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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2 (리커버 특별판 + 박스 세트) - 전2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 사촌이 땅 사는 소설 " 이 흥미 없는 이유
축소지향적으루다가 ㅡ 이사를 간다는 것은 꽤나 큰 스트레스다. 마당 넓은 집에서 마당 없는 집으로, 마당 없는 땅집에서 공동 주택으로, 축소에서 협소 주택으로 이사를 하다 보니 이사할 때마다 사는 공간이 무를 깍둑 썰기 하듯 깍둑싹둑 잘렸다. 가난으로 인해 " 나으 나와바리 " 가 점점 줄어들자 급기야 내 몸의 부피를 1/2로 줄이기 위해 일일일식을 하게 되었다(라는 말은 뻥이고 헤헤헤).
문제는 책이었다. 협소 주택에 살면서 책을 몇 천 권씩 쌓아둔다는 것은 사치였다. 이사 갈 때마다 웃돈을 요구하는 이삿짐센터 직원의 태도도 나를 힘들게 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고 자기 살점을 도려내듯 책을 대량으로 처분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책을 사는 즐거움을 중단했다. 읽을 여력이 없다기보다는 책을 책답게 전시할 공간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요즘은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예전에는 정독이라기보다는 속독에 가까웠지만, 첨언하자면 속독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모호한 속도로 책을 읽었다면, 지금은 정독이라기보다는 지독(遲讀)에 가깝다.
요즘은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 를 반 박자 느린 호흡으로 읽고 있다. 그 전까지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 속독 뒤돌아볼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은 천천히 읽다 보니 읽기를 잠시 멈추고 읽었던 내용을 곱씹어보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다 보니 읽자 마자 잊어버리는 망각은 사라지고 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문득 "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을 잃어버린다 " 라는 인디언 격언이 떠올랐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인디언은 잠시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왔던 길을 오래 바라본다고 한다. 말을 타고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영혼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걱정 때문이란다.
그래서 인디언은 자신의 영혼이 자신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기다린다는 것. " 힘내, 내 영혼 ! " 속독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 너무 빠른 속도로 읽으면 내용을 잃어버린다.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 를 읽는다는 것은 행복한 경험이다. 이 행복감은 철저하게 속물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인데,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행복을 느꼈던 이유는 돈키호테의 삶이 불행했다는 데 있다. 육체는 쇄락하고 정신은 오락가락하다 보니 명색이 귀족이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쥐어터지기 일쑤다. 말이 좋아 방랑이요, 모험이지 알고 보면 정신줄 놓은 병자의 노숙 생활인 셈이다.
내가 사랑한 문학은 모두 불행한 자의 서사'였다. 마담 보봐리, 안나 카레니나, 폭풍의 언덕, 백경, 죄와벌 등등에서 불행하지 않은 문학 속 주인공은 없다. 우리가 문학에서 위로를 받는 까닭은 그들이 불행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을 읽는다는 행위는 결코 고상한 짓은 아니다. 오히려 속물 근성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독자는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어도 남이 잘되는 꼴을 엿보는 소설은 읽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남이 잘될 때 아, 배아파 ! 그럴 때마다 나보다 더 불행했던 문학(속 인물)으로 도피하게 된다.
타자의 불행을 다루는 것이 바로 문학의 본질이다. 1800페이지에 육박하는 << 돈키호테 >> 는 집요하게 돈키호테의 불행을 다룬다. 낄낄거리며 읽다가 어느 순간에 그의 불행 앞에서 숙연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 구슬 같은 경험 " 일 것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 압도적 걸작 " 이다. 근대 소설의 탄생을 알린 이 소설은 놀랍게도 현대 소설의 미학적 개념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소설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선 작품이다. 읽을 때마다 놀라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놀라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