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투루 버릴 문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 :
허투루 버릴 문장 하나 없다는 것
1 김훈과 코맥 메카시
김훈의 << 칼의 노래 >> 를 읽었을 때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황홀했다. 아, 이런 문장으로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한국 문학에 벼락 같이 쏟아진 축복이라는 찬사가 납득이 갔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심도 품었다. 장편소설보다는 영웅을 노래한 대서사시에 가까운 형식을 내내 유지할 수 있을까 ? 나는 그가 언젠가는 밑천을 드러내어 결국에는 뽀록이 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코멕 매카시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만연체로 쓰여졌다(핏빛 자오선, 1985 / 모두 다 예쁜 말들, 1992 / 국경을 넘어, 1994 / 평원의 도시들, 1998).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되면 느닷없이 쉼표를 찍고는 문장을 이어가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젊은 시절의 작가가 독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욕심을 내다 보니 문장이 길어지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내공이 쌓이고 나면 여유가 생기는 법. 코맥 매카시의 후기작인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5 >> 와 << 로드, 2006 >> 에서는 문체가 바뀌어 미니멀리즘을 지향한다. 김훈의 << 칼의 노래 >> 는 코맥 매카시의 후기작을 닮았다. 무슨 뜻이냐면 : 김훈은 인생 마지막에 썼어야 할 작품을 너무 일찍 선보인 것이다. 내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최근 작 << 달 너머로 달리는 말, 2020 >> 은 뽀록의 정수였다. 그는 유리 공예 공장의 숙련된 노동자처럼 문장 속에 후카시를 작뜩 불어넣어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의 폼생폼사가 남루해 보인다. 허투루 버릴 글자 하나 없는 문장이지만 이상하게도 정이 안 간다. 김훈의 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허투루 버릴 글자 하나 없는 문장이 반드시 훌륭한 문장은 아니구나. 인간의 희노애락을 다루는 소설에서 아름다운 문장이 반드시 좋은 문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원빈의 잘생긴 얼굴이 다양한 배역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감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과 같다.
2 공지영과 박완서
자신이 쓴 문장에 대하여 자신이 없는 작가는 디테일이라는 이름으로 사족을 붙이기 마련이다. "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다 " 라고 쓰면 될 것을 굳이 "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너무 사랑했다 " 라고 강조한다. 그래도 그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너무 미치도록 사랑했다 " 라고 고치다가 성에 안 차서 "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너무 미치도록 죽을 만큼 허벌나게 환장할 정도로 사랑했다. 사랑한다, 미안하돠 ~ " 라고 쓴다. 상황에 도취된 나머지 지지리궁상으로 빠지는 대표적인 작가가 공지영이다. 사랑에 대해서 구구절절 쓰는데 그럴수록 구질구질하다.
공지영은 < 구구절절 > 과 < 구질구질 > 을 분간할 능력이 없는 작가'다. 그러다 보니 구구절절하지만 결국에는 구질구질한 러브-스토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엘리트 교수와 피에 굶주린 사형수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는 구질구질한 신파의 끝판왕이었다. 술에 취해서 밤에 쓴 연애 편지 같았다. 이 세상의 모든 초고는 쓰레기이듯이(헤밍웨이), 술에 취해서 밤에 쓴 연서도 눈 뜨고는 못볼 신파에 불과하다. 아, 이렇게 써도 소설이 되는구나. 아따, 참......허벌나게 짠허요. 반면에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문장에 대하여 확신을 가진 소설가다.
그는 << 그 남자네 집 >> 에서 이 애틋한 첫사랑 고백 장면을 "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 는 단순한 문장으로 생략한다. 이 문장에는 감정의 잔여가 없다. 나는 첫사랑을 구슬(주옥珠玉이 아닌)로 환유한 작가의 솜씨에 화들짝 놀랐다. 비싼 옥은 아니지만 예쁜 구슬. 예쁘지만, 잃어버려서 속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깝지는 않은 구슬. 예뻐서 모은 구슬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버려지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첫사랑은 그런 구슬 같은 것이 아닐까 ? 만약에 작가가 첫사랑을 구슬 대신 주옥 같은 보석으로 환유했다면 이 걸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그해 겨울은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여자가 첫사랑 남자에게 자신의 결혼 청첩장을 건네는 장면이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 앞에서 남자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_ 라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다가 격렬하게 흐느껴 울고, 여자도 따라 운다. 속물과 순정, 그 어딘가에 있을 소설 속 " 나 " 의 심정은 매우 복잡하다. 공지영 작가라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는, 아리송하지만 매우 상투적인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박완서는 질척거리는 감정의 잔여 없이 냉정하게 묘사한다. 황홀할 지경이다.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은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예쁘고 소중하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아깝지는 않은 구슬처럼 여자는 격렬하게 흐느껴 우는 남자를 보며 함께 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를 따스하게 포옹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여자의 모순된 감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은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 울지만 포옹하지는 않는 태도에 대하여 여자는 학교 졸업식 날 서럽게 우는 아이의 마음과 같다고 고백한다. 여자는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지만 끝끝내 가슴 한켠에 부채감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첫사랑 남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에서 여자는 우는 남자를 포옹한다. 그때 하지 못했던 것을 애도라는 이름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비로소 여자는 그 남자에 대한 부채감에서 해방된다.
나는 그의 어깨가 요동치는 걸 보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를 보듬어 내 품안에 무너져 내리게 하고 싶었다. 그때 그가 바란 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위안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감추고 있는 건 지옥불 같은 열정이었다......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불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 나는 박완서 작가가 칠순 나이에 첫사랑에 대한 소설'을 썼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올드한 나이가 아닐까 ? 하지만 내 판단은 틀렸다. 이토록 새련된 사랑 이야기라니. 내가 이 소설을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다. 박완서 문학의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강박적으로 묘사하는 레몬향 방향제 냄새에 질려버린 나는 박완서 작가가 다양하게 흝뿌려놓은 냄새에 빠지곤 한다. 밥 짓는 냄새, 젖은 흙 냄새, 카바이드 냄새, 흰 라일락 냄새. 그리고 간고등어나 꽁치의 비린내도 맛 볼 수 있다.
식물과 음식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박완서를 능가할 한국 작가는 없다. 굳이 해외 작가에서 찾는다면 마르셀 프르스트 정도 ? 만약에 내 이웃 중에서 이 소설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부럽다구요,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축복이다. 당신에게는 아직도 달콤한 초콜릿 과자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