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전파자 31번에게



                                                                               소설 << 몽실언니 >> 에서 몽실이는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길 위에서 헤어진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면 몽실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름이 뭐예요 ?                그 순간, 여자 인민군에 불과했던 사람은 로동순이 되고 남자 괴뢰군 아저씨는 곽팔용이 된다. 몽실이는 왜 그토록 사람의 이름에 집착했을까 ?  


양돈장에서 처음 일하게 되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새끼 돼지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 녀석은 똘똘이, 이 녀석은 촐랑이, 그 녀석은 얼룩이. 이름이 생기는 순간에 각각의 고유한 개성도 생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돼지를 키워서 도축장으로 보낼 때에는 마음의 상처를 얻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양돈장에서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은 일부러 짐승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 혹은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마음은 그 대상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마음가짐의 출발이다. 


반대로 격리 수용소 관리자들이 수형자에게 이름 대신 숫자를 부여하는 이유는 이름을 제거해서 대상을 " 비인격화 " 하려는 목적에 있다. 사육장의 노동자가 이름 없는 가축을 대하듯이 그들 또한 이름 없는 대상을 죄의식 없이 처리할 수 있다. 코로나 정국에서 언론이 코로나 환자를 확진자19, 20, 21, 22, 23, 24...... 31 따위로 호명할 때마다 언론 보도가 그들을 피해자로 인식한다기보다는 가해자 취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쓸쓸한 마음이 든다. 더군다나 동선 범위가 넓었던 확진자 31번은 " 슈퍼전파자 " 라는 혐오의 프레임에 갇혀서 공공의 적이 되었다. 


왜, 우리는 피해자에게 위로와 지지를 보내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혐오하게 되었을까 ? 슈퍼전파자라는 이 극렬한 혐오의 표현을 자유롭게 배설할 수 있는 애티튜드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 2015년 메르스 사태가 종식되었을 때 보건 당국의 역학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80번째 환자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방문했다가 다수 전파 환자였던 14번째 환자로부터 감염됐다. 162번째 환자는 2015년 6월11일께 삼성서울병원에서 80번째 환자의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과정에 개인 보호장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돼 감염됐다. 162번째 환자는 7월23일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지만 80번째 환자는 기저질환(악성림프종)이 악화돼 11월25일 숨을 거뒀다. 마지막 80번째 환자의 죽음으로 메르스 사태는 종식됐다.”


80번째 환자는 병상에 누워 뉴스를 통해 자신의 이름 대신 80이라는 숫자로 호명된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바이러스가 이 사람 저 사람의 몸을 떠돌가다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숙주가 자신이라는 점도 깨달았을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 환자가 없어지면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는 종식된다고 선언했다. 뒤이어 메르스가 종식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경제적 손실은 ○○조 원이라는 보도도 이어졌다. 모두 다 메르스의 종식을 원했고 그것은 곧 숙주의 죽음을 의미했다. 숫자 80이 아닌, 매우 평범한 이름을 가진 그는 이 상황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슈퍼전파자 31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또한 얼마나 외로울까. 


건투를 빈다, 진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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