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폭력과 안전이별
나는 데이트폭력이나 안전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본다. 어느 정도로 처참한 상태에 이르렀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그들은 더 이상 관계를 개선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래서 마지막 화풀이를 한 것일까?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정말로 그들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상태로 이행될 것이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왜 그런 선택을 할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 이건 말이 안 된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했을 때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야말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자의 어떤 행동이 극도로 강한 배신감을 느끼게 했던 것일까? 그래서 감정적으로 격노한 상태에서 그런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언론의 기사나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만으로는 그런 것까지 알 수 없다.
나의 경우는 어떠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도 많지는 않지만 여자에게 차여본 경험이 있다. 대체로 내가 겪었던 이별들은 예상된 것이었고 나는 마치 정해진 시나리오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이별을 수행해나갔다. 여자가 나에게 이별을 통보하기 전에 나는 이미 관계가 어그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사이엔 어떤 문제가 있고 아마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조만간 헤어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나의 경우와는 달리 예상하지 못한 이별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여자의 갑작스러운 배신이다. 그러나 그런 배신조차도 징후가 있을 것이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다. 남자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 징후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점점 더 현실과 감정의 갭이 커져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데이트폭력 문제는 현실인식의 문제다. 현실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는 남자들이 많아졌다는 거다.
현실인식 능력과는 별개로 다른 측면을 조명해볼 수도 있는데 이것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추악한 마음이다. 어떤 종류의 염치없음과 자기 파괴적인 감정을 손쉽게 허용하는 마음이다. 이왕 상황이 엉망이 되었으니 더 잃을 것도 없다는 마음이랄까. 갑작스러운 이별통보를 받은 모든 남자가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폭력이란 어떤 장벽을 넘어서야만 튀어나올 수 있다. 우발적인 폭력조차도 마찬가지다. 폭력을 쓴다는 것은 내가 이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감당해야할 온갖 것들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즉, 어차피 이 관계는 망했고 나는 추악한 인간이니 내 기분대로 하겠다는 어떤 결정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애덤 모턴의 책 <잔혹함에 대하여>에 나오는 ‘악의 장벽이론’이 떠오른다. 악의 장벽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넘지 않으려는 심리적, 도덕적 한계를 뜻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 너무 끔찍해서 ˝차마 할 수 없다˝는 내적 저항을 느끼는데, 이게 바로 장벽이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 장벽을 넘어서거나, 아예 장벽 자체를 무시해 버린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잘못과 구분된다. 즉, ‘악’은 단순히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라면 스스로 제어해야 할 ‘내적 금지선’을 넘어선 상태라는 것이다. 왜 누군가는 장벽을 넘고 누군가는 장벽 앞에서 돌아가는가? 모턴은 악에 저항하는 능력에 개인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하며 합리화와 자기기만이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즉, 어떤 더 크고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이트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더 중요한 목적이란 무엇인가? ‘저 여자는 벌을 받아야해’, ‘그게 이 사회를 더 좋아지게 하는 길이야’, ‘그게 마땅한 일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저 여자에게 사적인 처벌을 내림으로써 나중에 생길 수도 있는 또 다른 희생자를 예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아주 높은 확률로 현실과는 상관없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일 것이다.
뭐 어떻게 생각을 해봐도 데이트폭력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내가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자들이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과 거절당했을 때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품위와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