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문학동네>(2006년 여름호)에서 <강산무진>의 작가 김훈과의 대담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오랜만에 '김훈'을 검색하다가 찾은 기사를 옮겨온다. 지난달말 한겨레에 실렸던 모양이다. '전직 한겨레 기자 김훈'과의 인터뷰?

한겨레(06. 06. 30) "<한겨레> 지면에서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목소리를 높이고선 겸연쩍은 듯 씨익 웃습니다. 2년만 있으면 환갑인데 웃는 그의 모습은 유년시절 장난꾸러기 같습니다.

-김훈. 2002년 한겨레 사회부 기동팀 기자. ‘하니바람’에 김훈을 쓰면 어떨지를 한겨레 사람들에 물어봤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와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휴머니즘에 가득 찬 김훈 같은 보수주의자를 품을 수 없다면 어찌 한겨레일까요. 고개를 끄떡인 사람이 더 많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지난달 26일 부슬부슬 비 오던 날. 김훈은 훌쩍 떠난 지 4년 만에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를 찾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겨레가 많이 변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말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되돌아 온 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라”였습니다.

-2002년 2월 그는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종로경찰서 기자실에 들어섰습니다. <시사저널> 편집장에서 경찰기자로 ‘백의종군’한 것이지요. 팀장의 지시를 하늘처럼 받들었던 그는, 반백의 머리카락 휘날리며 ‘현장’을 뛰어다니며 기사를 썼습니다(*나도 그 기사를 즐겨 읽었다).

-한겨레에 오자마자 24시간 맞교대하는 철도 노조원들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보여줬습니다. 3월에는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6월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에서도 취재하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허원근 일병 의문사에 매달려 강원도로 뛰어다녔고, 그해 겨울에는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대선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기동팀에 있을 때 기억나는 것을 물어봤습니다. ‘월드컵 거리응원’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가 자랐던 시절하고는 정말로 다르더만 ….”

-그는 한겨레 있으면서 100여편이 넘은 기사를 썼는데, 압권은 ‘거리의 칼럼’이었습니다. 그의 칼럼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원고지 3.5매의 짧은 글안에는 현장을 볼 수 있고, 팩트가 녹여져 있었습니다. 막판 반전은 치밀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김훈의 칼럼은 한겨레 기자뿐 아니라 경쟁지 기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때 젊은 기자들 사이에선 김훈의 ‘간결체’와 ‘막판 뒤집기’를 따라하려는 어줍잖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스크들로부터 판판이 깨졌습니다. 기본이 안 돼 있으면서 기교만 부린다는 것이지요.

-한겨레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지요.” 그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진보니 보수니 따지는 것에 앞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김훈에게, 한겨레의 존재이유를 물어봤습니다. “한겨레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강자와 다수가 아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훈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깊이 박여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박지성 발처럼 못생겼습니다. 김훈의 울퉁불퉁한 손가락을 보면, 그가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연필로 꾹꾹 눌러 썼다 다시 지우개로 지우는 고독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수십 번의 이런 과정을 거쳐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겠지요.

-그와 인터뷰를 하는 중간 중간 어디에서 개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원지는 그의 휴대전화였습니다. 그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휴대전화는 ‘왕~왕~왕~’ 울었습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냈어요. 은둔이나 자폐가 아니죠. 혼자 있을 때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바쁘고, 가장 재미있어 혼자 있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휴대전화는 방해자일뿐이겠지요.

-뒤풀이로 간 밥집에서 그와 그를 찾아 온 한겨레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유쾌한 자리였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도마에 오르고, 북한 작가들의 혁명성과 남한 작가의 퇴폐성이 맞부딪혔습니다. 무지몽매한 젊은 놈들과 글 나부랭이들이 밥상에서 마구 마구 씹혔습니다. 인터넷 한겨레(hani.co.kr)와 7월1일 문을 여는 'e하니바람'(hanibaram.hani.co.kr)에서 뒤풀이편을 기대하십시오.

그 뒤풀이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삶의 구체성과 관련하여 보다 흥미로운 <문학동네>의 대담을 잠시 인용한다. <칼의 노래>에서 도망가는 놈들에 대하여. 

"김학종이라는 놈인데 여자를 싣고 도망가다가 잡혀 죽는데, 나는 그 도망가는 놈이 인간으로서 존엄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이면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지. 그렇잖아요? 나는 일본으로도 안 가고 이순신에게도 안 가고 내가 좋아하는 섬으로 가겠다고 배를 가지고 실천할 줄 아는 젊은이가 그 시대에도 있었던 거야. 그런 것이 인간의 고귀함을 입증하는 것이죠. 꼭 이순신 밑에 가서 죽는 것이 고귀한 게 아니잖아... "(*'탈주'라는 게 바로 그런 거잖아? 이 정도 모르고 작가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런데 그때 도망간 놈들은 다 예술가에 준하는 놈들이었을 거예요... 인간이 그럴 수 있어야 맞는 것이지. 조국을 위해서 죽은 많은 선배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개개인의 목숨을 요구하는 조국은 좋지 않은 조국이죠. 도망갈 줄 아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이죠. 그러니까 내가 파시스트가 아니잖아."

"삶의 구체성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탈을 쓴 예술가인 것이지. 그것이 파시스트냐 아니냐 하는 것을 얘기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지. 나는 도망가는 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줄 알아야 인간이지. 그러나 그놈은 잡히면 또 죽어 마땅한 거죠. 사형당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는 것이지. 이순신은 도망병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젊은 놈은 애인 데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이지."(*<청소년을 위한 칼의 노래>도 있는 모양인데, 이런 걸 청소년들에게 읽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이순신 밑에 가서 죽는 것이 고귀하다는 대목까지만 읽을 일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도망가는 자들의 존엄성을 안다는 건 작가로서 기본이긴 하지만(그렇다고 기본을 갖춘 작가가 흔한 건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아직 '삼인칭 소설'을 못 쓰는 작가이지만, 작가 김훈을 내가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에 맞지 않다면, 나는 김훈을 택하겠다...

06.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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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7-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을 좋아합니다. 저 칼의 노래 읽은 적이 있는데 문장이 상당히 묵직해서 눌리는 기분이었죠.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야지 벼르고 있습니다.
마침 요즘 불멸의 이순신 다시 재방송 해 주던데 참 좋더군요. 본방 때 못 봤거든요. 텍스트 버전이 김훈과 김탁환거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극작가들은 김탁환 것을 더 많이 참고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거 가져갈게요.^^

로쟈 2006-07-1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하도 '안티'가 많아서 누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려서 해야 하는가 봅니다. stella09님의 당당함이 보기에 좋습니다.^^

stella.K 2006-07-13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김훈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게 그냥 취향이 안 맞아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님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지 원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로쟈 2006-07-1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이라기보다는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보아서이고, 작가가 대놓고 '우익'을 자처해서였죠. 이전에 그의 인터뷰를 토대로 그 문제에 관한 페이퍼도 쓴 적이 있습니다.

stella.K 2006-07-1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6-07-1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저는 김훈의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게 따로 노는 진보쟁이나 보수쟁이는 아닌 거죠...

비자림 2006-07-14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잘 읽고 퍼가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