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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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호흡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도입부에 확 빨려 들어가 100쪽을 쭈욱 읽어버리게 만든 <사탄탱고>의 매력에 빠졌던 작년의 그 짜릿함을 기억한다. 황폐한 마을, 곰팡내 가득한 방,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던 그 음울함이 아직도 잔재처럼 머릿속에 콱 박혀 있는데, <죔레는 거기에>를 펼치자 웬걸, 점심으로 먹을 감자국수를 만드는 한 노인이 나온다. 예상 밖이다. 뭔가 소박하고 인간미도 느껴지고, 첫인상부터 내가 알던 작가의 느낌과는 꽤 다르다. 그런데 또 가만히 읽고 있으면 이 편안함 속에 놓치기 힘든 미세한 긴장감이 있다. 대체 이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역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이야기도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몰입해서 읽다 보니 결국 이러나저러나 역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맞긴 하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과도 거리가 멀어 사람도 거의 살지 않는 산 위의 집에서 살아가는 올해 아흔두 살의 은퇴한 전기 기술자 요제프(요지 아저씨)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기 기술자와 유랑 가수, 전직 교사, 퇴역 군인 등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더 이상한 건 모두가 그를 “폐하”라고 부른다. 요제프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온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를 헝가리 국가의 기틀을 세운 중세 마자르계 왕조, 아르파드 왕가의 마지막 후손으로 여기며 왕으로 추대해 왕정복고를 이루려고 한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고,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더없이 좋은 상징이기도 하다. 영 느낌이 싸하다. 어쨌든 숱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요제프는 왕좌에 오르는 일에 별다른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정작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했던 사람들, 가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온 긴 세월에 관한 기억들이다. 무엇을 잃었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무엇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지.

처음에는 요제프가 비밀을 간직한 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은둔자 같은 노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국회와 대주교, 유럽연합 관계자, 독일 대통령에게까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논리를 끊임없이 세상에 던졌다. 자신을 왕위에 올리든지, 아니면 그에 걸맞은 존엄을 인정해 연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린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답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요제프 역시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헝가리. 요제프는 독일 병사들의 무덤 6천 기를 찾아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 훈장에는 당시 헝가리가 겪어야 했던 복잡한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노인의 현실은 영 빠듯하다.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전기료로 쓰면서도 그는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며 전기난로를 사용한다. 전기료가 그렇게 부담스러우면서도 왜 굳이 전기난로를 고집하는 걸까. 그건 그렇고 잔뜩 모여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곁들인 와인 탓인지, 세월이 무거워진 탓인지 이내 잠에 들어버린 요지 아저씨. 거대한 역사와 한 사람의 초라한 일상이 한 몸 안에서 겹쳐 보이는 모습에 착잡함을 느끼며 눈길을 거두기 어려운데, 역사학자 버디지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요제프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한 말을 꺼낸다.

“우리에게는 아르파드 왕가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 좋은 서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왕이 필요하고, 당신은 바로 그 자리에 딱 맞습니다.” (p. 68)

여기서 ‘좋은 서사’라는 말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지 아저씨에게 지금 왕좌에 오르는 일보다 더, 더,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가족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해 질 녘 테라스에 앉아 늦봄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평온한 일상.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늘 목에 큰 가시가 박힌 듯한 심정으로 살아온 건 아닐까. 눈앞의 풍경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을 것만 같다.

더 이상의 전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여러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움직이듯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한 요지 아저씨의 시선과 말을 따라가면 될 뿐이다. 사뭇 진지함이 오가는 상황에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읽다가 난데없이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지게 만들기도 하는 이야기에 웃어? 울어? 말어? 싶은 순간들. 최대한 웃음 포인트를 살리고자 했다는 번역가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졌고, 즐기기만 하면 됐다. 에구,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쉬워, 기억에 남는 이야기 조금만 더 담고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요지 아저씨가 오늘날의 삶에서 사라진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정직해지시오, 용감해지시오, 인내하시오, 그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 이러한 고귀한 원칙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도우시오, 이것이 단순한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바이며, 이것만 따르면 충분하고, 다른 어떤 지침도 필요하지 않소.” (p. 161)

요지 아저씨가 말하는 삶의 원칙은 거창한 교리나 신념이 아니라, 의외로 단순했다. 정직할 것, 용감할 것, 인내할 것. 그런데 이게 참 별것 아닌 말 같으면서도 쉽지가 않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기, 두려워도 해야 할 말을 하기, 금방 달라지는 게 없어도 조금 더 견디기.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내 일이 되면 또 달라진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는데, 매번 그쪽을 선택하며 사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저 상황이 조금은 나아지는 쪽으로 기울여 보는 거다, 오늘도.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그 인생 안에 도저히 들어맞지 않는 일이 항상 하나쯤은 있어요, (p. 274)


이 책의 번역가 김보국 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죔레는 거기에>의 경우 외국어로는 처음으로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선뜻 번역 의뢰를 받고는 덥석 번역을 맡겠다고는 하였으나, 헝가리 내에서 작품 관련 논의를 살펴보던 중, <사탄 탱고> 이후 점점 더 난해해지는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의 정점이라는 어느 독자의 댓글을 읽고, ‘큰 나무에 도끼가 제대로 물렸다’라는 헝가리 속담이 떠올랐다.”

번역가에게는 처음으로 이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호사였다면, 독자인 나에게는 그 번역을 통해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한 여름날의 즐거움이었다. 헝가리를 사랑하는 번역가가 헝가리를 사랑하는 요지 아저씨의 마음을 헤아리고, 헝가리를 사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글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 같은 느낌. 헝가리를 향한 마음이 한 사람에서 또 한 사람을 거쳐 내게까지 건너온 것 같다. 작가의 또 다른 매력, 아름답기까지 한 문장을 만날 수 있었고, 요지 아저씨와 그의 심장, 죔레까지 한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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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8-1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책이 2권 있는데 아직 못 읽고 있어요. 재미는 없는듯한데...별5개라니!! 안보면 안될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곰돌이 2026-08-12 13:32   좋아요 0 | URL
읽는 데 문제는 전혀 없는데, 개인적으로 <죔레는 거기에>는 라슬로 작품을 좀 읽고 마지막쯤 에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읽다보면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이나 <헤르쉬트 07769>가 떠오르는 장면들이 직간접적으로 (조금) 나오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노인이라 그런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그동안 써온 세계와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쭉 떠오르는 그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어요. ‘아, 뭔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일렁이는 감정을 조금 더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소장하고 계신 책 중에 당연히 <사탄탱고>가 있으실 테니, 혹시라도 그 책이 별로라면 이 책까지 읽게 되진 않으시겠지만 ㅋㅋㅋ 괜찮으셨다면 이 책은 무조건 추천이요.

이상 돌팔이였습니다.
 
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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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마음에 남은 건 한 인간이 사랑했고, 잃고, 살아온 시간이었다. 요지 아저씨가 들려준 삶의 이야기가 이토록 쓸쓸하고 아름다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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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7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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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운 두려움이던 시대를 떠올리며 읽었다. 그 불안이 얼마나 컸기에 한 인간의 상상력을 이렇게까지 밀어붙인 걸까. 봤지만 설명할 수 없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으며 결국 홀로 견뎌야 하는 그 고독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 선 인간의 두려움과 맞닿은 소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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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리고 그때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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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작품 중, 겉으로는 아버지의 이야기지만 결국 딸이 오랫동안 삼켜온 감정을 꺼내는 일이기도 했던 <미스터 포터>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이들의 삶까지 토해내듯 써 내려간 딸의 심정이 오래 남았고, 그 인연이 <내 어머니의 자서전>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한 사람의 삶에 식민주의와 사랑의 결핍이 남긴 흔적을 끝까지 따라가는 지독한 결기를 느끼면서도, 그런 삶마저 끝내 살아내는 사람의 힘 앞에서 서글픈 안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리고 그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전 작품들처럼 분노가 격렬하게 터져 나오기보다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증오와 슬픔이 삶에 깊이 배어 있었다. 이전 작품들이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를 바라보게 했다면, 이번에는 과거가 현재를 찾아오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킨케이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이 짙고, 카리브해 앤티가섬 출신의 한 중년 여성이 작곡가인 남편 미스터 스위트와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삶은 어떤 잔인한 뜻밖의 일을 준비했을까, 어떤 부당한 과업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고된 임무를 이겨내야 할까. (p. 82)

어릴 적 엄마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바나나보트를 타고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미시즈 스위트. 사랑받았던 기억과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를 동시에 안고 살아온 그녀에게 미국에서의 삶 역시 결코 아늑하지 않았다. 유럽 작곡가의 클래식을 듣고 자란 남편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섬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이민자 아내. 두 사람의 출발점은 너무나 달랐다. 한때는 그 다름에 끌렸을지 몰라도, 둘 사이에 놓인 문화와 기억의 차이는 끝내 메워지지 않았고, 그 틈은 차가운 권태로 남았다. 길쭉한 다리가 매력이었던 젊은 시절의 아내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바나나보트를 타고 온 끔찍한 년”(p. 17)이자 자신의 삶을 가로막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남편. 그런 무시와 냉소 속에서도 미시즈 스위트는 자식을 사랑하고, 집안을 돌보고, 부엌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삶의 한 조각만큼은 끝내 놓지 않는 사람.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림책 너머의 의미를 먼저 읽어내던 아이였고,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게 내 권리”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마음을 먼저 따르던 아이였다.

누군가의 노동과 노력 위에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스터 스위트는, 아이를 돌보고 집을 지키며 자신의 몫까지 감당하고 있는 아내의 큰 목소리를 싫어한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싫어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녀에게 해보지만, 매번 묵묵히, 그것도 ‘척척’ 해내는 미시즈 스위트의 유능함은 다시 그의 열등감과 좌절을 건드린다. 아내가 일상을 버텨낼수록, 그는 자신이 빼앗겼다고 믿는 삶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미스터 스위트는 차고 위의 작업실에 있었다. 그는 항상 그곳에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곳이 장례식장은 아니었고, 단지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자신의 삶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p.65)

끝없이 자기 연민에 잠긴 미스터 스위트의 작업실이 마치 장례식장처럼 보이는 그 한 줄이 꽤 신랄했다. 내가 느낀 미시즈 스위트라면 남편의 이런 꼴사나운 슬픔마저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작업실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말없이 놓고 문을 닫아줄 것만 같다. 그녀는 아들 헤라클레스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도 그저 애들 장난으로 넘기지 않고, 아이의 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맥도날드 해피밀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플라스틱 인형은 병사가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하며, 온 세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 눈에 아내는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소설은 계속해서 ‘지금’과 ‘그때’를 오간다. 시간은 결국 모든 것을 그때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현재로 되살아나, 다시 지금이 된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저마다 지나온 수많은 ‘그때’를 데리고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을 계속 불러오는 일은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행복도 상처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라는 듯이. 지워질 수도,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던 시간을 다시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를 쉽게 이해하거나 판단하기보다, 한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온 시간을 먼저 바라보게 하는 것. 미시즈 스위트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을까.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밀어내지 않는다. 좋았던 일이든 아팠던 일이든, 그것까지 자신의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닿고 싶고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붙잡는 시간과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내겐 쉽지 않았다. 미시즈 스위트의 시선과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조금 피로하게 느껴졌고, 계속 애를 써야 하는 독서가 되어버리더라. 그런데도 킨케이드의 글을 읽을 때면, 글로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살아온 내 곁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했는지, 미워했는지, 참고 삼켰는지 그 마음의 결을 나는 다 알 수가 없다. 분명 말해지지 못한 것이 있었을 텐데. 어쩌면 한 사람이 잊지 못한 시간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느린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끝내 버리지 못한 시간을 읽어야 비로소 그 사람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마음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엄마를 떠올렸다. 내 엄마의 그때와 지금은 어떨까. 그 속에 나는 어떤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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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는데, 호아킨 폰트라는 인물이 자기 딸의 친구이자 젊은 시인인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共謀)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야만스러운 탐정들 1》, p. 321)

기존 문단의 질서에 맞서 자신들만의 문학을 꿈꾸던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이었다. 물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ㅋㅋ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아킨이 최고의 문학이라고 말한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을, 특정한 감정 하나에 독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던진 호아킨의 문학적 조언이 다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에 깊이 잠긴 문학이 어떤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게 만들기도 하니까.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돼버린 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을 열면 자신을 기다려 줄 곳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바람일 테다. 모든 종류의 문학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성숙한 독자는 아닌, 그저 취향에 맞는 책을 집어삼키는 내게는 어둠 속을 방황하더라도 결국 삶으로 돌아올 ‘생명줄’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늘 평온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호아킨이 말한 평온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온갖 고통의 소요를 치르고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공에 가까운 말이다.

예전에는 특정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문학이 내게 이용당하곤 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 속에 있더라도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그 감정에만 오래 머물지 않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그 고마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붙들고 읽어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삼십삼 년을 살아오며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것이 몇 있긴 해도 (진짜 있기나 한 건지...), 정말 앞날만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오늘의 이런 건전한 생각(?)이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만, 온갖 것을 다 쏟아부어도 ‘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싶은 개떡 같은 날은 또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은, 그저 글을 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마음을 헤아려보며, 잠깐 내 사정은 잊고 몰입한다. 그러다 문득,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그 어떤 틈새가 내게도 있었던 거구나 싶어 ‘이만해도 됐지 뭐’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진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편다.

돌고 돌아 7월에 산 책 이야기다. 이놈의 손가락이 인내라는 것을 몰라 장바구니를 비우고 또 몇 권 품에 들였다. 책을 고르는 일은 늘 그렇다. 읽고 싶은 마음은 앞서고, 참는 마음은 늘 한발 늦는다. 책 선택의 고민을 덜고, 또 다른 세계로 쉽게 발을 들일 기회를 얻는 일은 언제나 반갑고 귀한 일. 이번에도 먼저 읽고 좋은 리뷰를 남겨주신 알라디너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소박한 땡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앞서 호아킨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새 책 이야기는 가볍게 남겨야겠다.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

누군가의 상처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 뒤에 놓인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는 작품은 늘 내 책장 한 켠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만나봤던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식민지의 기억과 여성의 목소리를,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 공동체의 삶을, 옥타비아 버틀러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이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한 시대를 담아내는 소설, 역사와 인간이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보스니아의 드리나강 위에 놓인 한 다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시작은 다리를 둘러싼 오래된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낸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세워진 그 다리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라지는 시간을 지켜봤고, 제국이 바뀌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도 묵묵히 견뎌냈다. 수백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다리라면,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시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다리가 간직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로 남긴 순간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시간까지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전설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하듯 그렇게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법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건드리지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 (p. 32)



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

1934년 아르메니아인 사업가 하굽 야쿠비얀이 카이로 중심가에 지은 10층짜리 유럽풍 건물. 처음에는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던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습도 달라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떠나고, 일부 공간은 사무실이나 병원, 임대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옥상에는 값싼 거처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서민 사회가 만들어졌다.

처음 만난 인물은 자키 베다.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지만 혁명 이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한때 꿈을 펼치던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그를 20년째 ‘주인님’이라 부르며 모시는 아바스카룬이 있다. 그렇다면 건물 꼭대기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라크아를 행하는 모습,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며 웃는 여자들, 그리고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 그곳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잠시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곤소곤 대는 소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 기침 소리,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기도문 소리와 함께.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마야 두란이다. 그녀는 지금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다. 마야는 석 달 전으로 돌아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마야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87세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를 수행하게 된다. 늘 그랬듯 튀르키예를 소개하고 손님의 편의를 도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든 노교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침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러던 순간, 교수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를 계속 따라오는 수상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공상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마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은 아닐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펼치던 마야. 대체 왜 그녀는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남기려 하는 걸까.

나는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셈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내가 목격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내 고통도 극복될 테고, 삶도 단순해질 테니까. (p. 10)



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이쪽 작품들도 두루 살펴보던 중,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에 이끌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을 집어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낸 열두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터 읽어봤다.

“뭘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실비나가 물었다.
“음, 분신 의식이 언제쯤 끝날지 알고 싶어 하더구나.”
“언제쯤 끝날 걸로 보세요?”
“얘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말이다, 영원히 안 끝나면 좋겠어!” (p. 342)

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비나 역시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가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볼지 두려워 빈자리가 생기면 안도하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비나가 개인의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의 문제까지 마주하며 여성들의 연대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뜻 앞에 서지는 못했던 이들이라면, 실비나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연대는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기 몸으로 저항하게 되고, 세상이 끝내 듣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몸으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고, 또 알려고 했을까. 세상이 보내는 신호들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 정도로 넘겨버리면서, 당장 내 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데 바빴던 내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선택까지 했는지, 왜 마리아 엘레나는 끝나기를 바라야 할 이 의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



H. 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공포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갔다. 시청각적 자극 없이 활자만으로 과연 어디까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늘 반신반의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해도 뭘 알아야 읽어볼 거 아닌가. 주구장창 고어만 늘어놓으며 사람 기분만 더럽게 만드는 공포보다는, 밤에 괜히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덮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공포를 원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 여름이 가기 전 늦은 밤에 펼쳐볼 생각이었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장 짧은 작품들 위주로 분위기만 먼저 느껴봤다.

꼿꼿한 자세로 감정 기복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도, 분명 별 타격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읽는 도중이나 마지막 문장에 다다를 때 등을 훑고 가는 싸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포를 빌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작품도 있었다. 난 이게 더 좋았다. 그 끝에서 마주한 기괴한 절망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용한 탄식. 나처럼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에게도 의외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 14편 가운데 「랜돌프 카터의 진술」, 「에리히 잔의 연주」,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 「아웃사이더」까지 네 편을 먼저 읽었는데, 가장 오래 남은 건 마지막에 읽은 「아웃사이더」였다.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의 마지막 단조 화음을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울림이 한동안 가슴에 머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과거를 망각한 덕분에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것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와 인간들 틈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황금 아치 너머에 있던 그 괴물에게 뻗은 내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만져졌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 p. 109)



오노레 드 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골동품 진열실》

시작은 《사촌 퐁스》였다. 고구마 줄기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고른 《골짜기의 백합》도 시작부터 영 마음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끝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읽으면 되지.

《잃어버린 환상》 1권의 시작을 알리는 니콜라 세샤르.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식자공이나 교정자의 역할은 할 수 없었던 수습 인쇄공 출신의 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국민공회의 법령을 빠르게 유포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 덕분에 ‘어쩌다 보니’ 인쇄업 면허를 받고, 인쇄소 사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쇄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때마침 몰락한 귀족 모콩브 백작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인쇄소 감독관으로 일하게 되고, 세샤르는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뒤섞인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던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난이 끝나면 탐욕이 시작되는 법이다.” (p.21)

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다 보면 끝이 없으니 함께 고른 《골동품 진열실》을 펼쳤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작은 지방 도시 알랑송, 아직도 옛 귀족 사회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앞서 읽어본 《잃어버린 환상》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부르봉 왕정복고를 거치며 사회 질서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은 이미 신흥 부르주아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건만, 발자크는 가장 먼저 혁명으로 몰락한 데그리뇽 가문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데그리뇽 후작은 여전히 과거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곁에서는 충직한 집사 쉐넬이 현실을 묵묵히 떠받친다. 아직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단계인데, 발자크 표 각성 한 방 기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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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7-26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모두 아름답네요.

곰돌이 2026-07-26 09:58   좋아요 0 | URL
늘 드러내는 것에 있어서는 고민이 많고 쑥스럽기만 해서요. 이 글도 올려놓고 혼자 오버한 것 같아서 ㅋㅋㅋ 지울까 고민하다가 아몰라~ 하면서 뒀는데...... 다락방 님 댓글 잘못 단 건 아니시겠죠? 아, 달디달다...

다락방 2026-07-26 13:23   좋아요 1 | URL
진심입니다.글과 사진이 너무나 고급져요!!

잠자냥 2026-07-26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최근에 들어온 몇몇 땡투의 출처가 곰돌이 님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재미나게 읽으세요.

곰돌이 2026-07-26 15:31   좋아요 0 | URL
곰이라 그런지 맛있는 거랑 재미있는 책 낚아채는 데 빠르답니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글이 매력 있더라고요. 잠자냥님 덕분에 매번 좋은 작품과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신나고, 감사한 마음은 큰데 땡투는 영 변변찮네요.ㅋㅋ

책읽는나무 2026-07-27 0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볼라뇨 책 어디선가 접하고 보관함에 막 쑤셔둔 적 있었는데 저런 문장들이 있었군요. 문학이란…크.^^
그리고 곰돌이 님이 거두신 문학책들과 문학의 정의…크!!
절로 취하네요.ㅋㅋ
이 더운 여름 문학책과 함께 하신다면 그리 많이 덥진 않으시겠어요.
고요한 여름 풍경입니다.

곰돌이 2026-07-27 14:54   좋아요 0 | URL
‘크‘가 두 번!! 갑자기 얼마나 시원한지 감도 안 오는 막걸리가 확 땡기게 만드시는군요!! 요즘 책나무님은 만화책 열심히 읽고 계시던데, 저는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나면 공포 소설이나 한 권 읽어볼까 해요. 으스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