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오오, 필멸의 존재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되돌아오는

이 지하 세계를 다스리시는 신들이시여. 거짓말과

애매모호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고

또 그대들이 허락해주신다면, 내가 이리로 내려온 것은

어두운 타르타라를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고, 메두사 같은 괴물의,

뱀들이 친친 감고 있는 세 개의 목에 사슬을 채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리로 온 것은 아내 때문입니다. 발에 밟힌 독사가

그녀에게 독을 퍼뜨려 그녀의 꽃다운 청춘을 앗아갔으니까요.

나는 참고 견딜 수 있기를 바랐고, 아닌 게 아니라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하나 아모르가 이겼습니다.

그분은 여기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상계(上界)에서는

잘 알려진 신이지요. 아마 여기서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옛날의 납치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아모르는 그대들도 맺어주었습니다. 공포로 가득 찬 이 장소들과,

이 거대한 카오스와, 이 광대한 침묵의 왕국의 이름으로 청하옵건대,

너무 일찍 풀린 에우뤼디케의 운명의 실을 다시 짜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대들에게 귀속됩니다. 잠시 지상에서

머문다 해도 머지않아 우리는 한곳으로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는 이곳으로 향하고,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거처이니

그대들이 인간의 종족을 가장 오랫동안 통치합니다.

그녀도 명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그대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내 아내에게 그런 특혜를 거절한다면 나는 단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죽게 되니 그대들은 기뻐하실런지요!"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 * *

 

어느날 느닷없이 뻥 터져나온 '신경숙 표절 사건'도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난 듯하다. 그동안 내가 이 사건을 바라보며 떠올린 '낱말들'만 여기에 주욱 나열하더라도 아마 몇 줄은 족히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나는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여러 글들을 틈날 때마다 제법 열심히 찾아 읽었다. 물론 내가 온갖 다양한 매체에 올라온 글들을 '심각한 이해당사자'가 된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살핀 건 아니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멀찍이 떨어져 이번 사건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구경꾼'의 심정일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번 일을 바라보며 떠올렸던 낱말들이라고 해봐야 다른 대다수 사람들의 마릿속에 떠오른 그것들과 그리 다를 리는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더럽고, 치사하고, 짜증나고, 한심스럽고, 참담하고, 어이없는' 그런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들, 가령 거짓말, 사기, 속임수, 분개, 오만, 몰염치... 와 같은 단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도 결국 그 오랜 유래를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숭이에서 진화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유달리 남의 흉내를 내는 데 타고난 소질을 발휘한다. 모방 본능은 사람의 본성 가운데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뿌리깊은 본능이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글쟁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몽테뉴가 이미 오래 전에 '인류의 모방 본능'에 대해 유난히 깊은 관심을 쏟은 끝에 그 점에 대해 아주 많은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 놓았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건 없다.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짐승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짐승이다. 과연 외부에 나타난 모습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서, 그것은 원숭이일 것이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사실 몽테뉴보다 조금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문학의 기원 또한 '모방'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명백히 밝혀 놓았을 정도이다. 훌륭한 역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인류 역사 발전의 근원적인 힘을 결국 '모방'에서 찾을 정도였다. 그러니 도대체 참을 수 없는 뿌리깊은 욕망인 '모방 본능'을 그 누가 무작정 탓할 수가 있겠는가.

 

모방한다는 것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중에서 


그런데 다른 일도 흔히 그렇지만 '본능' 또한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하긴 인간의 욕망 가운데 타고난 본능대로 몸을 움직일 경우 대략 낭패를 보지 않을 욕망이 과연 얼마쯤이나 있을까마는.

 

어쨌든 우리 모두는 결국 필멸의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결국 '어두컴컴한 지하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떠올리기조차 싫어하는 그 지하세계를 자발적으로 애써 찾아간 인물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문학 역사상' 아주 걸출한 주인공들 가운데 아주 가끔씩 나타났다. 굳이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가 쓴 위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이었던 오뒷세우스나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그런 인물들의 '중차대한 임무'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그들의 절박한 얘기조차 우리들 가슴에는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오르페우스이다. 노래 하나로 온 우주를 감동시켰다는 전설의 가인 오르페우스만큼 '절절한 심정'으로 지하세계를 자발적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인물이 또 있었을까.

 

물의 요정들을 데리고 풀밭을 거닐다가 뱀 이빨에 복사뼈를 물려 꽃다운 나이에 덜컥 딴 세상 사람이 되고 만 아내 에우뤼디케의 신랑이 바로 전설의 가인(佳人) 오르페우스였다. 아내를 잃고 살아갈 의욕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린 오르페우스에게 남겨진 일이란 오로지 '저세상 끝까지 다 뒤져서라도' 기어코 아내를 다시 찾아내는 일뿐이었다.

 

에우뤼디케를 데려오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부분)
장 레스투(Jean Restout), 18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그가 저승에 당도하자말자 '사랑스럽지 못한 왕국'을 다스리는 명부의 신들에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히는 대목이 자못 인상적이다. '거짓말과 애매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자신은 바로 아내 때문에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마다않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도대체 얼마나 '거짓말과 애매한 말'이 많았으면, 그래서 지하 세계의 신들조차도 허구헌 날 지겹도록 들어야만 했을 지 모를 바로 그 '거짓말과 애매한 말'을 자신은 결코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부터 먼저 꺼내는 오르페우스를 보라.

 

'말만 하면 곧바로 시가 되는 바람에' 수입이 좋은 변호사 직업조차 포기할 만큼 타고난 시인이었던 오비디우스조차도 '남을 속이는 거짓말'이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의 입에서 떨어지기 힘든 지를 결코 모르지 않았다. 오르페우스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아내인 에우뤼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찾아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혹여 '거짓말과 애매한 말'이 끼어들어 (신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망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조바심을 내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신화에서 현실로 돌아오자. 신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는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될 존재'임엔 다르지 않다. 그리고 누구라도 살아가는 동안 얼마쯤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그게 심각한 거짓말이든 사소한 거짓말이든 별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그 거짓말을 얼마쯤 할 수밖에 없을 당시의 '상황'이 문제가 되는 듯하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속담을 꺼낼 필요까지도 없다. 백주대낮에,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자신이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도 남들이 전부 바보가 되어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이 결국 그렇게 풀리고 나면 그 자신은 아마도 평생을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심지어는 죽고 난 이후까지도 '영원히'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자주 거짓말쟁이들의 말을 듣고 살아야 할까. 그건 아마도 '허황된 환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오만과 허영'이 그런 거짓말을 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종용하기 마련일 테고 끝내 사람들은 나약하게도 거짓말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명망있던 사람들이 '거짓말' 때문에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줄기세포 가짜 논문으로 온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립 서울대 박사와 숨겨놓은 아들을 두고 유전자 검사까지 자청했던 전직 검찰총장은 '그날 이후'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행방조차 묘연할 정도이다.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은 결코 있지도 않았던 모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우매한 거짓말쟁이,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높은 신분인 체하고 기품 있는 체하는 난봉꾼(coxcomb)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은 갈채를 받고 있다는 공상에서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의 허영은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속아 넘어갈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황된 환상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큰 감탄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료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보이고 있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들을 본다고 그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나약함과 우매함 때문에 자신의 눈을 내부로 돌리지도 못하고, 또한 만약 진실이 알려진다면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멸스런 인간으로 보일 것인지 그들의 양심이 말해 줄 그런 경멸스런 관점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중에서

 

경제학자보다는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훨씬 더 명망이 높았던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도덕 감정'에 대해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인물이다 .'인간의 유래와 진화'에 대해 불멸의 업적을 남긴 찰스 다윈조차도 그에게 한 수 배웠을 정도이다. 그런 아담 스미스가 '수치심'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형태로 끝없이 타오를 '보복의 화염'을 놓쳤을 리는 만무하다.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

가장 그럴 듯한 상류사회의 모든 화려한 허식 속에서도, 돈에 매수된 고위 인사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비열한 아첨 속에서도, 일반 민중들의 어리석지만 천진난만한 환호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정복과 전쟁에서의 승리로 교만해진 가운데서도, 내심에서 은밀하게 솟아나는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은 그를 휩싸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예가 사방팔방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그 자신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둡고 추악한 불명예가 그를 바짝 뒤쫓고 있으며 언제라도 그를 덮치려고 하는 것처럼 느낀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중에서

 

어쨌든 '거짓말과 애매한 말'로 남을 속이는 '배반과 기만'은 참으로 몹쓸 악덕이다. 그에 따른 악영향 또한 너무 광범위하다. 그래서 자연히 '치욕'이라는 관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핑커 또한 인간 심리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거짓말쟁이를 구별하는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에게 치명적으로 나쁜 것이었던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


 - 아담스미스, 『도덕감정론』 중에서


 

오래 전에 진작 내려졌어야 마땅할 어느 작가의 작품에 대한 '표절 확진 판정'이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을 끌고 나서도 여전히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그 작가는 도대체 너무나도 뻔한 사실을 두고도 그토록 애써 '진실'을 감춘 채 앞뒤조차 맞지 않는 거짓말을 태연히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거짓말쟁이들을 넓은 아량(?)으로 계속 용서해줘야 할까.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가짜'에 대한 판별이 이토록 어리숙하고 흐리멍덩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현애살수(懸崖撒水)라는 말이 있다. 벼랑(崖)에 매달려(懸) 잡고 있는 손(手)을 놓는다(撒)는 뜻이다. 찾아보니 송(宋)나라 야부도천(冶父道川) 선사의 게송(偈頌)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사람이 어떻게 '붙잡은 나뭇가지'를 손에서 놓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방하착(放下着)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꾸로 '단축'하고 만다. 마치 흉내내기를 몹시도 좋아하는 원숭이가 호리병 속에 담긴 먹이를 손에 움켜쥔 채 '아침이 될 때까지' 손을 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알제리 농부에게 붙잡히는 꼴과도 닮았다. 스스로도 표절한 사실조차 모른다고 발뺌을 하는 작가를 보니 자꾸만 흉내내기를 몹시도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손에 움켜쥔 먹이는 끝내 놓치기 싫어하는 우리의 머나먼 옛 조상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느낌을 좀처럼 떨쳐내기 어렵다.

 

원숭이의 욕심

수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을 내버리는 방식은 원숭이의 욕심을 연상시킨다. 알제리의 카바일 족(주로 알제리 북부의 해안 산악 지대에 사는 부족-역자주) 농부가 호리병을 나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놓고 그 안에 약간의 쌀을 넣어두었다. 호리병의 주둥이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다. 원숭이는 밤에 나무로 와서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쥔다. 쌀을 쥐고 있어서 손이 빠지질 않지만 원숭이에겐 쌀을 놓고 손을 뺄 지혜가 없다. 그렇게 해서 원숭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거기에 서 있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


 - 새뮤얼 스마일즈,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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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무거워질까 두려워 끝내 이 글에 담아내지 못한 책 속 구절들)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트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737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손에 든 무기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
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유감이오, 친애하는 선생. 정말 유감이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건 원칙의 문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오.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당신은 정말 멋진 소장품들을 갖고 있소. 그러니 이번엔 솔직하게 당신이 속았다는 걸 인정해야 하오. 난 작품의 진위 문제에 대해 타협 같은 건 하지 않소. 속임수와 거짓된 가치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확실성이 있다면 걸작의 그것 아니겠소. 우리는 온갖 위조범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야 하오. 내게 예술작품이란 신성한 거요. 나에게 작품의 진위는 종교라고 할까 ······. 당신의 반 고흐 작품은 가짜요. 그 불행한 천재는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배반을 맛보았소. 적어도 사후에는 우리가 그를 배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잖소."

"말 다했소?"

 

"놀라운 일이오. 당신처럼 명망 있는 사람이 내게 그런 조작에 공범이 되어달라고 하다니······."

 - 로맹 가리,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가짜>  중에서

 

 

오만(傲慢)한 사람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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