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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ㅣ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사람은 체온이 35도 밑으로 떨어지면 위험하고 30도 밑으로 떨어지면 죽을 수 있다. 죽은 이의 몸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갑다.
평소에는 인간적이고 해롭지 않을 것만 같은 인간으로 묘사된 페리는 어떤 인물일까. 작가인 트루먼 커포티는 '사실'이라고 확언하는 이 소설 속에서 페리를 향한 마음을 절절하게 드러냈다. 페리의 진술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그가 진짜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다 친구를 잘못 만나 이런 범죄에 휘말린 것 뿐이었다고. 하지만 트루먼 커포티의 그 콩깍지를 좀 걷어내면 어쩌면 내 편견이 작동하는 '사실'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작은 키에 거대한 상체, 짧은 다리를 가진 페리를 보며 겁을 내는 내 모습 말이다.
인간이란 어쩜 이리도 이중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모르겠다. 그가 살아 온 모습을 보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좋은 평판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던 한 가족을 잔인하게 살해 한 사실을 본다면 어떻게 또 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안 할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는 살해당한 한 가족의 마지막 날을 너무나 자세하게 보여 준 다음 그들이 살해당한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가족의 죽음은 이미 드러나 있었고 누가 범인인지도 알 수 있었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이 적나라했으니, 나 역시 다를 바 없겠다 싶었다. 낸시와 연인이었던 보비와 절친이었던 수전의 충격과 슬픔은 가슴 아팠고,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어느 정도는 비극적이었고 어느 정도는 가십이었다. 그 와중에 클러터 씨의 농장은 팔리게 될 것이고, 낸시가 사랑한 말 베이브 역시 팔려갈 것이다. 그렇게 사랑으로 만들어진 사람들과 동물들, 추억이 깃든 집은 모두 파괴되었다.
페리에게 온정을 베풀길 바라는 사람들은 그가 딕과 함께 한 짓보다 그 일 이후 보여진 그의 모습에서 그의 좋은 모습을 보았다. 그가 부숴버린 일가족 네 명의 삶과 마을 사람들의 신뢰, 흩어진 동물들, 농장에서 쫓겨 난 사람들의 삶은 보지 않는 듯 했다. 나는 계속 평화롭던 그날의 풍경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성실하게 농장을 운영하던 클러터 씨, 아픈 몸이 좋아질 거란 기대를 가진 클러터 부인인 보니, 보비와 나름 아픈 사랑을 하는 낸시, 활발하고 귀여운 케니언의 모습이 말이다. 그들이 베이브와 물장난을 치고 늙은 개인 테디와 산책을 하고 보물 2호인 고양이 에빈루드를 귀여워 하는 모습들이 다 타버린 재처럼 흩어지자 깊은 상실감이 닥쳤다.
과거에 학대 당한 일이, 지금 차별당하는 일이 한 사람의 인생을 뿌리채 흔들고 좌절하게 만든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선택의 기로에서 모두 하나의 선택만을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더 선한 일을 하려 하고, 누군가는 과거에 겪었던 일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페리의 사정과 페리의 과거와 페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에 할애된 책의 낱장들이, 딕의 사정을 적은 글들이 끔찍한 살인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을 테다.
그리고 어쩌면 딕이 모든 것을 주동했고 페리는 작은 역할만 하지 않았을까 약간 기대했던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커포티는 페리를 너무 사랑한 것 같다.
히치하이커들을 태워 준 그 외판원 벨 씨는 진짜 운 좋은 사람이었다. 기적이란 게 있다면 바로 이 일이 아닐까. 누군가가 기적을 만날 때, 누군가는 사신을 만났다. 불운한 인연이란 이런 것일까. 결국 세상은 다 우연이 겹쳐 필연을 만들어가는 것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