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의 매력에 점점 더 빠지고 있다. 누군가의 스치는 감정이기보다 스포이드로 쏙 뽑아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놓여 있는 듯한 문장과 마주할 때의 쾌감도 좋고, 핀 조명으로 주목한 것 뒤로 드러내지 않아 가려진 것,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려보는 시간이 나에게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짧지만 잊지 못할, 그 찰나의 감정을 바로 흘려보내지 않고 조금 천천히 놓아주고 싶어진 내면의 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잘 흘려보내고 싶다. 좋은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어떤 식으로든 남겨두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옹글게 맺혀 있는 감정은 모난 모서리 부분을 잘 다듬어서 잘 흘려보내고 싶다.
뚱카롱을 좋아하고 뚱낭시에도 좋아하는 내가 뚱책마저 좋아하기에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로 눈길이 가 몇 권을 구매했다. 여섯 권 중 세 권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지만, 먼저 읽은 분들의 평과 작품의 분위기를 가지고 결정했고, 맨 처음에 실린 글과 표제작 위주로 조금씩 읽어보았다.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은 1865년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나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인도의 문화와 생활상 등을 관찰하여 글을 써오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아들을 잃고 난 뒤로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25편의 단편 중 맨 앞에 실린 「백 가지 슬픔의 문」을 펼치자, 백인과 인도인 혼혈인 한 남성과 인도의 뒷골목 비좁은 통행로와 담배 파이프 자루 상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편굴에 가득한 검은 연기와 아편 향에 취한 한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헛소린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독한 기운을 내뿜는 통에 나마저 대나무 파이프에 연기를 빨아올린 느낌이 들면서도,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맨정신으로 참담함을 목격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아편 거래로 수익을 올리며 배를 불리고 있는 영국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충분히 그려지다 보니, 검은 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눈알만 돌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의 모습이 이토록 허탈할 수가 없다. 아편에 중독되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똑같이 그 길을 걸어가는 남성은 내 시선에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기만 한데, 지난 기억들이 연기와 함께 전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평온함을 느끼고 위로를 얻고 만족해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괴상하다고 부를 만한 것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당신이 검은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으면 그 연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괴상하지 않다. (「백 가지 슬픔의 문」, p. 16)
<오랜 죽음의 운명 외 19편> 캐서린 앤 포터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미국 남부 태생인 캐서린 앤 포터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안타깝게도 그 불행이 남편과의 결혼 생활까지 이어졌다. 정신적·육체적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이혼 후 과거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칼리 러셀’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길러 준 조모의 이름을 따라 ‘캐서린 앤 포터’로 개명한다. 소개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니,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이 느껴졌다. 작가를 꿈꿔왔다고 한다. 이 꿈을 위한 노력이 그녀에게 버티는 힘을 주고, 살아 움직이게 하며 가슴 뛰게 했을 것 같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사는 한 여성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마주하게 된다. 응달진 길에 잠시 쉬었다 가면 좋으련만, 그쪽은 선인장이 무성하기에 괜히 가시 돋친 길을 걷다가 발에 박힌 선인장 가시를 뽑으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계속해서 조심조심 걸어 나간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남편과 한 여성의 다정한 모습이 마음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정작 그녀는 삶에 불만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어쩌지 못하게 만들었고, 언제쯤에야 이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싶어 발걸음을 계속 따라가 본다. 계속해서 걸어야 하고, 살아 나가야 하는 그녀를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촛불을 보듯 바라만 봐야 했다.
“기도는 혼자 조용히 하세요, 할머니. 아니면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해 주든가요.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걸 하느님께 직접 구할 테니까.” (「마리아 콘셉시온」, p. 23)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외 31편> 유도라 웰티
이 책의 서문을 위에 소개한 캐서린 앤 포터가 썼다. 그녀의 정성스러운 글 덕분에 유도라 웰티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올리비아 콜맨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웰티는,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 캐서린 앤 포터와 달리 미시시피 잭슨 출신의 풍족한 가정에서 별다른 걱정 없이 글쓰기에만 몰두하며 지냈다고 한다. 대학에서 따로 글쓰기를 공부한 적이 전혀 없고 자신이 방향과 목표를 잡고 도전하며 그 길을 닦아 나가다가 스물여섯 살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니 그런 그녀의 시선에 자주 들어온 것은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맨 처음에 실린 「릴리 도와 세 부인」은 지적 장애가 있는 ‘릴리’라는 한 여성을 향해 보이는 사람들의 손길이 과연 진실한 친절이자 배려이자 보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겉으로 보기엔 점잖아 보이는 여성들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며 릴리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은 오히려 그녀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만 같아 이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금 숨 막히고 불편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 불편한 감정이 틀에 박힌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삶에 미묘한 틈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웰티가 카메라 셔터를 내리는 순간 포착한 것처럼 그녀의 눈에 들어온 수많은 것 중 글로 담고 싶은 순간은 무엇일지 나머지 31편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릴리가 웃었다. 카슨 부인의 가슴 앞에서 손을 뻗어 창문 밖의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그저 거기에 혼자 서 있었다. 모자를 쓴 그는 외지인이었다. “저거 봐요.” 릴리가 대충 입을 가린 채 낮게 웃었다. “보지마라.” 지금까지 한 얘기를 다 통틀어 엄숙한 이 단어가 모자란 릴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게 하려는 듯이 카슨 부인이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엘리스빌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보지 말거라.” (「릴리 도와 세 부인」, p. 33)
조심성이 있지만 어떤 단단함이 느껴지는 웰티의 글을 따라가 보니 역시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왠지 얌전하고 차분할 것 같은 그녀가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표제작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는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문을 열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늘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다. 가족과 한 공간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 몹시 피곤하게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져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인데, “되바라진 년!”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여성과 가족 사이의 일상이 펼쳐진다.
“전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거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p.119)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공감을 자극했고, 무엇이 필요한지 충분히 알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평온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보수적인 미국 남부 지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이 소설에서 내가 흥미롭게 바라본 부분은 주인공 여성이 자신의 짐을 실은 수레를 이동시키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 검둥이 소녀(소설 속 표현 그대로)에게 삼촌이 5센트 동전을 ‘던져 준’ 장면이었다. 아홉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할 만큼 짐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웰티는 이 장면을 흑인 차별이 극심했던 그 당시의 보편적인 분위기 그대로 찰나의 순간처럼 담았다.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허먼 멜빌
읽어보고 싶은 책 중 하나가 <모비딕>인데, 이렇게 맛도리 단편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가문의 사업이 파산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학업도 중도에 포기해야 했던 허먼 멜빌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열세 살 때부터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고 한다. 힘겨운 시절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으며 보고 느낀 것들이 그의 작품에 깊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읽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일단 분량도 적고 제목부터가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를 펼쳤다. 빚에 쪼들리는 한 남성(입담이 상당히 좋음)이 등장한다. 입에 모터를 달았는지 험난하고 가혹한 세상을 향해 알아듣는 사람들이나 알아듣겠지 하는 심정처럼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낸다. 가진 게 없어 문제지, 마음만큼은 고상한 이 남성에게 세상이 도와주질 않아 비참할 따름인데… 아, 일단 재밌다. ㅋㅋㅋ (모비딕은 급행으로 장바구니로!) 이따금 부담을 낮춰주는 듯한 안녕! 흥!처럼 가벼운 표현으로 거리감을 좁혀주기까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쓴웃음을 주는 입담 뒤로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며 세월을 보내다가 삶의 불행에 초연해지는 인간의 마음에 가득 찬 음울함이 무겁게 내리누른다. 자본주의의 비극과 불행 속에서 그가 본 것,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드넓게 굽이치는 평원, 산들,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농가들, 큰 숲과 작은 숲, 시내, 바위, 초원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결국 이 거대한 대지에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자취들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대지는 인간에게 자취를 남긴다. (p. 71)
저 아래 평원에서 배고픈 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목숨을 빼앗길 운명에 처해 있는 하잘것없는 수탉 한 마리가 아무 뜻 없이 뉴올리언스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기리는 계관시인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나는 언덕 위에서 부루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p. 75)
썩은 가로장 울타리를 녹슨 못들로 오래 지탱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60년의 겨울과 여름에 걸쳐서 얼었다가 달궈지는 과정을 거듭해 온 막대기들에 무슨 수로 사라져 버린 나뭇진을 다시 주입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썩어 빠진 가로장 울타리를 썩어 빠진 가로장들로 수리하려는 한심한 시도이며, 많은 농부들이 그런 작업을 하다가 결국은 요양원에 들어가고 만다. (p. 85)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랭스턴 휴스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랭스턴 휴스의 소개 글을 통해 그는 흑인 고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접했던 흑인문학과는 또 다른 면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이들의 표현 수단이었던 연주가 내 감성을 자극했고, 그런 의미로 제목부터 끌리는 표제작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를 가장 먼저 펼쳤다. 예술가들을 후원해 주는 백인 ‘웰즈워스’ 여사와 그녀가 후원하는 흑인 소녀 ‘오시올라’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했지만 학교에서 독일 선생님께 피아노 레슨을 배웠기에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오시올라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교회에서 성가대 반주를 하며 돈을 모아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웰즈워스 여사는 오시올라의 뛰어난 실력을 소문으로 듣고 오로지 예술성에 대한 확신으로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예술에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가치관에 이 소녀를 끼워 맞추려고만 한다. 이 작품은 흑인의 고통과 저항을 드러내기보다는 오시올라가 자기만의 삶의 리듬을 따르는 모습에 마음을 무척 개운하게 해주었고, 그녀가 연주하는 흑인 블루스와 경쾌한 재즈는 당당함과 얽매임이 없으며 통제받지 않는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오르게 했다.
그녀가 블루스를 연주할 때 저음은 작은북들의 소리처럼, 고음은 작은 플루트들처럼 소리를 냈다. 땅속 깊은 곳과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의 두 음들의 경계 안에서 그녀의 음악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했다. 클럽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블루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면 브릭톱은 “헤이! 헤이!” 하고 추임새를 넣곤 했다. 오시올라는 크릴용 살롱에서 그녀의 음악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연미복을 빼입은 청중들 앞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할 때만큼이나 행복했다.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p. 102)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윌리엄 트레버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하는 윌리엄 트레버의 「욜의 추억」이 나를 방구석에서도 지중해의 고요함과 산들바람을 느끼게 해주더니, 갑자기 지저분한 남자가 나타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며 만끽하고 있는 여유를 침범하려 한다. 묻지도 않았거늘 자신의 이름은 ‘퀼런’이며 추방당한 아일랜드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영국으로 이주한 윌리엄 트레버가 이 남성의 심정을 잘 알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소외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이방인의 심정을 말이다. 고맙게도 ‘아그네스’라는 여성이 그의 눈에 담긴 불안함에 동정을 느끼며 인내심 있게 이야기를 들어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다. 기억 속에 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아픔을 말하는 입과 고통을 담은 눈빛에서 슬픔을 알아봐 주며 상처받은 손등에 손가락 끝을 조심히 갖다 대는 것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아그네스의 모습은 나 역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한다. 그저 설익은 마음으로 그치더라도 말이다. 퀼런이 불운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욜은 나에게도 멋진 해변 휴양지였지만, 지금은 마냥 그럴 수가 없다.
생전 처음보는 이 남자가 감상적인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바랐다. (「욜의 추억」, p. 13)
자로 잰 듯이 살 수 없는 내가 흘린 먼지를 주워 담을 순 없기에 나와 같은 사람의 모습에 공감해 보고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을 상상하며 또다시 대충 구겨서 안 보이는 구석으로 치우기도 해봤다. 이들의 삶은 누구나의 인생처럼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고 사랑도 다양했다. 빛바랜 할머니의 물건들, 주인은 떠나고 세월만 쌓여가는 장신구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울적해진 소녀의 마음처럼 불가사의한 사랑을 느껴보기도 하고,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중 세월만 흐를 뿐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젊을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마침표가 없기에 새로운 외면의 세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남자를 통해 체념할 수 없는 마음의 위험과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마음에 부질없음을 내내 읊조려 보기도 했다. 특히, 고되거나 포기하고 싶거나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 들 수밖에 없는 삶을 더 주목했는데, 대체로 동정심과 연민이 담긴 손길을 바라지 않았고, 우려의 시선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만큼 이 모든 것이 지나갈 일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듯했다. 이런 모습에 나는 권여선 작가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p. 80)
그리고 윌리엄 트레버는 등장인물 아그네스의 목소리를 빌려 “세상은 우리한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이 냉혹한 현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나는 왜 단 한 줄의 글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머무는 것일까? 분명 무언가 내 마음을 건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말로 옮기지 못해 닿지 못한 말들을 대신 적어 알려준다는 마음이 들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삶으로 방향을 틀도록 만든 것일까? 말하려 했던 수많은 시도에 귀를 기울여 그 감정을 하얀 종이 위에 짧은 호흡으로 써 내려가기까지 겪었을 글쓴이의 노력이 감동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대부분 공감이 가는 대상이나 와닿는 이야기를 만나면, 그다음 장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덮고 나면 또 다음에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한다. 기대한다는 것! 순수한 이 감정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나 홀로 떠진 눈을 끔벅거리며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떠올려지는 생각들을 따라가다가 나는 오늘 하루 몇 번의 기대를 하며 지냈는지 물어본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를 움직였던 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이제서야 단 한 권의 책만으로도 기대감으로 들뜨게 하는 이 순간의 값어치가 절대 작지 않음을 실감한다.
흐트러져 있던 마음을 움켜잡아 한 곳으로 모아보는 시간 그 자체를 즐겼다. 어쩌다 보니 습관적으로 늘 올곧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잊고 말이다. 몇 주에 걸쳐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읽다 보니 6권의 책에 대한 애정이 그새 많이 쌓였다. 인도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무거운 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리고 지중해의 산들바람을 타고 날리는 담배 연기와 잔에 담긴 독한 술의 향기까지, 아편 향에 취해, 술에 취해, 이야기에 취해 아주 어질어질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