속에서건, 분주하게 사무를 집행하는 중이건, 페스트가 창궐하는 중이건, 또는 한적한 절 속이건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자기 일을 수행한다.

(중략)

사랑이 어느 유일한 이성에게 쏠리게 되면 굉장한 힘과 열을 내어, 만일 사랑이 맺어지지 못하면 본인에게는 세계의 훌륭한 것들이 시들하게 보이고 나아가 목숨까지도 하찮게 생각되며 이 정열을 불태우기 위해 어떤 희생도 두렵지 않게 된다. 그 격정은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으며, 때로 미치거나 자살까지 하게 만든다.

(중략)

질투가 괴롭기 이를 데 없는 정념(情念)인 것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만하고, 또한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을 단념하는 일이 어떤 희생보다 크게 여겨지는 것도 납득이 된다. 영웅은 일상적인 일로 비탄에 빠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사랑의 비애에 대해서는 비탄을 억누르지 못한다. 이 경우 비탄에 빠지는 것은 본인 자신이 아니라 종족 자체이기 때문이다. 칼데론의 훌륭한 희곡 《위대한 제노비아》제2막에 제노비와 데시우스가 등장하여 데시우스가 말한다.

"아, 하늘이여, 당신이 날 사랑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백 번이라도 승리를 포기하겠소. 적진에서 도망쳐버리겠소."


여기서는 여러모로 이해타산적인 명예가 무시되고 그 대신 사랑, 즉 종족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명예와 의무, 그리고 충성은 지금까지 유혹이나 심지어 죽음의 협박에도 저항해 왔으나, 종족의 이해 앞에서는 고분고분 양보하고 굴복해 버린다.


(중략)

일단 종족에 대한 이해가 강조되면 개체에게만 관련되는 이해는 다 거기에 순종하며, 때로는 희생이 되기도 한다. 이같이 인간은 자신에게도 종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며, 자기가 개체 안에서보다 종족 가운데에서 더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에 빠진 자는 무엇 때문에 연인에게 완전히 얽매여 애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려고 하는가? 애인을 그리워하는 건 결국 그 사람 속에 깃든 영구불멸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밖의 것들은 오직 허망하게 생멸하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열렬한 사모의 감정은 우리 본성이 불멸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광명을 던져주는 것으로, 이를 요약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성적 욕망에 의한 이성의 선택은 차츰 열기를 더하여 드디어 열렬한 사랑에 이르고, 이것은 앞으로 나타날 인류의 특수한 개성적인 소질이 종족 속에서 존속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중략)

이 내재적인 본성이야말로 의식의 핵심이고 그 근저에 있으며 의식 자체보다 더욱 직접적인 것, 즉 개개의 원리에서 떠난 물자체(物自體)다. 개체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어디에 흩어져 있더라도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내가 다른 말로 '살려는 의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생명의 존속을 요구하며 죽음이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힘이다.

 - 쇼펜하우어, 『인생을 생각한다』중 '사랑의 형이상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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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6-01-02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새해 첫인사 드리네요. 새해에도 항상 책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이 뮤지컬은 국내 초연 때 한 번 보고 감동받아서 얼마 후 한 번 더 본 기억이 나네요. 물론 공연 DVD로도 몇 번 더 봤구요. Oren님 페이퍼 보니 그때 감동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

oren 2016-01-02 12:23   좋아요 0 | URL
새해 첫 글에 첫 인사를 야클 님으로부터 받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야클 님은 이 뮤지컬을 국내 초연으로 보셨다니 어언 10년 전에 만났던 작품이었군요. 첫 공연 이후로도 공연을 한번 더 보시고 DVD로도 여러 번 더 보셨다니 그때 받았을 감동의 크기가 짐작되고도 남네요. 저도 이 공연을 본 지 어느새 한달도 더 지났는데 그때 받았던 격한 감동이 계속 맴돌아 이렇게 기나긴 글로 옮겨 보게 되네요. 심금을 울리는 매혹적인 노래들이 너무 많아 가사들을 일일이 `채록`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들을 거듭 반복해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야클 님께서도 올 한해 좋은 책들과 더불어 멋지게 보내시길 바랄께요~~
 

 

어리석음과 지각의 혼란은 잠깐 가르쳐 주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것을 교정하는 문제에는, 막 전투하려는 마당에 군대의 사기를 북돋워 달라고 재촉하던 자에게, "사람들은 훌륭한 연설 한마디로 당장에 용감해지거나 잘 싸우게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좋은 노래를 듣고, 바로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키로스가 대답한 말이 바로 적용된다. 그것은 미리 오래 두고 꾸준한 훈련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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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밤 음악 공연은 내겐 약간 혼란스러웠다. 제법 기대가 컸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제대로 몰입이 되지 않았고, 뒤이어 연주된 교향곡 4번은 내 가슴에 격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지각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달리 나타나는 분야가 '음악'이라고 하지만, 똑같은 사람이 듣는 음악도 불과 몇십 분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크게 엇갈릴 수 있다는 사실이 영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고찰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뒤따를 자를 보지 못했던 몽테뉴가 한 말이 과연 맞았다.

 

지금의 나와 조금 전의 나는 확실히 둘이다.

 

이번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이 연주한 작품은 모두 슈만의 곡이었다. '슈만 집중 탐구 프로젝트'인 셈인데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 <피아노 협주곡 Op.54>와 <교향곡 4번>이 무대 위에 올려졌다. 나는 이 공연을 예매할 때부터 약간은 망설였다. 지휘자인 파보 예르비와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내게 낯설지 않았지만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슈만의 작품들은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보 예르비는 이번에 여섯 번째로 내한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왔던 2012년에 처음 만났다. 그 연주를 듣고 나는 단번에 그의 지휘에 매료되었다. 그 때 협연했던 힐러리 한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도 좋았고, 특히 말러 5번 교향곡이 멋지게 마무리된 직후의 '감동의 도가니'를 잊지 못했다. 파보 예르비가 그런 관객들의 흥분을 보고 자신마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곧바로 포디엄으로 뛰어올라가 오케스트라를 마구 휘저으면서 들려주었던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은 또 얼마나 마법처럼 순식간에 그 시공간을 아름답고 영롱하게 물들였던지 그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그날 그 지휘자는 마치 내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듯 앙코르 연주를 무려 세 번씩이나 들려줬고, 밤 11시가 넘도록 팬들을 위해 아낌없이 싸인을 남겨주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그는 언제나 내게 '팬들의 굳은 믿음'을 절대로 무너뜨릴 것 같지 않은 인물로 단단하게 각인되었다.

 

 

협연자로 나선 김선욱은 엊그제 세 번째로 만났다. 2010년 5월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영국 필하모니아를 이끌고 내한했을 때 일산 아람음악당에서 처음 만났고, 그 해 늦가을에 '영국 진출 후 첫 전국투어 리사이틀' 첫날 공연때 아람음악당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두 번 모두 좋았다. 첫 번째 인상은 이랬다. 이미 명성이 자자한, 먼 데서 오신 하얀 머리의 노신사, 자그마한 체구에 무척 나이가 든 모습으로 등장한 아쉬케나지는 얼굴에 묻어나는 온화한 미소가 이미 온 몸으로 다 퍼져나간 것처럼 첫느낌이 참 따스했다. 그래서 그만큼 더 대비되는 젊은이 김선욱도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새까만 머리에 하얗고 반듯하고 해맑은 얼굴이지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미소는 찾아 보기 어렵고 어딘지 모르게 진지함만 계속 묻어나는 그 젊은 피아니스트는 늙은 지휘자와 그렇게 서로 묘한 대조를 이뤘다.

 

김선욱과 아쉬케나지를 난생 처음으로 만났던 내가 그날 들었던 음악은 그저 '정말 좋았었다'는 정도로만 요약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들려줬던 음악보다는 그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상이 내게 훨씬 더 강렬하게 새겨졌음에 틀림없다. 그 때의 '감상'을 남겨둔 기록조차 없으니 그때의 나의 '음악적 지각'을 무엇으로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이며 무엇으로 또 되짚어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김선욱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들었던 베토벤의 '월광'은 정말 대단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피아니스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자리를 잡은 덕분이었다.

 

지난 18일 경기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다소 창백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런 낯빛과는 상관없이 김선욱은 무섭게 베토벤 선율에 빠져들었다. 베토벤 3대 후기 소나타 중 걸작 30번으로 문을 연 뒤 베토벤 소나타 14번 '월광'으로 이어지면서 연주는 후끈 달아올랐다. 슈만의 '아라베스크'와 '크라이슬레리아나'에선 특유의 화려한 손놀림으로 관객을 빨아들였다. 앙코르곡으로 브람스 '인터메조', 슈베르트 '즉흥곡'을 선사하자 객석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영국 진출 후 첫 리사이틀 전국 투어' 첫 테이프를 끊은 이날 김선욱의 연주는 예상대로 유쾌했다. (2010.11.19 뉴스에서 발췌)

 

나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따로 예습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거푸 이어지는 송년 모임이 끝나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온 뒤에도 유튜브를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찾아낸 '슈만 피아노 협주곡 연주 실황' 가운데 최고는 당연히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였다. 그녀의 연주를 지난주에만 너댓번은 들었던 듯하다. 그녀는 이미 50년 전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사실조차 그녀를 수식하는 더 멋진 장식이 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건반 위의 마녀'로 불리는 현존 최고의 피아니스트다.

 

 

 

 

 

 

 

 

 

 

 

 

 

 

 

 

그녀가 리카르도 샤이와 함께 연주한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은 '명연주 명음반'이 어떤 것인가를 눈과 귀로 확인시켜주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라디오를 통해 하나의 악장만 따로 떼어내서 들은 적은 많아도 이번처럼 한꺼번에 '협주곡 전곡 연주'를 그것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듣는 기회는 드물다. 이렇게 예습을 조금 열심히 하다 보면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예전에 미처 듣지 못했던 '음악'들이 조금씩 새롭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내가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좀 더 알아본 끝에 찾아낸 연주는 아주 젋은 여성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Khatia Buniatishvili)였다. 마침 파보 예르비와 협연한 멋진 실황 영상이 곧바로 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나는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틈틈이 듣다가 정말 뜻밖에도 이번 공연에서 실제로 만날 지휘자 파보 예르비까지 덤으로 만나는 행운까지 얻은 셈이었다. 좀 더 알고 보니 파보 예르비는 슈만에 대해서도 '교향곡 전곡 녹음'을 남겼을 정도로 이미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피아니스트인 김선욱 또한 베토벤에 훨씬 더 깊이 천착하는 듯하지만 '슈만'에 대해 소홀했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2006년 리즈 콩쿠르 우승과 함께 런던으로 음악 무대를 옮긴 김선욱은 자신의 핵심 레퍼토리인 독일 피아니즘, 그 가운데 슈만 피아노 협주곡으로 필하모니아와 만난다. 전통적인 해석의 미덕과 구조와 디테일을 이끌어내는 감각적인 터치로 이미 무수한 수연을 남긴 김선욱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가 기대된다.

김선욱은 이미 지난해 영국 레스터시티에서 필하모니아(지휘-아쉬케나지) 오케스트라와 같은 곡을 협연한 바 있으며, 한국 공연을 마친 다음달 8일에도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필하모니아와 같은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2010-04-05 뉴스에서 발췌)

 

5년 전에 내가 김선욱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연주가 어떤 것이었나 하고 살펴보던 나는 방금 인용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내가 아쉬케나지의 지휘와 김선욱의 연주로 들었던 협주곡이 바로 지금껏 내가 열심히 예습했고 또 이틀 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들었던 바로 그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나는 2010년 봄날 저녁에 도대체 무슨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 귀는 닫고 그저 눈으로만 음악을 보았단 말인가. 5년 전에 나의 음악에 대한 지각이 그토록 둔감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적잖은 예습,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에 대한 한두 차례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엊그제 내가 들었던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은 내게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몰입을 하기 위해 애를 쓸수록 피아노 연주와 오케스트라 연주가 서로 겉도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연주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피아노 소리가 뭔가 둔탁하고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듯하더니 그렇게 내 귀에 거슬리던 피아노 소리가 좀처럼 아름답게 바뀔 줄 몰랐다. 그렇다고 그들의 연주가 크게 잘못된 것 같지도 않았다. 김선욱은 연주가 끝나자 곧바로 지휘자와 뜨겁게 포옹할 정도로 자신의 연주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협연도 훌륭했음을 거듭 표시했다. 관객들의 박수도 적잖이 뜨거웠다. 비록 나만의 느낌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열광적이진 않은 듯했다. 예습때 내가 너무 아름다운 연주만 골라 들어서 나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음 연주에 기대하는 수밖에...

 

인터미션이 끝난 후 시작된 '슈만 교향곡 4번'은 시작부터 달랐다. 캄머필하모닉이 지닌 소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에도 불구하고 슈만의 격정과 불안과 방황과 강렬한 열망들이 1악장 연주에서부터 거침없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클라리넷 독주는 당당하면서도 가득한 호소를 담아 매혹적인 소리를 맘껏 뽐냈고 다른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들의 호흡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현악 연주들은 조용히 그런 호소와 갈망들을 받쳐주면서 '어두운 날 새벽에 떠나는 먼 여정'을 차분히 예고해 주는 듯했다. 뒤이은 현악기들의 땅을 뒤흔드는 듯한 저음 연주들은 밝아오는 새아침에 길을 나서는 젊은이의 가슴 벅찬 요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경쾌한 목관들과 현들이 주고 받는 지저귐은 새소리와 물소리로 변했고 금관의 힘찬 울림은 높은 산마루에 올라 가슴 벅찬 미래를 내다보는 젊은이의 포부를 그대로 표출하는 듯했다. 이따금씩 귓가를 스치는 감미로운 선율들은 금새 뜀박질을 재촉하는 듯한 거친 약동 속에 묻혔다. 내가 미리 예습할 때 느꼈던 '슈만의 격정들'이 캄머필하모닉을 통해서 고스란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번 예습때 가장 많이 들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연주)

 

첼로의 독주로 시작되는 2악장에선 꿈꾸는 듯한 아련한 그리움과 슬픈 이별이 가득하다. 그러다가도 애타는 절박한 그리움들이 다시 희망으로, 또다시 아름다운 옛 추억들로 되돌아가는 감정들이 수시로 교차한다. 무릇 어떤 사랑이든 결실을 맺기까지는 무수한 엇갈림과 만남과 이별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애잔한 악장이다.

 

네가 가까이 있으면 난 네가 두렵고 멀리 있으면 네가 그립다. 네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나의 마음은 네게 끌리고, 네가 나를 찾기라도 하면 나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나 괴롭다. 그러나 너를 위해 내 어떤 괴로움을 마다했던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3악장에선 그런 연약하면서도 여린 감정들이 순식간에 모두 사라지면서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벅찬 희망들로 다시 활활 불타오른다. 길고도 어두운 방황과 고뇌와 슬픔들은 저편으로 모두 사라지고 힘찬 미래만 남았다. 떨리는 가슴으로 맞이할 부푼 나날들과 충만한 기쁨들이 금세라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질 듯하다.

 

마침내 4악장에 이르면 '이젠 됐다'는 감격과 환희가 한 순간에 터져나온다. 니체가 말한 대로 목표에 다다른 사람은 '어깨춤'을 추게 마련이다. 어떤 일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기분으로 뛸 듯이 기뻐하며 신나게 앞으로 내달리는 모습이다.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이 느껴진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바로 작곡가 슈만이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필생의 연인' 클라라와 마침내 완전한 부부로 맺어지는 환희가 그대로 느껴지는 악장이다. 종반에 다가서면서 숨가쁘게 고조되는 현악의 선율들과 곧이어 격렬하게 뒤흔드는 저음의 선율들은 곧바로 승리의 함성처럼 터져나오는 관악기들의 합주들과 곧장 하나로 뭉쳐 열광적인 클라이맥스로 격렬하게 마무리된다.

 

이제 내가 처음 꺼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는 똑같은 작곡가가 쓴 작품을 똑같은 악단과 지휘자의 연주를 듣고도 그토록 크나큰 '음악적 지각의 차이'를 경험했다. 그리고 김선욱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연주가 마침 이번에 내가 들은 바로 그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인 줄도 모른 채 '또다른 예습'에 열을 올렸다. 그래도 나는 이번에 경험한 지각의 혼란에 대해 나 자신을 심하게 책망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음악이든 그걸 듣는 사람은 결국 그가 지닌 그릇만큼만 수용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내가 이것은 빈 수레를 끌고 지나가듯 아무것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반면에 저것은 그릇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철철 넘치도록 많이 받아냈다고 한들 그게 무슨 큰 허물이겠는가.

 

김선욱도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베토벤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꾹꾹 눌러 담았다면 슈만은 악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슈만은 연주자마다 너무나 독특한 해석이 나오는 것 같다. ‘슈만이 어때야 한다’는 정답은 없다. 나의 슈만은 나의 슈만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훌륭한 대왕이 말했듯이 누구든 훌륭한 연설 한마디로 당장에 용감해지거나 잘 싸우게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몽테뉴의 말대로 '어리석음과 지각의 혼란은 잠깐 가르쳐 주어서 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니 오래 두고 꾸준한 훈련으로 차츰 더 가까이 다가설 수밖에... 이토록 부실한 '지각'으로 이렇게 어렵사리 쓰는 글 또한 그런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음악을 잘 감상하기 위해 억지로 시계를 거꾸로 되돌릴 필요가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런 면에서 몽테뉴의 다음 말은 묘한 역설처럼 반갑게 들릴 때도 없지 않다.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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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파보 예르비가 2012년 6월에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했을 때 힐러리 한과 협연했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 Op.64>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날 공연 이후 다시는 그 연주를 듣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차마 몰랐다. 다시 봐도 정말 좋은 연주였다 싶다. 지금까지 조회수는 무려 4,879,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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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5-12-2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날 점심때까지 멀쩡하다, 오후 들어 1년에 몇번 없는 강력한 위경련이 찾아와서 표를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극찬하는 후기들을 보니 어찌나 배가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oren 2015-12-21 12:12   좋아요 0 | URL
그런 끔찍한 일도 생길 수 있군요. 얼마나 속이 쓰리고 배가 아팠을까요? 너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