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동안 읽은 책 중에서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위주로 몇 권 구매를 했다. 물론, 처음 읽게 된 작가의 책도 있다. 앞서 읽고 평을 올려주신 분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도움받아 고를 수 있어서 반갑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품에 들였다. 무사히 도착한 책들을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상자 속에서 꺼내 한 권 한 권 만지작거리다가 빳빳한 종이에 지문이라도 남겨 정도 쌓고 분위기만이라도 느껴볼 겸 앞부분만 가볍게 읽어보았다.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헤르쉬트 07769>, <죔레가 사라지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부터!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가시덤불땅에 헝가로셀 패널 오두막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한 남성(직업은 교수)! 창문 밖에는 그의 딸이 지역 TV 방송국 취재진과 신문 기자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서 무언가 받아야 할 것을 받아낼 때까지 떠나지 않을 기세를 보이며 버티고 있다. 혼외로 얻은 딸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나지 않는데 19년이나 지난 뒤에 “이제 빚을 갚으시지.”라는 팻말까지 들고 와서 설쳐대고 있으니, 교수는 모든 것이 적절히 계산되고 의도된 계획 앞에 지금 무진장 심란하다. 아니, 그런데 교수의 대응 방식도 만만치 않다. 냅다 방아쇠를 당겨 사람들을 쫓아내는 게 아닌가! 아직 벵크하임 남작도 못 만났으니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전에 읽은 <사탄탱고>보다는 시작이 덜 무겁게 느껴진다.

자신이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므로 그는 모든 조각을 맞추려고 발작하듯 애썼으나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 아무것도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요,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p. 27)

라슬로의 신작 <헤르쉬트 07769>는 구매 전 책 소개를 읽자마자 개인적인 취향을 자극해 이건 재미가 없을 수가 없겠다 싶어 바로 구매했다. 종말 앞에 선 인간의 정당한 태도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이 내가 느낀 라슬로의 매력 중 하나인데,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음울하고 불안한 심리를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헝가리 유대계 중산층에서 자란 라슬로가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쉼 없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비극적인 언어라도 현실의 붕괴 그 안으로 진입하려는 시도 자체가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려는 의지로써 읽힌다. 긴말이 필요 없다. 상당히 재미있다! 누군가 생사와 직결된 중요한 문제를 담은 편지를 독일 연방공화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에게 보내려 한다. 보내는 이 주소를 적는 왼쪽 상단에 헤르쉬트 07769만 적은 이 수상한 편지의 목적은 확실하다. 문제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즉시 안보리를 소집할 것! 편지를 보내려는 이의 정체는 독일 튀링겐 동부 전역에 이름난 담벼락 청소 사업을 하는 독일인 보스 밑에서 일하는 ‘플로리안’이다. 일단, 그의 보스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간략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네오나치 성향인 인물로 플로리안에게 서독의 국가를 부르라고 명령하며, 목소리가 맥이 없으면 너는 유대인이나 뭐 그런 거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독일인은 음악에 분명하고, 멋진 귀를 가지고 있다나 뭐라나…. 암튼, 독일에 ㄷ만 나와도 칭송부터 나오는 사람이다. 그 와중에 눈치는 또 얼마나 빤한지 자기 혼자만 재미있는 농담에 지루함을 느끼는 플로리안을 절대 그냥 못 넘어간다.

다아아앙연히 이 모든 것이 지루하지, 딱 봐도 그래! 보스는 엔진 넘어 고함을 질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플로리안은 목을 한 대, 보스가 농담으로 부르듯이, 찰싹 맞았다, 말 그대로, 난데없이, 한 대 찰싹, 그리고 그걸로 끝, 플로리안이 오랫동안 당연시하던 손찌검으로 막을 내렸다, 보스는 대화에 오른 이런저런 주제는 한 대 때리는 일로 마무리했고,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자신의 운명이 이런 것이려니, 털어버렸다, 보스가 자신의 운명이고 그것은 바꿀 수 없기에, (p. 25)

보스의 위압적인 태도에 입도 벙긋하지 않고 기분 나쁜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다소 순종적인 플로리안은 시민대학 강좌를 진행하는 ‘쾰러’ 선생님에게 물리학 수업을 듣고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선생님이 전하려는 말을 뒤늦게 파악하고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여 지금 보스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다. 세계가 붕괴할 것이라는 우주론적 예측에 사로잡혀 있는 플로리안과 그를 진정시키는 쾰러의 대화는 이 소설의 맨 처음 장면인 생사와 직결된 문제를 담은 편지를 플로리안이 왜 써야만 했고, 왜 독일 총리, 그것도 자연과학자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보내야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해 준다.

하늘을 봐, 저 구름을 봐, 이렇게 들어오는 햇살을 봐, 이것들은 다 만져지는 실제적인 것들이야, 너는 이 모든 진공 문제니 뭐니에 너무 깊이 정신을 팔 필요가 없어, 결국 네가 아예 완전히 잠겨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특히 너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양자물리학의 무력한 실패가 아니라 제한적인 인간 정신의 파탄인 탓이야,

나는 하늘을 올려다봐도, 쾰러 선생님, 더 이상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요, 왜냐면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 우주가 얼마나 무방비한지 느껴져서 공포에 사로잡혀요, (p. 35)

물리학 지식이라고는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책 정도에 불과한 데다가 직업학교를 졸업한 뒤 받은 중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있는 플로리안은 이런저런 계기로 쾰러가 멘토가 되어 매주 대화를 이어가며 지내왔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부족하지만, 물리학적 종말론에 대한 플로리안의 고뇌는 굉장히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휴, 그건 그렇고 편지를 다시 써야 할 지경이다!! 감히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젠장”이라고 적어버린 게 아닌가. 흠...



<순수 박물관> 오르한 파묵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눈>을 읽고 그의 책을 좀 더 검색해 보았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내 이름은 빨강> 외에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순수 박물관>이었다. 곧 약혼하고 결혼할 참인 이스탄불 상류층의 서른 살 케말과 그의 먼 친척이자 가난한 열여덟 살 퓌순의 사랑. 서로를 강하게 그리고 격정적으로 끌어안으며 희열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퓌순이 내지른 고함과 케말의 행복한 외마디 신음 외에, 극도의 정적에 휩싸인 방 안의 침대 위 두 남녀는 벌거벗은 채 서로를 껴안고 누워 있다.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흥분과 더없는 기쁨의 감정이 케말에게는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주고받았던 일과 오랜 세월 동안 후회할 말들과 행동일지 몰라도 내 눈엔 불순한 과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시간이 흘러 기억해 내고 꺼내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혹시라도 마음 한구석에 있던 외로움을 들먹거리며 회유하는 어조로 다가오거나 현학적인 말로 교묘히 속아 넘어가게 한다면 비난을 마구 퍼부어주겠다고 다짐하며 읽어 내려갔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비밀과 불안,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 잘 차려입은 손님들 가운데 몇 명에게 이상한 불안과 정신적 상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 속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한두 잔을 마시면, 우리가 고민했던 것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저 순간적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p. 62)

무한하고, 어린아이 같은 섹스의 희열 이외에, 나를 그녀에게 매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어떻게 그녀와 그렇게 진심 어린 형태로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까? 사랑을 낳은 것은 섹스의 희열과 계속해서 반복되는 그 욕구였을까, 아니면 이 욕구를 낳게 하고 키웠던 다른 것들이었을까? 퓌순과 매일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그 행복한 나날에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저 사탕 가게에 들어간 행복한 아이처럼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게걸스럽게 사탕을 먹곤 했다. (p. 93)

모든 것을 잊고 사랑을 나누었던 그 순간, 창문으로 불어오는 봄바람과 지저귀는 새 소리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물건 하나하나를 추억처럼 떠올리는 케말의 모습을 보자니, 공간과 사물에 대한 기억을 예민하게 끄집어내는 사람인 것 같다. 이것이 퓌순을 그리워해서인지, 퓌순과 사랑을 나눴던 그 때의 나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그 어느 것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가 불안정하게 공존했던 사회적 분위기와 여전히 폭력과 차별에 시달리는 튀르키예 여성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는 이 소설을, 누군가의 인생이 옳았는가 아닌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시선으로 보려 한다. (아직 이 소설의 끝을 보지도 못했고...) 니샨타쉬의 세속적인 부르주아로 지내면서 그에 걸맞은 여성과의 결혼을 앞둔 케말은 퓌순을 잊겠다며 마음먹지만, 그게 그리 쉽지는 않고 이슬람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구화된 자유로움이 드러나는 퓌순은 현실적인 욕망이나 삶에 대한 주체적인 계산 또한 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 퓌순을 계속 옆에 둘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케말의 모습에서 가난한 이슬람권 여성을 바라보는 평면적인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케말은 배덕감에서 쾌감을 느끼는 인간 이었단 말인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퓌순과의 만남에 죄책감과 두려움을 바꿔주는 무언가를 찾으며 지내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삶의 한순간, 꿈의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의 일부라고 느끼게 해 준 그날을 좀 더 따라가 본다.



<모비 딕> 허먼 멜빌

모비 딕은 평소에 읽어보고 싶었으나, 선뜻 고르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허먼 멜빌의 단편을 읽고 난 뒤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구매했다. 분량으로만 치면 바라만 봐도 심사가 고달파지지만, 허먼 멜빌의 글을 안 읽어봤으면 모를까 절대 외면할 수가 없었달까.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불구덩이 같은 가슴 속 열기를 좀 식히고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릴 겸 배를 타고 나가 두루 둘러볼 생각인 남자, 이슈메일. 내가 멜빌의 글에 이끌려 모비 딕까지 덥석 들었듯, 이슈메일도 나침반 바늘의 자력에 이끌리듯 모여들게 만드는 바다에 승객으로서가 아닌 (뭐, 주머니 사정이 좋지도 않고...) 선원으로 나갈 생각이다. 시련이나 고생 따위는 딱 질색이라고 말하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처럼 나름 현실에 자신을 맞춰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자존심이 박박 긁히는 상황 속에서도 뭐, 별 수 있나. 고달파해야 나만 손해이니 괴로움 따위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바닷물 못지않게 적잖은 짠내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쿨내를 동시에 풍기는 이 남자.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봤자 먹고 싸고 자고 남다를 게 없는 인간 세계에서 벌어진 비극에 신물이라도 난 걸까. 어찌 됐든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고래잡이 항해에 뛰어들었다. 경이의 세계로 통하는 거대한 수문이 열리고, 나 역시 마치 놀이기구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곧 입장하기 직전에 두근거림처럼 바다에서의 모험에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아, 그런데 출항은커녕 배에 타기까지도 영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아직 여행 가방도 안 싸놓은 이슈메일이 멜빌과 닮아 말이 여간 많은 게 아니라서 포경업의 비상지이기도 하고,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사체가 해안에 떠밀려 온 곳이라는 낸터컷 섬 얘기도 해야 하고, 지갑이 두둑하지 못하니 날씨도 더 춥게 느껴져 불안한 마음에 주머니도 괜히 일없이 뒤져봐야 하고 그 외 뭐뭐뭐뭐 다 들려줘야 하니 말이다. (헥헥) 입담이 워낙에 좋아 나름 술술 읽히게 해주니 요 맛에 보는 재미도 있다. 별 의도를 갖고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 듯하면서도 내뱉는 말 속에 철학을 품고 있는 멜빌의 글은 역시나 굿이다!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사실적이고, 강렬하며, 날카롭게 적힌 문장이 18세기의 런던과 파리 두 도시의 상대적인 모습을 단숨에 눈앞에서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도록 한다. 단 몇 장만 읽어도!

깊이 생각해볼 놀라운 사실 하나,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심오한 비밀이자 수수께끼라는 것. 밤에 대도시에 들어설 때면 숙연하게 떠오르는 생각 하나, 저기 시커멓게 옹기종기 서 있는 모든 집들이 나름대로 비밀을 품고 있으리란 것, 저 모든 집의 모든 방도 나름대로 비밀을 품고 있으리란 것, 저곳의 수십만 가슴 속에 뛰고 있는 심장들도 저마다의 생각 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심장에게조차 비밀스러운 존재란 것! 무엇인가 경외로운 것, 심지어 죽음 자체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p. 28)



<흥분이란 무엇인가> 장웨이

기회가 닿으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폴스타프님의 리뷰를 읽고, 주저 없이 모셔 왔다. 옌롄커와 위화 과가 아니라 츠쯔젠에 가깝다는 말씀에 어떤 느낌일지 짐작은 조금 가지만, 뭐든 읽어봐야 알 수 있으니 가장 먼저 실린 「대추나무 지킴이」와 표제작 「흥분이란 무엇인가」부터 읽어봤다. 그런데, 책 제목이 좀... ㅋㅋ 한 장, 두 장 책장은 넘어가고 이내 미소가 지어진다.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지만, 작년 12월 내란 우두머리 피고인석에 앉은 전직 대통령이 ‘통닭 계엄론’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찼던 기억, 그리고 예능에 나와서 맥주는 통닭이랑 먹어야 탈이 안 난다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한 것까지 떠올라 사람 참 한결같다며 헛웃음 짓다가, 모진 삶 속에서도 균형을 알고 조화를 이루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야말로 정말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으니, 마음까지 산뜻해지는 것 같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장웨이 탓이다!) 시대적 혼란을 잊게 할 만큼 때 묻지 않은 순박함이 느껴지는 시골 소년 네 명이 나누는 대화에는 실컷 소리 내 따라 읽다가도 마음 한편이 쓰라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인민공사 사원 모임이 시작되었을 때 다전쯔를 비롯해 그녀와 같이 어울려 다니는 처녀 몇 명은 어둑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한참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누군가의 제지를 받고서야 겨우 잠잠해졌으나 그것도 잠시, 얼마 안 돼 또 히히 하하 웃음이 터진다. 스웨터 뜨개질을 하며 웃고, 가장자리 레이스 처리를 하면서 웃고, 땅바닥 풀주기를 비틀며 웃고... 손을 가만히 두지 않는 건 물론, 입도 쉬지 않는 그녀들이었다. ( 「대추나무 지킴이」, p. 7)

“이게 인삼하고 거의 비슷한 보약이여. 많이 먹어도 안 되고. 울 아부지 말이, 젊은이가 많이 먹으면 코피 난단다.”
“어메— 진짜, 향기 좋네!” 징둥이 더덕을 씹으며 말하자 장유취한도 말했다.
“모름지기 ‘삼(蔘)’자가 들어가는 건 다 천연 보양식이지. 해삼, 인삼, 현삼⋯⋯ 또 ‘당(黨)삼.’ 공산당원이라야 먹을 수 있는 삼.” (「흥분이란 무엇인가」, p. 184)



<후리> 카멜 다우드

알제리 내전 동안 일어난 참혹한 비극을 담았다는 것에서 고민 없이 바로 구매한 책이다. 기억을 금지하는 곳의 이야기를 드러내며 기억을 되살리려는 작가 카멜 다우드의 메시지가 담긴 2018년의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티 없이 맑고 파란 하늘에 휘날리는 하얀 천을 담은 표지가 온몸을 바람에 맡긴 듯 자유롭게 다가오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스치는 바람에도 쓰라린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추위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온몸이 멍에 들어버린 것처럼 아파진다.

내가 네게 말은 하고 있지만, 네가 듣는 내 목소리는 소리가 아냐. 종잇장을 넘길 때 나는 소리, 겨우 그 정도겠지. 게다가 바다를, 개들을, 한 척의 배를, 야자수들을, 아니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내 얼굴을 정의 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니. 정의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잖아. 다 안심하기 위해 필요한 거지. (p. 15)



비탄 없는 완전한 삶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이 때로는 새로운 하루가 저 멀리 내려오는 것처럼, 또 때로는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에 휩싸이듯 했다. 어디에서도 토로할 수 없는 내면의 고뇌를 가진 인물의 삶 속에 내 삶을 비추는 지점들이 분명 있었다. 어떤 경계에 서서, 그 경계선 너머 무언가를 혼자 그려보는 동안 느꼈던 고독은 상황과 환경이 달라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라 생각한다. 내가 별다른 재주는 없지만 나한테 잘 맞는 재미있는 책 고르는 재주만큼은 있는지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느끼면서 꽤 만족스럽게 있었다. 읽었다? 아니다! 읽었다고 말하기도 뭐할 만큼의 분량만 읽어서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긴, 그럼 뭐 어떤가. 즐겼으면 그만이다. 일상의 고단함에 보상처럼 다급함 없이 안으로 향하는 감각에 평화로움을 느껴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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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7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도시 이야기를 다시 읽으려고 주문했어요. 감사합니다.

곰돌이 2026-01-17 21:2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저도 호시우행님 따라서 잘 읽어 보겠습니다!!

rainbass 2026-01-19 0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들의 앞부분만 읽으신것 맞아용?? 😮😮😮

곰돌이 2026-01-19 06:36   좋아요 1 | URL
넵! 어쩌다 보니 말은 길어졌지만...(풉) rainbass님 덕분에 <두 도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책마저 아주 예뻐서 더 마음에 듭니다.

그레이스 2026-01-19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도시 이야기 지난달 재독했어요.
모비딕도 반갑네요.
헤르쉬트..도요 반갑네요.
막 기대됩니다.
설산의 사랑도 샀어요.
저항의 멜랑콜리 먼저 읽어야해서 조금 지체 될듯합니다 ^^
저렇게 세워놓으니 아름답습니다. ^^

곰돌이 2026-01-19 21:42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저는 안 읽어본 책이 워낙 많아서 홍수가 났습니다. 철철철... 대신에 야금야금 읽어볼 거리가 많아서 좋다고 해야겠지요? 큭! 헤르쉬트 몇 장 읽어봤는데 꽤 재미있었어요.
 
백년보다 긴 하루 열린책들 세계문학 44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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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박완서 작가님의 <기나긴 하루>를 읽으면서 얼마나 삶의 무게와 고민이 깊은 하루이길래 제목마저 기나긴 하루가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번에는 백 년보다 더 긴 하루란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소설은 카자흐스탄의 초원에 있는 간이역에서 성실한 노동자인 ‘예지게이’가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까잔갑’의 장례를 위해 끝없이 펼쳐진 사막 위에 장례 행렬을 인도하며, 지난 삶을 회상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이 사는 광대하고 척박한 사막, 사로제끄 마을은 세계대전의 참상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 종착역처럼 머무는 곳이자, 오래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고 여겨질 만큼 고립되어 있으며,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꼭 있어야 할 나무 한 그루, 개울 한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고작 네다섯 집만 남은 곳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그리고 공상 과학적 성격을 띤 외계 문명과의 접촉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전통 방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낙타 등에 올라 장지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다른 한 곳에서 벌어지는 외계 행성 자원 탐사 프로젝트, 참 묘하다. 이게 조화가 맞는 거냐는 의구심을 갖게 되지만 읽다 보면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주고받은 말 한마디에도 좋은 감정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데, 까잔갑과 예지게이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두 사람이 함께 간이역에서 일하게 된 것은 예지게이의 딱한 사정을 알아보고 긴말도 없이 손길을 건넨 까잔갑 덕분이었다. 이제는 삶의 비극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잔갑의 충고가 그 어느 것보다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는 예지게이는 어느 날, 전쟁 포로였던 아부딸리쁘와 그의 가족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까잔갑이 건넨 손길처럼 예지게이도 이들에게 손길을 건넨 것이다. 맘처럼 살아지는 삶이 아니다 보니 아부딸리쁘 가족에게 시련이라도 닥치면 예지게이는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면서 괜히 자기 때문에 외부와 동떨어진 간이역에서 불행을 겪는 것은 아닌지 속은 속대로 상하고 애만 태운다. 뜻 없이 건넨 도움에도 괜한 의구심부터 갖는 그야말로 진심이 가치를 잃었다고 말하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괴리감이 살짝 느껴졌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따뜻한 손길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아는데도 때론 예지게이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처럼 보였다. 자기 집이라도 번듯하고 여유가 있는 데다가 속 썩을 일이 없어서 남의 일에 자기 일처럼 괴로워하고 속을 끓여대는 것도 아니고, 거참! 게다가 까잔갑에게 선물로 받아 기르게 된 낙타 ‘까라나르’가 겨울만 되면 발정 난 야수가 되어 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날뛰어 초원 끝으로 사라지고 암낙타에 올라타 버리기나 하는 판국이니 말이다. 언제쯤 한시름 놓는 날이 오려나 기다려지는 건 이 집 식구뿐만 아니라 다 마찬가지니 한숨이 나온다만, 내 눈에 보이는 고통과 불편도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로제끄 마을 사람들이다. 지친 낙타들이 서로 길게 뻗어 머리를 낮춘 채 서로에게 몸을 바짝 붙이고 누워 쉬듯이, 다 함께 서로의 존재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삶의 시작과 끝,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마음이 평온해지기 위해 예지게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체념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런 모습이 강인함으로 다가오면서도, 실없는 낙관으로 보이기도 해 고단함에 울음을 삼킨 웃음처럼 체념과 바람이 뒤섞인 씁쓸함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제는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어렵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그들을 비웃었다. “어리석은 양반들 같으니라고, 당신네들은 당신의 삶을 망친 겁니다. 그런데 뭘 위해서였죠?” 하지만 분명히 어떤 목적은 있었다. (p. 137)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이라 봤자 전쟁이 끝난 뒤에 형편이 조금씩 나아져 가고 있는 것 말고는 그저 서로 건강하고 너무 덥지 않으며 또 너무 춥지 않은 계절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특별하다고 붙일 게 거의 없다. 제 식구끼리 투닥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아니, 그럴 시간이 어딨나! 짐승들을 신경 써서 돌봐야 하고 난롯불 시중도 들어야 하며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지쳐 일찍 자는 것이 상책이니 말이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평생을 두고 기억할 만한 것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현기증을 느낄 만큼 숨 막힐 듯한 더위에 죽을 둥 살 둥 기를 쓰고 일을 하던 기억부터, 타는 듯이 가물던 날에 보상처럼 내려지던 빗줄기에 너도나도 아이들과 모두 하나가 되어 줄기차게 쏟아지는 폭우 아래를 냅다 달리고 소리 지르며 가슴이 뿌듯해진 채, 서로의 눈빛이 오갈 때마다 그저 기쁘고 고마워했던 값진 기억처럼 말이다.

삶 속에서 느끼는 무의미함과 허무를 극복해 나가는 대안으로 연대와 다정함을 내세운 이야기가 조금은 진부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고, 방대한 이야기에서 지루함도 살짝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매력을 잃지 않는 뒷심이 있는 소설이라고 느껴졌다. 요즘 시대 에겐남은 명함도 못 내밀 저자의 섬세함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고 잔잔한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숨을 수놓는 듯한 이 섬세함은 애가 타게 만드는 거듭되는 고난을 들여다보는 독자의 마음을 한없이 지치게 두는 것조차 마음에 쓰이는지, 깜깜한 어둠을 지나 멀리서 동이 트는 경이로운 모습에 어제와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힘, 포기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었던 생각을 고쳐먹게 해주는 힘마저 불어넣어 준다. 그러나 때론, 마음에서 우러난 타인의 고마운 말 한마디조차 아무런 힘이 되지 않을 만큼 깨진 창문 같은 심정일 때가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마음까지 읽어내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이라도 잊지 말라는 듯 소리 없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위로가 되어주는 인물이 등장하는 점에서, 저자의 연륜이 느껴지고 넉넉한 배려와 두루두루 살피는 섬세함을 느꼈다. 그리고 영화 속 씬스틸러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옛 전설은 독자 스스로 천천히 ‘삶의 가치’를 사유할 시간을 갖는 필요성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이 소설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제때 내려놓지 못하고 버려야 할 때를 놓친 고통에 빠진 예지게이의 모습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내려놓는 것을 ‘잃다’와 ‘버리다’ 그 자체만을 의식해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던 나의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제 주인에게서 벗어나려 엄청난 힘으로 날뛰는 낙타 까라나르가 쏟아지는 채찍질에도 멈추지 않고 눈길을 달리는 통에 개처럼 끌려가는 예지게이가 쥐고 있는 고삐 끈을 풀기 전까지는 방법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얼굴이며 배가 눈에 쓸려 얼얼한데도 놓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고삐를 놓는 예지게이의 모습에 무기력감과 공허감에 빠지게 하는 이 장면을 저자는 어떤 마음으로 써 내려갔을까.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을까. 누구나 아픔을 덜어줄 길이 보이지 않고 살아갈 도리가 없다고 여겨지는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리게 되지만, 지구는 계속 돌고 기차는 운행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타락한 세상에서 움켜잡고 앞만 보며 달려가지 말고, 뒤도 한번 돌아보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극복이 어려운 나약한 자신을 참을성 있고 끈기 있게 묵묵히 곁을 지켜준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한번 들여다보라고 말이다.

사방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이 외롭고 삭막해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끝도 없이 펼쳐진 이 사막이 모든 잡념을 다 털어내도 다 받아줄 것 같은 위안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삶의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자극들이 모두 사라진 곳에서 잠시 생각을 비워내고 머리를 식혀보는 순간을 가지며 내 삶을 위에서 조망하듯 들여다보는 것이다. 넘을 수 없는 장애물에 가로놓여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나날들, 건너가지 말아야 할 강을 기어코 건너버려 속을 끓이고, 해결책이라고는 내 마음의 단념이면 되는 것을 그게 그 무엇보다도 어려워 혼란스럽고 괴롭기만 했던 나날들을 떠올려본다. 그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더한 시련이 닥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온정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밤이 지나 동이 트는 것처럼 내 마음이 환하게 떠오르기도 하는 알 수 없는 삶에 온몸이 후끈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행복감이 밀려오는 모든 순간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자연이란 그런 곳이다. 어느 것에서도 찾지 못한 해답을 말없이 안겨주고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을 맡겨도 언제라도 두 팔 활짝 벌려 안아주는 곳. 예지게이가 어릴 적 파도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던 그 순간과 마주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나 역시 미처 다 맡기지 못한 마음속 잔재를 어디선가 생각지도 못한 바람이 불어와 가져가 버린 그 순간을 떠올려 볼 수 있어 마음이 참 편안했다.

옛날 노래와 옛날이야기, 그리고 옛 기억. 감동을 주고 생각을 채워주는 자신에게 더 친근한 것들을 떠올리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에 익숙한 대로 불편함도 제각각, 좋은 것도 제각각, 생각도 제각각인 채로 공존하며 살아간다. 앞으로의 삶과 미래보다는 지나간 옛것들을 더 많이 떠올리며 삶의 경험이 준 것을 이야기하는 부모님과 이에 반해 새로운 것,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더 이야기하는 나와의 관계가 점점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다른 방향으로만 길을 잘못 들어 휩쓸려버린 것처럼 되어버린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에게 가치 있는 삶을 물려주고 싶은 부모의 인생살이를 들여다보는 동안 내 부모 또한 길을 잃고, 앞일조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막막한 길을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이 망아지 같은 녀석을 어떻게 키우셨나 싶어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떤 기쁨으로 나를 안아 올렸는지 기억도 못 하는 내가 어느새 훌쩍 자라 마음을 굳게 닫은 채 부모님이 애가 타는 마음으로 나를 향해 문을 두드리도록 하였는가를 후회하면서 말이다.

옛날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는지. 노래란 그 하나하나가 온전한 한 페이지의 역삽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들을 상상하고 그들을 보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르죠. 그들처럼 고통을 받고 사랑도 하고…. 그게 바로 그들이 자기네들 스스로를 위해 남긴 일종의 기념비인 겁니다. (p.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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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19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대와 다정함 모두 이 시대의 언어 아닐까요? 시대를 초월한 해결책일듯 합니다.^^

곰돌이 2026-01-19 22:41   좋아요 1 | URL
더워도 너무 더운 사막 한가운데서 어쩌다 내린 비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같이 뛰어다니며 그 순간을 즐기는 장면이 아름답게 보일 만큼 좋더라고요. 어쩌면 제가 주고받는 손길 하나에도 고민이 필요하고 주저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닫혀만 가는 마음에 조금은 공간을 내어주게 해줄 소설이라 아주 좋게 읽었습니다!
 

<백년보다 긴 하루> 중에서...

사로제끄의 간이역들에서 살아가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파멸한다. 스텝은 광대하고 인간은 비소(小)하다. 스텝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누군가가 곤란에 처해 있건 사정이 두루 다 좋건 그런 데는 상관하지 않는다. 스텝이란 결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언제까지고 무심할 수가 없다. 그는 자기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라면 더 행복할 터인데도 다만 운명의 장난으로 거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는 거대하고 가차 없는 스텝 앞에서 좀 더 진득하게 참질 못하고 의지를 잃는다. 마치 샤이메르젠의 삼륜차 배터리가 전압을 잃어 가듯이, 그 차 주인은 차를 손질하기는 해도 그 차를 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차는 마냥 세워져 있을 뿐이고, 얼마 안 있으면 배터리가 다 닳아 시동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로제끄의 어느 간이역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 P21

그는 자기가 늙은이로 변할 때까지 여기에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때때로 그 시절의 오래된 사진들을 들여다볼 때면 지금 그의 모습은 얼마나 형편없이 달라져 있는가! 그는 반백의 노인으로 변했고 이제는 눈썹까지도 하얗게 세었다. 그의 얼굴 모습 역시 변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체중이 불지는 않았다. 그 기간을 죽 지나오면서 처음엔 그는 구레나룻을 길렀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턱수염을 길렀지만 이제는 말끔히 면도를 해버린 탓에 얼굴이 휑해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시절로부터 한 시기의 모든 역사가 다 지나가 버렸다고. - P48

이제 관자놀이의 실핏줄처럼 중동 지방의 거대하고 누런 스텝 한쪽 끝에서 다른 한끝까지를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실과도 같은 그 철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나 아직은 그 핏줄이 고동을 멈추지 않았고 기차들은 계속 오가고 있었다. - P116

예지게이는 그 자신에게, 그가 이 가족을 대신해서, 마치 그들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느끼는 분노와 쓰라림에 놀랐다. 그들이 과연 그에게 누구였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이건 내 일이 아냐.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판단을 내리거나 편을 들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을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스텝 지방의 사내 -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속이 뒤집혀야 했을까? 어째서 그가 세상일이 옳거나 옳지 못하다는 문제로 그의 양심을 괴롭혀야 했을까? 분명히, 아부딸리쁘의 곤경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부란니 예지게이보다 천배는 더 잘 알 것이다. 그들은 사로제끄에 뚝 떨어져 있는 그보다 사리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것이 그의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 P174

만꾸르뜨로 변해 버린 아들을 보고 나이만-아나는 괴로워하며 미칠 듯한슬픔과 절망 속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네 비명이 사막을 가득 채웠을 때, 밤낮으로 애타게 신을 부르고 몸부림치며 헛되이 하늘의 도움을 기다렸을 때, 네 고통받는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가래로 숨길마저 막히고 네 발작으로 뒤틀린 몸의 역겨운 배설물로 더럽혀졌을 때, 그 더러운 오물에 빠져 이성을 잃고 구름같은 파리 떼에게 시달리며 뜯어 먹힐 때 - 그때 네가 어찌 마지막 숨을 몰아 이 버려진 세상에 우리들 모두를 태어나게 한 신을 저주하지 않았겠느냐?

어둠의 그늘이 고통으로 갈가리 찢긴 네 영혼을 영원히 덮어 갈 때, 억지로 부서진 네 기억이 지난날과의 연상을 영원히 잃어 갈 때, 거친 몸부림 속에서 네 어미의 모습과, 네가 어릴 적 뛰어놀던 산중의 개울물 소리를 잊어 갈 때, 네 황폐한 의식 속에서 네 자신의 이름과 네 아버지의 이름을 잊고 네가 둘러싸여 자랐던 사람들의 얼굴이며 네게 얌전히 미소 짓던 처녀의 이름마저 희미해져 갈 때 - 그때 너는 어찌 바닥 모를 망각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고작 이런날을 살게 하려고 너를 자궁 속에 품었다가 신의 빛 속으로 내질렀다며 가장 지독한 욕설로 네 어미를 저주하지 않았겠느냐?」 - P185

그가 통나무로 엮어 만든, 높이가 사람 키만큼이나 되고 튼튼한 쇠사슬로 잠긴 문을 채 다 열기도 전에 까라나르가 그를 밀쳐 넘어뜨리더니 사납게 울부짖고 으르렁거리며 그 길쭉한 다리를 한껏 뻗어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탄탄하고 검은 혹을 흔들어 대며 쏜살같이 스텝으로 내달았고, 잠시 뒤에는 발굽에 채어 오른 구름 같은 눈에 가려 흐릿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염병할 놈!」 낙타 주인이 뒤에다 대고 욕을 해댔다. 그러나 다음에는 진심 어린 동정이 배어들었다. 「그래, 달려라! 서둘러라, 이 바보야. 안 그러면 너무 늦을 게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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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1-13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의 깝깝한(!) 편집에 처음 중독된 책이기도 하고, 정말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책인데, 표지를 보니 갑자기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이번에는 눈물 한 방울 찔끔하지 않을 것을 목표로...

곰돌이 2026-01-13 17:26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인물들의 이름이 영 입에 붙지 않더라고요. 표정이 고스란히 그려지는 섬세한 묘사 때문인지 중간에 읽다가 육성으로 탄식이 나오기도 했고요. (훌쩍) 문장은 왜 이리 아름다운지! 그쵸? 아, 그리고 얄리얄리님, 분명 또 눈물 한 방울 찔끔하신다에 손 들어봅니다!
 
눈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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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우리를 잊을 겁니다. 이렇게 바보 같은 삶을 살다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삶에는 사랑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없는 것만 같아요.”

카(Ka)는 어쩌면 불행을 선호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투쟁과 시련만 존재하는 곳을 벗어나 사랑하는 이펙과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들만의 둥지를 만들어 사는 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가 되어버린 그에게 행복에 대한 희망은 이내 다급함과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을 떠나 독일에서 십이 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한 영향일까.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정적을 주는 눈도 어느새 그치듯, 그 어떤 행복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카는 과분하게 여겨지는 행복보다는 불행을 공유하며 자신이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안정감을 바랐다. 그럼에도 행복을 갈망하며 가족과 함께 집에서 평온함을 느끼는 모습, 극장에 가서 소시지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는 일상의 잔잔한 행복을 상상해 본다. 이런 낙관적인 마음으로 또 잠시 마음을 놓은 카를 나는 그저 말없이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휩쓸리고, 불신과 과도한 망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카를 바라본다. 그리고 카 또한 자기 행복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시를 쓰는 자기 손을 다른 사람의 손인 것처럼 바라본다.

순수함과 낭만으로 여겨졌던 눈이 서서히 지겨워졌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카르스 도시에 즐비해 있는 사복 경찰도 마찬가지고, 군용 트럭에서 내린 정보국 요원들이 사람들과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는 카페에 언제라도 들이닥쳐 신분증을 요구하며 나를 페인트가 벗겨진 콘크리트 담벼락으로 세우는 상상을 하는 것도 끔찍하여 생명력을 잃은 유령의 도시를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극단적인 이념 싸움과 끊이지 않는 논쟁, 겉돌기만 하는 사랑, 이 모든 것이 갑갑했다. 정체성 따윈 완전히 잊힌 사람들의 죽음은 늘 일어나는 일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서서히 연극을 지루하게 바라보는 관객처럼 말이다. 희망이 떠오르지 않아서였을까. 그런데도 카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터키의 카르스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홀로 지내온 카의 삶을 천천히 밟아가며 그가 전하는 삶의 의미, 외로움, 쓸쓸함, 수치심, 두려움…. 위험으로부터 인간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카의 공포감은 측은하리만큼 솔직했고,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참 안타까워 보였다.

청년 시절 카에게 가장 숭고한 정신적 영광은 지적이며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죽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이념을 위해 고문을 당하고 죽어 나간 사람들을 보았다. 가난에 허덕여 은행을 털다가 총격전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제 손으로 폭탄을 터뜨리며 죽어 나가는 사람들도 보았다. 헛된 죽음을 맞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런 사회의 일원이었던 카는 무엇을 할 수 있었고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 같은 영혼을 공유하며 행복하게 살았던 카르스인들이 외부의 힘에 이끌려 자신들의 사회를 분리하고, 쿠데타가 벌어지고 학살이 되살아나는 이때, 독일에서 살다가 다시 카르스에 온 카를 사람들은 의심했고, 스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사랑하는 이펙과의 만남이나 길거리에서 마주친 고통스러운 세계와 전혀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것처럼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으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금세 사랑과 연민의 감정으로 마음속 희망의 한 줄기를 발견하는 카의 모습을 보자니, 왜 이토록 그는 다양한 감정의 기복으로 하루의 일상을 맞이해야만 했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어느 순간 비탄의 감정에 가까워졌다. 시대적 아픔을 뚫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고자 하는 그의 고민이 외로운 분투로 다가왔던 것일까.

행복에 겨워 거리를 걷고 싶었다. 아타튀르크 대로에서 왼쪽으로 돌았다. 찻집을 꽉 매운 사람들, 켜진 텔레비전, 구멍가게와 사진관을 보면서 카르스 개천까지 걸었다. 철교에 올라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말보로 담배 두 대를 피우며 프랑크푸르트에서 이펙과 나눌 행복을 상상했다. 개천의 맞은편에 있는, 한 때 카르스의 부자들이 밤마다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을 구경했던 공원에는 끔찍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p. 93)

사랑 앞에서도 소유욕과 좌절감이라는 양가감정에 빠지는 카에게 이펙은 어떤 존재일까. 사랑이 절실하긴 한 걸까. 내가 느끼기엔 누군가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길, 불안하게 떠도는 자신의 영혼을 꽉 붙들어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더 커 보였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새로운 인생과 오랫동안 지속될 행복의 문턱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카의 혼란스러움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행복에 빠지면 평범한 사람이자 평범한 시를 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시인 카는 오랜 세월 내면에 쌓인 상처와 아픔에 갇힌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처럼 보일 만큼 자기중심적 욕망에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끌어올리며 써 내려간 그의 시는 불행의 감정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감과 이성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결핍, 질투 그리고 후회가 있었다. 고통의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그렇게나 치명적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p. 225)

격동의 터키 현대사 안에 담긴 혁명, 사랑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대충 읽히거나 연상되는 무언가가 떠올라 자칫 지루하거나 고리타분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쿠데타 세력과 민중을 다룬 부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카르스 내 이슬람주의자와 세속주의자 간의 갈등과 대립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한 감정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줄도 쓰지 못했던 시를 카르스에 와서 쓰게 된 카가 평범한 독자인 나를 당장이라도 똑같이 그가 탄 버스를 타고 그가 묵은 호텔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싶게 만들었다. 빈곤에 허덕이는 실업자들의 우울함으로 가득 찬 지독히 추운 도시의 거리에서 바라본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희망을 발견한 그에게 손이라도 흔들어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내뿜는 순수함에 생의 약동감을 느껴보는 것도 잠시, 뺨을 스치는 매서운 바람과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수북하게 쌓인 길을 느릿하게 밟으며 떠도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 본다. 꾸밈과 사려 없이 내면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며 사랑을 갈구하고 확인하고 싶었던 그가 현실 세계를 감당하기 위한 선택,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책에 완전히 빠져서 읽게 된 이유는 차곡차곡 쌓여가는 서사도 한몫했지만, 조용한 풍경 속에서 번지는 듯한 근원적인 슬픔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카의 애처로운 영혼이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사랑과 상처, 그리고 회복의 연결이 순탄치만은 않은 내면의 그림자를 따라가면서 고달픔과 함께 푹 절여진 감정, 사랑에 목이 말라 손길을 갈구하는 모습이나 불행에 닥쳤을 때 오히려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앞으로의 행복을 상상하는 눈물겨운 희망으로 고비를 넘기는 모습까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깊은 내면을 연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글쓰기를 위안으로 삼았던 사람들에게만큼은 내 마음이 누구도 풀지 못하게 꼭꼭 잠가 놓은 잠금장치가 풀어지듯 무장해제가 되어버리는 건 어쩌지 못하겠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줄 만큼 훌륭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여운을 조금 더 오래 가두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고요히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경이로운 지금, 이 순간이 멈추길 바라듯 말이다. 그래서 한 번씩 더 읽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외로움에 한 줄 한 줄 글을 적어 내려갔을 카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며 더 정성스럽게 읽고 싶었다. 자신이 결점이 많고 죄가 크다고 여기며 모든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럴 수만은 없었던 어느 한 시기를 살아낸 남성이 남긴 아릿함에 이끌려 따라가다 보니, 어느 쪽에 서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마음만큼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가 내게 물었다. 의존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어느 날, 창문을 열어 내다본 바깥 풍경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를. 그리고 카는, 상상과 기억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그쳐 버린 카르스의 눈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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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1-05 04: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리뷰도 예술입니다! ㅎㅎㅎ

곰돌이 2026-01-05 14:02   좋아요 2 | URL
카와 카르스의 눈, 그리고 오르한 파묵까지 정말 책이 예술입니다! 푹 빠져 읽는 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당연히 잘 아시겠죠?ㅎㅎ 이렇게 저와 잘 맞는 책을 조금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폴스타프 님의 영향이 매우 큽니다.

페넬로페 2026-01-05 1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폴스타프님 말씀처럼 곰돌이님의 리뷰가 너무 좋습니다.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마치 이 글로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예요. 눈위를 걷는 느낌도 들고요. 터키의 현대사도 우리 나라와 비슷하게 격동의 시대를 지났네요.
익숙한 서사도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새롭게 읽힐수 있게 하는것이 작가의 역량인 것 같습니다.

곰돌이 2026-01-05 14:01   좋아요 2 | URL
많은 책을 읽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한 책을 다 읽고 나면 얼른 다른 책으로 넘어가곤 했는데, 이 책은 평소보다 여운을 좀 더 오래 가두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리뷰도 정성을 담아 남기고 싶었습니다! ㅎㅎ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짧게 끝내버리는 이유가 과분한 행복을 견딜 수 없어서라고 대답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숙명적 우울에 갇힌 것 같아 제 마음을 자꾸 붙들더라고요. 스포를 피하려고 많은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굉장히 매력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책읽는나무 2026-01-06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예술입니다.3
오르한 파묵은 예전에 <내 이름은 빨강> 그 책을 읽은 게 다인데 그때 그 책도 엄청 강렬했었던 기억이 남아 있네요.
이 책은 더한 감동이 있는 것 같네요.
겨울인 지금 읽어야 더 좋을 것도 같구요.
곰돌이 님의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곰돌이 2026-01-06 07:06   좋아요 1 | URL
원래 <내 이름은 빨강>을 먼저 읽어보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겨울이기도 해서 몇 장만 읽어보려고 책을 들었다가...... 놓지를 못하게 되었어요 (쿨럭) 이미 오르한 파묵의 책을 접하셨으니 이 책 또한 굉장히 좋게 읽으실 것 같습니다.
 
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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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을 먼저 읽어볼 생각이었다가 겨울이라서인지 이 책에 먼저 손길이 가길래 몇 장만 읽어보자 싶어 책장을 넘겼다가 완전히 빠져서 읽었다. 하얗고 순수한 눈에서 느껴지는 왜인지 모를 낭만과 함께 가련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에 정말 마음이 확 사로잡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비추는 가로등 아래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한 남성이 내뿜는 연기와 소리 없이 내쉰 한숨이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고국을 떠난 세월도 오래되었고, 사실 대단한 기대를 하고 돌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예전 모습만큼은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십이 년 만에 고향 터키를 방문한 이 남성의 이름은 카(Ka)이다.

이스탄불의 중상류층 사람들이 사는 지역인 니샨타쉬의 안락하고 세속적인 공화주의 가정에서 자란 카에게 집 너머의 삶은 다른 세상이었다. 그랬던 그가 정치적 망명자가 되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내다가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 이스탄불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좌익 성향의 신문사에서 정치면 기사를 쓰는 ‘타네르’라는 청년 시절의 친구를 통해 곧 카르스에서 지방선거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과 히잡을 착용하는 소녀들이 이상한 자살 증후군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무도 취재를 원치 않는 곳에 임시 기자증을 발급받아 카르스로 발걸음을 향하게 한 이유에는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인 아름다운 ‘이펙’이 그곳에 있다는 귀띔이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예정에 없던 여행이 시작되어 터키에서 가장 가난하고 잊힌 지역인 카르스에 도착한 카는, 과거의 순수를 찾고 싶은 충동이 생겨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친구들과 걸었던 거리를 가본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예전의 고향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버려진 듯 보이는 마을의 작은 빈민가를 지나 텅 빈 도시의 사방을 채우는 것은 일이 없어 카드놀이로 시간을 죽이는 우울한 실업자들뿐이었다.

이슬람주의 쿠르드족들과 마르크스주의 쿠르드 민족주의자들 간의 논쟁, 욕설, 구타, 길거리에서의 싸움으로 시작된 불화는 많은 도시에서 칼부림으로 변했고, 최근 몇 달 동안 양쪽 진영 모두가 서로에게 총질을 하거나 납치하여 고문을 동반한 취조를 했으며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p. 109)

카는 5년 전 프랑크푸르트 백화점에서 산 부드러운 회색 털코트를 입고 있다. 나는 방금 내린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카르스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이 두툼한 코트를 입은 채 숙소 침대에 누워 상상에 빠진 그의 내면을 이해하는 동반자가 되어 본다. 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껴보며 공화국 시기 터키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잠시 뒤 대학 시절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카를 당황스럽게 만들게 될 이펙과의 만남에 앞서 들뜬 감정 또한 함께 나눠본다. 가난한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명의 이스탄불 출신 서구화된 부르주아들의 만남은 과연 어떤 전개로 이어질까. 일단 카의 멋진 털코트가 빛을 발해야 할 텐데 말이다.

“넌 아주 멋져. 나도 너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3년 동안 그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않았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나도 4년 동안 그 누구와도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어.’ 카는 속으로 말했다.

영화 <도둑들>에서 “저 10년 동안 안 했어요.”라는 씹던껌(김해숙)의 대사가 떠올려지는 이 장면에서 난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10년 치 합시다.”라는 첸(임달화)의 박력을 카에게 바랄 수도 없는 것이, 그는 워낙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부끄럼이 많은 타입이다. 카와 이펙, 두 사람의 애정선은 가끔 이렇게 잔잔한 실소를 뿜게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흠, 분위기가 나 때문에 좀 이상하게 빠져버렸다. 이 진지한 소설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싶다. 아니, 그런데 이펙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홀딱 빠진 카는 깜빡이도 안 켜고 냅다 “너와 결혼하기 위해 이곳에 왔어.”라고 고백까지 하는 게 아닌가? 카의 급하고 거침없는 모습에 나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만남이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거론하기에 아직 성급하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서로 변화할 마음가짐이 없는 상태에서 오가는 대화가 영 겉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평온함을 찾고 싶었던 카에게 이펙을 향한 감정이 사랑인 건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2권을 읽어봐야 알 것 같다!

가벼운 이야기로 착잡함과 무거움을 피해 볼까 했지만, 그럴 수가 없겠다. 곧 있을 지방선거에서 복지당의 지구 위원장이 시장이 될 것이 유력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자리 잡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술을 도구로 삼은 세속주의 세력의 계몽 연극이 펼쳐지고, 이때 군부 쿠데타가 벌어진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어 혼란스러운 사람들과 똑같이 당황스러움과 혼란에 빠지게 하는 묘사가 압권이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온 군중들이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것 같아 올려다본 순간, 그들을 향해 군인들이 총구의 방향을 틀었을 때 무너져 내리는 지금의 심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착잡하다. 숨죽인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겁먹은 움직임과 웅성거림이 비명으로 바뀐 이날의 광경과 발포 명령에 따른 총소리와 처참함을 폭설이 가리고,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TV로 시선을 돌린 시민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 버린다. 이 소설은 자살, 히잡, 테러리스트, 탄압 등의 단어로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공포와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예상하게 하지만 자극적인 사건에 비해 이야기는 차분하게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용히 내리는지도 모르게 내리는 눈이 어느 순간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처럼, 극단적인 사건이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해주면서도 소리를 죽인 몰아침과 함께 서서히 쌓이는 서사에 완전히 압도당하게 된다.


카는 시인이다. 그는 시를 써야만 했다.
눈의 정적이 이어지면 쓸 수 있으리라.

카르스에 드리워져 있는 과거의 죄가 아니라 아름다운 시를 써야 했다. 따스한 호텔에서 손에 담배를 들고 좋아하지 않은 문제를 그냥 넘어가는 아이처럼 머릿속으로는 사랑하는 이펙과 얼른 이곳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침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분명 카르스의 현실과 조금 빗겨나간 듯 보인다. 무신론자이면서도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카는, 이슬람 세력이 서구화를 종교적으로 비판하고, 세속주의 세력은 군대가 저지른 쿠데타를 통해 세속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양쪽의 대립 또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비겁하게 보이는가? 세상은 고통스럽고 아픈데 평온함을 찾는 그의 내면이 나는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졌다. 이미 어린 시절 군사 혁명을 경험했던 그가 무너진 마음의 조각을 뚝 떼어놓고 잠시라도 혼란에서 벗어나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시에서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는, 세상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도 시인은 마음의 일부를 그것으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다는 내용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시인이라면 현재를 환상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해내기 힘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카는 시를 다 쓴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p. 248)


잠시, 눈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본다.
카르스를 가득 채우는 눈 오는 날, 또 하나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정하고 따뜻한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가오는 감정에 오롯이 빠져들어 본다. 언어는 들리지 않지만, 아이들의 동작만큼은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털복숭아처럼 오동통한 뺨은 갈수록 붉어지고,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식식거리며 뛰어노는 모습,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내뿜는 밝음과 희망찬 모습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만 같은 희망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의 해맑음이 나중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작은 공터에서, 눈 덮인 광장에서, 공공건물과 학교의 정원에서, 비탈길에서, 카르스 강 위에 있는 다리에서,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뛰어다니고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코트를 입은 아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교복 윗도리를 걸친 채 목도리와 두건을 쓰고 있었다. 아이들은 쿠데타를 기쁘게 맞이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으니까. (p. 311)

행복에 빠지면 평범한 사람이자 평범한 시를 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시인 카. 그런 카에게 이곳 카르스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모든 것이 정치적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카르스를, 새하얀 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유리를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듯,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가슴 깊숙이 쌓여가는 연민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수치심이 그를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은 쓸쓸함이 상당하다. 상실과 체념의 순간을 견뎌야 하는 고통을 준다. 아직 2권이 남아있어서 앞으로의 전개를 알 수 없고, 지금의 여운 또한 계속 이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오르한 파묵의 <눈>은 앞으로도 매년 눈이 오든 오지 않든 겨울이 되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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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2-29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파묵입니다! 애독자가 많지 않은 책 같아서 참 유감이었는데 곰돌이님이 읽으시니 즐겁기까지 하네요. ㅎㅎㅎ

곰돌이 2025-12-29 08:44   좋아요 1 | URL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손가락 안에 듭니다! Falstaff님 서재에서 제 망태기에 담아온 책들이 많아서 덕분에 좋은 작가와 작품을 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소박하게나마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헤헿

2025-12-31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31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