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비가일
서보 머그더 지음, 진경애 옮김 / 프시케의숲 / 2022년 9월
평점 :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를 다시 만났다.
저번에 읽은 <도어>는 한 인간이 살아가며 겪은 엄청난 사건과 그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극적으로만 표현하지 않았던 점이 오히려 내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것 같아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와서 좋았다. 나쁜 평판은 듣고 싶지 않아 타인에게 친절은 베풀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그들로부터 방해받고 싶지는 않은 솔직한 심리 묘사는 세밀했고 따끔했다.
삶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일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버겁다. 어쩌면 그래서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인물의 감정이 마를 대로 마르고 닳을 대로 닳아버린 것 같아 더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가보다. 또 반대로 누군가는 더 아플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사소한 일에 힘들어하는, 이를테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유난이다’ 타박을 들으며 힘겨워하는 사람을 보면 그 또한 여간 애타는 게 아니다. 때론 오히려 더 애잔하게 바라보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들려주고 받아들이는 감정과 살아가는 방식 또한 제각각인 사람들을 향해 절대 쉽지 않은 이 삶을 살아내는 모습 또한 다양하게 볼 수 있도록 많은 책이 쏟아진다. 기쁨과 즐거움을 숨기지 말고, 아픈 것도 눈치 보며 아프지 말라고 하는 듯이, 읽는 동안이라도 내 안에 들어차 있는 온 감정을 맘껏 느껴볼 수 있도록 말이다.
바쁠 땐 책 읽는 것도 정말 말 그대로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인지 세밀하게 쪼개져 있는 사람의 심리가 저자의 필력과 만나 그 책의 등장인물들이 주는 여운이 오래갈 때, 이럴 때 정말 기분이 좋다. 그래서 <도어>의 여운이 아직 다 가시지도 않은 채, 이 책의 책장을 넘기고 있다.
부다페스트에 사는 열네 살 소녀 ‘기너’는 자신이 사는 곳에서 까마득하게 먼 국경에 있는 머툴러 김나지움 기숙사로 들어가게 된다. 한 집에 살고 있었던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프랑스 여성 ‘마르셀’이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추축국인 헝가리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그녀의 아버지는 침묵을 지키기만 할 뿐이다.
헝가리의 장군인 아버지의 딸로서, 그녀는 슬픔과 절망을 최대한 자제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을 제외하고는 부족함 없이 자랐을 것으로 보이는 이 꼬마 아가씨가 자신 못지않게 슬픔을 숨기면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투정 한번 부리지 않는 걸 보니 내 가슴의 온도가 조금씩 높아져 간다.
고모와 마르셀, 그리고 파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대위 쿤츠 페리,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지만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걸로 보이는 아버지와 무덤에서 조용히 잠들어 계신 어머니까지 이 모두와 헤어져야 한다. 집에서 멀어져만 가는 차 안에서 느꼈던 불안감을 감당하기엔 아직은 너무 어린아이다.
(P. 16) “넌 다른 세계로 가는거야.” 장군이 말했다.
변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숙사로 가기 전 아버지가 사준 곱고 가는 목걸이를 마지못한 듯이 받았던 기너. 그리고 용돈으로 고른 재떨이를 사며 아버지에게 드렸던 순간, 부녀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 바라만 봤던 그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오고 가는 말없이 슬픔을 절제한 부녀의 눈빛은 이미 저울로도 잴 수 없을 만큼 슬픔의 무게로 무겁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심정으로 지내는 기너의 기숙사 생활은 그저 ‘갇힌 사람’으로만 보이면서도, 그나마 이곳이라도 올 수 있었던 기너의 삶 저편으로 그녀와 비슷했던 나이에 남의 집 하녀로 들어갔던 저자의 또 다른 소설 <도어>에 나온 에메렌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이미 모두 잃었기에 잃을 게 하나도 없었던 에메렌츠와 엄격한 기숙사 규칙에 따라 가진 소지품을 모두 내놓아야 했기에 핸드백에 들어있던 가족들의 사진과 빗, 집 열쇠, 잔돈 등의 지나간 삶을 기억나게 할 보물들이 많은, 그래서 빼앗길 게 많았던 기너. 두 소녀의 불행이 모두 가련하다.
더 좋아지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내 삶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간다는 것은 다를 바 없이 불행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어느 날, 학교의 경계를 두르고 있는 높은 돌담 벽 안쪽으로 한 소녀의 석상을 보게 된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친구들이 ‘아비가일’이라고 소개해 준 이 석상은 ‘아주 나쁜일’이 생기면 항상 자신들을 도와준다고 말한다. 학교의 규칙들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학급 친구들의 이런 유치한 이야기까지 들어주며 지내야 한다니 걱정만 쌓여간다.
그 동안 풍족하고 인정받는 삶 속에서만 지내왔기에 다소 편협한 면도 보이는 그녀의 학교생활이 도통 밝아 보이진 않다.
세상의 중심을 나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이 꼬마 아가씨도 피해 가지를 못 하니 말이다.
기너를 향해 눈에 보이는 아이들의 얄궂은 놀이가 시작된다.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가 있으니까 참아본다.
토요일 오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시간만 오면 맘껏 투정을 늘어놓을 수 있고, 해결책을 주실 테니까 지금 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조금만 참아보자. 조금만.
소식이 왔다.
아버지 전화가 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얼마나 기쁜가. 떨리는 가슴으로 전화를 받으러 가는 이 기쁨.
자신의 우울함을 전할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랏일로도 힘드시니 즐거운 소식만을 전달했으면 한다는 사감의 말씀에 그저 잘 지낸다고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
기너는 계획을 세운다.
지옥에서의 탈출.
기차를 타고 여기서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괜찮다.
어디든 군부대가 있으니 자기소개를 하고 장군인 아버지가 데려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이 지옥 같은 학교에서 자신이 얼마나 우울하게 지냈는지를 알면 절대 가만히 계실 아버지가 아니니까.
감옥처럼 폐쇄된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기너와 감옥처럼 폐쇄된 이곳을 ‘일부러’ 찾아내 그녀를 보낸 아버지.
그녀는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
부다페스트 집으로 갈 수 있을까?
기너는 이제 마음이 점점 힘들어지다 보니 그저 아이들의 유치한 이야기라 흘려들었던 어떤 존재를 떠올린다.
가장 힘들 때 도움을 준다는 석상, 아비가일.
아무도 없이 혼자인 것 같지만, 누군가가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부터는 어제보다 나은 삶이라 여겨지며 또 살게된다. 그래서 떠올렸나 보다.
그런데 도무지 풀리지 않는 엉킨 실타래 같았던 친구들과의 관계가 기대도 안 했던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풀리고 뜨거운 눈물로 서로 끌어안는 순간을 맞게 된다.
공습 방어 훈련을 위해 들어간 지하실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과 전선에 있는 자신의 아빠와 오빠를 떠올리며 제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그 마음속에서 아이들은 그동안에 철부지 같았던 자신들의 행동들을 떠올린 것이다.
더 늦게, 조금만 더 천천히 세상을 알아도 될 순수하고 아직은 실수가 많은 나이인 이 어린 소녀들조차도 폭격과 전쟁, 그리고 죽음 앞에는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만든 거다.
상황 자체가 참 슬프다.
무거운 이야기들만 담고 있진 않다.
이 ‘요새’안에서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하기에는 상상력이 마구마구 샘솟을 시기의 이 말괄량이 아이들은 얌전한 듯하면서도 얼마나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거릴 일이 많은지 모른다.
이 리뷰에 담지 않은 많은 이야기 속 일렁거리는 모든 감정선을 포함해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녀 기너, 그리고 사람들의 운명을 도와주는 존재 아비가일의 신비로움까지 애잔하면서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소설은 다음 장, 그다음 장 계속해서 넘겨 보게 하였고,
<도어>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전쟁의 아픔을 담고 있다.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껴가며 살 수 있었던 삶을 과거의 기억으로만 떠올려야만 하는 수많은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며, 잊지 않으려는 저자의 마음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