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 우아한 열정에 박수를 !

                                        

 

 

 

 

조용필은 언제나 마지막 무대에 선다. 슈퍼스타란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는 티켓을 얻는 사람'이다. 전공투'다운 말투를 빌리자면 연예계란 마지막 끝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김연아가 실수 없이 마지막 무대를 끝마쳤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박수를 쳤다. 하지만 감동하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엔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소트니코바도 아니고 김연아도 아니었다. 아사다 마오, 언제나 그림자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한 아사다 마오. 그녀가 보여준 무대가 나는 아름다웠다. 김연아를 이기기 위해서는 " 트리플 악셀 " 을 선보여야 했는데 그 신공은 아사다 마오'가 연마하기에는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볼썽사나운 실패를 하고는 했다. 1차전에서의 철저한 실패로 인해 그녀는 순위권과 멀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연기. 바로 그 무대에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다.  

 

그 무대는 공식적인 마지막 무대'였다. 그녀는 경기가 끝나고 빙판 위에 서서 서럽게 울었다. 저 뼈아픈 통증을 보고 있자니 모짜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의 통한이 엿보였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다. 슈퍼스타는 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지만 가끔은 슈퍼스타가 분장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막간에 등장하는 이름없는 밴드의 노래가 콘서트 가수보다 더 감동적일 때가 있다. 아사다 마오의 무대가 그랬다. 순위권에서 벗어난 그녀의 무대는 화려한 피날레가 아니라 막간'이었다. 최선을 다했다. 울루 그로스바드의 영화 < 조지아 > 에서 언니 조지아와 동생 새디'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조지아는 컨트리 가수로 성공해서 부와 인기 그리고 행복을 얻었지만 동생 새디'는 싸구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알콜중독자'가 되었다.

 

언니의 배려로 재기할 수 있는 무대는 몇몇 있었지만 그녀는 번번이 실패한다. 영화는 위기를 극복한 어느 무명 가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그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미덕이다. 새디'는 막간을 이용해 무대에 오른다. 왁자지껄한 이 술집에서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 이 누가 있을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슬픈 감정이 목이 메이는 지 툭툭 끊긴다. 내가 이번 피겨 스케이팅 경기를 보았을 때 떠오른 영화가 바로 < 조지아 > 였다. 나는 항상 실패한 자를 응원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면 루저를 응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가재미가 가재미를 지켜보듯이 루저가 루저를 지지한다. 나는 철저한 계급투표자'다. 성공한 서사가 아름답다고 해서 반드시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김연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지만 감동은 아사다 마오에서 발견했다.

 

내가 김연아 현상'에서 비판하고 싶었던 대상은 김연아가 아니다. 여론의 오지랖과 언론의 호들갑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지랖과 호들갑이 만나면 " 오호, 지들랖갑 " 이 된다. 러시아 선수에게 금메달 하나를 " 빼앗겼다고 " 분노하기에 앞서 우리가 그동안 " 빼앗았던 금메달 " 을 생각해야 한다. 88올림픽 때 종합 순위 4위와 2002년 4강 신화'가 과연 공정한 룰 속에서 진행되었는가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2006년 월드컵 한국 대 스위스 경기 때 심판의 오프사이드 반칙 판정이 맞다고 말한 신문선 해설위원이 지금까지도 괘씸죄에 묶여서 축구 해설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 국뽕의 힘 " 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 빼앗긴 금메달 " 이 억울하다면 그동안 스포츠 국수주의적 광기에 의해 억울하게 빼앗긴 외국 선수들의 승리'에도 분노해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짓만큼 꼴사나운 짓도 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이 이중잣대'가 혐오스럽다. " 된 놈 " 만 밀어주는 당신의 그 우아한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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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2-2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looser입니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저는 김연아 선수의 mentality에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리고 아사다 마오의 연기에 감동했습니다.

저의 자본주의 속물 근성에 의한 판단은 김연아 선수가 은메달을 따므로서 상품 가치(사람을 놓고 상품가치를 운운하는 것이 격이 떨어지지만 광고시장을 볼때)가 더 높아진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09:53   좋아요 0 | URL
저도 자본주의적 속물 근성으로 말하자면 상종가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멘탈 존중하고, 아름다운 연기 훌륭했습니다.


마립간 님을 위로합니다. 성부성자... 음 성신?! 뭐 하여튼 ... 이름으로 마립간 님을 위로합니다.

마립간 2014-02-22 12:54   좋아요 0 | URL
위 동영상을 보고 박시헌 선수를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네요. 국가주의가 어떻게 개인을 파괴하는지. 비록 금메달을 주는 과정이었어도.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3 08:25   좋아요 0 | URL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자기가 로비한 것도 아니고... 사실 은메달만 따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았겠습니까.

K잉여 2014-02-2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은 김연아를 위한다 위한다 해놓고는 정작 김연아본인은 항의하지도 않는데(이 정도면 자신의 마지막 은퇴경기를 추잡한 구설수에 올리지 않겠다는 김연아의 생각이 보이지않나?) 위한답시고 하는 꼴을 보면 진정성이 의심됩니다 진짜 연아를 위한다면 그녀의 입장부터 생각해주어야하지 않나요? 은퇴경기에서 꼭 금메달을 받아야 아름답게 끝난다는건 본인들 열망이지 김연아의 열망이 아니에요 물론 선수 본인도 아쉬움이 남는건 사실이겠지만 국민들이 감놔라배놔라 할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금메달이 가져오고 싶은거라고 차라리 솔직하게라도 말하던지 진짜 연아를 위한거라면 입닥치고 있던지, 아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는건지...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09:52   좋아요 0 | URL
김연아 고마워, 라고 검색창에 써서 실검 1위를 유지하자는 운동을 보고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대중이 메르한적 판타지에, 순정 만화 코드를 간직한 마음 따스한 국민이었는지 정말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 위의 박시헌 선수 보십시요. 국뽕의 힘으로 금메달 따주게 해씨만
결국 저 선수는 마음 감옥에 갇히지 않아씁니까...

르미에르 2014-02-22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러시아 덕분에 이제 여아느님은 전설이 되셨죠 -_-v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10:25   좋아요 0 | URL
연아 선수에게는 색깔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실수 없이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푸르푸르 2014-02-2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혹시 위너가 되시면 더이상 루저를 지지하거나 루저를 위한 글을 안쓰시게되는 건 아닌지?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10:24   좋아요 0 | URL
전 위너가 되면 루저따윈 개나 주라지 태도로 일관할 겁니다.

푸르푸르 2014-02-22 11:21   좋아요 0 | URL
그럼 오래 볼려면 같이 루저로 있는 편이 낫겠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11:47   좋아요 0 | URL
음 그렇군요. 비극이네요....

2014-02-22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11:50   좋아요 0 | URL
제가 어젠 거의 24시간 잠을 안 잔 상태에서 술을 마시다 보니 아... 무지 졸리더라고요.
다음에는 24시간 잠을 잔 후 술을 퍼마시겠습니다.

수다맨 2014-02-22 11:56   좋아요 0 | URL
네, 확인해보니 주소는 정확히 씌어 있습니다. 재전송이라고 하니 조만간 오겠군요. 책 감사히 읽겠습니다.

블랙겟타 2014-02-2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스피드스케이팅 8강전인가요. 아나운서가 직접 '상대가 러시아니 만큼 더욱 더 이겨야 겠습니다'라는식의 멘트를 날리더군요. 스포츠라는게 감정이 개입되기 쉬운 부분이 존재합니다만.. 어제 온통 스포츠 기사가 외국언론에서 나온 김연아 판정 반응 기사, 소트니코바 선수 비매너 관한 기사, 빙상연맹은 뭘하냐, 빙상연맹만 있냐. 우리 대한체육회가 나서겠다. 등등 넘쳐났습니다. 그러면서 해외에 퍼나르는 기사들중 사실관계가 분명치 않거나 왜곡.과장? 도 나오고 있었구요. 당분간 흥분의 세상은 이어 질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3 08:22   좋아요 0 | URL
스포츠 서사'는 늘 애국주의적 성향을 보여요. 소트니코바가 김연아를 보지도 않더라, 라는 기사를 쏟아내고는 하죠. 애국심을 위해서는 적이 필요합니다. 영웅을 위해서는 악당이 필요하듯이 말이죠.
현재의 한국 언론은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악당을 만드는 구조죠.
옛날에는 김연아를 위해 아사다 모아를 악당으로 만들고, 이제는 소트니코바 죠....
 

 

 

 

 

 

김연아 편파 판정 논란 : 포데기 신파에서 스포츠 국가주의로.

 

방금 피겨 스케이팅 종목이 끝났다. 결과는 러시아 선수가 금메달, 대한민국이 은메달, 이탈리아가 동메달'이었다. 김연아 선수가 별다른 실수 없이 경기를 마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억울한 면이 있다. 사실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소치 올림픽이 푸틴의 야망을 확장하기 위한 1인 모노극이기에 부덕의 소치'가 될 것이란 점은 모두 알고 있던 터였다. 볼썽사나운 시나리오가 연출될 거란 예상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볼썽사나운 현상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거란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제 곧 끔찍한 저주의 험담들이 오고갈 것이다. 언론은 한때 김연아를 띄우기 위해서 아사다 마오를 작살냈듯이, 이번에는 편파 판정에 대한 울분을 토해낼 것이다. 한국인은 어느새 국제 빙상 연맹 피겨 스케이트 국제 심판처럼 굴며 러시아 선수가 왜 잘못되었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해당 선수는 물론 심판진에 대한 신상털기를 외치지 않을까 ?

 

안 봐도 뻔하다. 열심히 한 김연아에게 박수를 보내듯이 러시아 선수에게도 박수를 치자. 그냥 러시아의 홈 텃새는 강했고 김연아는 금메달 따는 데 아쉽게도 실패했다고 생각하자. 혈압 올리며 퍽유 러시아를 외치지는 말자는 뜻. 이번 경기가 그렇게 억울하면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2002년 월드컵 경기 때 한국이 저지른 편파 판정을 생각해 보자. 월드컵 역대 오심 베스트 10'에 무려 2002년 월드컵 한국 경기가 4차례나 순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유감스럽게도 오심 10'에 오른 4경기에서 한국은 모두 이겼다. 이 결과는 한국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이었다는 점이 된다. 꼭, 이쯤되면 나오는 딴지. " 넌 어느 나라 편이냐 ? " 이럴 때, 나는 매우 슬픈 목소리로 당신에게 촉촉하게 대답하겠다. " 나도 목이 터져라 김연아 우승을 응원했다, 시바. 됐냐 ? "

 

벌써부터 해당 선수에 대한 사이버 테러와 심판들 신상털기'에 착수한 모양이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기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 아주 뻔한 스토리여서 놀랍지도 않다. 이처럼 편파 판정에 대해 들끓는 여론을 다루는 언론과 국가를 보면 국격을 읽을 수 있다. (이웃인 잉여킹 님이 재치있게 분류한 것을 적용하자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국민은 분노하지만 언론과 국가는 흥분하지 않는다. ② 국민은 분노하고, 언론도 이에 동조한다. 하지만 국가는 분노하지 않는다. ③ 국민이 분노하고, 언론이 이에 동조하며 덩달아 국가도 흥분한다. 1번과 같은 성향을 보이는 나라는 대부분 선진국이다. 반면 2번 이하는 국격에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은 2번에 해당된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한국 스포츠 영웅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싶으면 가차없이 그 상대를 비난하기에 열을 올리고는 했다.

 

아사다 마오는 여왕의 시녀가 되어서 김연아 앞에서는 " 피겨 하지 마오 " 가 되고, 안톤 오노를 향해서는 " 한국에 언제 오노 ? " 라며 칼을 간다. 한국 오면 원 펀치 쓰리 강냉이를 선보이겠다는 말씀. 거친 여론을 걸러서 중재해야 할 한국 언론은 오히려 더 거칠게 ,< 피겨 하지 마오 > 와 < 한국에 언제 오노 > 를 재생산한다. 아침 뉴스는 온통 김연아에 대한 잡다한 뉴스'를 배치하고는 그 다음 뉴스는 부산외대 사건을 짧게 다룬다. 왜 한국인은 김연아가 금메달을 빼앗겼다고 생각할까 ? 김연아가 은메달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 ?! 당신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 실천은 좀 존나 간사한 데가 있다. 우리가 눈물을 쏟고 온 열정을 다해서 지지하는 이웃은 " 될 놈 " 이 아니라 " 된 놈 " 들이다.

 

그것은 박애가 아니라 편애'다. 비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엘리스 크리스티나 소트니코바'가 아니라 스포츠 마피아들이다.  선수들은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뽐냈을 뿐이다. 한국인이 스포츠 판정에 대해 지나치게 흥분하는 이유에는 " 포데기 신파 " 가 큰 몫을 차지한다.  < 포데기 신파 > 란 " 내 새끼 가는 길, 아무도 막지 마라. 이 엄마는 내 새끼가 가는 길이라면 그 무슨 짓이라도 하리 - 주의 " 다. 내 혈통을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 억척 > 과 < 악착 > 을 아름다운 모성으로 둔갑시킨다. 이 포데기 신파'가 스포츠 국가주의를 부른다. 내 새끼 박승희'에게 반칙을 한 엘리스 크리스티는 쌍년이 되고 여동생 김연아에게서 금메달을 빼앗은 소트니코바는 얄미운 년이 된다. 이 억척과 악착에 가까운 애국적 오지랖이 나는 혐오스럽다.

 

이따위 신파에 울지 마라. 이제는 포데기 신파를 버릴 때도 됐다. 이번 2차 자유 경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 사람은 아사다 마오'였다. 물론 김연아 선수도 아름다웠다. 소트니코바'도 대성할 재목이다. 하여튼 흥해라, 눈물과 기쁨이여 ! 청춘은 그렇게 소비되는 것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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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 2014-02-2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모닝입니다
웬일로 아침일찍 글을 ㅎㅅㅎ

후후
곰발님이 연아킴의 은메달 획득에 분노하는 이들의 사고를
포데기 신파"와 연관시키실거 같았어요

뭐. 저도 아쉬운 1인입니다만.
외신까지 나서서 자극적인 기사를 내도 달라질건 없쟈나여

그녀가 잘 해냈고, 유종의 미를 충분히 거두었다는걸
모두가 알기에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즐금 불금 행금 되십쇼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12:24   좋아요 0 | URL
은메달에 분노하는 애국 시민을 보면 이 심리의 기저에는 " 애국적 오지랖 " 이라고나 할까요.
지금 청원 때리고 난리던데, 후후...
이런 자세라면 적어도 4천만 애국 시민들이 모두 하얼핀으로 가 도시락 폭탄 던질 태세입니다.

엄동 님도 알금 되시기 바랍니다. 알콜로 젖는 금요일되시길...

마립간 2014-02-2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경기를 보지 못하고 아침에 결과만 알게 되었고, 몇 신문의 기사를 읽었지만, 생각보다는 국민과 언론이 덜 흥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이든 국가든 한순간에 성숙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기 절제 안 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의 행동이 크게 보이잖아요.

저는 4년 뒤가 더 걱정됩니다. 서울올림픽이나 2002년 월드컵처럼되지 않을까 해서요.

마립간 2014-02-21 09:29   좋아요 0 | URL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440
연관된 글이기에.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12:25   좋아요 0 | URL
평창의 복수인가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울올림픽과 2002 월드컵 때 정말 어마어마한 편파판정으로
애간장 태운 나라가 한두 나라가 아니죠.

마립간 2014-02-21 14:56   좋아요 0 | URL
오후가 되니 흥분한 글이 많이 보이네요. 아마 제 판단이 틀리고 곰곰발님의 판단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편파 판정에서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도 만만치 않았죠. 저는 이런 국격을 기대해 봅니다. (평창에서 기대하기는 무리지만,) 다른 대회와 달리 홈그라운드의 잇점이 전혀 작용하지 않은 공정한 대회였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05:51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 대한 복수는 편파 판정으로 복수를 하기보다는 ㅁ
정말 깨듣한 페어로 복수를 하는 게 가장 통쾌하죠.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88올림픽, 86아시안게임, 2002월드컵에서 보여준 편파판정은 역대 모든 리스트를 파괴할 만큼 잔인하고 집요하게 편파 판정으로 순위를 올리고는 했죠. 88올림픽 때 로이 선수인가요 ? 미국 선수...
그 사람 완전 이기고도 져서 이거 거자고 미국이 엄청 항의했던 기록이 있더군요.

마립간 2014-02-22 08:11   좋아요 0 | URL
언뜻 듣기에 서울 올림픽때 경기에 지고 스스로 은메달로 딸 것을 생각했는데, 미국 선수 제치고 금메달 딴 한국 선수, 편파 판정의 충격으로 권투를 그만두었다고 하는군요. (인터넷 검색에는 박시헌 선수로 나오고,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글이 보이네요.)

누구의 평에 의하면 푸틴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닮았다고...

samadhi(眞我) 2014-02-2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겨하지마오로 불린 줄은 몰랐어요. ㅎㅎ. 마오를 보면 자꾸 짠해요. 속된 말로 연아는 그냥 신. 이라 생각되는데. 저 우에서 혼자 느긋하게 거니는 그런 존재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이런 일도 "뭣도 모르는 것들" 하고 가볍게 넘어갈 것만 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05:48   좋아요 0 | URL
피겨하지마오'는 제가 막 지어낸 말입니다...ㅎㅎㅎㅎㅎ. 개인적 말장난이에요..

블랙겟타 2014-02-22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자체가 기록경기가 아니기에 판정논란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지요. 제가 보기엔 올림픽 경기중에 참 '주관'적인 종목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하지만 그것보다 어제 새벽 마지막 올림픽경기이었던 김연아, 마오의 경기를 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금메달이든 아니든 전 그걸로 당연하게 만족 합니다. 메달을 떠나 두 선수에게 모두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네요. 거대한 국가(한국, 일본)를 뒤에 짊어진채 그 동안 힘들어했을 동갑이자 라이벌이었던 아사다 마오, 김연아.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놓으셔도 될 것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05:48   좋아요 0 | URL
제가 이런 글을 쓰면 꼭 넌 누구를 응원했냐, 하는데 전 물론 김연아를 응원했습니다. 안티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겟타 님 지적처럼 채점 기준이 심판의 주관적 입장이 크게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과 남이 하면 블륜이 되는 걸 지적하고 싶었던 겁니다. 신문선 해설위원인가요 ? 가 양반이 월드컵 때 한국 선수 반칙이 맞다고 해서 지금까지 스포츠 해설을 못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광기죠. 화면 판독 결과 한국 선수의 반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문선 해설 위원 말이 맞죠. ) 지금까지 해설을 못해요. 과연 그런 것들을 모두 외면한 채
이번 편파 판정에서만 광기에 가까운 소릴 하는 게 그렇다는 말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자소서 비슷한 것.

 

 

 

 

 

 

 

 

 

오즈 야스지로는 < 옆 > 을 잘 찍는 감독이기보다는 < 곁 > 을 잘 찍는 감독이다. 오즈의 카메라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든다는 느낌 없이 곁에 머물면서 조용히 지킨다. 옆을 바라본다는 것과 곁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느낌이다. 오즈가 다른 감독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 곁 " 을 포착하는 능력은 오즈가 가장 탁월했다. 반면 구로자와 아키라'는 < 앞 > 을 잘 찍는 아시아 감독에 속한다.* 관객은 종종 배우의 응시를 불편하게 받아들인다.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서양에서는 이 응시가 매혹적일 수 있으나 예를 중시하는 동양 문화에서는 자칫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구도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는 밖에서는 열렬한 찬사를 받았지만 자국 내에서는 짜디 짠 박대를 받았다. 일본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들은 오즈 야스지로의 위대함을 위해서 구로자와 아키라를 평가 절하시키고는 했다.

 

마치 김연아의 우아함을 위해서 아사다 마오와 비교 평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를 매우 좋아했다. [ 거미의 성 ] 은 셰익스피어 연극을 영화로 만든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탁월했고, [ 숨은 요새의 세 악인 ] 은 영화가 활동극'으로 불린 이유를 깨닫게 해준다. 그런 그가 자서전 비슷한 것을 쓴 모양이다. 그래서 제목도 < 자서전 비슷한 것 > 이다. 역자 후기를 보니 < 자서전 비슷한 것 > 은 1978년 3월 ~ 1978년 9월까지 신문에 연재한 것을 덧대고 재구성해서 단행본으로 나온 책으로 구로사와 감독이 부제로 붙인 이름이 " 자서전 비슷한 것 " 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이 책은 < 데루수 우자라 / 1975 > 와 < 가게무샤 / 1980 > 사이의 긴 공백 기간에 쓰여졌다. 칠순에 가까운 그가 지난 일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사실 이 책을 펼쳐놓고서는 한동안 당혹스러웠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 라쇼몽 ]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 현장이었는데 이 자서전 비슷한 것은 " 라쇼몽 " 까지만 다룬다. 아뿔싸, 책을 살 때 차례'를 자세히 보지 않은 탓이다. 더군다나 전체 가운데  2/3는 감독이 되기 전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실망은 1,2장만 넘기면 글 솜씨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훌륭한 감독이기에 앞서 탁월한 시나리오 작가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만든다. 자서전에서 보이는 그 흔한 허세'가 보이지 않는다. 직설적이며 화를 잘내는 성격이 글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자상한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달달하게 말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차 한 잔 마시며 진지하게 예술혼에 대해 말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왁자지껄하는 저잣거리 술집에서 불알친구들과 모여 낄낄거리며 수다를 떠는 것 같은 분위기'다. 그렇기에 그의 필모그라피 중 가장 화려했던 시기가 아닌 어렵고 힘들었던 애송이 시절에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글이 꼭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관동대지진 때 벌어진 재일 조선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감동적이며 서른이 되기 전에 자살한 형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구로사와의 글빨에서 불구하고 찜찜함은 남는다. 감독 스스로가 말했듯이 자서전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미완으로 남은 자소서 같다.

 

 

 

 

FIN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로사와 영화는 < 거미의 성 > 이다.

▦ < 거미의 성 > 을 볼 때 늘 궁금했던 점 하나가 마지막 장면이다. 1957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이니 특수촬영으로 화면을 조작할 리는 없는데 와시즈(미후네 도시로가 )가 수많은 화살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 리얼 " 했기 때문. 하지만 이 책 부록에 해당하는 필모그라피에는 그 궁금증을 해소할 만한, 청천벽력 같은 사실이 폭로된다. 다음과 같다. " 와시즈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도망가는 라스트신에서 와시즈 역을 맡은 미후네의 공포에 질린 얼굴은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대학의 궁도부원들에게 미후네를 향해서 화살을 쏘게 했다고 한다. " 맙소사 ! 미후네의 영화 속 공포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던 것이다.  한국 양궁 선수라면 모를까 ? 실력이 꾀죄죄죄한 일본 대학 궁도부원들이 진짜로 미후네를 향해 화살을 쏜 것이다.  화살이 그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는데 그중 한 발이라도 엇나갔다면 미후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 문득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 피츠카랄도 > 가 떠올랐다.  구로사와가 화살을 쏘았다면 헤어조크는 권총으로 배우를 협박했다. " 연기할래, 아니면 죽을래 ? " 둘 다 약간 미친 감독 같다.

▦ < 천국과 지옥 > 은 카메라의 동선과 배우의 동선이 서로 얽히지 않고 유려하게 치고 빠질 수 있는 신기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호흡을 함께 한 탱고 같다. 집중력을 잃지 않는 힘, 그것이 바로 구로사와 영화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 구로사와는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겨울에 찍고 반대로 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여름에 찍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다. 그래서 촬영장은 전쟁터 같은 치열함이 있었다고 한다. < 살다 > 라는 영화는 겨울이 배경인데 이 영화는 여름이 찍었다. 아, 불쌍한 시무라 다카시. 눈이 펑펑 내리는 놀이터에서 ' 곤돌라의 노래 ' 를 부를 때 얼마나 더웠을까 ? 시무라 다카시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장면은 구로사와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 개인적으로 구로사와에게 영광을 안긴 < 라쇼몽 > 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구로사와 영화치고 심심한 영화에 속한다. 혹여, 이 영화 한 편 보고 지레 실망해서 그의 다른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다면 당신은 큰 실수를 저지르는 꼴이 된다.

▦ 그는 꽤 굵직굵직한 해외 문학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다. < 거미의 성 > 은 [ 맥베스 ] 가 원작이고, < 밑바닥 > 이라는 영화는 막심 고리키의 [ 밑바닥에서 ] 가 원작이다. < 요짐보 > 는 대실 해밋의 [ 피의 수확 ]에서, < 란 > 은 [ 리어왕 ]에서, < 백치 > 는 제목 그대로 도스토엡스키의 [ 백치 ]에서, < 살다 > 는 톨스토이의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다.

▦ 러시아가 구로사와를 초대해서 < 데루수 우잘라 > 를 찍었는데 그것은 러시아 문학 작품을 꾸준히 영화로 각색한 노 감독에 대한 답례처럼 보인다. 실제로 영화 제작 및 투자를 담당한 러시아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참견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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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퀸 2014-02-21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읽을만 한가요? 제 블로그에 구로자와에 대한 글도 아니고 블로그 포스팅 한 글에 구로자와 이름이 있었는데 이 책 낸 출판사에서 서로 이웃 신청하더군요 ㅎㅎ 흥미로워 보여서 살까 생각은 하고 있는데. 이게 예전에 나왔던 감독의 길의 정식 버전이라고 하던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04:1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감독의 길'이죠. 이전 책이 영문 번역이었다면, 이 책은 원판 번역.. 이게 맞는 말인가?! 하여튼...
촬영현장이나 우리가 흔히 알고 싶어하는 이 영화 이 장면 어떻게 찍었지 ?! 이런 굼금증을 해소해 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측면에서는 좀 아쉽습니다. 그냥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으로는 좋으나 전문적으로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다는 측면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죠. 퀸 님에게는 별 득이 안 되는..
그러니간 나 같은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 그냥 읽기에는 좋지만 기술적인 노하우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매직퀸 2014-02-21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답변 감사. 인생 이야기가 사실 더 궁금하고 흥미롭긴 합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05:11   좋아요 0 | URL
책 아주 재미있습니다 ! 읽어보세요. 문장력도 좋아서 책이 술술 읽힙니다. 딱딱하지 않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2-2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후네 도시로와 구로자와 아키라는 늘 함께 떠오르더군요.나중에 대판 싸우고 결별했지만...이 자서전에는 미후네 도시로에 대한 언급은 어느 정도 나오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05:55   좋아요 0 | URL
아, 노이제자이트 님 오랜만입니다. 후후.
미후네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는 않아요. 워낙 , 라쇼몽 까지만 다뤄서 말이죠.
하지만 읽어볼 만한 후일담입니다.
 

 

 

 

 

 

 

 

 

 

 

 

 


 

 

 

 

 

 

아주 오래된 통증......

 

 

 

복사꽃을 본 지 오래되어서 다음해 맹무살수의 고향에 갔다. 하지만 그곳엔 복사꽃은 없었다. 복사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떠날 때에야 깨달았다. 복사꽃은 그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고 나서야 황약사가 날 찾아왔던 이유를 알았다.

 

- 동사서독, 구양봉(장국영)의 독백 中

 

 

김훈은 에세이 < 상처와 풍경 > 서문에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라고 고백한다. 염세주의자인 나는 이 말을 " 모든 관계는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 라고 고쳐 말한다. 관계'가 상처를 주는 원인이라면 가장 농밀한 관계라 할 수 있는 사랑은 말해서 무엇하랴.  이 세상, 모든 사랑은 상처의 풍경일 뿐. 사랑할 때는 보이지 않으나 헤어지고 나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부재'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장소를 공유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함께 했던 " 자리 " 를 기억하는 행위가 바로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함께 했던 < 자리 > 에서 텅 빈 자리를 바라볼 때 그 사람의 부재를 읽는다. 왕가위 영화 속 사랑은 대부분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영화 < 동사서독 > 에서 사랑의 상처를 얻고 고향을 떠나 세상 밖으로 떠도는 맹무살수(양조위)는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 복사골 " 을 호명한다.

 

그는 복사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기억하기 위해서 복사꽃 피는 마을(복사골)을 에둘러 말한다. 그래야지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슬픈 사랑이다. 그는 도적떼가 휘두른 칼 끝에 자신의 목이 베일 때 경쾌한 바람소리를 듣는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장소를 잃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처럼 상처라는 낱말이 품은 핵심은 장소/자리'이다. 상처에서 < 처 > 가 한자로 < 處 : 곳 처 > 다. 롤랑 바르트'처럼 화려한 만연체로 말하자면 실연에 따른 아픔은 그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주 가던 장소에 그 사람이 부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처연'이다. 글을 쓰다 보니 너무 먹물스럽게 말을 비비꼬았나 ? 헤헤헤. 됐고 ! 언제부터인가 나는 상처라는 말보다 흉터'라는 말이 가슴에 더 와닿았다. < 상처 > 라는 말은 왠지 싸구려 신파 같았고 < 흉터 > 는 가슴에 사무쳤다.  

 

어제는 떠나버린 사랑 때문에 질질 짜다가 오늘은 느닷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희희낙락할 수 있는 감정이 " 상처 " 라는 낱말에 어울릴 것 같았다. 반면 < 흉터 > 는 묵직하고 담담한 어감이다. 흉터는 쉽게 울지 않고 쉽게 웃지 않는다. < 상처 > 와 < 흉터 > 는 모두 " 통증 " 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상처가 주는 통증은 찰나'에 가깝고 흉터가 주는 통증은 지속'에 가깝다. 부풀어오른 통증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흉터란 오랜 시간을 거쳐야 완성되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 동사서독 > 에서 도적떼에게 목이 베인 맹무살수는 목에 흉터를 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처는 치명적이고 흉터는 지속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상처는 못 견디는 것이고, 흉터는 견디는 것이다. 

  

 

 

▶ 한 여성 행위 예술가가 현대인의 소통 단절에 대한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낯선 사람과 1분 간 서로 눈으로 대화를 나누자는 의도이다. 여기에 의도치 않은 한 남자가 등장한다. 행위예술가는 그 남자를 보자 설움과 기쁨이 섞인 눈물을 쏟는다. 옛날에 사랑했던 남자이자 동지였던, 그 남자 ! 여기서 여자 앞에 앉은 남자는 흉터'다. 한때는 못 견딜 것 같던 상처였으나 이제는 견딜 수 있는, 아름다운, 그리운, 보고 싶던 흉터가 그녀 앞에 있다.

 

영화 < 화양연화 > 에서 양조위는 아주 오래된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돌의 흉터'를 본다. 그는 천년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돌 속에서 상처입은 돌 하나를 발견한다. 숨탄것은 상처를 방치하면 살이 부풀어올라 양각으로 새겨진 흉터를 남기지만 나무와 돌은 음각으로 새겨진 흉터를 남긴다. 전자는 덧대고 후자는 파인다. 양조위가 앙코르와트에서 발견한 돌 구멍'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물지 못했던 돌의 흉터였다. 얼마나 깊은 통증이었기에 저토록 단단한 돌에 구멍이 파였을까 ? 그는 오래된 통증 앞에서 자신이 겪었던 통증을 섞는다. 그리고는 지푸라기로 봉합한다. 그것은 일종의 치유이다. 텅 빈 자리를 메우는 상징적 몸짓이다. < 흉터 > 라는 말이 한자 조합으로 이루어진 낱말 같지만 사실은 순우리말이다. " ~ 터 " 는 놀이터, 일터, 낚시터'처럼 " 자리 " 나 " 장소 " 를 뜻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페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모두 어딘가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려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가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를 위한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 뿐

 

- 시집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 중 시 " 뼈아픈 통증 " 전문

 

 

 

황지우 시집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에 수록된 " 뼈아픈 후회 " 는 사랑과 장소'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시인은 " 사랑했던 자리 " 가 " 모두 폐허 " 가 되는, 쓸쓸한 풍경을 지켜본다. 그는 < 상처 > 나 < 흉터 > 라는 말 대신 < 폐허  廢墟 > 라고 말한다. 여기서 허(墟 : 터, 언덕, 구렁) 는 " 처 " 와 " 터 " 를 동시에 아우르는 지점이다. 폐허는 상처와 흉터 어딘가에 위치한다. 시인은 이 폐허를 견디지 못하고 "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 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 고백이 상처를 숨기기 위한 위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텅 빈 자리(폐허)를 메우는 행위가 비록 "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 뿐 " 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 지지부진한 채움'을 견뎌야 한다. 모래가 모여서 사막이 되듯, 속을 비운 채 질긴 가죽만 남은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내부의 폐허를 채우는 행위가 사랑이다. 이처럼 " 處 " 와 " 墟 " 를 메워야지 사랑이라는 텅 빈 기표를 완성할 수 있다.

 

나는 한때 산기슭을 내려오다가 나무 구멍에 대고 속삭인 적이 있다. 누군가가 그 나무가 베였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누설했던 비밀을 품은 나무가 봉인 해제되었으니 이제 저잣거리에서는 벌통을 건드린 벌떼처럼 풍문으로 떠돌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시계의 시계추처럼 매달려 울던 신파를 조롱해도 어쩌랴. 한 여자를 오래 사랑했으니,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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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4-02-1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흉이 남아 있는 터군요. 슬프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0 04:45   좋아요 0 | URL
전 처음에 흉이 가슴 凶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순우리말이더라고요...

밤하늘의별소리 2014-02-19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라는 시가 생각나네요-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

--

'한 여자를 오래 사랑했으니, 후회는 없다.'라고 말하는 곰발님이 멋져요. 제가 생각하는 저는 나중에 나이들어서 이 시구절을 되뇌일 것 같거든요 :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면서/ 내 뼈 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거"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0 04:47   좋아요 0 | URL
이 시, 제가 좋아하는 시이고 자주 인용하는 부분이죠.
사랑했던 자리마다 / 모두 폐허다

참... 아련해지네요. 이 글을 좀 보충해야 할 것 같군요.
그 여자였으니 저 같은 사람을 좋아했지 그 누가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전 볼썽사나운 괴물이었습니다.

샤아 2014-02-20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끔찍한 악귀였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00:23   좋아요 0 | URL
좋은 일 하시는 샤아 님이 악귀면 이명박은.. 음....

samadhi(眞我) 2014-02-20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와닿는 시네요. 제가 손대는 것마다 망가지거나 부서져서 제스스로 "마법의 손" 이라며 돌려 말하고는 하는데.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00:24   좋아요 0 | URL
황지우 시인만한 사람도 없죠. 황지우 시에는 어떤 처절함이 있는 거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00:24   좋아요 0 | URL
황지우 시인만한 사람도 없죠. 황지우 시에는 어떤 처절함이 있는 거 같습니다.

samadhi(眞我) 2014-02-21 08:37   좋아요 0 | URL
당장 시집을 주문해야겠어요. 제 수준이 워낙 바닥이라 시를 잘 안 읽는데. 이해하기 쉬운^^ 시 몇 편 정도만 좋아하고.

수다맨 2014-02-20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영상이 참 가슴 저리게 다가오네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이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일 저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손잡는 것 이상의 접촉을 보여주었으면 이 감동이 격감됐을 것도 같구요. 오로지 눈빛 하나로 여자의 흉터, 그 속에 담긴 온갖 복잡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군요.

2014-02-21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1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엄동 2014-02-2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 좋네요.
첫 세줄에 가슴이 먹먹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05:53   좋아요 0 | URL
저 시 좋죠 ? 좋아요.... 정말 먹먹하죠. 가슴을 후벼하는 힘이 있습니다.

유다 2014-02-22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억. 저 동영상 공연 제가 뉴욕살 때라 모마에서 직접 봤는데 영상은 뭔가 있어보이네요...; 걍 사람들 십 초만에 힐끔 보고 지나감. 거의 병풍;수준...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2 05:52   좋아요 0 | URL
아니 유다 님 뉴요커셨군요 ? 전 아마 그때 군산커'였을 겁니다...
 
화양연화 (1disc) - [초특가판]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돌의 흉터.

 

 

 

 

 

 

 

 

한 여자를 사랑했다. 부모는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가난한 누대의 맏딸'이었다. 그녀와 함께 그녀가 사는 달동네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를 수록 성한 나무는 없다고, 근사한 놀이터와 장난감이 없는 달동네 아이들에게는 나무가 놀이터이자 장난감이라고, 그래서 가끔은 친구 같다고, 내 몸이 나무에 비해 너무 성해서 부끄럽다고. 운동권에 몸담았던 그녀는 치열하게 살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녀 말마따나 마을이 가까울 수록 나무엔 흠집이 많았다.  가지는 꺾이고 나무 기둥 곳곳은 움파였다. 어떤 나무에는 칼로 나무를 도려낸 낙서도 있었다. 소년 A가 소녀 B를 사랑한다는 낙서이거나, 소녀A가 소년B를 짝사랑한다는 낙서였다. 저 나무는 얼마나 오랫동안 저 낙서를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또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해야 할까 ? 가파른 기슭 끝에 여자네 집이 보였다.  낡고 좁고 초라했다. 몇 년 후, 우리는 헤어졌다.  오래 사귀었으나 이별은 승냥이의 걸음보다 빨랐다. 그리고 또다시 몇 년 후, 문득 그 동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그 동네를 향했다. 나무는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을이 가까울 수록 흠집이 많던 나무는 여전히 흉터가 많았지만 싱싱하고 울창했다. 조금 더 올라가자 칼로 새긴 낙서를 품은 나무가 보였다. 그래, 바로 그 나무였다. 세월이 흐른 만큼 살이 돋았으니 나무에 새겨진 문신은 사라졌을까 ?  다가가 꼼꼼하게 살폈으나 칼로 새긴 흉터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한없이 슬퍼졌다. 왜 슬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슬펐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그녀가 살던 집을 향해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나는 방금 내가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로 새겨진 낙서를 품은 나무는 아까 그 나무가 아니었다. 내 앞에 있던 나무는 몇 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음각으로 새겨진 낙서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 그때 깨달았다. < 흉터 > 는 느리게 자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흉터는 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꽃은 피고 지지만 흉터는 달팽이보다 느리게 조금씩 조금씩 자랐다. 상처는 빠르게 봉합되면 흉터가 남지 않지만 흉터는 오랫동안 아물지 못하고 부풀어올라 이음매를 남긴다. 그 나무를 보다가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흉터였다. 아주 오랫동안 그녀 때문에 아팠다. 아물지 못하고 부풀어올라 흉터로 남은 여자. 그 나무 밑에 있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옹이가 빠져서 생긴 나무 구멍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무슨 말을 했는가는 당신에게 말하지는 않겠다.

 

나는 그해 부산영화제'에서 기술 스텝으로 일을 했다. 영화제 기간 중 늦은 밤, 부산 다찌집에 들렸다가 왕가위 감독을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합석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그에게 달동네와 흠집이 많던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무 구멍 속에다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말도 했던 것도 같다. 왕가위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몇 년 후, 왕가위는 < 화양연화 >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왕가위 감독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였다. 저 처연한 슬픔은 " 느림 " 에서 파생된 아름다움이었다. 느리다는 것은 슬픈 것이니깐, 뒷모습은 늘 느리니깐,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아주 오래 묵힌 된장 같으니깐.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을 찾는 장면에서 나는 낮게 소리쳤다. " 개새끼... 내 이야기를 훔쳤군 ! "  움파인 나무에 대고 속삭인 장면은 어느새 돌벽 구멍에 대고 속삭이는 양조위로 바뀌었다.

 

화가 난 나는 극장을 박차고 나와 홍콩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웨이 ? " 그의 탁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나는 분을 삼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오갱끼데스까 ? 와따시와 갱끼데스.... " 그는 내 심중을 알아채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봐, 친구 ! 이 영화 속 주인공은 곰곰발 자네도 아니고 장만옥도 아니야. 물론 양조위도 아니라네. 실제 주인공은 바로 흉터'야. 나는 흉터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네. 돌의 흠집 말이야. 사람은 흉터가 생기면 부풀어오르지만 나무는 흉터가 생기면 파인다네. 돌도 마찬가지야. 나는 벼린 것들로 도려진 흉터를 메우고 싶었지. 흉터를 치유하고 싶었거든...... "  감독의 말을 듣고 나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게 되었다. 양조위는 돌 속에 비밀을 묻는다. 돌은 바람과 달라서 입이 무거운 법, 그가 토해놓은 비밀은 천년만년 봉합되리라. 

 

돌의 흉터를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아물지 못하고 부풀어올라야지 저토록 단단한 흉터가 될 수 있을까 ? 언제부터인가 나는 < 상처 > 라는 단어가 그닥 슬프게 와닿지 않았다. 상처'라는 말에는 " 지금의 아픔 " 과 통증만 있을 뿐 오랜 세월의 흔적은 없었다. < 흉터 > 라는 말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흉터는 느리게 자라는 통증이니깐, 흉터는 선명한 불행이니깐, 나는 불행한 것과 느린 것을 사랑하니까.

 

■

 

이상한 꿈을 꿨다. 한 여자가 내게 와서 수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그 소문이 아무래도 당신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 여자는 슬픈 듯 잠시 바닥을 보더니 내게 뜬금없이 미안하다는 소리를 남기고는 이내 사라졌다.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라일락 향이 코끝을 어지렵혔다. 꿈에서 깼으나,  잔향은 그대로 남았다.

 

■

 

하, 수상하여 오늘 그 동네를 가보았다. 마침 여름 수해를 대비하기 위한 산림 정비가 한창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비밀을 고백했던 나무는 베어져서 밑둥치'만 허옇게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 나무는 라일락이었다.

 

 

 

 

FIN.

 

 

 


 

 

왕가위 영화에 대한 생각(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왕가위 영화는 < 동사서독 > 이다. 사실 완성도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질이 떨어지는 영화이지만 나는 이 영화가 좋다. ▦ < 아비정전 > 은 마흔 번 넘게 보았다. ▦ 느리다는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 화양연화 > 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빠르다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즐거움에 속한다. 그러므로 < 느림 > 의 반대말은 < 빠름 > 이 아니다. ▦ 내가 < 해피투게더 > 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장첸이 양조위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포옹하는 씬'이다. 이때 화면은 버퍼링 노이즈'처럼 잠시 멈춘다. 그 장면을 좋아했다.  ▦ 이 세상에서 흰 빤스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는 장국영이었다. < 아비정전 > 과 < 해피투게더 > 를 보다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불알이 큰 놈은 흰 빤스가 어울리지 않는다.  ▦ 장국영이 자살했을 때, 나는 섹스에 열중하고 있었다. 섹스를 좋아하니깐. ▦ 내가 생각하는 왕가위 영화 중 최악은 < 2046 > 이었다. 자기 복제 차원을 떠나서 자기 표절에 가까워서 그 이후로는 그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 왕가위는 악전고투 끝에 영화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수록 이상하게 좋은 영화를 만든다. < 아비정전 > 이 그렇고 < 동사서독 > 이 그렇다. ▦ 지금 방금 생각났는데 가장 최악은 < 동사서독 리마스터링 > 이었다. 색 보정을 보강하고 불친절한 서사를 친절하게 재배치했는데 마치 알타이 고분 벽화가 희미하다고 해서 노루표 페인트로 덧칠을 하는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맙소사, 정말 끔찍한 영화였다. ▦ 한때 나는 매점 아가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 아비정전 > 때문이었다. ▦ < 타락천사 > 와 < 중경삼림 > 이란 영화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가위가 별 걱정없이 쉽게 촬영을 끝냈으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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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2014-02-18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흑흑

곰곰생각하는발 2014-02-19 03:10   좋아요 0 | URL
유령이라 좋은 이름이군요.

유령 2014-02-19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그 나무구멍에서 오백년을 살은 넋입니다. 어느 날 당신이 속삭인 말을 들었지요 후후.

곰곰생각하는발 2014-02-19 16:48   좋아요 0 | URL
그럼, 그때 내 꿈속에 나온 분이 바로 당신이셨군요 ? 후후

엄동 2014-02-1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누군가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서성거리고 기웃거리곤 합니다
강도하 만화에서 말했듯.
이별 후 잃는건 사람만은 아니니

이 글을 읽고 나니
그닥 설레지도 아리지도 않았던
흉터"란 단어가 달리 느껴져요
부르튼 아픔" 처럼 따꼼따꼼하게

곰곰생각하는발 2014-02-19 17:03   좋아요 0 | URL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장소를 공유한다는 것이 됩니다.
흉터'가 한자 조합 같지만 사실은 순수이말이에요.
여기서 ~터' 가 바로 ' 장소 ' 를 나타냅니다.
낚시터, 놀이터 할 때 그 터죠.
그리고 왜 우리 흉터를 흔히 흠집이라고도 하는데
~집'도 보면 자리를 의미합니다.
상처도 마찬가지잔하요. 처가 바로 곳 처' 라는 한자 뜻이니...

사랑은 본질적으로 상처요, 흉터요, 흠집이라고 생각하는 저에게는
사랑과 자리'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samadhi(眞我) 2014-02-19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양연화 비디오테이프를 싸게 사려고 발품 좀 팔았는데 티비 없이 십여년 사는 동안에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19 17:04   좋아요 0 | URL
저도 티븨 안 봅니다만... ( 밥 먹을 때만 봄 )
안 보면 안 보게 되더라고요. 안 보니 차라리 편합니다...

samadhi(眞我) 2014-02-20 11:00   좋아요 0 | URL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크고 선명한 화질로 된 야구중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00:26   좋아요 0 | URL
진짜 그르네요. 하지만 보고 싶은 경기할 때는 무조건 호프집 가서 봐야죠.
야구는 집에서 보는 것보다 술집 가서 맥주 마시면서 보아야 함...

미미달 2014-02-2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해피투게더를 다시 보고 싶어졌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1 00:28   좋아요 0 | URL
전 어제 다시 보았는데 영화 처음 부분이 좀 야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극장에서 보았을 때는 삭제를 했나 ?! 배드씬이 안 나왔던 거 같던데...ㅋㅋㅋㅋ
제가 동성재 반대를 외치는 사람은 전혀 아닌데 사실 남자이다 보니 동성애 배드씬이 나오면
좀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뭐 명불허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