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샀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그럴싸한 이유가 부추긴 것은 아니고 그저 구매욕이 뿜뿜하여 오랜만에 여러 권을 한꺼번에 샀다. 10월에 구매한 책들 중에서 제일 먼저 펼친 것은 츠쯔젠의 <가장 짧은 낮>인데 두껍고 무겁고 튼튼하며 표지도 예쁘다. ‘내 문학의 강’이라는 제목의 저자의 말을 적어본다.

“점점 흐려지는 노안으로나마 어느 정도는 푸른 풀과 밤하늘의 별빛, 비와 이슬과 눈물, 꽃과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있다.”

기력이 청년 시절만 못하다고 고백하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시든 풀과 차가운 눈일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이제는 어딘가 생기를 잃고 마음을 시리게 하는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도 푸르른 풀이 시들기까지, 이슬이 맺히고 비가 내리다가 눈으로 변하기까지의 그 과정 속에서도 무언가를 발견해오며 살아왔을 것이다. 한순간도 흐름을 멈춘 적이 없었던 자신의 문학을 강으로 표현한 저자에게 흐르는 대로 주어진 대로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발견한 것들을 이 책에 담았을 것 같은 기대감을 조금 누르고, 횔덜린의 시선집 <생의 절반>을 조금 훑어보다가 눈길이 머무는 시를 발견했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신성(神性)의 상(像)이네.
하늘 아래 있는 듯, 대지의 사람들은 떠도네,
위를 보네. 그러나 마치 천문(天文)을
읽어내는 듯, 인간은 무한을, 풍족함을
모방하네. 한 겹의 하늘이
과연 풍족하던가? 은빛 구름들은
마치 꽃잎과도 같은데. 그러나 바로 저곳에서
이슬과 물기가 내려오는 것이네. 허나
저 푸름, 한 겹의 푸름이 꺼져버리고 나면 드러나는
흐린 것, 대리석을 닮은 것, 마치 청동처럼 빛나는,
풍족함의 징표.


단순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 단순함 속에 숨겨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내겐 필요하다. 특히,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놓치고 있던, 잊고 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독서가 참 좋은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이유로 독서를 하는 것 같은데 괜히 거창하게 얘기하고 있다. 점잖은 척 하려니 여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뒤에서 자꾸 누가 옷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세상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분들의 글을 읽으면 목적의식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고 마음이 가다듬어지기도 해서 편안해진다. 그런 이유로 박완서 작가님의 책도 곧잘 읽는다. 중고로 구매했는데 뒤에 붙은 스티커를 살살 떼어내서 책상이나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한 번씩 ‘톡톡’ 붙여서 버리고,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봤다.

공부를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기나긴 하루>, p. 28)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정성들여 손을 씻지만 대강 씻고 무심히 외출한 적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내 손톱 밑에 낀 것은 단연 때가 아니라 흙이므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17)


살만 루슈디의 책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시작으로 너무 재밌어서 여러 권을 후루룩 보는 바람에 조금 천천히 볼 생각이다. 물론, 한 치 앞을 내다보는 재주가 없어 장담이란 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찍먹을 하는 중에도 냅다 들이붓고 와구와구 먹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남지 않았으니 아껴봐야겠다.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2년 8개월 28일 밤>,p. 17)

매일 쏟아지는 환영과 계시로 가득 찬 이 꿈의 시는 아직 제 코앞밖에 못 보는 단조로운 사실에 짓뭉개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 본인은 경이로운 이야기, 특히 그를 벼락출세하게 해줄 수도 있고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한 이야기에 의해 자신의 문 밖으로 쫓겨났다. (<피렌체의 여마법사>, p. 23)


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 조너선 프랜즌의 <인생 수정>은 제법 두꺼워서 좀 더 나중에 읽어야지... 하면서 앞부분만 조금 훑어보는데, 책장이 계속 넘어가는 거다. 지금 읽고 있는 똑같이 두꺼운 <가장 짧은 낮> 다음으로 읽을 책으로 정해진 듯하다. 다만, 새털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알 수가 없긴 하다.

강요된 이송과 수송이 잇따르자 그나마 어렴풋이 유지되던 질서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 결과 손잡이 하나가 반쯤 떨어져 덜렁대는 채로 먼지 주름 장식을 켜켜이 단 노드스트롬 백화점 쇼핑백은 내쫓긴 난민의 비극적 정서를 자아냈다. 뒤죽박죽된 <주부생활>더미와, 이니드의 흑백 스냅사진과, 상추를 살짝 익히는 조리법을 담은 채 갈색으로 산화된 신문 쪼가리와, 이번 달 전화와 가스 요금 고지서와, 50센트 이하의 채무는 무시하라는 상세한 설명을 담은 임상검사 센터의 첫 번째 통지문과, 무료 크루즈 여행 때 화환을 목에 건 이니드와 앨프리드가 속을 파낸 코코넛에 담긴 음료를 홀짝이며 찍은 사진과, 자식들 중 두 아이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출생증명서 따위로 가득 찬 채. (<인생 수정>, p. 15)


그건 그렇고, 배송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겠지만 책 모서리가 눌려져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살짝 쓰리다. 만지작거린다 한들 소용도 없는데 괜히 자꾸 만져본다...(흐윽) 미련 둔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이번에 처음 만나보는 작가의 책인 옌롄커의 <물처럼 단단하게>와 커트 보니것의 <나라 없는 사람>과 <제5도살장>으로 시선을 얼른 돌려본다. 조금씩 읽어보는 동안 공통점을 발견했다. 넋 놓고 봤다가는 이 책들도 책장이 계속 넘어갈 것 같다는 거다.

빌리는 노망이 든 홀아비로 잠이 들었다가 결혼식 날 깨어났다. 1955년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니 1963년의 자신이 나왔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제5도살장>, p. 39)

나는 드레스덴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폭격 이전에 멀쩡했던 드레스덴을 보았고 폭격이 멈췄을 땐 방공호에서 빠져나와 폐허가 된 드레스덴을 보았다. 그로부터 생겨난 반응 중에는 분명 웃음이 있었다. 맹세컨대 웃음은 안도를 갈구하는 영혼의 산물이다. (<나라 없는 사람>, p. 13)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과 보라색을 띤 그녀의 입술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언제 첫번째 단추를 풀었는지 그녀의 두 손이 두번째 단추에서 떨리고 있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처럼 단단하게, p. 39)


존 말코비치 주연의 <미스터 블레이크>를 봤다. 영국의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블레이크가 아내가 죽은 뒤 은퇴하고 처음 그녀와 만났던 프랑스 저택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 저택의 주인 여성 역시 4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중단한 상태였다. 편안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특히, 이 저택에서 키우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만큼이나 주인공 역할의 말코비치가 발랄(?)하면서도 귀엽게 나온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찾은 저택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이전에 주변을 향해 온화하면서도 강력한 힘으로 희망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블레이크를 보면서 한 사람의 온기로 여러 사람이 활력을 찾고 다 같이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보는 내내 굉장히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횔덜린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꽃이 피었다가도 지듯이 구름이 끼고 비가 세차게 오다가도 또 그 비를 맞고 새싹이 푸른색을 띠며 돋아난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과 영화를 보고 나니, 사소한 일상 속에서 ‘희망’이 청동처럼 반짝이며 빛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단,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을 늘 망각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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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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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에게 처음 눈길이 멈췄던 것이 어느 날, 어느 때였는지를 나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나의 열여섯 살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누구나가 거쳐가는 과정을 예외 없이 거치면서 손발이 오글거리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그때는 가족보다 친구가 좋았기에 유독 눈길이 가는 친구와 베프가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실로 대기권을 뚫고도 남았다. 그리고 왠지 느낌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저 친구랑 베프가 될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주는 확신 같은 거.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열여섯 살 소년들이 이런 찰떡같은 예감을 상기시켜줘서 옛 감성에 너무 젖은 것인지, 그때의 순수함을 찾을 수 없는 타성에 젖은 직장인의 모습을 한 내 모습이 되려 이질감이 들고 영 기분이 그저 그렇다. (흐윽)

193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짤막하고 투박하며 잉크 물이 든 손을 가진 유대인 소년 ‘한스 슈바르츠’는 같은 반에 전학 온, 희고 티끌 한 점 없는 깨끗한 손을 가진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리고 슈바르츠도 나처럼 찰떡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감히 손을 내밀기도 어렵기만 한 호엔펠스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 말이다. 이미 잘생기고 매력적인 전학생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에워싸는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결국 그 녀석들을 제치고 호엔펠스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던 슈바르츠가 마침내 친구 이상형에 딱 걸맞은 호엔펠스와 친구가 되었다는 이 설렘과 벅찬 기쁨이 어땠을지는 전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저 온 천지가 봄이었으니 말이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소년이었던 슈바르츠에게 호엔펠스는 ‘희망’이었을 것 같고, 새로운 마음으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며 ‘행복’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던 것이 아닐까? 그의 진심이 묻어나는 글에서 호엔펠스와의 우정이 슈바르츠의 삶에서 얼마나 귀중했는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마음가짐을 얻게 할 만큼 빛나고 소중한 우정이라니...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라 여기며 행복해하는 모습과 함께 이들이 사는 곳의 아름다움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묘사가 이 모든 것을 조금도 훼손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만 가득 차게 만들었다.

나무와 월계수 덤불 사이로 몇 킬로미터씩 뻗어 나간 숲들을, 그리고 절벽이며 성채들, 미루나무들, 포도밭과 오래된 도시들 사이를 유유히 흘러 하이텔베르크와 라인 강을 거쳐 북해로 빠져나가는 네카어 강을 볼 수 있었다. 밤이 내리면 경치는 피렌체의 피에솔레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수천 개의 불빛들, 재스민과 라일략 향기가 실린 따뜻하고 상쾌한 바람, 사방에서 들려오는, 너무 많은 음식으로 졸려 하거나 너무 많은 술로 정열에 취해 만족스러워 하는 시민들의 이야기 소리와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마법에 홀린 듯했다. (p. 77)

갖가지 꽃과 나무의 색을 느끼며 사는 인생의 행복이 얼마나 평온하면서도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주는지를 알려준다. 저자가 화가로서의 경력을 갖고 있어서인지 자연에 대한 묘사에서 풍경을 스케치하고 색을 입히며, 물감에 없는 색은 두 소년이 보여주는 우정의 반짝임으로 칠하여 완성하듯이 낭만적으로 표현해준다. 그래서인지 평온한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여유를 만끽하는 이 봄이 더 오래 지속되길 바라게 만든다.

얼마 전, 필리아님이 올려주신 <횔덜린의 광기> 리뷰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특히 ‘거주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그런 이유로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슈바르츠와 호엔펠스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횔덜린이라고 한다. 그가 정신 착란에 시달리며 36년 동안 은둔하며 지냈던 튀빙겐에 있는 탑을 내려다보며 두 소년이 횔덜린의 시 「반평생」을 낭송하는 장면에서, 어떤 마음을 품고 시를 낭송했을지 상상해보니 왠지 가슴 한 켠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적어본다.


노란 배들이 매달리고
들장미 가득 심긴
땅이 호수에 비치니.
너희 고귀한 백조들은
키스로 물을 마시며
신성하고 냉철한 물 속에
네 머리를 담그누나.

아아, 나는 어디에서 이 겨울에
꽃들을 찾을 수 있을 거나
또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거나.
깃발들이 덜컹거리는
바람 속에서 벽들은
말 없이 차갑게 서 있는데.


시를 통해 내가 느낀 감정선이 슈바르츠와 호엔펠스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서야 그토록 원하던 친구와 우정을 쌓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행복감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었던 유대인 소년 슈바르츠가 이상과 현실을 고뇌하는 마음, 그리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할 만한 환경에서 살아온 귀족 소년 호엔펠스가 맞닥뜨리게 될 현실이 그려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여러 경험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성장해 나가야 할 청소년기에는 흔들림이 없을 거라 스스로 장담하며 고집스럽게 내세운 신념조차 흔들리고 무너지는 반복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더욱이 광기와 분노로 가득 찬 세상에서는 어른들조차 혼란의 연속이 아닌가. 시내와 학교에서 나치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을 향한 모욕과 경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슈바르츠와 호엔펠스 각자가 가진 신념이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들의 순수한 우정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갖지 못하고 안타까움과 불안함을 가진 채 읽어내려가야만 했다.

두 소년의 심리가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분명했지만, 서문과 추천사에 쏟아진 찬사만큼의 감정까지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순수하고 단순한 시선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고 서로의 관심사에 더 흥미를 느끼며 우정을 쌓아갔던 초반부의 이야기들이 아름다웠고 좋았다. 그래서 슈바르츠와 호엔펠스가 사랑하는 횔덜린의 시를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그런 이유로 <횔덜린의 광기>와 함께 읻다 출판사의 횔덜린 시선집 <생의 절반>을 주문했다. 시집은 서너 권 정도 읽어본 게 전부인 나의 해석 수준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진입 장벽이 높게만 느껴져 감히 시선을 두지 못했는데,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내겐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게 되었다.

빛바랜 종이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책장을 넘기는 동안, 독일의 경제 회복을 위해 유대인의 재산을 강탈하고 수단으로써 이용하며 더 많은 희생양을 원했던 히틀러와 나치의 잔인함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무엇을 앗아갔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인간다움을 아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조화로운 삶을 위해 ‘가치 있는 삶’에 뜻을 두고 그 마음을 담아 이 책의 결말을 정한 것이 아닐까?라는 혼자만의 짧은 생각을 해보았다. 계절과 함께 흘러가고 변화되는 주어진 삶, 그저 처한 운명에 따라 어떻게든 살아가면서도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 그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실패자들이니까.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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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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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머그더 이후 두 번째로 만나는 헝가리 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 <사탄탱고>는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강렬함이 책의 도입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미 절망적인 감정을 넘어 그 어떤 것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고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이 허공을 향해 흩뿌리는 부정적인 말들이 확신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p. 15)

공허함으로 가득 찬 헝가리 시골의 버려진 집단농장. 이곳 주민들은 외부의 위협에 공포를 느끼고 불안감 속에서 제대로 된 일상을 살지 못하고 있으며, 시큼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집과 바닥 곳곳에 자라나는 잡초는 이곳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떠나야 하는 곳처럼 느끼게 한다. 매일 밤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을 간절히 바라는 남자, 집 안에서 나는 악취를 느끼지 못한 채 바깥을 감시하며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는 일에만 온 정신을 기울이는 의사, 고함을 지르며 짐차에 짐을 싣고 몰락한 이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

이 소설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낯선 세계에 서서히 진입하다가 완전히 몰두하여 잡념이 머릿속에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는, 독서를 통한 몰입 그 자체의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줄거리는 핵심 사건을 피하고 간략하게만 적으려 한다.) 특히, 긴 호흡 안에 담긴 인간의 심리를 앞선 발자국을 따라가듯 똑같이 진창길을 밟으며, 시월의 찬 바람에 날리는 그 모든 것을 낚아채고 휘어잡으며 구덩이에 빠져버린 것들까지 모두 갈고리로 끌어올리듯 구석구석에 남겨진 잔상까지도 음미해보길 감히 권해본다.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리는 비를 맞고 들어온 한 노인, 차장 ‘켈레멘’이 암묵적으로 마을의 집합소가 된 술집으로 들어와 젖은 모자를 벗고 쥐어짠 다음, 술집 주인이 내민 독주를 마신다. 그리고 분명 기대하는 것이 있는 마을 사람들은 그가 새로운 소식을 들려줄 것이라는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모든 질서가 깨져버린 이곳에서 변화가 있기를 바라며 불확실성 속에서 들뜬 마음으로 노인의 말을 기다려본다.

누군가에게 확신을 불어넣고 그의 덧없는 실존을 온전한 존재로 고양시키는 기억은, 어떤 사태로부터 기억 자체의 질서에 따라 실마리를 끄집어내고 기억과 인생 사이의 거리를 단지 그 기억을 지니고 있다는 경직된 만족감으로써 무마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p. 128)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이 두 사람이 죽은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두 사람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서도 이들이 다시 마을에 돌아온다는 소문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의 가망 없는 상황을 구제해줄 목자 이리미아시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라며 다시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그건 그렇고, 켈레멘이 들려줄 말이 꽤 있을 것 같은데 어째 속도를 내지 않는다. 속이 탄다. 인내심을 가져본다. 어차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루하루가 똑같은 날들의 무력함 속에서 기대감을 갖게 되었으니 변화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러나 그 기대감조차 헛된 생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제각기 갖는 절망감은 술집 문틈으로 막아보려 해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과 함께 이들을 에워싸고만 있다. 굳이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게 만드는 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어둠이 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듯 그저 숨죽여본다.

끝나가는 시월의 밤은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이나 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질서에 따라 나무들을, 비와 진창길을, 노을과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근육을, 정적을, 구부러진 길과 풍경을 두들겼다. 머리카락은 무리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몸과는 다른 리듬을 따랐고, 성장과 몰락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수없이 두들기고 되울리는 한밤의 소리들은 짐짓 절망을 가리는 한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한 장면 뒤로 불현듯 또 다른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눈에 보이는 경계를 넘어서면 현상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졌다. 마치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처럼, 틈이, 균열이 있었다. (p. 132)

살인적인 가을과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겨울 그리고 요란하지만 충족을 주지 않는 봄 (p. 147)


사람이 집중하다 보면 당연히 모든 감각 기관이 활발해지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나를 가장 예민하게 만든 것은 청각이었다. 이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둘러싸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불분명한 것으로부터 여러 위험성과 가능성을 감지하는 사람들을 긴장한 상태로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긴장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상대의 감정을 파악해 가며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의 하루가 누군가의 힘이나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 막강한 힘을 자신에게 방망이 휘두르듯 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이고, 내 언니들이며, 내 오빠였던 소녀 ‘에슈티케’가 등장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은 감히 아래에서 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듯 사람의 기분에 맞추어 살아가야 했던 사람에게 용기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슈티케는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런 연약한 소녀의 복잡한 내면까지 읽고 그 순한 마음을 거침없이 낚아채가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기 때문이다.

에슈티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을 앗아가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가벼워지고 싶어 하는 소녀가 조금 숨을 쉴 수 있도록 정적이 시간을 내어준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이런 에슈티케에게 전쟁으로 두 눈을 잃고 장터나 술집에서 하모니카를 불어서 번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소년 ‘코린’이 말을 건넨다.

“눈이 먼 다는 건 아주 멋진 일이란다, 얘야.” (p. 167)

숨죽인 채 살아가는 사람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극과 닮은 쉼 없이 긴 호흡의 문장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다. 덧없는 삶에서 벗어나려 해봐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에서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절망적인 이 세상을 드러내기만 했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이 삶을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었다.

소녀는 고양이의 눈에서 공포와, 무력한 짐승의 고통을 보았다. 절망적인 고양이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은, 자신을 먹이로 내줌으로써 어쩌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고양이의 두 눈은 어둠을 가르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지난 몇 분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소녀와 고양이가 한데 엉켰다 떨어졌다를 거듭한 싸움의 순간들을. 소녀는 자신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쌓아 올린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p. 174)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보고 싶었던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소녀의 울음이었다. 어른들도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차라리 소리 지르며 으왕 하고 울길 바랬다. 에슈티케의 눈물 대신 세찬 바람과 함께 차가운 비만 내린다. 고성을 지르고 괴로움을 온몸으로 내비치는 모습보다도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괴로웠다. 모든 것이 평온해지고 괴로움이 사라지기까지의 소녀의 숨 막히는 현실을 우리는 똑같이 숨죽인 채 지켜만 봐야 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바보처럼 말이다.

비통한 바람이 부는 황폐한 마을에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실존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실리를 쫓아 움직이고 서로를 경계하며, 비난하고, 조롱하면서도 불안과 혼란 속에서 절박하게 ‘구원’을 바란다. 점점 커지는 기대가 불러온 허상이 사람들에게 솔깃한 말로 속삭이고, 매혹적인 안도감에 금세 현혹된 사람들은 다시 내일이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한다. 과연 이들은 어디에서 확신을 얻은 것일까.

라슬로는 나약한 영혼을 꿰뚫고 유혹하는 사람과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마디에 낙관적 편향에 빠져 객관적으로 구분할 능력조차 상실한 자들의 삶의 줄을 당기며 서로 의지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불안한 관계 속에서 겪는 갈등을 통해 인간 본연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황량함으로 온몸이 무겁게 눌려진 채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고통에 나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묻는다.

두려움에 찬 눈을 그냥 감아버리겠는가?
깊숙이 파고드는 통증을 잊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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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10-17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 노벨상 수상작가를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청개구리 심보가 또 나와서 몇년후에 접할듯 한데...몰입감 최고라는 평에서 살짝 흔들리는 중^^

곰돌이 2025-10-17 05:47   좋아요 1 | URL
다음 장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만드는 몰입도는 초반에 특히 그랬어요! 줄거리보다는 라슬로의 메시지를 포착해 나가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천천히 여유를 두고 마음이 원할 때 읽어보세요. ㅎㅎ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 탱고>를 펼쳤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서 앞부분만 읽어보려고 했는데 금세 100쪽을 넘겨버렸다.

모든 것을 훑고 가버린 듯한 황폐한 마을이 등장한다.
습하고 축축하면서도 시큼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떠날 시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내뿜는 두려움과 무력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머릿속에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진창길을 걷느라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부츠를 신은 남자들과, 강박이 느껴질 만큼 끊임없이 사람들을 기록하는 의사까지... 쓸만한 물건들은 모두 드러내어 버려진 물건과 함께 남겨진 듯한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소리까지 민감해지면서 나마저 집요한 관찰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직 윤곽이 분명치 않은 그 형체를 보고 싶게 만드는 궁금증 때문인지 책장이 계속해서 넘어가고 있다.


- 밑줄 -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p. 15)

매일 밤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만 있으면 돼. (p. 26)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수킬로미터를 걷는다. 어쩌다가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도 같지만, 짙은 어둠이 내내 이어진다. 어쩌다가 달도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달은 그 아래 자갈길을 걷는 두 지친 방랑자들처럼,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는 마주치는 모든 장애물을 통과해 마침내 새벽이 올 때까지 하늘의 전장(戰場)을 가로질러 도주하는 중이다. (p. 70)

혼자서는 절대로 저지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모든 것-집들과 담장들, 나무와 들판, 공중에서 하강하며 나는 새들, 배회하는 짐승들, 육신을 가진 인간들, 욕망과 소망들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힘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위협적인 공격에 헛된 저항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의 모든 것, 벽돌공이 쌓고 목수가 만들고 여인들이 바느질한 모든 것이, 남자들과 여자들이 애써 이룬 모든 것이 저승의 물살에 어지러이 휩쓸려 형체가 불분명한 액체로 화한다 해도 오로지 기억만은, 그가 맺은 계약이 깨져 죽음과 몰락이 그의 뼈와 살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을것임을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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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0-09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시작하자!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첫 장 넘기면 곧바로 확 빨려 들어간 몇 안 되는 책이었답니다. 이 책 읽으신다는 것 만으로도 반가워서 말입죠.

곰돌이 2025-10-09 20:58   좋아요 2 | URL
한두 장만 읽어보고 느낌만 조금 가져보자!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페이지 터너! (참고로 이 책은 Falstaff님 리뷰를 읽고 땡투까지 했답니다.)

그레이스 2025-10-09 21:25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님이 원조셨군요 ^^

페넬로페 2025-10-09 21:45   좋아요 2 | URL
역시 폴스타프님👍👍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0-09 2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작가님 노벨문학상 수상하셨네요!

곰돌이 2025-10-09 20:59   좋아요 1 | URL
오~!! 괜히 기쁘네요. 전 참고로 살만 루슈디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어요...ㅎㅎ

페넬로페 2025-10-09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곰돌이님
선견지명 있으십니다^^

곰돌이 2025-10-09 20:59   좋아요 1 | URL
곰돌둥절!!! ㅎㅎ 어쩌다가 이렇게 책 읽은 시기와 맞아떨어졌어요. 얻어 걸렸는데 그래도 왠지 기쁘네요, 곰돌으쓱!! ㅎㅎ

2025-10-09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09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10-09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발표하는거 보고 방금 샀는데,,, 곰돌이님께 땡투를 했더라구요.
전에 장바구니에 넣을때 곰돌이님 리뷰나 피드 보고 한듯요.^^
발표 직전까지 제가 왜 긴장을 했는지...^^ 암튼 축하합니다~~

곰돌이 2025-10-09 21:44   좋아요 1 | URL
우연히 <사탄탱고>를 펼치게 되어 그레이스님께 축하까지 받게 되네요. 하하!! 또 곰돌둥절입니다!! 이 책의 작가님이 조금 무섭게 생기셔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데 책은 술술 잘 넘어가네요!! (아무말 대잔치ㅎㅎ)
 
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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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이 되면 반드시 늦게까지, 정말 늦게까지 잠만 자야지라고 생각하지만, 기계처럼 잠에서 깬 나는 베개에 눌려 찌그러진 눈을 하고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아 굼뜬 손으로 핸드폰만 연신 뒤적거리다가 차라리 이럴 바엔 책이나 읽는 게 낫겠다 싶어서 독서등을 켜고 책상에 앉아 7편의 중단편으로 엮인 권여선 작가님의 <비자나무 숲>을 펼쳤다.

기획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팔도기획」 출판사에서 일하는 이십 대 여성 ‘김 작가’는 읽는 내내 정이 1도 가지 않았던 홍 팀장 밑에서 몇 명의 선배 작가와 함께 자비 출판을 원하는 고객의 요구에 맞게 대필하거나 원고를 수정하고 가필하여 최소한 출판 가능한 수준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원고를 가지고 사무실을 방문했다.
출판 의뢰를 하러 온 줄 알았더니, 대필 같은 아르바이트를 원해서 왔다면서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침 급하게 마감해야 할 작업도 있어서 ‘윤 작가’라 불리며 투입되는데, 근무를 막 시작한 직원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말문이 막힐 만큼 대쪽 같은 자기만의 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다들, 이건 뭐지?라는 표정일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안 한다, 못 한다 소리 한 번도 못 해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고 지냈던 김 작가는 뒤에서 윤 작가에 대해 숙덕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눈치껏 한마디 얹어보고 앞으로 닥칠 일들이 아득하고 험난해 보이기만 한 그녀의 당당함에 잽싸게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중얼거리며 몹쓸 개를 끌 듯 힘겹게 길쭉한 삼각형의 꼭짓점을 계단 밑으로 질질 끌고 내려왔다. (p. 34)

누울 자리 봐 가며 발 뻗는다고 기대감 따위 저 깊숙한 곳에 넣어두어야만 하는 곳의 기분 나쁜 냄새를 단박에 알아내고 헛헛함에 친숙해져야 하는 사람이었던 김 작가와 달리 매사 결기 있게 대처하는 당찬 윤 작가의 말과 행동에 잠시 현실을 떠올려봤다. 분명, 직장 상사와 선배를 앞에 두고 물과 기름처럼 융화되지 않는 윤 작가의 태도에 나머지 직원들은 괜히 눈치를 살피며 양쪽 귀만 엄청나게 커진 채로 업무용 PC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 없이 손만 괜히 바빠지고, 당사자 못지않게 다들 온몸이 뻐쩍 지근해지고 있을 게 눈에 훤하다. 아니, 그런데 윤 작가에게 인내심이라도 베풀 듯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눈에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당연히 며칠 못 버티고 그만둘 거라 생각했던 김 작가의 예상과 모든 것이 달랐던 것이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어긋남은 점점 무력감을 주고, 불합리함 속에서도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추욱 내려간 듯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지내온 김 작가에게 윤 작가의 뚜렷한 신념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게 만든다.


5년이나 함께 살다가 홀연히 떠나 이제는 요양소에서 지내는 ‘심 여사’를 만나러 간 ‘오 여사’의 이야기를 담은 「은반지」는 다사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에는 꽤나 사연이 있는 듯한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며 멍하니 상념에 빠진 채 나 자신에게도 현실을 제대로 보며 살아왔는지 질문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심 여사?”
“아픈 데가 왜 없겠어요? 이도 시원찮고 무릎도 아프고 그렇죠, 오 여사님은요?”
그 말에 오 여사는 반색을 했다.
“아이. 나도 그런데. 나도 무릎이 안 좋아서 한동안 병원다니느라 고생했어요. 이는 겁이 나서 아직 못 가봤고. 심 여사는?”
“저는 그냥 참아요. 늙어서 아픈 걸 어쩌겠어요?”
심 여사의 말이 자신에 대한 비난처럼 들려 오 여사는 기분이 좀 상했다.
“늙어서 아프든 젊어서 아프든 아플 때 가라고 있는 게 병원인데 안 가면 자기만 고생이지 뭐.”
“그건 그렇죠. 형편 따라 하는 거죠.”

내 집에서 5년이나 살다가 갑자기 떠나버린 심 여사가 괘씸해도 서울에서 꼭두새벽에 출발해 몇 시간 걸려 이놈의 요양소까지 얼굴 보러 와줬거늘, 어째 말끝마다 어깃장 놓는 듯한 심 여사 때문에 오 여사는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두 여성의 대화는 점점 음침하면서도 오싹한 기운을 만들어내 잔잔한 수위의 스릴러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만큼이나 숨죽이며 몰입하게 만들었다. 절대 잊지 못할 거라 다짐했던 순간조차 서서히 기억에서 지워지듯, 혹시 오 여사가 미처 알지 못한 채 흘려보낸 세월 속에 심 여사만 아는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궁금증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심 여사의 증오와 원망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된 그 순간 오 여사의 머릿속을 헤집는 말들은 이제서야 아귀가 딱딱 들어맞게 되는데...


사랑하는 이가 떠난 뒤, 올려다본 하늘은 어떤 색일까.
자신이 마주치는 삶에서 잊히는 것의 애달픔과 통증이 에워싸고 있어 아무런 색도 느낄 수 없었을 한 여성이 사랑하는 애인이 죽은 후, 오랜만에 그의 동생과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같이 근무하는 미영 씨의 생일 선물로 고르는 ‘비니’ 하나도 어떤 것으로 정할지 꽤 망설인 그녀가 죽은 애인의 동생의 전화를 받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주도행 표를 예매한 것이다.

서로의 만남 자체가 슬픔을 상기시키는 것이 될지 모를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겪고 있는 아픔은 단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수천, 수만 가지, 아니 그 이상. 어쩌면 단 한 마디조차도 표현할 수 없는 그 아픔 속에서 아직은 회복되지 않은 이들에게 나는 희미한 가능성마저 접어둘 순 없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햇살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비통한 마음을 조금 거두고 올려다본 하늘이 희끄무레한 잿빛이어도 말이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만들어낸 빈 공간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견디는 것만이 전부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변화된 일상과 슬픔을 진부한 말로 채워 넣지 않아서 좋았던 것 같다.

사방에 부딪혀 깨진 달걀처럼 곤죽이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숨을 쉬게 될 것이고 그때쯤이면 비자나무 숲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p. 117)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 놓이게 된다.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어긋나버린 인생을 포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극단적이고 불쾌한 전개를 통해 운명의 폭력성을 보여준 「길모퉁이」와 「소녀의 기도」에는 불행한 삶 안에 갇혀 기다리는 사람이라고는 사채업자와 빚쟁이, 그리고 구역질 나는 완전 건덕지 같은 새끼(p. 160)뿐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평생 악몽처럼 따라붙을 자신의 잘못된 선택 앞에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욕망이 만들어 낸 상상 속 내 모습을 움켜쥔 채, 길모퉁이를 지나 무엇이 기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애먼 길을 돌고 돌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를 향해 자유의지로 내딛은 발걸음의 의미를 스스로 알고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인간이 증오와 원망의 마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을 탓하는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로 그 운명이 밀어 넣었다고 답하는 것만 같았던 두 작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없었다. 특히 「소녀의 기도」는 불행, 폭력, 탐욕이 오물과 뒤범벅되어 나락으로 빠지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재생이라니. 그건 간단한 만큼 불가능한 개소리였다. (p. 148)


그리고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를, 아니면 알기에 더욱 지독하고 쓰라린 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읽고 난 뒤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렀던 「꽃잎 속 응달」은 책 속의 문장으로 줄거리를 대신한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 딴에는 잘해보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돌아보면 온 청춘을 다 바쳐 망조가 드는 길로만 숨 가쁘게 치달려 온 셈이었다. 자신이 가려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와버렸음을 실감하는 이 순간, 이 절대적인 낯섦은 차라리 이곳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애초에 가려던 곳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었다. (p. 227)

그 시절이 영영 가버렸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과연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p. 229)


지나온 삶을 기억한다는 것은 선물과도 같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치욕스러움이자 끔찍한 고통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착각에 빠져 살아왔을지 모를 삶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치욕스러움이자 끔찍한 고통일 수도 있는 조금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감춰진 기억을 집요하게 건져 올려,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의문,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라는 물음에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게 했던 것 같다.

아직은 삶을 더 많이 살아보고 난 뒤에 삶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꼈던 것은 계획한 대로, 의도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 허무할 수도 있고 절망적일 수도 있는 그 삶을 붙들고만 있는 것이 과부하가 될 때, 그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하지 않은 관계 속에 후회가 가득한 기억들만이 존재하더라도 조바심 내지 말고, 괜찮다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삶,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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