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영화 <수퍼맨 리턴즈>를 떠올리시지 못한 분들이라면 낭패감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나로선 비디오로나 보게 될 듯하지만, 최근에 개봉된 이 영화에 대한 사전인지 차원에서 리뷰 하나를 옮겨놓는다. '오동진의 동시상영관'에서 가져온 것인데, 예전엔 YTN의 '씨네24'에서도 곧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영화평론가 그 사람이다(강우석 감독에 대한 책도 냈다). 가장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의 핵심을 잘 짚어준다. <수퍼맨 리턴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문화일보(06. 07. 04) 돌아온 수퍼맨을 다룬 영화 <수퍼맨 리턴즈>는 양가적이고 중의적인 영화다. 양가적이고 중의적이라면 어디 <수퍼맨 리턴즈>뿐이겠는가. 할리우드 영화들, 특히 여름철에 집중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죄다 중의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들이다.

-<수퍼맨 리턴즈>야말로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여전히 세계의 각종 현안을 미국인(물론 크립톤 행성 출신이긴 하지만, 미국인 농부에 의해 길러진) 영웅이 혼자서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식의 강박증을 갖고 있는 모습에 혀를 끌끌 차게 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수퍼맨이란 초현실적 캐릭터가 처한 여러 상황을 통해 미국의 현재를 성찰해내려는 태도가 읽히기도 한다. <수퍼맨 리턴즈>는 그렇게, 후자의 의미로 더 읽힐 수 있는 작품이다. 단순히 ‘팍스 아메리카나’의 이데올로기를 그린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이번 영화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는 거기서 몇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지금의 미국사람들이 혹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진정한 수퍼맨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그린다. 예컨대 이런 얘기를 통해서다. 극중에서 수퍼맨의 연인인 로이스(케이트 보스워스)는 5년간 말없이 자신 곁을 떠나 있었던 수퍼맨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다. 그녀는 ‘왜 우리는 더 이상 수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란 기사로 퓰리처상까지 받게 된데다 수퍼맨 따위는 싹 잊은 척하고 편집국장의 조카인 리처드(제임스 마스덴)와 오랜 동거 끝에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다시 펜을 들어 새로운 기사를 써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녀의 새 기사는‘우리에게 수퍼맨이 필요한 이유’다.

-애인 로이스가 왔다갔다 한 것처럼 우리들 역시 수퍼맨에 대한 애증이 왔다갔다 했다. ‘수퍼맨 시리즈’가 처음 시작됐던 1978년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수퍼맨을 원했다. 영웅을 원했다. 자신들을 이끌 진정한 지도자를 원했다. 베트남전의 후유증과 만성적인 경기불황으로 극도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너무나 지긋지긋했으니까.

 

 



 

-그러나 막상 레이건 시대가 개막되고,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라는 대증요법에 따라 일시적인 대 호황국면이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그토록 갈망했던 영웅을 저버렸다. 영화속 로이스가 ‘더 이상 수퍼맨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사람들 역시 수퍼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달라졌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극도로 혼미한 상태에 빠져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극단적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다. 로이스가 그랬듯이 사람들 역시 ‘수퍼맨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수퍼맨 리턴즈’에서 수퍼맨이 맨 처음 해결하는 사건은 여주인공 로이스 등 기자단을 태운 비행기가 양 날개를 잃은 채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 한가운데로 추락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사실 수퍼맨의 영원한 경쟁자인 렉스 루터가 조장한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비행기 사고로 대규모 사상자가 날 뻔했던 그 같은 상황은 단박에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하며 따라서 이 영화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또 어디로 갈 것인지를 곧바로 상징해낸다. 미국은 9·11 테러의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퍼맨 리턴즈’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많이 보면 미국문화병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단선적인 생각이다. 편협한 생각이다. 영화는 어떠한 관점으로 보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수퍼맨 리턴즈’같은 영화야말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미국 대중문화뿐 아니라 지금의 미국사회가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수퍼맨에게 자꾸 마음이 끌리는 건 그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영화관으로 발길을 옮기도록 할 만큼 끌리는 건 아니다. 근데, 크립톤성에도 성형외과가 있나?)

06. 07. 1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oshot 2006-07-13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동진의 '우왕좌왕'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슈퍼맨 리턴즈]에 대한 묘사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이 영화는 엑스맨의 마그니토(2차 세계대전의 폴란드수용소에서 살아남은)가 슈퍼맨(메시아)으로 변신한 얘기에 가깝습니다. 너무 우아하게 나오니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거죠. 크립톤행성의 출신자/유태인/게이가 우아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면 그저 입을 벌리고 감탄하며 바라보면 좋을 것을...

로쟈 2006-07-13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cus님의 우아한 리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아님,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경제학 책을 내가 사서 읽는 일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없지는 않다(지금은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이 분야의 책도 30여권은 될 듯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경제/경영 관련서를 구입한 기억이 없다(하긴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으니!). 물론 바타이유식의 '일반경제'라면 사정은 달라지고 나는 그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관심이 제한되어 있는 쪽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 곧 '제한경제'일 따름이다. 그걸 나는 다리 '속좁은 경제'라고 부르고도 싶다.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쉬운 경제학 입문서'라 이름붙일 만한 책의 리뷰가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얼마전 출간된 <일상의 경제학>(더난출판사, 2006)에 대한 리뷰인데 문화일보 김종락 기자의 것이다.

문화일보(06. 07. 07) 인생이 무엇이냐고? 경제학을 읽어라!

-일부다처제는 남성에게 천국인가, 지옥인가. 혼잡한 고속도로에서 잘 빠지는 옆 차선으로 옮길 때마다 왜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가.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는 것은 경기가 나아지고 있다는 신호인가, 그 반대인가. 스커트 길이와 경기의 상관관계야 경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회자되지만, 여타의 질문들은 경제학과 관계가 없어 보인다. 특히 일부다처제 같은 주제는 효율을 제1원리로 하는 경제학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로 여겨질 만하다. 그럼에도 <일상의 경제학>은 경제학이야말로, 이런 문제에 가장 훌륭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거의 모든 일상의 순간들이 경제학적 상황에 놓여 있고, 경제학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FAZ)’의 경제전문 에디터인 저자 하노 벡 박사는 경제학이 각종 도표와 수식으로 가득한 골치 아픈 학문이며, 일부 학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오해를 바로잡는 데서 책을 시작한다. 경제학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만 기계적으로 따지는 학문이 아니라, 보다 근저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심리학이라는 것이다(*이건 경제학의 확장인가, 자포자기인가?). 현대인의 매 순간이 경제학적 활동의 연속으로, 남녀 간의 연애에서 밀고 당기기를 할 때조차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쯤에서 책에 기대 앞의 문제를 풀어보자. 일부 남성들이 꿈처럼 이야기하는 일부다처제.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1대1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능력있고 잘 생긴 일부 남성들이 여러 여성들을 차지할 경우 나타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다. 평범한 남성들은 일부 빼어난 남성들로 인해 확 줄어든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나마 차지하기 위해 쟁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예전에 일본인 저자가 쓴 <결혼경제학>이란 책도 출간됐었다. 그걸 읽었다고 해서 내가 도움을 받은 바는 하나도 없지만).

-여성을 두고 쟁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뼈 빠지게 돈은 벌어주되 요구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가능하고, 설거지며 빨래, 청소, 육아를 도맡아 하겠다는 전략도 가능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여성을 얻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 시장에 남성은 여전히 넘치기 때문이다. 여성의 요구가 보다 다양해지고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예상과는 다른 남성의 지옥이다.

-혼잡한 도로나 할인마트의 줄에서 머피의 작용이 작용하는 것도, 경제학에서 다루는 인간의 욕구와 관련돼 있다. 도로에서 한쪽 차선이 잘 빠지면, 필연적으로 차선을 옮겨 타는 차량이 생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우르르 차선을 바꾸다 보니 잘 빠지던 차선이 정체되는 반면, 좀 전의 차선은 멀쩡하게 빠진다.

-그래서 옮겨 타면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도로의 차선이나 할인마트의 줄 같은 것이야 조정이 빨리 이뤄지지만, 조정 사이클이 긴 농산물이나 직업 시장은 상황이 다르다. 고추 파동이며 돼지 파동이 일어나고, 한때 대접깨나 받던 직업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미니스커트의 길이와 경제의 상관관계도 심리학으로 설명한다.

“여성들이 짧은 스커트를 입을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뭔가를 감행하고 싶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바로 경기가 호황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분과 같다.”



-이야기는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패션이 화려하고 실험적이라면 경제상황 또한 낙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이 경제학으로 설명하는 일상은 이뿐 아니다. 왜 청바지는 직장의 유니폼이 될 수 없는가, 영화에서 여자 친구를 인질로 잡은 갱의 위협에 굴복해 총을 내려놓는 것은 왜 현실적이지 못한가, 농업보조금이 반경제적인 이유는, 내기는 도박인가 게임인가….

-경제학자인 저자가 이런 문제에 적절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경제학이 인간의 욕망해소, 선택과 집중, 계산과 저울질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책이 주제별로 배치해 솜씨좋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요와 공급, 기회비용, 가격의 탄력성, 게임이론, 죄수의 딜레마 등 경제학의 주요 개념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책은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난해한 개념이나 복잡한 수식을 늘어놓는 경제학 전문 서적이나, 전체 경제에 대한 조망없이 말초적으로 돈버는 기술만 전수하는 재테크서와 구별된다. 더불어 일상에 녹아든 경제학의 논리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도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전한다. 맛깔스러운 번역으로 글만 읽어도 이해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책, 편집자들은 여기에 그림과 만화까지 덧붙여 더러 미소까지 머금으며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언젠가 전공서로서 가령 <맨큐의 경제학> 같은 책을 그 '명성' 때문에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984쪽짜리 경제학서를 읽는 게 과연 내게 '경제적인' 일인지 끝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남들 경제학개론 들을 때 나는 문학개론이나 듣지 않았던가?). 259쪽짜리 <일상의 경제학>이라면 사정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괴짜경제학>이나 <경제학 콘서트> 같은 책들도 취지는 유사하다). 하지만, 가장 '경제적인' 일은 이런 잡스러운 관심들을 잡아매고 팔릴 만한(?) 책을 한권 쓰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06. 07. 12.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6-07-12 23:18   좋아요 0 | URL
경제학원론정도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상의 경제학>이라던가 <쾌도난마 한국경제>등과 같은 책을 읽는다는건 영문법을 공부하지 않고 영문독해를 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맨큐의 경제학>이나 <경제학원론>같은 책을 한번 통독해보는 것은 그다지 품을 많이 팔지 않는 일입니다. 제가보기에는 그런 초급 경제학전공서을 읽는 것이 본격적인 철학책 한권 읽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로쟈 2006-07-13 00:11   좋아요 0 | URL
일반경제 얘기도 꺼냈지만, 제가 '공학적' 경제학(센이 그렇게 부르더군요)에 대해 갖는 불만은 경제에 작용하는 경제 '외적' 변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이진경식 표현을 쓰자면, '경제학의 외부'를 경제학은 다룰 수 있느냐는 것. 더불어, 그것이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게 왜 '외부'냐는 것). 넓게 보아 '계량적/계산적 합리성'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건지(경제학 개론을 듣던 친구는 시험공부한다고 얼심히 계산문제 풀더군요). 더불어, 기본은 고등학교때 다 배웠다는 '자만'도 있는 거죠(부동산과 주식 투자만 빼고)...

yoonta 2006-07-13 00:39   좋아요 0 | URL
님이 말씀하시는 "일반경제" 혹은 이진경의 "경제학의 외부"와 <경제학원론>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죠. 원론에서는 그런 경제 외적 변수는 고려치 않고 즉 다른 변수들은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죠. 그건 어떻게 보면 다른 여타 과학과목과 비슷한 연구방식이죠. 그런 극히 제한되고 공학적이고 조작적인 논리전개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수도 있고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같은 순수과학분야에서는) 경제학과 같은 "일반경제" 혹은 "경제학의 외부"와 같은 외생적 변수들이 내생적 변수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분야에서는 그러한 인위적 제한은 그 경제학이라고 하는 학문자체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회의로서 제기될만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경제학이라고하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양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맑스주의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의 모습이 그런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죠. 어쨋든 맑스의 자본론과 같은 "(주류)경제학의 외부 "와 경제학의 내부를 구분하려면 적어도 그 내부가 무엇인지 정도는 대충 알아볼 필요는 있단 거죠..^^ 공무원시험이나 고시공부할것 아니면 한 두번정도 읽고 이해하는 수준정도만 봐주면 일반경제와 주류경제학전반을 어느정도 조망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겁니다..^^

로쟈 2006-07-13 00:42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의 주제이기도 한데, 경제면의 기사를 읽는 데 장애가 없다면 그럴 만한 '투자'의 필요성을 제가 갖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는 얘기지요.^^

yoonta 2006-07-13 00:45   좋아요 0 | URL
근데 경제면의 기사를 읽는데 장애가 옵니다..솔직히..경제학원론을 잘 모르면..-_-
가령 왜 최근들어 GNP를 사용하지 않고 GDP를 사용하느냐하는 것등의 이유는 원론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죠..

로쟈 2006-07-13 00:52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컴퓨터에 대해서도, 자동차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오히려 실생활에서는 그런 '무지' 때문에 불편하거나 타박을 받곤 합니다. 혹은 부동산 시세에 대한 무지. 요컨대, 모든 공부는 유용하지만 인생은 짧고 벌이는 항상 모자라는지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瑚璉 2006-07-13 11:54   좋아요 0 | URL
경제 원론을 읽는 것은 1) 이른바 '경제학적 마인드'를 접할 수 있고, 2) 경제학의 큰 틀을 조감할 수 있다라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경제쪽이 전공은 아니지만 '맨큐의 경제학'은 한 번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그 정도 노력을 할만한 가치는 있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06-07-14 14:45   좋아요 0 | URL
'원론'적인 문제로 되돌아왔네요.^^
 

 

 

 

 

엊그제 <문학동네>(2006년 여름호)에서 <강산무진>의 작가 김훈과의 대담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오랜만에 '김훈'을 검색하다가 찾은 기사를 옮겨온다. 지난달말 한겨레에 실렸던 모양이다. '전직 한겨레 기자 김훈'과의 인터뷰?

한겨레(06. 06. 30) "<한겨레> 지면에서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목소리를 높이고선 겸연쩍은 듯 씨익 웃습니다. 2년만 있으면 환갑인데 웃는 그의 모습은 유년시절 장난꾸러기 같습니다.

-김훈. 2002년 한겨레 사회부 기동팀 기자. ‘하니바람’에 김훈을 쓰면 어떨지를 한겨레 사람들에 물어봤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와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휴머니즘에 가득 찬 김훈 같은 보수주의자를 품을 수 없다면 어찌 한겨레일까요. 고개를 끄떡인 사람이 더 많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지난달 26일 부슬부슬 비 오던 날. 김훈은 훌쩍 떠난 지 4년 만에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를 찾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겨레가 많이 변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말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되돌아 온 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라”였습니다.

-2002년 2월 그는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종로경찰서 기자실에 들어섰습니다. <시사저널> 편집장에서 경찰기자로 ‘백의종군’한 것이지요. 팀장의 지시를 하늘처럼 받들었던 그는, 반백의 머리카락 휘날리며 ‘현장’을 뛰어다니며 기사를 썼습니다(*나도 그 기사를 즐겨 읽었다).

-한겨레에 오자마자 24시간 맞교대하는 철도 노조원들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보여줬습니다. 3월에는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6월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에서도 취재하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허원근 일병 의문사에 매달려 강원도로 뛰어다녔고, 그해 겨울에는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대선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기동팀에 있을 때 기억나는 것을 물어봤습니다. ‘월드컵 거리응원’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가 자랐던 시절하고는 정말로 다르더만 ….”

-그는 한겨레 있으면서 100여편이 넘은 기사를 썼는데, 압권은 ‘거리의 칼럼’이었습니다. 그의 칼럼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원고지 3.5매의 짧은 글안에는 현장을 볼 수 있고, 팩트가 녹여져 있었습니다. 막판 반전은 치밀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김훈의 칼럼은 한겨레 기자뿐 아니라 경쟁지 기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때 젊은 기자들 사이에선 김훈의 ‘간결체’와 ‘막판 뒤집기’를 따라하려는 어줍잖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스크들로부터 판판이 깨졌습니다. 기본이 안 돼 있으면서 기교만 부린다는 것이지요.

-한겨레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지요.” 그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진보니 보수니 따지는 것에 앞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김훈에게, 한겨레의 존재이유를 물어봤습니다. “한겨레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강자와 다수가 아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훈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깊이 박여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박지성 발처럼 못생겼습니다. 김훈의 울퉁불퉁한 손가락을 보면, 그가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연필로 꾹꾹 눌러 썼다 다시 지우개로 지우는 고독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수십 번의 이런 과정을 거쳐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겠지요.

-그와 인터뷰를 하는 중간 중간 어디에서 개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원지는 그의 휴대전화였습니다. 그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휴대전화는 ‘왕~왕~왕~’ 울었습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냈어요. 은둔이나 자폐가 아니죠. 혼자 있을 때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바쁘고, 가장 재미있어 혼자 있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휴대전화는 방해자일뿐이겠지요.

-뒤풀이로 간 밥집에서 그와 그를 찾아 온 한겨레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유쾌한 자리였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도마에 오르고, 북한 작가들의 혁명성과 남한 작가의 퇴폐성이 맞부딪혔습니다. 무지몽매한 젊은 놈들과 글 나부랭이들이 밥상에서 마구 마구 씹혔습니다. 인터넷 한겨레(hani.co.kr)와 7월1일 문을 여는 'e하니바람'(hanibaram.hani.co.kr)에서 뒤풀이편을 기대하십시오.

그 뒤풀이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삶의 구체성과 관련하여 보다 흥미로운 <문학동네>의 대담을 잠시 인용한다. <칼의 노래>에서 도망가는 놈들에 대하여. 

"김학종이라는 놈인데 여자를 싣고 도망가다가 잡혀 죽는데, 나는 그 도망가는 놈이 인간으로서 존엄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이면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지. 그렇잖아요? 나는 일본으로도 안 가고 이순신에게도 안 가고 내가 좋아하는 섬으로 가겠다고 배를 가지고 실천할 줄 아는 젊은이가 그 시대에도 있었던 거야. 그런 것이 인간의 고귀함을 입증하는 것이죠. 꼭 이순신 밑에 가서 죽는 것이 고귀한 게 아니잖아... "(*'탈주'라는 게 바로 그런 거잖아? 이 정도 모르고 작가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런데 그때 도망간 놈들은 다 예술가에 준하는 놈들이었을 거예요... 인간이 그럴 수 있어야 맞는 것이지. 조국을 위해서 죽은 많은 선배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개개인의 목숨을 요구하는 조국은 좋지 않은 조국이죠. 도망갈 줄 아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이죠. 그러니까 내가 파시스트가 아니잖아."

"삶의 구체성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탈을 쓴 예술가인 것이지. 그것이 파시스트냐 아니냐 하는 것을 얘기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지. 나는 도망가는 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줄 알아야 인간이지. 그러나 그놈은 잡히면 또 죽어 마땅한 거죠. 사형당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는 것이지. 이순신은 도망병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젊은 놈은 애인 데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이지."(*<청소년을 위한 칼의 노래>도 있는 모양인데, 이런 걸 청소년들에게 읽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이순신 밑에 가서 죽는 것이 고귀하다는 대목까지만 읽을 일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도망가는 자들의 존엄성을 안다는 건 작가로서 기본이긴 하지만(그렇다고 기본을 갖춘 작가가 흔한 건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아직 '삼인칭 소설'을 못 쓰는 작가이지만, 작가 김훈을 내가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에 맞지 않다면, 나는 김훈을 택하겠다...

06. 07. 12.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6-07-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을 좋아합니다. 저 칼의 노래 읽은 적이 있는데 문장이 상당히 묵직해서 눌리는 기분이었죠.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야지 벼르고 있습니다.
마침 요즘 불멸의 이순신 다시 재방송 해 주던데 참 좋더군요. 본방 때 못 봤거든요. 텍스트 버전이 김훈과 김탁환거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극작가들은 김탁환 것을 더 많이 참고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거 가져갈게요.^^

로쟈 2006-07-1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하도 '안티'가 많아서 누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려서 해야 하는가 봅니다. stella09님의 당당함이 보기에 좋습니다.^^

stella.K 2006-07-13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김훈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게 그냥 취향이 안 맞아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님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지 원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로쟈 2006-07-1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이라기보다는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보아서이고, 작가가 대놓고 '우익'을 자처해서였죠. 이전에 그의 인터뷰를 토대로 그 문제에 관한 페이퍼도 쓴 적이 있습니다.

stella.K 2006-07-1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6-07-1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저는 김훈의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게 따로 노는 진보쟁이나 보수쟁이는 아닌 거죠...

비자림 2006-07-14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잘 읽고 퍼가옵나이다.^^
 

얼마전 출간된 미술책들 가운데 생각만 해두고 있다가 흘려보낸 책은 브리타 벵케의 <조지아 오키프>(마로니에북스, 2006)이다.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화려한 색채 속에 관능을 숨겨놓은 꽃그림으로 유명한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대표작들을 모아 정리해 보여"주는 책. '스포츠칸'의 연재기사 '미술 속의 에로티시즘'이란 제하의 연재기사 중 오키프를 다룬 기사를 몇몇 이미지들과 함께 옮겨놓는다. 산타페 이야기를 곁들여서.

 

  

 

스포츠칸(06. 04. 09) 꽃에서 풍기는 '은밀한 추상'   

 

-금세기 미국이 낳은 위대한 여류화가, 에로틱의 상징 조지아 오키프(1887∼1986). 사람들은 그녀를 디에고 리베라의 프리다 카를로와 비교한다. 그녀의 삶과 예술이 워낙 특별하기 때문이다. 위스콘신 인근의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시카고와 뉴욕에서 공부하고 그래피스트와 강의로 활동했다. 평범했던 그녀의 30대는 사진작가이자 화상인 52살의 스티클리츠(*아래 사진)를 만나면서 역전됐다. 친구가 그녀의 작품을 뉴욕의 화랑 291에 소개한 것이다.



-이때 스티클리츠는 “사진은 예술을 모방할 게 아니라 당당히 예술을 파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등을 소개하는 전위적인 화상이었다. 그는 오키프를 보자마자 한눈에 대단한 여자가 등장했다며 그녀의 광기를 알아보았고, 그의 덕택으로 세계적 거장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유명화가가 되었다.(*아래는 스티클리츠가 찍은 조지아 오키프의 누드, 1919)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즐겨 그렸는데 특이하게 여성의 음부를 닮은 산과 바위, 짐승의 두개골과 뼈, 조개껍데기, 도시에 거대하게 솟아오른 빌딩들은 그녀가 특히 사랑한 풍경이었다. 이것들은 거대한 남근의 상징으로 불렸지만 그녀의 본격적인 작품은 거대한 꽃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꽃이 있으면 꽃을 꺾었고 조개껍데기, 돌멩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광활한 이 세계의 경탄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여기 ‘검은 붓꽃’처럼 그녀는 “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본 것을 그리겠다. 사람들이 놀라서 그것을 쳐다볼 시간을 갖도록 꽃을 아주 크게 그린다”라며 화폭 전체에 꽃을 그렸다. “사람들은 왜 풍경화에서 사물들을 실제보다 작게 그리느냐고 묻지는 않으면서, 나에게는 꽃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는가?”라고 그녀는 되물을 정도였다.



-스스로 “꽃 자체를 그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꽃에서는 어렵지 않게 ‘신비하며 아름다움과 함께 이상하고 음침하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미지와 생식기의 에로틱한 모습이 연상된다. 빨간 칸나와 함께 이 검은 붓꽃도 꽃의 이미지에 충실하며 여성의 한 부분이 강렬하게 떠올려지는 작품이다.



-그녀는 종종 텍사스의 사막으로 갔지만 남편은 한번도 그곳을 가지 않았다. 그들이 나눈 사랑의 편지는 무려 1만1천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그들의 사랑은 끈끈했다. 스티클리츠가 죽고 오키프가 85세일 때 그녀는 50년 연하의 남자 해밀턴을 만나 13년을 함께 살았다.



-오키프는 젊은 애인에게 재산의 3분의 2를 주었고, 그 둘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녀는 2,000여점의 작품과 65억달러의 유산을 남겼고, 그리하여 그녀는 산타페에 미술관을 가진 미국의 유일한 여류화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산타페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허름한 폐광촌이었던 이곳이 예술인 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인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 덕분. 20세기 미국 미술계의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는 오키프는 1917년 기차여행 때 이곳을 만난 뒤 매년 여름을 이곳에서 보내다 62세 때인 1949년부터는 아예 정착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지난주 기자가 찾은 오키프 미술관(www.okeeffemuseum.org)은 평일인데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1997년 한 독지가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불과 7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매년 여러 나라에서 온 17만여 명이 찾는다고 한다."(동아일보, 05. 09. 27)

 

 

내가 아는 산타페는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사진집 <산타페>(1991)의 산타페와 복잡성과학 연구의 산실 '산타페연구소'의 산타페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그 대모(代母)격인 셈. 가장 관능적인 도시에서 복잡성을 연구한다? 제법 그럴 듯하군...

 

06. 07. 11.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6-07-1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키프의 그림은 혼자 보면서도 왠지 삐쭉 삐쭉 거리게 된다니까요.ㅎ

로쟈 2006-07-1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좋다는 말씀이신가요?..

드팀전 2006-07-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민망하다는 거죠 ㅎㅎ
 

어제는 태풍을 핑계로 하루종일 집에 죽치고 있다가 저녁 무렵 읽은 게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김용석 교수의 연재칼럼이다.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이고 청소년들을 타겟으로 한 글이지만, '진화생물학의 마키아벨리즘'이란 제목도 눈에 띄고 도킨스의 책도 한번 더 홍보할 겸 여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6. 07. 10)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년)가 출간된 이후 지난 한 세대 동안 이 책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도킨스 자신도 책의 2판(1989년) 서문에서 “논쟁적인 저서로서의 이 책의 명성은 해가 갈수록 커져 지금에 와서는 과격한 극단주의의 작품으로 널리 간주되고 있다”고 인정한다(*이전에 지적한 바이지만, 국내에는 이 1판과 2판이 모두 번역돼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주장이 ‘보편적 이론’일 수 있음을 확신한다. 또한 이런 확신 때문에 동료 과학자들로부터도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도킨스의 입장이 이해보다는 오해와 곡해의 대상이 된 것은 일정 부분 그 자신의 수사법에도 기인한다. 그의 수사법이 모호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단도직입적이고 명확해서라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생존 기계다.” “우리는 로봇 운반자다.” “사람과 기타 모든 동물은 자기 복제하는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같은 표현들이 그것이며, 바로 이 간단한 문장들이 그의 이론을 대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킨스의 이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 문장에 현혹될 게 아니라 내용 전체를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으며, 찰스 다윈의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도킨스의 이론은 “유전자의 눈으로 본 다윈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다윈의 이론이지만 다윈이 택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즉 “개개의 생물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유전자의 눈으로” 자연 선택을 설명한 것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진화생물학의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이는 책에서 도킨스가 지적하는 것도 종의 이해관계나 개체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진화론의 오류들이라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유전자의 이해관계이다.



-한편 과학사회학과 과학철학적 맥락에서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흥미로운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이 저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저주받은’ 책 <군주론>과 유사한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도킨스도 인정하듯 엉뚱하고 깜짝 놀랄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비유와 해석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선 도킨스는 자신이 사용하는 윤리적 성격의 단어, 즉 ‘이기적’이니 ‘이타적’이니 하는 말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에 제동을 건다. 이 말들로 “진화에 따른 도덕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말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즉 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떠하다고 하는 진술’의 구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의 논법이다. 마키아벨리 역시 도덕적 논의에서 벗어난 입장을 견지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사는가’의 구별을 전제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도킨스는 자신의 목적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마키아벨리는 다름 아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정치학’을 탐구한다. 그는 정치사의 사례들을 들면서 “이로부터 거의 항상 유효한 일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즉 타인을 강하게 하는 자는 자멸을 자초할 뿐이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타주의를 가장할 줄 알라고까지 조언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결코 타자를 도와주지 않는다. 도와주는 것처럼 보일 경우라도 그것은 “겉보기의 이타주의일 뿐”, 결국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다.

-이 밖에도 둘 사이의 유사점은 많다(그들이 사용하는 수사법도 그렇고, 일부 주장들은 ‘양면적’으로 독해해야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두 저서에 가해진 비판들도 비슷한 양상을 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두 저서가 공유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둘 모두 ‘현실을 직시하라’는 매우 평범하면서도 지극히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도킨스의 경우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관점’에서 본 한정된 현실이지만, 이런 고전들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중요한 관점들을 제시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06. 07. 1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루핀 2006-07-14 03:40   좋아요 0 | URL
"자신을 위한 이타주의"... 저는 <이타적 유전자>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양극화 현상이 전세계적인 흐름이라고 할 때 자신을 위한 이타주의, 즉 타인에 대한 기만이 아닌 자신과 남을 향한 공생적 (win-win) 이타주의에 대한 철학이 너무나 절실하지 않나 싶은 요즘입니다. <이타적 유전자>라는 책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신지..

로쟈 2006-07-14 07:37   좋아요 0 | URL
<이타적 유전자>란 책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아시다시피 원제는 <미덕의 기원>이니까요. 그리고 그때의 미덕은 '이기적 유전자'론으로 다 설명되는 부분입니다(상호 협력(공생)이란 것도 궁극적으론 지극한 이기주의(계산)의 산물이라는 것이죠. 다만 개체 차원이 아닌 유전자적 차원에서). 다만, '이기적'이란 게 유전자적 이해관계를 표현한 수식인 만큼 인간적 '해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붉은루핀 2006-07-15 03:12   좋아요 0 | URL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타적, 이기적 이라는 단어 속에는 벗어날 길 없는 도덕적 윤리적 포스가 서려있긴 하지요...ㅎㅎ <이타적 유전자> 경우 제목 자체때문에 조금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혹 대안할만한 좋은 단어가 있을런지요?

로쟈 2006-07-15 19:46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원제가 좋습니다. '미덕의 기원', 혹은 '이타성의 진화' 같은 것도 고려해볼 수 있을 거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