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샀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그럴싸한 이유가 부추긴 것은 아니고 그저 구매욕이 뿜뿜하여 오랜만에 여러 권을 한꺼번에 샀다. 10월에 구매한 책들 중에서 제일 먼저 펼친 것은 츠쯔젠의 <가장 짧은 낮>인데 두껍고 무겁고 튼튼하며 표지도 예쁘다. ‘내 문학의 강’이라는 제목의 저자의 말을 적어본다.
“점점 흐려지는 노안으로나마 어느 정도는 푸른 풀과 밤하늘의 별빛, 비와 이슬과 눈물, 꽃과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있다.”
기력이 청년 시절만 못하다고 고백하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시든 풀과 차가운 눈일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이제는 어딘가 생기를 잃고 마음을 시리게 하는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도 푸르른 풀이 시들기까지, 이슬이 맺히고 비가 내리다가 눈으로 변하기까지의 그 과정 속에서도 무언가를 발견해오며 살아왔을 것이다. 한순간도 흐름을 멈춘 적이 없었던 자신의 문학을 강으로 표현한 저자에게 흐르는 대로 주어진 대로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발견한 것들을 이 책에 담았을 것 같은 기대감을 조금 누르고, 횔덜린의 시선집 <생의 절반>을 조금 훑어보다가 눈길이 머무는 시를 발견했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신성(神性)의 상(像)이네.
하늘 아래 있는 듯, 대지의 사람들은 떠도네,
위를 보네. 그러나 마치 천문(天文)을
읽어내는 듯, 인간은 무한을, 풍족함을
모방하네. 한 겹의 하늘이
과연 풍족하던가? 은빛 구름들은
마치 꽃잎과도 같은데. 그러나 바로 저곳에서
이슬과 물기가 내려오는 것이네. 허나
저 푸름, 한 겹의 푸름이 꺼져버리고 나면 드러나는
흐린 것, 대리석을 닮은 것, 마치 청동처럼 빛나는,
풍족함의 징표.
단순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 단순함 속에 숨겨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내겐 필요하다. 특히,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놓치고 있던, 잊고 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독서가 참 좋은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이유로 독서를 하는 것 같은데 괜히 거창하게 얘기하고 있다. 점잖은 척 하려니 여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뒤에서 자꾸 누가 옷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세상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분들의 글을 읽으면 목적의식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고 마음이 가다듬어지기도 해서 편안해진다. 그런 이유로 박완서 작가님의 책도 곧잘 읽는다. 중고로 구매했는데 뒤에 붙은 스티커를 살살 떼어내서 책상이나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한 번씩 ‘톡톡’ 붙여서 버리고,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봤다.
공부를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기나긴 하루>, p. 28)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정성들여 손을 씻지만 대강 씻고 무심히 외출한 적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내 손톱 밑에 낀 것은 단연 때가 아니라 흙이므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17)
살만 루슈디의 책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시작으로 너무 재밌어서 여러 권을 후루룩 보는 바람에 조금 천천히 볼 생각이다. 물론, 한 치 앞을 내다보는 재주가 없어 장담이란 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찍먹을 하는 중에도 냅다 들이붓고 와구와구 먹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남지 않았으니 아껴봐야겠다.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2년 8개월 28일 밤>,p. 17)
매일 쏟아지는 환영과 계시로 가득 찬 이 꿈의 시는 아직 제 코앞밖에 못 보는 단조로운 사실에 짓뭉개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 본인은 경이로운 이야기, 특히 그를 벼락출세하게 해줄 수도 있고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한 이야기에 의해 자신의 문 밖으로 쫓겨났다. (<피렌체의 여마법사>, p. 23)
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 조너선 프랜즌의 <인생 수정>은 제법 두꺼워서 좀 더 나중에 읽어야지... 하면서 앞부분만 조금 훑어보는데, 책장이 계속 넘어가는 거다. 지금 읽고 있는 똑같이 두꺼운 <가장 짧은 낮> 다음으로 읽을 책으로 정해진 듯하다. 다만, 새털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알 수가 없긴 하다.
강요된 이송과 수송이 잇따르자 그나마 어렴풋이 유지되던 질서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 결과 손잡이 하나가 반쯤 떨어져 덜렁대는 채로 먼지 주름 장식을 켜켜이 단 노드스트롬 백화점 쇼핑백은 내쫓긴 난민의 비극적 정서를 자아냈다. 뒤죽박죽된 <주부생활>더미와, 이니드의 흑백 스냅사진과, 상추를 살짝 익히는 조리법을 담은 채 갈색으로 산화된 신문 쪼가리와, 이번 달 전화와 가스 요금 고지서와, 50센트 이하의 채무는 무시하라는 상세한 설명을 담은 임상검사 센터의 첫 번째 통지문과, 무료 크루즈 여행 때 화환을 목에 건 이니드와 앨프리드가 속을 파낸 코코넛에 담긴 음료를 홀짝이며 찍은 사진과, 자식들 중 두 아이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출생증명서 따위로 가득 찬 채. (<인생 수정>, p. 15)
그건 그렇고, 배송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겠지만 책 모서리가 눌려져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살짝 쓰리다. 만지작거린다 한들 소용도 없는데 괜히 자꾸 만져본다...(흐윽) 미련 둔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이번에 처음 만나보는 작가의 책인 옌롄커의 <물처럼 단단하게>와 커트 보니것의 <나라 없는 사람>과 <제5도살장>으로 시선을 얼른 돌려본다. 조금씩 읽어보는 동안 공통점을 발견했다. 넋 놓고 봤다가는 이 책들도 책장이 계속 넘어갈 것 같다는 거다.
빌리는 노망이 든 홀아비로 잠이 들었다가 결혼식 날 깨어났다. 1955년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니 1963년의 자신이 나왔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제5도살장>, p. 39)
나는 드레스덴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폭격 이전에 멀쩡했던 드레스덴을 보았고 폭격이 멈췄을 땐 방공호에서 빠져나와 폐허가 된 드레스덴을 보았다. 그로부터 생겨난 반응 중에는 분명 웃음이 있었다. 맹세컨대 웃음은 안도를 갈구하는 영혼의 산물이다. (<나라 없는 사람>, p. 13)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과 보라색을 띤 그녀의 입술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언제 첫번째 단추를 풀었는지 그녀의 두 손이 두번째 단추에서 떨리고 있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처럼 단단하게, p. 39)
존 말코비치 주연의 <미스터 블레이크>를 봤다. 영국의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블레이크가 아내가 죽은 뒤 은퇴하고 처음 그녀와 만났던 프랑스 저택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 저택의 주인 여성 역시 4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중단한 상태였다. 편안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특히, 이 저택에서 키우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만큼이나 주인공 역할의 말코비치가 발랄(?)하면서도 귀엽게 나온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찾은 저택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이전에 주변을 향해 온화하면서도 강력한 힘으로 희망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블레이크를 보면서 한 사람의 온기로 여러 사람이 활력을 찾고 다 같이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보는 내내 굉장히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횔덜린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꽃이 피었다가도 지듯이 구름이 끼고 비가 세차게 오다가도 또 그 비를 맞고 새싹이 푸른색을 띠며 돋아난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과 영화를 보고 나니, 사소한 일상 속에서 ‘희망’이 청동처럼 반짝이며 빛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단,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을 늘 망각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