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1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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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가 잭 런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평소에 계급 간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계속 다른 책들에 밀려만 있었는데, 예쁜 표지 못지않게 책 맨 앞에 실린 녹색광선 편집부의 ‘책 머리에’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글과 더불어 ‘추앙으로 시작된 붕괴’라는 부제가 흐름이나 결말을 예상하게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할지 모를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줄 것 같아 기대하게 했다.

(P. 11)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붕괴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독자분들께서 마틴의 붕괴에서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이라도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모순과 붕괴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문학 안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므로.


저자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밑바닥 세계를 떠돌며 지내다가 15세 되던 해, 양식장의 굴을 약탈해서 팔면 돈이 된다는 말에 배를 한 척 사서 어린 해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를 위한 바다 위 피비린내 풍기는 욕망과 모래밭 위에서 육체적 쾌락에 뒹구는 것만이 존재한 거친 해적과 그들 주변을 맴도는 헤픈 웃음을 날리는 여자들, 그리고 상처로 굳어진 얼굴과 손으로 온종일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그의 세계를 채우고 있지 않았을까.

시도와 포기의 반복을 거쳐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미국 최고의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잭 런던의 서사 때문인지 이 소설에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남녀 간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가 인생을 살아가며 깨달은 삶의 본질을 엿볼 수도 있을 거란 기대도 하게 한다.

책장을 더 넘겨본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아온 가난한 노동자 ‘마틴’은 우연히 상류 계급의 여성 ‘루스’를 만나게 된다.

여태껏 알던 탐욕스러운 여자들과의 강렬함과 달리 희고 창백한 얼굴로 우아한 아름다움만을 풍기는 그녀의 모습은 마틴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태어날 때부터 장밋빛 인생인 루스의 고귀한 자태 양옆으로 암담하던 시절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P. 21) 화이트채플 가에서 발을 질질 끄는 퀴퀴한 여자들, 술에 절어 퉁퉁 부은 노파들. 또 괴물 같은 여자 형상으로 선원들의 피를 빠는, 입도 몸도 더러운 지옥의 온갖 것들, 항구의 쓰레기들, 인간 세상의 밑바닥 찌꺼기들.

이 문장을 읽는 내내 적잖이 불편했다.
진절머리 나는 시궁창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 빚어진 자신을 향한 혐오의 표현일 수도 있다. 다만, 절망 속에서 더는 피할 수 없었던 선택이란 것도 있지 않을까? 시련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한 선택에 가려진 것은 없었을까? 인간의 숭고함을 잃지 않으려 했던 몸짓말이다. 생계를 위해 거친 삶 사느라 차마 드러내지 못한 이 모든 것까지도 한데 묶인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인간의 가치가 계급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을 보고 느꼈을 저자의 직설적인 표현으로 이 소설 속 주인공 마틴이 지독한 자신의 삶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가를 알게 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돈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가 달라붙는 사람들을 보고 지내왔는데, 지금 눈앞에 생계를 위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책에서만 봤던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화려하고 멋진 저택에서 모든 게 어색하면서도 인간의 본능에 따라 아름다움을 좇는 마틴의 복잡한 마음은 그 만의 몫이 아니었나 보다. 고상한 삶에서 모든 게 익숙해 보이는 루스 또한 다른 결의 복잡함을 느끼며 자신도 놀랄 만큼 마틴을 원하고 있었다.

(P. 28)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타락의 본성이 자신에게 내재해 있다가 드러나는 듯싶었다.

사랑은 그랬다. 매혹적이었다.
본능에 충실한 ‘그 순간만큼’은 계급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감춰지고, 서로를 향한 호감은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고, 자신을 단속하려고 해도 더는 그 필요성을 잊어버리게 하는 마술이었다.

소금기 섞인 바람에 찌든 좁디좁은 방 한구석으로 돌아와서야 꿈에서 깬 듯 현실이 보이고 마틴은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애쓰지 않아도 자신과 그녀와의 머나먼 거리를 실감 나게 하는 것들이 하나둘 떠올려지고 자신의 주변을 채우는 소리와 코에서 맡아지는 냄새까지 어느 하나 고통과 가난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는 자기 삶이, 그녀와의 첫 만남은 분명 현실감 없는 꿈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안 될 이유만 가득한데도 지금은 황홀경에 빠져 하루가 삼 년 같고 그녀 생각으로 가슴에 먼지만 쌓여가기에 마틴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려 결심한다. 루스의 삶에 어울릴만한 나 자신을 만들고 싶은 열망은 솔직했고 순수했고 간절했다. 교양을 쌓고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한 마틴은 더 나아가 글로써 인정받고 싶고 작가로 성공해서 루스의 사랑을 얻고 싶었다. 흥미로운 건, 마틴이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점이었다.

(P. 91) 당신이 이 집에서 누리고 있는 삶에 나도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내고 싶어요.


‘계급’이라는 것은 가난을 벗어나려고 한 만큼, 글을 쓰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쓴 만큼 아무리 가려보고 눌러보고 막아보려 해도 부력에 의해 떠오르는 풍선처럼 가라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랑의 힘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숨겨두고 외면했던 감정을 끌어올리면서 애초에 가라앉을 수가 없었던 계급과 지위라는 장벽마저 들어 올리게 만드는 게 진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애처로운 노력으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마틴의 사고는 건강해 보였다.
상류층 삶을 향한 속물적 욕망을 내비치고, 자신의 처지만을 탓하고, 기대만 하고, 고통만 받으며 제자리에서 이룰 수 없는 그녀와의 사랑만을 미친 듯이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루스는 마틴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 노력하고 그에게 느낀 활력을 그날의 자양분 삼아 하루를 보내면서 거칠고 열정적인 불꽃 같은 마틴이, 온화하고 차분한 애정과 사랑을 주고받는 삶으로 진입하길 원했다. 나는 서서히 현실의 냄새가 맡아진다.
마틴의 축적된 습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그가 가진 매력이 계급의 차이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지고한 가치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듯한 이 문장을 난 그저 냉정하게 응시할 뿐이다.

(P. 103) 그녀는 자기가 그를 빚어내고 있으며, 자신의 의도는 선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면서도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는 단단함을 가진 마틴이라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론 너머의 삶에 가닿기 위해 매 순간 충실하기만 한 그의 쉬지 않는 열정이 조금은 우려스러웠다.
그럼에도 마틴의 노력이 ‘가치 있는 삶’에 방향을 두고 있다는 점이 좋았고, 글을 쓰는 것을 통해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은 근사했다.

새로운 세계에 금방 눈을 뜬 사람처럼 적당한 긴장감과 발견하는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보이는 그의 모습은 경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소설을 써 내려가며 집필이 끊긴 동안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고 위로할 줄 아는 모습에 내심 놀랐다.
그가 겪어온 삶을 추측해 보며 자존감을 지키기 어려웠을 거란 편협한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싫은 건 싫다고 할 줄 아는 마틴인데 말이다.

(P. 273) “나는 나고, 사람들이 다 만장일치로 내린 평가라 할지라도 내 입맛을 거기에 맞추지는 않겠어. 내가 어떤 게 싫으면, 나는 그걸 싫어하는 거야. 그뿐이야. 나와 같은 인간들 대부분이 그걸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척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시늉을 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나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에 있어서 유행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야.”


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점 또 하나는, 마틴이 자신과 같은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에게 혐오가 아닌 동류의식을 갖고 좌절 대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그의 모습은 분명 내면의 또 다른 불씨를 켜는 순간으로 보였다. 더 이상, 삶을 좌절시키는 것이 자기 자신이면 안 된다는 의지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P. 279) 자기 앞에 있는 고생에 찌든 여인의 주름진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수프와 갓 구운 빵 한 덩어리들을 떠올리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사와 인류애가 샘솟았다.

망망대해에 가로막힌 삶에서 벗어날 거란 생각을 못 했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배움을 통해 마틴은 지식을 얻고, 교양을 쌓으며 루스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가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속한 상류사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고 언제라도 허물어질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환멸과 분노를 안겼다.

나는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얻게 되는 인생의 진리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는 사람이기에 그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참된 아름다움의 의미를 얻을 수 있길 응원했고, 루스와의 사랑을 이루든 못 이루든 적어도 정신적인 가난에서만큼이라도 벗어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마틴의 분투와 배움의 의지는 자극되기도 하고 그가 도서관을 다니고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도 이전 삶에서는 찾지 못했던 숭고한 아름다움과 경외심을 찾는 모습에 그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가슴 한편이 조금 애처로웠다. 꿈을 갖는다는 것, 목표를 갖는다는 것조차 이렇게나 사람을 가슴 뛰게 하고 열정을 갖고 움직이게 만드는데, 현실은 이상과 다르지 않은가.

현실을 사는 내가 현실을 잊고 현실과 다른 나로서 마틴의 세계에서 그의 선택이 우주의 아름다움이든 푹푹 찌는 열기 속 노동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그 가치를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은 채 즐기며 읽을 수 있었기에 독서 자체의 즐거움이 컸다.
무엇보다 중요할지 모를 ‘그 무언가’를 찾고 싶었던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마틴이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일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P. 171) “그리고 삶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그런데도, 내가 이상하게 생겨 먹은 탓인지, 나는 그 삶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죠. 아름다움은 그런 삶 속에 있기 때문에 열 배로 증폭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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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08-22 0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듣는 작가인데...작가이름에도 책제목에도...이름에 지명을 붙이기 좋아하는 작가인가봐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곰돌이 2025-08-22 04:39   좋아요 1 | URL
(작가 이름은 계부의 성을 딴 거라고 해요) 주인공의 이름은 확실한 이유가 있어 보여요. 자기 삶에 비하면 여주인공의 삶은 천국 같아 보이거든요. 그곳을 향해 열심히 가고 있는 남자입니다. 재밌어서 2편 기대 중!!ㅎㅎ

바람돌이 2025-08-22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부에서는 그 천국에서 추락하는 마틴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앗 스포??? 그건 뭐 뻔한 이야기고요. ㅎㅎ 2권은 더 좋았습니다. 곰돌이님 글을 읽으니 제가 이 책 읽을 때의 흥분이 다시 살아나네요.^^

곰돌이 2025-08-22 13:06   좋아요 1 | URL
마틴의 삶만 풀어놔도 재밌어서 꿀떡꿀떡 읽었어요. ㅎㅎ 각자 살아온 삶에 너무 길들여진 상태라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마틴이 이제는 벗어나기 위한 삶 말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2권 다 읽고 나면 영화도 보려고요. 말하고 움직이는 마틴을 또 한 번 만나봐야겠어요!!

새파랑 2025-08-22 1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녹색광선에서 나온 책들이 다 좋은데, 그중 마틴에덴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바람돌이님 말처럼 2권이 더 좋았음~!!

곰돌이 2025-08-22 13:07   좋아요 1 | URL
녹색광선에서 나온 책은 감정의 혼란만 읽어봤어요. ㅎㅎ 1권도 꽤 재밌게 읽었는데 2권이 더 재밌다니…. 그나저나 마틴이 맥주 한 잔 시원하게 하면서 구애받지 않는 상황에서 소설 쓰는 장면이 나와주면 좋겠는데요…. 과연 ㅠㅠ
 
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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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두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떨었던 암담한 시기를 들여다보며 절망과 회한의 삶에도 한숨을 삼키고 애쓰며 살아온 모습은 강인함을 단단히 심어주지만, 어둠을 잔뜩 머금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나가야 했던 모습이 뇌 한구석에 깊게 박혀서인지 마음이 쉬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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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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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완서 작가님의 등단작이자 대표작 <나목>이다.

저자의 또 다른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은 지 오래되지 않아서 그때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당장에 배곯지 않는 내일이 중요해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음전한 올케와 남의 집 세간살이를 들쑤시며 먹을 것을 찾던, 그리고 향토방위대에서 만난 언니가 소개해 준 미군 PX 파자마부를 다니며 밥벌이했던 ‘나’가 떠오르고, 그때의 사람들과 분위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첫 월급봉투를 당당히 내밀었던 ‘나’의 벅찬 감정까지도.


저자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이 소설은 1·4 후퇴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1932년생 ‘이경’이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흐른다.

왠지 마음 한 귀퉁이 모가 나 있는 듯한 그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전쟁 때문에 피폐해진 삶을 살았던 저자의 우울함과 무기력한 그때의 모습이 경아에게도 투영된 듯하다. 한 발 내딛기조차 어려운 막막한 상황에 마음속엔 뾰족한 가시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저자의 몇 권의 책에서 주인공 여성의 공통점이 있다면, 주눅이 들지 않는 당돌함과 솔직함이 아닐까 싶다.
남성 중심 사고 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이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며 살고 싶었던 여성은, 이내 듣기 거북한 말 한마디 세차게 듣고 아랫입술을 잘근 짓씹으며 참아야 했지만 때때로 억압과 차별을 향해 보여주는 맹랑한 태도와 벌침 쏘듯 하는 말 한마디가 손에 쥐는 건 없어 성엔 안 차도 꽉 막힌 목구멍을 뻥 뚫어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한순간에 행복했던 삶이 무너졌다.

6.25 한 달 전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오빠마저도 폭격으로 잃었다. 산다는 게 간단치 않은 무게로 다가오고 구질구질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과 무기력한 감정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가치를 잃게 하여 삶이 무의미해지고, 신물이나 더는 반짝거림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세상에 염증을 느끼게 된 상태. 그녀가 딱 그래 보였다.

(P. 44) 싫은 게 나인지 나 외의 남인지 어쩌면 그 모든 것인지 난 아무튼 나를 포함한 내 주위의 너절한 풍경을 종이조각 꾸기듯 마구마구 구겨 던져버리고 싶었다.

대학 시험에 실패하고 밥벌이를 위해 초상화부에서 사장 최만길에게는 미스리로 불리며 사업실적을 올려야 할 일에 달달 볶여야 하는, 늘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늘을 살아갔다.

황홀하고 매력적인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의 상품과 저녁 화장에 여념이 없는 세일즈걸들을 바라보기를 즐겼던 경아는 퇴근할 때 종업원 출입문에서 겪는 불쾌한 보초 순경들의 몸수색을 지날 때면, 집 근처라도 동행할 만한 친구 한 명이 무척 간절했다.
공포감으로 가득한 전쟁통 속에서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식구들은 당장 먹고사는 게 급급해서 각자의 슬픔은 가슴에 묻은 채 스스로 강해져야 했을 테지만, 어두운 골목길은 전쟁을 떠올리게 해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이 퇴근할 때까지 먼저 잡수시지도 않고 기다리시다가 딸이 오면 그제야 밥상을 들여오는 어머니를 만나기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집을 향해 냅다 뜀박질해야 했다.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숨통을 조여오는 긴장감과 치닫는 공포감이 사람의 정신과 일상을 파먹어 구멍투성이가 되었을 불완전한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 아니었을까.

꼿꼿한 자존심만 남은 경아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다.
희망 끝자락에 딱 붙어 근근이 살아갈 힘을 얻으며 살아가야만 하기에는 팔딱팔딱 심장이 뛰고 활력이 넘칠 나이, 스무 살.
보석을 삼킨 듯 아름답고 현란한 색채를 띠며 재미나기만 하던 시절은 이제 익숙해질 수 없는 회색빛 우울과 외로움만 남은 채 전부 사라졌다. 전쟁이라는 험한 것이 경아의 기억을 제외 한 모든 것으로부터 그 빛들을 앗아가 버렸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못할 자식 잃은 참척의 고통을 겪는 엄마의 심정을 모르진 않지만, 자신도 엄마의 자식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서운한 마음과 서로 물러서지 않는 고집까지 더해져 모녀간 갈등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되풀이만 되었다.

엄마가 고생한 만큼 더 잘 지냈으면, 속앓이하는 얼굴 그만하고 다시 밝아졌으면, 그런 엄마 얼굴을 바라보는 내 생각도 헤아려주고 나를 위해서라도 살아주길 바라는 분노 섞인 감당하기 벅찬 경아의 마음이 회색 벽에 부딪혀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졌다.
두 사람을 향한 나의 시선은 이내 먹먹함과 무력함 그 어딘가쯤에 가닿고 있었다. 무진 애를 써봐도 어찌 잘 안되는 관계, 이 두 사람이 그러했다.

(P. 22) 나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사는 것을 재미나 하고픈, 다채로운 욕망들은 이 완강한 고집 앞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한 명의 환쟁이 ‘옥희도’씨가 초상화부에 들어온다.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경아 시선에는 어딘가 고지식하면서도 자기 세계가 있어 보이는, 황량한 풍경이 담긴 눈을 가진 그가 다른 이들과 달라 보였다. 자신의 마음을 한 줌 털어놓고 상실로만 가득 찬 빈자리를 그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 걸까? 다섯 명의 아이와 아내가 있는 옥희도 씨를 향한 생각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 거다. 그가 가진 절망을 덜어내 주고 싶은 마음까지도.

아버지와 두 오빠의 부재가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고, 가슴을 옥죄고 있는 돌덩이 하나라도 털어놓고 싶은 간절함의 세포들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여, 그녀를 이리도 연약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릇된 감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나의 솔직한 마음을 무시하려 해도 갑갑함을 피할 수 없던 차, 짙은 고독을 앓는 경아에게 번지수를 잘 못 고른 남자 ‘한태수’가 나타난다.

전깃줄 다발을 든 채 실없는 농담을 하는 PX 전기공으로 일하는 태수는 떡 줄 사람의 생각도 모른 채 경아 주변을 맴돌며 언제나 껄껄대며 인사를 걸어왔다. 넉살이 좋아 경아에게 척척 들러붙고 속없는 사람처럼 너불너불 잘 떠들지만, 한 겹만 드러내도 그 속은 호젓하다 못해 쓸쓸했을 터.


선선한 바람 하나 불 것 같지 않았던 뜨거운 여름,
불볕더위에 잠 못 이룰 때는 어쩌다가 피부에 닿는 이불에서도 열이 펄펄 나는 것 같아 얼른 발로 옆으로 밀어버렸는데, 언제 이렇게 기온이 내려갔는지 자다가 썰렁함을 느껴 이불자락 한 번 더 끌어당겨 안고, 그간 설쳤던 잠을 몰아 자듯 잠을 깊이 자는 나 자신을 보니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살아가는 것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당장에 지붕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앞이 내다보이지 않아 갑갑하다가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뿜어대는 강인한 생명력이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이 돼 주어 각자 품은 결핍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하도록 마음을 식혀주고, ‘살아지는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 주니까 말이다.

모두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떨었던 그 암담한 시기를 들여다보며, 지쳐버린 절망과 회한의 삶에도 근심과 한숨을 삼키고 애쓰며 살아온 사람의 모습은 우리에게 강인함을 단단히 심어주지만, 어둠을 잔뜩 머금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 나가야 했던 모습이 뇌 한구석에 깊게 박혀서인지 마음이 쉬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P. 124) 몇십 년이나 묵은 은행이 그 가을엔 왜 그렇게 처절하도록 노오랬던가. 난 그것을 보며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죽고 싶고를 번갈아 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가.


저자는 이 작품을 40세에 썼지만, 20세 미만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썼다고 한다. 그렇게 기억된다고.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을 만큼 눈앞이 깜깜하고 결핍 많은 삶을 살다가도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추운 겨울 이겨 내고 자유롭게 뻗어있는 가지에 매달린 꽃망울을 보며, 그 작은 것이 품고 있을 생명력에 감동하는 벅찬 마음을 저자는 이 소설의 옥희도 씨의 실제 모델 박수근 화백의 유작전을 통해 느꼈다. 그 힘이 저자에게 열정의 불꽃을 피워 올렸고, 그와 같은 강인함과 벅찬 감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목>을 선사해 줬다.

‘진실한 이야기’의 힘을 통해 소박한 일상의 한순간을 더욱 값지게 여기는 감사함과 겸손함을 얻음과 동시에, 전쟁의 공포와 가난에 찌들어 대포 한잔할 새 없이 가족들 부양하느라 예술가로서 살아가기 어려웠던 이들의 열정과 그들을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던 사람의 마음마저 떠올려져 가슴이 뜨거워진다.

저자의 책은 읽고 나면 마음이 단정해진다.
흐트러져 있던 옷매무새 한 번 더 다듬어 볼 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나의 세계에서 내가 차고 있는 시계의 속도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겠지만, 혹독했던 삶을 버티며 살아온 사람의 모습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정작 내가 이루고자 했던 삶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만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삶은 아니었는지, 그것이 현재의 삶을 잡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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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박솔뫼.안은별.이상우 지음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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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는 그때의 나와 그리고 사람들을 그려보며 재밌기도 했고 울적하기도 했다. 무슨 자신감에 그 시간을 내 기억력에만 의존한 채 놓아준 건지 너무 아쉽다. 이제는 언제 들여다봐도 그때의 모습과 감정이 더 많이, 더 선명하게 오래 이어질 수 있도록 뭐로든 남겨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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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타치오 바닐라 향’ 커피 캡슐을 골라 얼음과 두유를 넣고 내려 한 모금 마셨다. 크레마가 풍부해 목 넘김은 부드럽고 피스타치오와 두유가 만나 고소함이 배가 됐다. 거기에 은은한 바닐라의 향과 인위적이지 않은 달콤함까지 아주 맛있다. 


맛있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집어 든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이라는 에세이는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 세 작가가 서울, 도쿄, 베를린에서 같은 기간 동안 각자 쓴 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1년 동안 써온 글을 모은 것이다. 아니, 이렇게 서로 붙어 버렸다고 한다.


나는 지금 골방지기가 되어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이 세 사람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주는 사람처럼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책장을 넘겨보니 각자의 삶 속에서 스쳐 지나간 이들을 초대하고 찰나의 생각들을 담은 걸로 보인다. 각각의 스타일이 묻어나는 세 사람의 솔직한 감정을 담은 일기를 허락받고 살짝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부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가 본다.


예전에 스트레스와 이런저런 걱정으로 불면증을 잠시 앓았는데 ‘서울의 박솔뫼’도 그랬나 보다. 머리만 대면 자는 사람이었다는데, 고민이 있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는 종종 잠이 안 왔다고 한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옆으로 몸을 살짝 돌려 누웠을 때, 그 어느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에 빠지면 수면과는 점점 더 멀어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잠 못 이루는 밤은 이어진다.

아니 그런데, 이거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이 안 올 때 자려고 노력하지 말고, 오히려 안 자려고 노력해 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심리적인 걸까?
내가 얼마나 안 자고 버티는지 보자!!! 하는 마음으로 버티는 것이 정말 수면에 효과가 있을까?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인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포용하고 받아들이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예민해서 그런 거라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한다’라는 세트처럼 묶인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중언부언 길어지면 가열된 나의 가슴에 또다시 불씨가 타올라 펄펄 끓기만 하고, 괜히 억울해서 두 눈에 눈물만 뜨겁게 차오르곤 했다. 이는 반드시 불면의 밤으로 이어지고.

그땐 그랬었다.
지금은 이렇게 잠만 잘 자는 것을 말이다.

(P. 13) 그러니까 가위눌림 같은 것, 시간이 지나서야 정체가 어렴풋하게 파악되는 것, 파악되었다고 착각하는 것들을 조금 안정감 있는 자세로 받아들이려는 시도인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데 그리고 어디에 있게 될 건데 그것은 그렇게 되어 버리는 일이라는 것.


‘도쿄의 안은별’은 여기에서 저기로 간다는 것, 혹은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은 반복되는 루틴이라 해도 매번 새로운 단 한 번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보다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혹은 좀 더 생산적이었어도 좋았을 터라는 아쉬움을 내비친다. 그러게, 나도 무척이나 많이 했던 아쉬움 중 하나라서 공감이 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어 지겹다는 말을 입 밖으로 자주 내뱉고는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조금 화끈거린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당연하게 내일도 주어질 거라는 그 오만함이 얼마나 경솔한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될 수 있으면 특별할 게 없는 (특별하지 않은 게 더 좋다. 평범한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걸 이제는 안다.) 오늘을 아쉬워하지 않고 조금 더 즐거운 마음으로 채우고 싶다. 그녀가 내리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차창을 바라보며 내릴 역에 다다르지 않기를 바라는 그 묘한 간절함, 편안함을 느끼며 공간과 장소를 채워보듯 말이다. 
나는 거창한 거 말고 내 방 안으로 들려오는, 거실에서 TV를 보는 가족의 웃음소리 반복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P. 18) 그 어떤 것도 그 시간과 공간을 완벽하게 반복해 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이 에세이집을 내기 전, 세 사람이 주고받은 메일을 보니 한참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했던 시절이었더라. 한순간에 자유로움이 막혀버린 시간, 그리고 누군가는 쉽게 떠올리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이 무너졌거나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그때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예기치 못한 혼란스러움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던 나의 모습과 사소한 것조차가 너무 그립고 간절했던 마음까지도.


‘베를린 이상우’는 ‘조르조 모로더’의 9분짜리 트랙을 듣고 있다.
그 순간 주변은 1970년 베를린의 디스코텍으로 바뀌고 한 테이블에 앉은 조르조와 마주하며 미래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혼자 기타를 치는 이탈리아 소년이었던 그의 여정에 빠져본다. 독일에도 강도 높은 제재로 외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질병으로부터 안전했던 그 시절의 안락함이 그리움으로 다가와 조르조의 목소리를 듣게 하였나 보다.


나는 근사한 오디오와 스피커가 없어 현실은 휴대전화 속에 들어있는 곡이 헤드셋을 통해 내 귀를 호강시켜 주는 게 전부이지만,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특히, 클래식을 재생시키면 나 자신이 고상하고 우아해진 것 같은 착각에 단단히 빠진다. 광활한 우주가 펼쳐지며 내 마음을 두드리고, 어루만져주고 머릿속에서 광광 울려대는 폭발에 압도되는 그 벅찬 감정. 환상이면 어떤가.


(P. 36) 꿈에서 깨어나듯이 혹은 꿈속에서 깨어나듯이 단지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트랙을 재생하자마자 우리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그러나 괜히 익숙한 레스토랑에 앉아,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조르조를 마주하고 있다.


코로나 시절 어디선가 기침 소리만 나도 도끼눈을 하고 서로 쳐다보며 의식했던 기억이 난다. 잠옷 그대로 노트북을 켜기만 하면 됐던 재택근무가 처음에는 아주 좋았다가 점점 걸려 오는 업무 전화도 귀찮아지고 업무처리의 한계도 있고 사람도 무기력해져, 차라리 출근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었던 그때의 기억. 그리고 규제가 완화돼 길거리를 걷다가 아직은 마스크 벗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그때, 술집과 음식점을 가득 채우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왠지 좀 낯설고 위험해 보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찰나의 순간을 놓아주지 말고, 그때의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이라도 이따금 써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 삶을 채워준 추억 속에 잊을 수 없는 고맙고 소중한 기억도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희미해지고 마음에선 안 그런데 삶을 살아가다 보면 놓치게 되더라. 그럼, 아쉬움을 되풀이하지 말고, 기록을 통해 스쳐 지나간 사람과 공간과 장소를 다시 마주해보는 거 어떨까.


이 와중에 너무 뜬금없지만 ‘금값이 이렇게 많이 오를 줄 알았더라면 그때 좀 사둘걸’과 같은 엉뚱하지만, 현실성 있고 실속 있는 과거의 나 자신이 적은 글을 읽고 나중에 씩 한번 웃게 될지도 모른다. (풉!)


(P. 76) 순진한 기다림으로 놓친 것들이 많은 것 같다. 너무 늦기 전에, 적어도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이 잊어버리기 전에 짧게나마 써 둔다.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기간, 각자의 방식으로 채웠던 일상의 조각과 감정을 붙여보는 새로운 대화법. 이 세 사람이 우정을 채워나가는 방식이 꽤 낭만적인 것 같다.


그리하여, 내 친구들에게 서로 같은 기간 동안 찰나의 감정을 담은 글을 공유해 보자고 제안해 보면 뭐라고 할지 잠시 머릿속으로 상상해 봤다.
나의 안색을 살피며 대꾸도 없이 뒤통수만 보일 것이 분명할 이 ‘비생산적’인 생각을 내가 잠시라도 왜 해 봤을까 싶지만, 그럼 꼭 친구가 아니더라도(빠른 포기) 사람들과 새로운 대화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눈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려본다.


돌이켜보니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순간들이 많다.
아직은 ‘돌이켜보다’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후회와 아쉬움의 색이 짙다.

박솔뫼 작가님이 이제는 곁을 떠난 아빠를 떠올리며 후회의 마음을 적어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다 알 수는 없기에 조심스러워하지만, 진심만큼은 선명했던 그녀를 향한 친구의 일기는 더 따뜻하게 읽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그 모습을 감추어도 또다시 어둠을 뚫고 빛이 오르며 해가 뜨는 것처럼, 그 후회와 자신을 향한 원망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럼에도 우리는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때의 아빠도 분명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거다.
지금 그녀가 친구의 마음을 알 수 있듯이.


세 사람의 일상 속 찰나를 채우고 있는 많은 것 중 공통된 것이 있다면,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거다. 그 기억의 대상은 가족도 있고, 지인도 있지만, 이 시간 여전히 전쟁 속에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어딘가에서 이 세 사람과 스쳐 지나간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읽다 보니,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남은 이야기를 마저 읽어야겠다. 그리고 한동안 치워져 있던 일기를 다시 꺼내, 단 몇 줄이라도 남겨볼까 한다.


 (P. 54) 단지 나를 위해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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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0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상은 늘 반복되기에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무너졌을 때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잖아요. 코로나는 우리 모두에게 한꺼번이 그걸 알려준 사건이었던것도 같아요. 이런 일상의 글도 좋고 그걸 섬세하게 읽어내는 곰돌이님의 글도 좋네요

곰돌이 2025-08-10 11:39   좋아요 1 | URL
평범한 보통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계기가 저에게는 슬픈 일과 이어져서인지 때론, 차라리 예전처럼 뭣도 모르고 날뛰던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어요. 무언가를 얻으면 잃는 게 있다는 것만큼은 왜 이리 비켜나가기 어려운 걸까요. ㅎㅎㅎ 전 아직 매콤하게 더 혼나야 해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담아야 할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댓글에 마음이 후끈해졌어요. 감사합니다. :)

페넬로페 2025-08-10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쓰는 지인들이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느낌으로 글을 쓰고, 서로 공유하는 것,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조금 부럽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커피 한 잔 내려놓고
그냥 좋은 글을 읽는 것도
부담없고 행복해요 ㅎㅎ^^

곰돌이 2025-08-10 15:33   좋아요 1 | URL
작가라는 직업은 제 주변에서는 찾기 어려운 직업군이라서 그런지 이들의 대화를 들여다보고 서로 아이디어를 짜내는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맛있는 커피 마시면서 지난 기억을 소환시켜 보며 이 생각 저 생각해 보는 동안 괜히 마음과 손끝도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이쯤이면 충분하다 싶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