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 우아한 열정에 박수를 !
조용필은 언제나 마지막 무대에 선다. 슈퍼스타란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는 티켓을 얻는 사람'이다. 전공투'다운 말투를 빌리자면 연예계란 마지막 끝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김연아가 실수 없이 마지막 무대를 끝마쳤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박수를 쳤다. 하지만 감동하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엔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소트니코바도 아니고 김연아도 아니었다. 아사다 마오, 언제나 그림자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한 아사다 마오. 그녀가 보여준 무대가 나는 아름다웠다. 김연아를 이기기 위해서는 " 트리플 악셀 " 을 선보여야 했는데 그 신공은 아사다 마오'가 연마하기에는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볼썽사나운 실패를 하고는 했다. 1차전에서의 철저한 실패로 인해 그녀는 순위권과 멀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연기. 바로 그 무대에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다.
그 무대는 공식적인 마지막 무대'였다. 그녀는 경기가 끝나고 빙판 위에 서서 서럽게 울었다. 저 뼈아픈 통증을 보고 있자니 모짜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의 통한이 엿보였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다. 슈퍼스타는 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지만 가끔은 슈퍼스타가 분장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막간에 등장하는 이름없는 밴드의 노래가 콘서트 가수보다 더 감동적일 때가 있다. 아사다 마오의 무대가 그랬다. 순위권에서 벗어난 그녀의 무대는 화려한 피날레가 아니라 막간'이었다. 최선을 다했다. 울루 그로스바드의 영화 < 조지아 > 에서 언니 조지아와 동생 새디'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조지아는 컨트리 가수로 성공해서 부와 인기 그리고 행복을 얻었지만 동생 새디'는 싸구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알콜중독자'가 되었다.
언니의 배려로 재기할 수 있는 무대는 몇몇 있었지만 그녀는 번번이 실패한다. 영화는 위기를 극복한 어느 무명 가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그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미덕이다. 새디'는 막간을 이용해 무대에 오른다. 왁자지껄한 이 술집에서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 이 누가 있을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슬픈 감정이 목이 메이는 지 툭툭 끊긴다. 내가 이번 피겨 스케이팅 경기를 보았을 때 떠오른 영화가 바로 < 조지아 > 였다. 나는 항상 실패한 자를 응원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면 루저를 응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가재미가 가재미를 지켜보듯이 루저가 루저를 지지한다. 나는 철저한 계급투표자'다. 성공한 서사가 아름답다고 해서 반드시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김연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지만 감동은 아사다 마오에서 발견했다.
내가 김연아 현상'에서 비판하고 싶었던 대상은 김연아가 아니다. 여론의 오지랖과 언론의 호들갑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지랖과 호들갑이 만나면 " 오호, 지들랖갑 " 이 된다. 러시아 선수에게 금메달 하나를 " 빼앗겼다고 " 분노하기에 앞서 우리가 그동안 " 빼앗았던 금메달 " 을 생각해야 한다. 88올림픽 때 종합 순위 4위와 2002년 4강 신화'가 과연 공정한 룰 속에서 진행되었는가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2006년 월드컵 한국 대 스위스 경기 때 심판의 오프사이드 반칙 판정이 맞다고 말한 신문선 해설위원이 지금까지도 괘씸죄에 묶여서 축구 해설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 국뽕의 힘 " 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 빼앗긴 금메달 " 이 억울하다면 그동안 스포츠 국수주의적 광기에 의해 억울하게 빼앗긴 외국 선수들의 승리'에도 분노해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짓만큼 꼴사나운 짓도 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이 이중잣대'가 혐오스럽다. " 된 놈 " 만 밀어주는 당신의 그 우아한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