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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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변한 도시를 떠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엄마 아빠와 떨어져 낯선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져야 하는 상황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미 집안에 감도는 불안한 기운을 느낀 순간부터 이 모든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을지도. 그래서 헐레벌떡 뛰어나와 두 팔로 맞이하며 쌍둥이 손자들을 향해 “우리 강아지들”이라며 반겨주는 게 아닌,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는 할머니를 마주하면서도 겁먹거나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사람들이 너무나 현실 같지 않아서, 도저히 놀랄 수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말 상처받지 않았는지, 놀라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극히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묘사만으로 쓰인 글을 읽으며 추측할 뿐이다.

작년에 이 책의 앞부분만 대충 훑었을 때, 할머니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채로 덮었던 기억이 난다. 하도 입이 험하고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그런데 다시 찬찬히 읽다 보니, 지옥 같은 날들을 살아온 할머니의 드러나지 않은 삶을 자꾸 유추하게 된다. 내가 이 할머니에게 연민을 느끼게 될 줄이야. 그래도 이름 한 번 불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손자들에게 아픈 말만 쏟아냈을까 싶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한 번쯤 대들 법도 한데, 대들기는커녕 오히려 할머니가 고운 말 한마디 없이 자신들을 찔러대는 이유마저 이해한다는 듯 굴어댄다. 아니지, 할머니와 피붙이 손자의 관계라기보다는, 지옥 같은 세상을 먼저 살아낸 생존자와, 그 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가는 아이들의 기묘한 동행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나를 향해, 아이들은 오히려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뀔 것만 같다.

“우는 건 소용없는 짓이에요. 우리는 절대로 울지 않아요.” (p. 49)

전쟁터에 나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종군기자였던 아버지의 기질을 닮아서인지 탐구욕이 대단해, 할머니 몰래 집안 곳곳을 살펴보기도 한다. 가진 돈도 없이 찾아간 문방구에서 주인에게 기어이 노트와 연필을 얻어내는가 하면, 집에서 챙겨온 사전과 할머니의 다락방에 있는 성경책으로 공부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둘만의 작문 시간에는 규칙이 존재하는데,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너무나 모호하다는 이유로 배제한 채 오직 ‘사실에 충실한 묘사’만으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념과 근성이 대단하지만, 때때로 어린아이답지 않은 냉혹함과 잔인한 결을 비출 때면, 마치 생존이라는 목적만 남은 것처럼 보여 그 모습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뭔가 이건 아닌데,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인데, 정말 기가 막히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쩌면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마음으로 할머니 집 문턱을 넘은 것이 아닐지.

그런데 1부가 끝이 나도록 이 쌍둥이들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살았다는 사실만 있을 뿐 어디인지는 알 수 없고, 시골이라는 공간만 있을 뿐 할머니의 집이 어디인지도 지워져 있다. 그래서인지 분명 1부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인데도, 마치 타인의 삶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슬픔도, 두려움도, 상실의 고통도,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엄마와 다시 만나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그 이후로 미뤄둔 것뿐인지도 모른다.

전쟁통 속에서 오직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평생 억척스럽게 일만 하며 사람의 온정 따윈 사치로 여기며 살아온 할머니. 그리고 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단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채 신체적 결함 때문에 마을 안에서도 짐승 취급을 당하며 밀려나, 기어이 짐승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언청이 소녀. 지워지지 않는 비극의 껍데기를 씌운 채 살아가는 이들을, 나 역시 끝내 그 껍데기를 벗겨내지 못한 채 할머니를 순수한 노인으로, 소녀를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참 지독하리만큼 슬픈일이다.

이 모든 것들을 “그냥 이런 일들이 있었다.” 하고 쓱 베어내듯 보여주는 1부를 지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인 서점 주인 빅토르가 등장하는 2부에 이르자,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끼어드는 탓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뎌졌다. 평화롭고 정상적인 일상에서는 오히려 숨을 쉬지 못하고,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야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고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게 된 알코올중독자 빅토르. 그의 삶을 마주하면서, 그제야 내가 이 소설에서 ‘붙잡게 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과,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이미 내면이 지옥이 되어 평화 속에서조차 구원받지 못하는 삶. 어느 것이 더 지옥일까.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었겠는가? 내 생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주변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쓸 거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누나는 끊임없이 내게 차를 날라다주고, 가구를 닦아주고, 내 장롱 안의 내 옷들을 정리해주었다. 누나는 내가 글을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종이를 자꾸 메워나가야 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베껴놓았다. 가끔씩 누나는 내 어깨 너머로 그 문장들을 한두 장 읽어보고는 멋진 문장이라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격려했다.
누나가 나의 속임수를 알아챌 염려는 없었다. 누나는 책이라고는 통 읽지 않으니까. 누나는 평생 동안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해왔기 때문에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p. 338)

3부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안다고 믿었던 것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는 경험을 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더 눈길이 갔던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보다, 상처가 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영혼을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리는 상처는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또 어떤 방식으로 선을 그어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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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02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둥~ 헝가리 욕쟁이 할머니 등장이군요.

곰돌이 2026-07-02 22:08   좋아요 0 | URL
할머니는 전쟁 이전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끝이 날 거라는 기대도 없이, 생존만을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버텨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인지 더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작년만큼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를 꾸준히 이어 나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하던 일이다. 키보드 위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글만 떨어트리던 손가락이었다. 나의 사적인 속내를 담아본다?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졸음 참는 거다) 덜어내고 비워내는 것에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라도 일단 담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쓰기’를 시작했다. 뚝딱거리던 손가락이 서서히 괜찮아질 때쯤이었을까.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는데, 머릿속에서 뭔가 불이 번쩍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각각의 계절>, p. 241)

쏟아내든지, 그것도 아니면 주변을 좀 살펴보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물어물 말만 흐리다가 곁에 있는 애먼 사람들만 안절부절못하게 만들면, 아니, 그대로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시간에만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건 스스로가 잘 안다. 그렇게 읽고 쓰면서 스스로를 추슬러 보고 난 뒤에서야 “독서는 경이로운 애도” (<작은 파티 드레스>, p. 9)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적다 보니 영 분위기가 우중충해질라 한다. 어쨌든! 역시, 책은 옳다. 쓰는 것도 그만큼. 때론, 그보다 더.

6월에 고른 책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내 보석함에 모셔놓은 알라디너 분들의 글을 훔쳐보다가 발견한 책 몇 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것 중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몇 권을 책장에 채워봤다. (감사의 마음은 땡투에 담아...)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 잔만큼이나 맛있는 찍먹의 순간! 물음표를 달고 짐작과 궁금증이 부풀어 오르는 딱 이 타이밍만의 재미를 즐기며, 이번에도 앞부분 느낌 정도만 남겨본다. 아님, 좀 더 길게.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기행 작가인 이반 곤차로프의 작품이다. 이제껏 읽어온 소설 속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특질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1850년대 러시아를 시대적 배경으로 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삼십 대 초반의 남성,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다.

딱 부러진 이념도 없는 것이, 무언가에 몰입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새처럼 생각이 얼굴에서 산책을 하고, 눈 안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반쯤 벌어진 입술에 내려앉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숨어버렸다가 이번엔 어디론가 아주 자취를 감춰버리곤 한다. (...) 단 한 순간 피곤도, 따분함도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을 내몰지는 못한다. 그 온화함은 얼굴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1)

저자는 그 온화함이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며 아름답게 포장해 주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그 온화함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만고의 진리를... 돈 많은 백수임이 틀림없다! (아닌가?) 한참 사회활동을 할 법한 나이에 누워있는 게 일상인 데다가 따분함을 느낄 만하다가도 다시 유턴해서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을 내비칠 수 있다? 게다가 “모든 근심은 한숨으로 해결되고 무관심과 졸음 속에서 기력을 잃고 만다 (p. 12)”고 하니 혼자 속 끓여대면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보이고! 좀 낡긴 했지만, 신축성 좋은 잠옷에 부드러운 신발까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흠, 그러면 그렇지.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하인까지 둔 지주였다. 그런데 집 안 꼴이 말이 아니다. 사방에 쌓인 먼지는 기본이고, 거미줄에, 널브러진 접시와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까지. 나름 최소한의 질서는 있는 건지, 오블로모프가 하인 자하르를 부른다. 잠시 후, 오랜 관성과 고집으로 단련된 기존쎄 같은 기운을 풍기며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의 자하르가 등장한다.

“집구석 한번 깨끗하다. 먼지 하며, 너절한 게, 맙소사! 저기, 저 구석 좀 보란 말야. 하는 일이 뭐야, 도대체….”
“아니, 하는 일이 뭐냐니유….” 자하르가 억울하다는 투로 툴툴거렸다. “애쓰구 있잖유. 사는 게 뭔지! 먼지두 훔치구, 청소두 거의 매일 하는디….”

“청소해, 구석의 쓰레기도 치우고. 그럼 빈대니 하는 것들도 없어질 거야.”
“치워봐야 또 쌓일 텐디유 뭐.”

160여 년 전의 러시아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뭐,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소설의 저자 이반 곤차로프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는데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 독특한 이력까지 있다. 그 말은 오만가지의 인간을 겪어봤다는 말씀?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다들 기를 쓰고 달리는 격동의 19세기 러시아 한복판에서, 왜 하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웠을까.



아모스 오즈 <유다>

<나의 미카엘>이 워낙에 유명했지만, 딱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읽게 됐는데, 아주 좋았다.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감정은 아니지만, 어떤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의 기억을 공유하는 동안 생각지 못한 동질감이 느껴졌고,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건 여전히 유효하기에. 그리고 이 책을 골랐다.

부친의 사업 실패와 연인과의 결별로 마음이 고달픈 스물다섯 살의 슈무엘. 어딘가 불안정하지만,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는 원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중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상태다. 아모스 오즈 문학의 중요한 무대인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둔 점이나, 슈무엘이 드나드는 사회주의 서클의 논쟁과 스탈린에 대한 담론을 담은 장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에 흐르던 예루살렘 지식인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학업과 사랑이 동시에 흔들리며 삶의 방향을 잃은 슈무엘은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이사를 준비하던 중,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 저녁마다 다섯 시간 정도 학식이 깊고 지적인 일흔 살 장애인 남성에게 말동무를 해 주시면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소액의 월급도 지급함. (p. 26)” 이라는 광고를 읽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 오래된 상처와 침묵이 배어 있는 고택에서, 까다롭고 논쟁을 즐기는 노인 발트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발자크는 늘 읽어보고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작가였다. <사촌 퐁스>를 읽고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이번에 고른 <고리오 영감>은 ‘인물 재등장 기법’이 최초로 도입된 소설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사촌 퐁스>를 읽을 때 재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소개와 함께 줄거리가 펼쳐질 때마다, 나 혼자 초면이라 우두커니 눈만 끔벅거렸는데, 이번에는 재회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겠구나. 뭐, 딱히 더 만나고 싶은 인물은 없다만... ㅋㅋ

19세기 프랑스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보자면, 보케르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등장한다. 주변 지형을 시작으로 냄새부터 내부 벽지 무늬, 가구와 바닥 상태 하나하나 묘사가 길고 빽빽하다. 하숙집 부동산 매물 실사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다. 나의 인내심이 책 읽을 때만큼은 진득함을 유지하기에 참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뒤이어 이 퀴퀴한 3층짜리 하숙집을 채우고 있는 세입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향집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파리에 상경했다는데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번뜩이는 법대생 라스티냐크, 털털하고 유쾌한 척하지만, 언뜻언뜻 구린 구석과 서늘함을 풍기는 근육맨 보트랭, 그리고 이 하숙집의 공식 샌드백이자 조롱거리이면서도 바보처럼 허허거리기만 하는 의문의 노인, 고리오 영감까지. 저마다 사연 있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 층수별로 방값에 맞춰 다닥다닥 모여 살고 있는 이곳은 돈이 전부인 파리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말라붙은 심장과 텅 빈 두개골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기에 더 끔찍스러운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p. 12)

그리고 똑같이 19세기 프랑스를 다룬 <골짜기의 백합>을 골라봤다. 우선 펼쳐 든 앞부분의 공기는 <고리오 영감>의 음울하면서도 퀴퀴한 파리 골목과는 전혀 딴판이다. 펠릭스라는 남성이 자신의 연인 나탈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함께 있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자주 상념과 침묵에 잠기던 펠릭스의 모습에, 나탈리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진 모양이다. 과연 그녀에게 지난날을 고백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탈리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오래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 들기로 한다.

그렇게 펠릭스는 자신의 과거를 적어 내려간다. 갓난아기 시절 시골 보모 손에 맡겨진 일부터, 좀 자라서는 형과 누이들의 지독한 괴롭힘, 부모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온 집안의 애정을 철저히 박탈당했던 유년기의 외로움과 불행까지. 더욱 착잡해지는 것은, 펠릭스가 악바리 같은 정신적 저항력을 키워내며 버텨 왔다는 점이다. 부모의 방임 속에서 혼자 차별받는 펠릭스의 모습 위로, 실제 발자크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사촌 퐁스> 속 퐁스의 지독한 결핍이 겹쳐 보여, 이게 또 하나의 맴찢 포인트! ㅠㅠ 편지에 담긴 뒷이야기들이 어떤 내용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당장은 내가 나탈리라면 펠릭스의 편지를 읽자마자 안쓰러운 마음에 일단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 같다.

내 안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바꾸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열정적인 마음이 오랫동안 품은 희망들이 하루 만에 무너진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p. 17)

이런 가시 박힌 장벽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감정의 뿌리가 너무도 깊어서, 또 어머니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녀에 대한 거룩한 외경심은 버릴 수가 없어서, 우리가 더 나이 들어서 그녀를 정당하게 심판하게 된 그날까지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녀를 계속 사랑했다. (p. 26)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 그저 나에게 달려 있었다. 이를 깨닫는 데 무려 육십 년이나 걸리다니. 나는 버림 받았고, 고독하고, 당신을 너무나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다.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표류하지 않기 위해 떠내려가는 뗏목을 억지로 붙잡는 일은 하지 않겠다. (...) 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이 원고 앞에 나는 홀로 섰다”

이 차갑고도 고독한 고백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바르셀로나(발카르카)라는 현재와 500년 전 중세 수도원, 그리고 1690년 대재앙의 과거가 경계를 허물듯 뒤섞이며 시점이 바뀌고 교차한다. 온통 까맣게 타버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숲, 그 황량한 잿더미 속에서 돈이 될 만한 나무 밑동을 기를 쓰고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중에서도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뛰어난 눈을 가진 자키암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배경이 아닐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자키암과 그의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무리 네가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지만, 아들아, 이 저주받은 집안의 넷째 아들아, 우리가 절대 팔지 않을 가장 훌륭한 재질의 단풍나무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너의 목숨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앞에 닥쳐올 고난으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는 길이야.” (p. 19)

결국 숲을 떠나야만 하는 자키암의 가혹한 운명. 그리고 소설의 서두를 연, 죄의식에 짓눌린 한 노인의 서글픈 참회. 이 두 줄기의 서사가 내 머릿속에 맞물리면서 묘한 불길함과 먹먹함을 풍기더니, 어느새 시선은 잿더미가 된 숲을 빠져나와, 골동품 수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 지배하는 바르셀로나의 무거운 저택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이 숨 막히는 그늘 밑에서, 앞서 등장한 노인의 유년 시절이었을 소년 ‘아드리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안이 필요한, 펠릭스의 고독한 아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해 분주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머니는 그 곁에서 묘하게 차갑다.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어린 아드리아가 아버지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첫머리에서 만난 그 고백이 괜히 더 아프게 읽힌다. 아직 어설픈 짐작으로 베일을 걷어내듯 읽고 있지만, 소설 속 역사적 사건, 인물들의 대화, 그리고 그 안에 감도는 공기들이 뭔가 거대한 한 지점을 향해 차곡차곡 쌓여 가는 듯한 느낌에 기대감이 끌어올려지면서 묘하게 흥분되고, 얼른 다음 장을 넘기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다. 다만, 오는 길이 잘 닦인 아스팔트 길 같지만은 않았다는 것.



저번 5월에 구매한 책 리스트(사촌퐁스, 마왕, 딩씨 마을의 꿈, 아메리카의 비극 등)가 ‘인간 욕망 파멸 세트’였다면, 6월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이미 상처를 안고 있거나, 후회하고 있거나, 멈춰 서 있거나, 과거에 붙들려 있는 모습으로. 하긴, 맨날 도파민이나 터지는 탄탄대로 같은 인생사가 세상에 어딨나 싶다. 결국은 덜컹거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내 삶의 어느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니, 또 읽고 또 끄덕이고 또 어딘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지.

인간이 지상에서 거주하는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진부한 삶일 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다. (<횔덜린의 광기>, 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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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6-06-28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을유출판사 책이군요. 을유 표지는 언제봐도 고급지다는.

곰돌이 2026-06-28 05:40   좋아요 1 | URL
그쵸! 을유는 색감도 고급스럽고 디자인도 깔끔해서 저도 좋아요. 종합적으로 만족도가 높음.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2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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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서랍 속에서 꺼낸 듯 기억의 먼지가 가득한 문장을 따라가는 것이 흥미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참 희한하게도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묘하게 느껴지는 차분함도 나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왜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지 않지? 왜 더 끄집어내지 않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는데, 지금의 평온을 굳이 깨고 싶지 않아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으려는 사람 특유의 어딘가 잔뜩 움츠린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 하나 보내는 데도 사회주의(붉은 위험)니, 종교 극단주의(검은 위험)니 하면서 온갖 거창한 사상과 이념을 갖다 대고 저울질을 해야 하는 오즈의 주변 환경부터 국가와 언어, 시온주의의 이상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친가와,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이 한숨처럼 맴돌던 외가의 차이까지 읽기만 해도 가슴이 갑갑했다. 어린시절의 오즈는 또래 아랍인 여자아이에게 대화 한 번 거는 것조차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불신과 긴장을 의식하면서 “나는 네게 선의를 품고 있어”라고 증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짐을 지고 평범한 아이로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니 가족과 이웃의 상처만 조심조심 들여다보는 그 좁은 시선이 어쩐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알 것 같다고는 말하지만 내가 얼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자기 그림자에 놀라 두려움부터 느껴야 한다는 걸.

동유럽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며 아름다운 문장과 낭만을 가득 품고 살았던 오즈의 엄마, 파니아. 하지만 나치에 의해 동포와 친구들을 잃고 고향마저 파괴되어 버린 상실감, 그리고 척박한 예루살렘의 현실이 주는 괴로움으로 그녀는 서서히 빛을 잃어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뛰어난 지성을 지녔지만, 감정을 표현하고 헤아리는 데 서툴렀던 남편 곁에서 파니아가 홀로 겪은 우울증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선택은, 결국 이 ‘집 안의 어둠’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알지 못했고, 말하지 못했고,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원망도 했지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엄마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절망감으로 오즈는 오랜 시간 자신을 자책했다.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방구석에서 숨을 죽이거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를 채워가고 있다고 믿는 것뿐이었을 테니까.

아버지는 어머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돗자리에 대자로 누워, 풀잎을 씹고 있었다. 나도 똑같이 했다. 돗자리에 누워, 어머니의 다른 쪽 무릎을 베고, 풀잎을 씹으며, 겨울바람과 비가 깨끗이 씻어내린 봄에 취한 곤충들의 윙윙 소리와 싱그러운 향으로 가득한 따스한 공기로 내 허파를 채웠다. 그녀가 죽기 2년 전인, 그 봄 축제 때 텔아즈라 숲에 우리 셋이 있던 장면에서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글쓰기도 여기서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 231)

우리는 그해 가을, 같은 독방을 쓰는 세 명의 사형수처럼 함께 묶여 들러붙어 있었다. 아직 우리는 각자였다.
천 년의 빛의 세월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아니, 빛의 세월이 아니다. 어둠의 세월이.
그러나 그들이 겪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뭘 알았을까?
그리고 그들 둘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의 시련에 대해 뭘 알았을까? 어머니는 그의 고통에 대해 뭘 이해했을까?
천 년의 어둠의 세월은 모두를 떼어놓았다. 한 독방에 갇혀 있던 세 명의 죄수까지도. (p. 308)

살아가면서 얻은 상처나 불행이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주위를 에워싸면서 결국 그 사람의 결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오즈가 평생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역사적 사실보다, 그 일이 한 사람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아 계속 작용하는가’라는 점에 더 주목하며 읽어 나갔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과거로만 뚝 떼놓고 볼 수 없었기에,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1권을 읽고 남겼던 “오즈가 비추는 곳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좁고 밀폐된 ‘내부의 숨 막힘’이었다”라는 감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오즈의 모습을 아쉽게 바라봤음에도,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구름 한 조각이 되고 싶었다. 달 표면에 놓인 돌덩이가 되고 싶었다. (p. 331)

이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버티고 살아가야 할까? 당장에 내 가족의 아픔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놓치듯 떠나보냈는데 전쟁과 증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당장 내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 마음대로 골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서로 사랑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서로에게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오즈의 외할아버지는 그 답을 거창한 곳이 아닌 집 안에서 찾는다.

“그런데 지옥이 뭐냐? 천국은 뭐고? 분명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단다. 우리 각자의 집에 있어. 모든 방에서 너희는 지옥과 천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게다. 모든 문 뒤에. 두 겹 담요 아래. 사실은 이런 거야. 작은 사악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지옥이 되지. 작은 연민, 작은 관대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천국이 되고.” (1권, p. 290)

거대한 비극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작은 연민과 관대함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외할아버지는 오즈에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말은 멀리 있는 세계를 향한 말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드러나는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말 한마디를 헤아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침묵의 세월이 흘러갔던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아픔을 들여다보는 눈’을 통해 노년의 오즈는 이해와 후회의 잔인한 시간 속으로 들어섰고, 그 안에 남은 것은 붙잡을 수 없는 순간들뿐이었다. 후회,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다가도 이내 또 달라붙는 후회가 어디 그만의 것일까. 덜 후회하고 더 헤아리며 살고 싶어 다른 이들의 삶을 읽고 또 읽는데, 읽는 만큼 내가 마음도 읽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서로에게 작은 지옥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그 생각만 겨우 붙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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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1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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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읽은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시블리의 <사소한 일>이 떠올랐다. 1948년, 이스라엘 점령군의 무자비함 속에 짓밟힌 베두인 소녀의 운명과 수십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과거를 마주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여성의 시선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들에게 그해는 나라를 빼앗기고 총칼 앞에 강제로 추방당해야 했던 ‘나크바(대재앙)’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같은 역사의 다른 자리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펼쳤다. 유럽 곳곳의 오랜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떠나온 이민자와 난민들로 가득했던 예루살렘. 그해 유대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며 환호한다. 하지만 또다시 갈 곳 없는 난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은 나라를 빼앗기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고, 다른 한쪽은 오랜 박해의 기억 속에서 또다시 갈 곳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 대립 속에서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이야기를 써냈는지보다, 결국 어느 쪽이든 비극과 고통을 겪어야 했을 무고한 시민들의 처연한 삶이 먼저 눈에 밟혀서인지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한 자전적 소설 속에서, 어린 ‘오즈’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자신이 자란 예루살렘의 케렘 아브라함 마을을 ‘체호프의 소유지’라고 말한다. 마을로 이주해 온 유대인 중 상당수가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도망쳐 온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몸은 중동 땅에 있지만, 여전히 유럽의 문화와 러시아 문학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향수와 미래의 불안 사이에 갇혀 있던 사람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의 공기, 그리고 그 안에서 서서히 빛을 잃고 시들어가던 어머니까지. 그래서일까. 오즈는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이웃 도시 ‘텔아비브’의 생기와 밝음을 갈망한다.

내 삶도 새로운 노래, 태양이 작열하는 날의 시원한 물 한 잔처럼 맑고 정직하고 순전한 삶이 될 것이다. (p. 16)

유월절에 처음 가본 텔아비브는 경악할 만큼 놀라운 곳이었다. 늘 집 창문 너머로 먼지 쌓인 나무나 꽉 막힌 벽만 보며 자란 꼬마에게, 거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한창 온몸으로 부딪치고 뛰어놀고 싶을 나이인데, 오즈는 그 자유를 오직 상상으로만 채운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아니 어쩌면 참 다행히도 이 덧없어 보이는 상상이 생기 없는 우울함 속에서 오즈를 숨 쉬게 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지독한 결핍으로 눅눅해진 집구석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을 꿈꾸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껏 빛나고 자유로웠을 테니까.

처음엔 역사적 수난을 앞세운 서사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오즈가 비추는 곳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좁고 밀폐된 ‘내부의 숨 막힘’이었다. 오즈가 자란 예루살렘은 외부의 전쟁만큼이나 내부의 사상적 충돌과 갈등 역시 치열하게 부딪히던 곳이었고,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가진 역사의 상처보다 오즈를 더 짓눌렀던 건, 어른들의 거대하고 갑갑한 이념의 세계였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당장 땅과 군대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집안의 시온주의자 어른들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끝내고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지만, 신의 뜻보다 앞서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던 메아 셰아림의 정통파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컸다. 이 모든 상황을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그저 무겁기만 했지만, 그렇다고 집안 어른들이 그저 목을 죄는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대 학계의 거물이자 강한 민족주의적 신념을 지닌 큰할아버지로부터 유대인들의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 단어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오즈에게 갑갑한 이념의 세계와는 다른 경이의 세계였다. 부르는 이름 없이 겉돌던 일상에 ‘셔츠’나 ‘양말’ 같은 살아있는 이름을 붙여, 진짜 현실을 선물해 주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오즈는 그 속에서 언어의 힘을 얻었다.

큰할아버지를 둘러싼 어른들은 자신들을 밀어내고 박해했던 유럽의 역사와 정치를 뼈저리게 증오하면서도 도스토옙스키와 체호프의 세계를 사랑하고, 괴테와 실러의 시를 읊조렸다. 히브리 문학의 부활부터 사회주의와 토지 균등 분배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거창한 사상적 논쟁을 서재에서 고상하게 벌이면서도, 정작 그들이 ‘조상의 땅’이라 주장했던 곳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농사를 짓거나, 가난한 아랍인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현실은 경멸했던 지식인들이었다. 오즈는 이런 어른들의 위선과 모순을 빼놓지 않고 끄집어내는데, “모든 적들을 다 물리쳐야만 해. 우리가 흠씬 두들겨 패면 그들은 우리에게 평화를 구걸하게 될 거다 (p. 206)”라며 강한 힘과 민족을 앞세웠던 큰할아버지의 세계관과, “이론에 따라 삶을 구성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일이야! (p. 310)”라며 인간과 정의를 먼저 생각했던 외할아버지의 세계관,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라진 부모의 성향까지 모두 어린 오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세계였을 것이다.


국립도서관 사서였던 아버지 덕분에 늘 책과 가까이 지냈던 오즈에게, 인생 최고의 날은 아버지가 책장 한 칸을 비워 자신만의 책을 꽂도록 허락해 준 날이었다. 이 작은 도서관이야말로 내 편과 네 편, 허락된 행동과 금지된 행동 등으로 모든 게 명확하게 갈라져 있었던 현실과는 다른 공간이자, 수많은 다른 길을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온전한 세계였다. 책을 펼치고, 상상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동안, 마음속 상처와 흉터를 꼭꼭 숨기거나 억지로 씻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조각조각의 일화만으로 오즈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언제 숨통이 트였고 어떤 미래를 꿈꿨는지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그가 작가가 아닌, ‘한 권의 책’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말이다.

나는 사람들은 왔다가 가고 태어나고 죽지만, 책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내 야심은 자라서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이었다. 작가가 아니라 책 말이다. 사람들은 개미처럼 죽을 수 있다. 작가들은 어떤 인물이든 쉽게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계획적으로 파괴하려 들어도 늘 하나의 복사본이 살아남고, 레이캬비크나 바야돌리드 혹은 밴쿠버의 어딘가 인적 드문 도서관 한구석 선반에서의 삶을 계속 즐길 기회를 얻는다. (p. 46)

이 책 안에 담긴 복잡한 역사와 줄거리를 다 떠나서, 무언가 한쪽에 너무 치우치면 반드시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속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줄거리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과거에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를 계속 읽어 나가게 하는지 다시 한번 멈춰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 이어졌고, 어떤 글은 그 문장 속에 그대로 파묻히고 싶기까지 했다. 이 책을 통해 얻을 거라 예상한 감정이 전혀 아니다. ‘지나친 이입이었을까’라는 소심한 염려 섞인 마음조차 이내 안도로 바뀌며, 안개 같은 무언가에 가려져 있거나 어둠 속에 묻어 둔 이야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야 꺼내놓는 오즈의 기억을 더 따라가 보려 한다. 그 좁은 책장 한 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얼마나 멀고 험난한 세월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지, 가장 아프고 따뜻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는 노년의 오즈 곁에 아무도 모르는 존재인 나는 그저 가만히 나란히 서본다.

그대여, 묻지 말라. 이것들이 사실이오? 이게 저 작가에게 일어난 일이오? 스스로 질문하라. 자신에 관해 물으라. 그러면 그 답을 당신에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니.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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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1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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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올해 상반기 읽은 책들 가운데 오래 기억에 남을 책이다. 줄거리에 끌려 집어 들었을 뿐인데, 내가 왜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펼쳤는지, 그리고 왜 계속 책을 읽는지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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