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에 있어서 ‘남천참묘의 공안’이 갖는 의미



yamoo 님께서 이번에 소설 『금각사』를 무려(?) 세 번째로 읽고 나서 쓰신 '남천참묘의 공안'이라는 글 내용이 한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비록 그 소설을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yamoo 님께서 올려주신 흥미로운 글들을 읽으니 마치 그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금방이라도 제 눈 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그런데 저는 yamoo 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제가 최근에 읽었던) 막스 베버의 글 내용 가운데 일부가 희미하게 겹쳐 떠올라 약간은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막스 베버 또한 '근대적 인간의 삶'을 바로 '행위와 체념'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쌍'에 입각해서 접근했는데 바로 그 부분이 우연하게도 yamoo 님의 글 내용과 갑작스레 어떤 연관을 맺게 된 모양이니까 말이지요. 더군다나 베버가 그렇게 꿰뚫어 본 내용 가운데 일부는 그 유명한 '괴테의 걸작 소설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어서 yamoo 님의 글과 일말의 '선택적 친화력'을 지닌 듯한 느낌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yamoo 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막스 베버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신 기억도 새삼 떠오르고 해서 이렇게 무턱대고(?) 먼댓글 형식으로나마 제가 떠올린 그 부분을 '밑줄긋기' 하듯이 올려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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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에 따르면 칼뱅주의자들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행위에 의해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스스로 창조하는데, 이는 괴테가 『잠언과 성찰』에서 한 다음과 같은 격언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안 되고, 행위를 통해서나 가능하다. 네 의무를 이행하도록 애써라.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 그런데 너의 의무는 무엇인가? 일상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 베버는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 칼뱅주의는 다른 어떤 신앙 형태보다 사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이 역시 수동적인 관조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에 칼뱅주의 윤리의 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괴테의 명제가 적용되었다. "행위하는 자는 언제나 비양심적이다. 양심을 가진 자는 관망하는 자뿐이다." 결국 베버는 칼뱅주의의 행위윤리와 괴테의 행위윤리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존재함을 확인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인의 인격 및 근대의 문화와 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대한 베버의 논리 전개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즉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마지막 부분에서 '행위'(Tat, Handeln)를 '체념'(Entsagen)과 결합하고 있다. 체념이란 개인의 삶을 전문적 직업노동에 한정하며 다방면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행위와 체념은 근대인의 특성이자 숙명으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이다. 베버가 보기에 이 둘의 관계는 괴테의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와 희곡 『파우스트』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근대적 직업노동이 일종의 금욕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전문 노동에 한정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다방면에 걸친 삶을 살려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치 있는 행위를 위한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 되며, 따라서 '행위'와 '체념'은 오늘날 불가피하게 서로를 조건 짓고 제약한다. 시민계층적 생활양식의 이러한 금욕주의적 기조─이 생활양식이 무(無)양식이 아니라 어떻게든 양식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기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는 이미 괴테도 그 삶의 지혜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통해 그리고 희곡의 주인공 파우스트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괴테에게 이러한 인식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의 시대로부터 체념 어린 작별을 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가 되풀이될 수 없듯이, 그러한 시대 역시 우리의 문화 발전 과정에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 반면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에서 나와 직업 생활 영역으로 이행함으로써 세속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또 공장제·기계제 생산의 기술적·경제적 전제 조건과 결부된 저 근대적 경제질서의 강력한 우주를 건설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그 추진력에 편입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 비단 직접적으로 경제적 영리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아마도 그 마지막 톤의 화석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규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5)

35) Max Wever,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P. 203[364∼365쪽]

 


베버에 따르면 행위는 각 개인이 세계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정립하고 이 세계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전제한다. 그는 이러한 의지와 능력을 인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인격은 불가피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한정적이고 일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바로 괴테가 그의 문학 작품에서 형상화한 내용이다. 이처럼 베버의 인격 개념과 괴테의 인격 개념은 본질적으로 '선택적 친화력'을 보여준다. 선택적 친화력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밖에도 베버는 1917년의 강연 '직업으로서의 과학'(Wissenschaft als Beruf)에서 괴테같이 위대한 예술가의 경우에도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한 시도는 예술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행위와 체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예술가의 인격도 이 행위와 체념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베버에게 괴테가 가지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 방금 언급한 ─ '선택적 친화력'(Wahlverwandtschaften)이라는 개념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인식 과제를 "일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앙과 직업윤리 사이에 과연 그리고 어떤 점에서 특정한 '선택적 친화력'이 인식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경우 종교적 이념이 생활양식의 하부구조를 구성한다. 사실 일견 하등의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 이 범주 사이에 이처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진술일 따름이다. 인간의 문화적 삶에서는 내적·정신적 요소들과 외적·물질적 요소들 사이에 아주 다양한 관계가 성립한다. 즉 저해하는 관계, 중립적인 관계 또는 정초하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방적 관계나 상호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이처럼 경험적으로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다양한 양태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역사적 개연성에 대한 방법론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베버가 도입한 것이 바로 '선택적 친화력'인 것이다.

 

선택적 친화력이란 개념이 처음 사용된 곳은 화학이다. 화학자들은 이 개념으로 원소들 사이의 결합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다가 1809년에 출간된 괴테의 소설 『선택적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에 의해 인간 세계에 적용되었다. 베버는 바로 이것을 역사적 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사유에 도입했던 것이다.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옮긴이 해제 <종교 ·경제 ·인간 ·근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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