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1~2 (리커버 특별판 + 박스 세트) - 전2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 사촌이 땅 사는 소설 " 이 흥미 없는 이유










축소지향적으루다가 ㅡ 이사를 간다는 것은 꽤나 큰 스트레스다. 마당 넓은 집에서 마당 없는 집으로, 마당 없는 땅집에서 공동 주택으로, 축소에서 협소 주택으로 이사를 하다 보니 이사할 때마다 사는 공간이 무를 깍둑 썰기 하듯 깍둑싹둑 잘렸다. 가난으로 인해 " 나으 나와바리 " 가 점점 줄어들자 급기야 내 몸의 부피를 1/2로 줄이기 위해 일일일식을 하게 되었다(라는 말은 뻥이고 헤헤헤). 


문제는 책이었다. 협소 주택에 살면서 책을 몇 천 권씩 쌓아둔다는 것은 사치였다. 이사 갈 때마다 웃돈을 요구하는 이삿짐센터 직원의 태도도 나를 힘들게 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고 자기 살점을 도려내듯 책을 대량으로 처분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책을 사는 즐거움을 중단했다.  읽을 여력이 없다기보다는 책을 책답게 전시할 공간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요즘은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예전에는 정독이라기보다는 속독에 가까웠지만, 첨언하자면 속독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모호한 속도로 책을 읽었다면, 지금은 정독이라기보다는 지독(遲讀)에 가깝다. 


요즘은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 를 반 박자 느린 호흡으로 읽고 있다. 그 전까지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 속독  뒤돌아볼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은 천천히 읽다 보니 읽기를 잠시 멈추고 읽었던 내용을 곱씹어보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다 보니 읽자 마자 잊어버리는 망각은 사라지고 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문득 "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을 잃어버린다 " 라는 인디언 격언이 떠올랐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인디언은 잠시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왔던 길을 오래 바라본다고 한다. 말을 타고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영혼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걱정 때문이란다. 


그래서 인디언은 자신의 영혼이 자신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기다린다는 것. " 힘내, 내 영혼 ! "  속독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  너무 빠른 속도로 읽으면 내용을 잃어버린다.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 를 읽는다는 것은 행복한 경험이다.  이 행복감은 철저하게 속물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인데,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행복을 느꼈던 이유는 돈키호테의 삶이 불행했다는 데 있다. 육체는 쇄락하고 정신은 오락가락하다 보니 명색이 귀족이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쥐어터지기 일쑤다. 말이 좋아 방랑이요, 모험이지 알고 보면 정신줄 놓은 병자의 노숙 생활인 셈이다. 


내가 사랑한 문학은 모두 불행한 자의 서사'였다. 마담 보봐리, 안나 카레니나, 폭풍의 언덕, 백경, 죄와벌 등등에서 불행하지 않은 문학 속 주인공은 없다. 우리가 문학에서 위로를 받는 까닭은 그들이 불행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을 읽는다는 행위는 결코 고상한 짓은 아니다. 오히려 속물 근성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독자는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어도 남이 잘되는 꼴을 엿보는 소설은 읽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남이 잘될 때 아, 배아파 ! 그럴 때마다 나보다 더 불행했던 문학(속 인물)으로 도피하게 된다. 


타자의 불행을 다루는 것이 바로 문학의 본질이다. 1800페이지에 육박하는 << 돈키호테 >> 는 집요하게 돈키호테의 불행을 다룬다. 낄낄거리며 읽다가 어느 순간에 그의 불행 앞에서 숙연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 구슬 같은 경험 " 일 것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 압도적 걸작 " 이다. 근대 소설의 탄생을 알린 이 소설은 놀랍게도 현대 소설의 미학적 개념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소설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선 작품이다. 읽을 때마다 놀라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놀라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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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1-01-29 18: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짜 공감!! 책은 어디로 이사가도 부담스러워요. 저도 이사 갈 때 마다 처분하고... 이젠 전자책에 매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ㅎㅎ 주인공이 불행한 이야기는 읽기 힘들던데요. 저는...

곰곰생각하는발 2021-01-29 18:49   좋아요 2 | URL
책 많은 사람들의 뭐.. 행복한 고민이랄까요.. ㅎㅎ
그런데 고전 문학은 대부분 주인공들이 불행하지 않나요 ? 유머 소설이 아니면 대부분 불행하더라고요.. 보봐리 부인, 차탈리 부인, 테스, 히스클리프, 롯테, 베르테르, 라스콜리니코프, 로캉탱, 등등등등등... ㅎㅎㅎㅎ

막시무스 2021-01-29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캬! 타자의 불행을 다루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는 말씀은 카톡에 메인 메시지로 남겨두고 싶네요!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건 주말되십시요!ㅎ

곰곰생각하는발 2021-01-29 19:16   좋아요 4 | URL
저의 ˝ 문학에 대한 정의 ˝ 입니다. ㅎㅎ
개인적으로
역사는 세계의 불행을 압축하는 학문이고,
문학의 개인의 불행을 확장하는 학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라로 2021-01-30 0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늘 적당한 길이의 곰발님 글 좋아요!! 저는 소설이나 문학작품을 저대로 접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저 어제 퐉 질렀는데 이 글을 먼저 읽었다면 어제 안 질렀을 지도, 아닐지도, 암튼, 지르고 맘이 불편하긴 했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 저거 또 보는 순간 검색! 그런데 금가루 날린다고 해서 일단 멈춤. ^^;; 저 돈키호테 넘 좋아합니다. 맨 오브 라만차 뮤지컬도 넘나 좋아하고요. 곰발님도 좋아하신다니 괜히 기분 좋아. ㅋ

곰곰생각하는발 2021-01-30 15:25   좋아요 1 | URL
글이 너무 길어도 실례더라고요. ㅎㅎㅎ 그래서 길면 나눠서 올립니다. 같은 주제로 여러 번 글을 쓰는 경우도 그런 경우.

하여튼, 스페인어 제대로 알면 < 돈키호테 >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유희가 상당하거든요.

가넷 2021-01-30 0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전에도 거의 10년 가까이 지냈던 방을 떠나서 이사를 할때 너무 힘들었어요 책 처분한다고. 그래도 책들이 많이 남았지만, 웃돈을 요구받지는 않았죠. 책이 무겁더라도 그것 말고도 별로 옮길 것도 없기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2년전 일인데 다시 책이 상당히 늘어버려서 또 걱정이네요. 이사해야 되는데...^^;;;

곰곰생각하는발 2021-01-30 15:27   좋아요 1 | URL
투덜투덜대시더라고요. 책이 많아서 인부 한 명 더 써야 한다... 즉, 이사 비용 더 달라는 거잖아요. 한편 이해는 갑니다. 책 짐 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무게도 많이 나가고, 또 풀어서 다시 진열해야 하잖아요. 제가 인부라도 질색일 것 같긴 합니다...ㅎㅎㅎ

꼬마요정 2021-01-31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발님 글을 읽으니 저도 천천히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읽을 땐 제 상황이 꼬여 있어서 일도 안 하고 망상에 빠진 나이 드신 분이 재밌기도 화딱지 나기도 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간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때 전 정말 삐딱했어요ㅠㅠ) 책표지가 자꾸 예쁘게 바뀌어서 다시 사고 싶지만 말씀처럼 둘 데가 없어요. 슬프네요.

오늘도 배워갑니다. 참,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의 드니즈나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벳은 나름 행복한 주인공들 아닐까 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21-02-01 20:30   좋아요 1 | URL
저도 이번에 이 책 세 번째 읽었습니다. 처음은 중학교 때 축약본으로, 두 번째는 이 책을 샀을 때, 그리고 몇 년 지나서 지금. 볼 때마다 관점이 조금 달라지더군요. 그전까지 희극으로 보았다면 이번에는 비극의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으니 화아아악 와닿습니다. 돈키호테가 예수처럼 느껴져요.. ㅎㅎㅎㅎ
 









                                        


허투루 버릴 문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 :











허투루 버릴 문장 하나 없다는 것 






1  김훈과 코맥 메카시


김훈의 << 칼의 노래 >> 를 읽었을 때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황홀했다. 아, 이런 문장으로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한국 문학에 벼락 같이 쏟아진 축복이라는 찬사가 납득이 갔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심도 품었다. 장편소설보다는 영웅을 노래한 대서사시에 가까운 형식을 내내 유지할 수 있을까 ? 나는 그가 언젠가는 밑천을 드러내어 결국에는 뽀록이 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코멕 매카시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만연체로 쓰여졌다(핏빛 자오선, 1985 / 모두 다 예쁜 말들, 1992 / 국경을 넘어, 1994 / 평원의 도시들, 1998).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되면 느닷없이 쉼표를 찍고는 문장을 이어가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젊은 시절의 작가가 독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욕심을 내다 보니 문장이 길어지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내공이 쌓이고 나면 여유가 생기는 법. 코맥 매카시의 후기작인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5 >> 와 << 로드, 2006 >> 에서는 문체가 바뀌어 미니멀리즘을 지향한다. 김훈의 << 칼의 노래 >> 는 코맥 매카시의 후기작을 닮았다. 무슨 뜻이냐면  :  김훈은 인생 마지막에 썼어야 할 작품을 너무 일찍 선보인 것이다. 내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최근 작 << 달 너머로 달리는 말, 2020 >> 은 뽀록의 정수였다. 그는 유리 공예 공장의 숙련된 노동자처럼 문장 속에 후카시를 작뜩 불어넣어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의 폼생폼사가 남루해 보인다. 허투루 버릴 글자 하나 없는 문장이지만 이상하게도 정이 안 간다. 김훈의 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허투루 버릴 글자 하나 없는 문장이 반드시 훌륭한 문장은 아니구나. 인간의 희노애락을 다루는 소설에서 아름다운 문장이 반드시 좋은 문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원빈의 잘생긴 얼굴이 다양한 배역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감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과 같다. 






2 공지영과 박완서


자신이 쓴 문장에 대하여 자신이 없는 작가는 디테일이라는 이름으로 사족을 붙이기 마련이다. "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다 " 라고 쓰면 될 것을 굳이 "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너무 사랑했다 " 라고 강조한다. 그래도 그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너무 미치도록 사랑했다 " 라고 고치다가 성에 안 차서 "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너무 미치도록 죽을 만큼 허벌나게 환장할 정도로 사랑했다. 사랑한다, 미안하돠 ~ " 라고 쓴다. 상황에 도취된 나머지 지지리궁상으로 빠지는 대표적인 작가가 공지영이다. 사랑에 대해서 구구절절 쓰는데 그럴수록 구질구질하다. 


공지영은 < 구구절절 > 과 < 구질구질 > 을 분간할 능력이 없는 작가'다. 그러다 보니 구구절절하지만 결국에는 구질구질한 러브-스토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엘리트 교수와 피에 굶주린 사형수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는 구질구질한 신파의 끝판왕이었다. 술에 취해서 밤에 쓴 연애 편지 같았다. 이 세상의 모든 초고는 쓰레기이듯이(헤밍웨이), 술에 취해서 밤에 쓴 연서도 눈 뜨고는 못볼 신파에 불과하다. 아, 이렇게 써도 소설이 되는구나. 아따, 참......허벌나게 짠허요.   반면에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문장에 대하여 확신을 가진 소설가다. 


그는 << 그 남자네 집 >> 에서 이 애틋한 첫사랑 고백 장면을 "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 는 단순한 문장으로 생략한다. 이 문장에는 감정의 잔여가 없다. 나는 첫사랑을 구슬(주옥珠玉이 아닌)로 환유한 작가의 솜씨에 화들짝 놀랐다. 비싼 옥은 아니지만 예쁜 구슬.  예쁘지만, 잃어버려서 속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깝지는 않은 구슬.  예뻐서 모은 구슬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버려지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첫사랑은 그런 구슬 같은 것이 아닐까 ?  만약에 작가가 첫사랑을 구슬 대신 주옥 같은 보석으로 환유했다면 이 걸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그해 겨울은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여자가 첫사랑 남자에게 자신의 결혼 청첩장을 건네는 장면이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 앞에서 남자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_ 라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다가 격렬하게 흐느껴 울고, 여자도 따라 운다. 속물과 순정, 그 어딘가에 있을 소설 속 " 나 " 의 심정은 매우 복잡하다.  공지영 작가라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는,  아리송하지만 매우 상투적인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박완서는 질척거리는 감정의 잔여 없이 냉정하게 묘사한다. 황홀할 지경이다.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은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예쁘고 소중하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아깝지는 않은 구슬처럼 여자는 격렬하게 흐느껴 우는 남자를 보며 함께 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를 따스하게 포옹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여자의 모순된 감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은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  울지만 포옹하지는 않는 태도에 대하여 여자는 학교 졸업식 날 서럽게 우는 아이의 마음과 같다고 고백한다. 여자는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지만 끝끝내 가슴 한켠에 부채감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첫사랑 남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에서 여자는 우는 남자를 포옹한다. 그때 하지 못했던 것을 애도라는 이름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비로소 여자는 그 남자에 대한 부채감에서 해방된다. 



나는 그의 어깨가 요동치는 걸 보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를 보듬어 내 품안에 무너져 내리게 하고 싶었다. 그때 그가 바란 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위안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감추고 있는 건 지옥불 같은 열정이었다......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불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   나는 박완서 작가가 칠순 나이에 첫사랑에 대한 소설'을 썼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올드한 나이가 아닐까 ?  하지만 내 판단은 틀렸다. 이토록 새련된 사랑 이야기라니.  내가 이 소설을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다. 박완서 문학의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강박적으로 묘사하는 레몬향 방향제 냄새에 질려버린 나는 박완서 작가가 다양하게 흝뿌려놓은 냄새에 빠지곤 한다. 밥 짓는 냄새, 젖은 흙 냄새, 카바이드 냄새, 흰 라일락 냄새. 그리고 간고등어나 꽁치의 비린내도 맛 볼 수 있다. 


식물과 음식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박완서를 능가할 한국 작가는 없다. 굳이 해외 작가에서 찾는다면 마르셀 프르스트 정도 ?  만약에 내 이웃 중에서 이 소설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부럽다구요,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축복이다. 당신에게는 아직도 달콤한 초콜릿 과자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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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1-22 12: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글 읽으며 미소 짓고 눈물 핑 돌고 막 그랬어요. 아 놔~~.

곰곰생각하는발 2021-01-22 13:53   좋아요 2 | URL
박완서 작가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허투루 사용한 단어 같지만 나중에 연결하다 보면 매우 적확한 단어 사용이라는 것을 볼 수 있죠. 구슬, 학교, 포옹.... 이게 다 서로 연결이 되잖아요. 기똥찬 문학입니다. 읽는 내내 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 물론, 저는 이 작품을 오래 전에 읽었지만, 새로 단장을 해서 기쁜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네요....작가가 구슬 같다, 라고 쓰는 순간, 게임 오버였습니다.

scott 2021-01-22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밥짓는 냄새 흙냄새 ㅜ.ㅜ 그리운 작가님

곰곰생각하는발 2021-01-22 13:55   좋아요 2 | URL
현대 작가의 작품에는 없는 게 박완서 문학에는 있습니다. 현대 작가들이 주로 향기에 집착한다면(사실 향기도 아닌 방향제 냄새 같은)박완서 문학은 냄새가 매우 다채로워요. 읽다 보면 정말 그 냄새를 추억하게 된다는....

막시무스 2021-01-22 16: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부끄럽게도 최근에 들어서 엄마의 말뚝으로 박완서선생님을 처음접했습니다! 책을 읽고 표현할 수 없는 뭔가에 놀라고, 대단하다는 추상적 느낌이 압도했는데 곰발님의 글을 읽으니 그 느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신파조일거라는 편견을 왜 가졌는지 죄송할 따름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선생님 타계 10주년을 즈음해서 작품을 좀 더 읽을수 있는 동력을 얻은것 같아요!ㅎ 즐거운 주말되십시요!

곰곰생각하는발 2021-01-23 08:56   좋아요 0 | URL
저도 똑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순애보와 신파, 그 특유의 애상이 지배할 것으로 보았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오히려 현대 작가의 작품보다 냉정하고 날카롭고 문체는 세련되고, 문제 의식은 뛰어나고.... 깜놀의 연속이었죠. 그 경험이 새롭네요..

나와같다면 2021-01-23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뭐라고 눈물이 나지?

곰곰생각하는발 2021-01-23 08:53   좋아요 1 | URL
어, 그래요 ? 두 분이 제 글을 읽고 눈물바람이 났다고 하니.. 이번에는 내 글이 훌륭했던 것으로 결론 !
 











그 사람에서 그것으로 !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황당할 정도로 지나치게 높아져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그에게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다. 아예 없다. 그는 옛날 소설들에서 얼개를 가져와서는 그 이야기들을 극적인 틀에 맞출 뿐이다. 그가 들이는 노력이라고는 당신과 내가 그의 희곡을 다시 산문적인 이야기로 바꿀 때 드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ㅡ 이 주장에 대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거나 문학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주먹 쥐고 일어나 나를 향해 원 펀치 쓰리 강냉이를 털었을 것이다. " 무식한 페루의 남미 새끼 ! 네가 문학을 알아 ? " 


우우, 오해는 마시라. 셰익스피어에게 저주를 퍼부은 사람은 페루애가 아니라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니까(제임스 호그에게 보낸 편지). 평소 바이런의 인성을 쓰레기'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그가 셰익스피어를 평가한 부분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 로미오와 줄리엣 >> 에 등장하는 비약泌藥(줄리엣은 가짜 독약'을 삼켜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관 속에서 눈을 뜬다는 계획을 꾸민다)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줄리엣이 " 죽은 척하는 생태 " 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뭔 짓인가. 이런 얼어죽을 동태 같으니라구...... << 베니스의 상인 >> 은 더 가관이다. 


베니스의 재판관은 계약서에 < 살 > 만 적혀 있을 뿐 < 피 > 는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 안토니오의 살은 베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되며,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샤일록의 전 재산은 몰수하고 사형에 처한다 " 고 선언한다. 결국 샤일록은 재판관의 선처(?)로 목숨은 부지하지만 전 재산을 잃고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한다. 오, 불쌍한 샤일록 ! 이것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다. 놀랍게도 << 베니스의 상인 >> 은 히틀러 나치 시대 때 가장 인기 있는 연극이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샤일록을 연기했던 독일 배우는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법정에서 판사에게 소리쳤다. 


" 배우가 최선을 다해 연기한 것이 죄라면 유대인을 혐오하는 연극을 쓴 셰익스피어부터 무덤을 파고 그 해골을 기소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 " 이 독일 배우의 당당한 외침에 당황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이 그를 기소했기 때문이었다. 마, 마마마마많이 당황하셨세여 ? << 햄릿 >> 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 햄릿 >> 은 무대 위에 오를 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어서 어쩔 수 없이 상연이 중단된 연극이다. 해태 프로야구 김응룡 감독의 성대모사를 빌리자면 : 아 ! 오필리어도 없고, 아 ! 플로니어스도 없고, 아 ! 거투르드도 없고, 아 ! 클로디어스도 없고, 아 ! 레어티즈도 없고, 아 ! 햄릿도 없고...... 


슬래셔 무비처럼 등장하는 족족 죽으니 연극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있나. 이 연극은 등장 인물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슬래셔 무비와 닮았다는 점에서 최초의 슬래셔 대본이라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문학은 희극일 때는 결혼으로 끝나고 비극일 때는 죽음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단순하다. 이런 작품을 가장 위대한 세계 문학이라고 설레발을 떠는 것은 교양이 없는 짓이다. 바이런의 말마따나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었다. 2002년, 노벨 연구소가 주최한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책 1위는 << 돈키호테 >> 였다. 투표에 참가한 작가의 절반 이상이 이 작품을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뽑았다. 


셰익스피어에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다고 혹평했던 바이런조차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 에 대해서는 " 서사의 예술 " 이라고 극찬했다. 이 문학 작품에 붙는 " 최초~ " 라는 수식어는 찬란하다. 최초의 근대 소설,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최초의......  이 소설에는 이미 상호텍스트성, 작가의 죽음, 독자 비평과 같은 20세기 문학 개념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다. 그런데 세르반테스를 초월하는 작가가 있었다. 바로 피에르 메나르'다. 그는 << 돈키호테 >> 를 흠모한 나머지 첫 문장의 첫 글자부터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그대로 필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발생한다. 피에르 메나르가 쓴 << 돈키호테 >> 는 세르반테스가 쓴 << 돈키호테 >> 보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는다. " 우리 모두, 대문호 삐에르 메나르에게 경배를 ! " 원본보다 사본이 훌륭한 경우'다. 그런 희한한 일이 가능하냐고 ?  놀라지 마시라. 이 이야기는 호르헤 보르헤스의 <<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 라는 단편에 나오는 픽션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삐에르 메나르가 쓴 << 돈키호테 >> 를 시뮬라크르1)라고 부른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 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바로 시뮬라시옹이다. 


현대 사회는 재현과 실재의 관계가 역전되어 더이상 흉내 낼 대상인 원본이 없어서 삐에르 메나르가 쓴 < 돈키호테 > 가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가 된다. 며칠 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손창현 문학 도용 사기 사건은 보르헤스와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문학 혹은 문화 이론을 떠올리기에 손색이 없다. 그는 한국의 삐에르 메나르'다. 손창현은 2018년 백마문학상 수상작인 김민경의 << 뿌리 >> 를 그대로 필사해서 제16회 김장생 신인문학상 수상, 2020포천문학상 최우수상,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제2회 글로리시니어 신춘문예 당선, 계간지 소설미학 2021년 신년호 신인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최거를 이룬다. 


원본(김민경의 뿌리)이 한 개의 문학상을 수상한데 비해 사본(손창현의 뿌리)은 무려 다섯 개의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원본을 초월한 사본의 탄생인 셈이다. 그런데 그가 창조한 시뮬라크르-들은 문학상 공모 작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각종 아이디어 공모전, 사진전, 정책 논문 그리고 자신의 프로필마저 모두 가짜였다. 나는 이 지점에 전율했다. 그는 한갓 문학 작품이나 필사하는 필경사의 운명을 초월해서 그 스스로 시뮬라시옹 해서 시뮬라크르가 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 발현된 미학의 결정판이란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은 시뮬라시옹을 통해서 < 그 사람 > 에서 < 그것 > 으로 전환한 물성이 되었다. 이제 더이상, 우리는 그를 그 사람이라고 호명하면 안된다. 그는 " 그것 " 이다. 





덧대기    " 그것 " 은 국민의힘  중앙위원회 국방안보분과 부위원장이었으나 이번 사태로 인하여 국민의힘중앙위원회국방안보분과부위원장에서 해촉되시었다. 최은혜 국민의힘 중앙위원회 국방안보분과 간사 님께서는 페이스북을 통해 " 그것 " 이 제명되었음을 만천하의 국민의힘 동지들에게 고지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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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뮬라시옹 : 프랑스 철학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이론으로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가상실재, 즉 시뮐라크르의 미혹 속인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물이 기호로 대체되고 현실의 모사나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들이 실재를 지배하고 대체하는 곳이다. 이제 재현과 실재의 관계는 역전되며 더이상 흉내낼 대상, 원본이 없어진 시뮬라크르들이 더욱 실재 같은 극실재(하이퍼리얼리티)를 생산해낸다. 더이상 원본은 없고 어느 의미에서는 원본과 모사물의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뮐라시옹의 질서를 이끌고 나아가는 것은 정보와 매체의 증식이다. 온갖 정보와 메시지를 흡수하지만 그것의 의미에는 냉담한 스폰지 또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현대의 대중이다. 사유가 멈추고 시간이 소멸된 현대사회에서 역사의 발전은 불가능하며 인권이란 미명 아래 강요된 정보에 노출된 대중과 시뮬라시옹의 무의미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이같은 사고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지적 허무주의자, 정치적 보수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사상 체계를 만들어 가던 1960년대는 프랑스가 본격적인 대량 소비 사회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1940년대 말의 전후 복구기와 1950년대의 경제 구조 형성기를 거친 프랑스에 호황이 시작됐고 거리, 상점, 가정에 물건들이 넘치기 시작했고, 라디오와 TV가 가정필수품으로 자리 잡아 가던 즈음이었다. 넘치는 물건, 넘치는 일자리, 넘치는 이미지 앞에서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넘치는 물건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의미 관계를 맺는지를 고찰했다.


- 철학사전2009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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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 개정판
마틴 셀리그만 지음, 김인자.우문식 옮김 / 물푸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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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사람 잡는다









종종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 지성의 문화 교양을 통해서 자기계발을 하자는 주장이다. 이지성이 대표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그의 < 리딩으로 리드하라 > 라는 책을 읽다 보면 이 지성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지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지성이 그 지성이 아닌가벼.         


인문학과 성공학은 떼레야 뗄 수밖에 없는 젖은 땔감과 같은 사이'여서 서로 상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계발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지만 인문학은 대체로 인간을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볼까 ? 마르크스의 < 자본론 > 은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을 부스러기로 보고 대신 물질을 근본적인 실재라고 생각한다(유물론). 물질이 상수이고 정신은 하수다. 이수일은 변심한 심순애에게 "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더냐 ? " 라고 묻자 심순애는 아무 말도 못한다. 부끄럽구요. 하지만 유물론적 시각으로 보자면 " 응. 다이아몬드 좋아, 대빵 좋아 ~ " 가 정답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한술 더 뜬다. 인간은 하(?)고 싶어 미친 짐승이다. 정상적인 놈은 하나도 없다. 인간은 모두 다 발정난 개/돼지다. 하, 시바. 결정타는 다윈'이다.  다윈에 이르러 만물의 주인인 인간은 원숭이로 강등된다. 19세기 거대 지성 3인방은 말 그대로 인간의 얼굴에 똥바가지를 붓는다.  종합하면 " 다이아몬드에 환장한 발정난 원숭이 " 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 자기계발은 과연 가능할까 ?  다이아몬드에 환장한 발정난 원숭이에게 배울 게 뭐가 있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문학에 대하여 손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 인간은 지구의 기생충 " 이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만드는 학문이라는 데 있다. 반성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인간 본성을 계발하자는 주장은 더 악랄하게 지구의 혈관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자는 소리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자기계발서가 숭배하는 긍정심리학의 해악은 해악의 범위를 뛰어넘는 사악에 이르게 된다. 고양이라면 정색을 하며 하악질 할 판. 솔까말, 사약 한 사발 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긍정심리학의 할베이자, 신자유주의 천조국의 자랑스러운 아들 마틴 셀리그만은 " 학습된 무기력 " 이라는 개념으로 부정성을 비판하면서 " 학습된 낙관주의 " 를 장려하지만 학습된 낙관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솝 우화 < 개미와 베짱이 > 에서 여름 내내 놀다가 겨울에 식량이 떨어져 얼어죽은 베짱이의 낙천성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긍정 심리학 - 교도들은 부정성을 나쁜 것으로 인식하며 부정성 편향을 병으로 취급하지만 부정성 편향은 인간의 생존 전략이자 본능에 가깝다.  좋은 뉴스보다는 나쁜 뉴스에 눈이 가는 이유는 길 위의 토끼보다는 길 위의 뱀에게 더 집중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만약에 마틴 셀리그만의 학습된 낙관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 설마, 저 뱀이 나를 물겠어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이 대책없는 모험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다. " 설마가 사람 잡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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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내 인생 - [초특가판]
라세 할스트롬 감독, 안톤 글란젤리우스 외 출연 / 기타 (DVD)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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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의 힘











고1이었을 때 머리를 삭발한 적이 있다. 그것도 새벽 한밤중에 말이다. 면도기로 머리를 밀기 시작했는데 머리에 난 여드름(들)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에라 모르겠다, 시바. 잠이나 자자. 


다음날, 비명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니 형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명소리에 어머니가 뛰어오고 누나가 달려왔다. 비명에, 비명에, 비명을 더하니 이런 것이 아비규환이로구나. 처음에는 가족의 호들갑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거울을 보고서야 가족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면도기로 밀다가 터진 여드름 상처 때문에 머리에는 온통 피딱지가 붙었고 핏줄기는 굳어서 빨강머리 대머리 소년이 된 것이다. 피딱지 붙은 민머리를 보고 있자니 가뭄으로 인해 밑바닥을 드러낸 강바닥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찰랑찰랑한 물결을 걷어내자 드러난 것은 황폐한 자갈밭이었다. 


문제는 이 꼬라지로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  심란한 마음에 어물정거리다가 지각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 중이병-스러운 기질이 있던 나는 지각을 해도 항상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가곤 했는데 그때도 나는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서 교실은 혼란스러웠다. 지각하는 놈에게는 원 펀치 쓰리 강냉이를 선물하시는 담임도 영문을 몰라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마도 선생은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내가 미친 줄 아셨던 모양이었다. 선생이 내게 삭발한 이유를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집이 가난해서 머리 깎을 돈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매일 두발 단속을 하니 한 달에 한 번은 이발소에 가야 하는데 우리집은 그럴 돈이 없어요. " 나는 이 변명이 기가 막힌 거짓말이라 생각했는데 선생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날, 죽도록 맞았다. 개 같은 날이었다. 3교시'였나 ? 수업 도중에 교무실에서 나를 긴급 호출했다. 그 자리에는 담임과 교감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오고가는 입말을 요약하자면 교감은 내게 심리 상담을 받아보라며 조퇴해도 좋다는 선고를 내렸다. 학교를 조퇴하고 집으로 오는 길. 맑고 밝고 화창했던 한낮. 그때 보았던 영화가 바로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 개 같은 내 인생 >> 이었다. 


좋은 영화였다(그 후로도 몇 번,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그때마다 머리를 삭발했던 일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곤 한다). 그때 그 사건을 계기로 신경질적인 만큼 잔인했던 학교의 두발 단속 기준은 상당히 완화되었다. 삭발의 힘이었다. 황폐한 자갈밭에서도 내 머리는 자랐다. 사막에서는 풀 한 포기가 자라기 위해서는 자갈밭이 필요하다고 한다. 돌맹이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아침 이슬이 돌덩이를 타고 땅에 떨어져 수분을 공급하기 때문이란다. 내 인생을 " 지랄 발악 " 이라고 고백한 내 이웃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힘 내시라. 인생..... . 시발. 사실은 좆도 아니다. 






ㅡ 이 노래 듣고 힘 냅시다 !!! 

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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