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의 매력에 점점 더 빠지고 있다. 누군가의 스치는 감정이기보다 스포이드로 쏙 뽑아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놓여 있는 듯한 문장과 마주할 때의 쾌감도 좋고, 핀 조명으로 주목한 것 뒤로 드러내지 않아 가려진 것,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려보는 시간이 나에게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짧지만 잊지 못할, 그 찰나의 감정을 바로 흘려보내지 않고 조금 천천히 놓아주고 싶어진 내면의 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잘 흘려보내고 싶다. 좋은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어떤 식으로든 남겨두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옹글게 맺혀 있는 감정은 모난 모서리 부분을 잘 다듬어서 잘 흘려보내고 싶다.

뚱카롱을 좋아하고 뚱낭시에도 좋아하는 내가 뚱책마저 좋아하기에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로 눈길이 가 몇 권을 구매했다. 여섯 권 중 세 권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지만, 먼저 읽은 분들의 평과 작품의 분위기를 가지고 결정했고, 맨 처음에 실린 글과 표제작 위주로 조금씩 읽어보았다.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은 1865년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나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인도의 문화와 생활상 등을 관찰하여 글을 써오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아들을 잃고 난 뒤로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25편의 단편 중 맨 앞에 실린 「백 가지 슬픔의 문」을 펼치자, 백인과 인도인 혼혈인 한 남성과 인도의 뒷골목 비좁은 통행로와 담배 파이프 자루 상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편굴에 가득한 검은 연기와 아편 향에 취한 한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헛소린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독한 기운을 내뿜는 통에 나마저 대나무 파이프에 연기를 빨아올린 느낌이 들면서도,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맨정신으로 참담함을 목격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아편 거래로 수익을 올리며 배를 불리고 있는 영국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충분히 그려지다 보니, 검은 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눈알만 돌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의 모습이 이토록 허탈할 수가 없다. 아편에 중독되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똑같이 그 길을 걸어가는 남성은 내 시선에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기만 한데, 지난 기억들이 연기와 함께 전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평온함을 느끼고 위로를 얻고 만족해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괴상하다고 부를 만한 것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당신이 검은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으면 그 연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괴상하지 않다. (「백 가지 슬픔의 문」, p. 16)



<오랜 죽음의 운명 외 19편> 캐서린 앤 포터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미국 남부 태생인 캐서린 앤 포터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안타깝게도 그 불행이 남편과의 결혼 생활까지 이어졌다. 정신적·육체적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이혼 후 과거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칼리 러셀’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길러 준 조모의 이름을 따라 ‘캐서린 앤 포터’로 개명한다. 소개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니,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이 느껴졌다. 작가를 꿈꿔왔다고 한다. 이 꿈을 위한 노력이 그녀에게 버티는 힘을 주고, 살아 움직이게 하며 가슴 뛰게 했을 것 같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사는 한 여성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마주하게 된다. 응달진 길에 잠시 쉬었다 가면 좋으련만, 그쪽은 선인장이 무성하기에 괜히 가시 돋친 길을 걷다가 발에 박힌 선인장 가시를 뽑으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계속해서 조심조심 걸어 나간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남편과 한 여성의 다정한 모습이 마음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정작 그녀는 삶에 불만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어쩌지 못하게 만들었고, 언제쯤에야 이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싶어 발걸음을 계속 따라가 본다. 계속해서 걸어야 하고, 살아 나가야 하는 그녀를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촛불을 보듯 바라만 봐야 했다.

“기도는 혼자 조용히 하세요, 할머니. 아니면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해 주든가요.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걸 하느님께 직접 구할 테니까.” (「마리아 콘셉시온」, p. 23)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외 31편> 유도라 웰티

이 책의 서문을 위에 소개한 캐서린 앤 포터가 썼다. 그녀의 정성스러운 글 덕분에 유도라 웰티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올리비아 콜맨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웰티는,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 캐서린 앤 포터와 달리 미시시피 잭슨 출신의 풍족한 가정에서 별다른 걱정 없이 글쓰기에만 몰두하며 지냈다고 한다. 대학에서 따로 글쓰기를 공부한 적이 전혀 없고 자신이 방향과 목표를 잡고 도전하며 그 길을 닦아 나가다가 스물여섯 살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니 그런 그녀의 시선에 자주 들어온 것은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맨 처음에 실린 「릴리 도와 세 부인」은 지적 장애가 있는 ‘릴리’라는 한 여성을 향해 보이는 사람들의 손길이 과연 진실한 친절이자 배려이자 보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겉으로 보기엔 점잖아 보이는 여성들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며 릴리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은 오히려 그녀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만 같아 이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금 숨 막히고 불편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 불편한 감정이 틀에 박힌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삶에 미묘한 틈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웰티가 카메라 셔터를 내리는 순간 포착한 것처럼 그녀의 눈에 들어온 수많은 것 중 글로 담고 싶은 순간은 무엇일지 나머지 31편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릴리가 웃었다. 카슨 부인의 가슴 앞에서 손을 뻗어 창문 밖의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그저 거기에 혼자 서 있었다. 모자를 쓴 그는 외지인이었다. “저거 봐요.” 릴리가 대충 입을 가린 채 낮게 웃었다. “보지마라.” 지금까지 한 얘기를 다 통틀어 엄숙한 이 단어가 모자란 릴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게 하려는 듯이 카슨 부인이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엘리스빌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보지 말거라.” (「릴리 도와 세 부인」, p. 33)

조심성이 있지만 어떤 단단함이 느껴지는 웰티의 글을 따라가 보니 역시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왠지 얌전하고 차분할 것 같은 그녀가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표제작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는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문을 열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늘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다. 가족과 한 공간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 몹시 피곤하게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져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인데, “되바라진 년!”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여성과 가족 사이의 일상이 펼쳐진다.

“전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거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p.119)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공감을 자극했고, 무엇이 필요한지 충분히 알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평온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보수적인 미국 남부 지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이 소설에서 내가 흥미롭게 바라본 부분은 주인공 여성이 자신의 짐을 실은 수레를 이동시키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 검둥이 소녀(소설 속 표현 그대로)에게 삼촌이 5센트 동전을 ‘던져 준’ 장면이었다. 아홉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할 만큼 짐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웰티는 이 장면을 흑인 차별이 극심했던 그 당시의 보편적인 분위기 그대로 찰나의 순간처럼 담았다.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허먼 멜빌

읽어보고 싶은 책 중 하나가 <모비딕>인데, 이렇게 맛도리 단편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가문의 사업이 파산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학업도 중도에 포기해야 했던 허먼 멜빌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열세 살 때부터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고 한다. 힘겨운 시절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으며 보고 느낀 것들이 그의 작품에 깊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읽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일단 분량도 적고 제목부터가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를 펼쳤다. 빚에 쪼들리는 한 남성(입담이 상당히 좋음)이 등장한다. 입에 모터를 달았는지 험난하고 가혹한 세상을 향해 알아듣는 사람들이나 알아듣겠지 하는 심정처럼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낸다. 가진 게 없어 문제지, 마음만큼은 고상한 이 남성에게 세상이 도와주질 않아 비참할 따름인데… 아, 일단 재밌다. ㅋㅋㅋ (모비딕은 급행으로 장바구니로!) 이따금 부담을 낮춰주는 듯한 안녕! 흥!처럼 가벼운 표현으로 거리감을 좁혀주기까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쓴웃음을 주는 입담 뒤로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며 세월을 보내다가 삶의 불행에 초연해지는 인간의 마음에 가득 찬 음울함이 무겁게 내리누른다. 자본주의의 비극과 불행 속에서 그가 본 것,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드넓게 굽이치는 평원, 산들,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농가들, 큰 숲과 작은 숲, 시내, 바위, 초원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결국 이 거대한 대지에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자취들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대지는 인간에게 자취를 남긴다. (p. 71)

저 아래 평원에서 배고픈 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목숨을 빼앗길 운명에 처해 있는 하잘것없는 수탉 한 마리가 아무 뜻 없이 뉴올리언스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기리는 계관시인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나는 언덕 위에서 부루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p. 75)

썩은 가로장 울타리를 녹슨 못들로 오래 지탱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60년의 겨울과 여름에 걸쳐서 얼었다가 달궈지는 과정을 거듭해 온 막대기들에 무슨 수로 사라져 버린 나뭇진을 다시 주입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썩어 빠진 가로장 울타리를 썩어 빠진 가로장들로 수리하려는 한심한 시도이며, 많은 농부들이 그런 작업을 하다가 결국은 요양원에 들어가고 만다. (p. 85)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랭스턴 휴스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랭스턴 휴스의 소개 글을 통해 그는 흑인 고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접했던 흑인문학과는 또 다른 면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이들의 표현 수단이었던 연주가 내 감성을 자극했고, 그런 의미로 제목부터 끌리는 표제작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를 가장 먼저 펼쳤다. 예술가들을 후원해 주는 백인 ‘웰즈워스’ 여사와 그녀가 후원하는 흑인 소녀 ‘오시올라’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했지만 학교에서 독일 선생님께 피아노 레슨을 배웠기에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오시올라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교회에서 성가대 반주를 하며 돈을 모아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웰즈워스 여사는 오시올라의 뛰어난 실력을 소문으로 듣고 오로지 예술성에 대한 확신으로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예술에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가치관에 이 소녀를 끼워 맞추려고만 한다. 이 작품은 흑인의 고통과 저항을 드러내기보다는 오시올라가 자기만의 삶의 리듬을 따르는 모습에 마음을 무척 개운하게 해주었고, 그녀가 연주하는 흑인 블루스와 경쾌한 재즈는 당당함과 얽매임이 없으며 통제받지 않는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오르게 했다.

그녀가 블루스를 연주할 때 저음은 작은북들의 소리처럼, 고음은 작은 플루트들처럼 소리를 냈다. 땅속 깊은 곳과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의 두 음들의 경계 안에서 그녀의 음악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했다. 클럽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블루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면 브릭톱은 “헤이! 헤이!” 하고 추임새를 넣곤 했다. 오시올라는 크릴용 살롱에서 그녀의 음악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연미복을 빼입은 청중들 앞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할 때만큼이나 행복했다.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p. 102)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윌리엄 트레버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하는 윌리엄 트레버의 「욜의 추억」이 나를 방구석에서도 지중해의 고요함과 산들바람을 느끼게 해주더니, 갑자기 지저분한 남자가 나타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며 만끽하고 있는 여유를 침범하려 한다. 묻지도 않았거늘 자신의 이름은 ‘퀼런’이며 추방당한 아일랜드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영국으로 이주한 윌리엄 트레버가 이 남성의 심정을 잘 알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소외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이방인의 심정을 말이다. 고맙게도 ‘아그네스’라는 여성이 그의 눈에 담긴 불안함에 동정을 느끼며 인내심 있게 이야기를 들어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다. 기억 속에 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아픔을 말하는 입과 고통을 담은 눈빛에서 슬픔을 알아봐 주며 상처받은 손등에 손가락 끝을 조심히 갖다 대는 것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아그네스의 모습은 나 역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한다. 그저 설익은 마음으로 그치더라도 말이다. 퀼런이 불운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욜은 나에게도 멋진 해변 휴양지였지만, 지금은 마냥 그럴 수가 없다.

생전 처음보는 이 남자가 감상적인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바랐다. (「욜의 추억」, p. 13)


자로 잰 듯이 살 수 없는 내가 흘린 먼지를 주워 담을 순 없기에 나와 같은 사람의 모습에 공감해 보고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을 상상하며 또다시 대충 구겨서 안 보이는 구석으로 치우기도 해봤다. 이들의 삶은 누구나의 인생처럼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고 사랑도 다양했다. 빛바랜 할머니의 물건들, 주인은 떠나고 세월만 쌓여가는 장신구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울적해진 소녀의 마음처럼 불가사의한 사랑을 느껴보기도 하고,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중 세월만 흐를 뿐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젊을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마침표가 없기에 새로운 외면의 세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남자를 통해 체념할 수 없는 마음의 위험과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마음에 부질없음을 내내 읊조려 보기도 했다. 특히, 고되거나 포기하고 싶거나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 들 수밖에 없는 삶을 더 주목했는데, 대체로 동정심과 연민이 담긴 손길을 바라지 않았고, 우려의 시선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만큼 이 모든 것이 지나갈 일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듯했다. 이런 모습에 나는 권여선 작가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p. 80)

그리고 윌리엄 트레버는 등장인물 아그네스의 목소리를 빌려 “세상은 우리한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이 냉혹한 현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나는 왜 단 한 줄의 글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머무는 것일까? 분명 무언가 내 마음을 건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말로 옮기지 못해 닿지 못한 말들을 대신 적어 알려준다는 마음이 들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삶으로 방향을 틀도록 만든 것일까? 말하려 했던 수많은 시도에 귀를 기울여 그 감정을 하얀 종이 위에 짧은 호흡으로 써 내려가기까지 겪었을 글쓴이의 노력이 감동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대부분 공감이 가는 대상이나 와닿는 이야기를 만나면, 그다음 장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덮고 나면 또 다음에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한다. 기대한다는 것! 순수한 이 감정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나 홀로 떠진 눈을 끔벅거리며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떠올려지는 생각들을 따라가다가 나는 오늘 하루 몇 번의 기대를 하며 지냈는지 물어본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를 움직였던 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이제서야 단 한 권의 책만으로도 기대감으로 들뜨게 하는 이 순간의 값어치가 절대 작지 않음을 실감한다.

흐트러져 있던 마음을 움켜잡아 한 곳으로 모아보는 시간 그 자체를 즐겼다. 어쩌다 보니 습관적으로 늘 올곧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잊고 말이다. 몇 주에 걸쳐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읽다 보니 6권의 책에 대한 애정이 그새 많이 쌓였다. 인도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무거운 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리고 지중해의 산들바람을 타고 날리는 담배 연기와 잔에 담긴 독한 술의 향기까지, 아편 향에 취해, 술에 취해, 이야기에 취해 아주 어질어질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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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09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거 전집 있으요~~~ 아직 읽은 책은 없지만 언젠가는 읽으려고 항상 대기중인 전집..^^;;

곰돌이 2025-12-09 10:10   좋아요 0 | URL
저도 이따금 하나씩 쏙쏙 뽑아먹으려고 합니다. yamoo님의 리뷰를 읽어볼 날을 기다릴게요!! 언젠가는 볼 수 있겠죠 ㅋㅋㅋ

새파랑 2025-12-09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현대문학세계문학단편집 모으는데...
사긴 사는데 너무 방대해서 몇권 못읽었습니다 ㅋㅋ

곰돌이 2025-12-09 18:18   좋아요 1 | URL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뚱실함…ㅋㅋ 천천히 여유를 두고 읽어보자요!!
 
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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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지?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월급도 형편없는 외딴 시골 우체국에서 일하는 스물여덟 살의 ‘크리스티네’는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사소한 일에도 웃음의 물결이 퍼졌던 진정 자유롭던 시절의 행복이 이제는 새삼스러운 기억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어버렸다. 전쟁은 그랬다. 늘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습기 찬 다락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어머니를 아프게 만들었고, 행복을 느꼈던 게 언제였는지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도록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으로 만들었다. 암흑으로 변한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가난으로 허덕이는 현실 속에서는 사랑조차 설렘이 사라진 연민의 감정일 뿐, 거리낌 없이 욕망을 충족하는 다른 여성들의 모습에 거부감이 들 만큼 그녀는 이미 모든 것에서 지쳐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사는 이모의 초청으로 알프스의 최고급 휴양지로 휴가를 떠나게 된다. 마음 편하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열차는 출발 신호를 알렸다.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낮게 드리운 저녁, 피로에 지친 여자는 객차의 좌석 한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앉아있었다. (p. 57)

여자의 지난 삶을 알고 난 이후에 이 문장을 읽으니, 마음이 꽤 아려왔다. 차창 너머의 세상을 모호한 감정으로 들여다보다가 익숙하지 않은 평화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어느새 스르르 잠에 든 그녀의 지친 나날들이 멈추지 않는 기차 바퀴 소리와 함께 모두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만 싶다.

희고 깨끗하고 생경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고 날카로워서 여자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놀라운 광경을 좀더 가까이 보려고 손으로 유리창을 누르자, 창문이 왈칵 열렸다. 찬바람에 날려 객차 안으로 들어오는 눈과 함께 얼음처럼 차고 유리처럼 예리한 공기가 화들짝 놀라 벌어진 여자의 입을 통해 폐까지 들어왔다. 생애 가장 깊고도 깨끗한 호흡이었다. 거세게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려고 여자는 두 팔을 벌렸다. 가슴을 부풀리며 들이마신 시원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아, 정말 대단해!’ (p. 58)

‘클라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유럽을 벗어나 미국 땅에 정착한 ‘클레르’ 이모는 어머니와는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일찍이 부의 세계로 건너가 살 수 있었다. 그런 이모의 눈에 방금 막 도착한 크리스티네의 모습은 그저 며칠 동안 좋은 옷 한 벌 없이 지내는 오스트리아의 불쌍한 여자아이였다. 추한 블라우스를 집어 던지고 이모가 건네준 깃털처럼 가벼운 옷을 걸친 크리스티네에게 이모가 사는 세계는 달콤하고 꽃향기가 감도는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하루의 일과를 걱정으로 시작했던 자신이 근심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과 거리를 걷고 있다니….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현란한 색채를 드러냈던 풍경이 푸른빛이 감돌다 어두워지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던 크리스티네도 금세 모든 걸 잊어버렸다. 어색하던 자리와 무서웠던 사람들 사이에서 말도 많아지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이다.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신의 불안한 마음도 단숨에 무너진 것이다. 더 이상 모든 행동과 말에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른 채 낡은 여행 가방을 들고 알프스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던 크리스티네는 이제 최고급 호텔방에서 발코니를 열고 흥분에 들뜬 채 광활한 풍경을 바라본다. 넓은 방이 이제는 비좁게 느껴진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도에 휩싸여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린 여자는 난생처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영혼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단 한번의 체험만으로 무한히 커질 수 있고, 그 비좁은 공간에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p. 111)

자신의 존재 가치와 자신감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고 흥미를 느끼며 만끽해 보는 것, 모든 것이 재미있고, 친절을 베풀고픈 마음을 품게 만들고 감탄할 줄 알게 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처음으로 느껴보며, 어디를 둘러봐도 모든 게 낯설고 새롭고 신기한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순박함과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친절과 관심에 용기를 갖는 모습을 담은 1부는 읽는 동안 동화 속 소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리고 감정을 드러내며 표현하는 일에 서툰 고향 사람들과 달리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크리스티네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한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이란 변화가 어렵기도 하면서 동시에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대단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습관과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크리스티네도 새로운 변화에 금세 익숙해지는 걸 보니 말이다. 삶의 아름다움이 만족과 행복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이 순간에도 분명, ‘나’라는 존재보다는 ‘지금의 나’를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작가로 유명하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가슴속에서만 머물던 생각들을 알아채서 명료하게 설명하는 빈틈없는 예리한 시선이 얄미울 정도다. 지루할 새 없이 책장을 넘기게 해줄 만큼 재미가 있는 데다가 그의 사실주의적 디테일까지 더해지니 읽는 동안에도 크리스티네가 살아온 삶과 단 몇십 일 동안의 경험으로 그녀가 갖게 된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은 나의 기쁨과 흥분이기도 했고, 가슴을 훑는 듯한 고통에 내 속 마음 또한 심란해져 그녀와 함께 ‘나만 생각하자, 나만.’을 읊조려 보기도 했다. 츠바이크의 또 다른 소설인 <초조한 마음>에서도 불의의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소녀 ‘에디트’의 민감함과 그런 에디트를 향한 현역 장교 ‘호프밀러’의 연민 사이에서 오가는 복잡한 감정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오면서 읽는 내내 불안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던 그 감정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만큼 각 인물의 감정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도록 세밀하게 담아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츠바이크의 글솜씨에 감탄하며 읽는 게 아닐까?

한낱 과거로 흘러갈 짧은 추억이 진절머리 나는 오늘 하루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줌과 동시에 현재의 삶을 더 고통스럽게 하지만 버리지 못할 아까운 순간들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야 하는 크리스티네를 바라보며 우리도 같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쳇바퀴 도는 삶을 살면서 더 앞으로 달리고 싶고 더 높이 오르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깃털 같은 옷을 입고 마음마저 가벼워져 발걸음까지 빨라지다가도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라고 스스로 멈추는 모습에 어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몸과 마음이 맥박처럼 빨리 뛰는 젊음과 생기로 가득 차야 할 이십 대의 여성에게 말이다. 이제서야 육체적 고통에서 조금 벗어나 ‘깨어있음’을 느끼는 크리스티네에게 말이다. 이처럼 츠바이크는 연민의 감정을 잘 다루는 것 같다. 힘든 삶 속에서 우리가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아니면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었을 때 먼저 자신을 연민의 감정으로 들여다보고 돌봐야만 타인에게도 같은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다층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원치 않는 일을 겪으며 산다. 정신력으로 상황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태도가 스스로에게 원동력이기보다는 고문이 될 만큼 힘에 부치고 뜻대로 안 되는 상황에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억지로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고 되는 일이 아닐 때가 있다. 단순히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의 대상이 되어 꼼짝 못 하고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의 소박한 안녕을 원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가질 수 있길 욕망하는 것부터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괴로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또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두 사람은 아직 젊고, 우리가 버리려고 하는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어.” (p. 388)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내다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고 있는 연약하고 불안한 감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마음을 괴롭힌다. 앞으로도 창문을 열고 눈을 뜨면 같은 간판에 같은 사람들, 같은 절망과 같은 회의감을 느끼며 감옥 같기만 한 우체국 안에서 원을 그리는 시계처럼 사는 삶이 앞으로 얼마나 변화할지 아닐지, 그것은 모르겠다. 다만, 분명 바뀌지 않은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삶에 묵힌 공기를 환기시키는 날이 올지 또한 모른다.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츠바이크 전문가들은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결말을, 크리스티네를 향한 내 진심으로 채워보고 싶다.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우리 함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아보자. 살다 보면 어두운 거리가 차츰 희미하게 빛을 내며 그동안 보아온 것과 다른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너무 감상적인 태도인 걸까? 그렇다 해도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계속해서 살아내면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알 때까지 계속해서 살아보는 거다.

내가 가진 생각이 해답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와닿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가치관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려지는 것이 있다면,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한 삶을 사는 똑같이 위태로운 인간인 내가 ‘틀림없이’ 좋은 일과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듣고 읽으려는 마음가짐만은 잃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실은, 그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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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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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죽음이 여러 사람을 바쁘게 만들었다. 비어버린 퍼즐 블록의 한 자리를 얼른 새로운 블록으로 채워 완성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활력을 불어넣을 만한 일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이기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의 잔인함을 톨스토이는 냉철한 시선으로 담았다.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였다. 성공과 출세가 부와 명예를 안겨주고 주변에는 상류층 사람들만 존재했기에 그토록 원하는 품위를 지킬 수 있었으며, 평범한 시민의 시선으로 그의 삶은 분명 꽤 괜찮았다. 어느 날, 몸에 이상을 느껴 아내에게 등 떠밀려 찾게 된 병원에서 만난 의사에게 법정에서 짓고 있던 자신의 익숙한 표정과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뻔한 절차를 진행하며 뻔한 대답을 요구하는 근엄한 표정 말이다. 처음으로 타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에 이어,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안락한 삶을 살았던 그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된다.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일보다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이의 입장에 서서 들여다봤다. 죽음이라는 공포감이 만들어낸 암흑세계 안에서 꺼내줄 수 없는 무력함과 절망감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상처받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기를 다루듯이 대해야 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예민해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누구나 겪어봤거나 겪고 있거나 겪게 될 것이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을 위로하려 다가간다는 것은 사실 참 힘들다.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면 ‘나는 이렇게 아픈데 저 사람은 뭐가 이렇게 신이 났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주춤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대하면 환자 취급하는 게 서글프고 짜증스럽게 느껴질까 봐 또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가족은 그를 세심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 앞에서 그깟 오페라 망원경을 챙겼는지, 그리고 누가 그걸 어디로 치웠는지 따위의 논쟁이나 벌이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도 돈과 명예로 해결할 수 없는 병을 얻기 전까지는 자신의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삶의 끝자락 혹은 파멸의 경계에 와서야 사소한 것의 소중함,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것에 목숨이라도 건 사람처럼 시간을 허비했던 어리석음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만큼 자신의 존재는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부족함을 느끼긴 했어도 제법 만족스럽게 살아갔던, 적당히 흘러가는 삶 속에서 느낀 행복한 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그를 괴롭히며 생의 연장을 요구했다. 이런 이반 일리치의 심경을 들여다보는 동안 몸과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존엄을 잃는 그 순간에 내가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깊은 고뇌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별생각을 다 해봤지만, 도무지 어디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가 떠올랐다. 애석하게도 이런 과정을 통해 과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다. 이런 감정은 한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 같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버리게 된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접했다. 왜인지 그의 이름만으로도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는 신화 속 인물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과 내면 세계를 다루고 있었고, 현실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고 완성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들어서 입문작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서사 구조가 간단하지만, 날카로울 만큼 사실적이기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 계속해서 묵직한 뜨거움이 올라오면서 내 목을 괴롭혔고, 책을 핑계 삼아 눈물을 확 쏟아내고 싶을 만큼 비애를 느껴야만 했다.

이 소설은 죽음을 의식으로부터 밀어버리려고 했지만 결국 몇 분, 몇 시간 만이라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잠을 잘 수 있기를 바라는 단계까지 와버린 이반 일리치가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상황 속에서도 집요하게 자신의 삶에 몰입하는 동안 얻게 된 깨달음을 알려준다. 자신이 떠난 뒤의 세계를 상상하며 존재의 공허가 만들어낸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다가도 오늘은 그럭저럭 덜 아픈 몸 덕분에 마음까지 밝아져 희망을 얻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되뇌고 또 되뇌었던 수많은 생각들 사이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었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 어쩌면 아직, 아직 ‘그걸’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지?”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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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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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작가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한창 더운 7월의 어느 여름, 위화의 <인생>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와 따끈한 붕어빵을 먹으면서 배 속이 뜨듯해지는 것이 딱 이대로 자면 참 좋겠다 싶은 계절이 와버렸다. 나는 곰이라서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니 입이라도 즐겁게 맛있는 간식을 옆에 두고 <허삼관 매혈기>를 펼쳤다. 작가의 서문이 참 좋다. 독자를 향해 감사의 말을 담은 개정판의 서문인데, 책과 나의 거리를 가깝게 좁혀주는 말 한마디가 동면에 들어가지 못한 곰 한 마리의 마음을 스르르 움직이게 했다. 뒤로 이어진 서문에 또 콧구멍에서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게 만드는 작가의 말이 이어졌지만, 나도 나름대로 부끄러움이 있는 곰인지라 생략할 수밖에 없겠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을 때, 부엌에서 외할머니가 이것저것 만들고 계시길래 뭐든 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병에 걸려 사람들을 귀찮게 하던 내가 묻고 또 물었다. 찌개에 톡톡 넣는 하얀 가루의 정체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미원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궁금했다. 설탕 같기도 하고 소금 같기도 한 가루의 맛이 어떨지.

“할머니, 미원은 무슨 맛이야? 짜? 달아?”
“무슨 맛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음식에 조금씩 넣는 애야, 얘는.”
“아니, 그래도 어떤 맛이 있을 거 아니야. 응?”
“흐음... 순수한 맛?”

꼬맹이가 순수한 맛이 어떤 맛인지 당최 알 도리는 없고, 나중에 TV에서 조미료는 몸에 안 좋다며 음식에 넣지 말아야 한다는 둥 안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는 걸 주워들은 내가 어린 마음에 ‘우리 할머니는 나한테 몸에 안 좋은 걸 넣어서 음식을 만들어 주셨던 거구나….’라며 배은망덕한 오해를 하기도 했다. 먹을 땐 좋다고 뱃속으로 집어넣었던 할머니의 음식이 그릇으로 몇 그릇인지 새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녀석이 말이다. 이제는 할머니가 말한 순수한 맛이 어떤 뜻인지 알아들어도 열두 번은 더 알아들을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생생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직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허삼관 이야기를 좀 들여다봐야지 했는데, 책장을 넘기자마자 허삼관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고, 지나간 삶을 추억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잠시 누려봤다.


“저 장가나 가버릴래요.”

삼촌의 외밭에 가서 온종일 죽치고 있다가 수박 두 통을 해치우고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허삼관이 피를 팔러 가는 근룡이와 방씨를 우연히 만나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피 팔아 벌어온 돈 삼십오 원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장가나 가버리겠다고 한다. 힘을 들여 번 돈이 아니라 제 피를 팔아서 번 돈, 말 그대로 피 같은 돈이니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성안의 생사 공장에서 누에고치로 가득 찬 수레를 미는 작업을 하고 지내는 허삼관에게 예비 신부 후보가 둘씩이나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볼우물까지 있는 큰 눈을 가진 임분방이 1번! 뒤이어 간이식당에서 꽈배기를 튀기는 예쁘장하게 생긴 허옥란이 2번! 수박이나 먹을 줄 아는 사람인지 알았더니 패기가 넘쳐 황주 한 병과 담배 한 보루 들고 허옥란의 집에 찾아가 허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해 준다며 데릴사위를 자청한다. 결국 허옥란이 허삼관에게 시집을 가는데 이 소식을 알려주는 장면을 읽고 한 몇 초가 지났나? ㅋㅋ 분만대에 누워 있는 허옥란이 진통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난 속으로 ‘아, 벌써 임신해서 출산하는구나.’ 했는데 두 번째 출산이란다. ㅋㅋㅋ 이렇게 낳은 자식이 5년 동안 아들만 셋. 그들의 이름은 허일락, 허이락, 허삼락이다. 이름 짓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 이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랐고, 하루는 싸우고 들어온 삼락이를 위해 형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해 보겠다며 이락이가 식식거린다.

“이런 씨팔, 감히 내 동생을 얕보는 놈이 있다니. 가서 그 자식 손 좀 봐줘야겠는걸.” (p. 78)

뭐, 물론 내 맘처럼 세상이 잘 돌아가 준다면 좋으련만….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고 피를 뽑아 돈을 받아 결국에는 허옥란과 결혼까지 하게 된 허삼관이 십 년 만에 다시 병원을 찾아 피를 팔아야 할 지경에 처한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속만 터진다. 쪼잔하고 옹졸하기로는 어디 가서 안 빠질 허삼관은 허삼관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조용할 날이 없지만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아니,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라고 놀랄 만한 상황도 자다가 목이 말라 찬물을 들이키고 다시 드러눕는 것만큼이나 대단하지 않은 일처럼 받아들이고 산다. 허삼관이 때론 앞에서 화통 삶아먹는 소리를 하며 화를 더 긁고 말로 다 까먹기도 하지만,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기에 사람 마음을 참 와따가따 하게 만든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참혹한 상황에서 허삼관네 가족의 상황도 다르지 않으니,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멀건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배고프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자식들에게 움직이면 배가 고프니 조용히 누워 있으라고 다그치다가, 피골이 상접한 자식들의 모습이 짠했는지 허삼관은 상상의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말로 만들어내는 요리를 아이들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듣고 있다. 쓸데없이 요리 과정은 어찌나 생생한지 모른다.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이 아니고서야 웃으면 안 될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이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아야 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말 위화가 손가락 안에 드는 것 같다.

가혹한 운명과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위화는 버티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비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고통 안에서도 좌절 대신 나름의 즐거움을 찾길 바라는 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그의 또 다른 소설 <인생>과 시대적 배경이 비슷해서인지, 남루한 모습으로 자신과 닮은 소 한 마리 끌고 밭에 나가 쉬고 일하고 쉬고 일하는 것을 반복하던 노인 ‘푸구이’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구구절절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다 읽고 나면 투박스럽고 억척스러운 모습에 손사래를 치게 만들고, 뜻이 맞지 않는 일만 점점 늘어나는 내 집 식구들을 들여다보는 눈길에 애정이 한 스푼 더 들어가게 되고, 괜히 뭐라도 하나 챙겨주고 싶게 만들어주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네들, 먼저 이 소금을 좀 먹어봐. 소금을 먹어서 입 안에 짠맛이 돌면 그때부터는 어떤 물이든 다 마실 수 있거든.” (p.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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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12-04 0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큰일났네요. 앞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란 제목을 볼때마다 곰돌이님이 생각날것 같습니다. ‘어디에선가 나는 곰이로소이다‘ 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곰돌이 2025-12-04 06:48   좋아요 1 | URL
혹시 영화 <코카인 베어> 보셨나요?🐻 생각하고 싶지 않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ㅋㅋㅋ

rainbass 2025-12-04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제목부터가 대박인데용

젤소민아 2025-12-06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장면 어디쯤...불한당 같은 젊은이들과 나누는 허삼관의 대화가 압권이었어요. 피를 하도 빼서 몸이 식어가는 허삼관...자기 핏줄이 아닌 첫아들을 끌어안는, 작고도 큰 사람이죠. 저도 <인생> 읽었어요. 좀 심하죠....푸구이 노인만 남고 다 죽는....ㅠㅠ 두 작품 다 유머가 깃들어있으면서도, 우리삶의 끈적한 슬픔을 제대로 보여준 것 같았어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곰돌이 2025-12-06 13:35   좋아요 0 | URL
때론 속이 갑갑할 때가 있을 만큼 묵묵히 받아들이고만 사는 모습이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도 속이 터지기도 하고 시큰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좋고요!! 일단, 위화의 작품은 너무 재미있어요 ㅋㅋ
 
어부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3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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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첫 장편소설 <어부들>은 이번에 내가 처음 읽어보게 된 나이지리아 이보족 출신 작가의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이 이보족 가정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역사를 덧붙이자면, 식민 지배라는 역사를 빼놓을 수 없는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역시 대영 제국이 식민화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국경선을 마음대로 그어버려 같은 부족이 여러 나라로 갈리고 다른 부족이 한 나라에 섞여버렸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967년에 나이지리아의 종족 중 ‘이보족’들이 비아프라 공화국을 건국하고 분리 독립을 선언했는데, 영국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영국으로부터 지원받았던 이보족의 역사로 인해 독립 후 나이지리아에서는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아픔의 무게가 실린 시계추는 멈추지 않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만큼 잊을 수 없을것만 같았던 것들도 점차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히고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기억과 상처를 안은 채 사람들은 오늘의 평화를 바라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리라.

1996년 1월, 나이지리아 아쿠레 마을에 사는 중산층 이보족 가족의 하루도 분명 그러했다. 아버지가 자식 욕심이 많아 열다섯 살인 장남 이켄나와 보자, 오벰베, 벤저민(화자), 데이비드, 그리고 여동생 은켐까지 총 5남 1녀를 두었다. 너무 어려 어머니의 손길에서 떨어질 수 없는 데이비드와 은켐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 넷이 이 소설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데, 한참 밖에서 놀기를 좋아할 나이다 보니 우르르 몰려다니며 축구공을 뻥뻥 차서 남의 집 창문을 깨부수기도 하고, 한바탕 꿈에 부풀어 희망 찬 미래를 상상하면서도 지나간 일은 굳이 담아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개구쟁이들답게 방문 밖에서 들리는 부모님의 높아진 목소리에 귀가 쫑긋해져 동태를 살피며 자기들끼리 추리를 펼치는 등 천진난만한 일상을 보낸다.

역사적 원한과 갈등이 있는 이보족과 요루바족이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 가족이 사는 마을에서는 요루바족인 선생님이 이보족 학생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정도만 종종 나온다. 어찌 보면 주어진 환경과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제대로 경험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뛰쳐나와 집에 들어가기 전 막다른 골목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 이 아이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북부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다다르게 되고, 대부분 기독교인인 남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무슬림이 거주하는 곳임을 알 수밖에 없도록 깔개에 무릎을 깔고 앉아 허리를 숙여 기도를 하는 모습, 그리고 장터 전체가 구더기 떼처럼 모여든 사람들로 부글거리는 모습까지…. 이처럼 지역마다 인종, 언어, 문화, 종교, 경제적 차이 등을 실감하게 하는 문장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나이지리아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조만간 오랜 시간 내 책장에서 잠들어 계시는 같은 이보족 출신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도 살살 깨워 드려야겠다.

얌전히 집에서 독서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시겠지만 슬슬 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형제들이 친구 몇 명과 함께 ‘오미알라’ 강에 낚시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참고로 이 강이 어떤 곳이냐 하면, 이제는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경멸을 당하게 된 통행 금지령이 내려진 곳이다. 원래는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유럽에서 식민주의자들이 찾아와 성경을 소개했을 때부터 점차 아쿠레 마을 주민들에게 버려지게 되었다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보상도 없이 고생만 하고, 이곳저곳 다치면서도 부모님 몰래 하는 짓이 대체로 스릴 있고 재미있듯이 그저 물고기 잡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평범했던 일상이 지나가고 한순간에 상황이 바뀌어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에 다녔던 아버지가 북쪽 마을로 전근을 가게 되어 장터에서 신선식품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가 졸지에 혼자 아이들을 돌보게 된다. 더욱이 아버지가 계신 ‘욜라’라는 곳에 1996년 3월 유혈 분파주의 폭동이 터져 집에 자주 올 수 없게 되는데, 여기서 잠깐 부모님 소개를 간단히 해보자면, 이보족의 전통과 변화 앞에 균형 있게 가정을 유지하기보다는 서구 문화에 치우치는 아버지는 ‘서구적 교육’에 열성이면서도 이보족의 전통인 가부장 제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잘못할 경우 채찍질을 하는 아버지와 달리 미신적 행동을 하면서도 남편의 말에 의존하는 어머니의 힘 잃은 모습이 펼쳐진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들을 불완전한 사회 속에서 지키려는 부모의 표현이 현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분명 안정감을 느끼기 어렵게 보이고 우려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될 때가 있긴 하지만, 이들의 문화와 분위기를 인식하고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번개가 번쩍이며 우르르쾅 천둥소리 뒤에 금방이라도 무섭게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불안감에 집 밖을 소심하게 내다보듯 서서히 질서가 무너지고 균열을 보이는 상황은 아직 사회의 복합성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의 경직된 감정을 느끼게 했고, 각 등장인물의 상황 안에 예전 식민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을 잠식했을 때 겪었을 아픈 역사와 문화 충돌,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불안을 떠올리게 할 만한 문장까지 적절히 녹여 더욱 안타까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다.

“가고 말고는 너희 마음이지만, 그런 식으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지는 말거라. 알겠느냐?” (p. 34)

우리 모두 꺼리는 점이 있었다. 보자는 오미알라강이 작고 그 안에는 ‘쓸모없는’ 물고기밖에 없다는 점을 싫어했다. 오벰베에게는 물 밑, 강 속에는 빛이 없는 만큼 밤에 물고기들이 뭘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밤이면 강은 이불처럼 덮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물고기들이 대체 어떻게 ―전기도, 등불도 없는데―돌아다니는지 자주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방어와 올챙이의 나약함이 매우 싫었다. 강물에 담아두는데도 얼마나 쉽게 죽는지! 이런 약점에 나는 가끔 울고 싶었다. (p. 81)

어느 날 아이들은 강에서 모두가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아불루’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의 만남은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떠올려지기도 했다. 주인공 살림의 외할아버지가 카슈미르 골짜기의 지박령 같은 존재인 늙은 뱃사공 ‘타이’를 만났을 때처럼,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마치 꿈속에서 벌어진 일 같기도 한 상황이라든지, 기괴함이 느껴지는 아불루에 대한 묘사 등이 그러했다. 극히 일부분에 대한 비교일 뿐이지만, 살만 루슈디의 작품에서는 ‘아니, 어딜 맨입으로 단박에 알려고 들어?!’라는 듯 너스레 속에 잔혹한 인도의 역사적 진실을 녹여 기발함에 놀라면서도 익살스러움 뒤에 숨겨진 애환을 헤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적 교감을 오고 가게 했다면,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을 통해 대부분의 사물을 이해하며 자라온 동생이 어디서도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 없는 처음 겪는 기묘한 상황을 아직은 동심을 가진 아이의 시선으로 표현해 준 느낌이었다.

그 남자는 우리 눈앞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걸친 것이라고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느슨하게 걸려 있는 넝마 한 조각이 전부였다. 사타구니는 빽빽한 털로 덮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 혈관이 두드러진 성기가 허리띠처럼 흐늘거리며 늘어져 있었다. 그의 두 다리는 팽팽한 정맥들로 터질 듯 했다. 그는 귀청을 찢을 듯한 시끄러운 고함을 내지르며 망고를 아주 높이 내던졌다. 기세만 봐서는 망고가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 중심부에라도 떨어질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발밑이 쑥 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p. 135)

기괴함으로 오싹하게 만드는 아불루가 이켄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평범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그의 부름에 두려움에 찬 친구들은 하나둘 떠나고 형제들만 남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켄나를 부르는 아불루가 “너는 붉은 강에서 헤엄칠 것이나 다시는 그 강물에서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라며 영 사람을 찜찜하게 만드는 재수 없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침이나 ‘퉤’ 뱉어버리고 탁 털어내면 좋을 이 말 한마디를 예언처럼 받아들인 이켄나는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가웠던 모습을 잃어가고 형제 간의 사이도 점점 틀어지게 된다. 그런 이켄나를 놓쳐버린 연의 끈을 바라보듯 했을 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애 좋던 시절이 눈앞에서 필름처럼 지나가는 것을 허망하게 느끼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길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 싶어 내 콧등도 조금 시큰해져왔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인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라는 이미지가 심어준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 간의 갈등이나 정체성 혼란, 사회적 및 문화적 영향 등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1986년생이라 나이지리아 독립(1960년) 이후의 내전, 쿠데타 등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사회 문제에서 조금은 빗겨나갈 수 있지 않았겠는가. 물론,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던 1993년에 형들의 손에 이끌려 다녔던 겁먹은 동생의 불안과 공포를 다루고는 있다. 어쩌면 저자가 직접 눈으로 봤을지 모를 그때의 공포스러운 광경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심정을 그대로 담고 싶어서 이 소설의 화자를 형제 중에서 당시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벤자민으로 정한 걸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려운 나이지리아의 현재까지 이어지는 내전, 부정부패,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가속화시키는 남북전쟁 등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하고 빈부 격차가 나날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반 토막으로 썰린 세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지나간 역사를 알아챌 수 있도록 곳곳에 담았다. 비중이 크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위기를 맞닥뜨리게 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감정 변화를 담은 서사에 나이지리아 속담, 전통 등을 접목하여 그들의 문화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특히, 동물에 관해서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좋지 않은 징조로 느껴졌던 ‘거미’가 이보족에게는 슬픔의 동물이라는 것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슬퍼하는 사람들의 집에 둥지를 틀고, 점점 더 많은 그물을 소리 없이, 마음 아프게 짠다고 믿었다는…. 이 말에 왠지 앞으로 집에서 거미를 발견하게 되면, 예전과 달리 ‘이 녀석이 내 슬픔을 알고 찾아왔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덜 무섭고 덜 징그럽게 들여다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보면 나란 사람은 말 한마디에 참 현혹되기 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심리 변화가 오히려 인간이든 사물이든 동물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바라보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존재의 다면성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만 같은 십대의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들여다본 것은 연약함과 강함이 공존하는 인간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미래에 그려지는 불행 중 어느 것이 더 구체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드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에만 멈추도록 저자는 한정된 곳에 독자를 가두지 않는다. 그래서 꽤 생각할 게 많은 소설이었다. 이것은 치고지에 오비오마가 독자와 마주하게 한 단순한 아이의 시선이 던지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메시지가 오히려 깊은 사유를 끌어내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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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12-06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 문학은 ‘개인‘보다 ‘군집‘이 읽혀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그 소설도 그렇고요. 개인보다 종족, 부족의 운명을 푸는 경향이 짙은 듯해요. 그만큼 자연과 붙어 있어서이지 않을까요. 자연은 ‘무리‘가 더 어울리니까요...자세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