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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평점 :
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에서 가장 외로움이 묻어나는 첫 문장이었다.
(P. 11) 그 기억의 편린들은 좀처럼 휘발되지 않을 것 같고, 어느덧 나의 일부분으로 스며든 듯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왜 어떤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남은 생을 고스란히 들여도 소거할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찰나의 순간에서 느낀 감정들을 섬세하게 풀어낸 문장들을 발견하면, 금세 내 삶에서 축적된 감정들과 맞닿아 보며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8편의 단편으로 엮인 이 책은 보통의 연애와 만남 그리고 일과 퇴사 같은 일상에서 분출되는 감정들을 담고 있다.
“ 뭐 그걸 꼭 겪어봐야 아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말들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 겪어봐야 안다. 큼직하게 나눈 카테고리 안에서의 예측 가능한 감정 말고, 촘촘하게, 굳이, 기어코,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그 사람의 연약한 감정 세포 하나하나를 어떻게 겪어보지 않고 다 알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이 책은 그 섬세한 표현들 덕분에 조금은 수월하게 그 사람의 감정에 접근할 수 있었다.
(P. 98) 나는 손을 뻗어 낙하하는 빗방울을 쥐어보려고 했다. 추락의 궤적을 자꾸만 낚아채려고 했다. 쥔채로 입술 가까이 가져와 봤을 때에야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실 나와 다른 부분들이 많았다.
모두가 뜯어 말리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 새로운 삶을 위해 주저없이 퇴사를 하는 모험적인 사람들.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모든게 다 공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쿨럭’하고 나오는 기침을 가슴과 목의 날카로운 쓰라린 통증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갑갑했던 가슴 속을 긁어주는 시원함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을 수 없다.
사랑의 관한 부분은 거의 동성간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의 관한 부분은 개인의 존중되어야 할 자유의 몫으로 생각하기에 나에겐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에 가닿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바라보고 판단하기엔 광활한 우주 앞에 인간은 요만한 먼지일 뿐.
물론, 수용하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그 기다림이 무척이나 외로웠을 사람들의 ‘고민’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고, 불편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그 날의 계절들을 품은 문장들은 생생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좌절감을 느끼는 등장인물의 쓰린 감정들은,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P. 101)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옷깃에 인 보풀을 발견하고는 무십코 잡아당겼는데 그게 쭉 늘어나기만 하고 끊어지진 않아서 아이씨 뭔데, 하는 채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알 듯 말 듯 주변을 멤돌다 없어져 버리는 관심이나 위로 말고, 걱정이나 두려움에 싸여있는 어두컴컴한 방안에 있는 누군가가, 온기를 머금은 아늑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서로가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게 당연한 ‘보통의 일상’을 누릴 수 있길. 더이상, 특별하게만 비춰지는 사랑이 아닌, 좋을때도 있고 나쁠때가 있는 그저 평범의 사랑으로서만 비춰지며 자신이 택한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경험하지 못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경험해 보는 것 어떨까.
한 걸음 내디기가 참 어렵고, 매 순간 무너짐으로 시끄러운 속을 달래야만 했던 나와, 어떤이들이 마음의 고통을 나눠보며, 그 속에 갇혀 있는 막막함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로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는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심의 위로와 손길을 ‘사람’에게서 채우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로 스스로에게 더 상처를 내고, 문을 닫아 버렸던 사람들이 한 손에 쏙 잡히는 작은 ‘책’으로부터 조금씩, 촘촘하게, 차곡차곡 구멍이 나 버린 마음을 채워 보는 것이 때론 충분한 온기를 얻게 된다는 걸.
이 또한 어느 정도의 현실이 받쳐줘야지만 가능하다는 불신의 마음으로 또 한번 낙심하더라도, 나와 닮은 인물과 내 마음을 닮은 구절에 생각지 못한 ‘치유’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걸.
어떤 간절함이 느껴지는 등장인물의 떨림과 주저, 깊게 내쉰 숨으로 가득 찬 방 안에 공기만으로도, 나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어딘가 관심이 필요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해보이는 이별 뒤에 한 때 자신의 연인이었던 사람을 떠올리는 그리움에서 살짝 ‘찌질미’를 느끼게 하는 모습들이 꽤 마음이 갔다. 그런데 만일 그 이별의 사유가 서로의 식은 사랑이 아닌 사회의 억압과 사람들의 시선에 의한 포기라면 좀 슬플 것 같다.
은은하게 속 터지게 하는 묘한 신경쓰임 대비 정작 본인은 나른해 보이기도 했던, 아니 그런 척 해 보였던 등장인물의 모습에는 ‘피식’ 웃기도 했다. 꼭 쓸쓸하고 헛헛함만이 아닌, 친근하면서도 익숙한 사람들의 관계 속 그 안에서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을 저자의 마음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이 책 등장인물들의 정체성을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한정된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는, 새 삶을 살기 위해 과감히 퇴사를 하고 떠나버리기도 하고, 후회도 하고 헤매기도 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담은 걸로 보였으니까.
기억에 남는 문장들과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이미지들이 많지만, 특히 <고요한 열정>편에서 누나 ‘연수’가 많이 떠오른다.
상처를 입은 남동생 ‘연후’가 집을 떠난 뒤, 본인도 외로움과 통증이 있음에도 누나 ‘연수’는 동생을 찾으러 다닌다.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헤아려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존중의 마음이 참 뭉클했고 고마웠다.
외면하지 않아서 말이다.
생경한 계절의 풍경에서, 급한거 없이 느긋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지나가다 눈에 띈 상점에 진열된 여러가지 물건들에서 과거를 떠올리 듯, 사람의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조금은 쓸쓸했던, 그리고 공허함과 과거의 그 날들이 남긴 후회가 느껴지기도 했던 <우리는 같은 곳에서>였다.
(P. 154) 어째서 나 같은 삶에는 단 하나의 예시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들은 대체 어떠한 생을 견디다가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나는 그들처럼 소거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