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레히트와
서사극
많은 사람들은 문학 그 중에서도 희곡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희곡, 특히 비극은 카타르시스(부정을 정화한다)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연극의 상연이 두 가지 의미로 카타르시스라고 이해되었다. 첫 째로, Tragedy가 ‘염소의 노래’를
의미하듯 연극 축제 기간에 염소와 같은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써 도시의 부정을 ‘씻고자 하였다. 또한, 관객들은 양 극단의 성질을 지닌 상황이나
인물들이 대립하여 강렬한 대립으로 끝나는 결말과 그 긴장이 해소되는 것을 보며 개운한 감정을 느끼게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온 정통 연극은 관객들이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는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관객들은 배우의 사실적인 연기를 보면서 극 중 인물들의 고통에 슬퍼하고 아파하였다. 일례로, 오이디푸스의
넘치는 자신감도 결국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힘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는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서
사람듩은 거대한 운명의 힘과 대면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오만한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나약하지만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브레히트는 ‘소격효과(낯설게하기)’를 통해서 1)
관객들이 등장 인물의 감정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고 오히려 극중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의도하였다. 2) 또한, 관객들이 극을
자연스럽고 있을 법한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낯선 시선으로 극에 내포된 부조리함과 모순을 파악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는 매 막이
시작할때마다 자막으로 줄거리를 알려주어서 기대감과 환상성을 소멸시키고, 등장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불러서 관객들이 보고
있는 것이 ‘사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연극’일 뿐임을 강조했다. 3) 즉,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심미주의에 반대하였다.
대신, 관객들이 사회의 모순을 담고 있는 연극을 비판적으로 관람한 후, 사회적 모순을 변혁시키는 행동으로 이어가기를
기대했다.
2.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낯설게 바라보기
브레히트는 관객들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ler>>의 주인공 억척어멈을 비판적으로 보아줄 것을 기대했다. 억척어멈은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 전사자들의 소지품을 모아서 군부대에 되파는 종군상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있는
농부에게 천 한 쪽도 내주지 않아 전쟁터의 하이에나라고 불리운다: “나한텐 베가 없어요. 내가 가지고 있던 붕대는 연대에 다 팔았어요.
장교셔츠를 찢어 붕대로 쓰기는 싫어요. (...) 난 아무것도 내줄 수 없어. 그 사람들은 돈을 내지 않아. 왜냐면 돈이 없으니까”(5막).
또한, 자신의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을 무릎쓰는 탐욕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한테 평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요. 난 방금 재고품을 새로 사들였는데”(8막).
사실 <<억척어멈>>은 30년 전쟁을
극의 배경으로 삼지만, 전쟁과도 다름 없는 자본주의적 상황을 비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개인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관객들이 억척어멈의 역할에 감정이입을 한다면 그녀의 억척스러움이 전쟁터에서 피할 수 없고 자연스러운 대응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극을 비판적으로 거리두고 바라본다면 비록 사회적 현실이 억척어멈을 자신의 생존밖에 모르도록 만들었을지라도 자신의 사회적 모순에
무지하고 체제유지에 협조만 하는 그녀의 태도 또한 비판의 될 수 밖에 없다.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인물인 억척어멈은 전쟁터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장사를 한 덕분에 밥먹을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흥정과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세 자식들을 잃는다는 것에서 억척어멈이 스스로의
자본주의적 탐욕의 피해자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브레히트는 좁고 이기적인 사랑을 비판한다.
억척어멈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억척스러울 수 밖에 없던건 자식들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카트린은 총살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농부의 아이들과
성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북을 친다. 자기가족중심적인 좁은 사랑을 보이는 억척어멈에게 군대 상사는 말한다: “전쟁으로 먹고 살려면
전쟁에 갖다 바치는 것도 있어야지”(1막). 하지만 카트린은 직접적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이타적인 사랑을 실현한다. 브레히트는 카트리나라는 인물을 통해서 죽음도 불사한 이타적인 사랑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억척어멈의 이기적이고 속좁은
사랑을 강렬하게 대비시킨다. <억척가>에서 추선이 북을치며 죽는 장면에서 이 극의 긴장 역시 최고도되었다.
사는 것은 ‘생존’하기위한 몸부림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사천가>에서 ‘착하게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노래했던 이자람은 이번 <억척가>에서 ‘인간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를 노래한 것 같다.
3.
<억척가>(판소리)가 서사극의 효과를 극대화
많은 관객들은 그녀가 비인간적인 전쟁터에서 자식들을 모두 잃는
것에 연민을 가진다. 억척어멈이 말한대로 그녀가 ‘억척’스러울 수 밖에 없는 건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사회 현실과 가난한 사람의 비참한 처지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억척이 필요해요. (...) 왜냐하면
그들에겐
전망이 없으니까. 서로 얼굴을
마주보려고만 해도 그들은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 그것도 억척이 필요해요. 그들이 황제 한 명과 교황 한 명을 견뎌낸다는 사실도
엄청난 억척을 증명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6막).
따라서 사람들은 억척어멈을 생존하기 위해 억척스러움을 보이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계급의 인물이라고 보기에, 아무리 그녀에게 비판적인 요소가 있을지라도 그녀의 비극적인 처지에 공감하고, 영웅시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억척어멈>>의 첫 공연과
이후의 수많은 공연들에서 연출가 뿐만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억척어멈에게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비평가 야코비(Jahanness
Jacobi)는 “억척어멈은 개인적인 불행에 처할 때, 즉 분노나 경멸이 아니라 공감과 눈물을 자아내는 인물로서 감동적. 가엾은 B. B.”라는
평을 하였다. 아무리 브레히트가 서사극 ‘이론’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무대화시키는 것의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듯 하다.
실제로 <억척가>를 보러가기 전 브레히트의 의도대로
무대화하는 것에 실패한 수많은 <<억척어멈>> 공연 사례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 판소리를 접해본 경험이 없던 나는
<억척가> 역시 恨(한)이라는 정서로 억척어멈의 비극적인 상황을 극대화하여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억척가>를 보는 내내 느꼈다. 아마 브레히트가 판소리를 알았더라면, 주저없이 판소리로 <<억척어멈>>을
무대화시키지 않았을까-하고.
판소리는 <<억척어멈>>이라는 서사극을
브레히트의 의도를 살려내기에 적합한 형식이었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서사자가 되어 전체 극을 이끌어나가는 동시에, 다양한 등장인물을
연기한다. 서사자의 해석을 통해서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에게 자연스럽게 공감하기보다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쉬워진다. 이전의 연출실패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브레히트와 같이 비극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개인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개인이 상황의
희생물로 표현되어 극이 비장하고 슬프게 연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판소리의 놀음의 유쾌함, 고수의 장단에 맞춘 과장된 연기를 통해서 인물의
부정적인 면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다른 브레히트의 작품을 판소리로 옮긴
<사천가>를 본 프랑스인은 말했다: “우리가 이 극을 무대화시킨다면 아마도 비장하기만 했을 거예요.” 이자람의 설명처럼 판소리는
“음악이자 문학이자 서사자의 연극”이다. 또한 “왕조시대에 테크닉을 가진 소리꾼들이 자기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자신의 의견을 섞어서 이야기하던 한
판 놀이였고, 한 광대가 소리를 하고 나면 다른 광대가 또 살을 붙이는 수 백명의 소리꾼들의 자유로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유쾌함과
비판적인 시선을 갖춘 종합예술 판소리는 항상 머리속으로 떠올리고 상상만 해야했던 브레히트의 서사극이론을 놀라울정도로 잘
구현한다.
4. <억척가>와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차이
배경의 차이에 맞춘 사소한 변형을 제외하면,
<억척가>와 <<억척어멈>>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에서 나타난다. <<억척어멈>>에서는
억척어멈이 자식 셋을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종군상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을 다짐한다: “나 혼자서라도 마차를 끌 수 있으면 좋겠다. 잘
되겠지. 마차 안에는 물건도 별로 없으니까. 난 다시 장사를 해야 돼”(12막). 이를 통해 브레히트는 자신 가족의 비극적 결말이 돈과 장사의
집착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끝까지 장사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억척어멈을 비판하고자 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사회의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브레히트는 맑시스트로서 사회 속의 모순을 인지한 개인의 행동을 중시했기에 관객들이 억척어멈의 모순적인 행동을
보고난 후, 극장을 나가서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적 사회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다양한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브레히트가
억척어멈을 반영웅(anti-hero)로 연출하고자하는 의도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반면, <억척가>는 억척어멈이 셋째 딸 추선이를
잃은 후 노래한다:
“무거운 달구지 끌고 몇 날을 걸어 어디를 갈거나 목 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낱알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청하며 이렇게 가다보면 당도할 길이 있을 법도 한데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 알 수
없는 인생이야.
이제껏 끌고 온 이 달구지는 누구의 무덤이냐 용팔이 숟가락, 정직이 숟가락, 추선이 숟가락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나 이건 뉘집 귀한 아들 군화냐, 이건 뉘집 에비 투구냐, 이것들이 내게
다 무슨 소용이냐, 내가 누구인지 너무 오래
잊고 있었구나,
사람답게 살아보자 시체속에서 건져 올린 밥 한 숟가락 내 잎에 넣는 것 이제 그만하자
사람으로 태어나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자.
다시 뜨는 저 해야 이꼴 저꼴 딱 죽을 것 같지마는 살아있으니 살어야지.
귀하에 붙은 이 숨 고히
가지고 살아야지.”
나는 억척어멈의 이 변화된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인간다운 사회와 삶’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브레히트는 ‘전쟁에서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기 어렵다’며 억척어멈이
깨달음을 얻는 결말로 수정하자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다. 즉, 브레히트는 등장인물의 변화보다 관객의 변화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브레히트에게 묻고 싶어진다. 등장인물의 변화가 그리 어려운거라면 관객의 변화는 어떻게 그리 쉽게 기대하느냐고.
어찌되었건, 나는 <억척가>가 표현한 억척어멈을
통해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되었고 또 인간적으로 정의롭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번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죽을 것 같지마는 살아있으니 살어야지’라는 억척어멈의 그 말을 들으며 내 지나간 날의 잘못이라던가 앞으로 다가올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전쟁같은
현실 속에서, 어느 순간 대충 살아지는대로 살아야겠다는 내 무기력함이 너무 부끄럽고 한심해졌다. 실로, 나는 내 한 몸 생존하기 위해 독하고
억척스럽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희생시키지 않아야겠다는,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인간으로서 해야할 당연한 고민을 해야만 할 것이다.
5.
판소리의 세계화
<억척가>를 보고 나는 판소리가 한국에만 머무르기
너무 아까운, 아니 한국에서도 잊혀져가기에는 정말 안타까울정도로 소중한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것이기에 무조건 좋은것이라는 그런
자문화중심주의적인 마음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한국의 문화적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주 접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장구소리라던가 창자의
소리에 친숙함을 느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브레히트의 의도대로 <<억척어멈>>을 무대화시키는 것의 어려움만 잔뜩
들어왔던 내가 <억척가> 공연을 통해 브레히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면, 그게 판소리라는 형식 덕분이었다면 판소리가 다른 장르들이
가지지 못한 독특한 매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판소리는 언어가 가진 음악성을 잘 표현한다. 음악극
<모비딕>을 보았을 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멜로디로 표현하는 것의 감동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그리고
<억척가>를 보기 전까지, 나는 인간의 언어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억척가>에서 둘째 정직이와 셋째 추선이를 잃고 통곡하는 이자람의 목소리는 어떤 악기도 표현할 수 없었던 인간의 통렬한 슬픔이었다.
또한, 추선이가 북을 두드리는 소리를 처음에는 진짜 북으로 표현하다가 이자람의 목소리로 ‘둥- 둥- 둥-’하고 표현할 때 어떤 북소리도 전달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느꼈다.
물론 번역의 문제는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번 LG아트센터의
공연에서는 이자람의 아니리(말)과 소리(창)이 영문 자막으로 제공되어서 번역의 문제를 좀 더 고민할 수 있었다. 일단, 번역으로는 판소리의
매력인 의성어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독특한 발성과 소리로 ‘구루루루루루루루루’하는 달구지 끄는 소리, ‘뻐꾹-뻐꾹’하는 새소리, 그리고
‘얼씨구 절씨구’하는 외침의 흥겨움 등은 번역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판소리의 매력이다. 이자람은 외국에서 공연하면 왜 억척어멈 이름을 Anna
Kim 이라고 지었는지 관객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내 팔자야 이놈의 이름을 바꿔보자… 글로벌 시대에 맞춰
영어이름이 좋겠구나… 수잔 제인 캘리 소피 아니야… 안되겠다… 내 더 이상 아이는 안 낳을 테니 안 낳아 안 나 안 나 안나 내 이름은 오늘부터
김안나로다!”또 중간에 막걸리를 나누어주는 장면에도 외국에서는 애드립을 하지 못하는 힘든 점이 있다고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많은 판소리를 듣고싶고, 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기를 바란다. 번역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단테의
<<신곡>>을 이탈리아어 음원을 들으며 운율과 음악성을 느끼는 것처럼, 판소리에서 등장인물이 바뀔때마다 소리꾼의 목소리가
자유자재로 바뀌는 것과 창자의 노래는 듣는것만으로도 사람의 정서를 자극하는 매력이 있는듯했다. 이미 나의 귀와 사고는 유럽과 미국의 연출 방식과
음악에 익숙해져있다. 그 장르들이 가지지 못하는 매력이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판소리에 있는 것 같다. 이자람 역시 자신은 판소리를 세계화시킬
의무감으로 공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가 판소리를 현대화하여 공연하는 것일까: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아주 멋진
장르니까- 우리나라 밖에 없으니까- 아주 좋은 거니까-”(이자람).
[ 2013. 10. 27.
<억척가>. LG아트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