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루블화가 7월 1일부터 완전 태환화를 실시한다고 한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며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잘 모르겠지만, 루블화의 위상을 강화/격상시키는 것이라 한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온다.

한국일보(06. 07. 01) "러 호황 타고 루블화 위상 높이기"(온라인 기사의 제목은 "러시아 루블화 7월 1일부터 완전 태환?") 

-러시아의 자신감은 어디까지 뻗어갈 것인가. 옛 소련 붕괴 후 최고의 경제 활황세를 누리고 있는 러시아가 7월 1일부터 루블화에 대한 모든 통제를 없애며 완전 태환화를 실시한다. 러시아 국민들은 루블화를 자유롭게 들여오거나 나갈 수 있으며 외국인 투자자는 루블화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 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가 1998년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 당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루블화를 미국 달러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화폐 자리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본격 시동을 걸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가 어깨에 힘을 주는 이유는 배럴 당 70달러까지 치솟은 기름값 때문. 러시아는 연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오일 달러에 힘입어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 루블화 수요가 크게 늘었다. 러시아 외환보유액은 1998년 150억달러에서 올해 2,300억달러로 1,500%나 뛰어 올랐다(*러시아 국영 '가즈프롬'에 관해서는 이전에 다룬 바 있다). 사회간접자본 구축과 국민 복지 증진을 위한 안정화기금도 700억달러나 쌓였다.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듯 러시아 하원(두마)은 24일 기업, 상점, 식당에서 외국 통화로 가격을 표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 시켰고 장관 등 공무원이 상품, 서비스 가격을 언급할 때도 달러화나 유로화로 바꿔 발표하지 못하도록 했다. 달러화, 유로화에 의지하지 않고 루블화만 가지고도 충분히 경제를 꾸려갈 수 있다는 뜻이다. 파이낸셜 타임즈(FT)는 러시아의 이번 결정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30일 분석했다.

-러시아 정부는 2007년 1월부터 시작한다는 원래 계획보다 6개월이나 앞당겨 태환화 실시를 결정했다. 2주 후 상트 페테르부르크서 G8(서방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이 열리고 러시아 정부가 파리클럽에 빚진 220억달러를 갚기로 합의한 지 불과 며칠이 지난 시점이다.

-FT는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유예) 선언 8주년을 맞은 러시아 정부가 G8 회담을 앞두고 루블화 이미지를 개선하는 동시에 재정 파탄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자랑하기 위한 조치”라고 전했다. 아울러 “외교 분야에서 미국의 독주를 막겠다는 블라드미르(*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의지를 경제 분야 까지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러시아는 핵 문제로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이란에 대해 미국이 강력히 제재하려 하지만 이를 반대하고 있다. 또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총선을 통해 집권하자마자 미국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마스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직접 초대하는 등 곳곳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부딪히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성장했다”며 “과거의 선입견으로 바라봤던 사람들은 지금 러시아를 두려워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루블화가 태환화 함에 따라 경제가 과열, 물가가 오르고 수출 가격이 상승해 기업들이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박상준 기자)(*아래는 루블화 지폐의 견본 이미지. 루블의 최고액권은 1000루블짜리이며 원화로는 대략 4만원 정도이다.)

세계일보(06. 07. 01) 러시아 "루블화 위상 되살리자"

-국제유가 상승으로 오일 머니를 축적한 러시아가 1일 루블화의 완전 태환(통화 자유교환)을 위해 외환시장 규제를 철폐한다. 1998년 외환위기 때 400억달러(약 38조원) 규모의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한 지 8년 만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1일부터 루블화를 자유롭게 반입·반출할 수 있고, 외국 투자자들도 루블화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기업이 벌어들인 외화의 25%를 중앙은행에 예치토록 한 규제도 사라진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루블화 태환 일정이 예정보다 6개월 앞당겨진 것은 계산된 정치적, 상징적 조치라고 30일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날 국제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과 8월21일까지 213억달러의 부채를 조기 상환키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부채 213억달러와 조기 상환에 따른 할증금 10억달러 등 총 223억달러를 지불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조기 상환으로 이자비용 부담이 감소, 총 77억달러의 경제적 이득을 보게 됐다고 강조했다.

-UBS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알 브리치는 “러시아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국제사회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련의 조치”라고 분석했다. 외환시장 규제 철폐 역시 몰락했던 루블화의 위상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달러화 독주를 견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신문은 분석했다.

-러시아가 루블화 태환에 나선 것은 25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과 700억달러의 석유안정화기금으로 대변되는 탄탄한 경제상황 덕분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루블화의 완전 태환은 경제구조 개혁과 기업환경 개선 등을 통해 러시아가 투자할 만한 시장으로 인정받을 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루블화의 태환화가 순조로우면 러시아 경제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유입 자금이 급증하면 경기 과열이나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외환시장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AP은 러시아 중앙은행이 하루 환율 변동 폭을 규제하기 때문에 루블화 환율에 큰 충격은 없을 것으로 분석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에 따르면 29일 현재 달러·루블화 환율은 1달러에 27.0611루블이다.(조현일 기자)
 
 
06. 07. 01.
 
P.S. 지난 한주 러시아 관련 기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복수를 푸틴이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TV보도용 멘트는 이렇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특수부대에 러시아 외교관 살해범들을 추적 분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러시아 대통령궁인 트램린 공보실은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이 특수부대에 모든 필요한 조치를 다해 이라크 주재 외교관들을 살해한 범죄자들을 찾아내 분쇄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습니다. 크렘린은 특수부대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러시아 비밀경찰 KGB의 후신인 해외정보국이 작전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Photo from www.photobucket.com
 
그런데 거기에 이어진 해외토픽: "한편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해 크렘린을 나서던 푸틴 대통령은 놀러온 어린이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한 어린이의 셔츠를 걷어올리고 배에다 깜짝 뽀뽀를 해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외신을 참조하여 조금 보충하면 푸틴은 4-5세쯤 된 이 아이에게 이름을 묻고, '니키타'라고 대답하자 사진처럼 뽀뽀를 했다. 아이나 주변 사람들이 다소 당황해 한 것은 불문가지이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분쇄'를 지시하는 대통령과 어린아이의 배에 입맞추는 대통령, 이것이 푸틴의 두 가지 얼굴, 더 나아가 러시아의 두 가지 얼굴이다(푸틴의 대중적 지지의 일부는 그의 이러한 엉뚱한 돌출행동에 힙입고 있다). 대중적 친근감에 있어서 부시 또한 푸틴 못지 않지만, 차이라면 푸틴은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지극히 '러시아스런' 권력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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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정래 선생의 신작 장편소설 <인간 연습>이 출간됐다. 책이 나온 건 며칠 됐고, 오늘자 한겨레에 최재봉 기자의 리뷰가 실렸다. 길잡이 삼아서 옮겨놓는다. 기사의 타이틀은 "무너진 사회주의 전향 장기수의 선택은?"이지만, "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문학적 해명 시도"라는 설명에 기대어 페이퍼의 제목을 달았다. 그게 나의 관심사와 맞기도 하고(주제면에서 가장 '러시아적'이기도 하다).

-작가 조정래(63)씨가 새 장편소설 <인간 연습>(실천문학사)을 내놓았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한강> 이후 소설로는 4년여 만이다. 80년대 초부터 20여년 동안 세 편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 매달려 온 조정래씨가 한 권짜리 소설을 발표하기는 <불놀이>(1983) 이후 23년 만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유신 말기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대하소설 삼부작으로 갈무리한 작가의 다음 행보가 어떠할지 독자들은 궁금해했던 터였다.

 

 

 

 

-<인간 연습>은 전향한 장기수 ‘윤혁’을 통해 이념의 현실적 의미를 따져 묻고 그 방향을 모색해 본 작품이다.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에서 윤혁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사상의 조국’ 소련이 무너지고 조국의 북쪽에서는 인민들이 굶주림에 쓰러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윤혁과 또 다른 전향 장기수 ‘박동건’은 자신들이 평생 동안 추구해 온 가치가 속절없이 스러지는 장면 앞에 망연자실해한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악랄한 고문에 못 이겨 전향은 했을지언정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던 사회주의 이념을 진정으로 버리지는 않았던 것.

-“이런 꼴 보려고 우리가 평생 그 고생을 한 겁니까”라며 탄식하던 동건은 결국 병상에서 죽음을 맞고, 윤혁에게 “그의 죽음은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진다. 동건의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태는 실상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가치의 현실적 죽음을 대행하는 것이었으니까. 사회주의가 무너진 마당에 동건과 윤혁에게 남은 삶은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이념을 좇았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윤혁은 이성과 논리의 인간이다. 비록 전 존재가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사태의 진상과 원인을 합리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실패였음이 드러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합당한 옹호의 논리가 필요했던 것. 이 대목이야말로 소설 <인간 연습>의 핵심에 해당할 터인데, 소설 속에서는 윤혁의 감방 동료였던 운동권 출신 ‘강민규’가 우선 윤혁의 노력을 돕는다.

-강민규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공산당 일당독재 △인간을 도덕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믿음 △당의 일방적 계획과 집행 △‘당의 무오류’라는 오류 등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원인 분석 가운데서도 민규와 윤혁은 특히 사회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에 큰 공감을 표한다. 윤혁은 달리 “(본능적 존재인)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이성의 힘이 큰 존재로 보려고 한” 착각을 들먹이기도 한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보호관찰 대상인 윤혁을 감시하는 ‘김 형사’가 퉁겨준 신문 칼럼에서 어떤 교수가 쓴 글이다: “마르크스주의란 기본적으로 밥 먹는 철학인데도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해 결국은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사후 분석들에 앞서 벌써 30여 년 전에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견해도 있었다. 간첩으로 내려오자마자 믿었던 친구의 신고로 체포된 윤혁을 담당했던 검사의 장담이었다: “모두 함께 일해 공평하게 나눠 먹는다고? 말이야 근사하지. 그렇지만 내 것이 아닌데 어느 누가 최선을 다해 일하겠나? 그 망상이 결국 공산주의를 망치게 될 것이다. 두고 봐.”

-미흡한 대로 원인 분석이 끝났으면 향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법. 이제 사회주의는 패배했으니 승리한 자본주의 쪽에 빌붙어 그 떡고물이나마 얻어 먹고자 분골쇄신해야 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와 관련해 작가 쪽에서 뚜렷하고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에 대한 요구로는 처음부터 무리했달까. 작가는 다만 일종의 원칙론이랄까 막연한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어 보인다.

-방향은 두 가지. 하나는 강민규가 운동의 새로운 활로로서 추진하는 ‘진보적 시민단체’ 결성이다. “건전한 보수와 생산적 진보를 조화시켜 좌우의 날개로 균형을 잡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구상”이라고 민규 자신은 설명한다. ‘사회주의는 시민단체들을 용인하지 않아 몰락했을 수도 있다’는 윤혁의 생각은 민규의 구상에 대한 납득과 지지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방향은 다소 엉뚱할망정 윤혁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하게 와 닿는 체험적 진실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 이름은 ‘아이들.’(*이 '엉뚱함'이 어중이떠중이들과 '작가'의 차이이다.) 윤혁은 우연한 계기로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 ‘경희’와 ‘기준’을 만나고 그 아이들을 손주처럼 돌보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아이들과의 만남은 “새싹 파릇파릇 돋는 너른 초원”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으로 묘사될 정도로 윤혁의 잿빛 삶을 황홀하게 채색한다.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은 ‘인간의 꽃밭’인데, 이 표현은 윤혁이 출간한 수기를 읽고 그를 찾아온 대전의 보육원장 ‘최선숙’이 자신의 보육원을 가리켜 한 말이다. 선숙은 그 자신 대학병원 간호부로서 전쟁 때 만났던 인민군 장교에게 큰 감화를 받아 인민군에 입대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가 자신의 현재를 말한다: “제가 무작정 인민군을 따라나서며 그렸던 세상을 아이들을 길러내면서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윤혁이 경희·기준 남매를 데리고 선숙의 보육원으로 들어간다는 소설 결말은 윤혁 역시 선숙의 견해에 동조한다는 뜻이리라. 아이들이 곧 미래라는 것. 이념 이전에 아이들을 잘 기르는 것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투자요 실천이 될 수 있다는 뜻(*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이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테마이기도 하다).

-<인간 연습>은 조정래씨가 <한강> 이후 발표한 중단편 <수수께끼의 길>과 <안개의 열쇠>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인류사적 사건에 대한 문학적 해명을 시도한 작품이다(*물락 15년 후에도 이 주제를 붙들고 있는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태백산맥>과 같은 이전 작품에서 좌익 옹호라는 비난을 받고 국가보안법 혐의로 피소되기까지 했던 작가의 이번 소설은 그가 맹목적 이념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다. 다만 사회주의 몰락 원인에 대한 해명과 그 이후의 대안 모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법하다. 시종 윤혁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소설이 끝부분에 가서 민규와 선숙의 시점 쪽으로 흔들리는 것이 혼란스럽다.

06.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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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에서 올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을 다룬 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경향신문의 김중식 기자이며 타이틀은 "박주영, 책세상에 칩거하는 ‘프리터族’ 그려"이다. 너무 기사틱한 제목이어서 '자발적 백수의 윤리학'이라고 고쳐단다. 보아하니, 백수는 2000년대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인물군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책을 소유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그것을 쓰는 것이라고 발터 벤야민은 썼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소설에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었다. 쓰면서도 읽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는 더 많은 자유가 있었고, 나는 그 자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6. 29) 올해 제30회 ‘오늘의 작가상’을 탄 박주영씨(35)는 취미·놀이가 자연스럽게 직업·일로 연결된 행복한 사람이다. 수상작인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민음사) 역시 “가장 겸손한 독자를 치밀한 소설가로 탈바꿈시킨다”(심사위원 김화영)는 말마따나 오직 책을 읽는 것만이 삶의 이유이자 목표인 ‘나’(서연)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나’는 일종의 프리터족(자유롭게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만큼만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인데 때때로 일 하러 나가는 유일한 이유는 책값을 벌기 위해서다.

 

 

 

 

-박씨는 “독서 자체가 정체성인 주인공의 삶과 나의 실제 생활은 70~80%쯤 비슷하다”면서 “올들어 60권쯤 읽었고 대학원(정치외교학) 졸업 직후인 1997~99년에는 연평균 300권쯤 읽었다”고 말했다(*백수는 백수가 안다). 작품의 구조는 노래가사와 드라마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뮤지컬 ‘맘마미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서사와 국내외 현대소설의 인용문이 돌쩌귀의 암짝·수짝처럼 문설주와 문짝을 사이좋게 열고 닫는 것 같은 모양새다. 작가는 “딱 맞는 인용문이 떠오르지 않을 땐 일단 공란으로 비워두고 소설을 써내려가면서 나중에 인용문을 찾아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나’는 책을 읽거나, 읽을 책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다 절판된 책을 갖고 싶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그 책을 팔겠다는 한 남자와 ‘오프라인’에서 접선한다. 실연한 남자는 옛사랑이 남긴 책을 팔아치움으로써 연인을 잊어버리겠다는 복수극에 ‘나’를 끌어들인다(*왠지 장정일의 <아담의 눈뜰 때>를 떠올리게 한다. 21세기 버전?).

-이 작품이 문제적인 이유는 두 가지 대목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밀폐적·자족적·자발적 백수들의 존재론을 묘사했다는 것과 경제적 어려움을 모른 채 자란 젊은이가 커서도 캥거루족처럼 부모에게 의지해 살면서도 ‘스스로 컸다’고 뻗대는 새로운 윤리학이 그것이다.

-식당 주인인 아버지는 돈을 잘 버는데도 돈 쓸 시간이 없을 만큼 일만 한다. 반면 “책을 읽을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하기 싫다”는 ‘나’는 아버지가 저당잡힌 ‘시간’마저 책읽기에 쓴다. 사글세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아버지에게 얹혀사는 형국이다.

-작가는 “두 세대간에는 노동에 대한 개념과 삶의 방식이 다르다”면서 “프리터족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만 돈을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삶의 방식 또한 자신만의 유토피아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나’의 친구 유희와 채린 역시 사회적 관계와 의무를 팽개치고 소설쓰기와 로맨스(불륜)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것이다.

06. 06. 29.

P.S.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미현 교수는 이렇게 평한다: "그 자체로 불후의 도서관인 소설, 그 옆에 영화관이 있는 소설, 그 속에서 자족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있기에 이 소설은 21세기적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나비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불가능한 이상을 실현 가능한 일상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소설은 환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을 이제 우리 한국 소설에서도 갖게 되었다."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마지막 문장의 멘트는 '추상적'이다. '스스로 컸다'고 생각하는 백수들의 윤리학을 이 소설이 건드리고 있다면 말이다...

P.S.2. 자료를 옮겨오는 김에 문화일보 장재선 기자의 소개기사도 옮겨오도록 한다.

문화일보(06. 06. 29) 책읽는 여자, ‘백수 유토피아’를 꿈꾸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는 걸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책 읽기는 공부라는 성실하고 고리타분한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내 책 읽기는 처음부터 놀이였을 뿐이다. 내가 설사 아주 어려운 학술 책을 읽고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놀이일 뿐이다.놀이가 꼭 쉬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아주 지능적이어야 하고 연마를 거듭해야 하는 바둑이나 장기, 체스를 놀이로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백수생활백서>의 주인공 서연의 독백.


-현존하는 한국 최고 독서가는 누구일까.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서 감옥생활이 괜찮았다고 회고한 김대중 전 대통령일까, 수만권의 장서를 갖고 무불통지(無不通知)의 혜안을 과시하는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일까, 아니면 중학 중퇴 학력으로 오로지 책 읽기와 글 쓰기를 통해 대학교수로 입신한 소설가 장정일씨일까.

-여기 이들 못지 않게 책 읽기를 즐기는 28세의 여성이 있다. 이 미혼 여성은 1년에 최소 300권에서 700권 정도의 책을 읽어야 살맛이 난다. 지난 10년간 대략 5000권 정도의 책을 비타민처럼 씹어재꼈다. 사람들이 책을 하도 읽지 않아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단체까지 생긴 인터넷 시대에 책 읽기를 통해 자족의 삶을 추구하는 희귀종인 이 여성은, 그러나 실존인물은 아니다.

-올해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주영(35)씨의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민음사 발행)에 나오는 주인공 서연의 이야기다. 서연은 21세기에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일하지 않고 오로지 책만 읽으며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서연은 책 읽을 시간을 뺏기지 않으려 직업을 얻지 않은 자발적 ‘백수’입니다. 오로지 책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주유소나 친구 비디오가게에서 잠깐씩만 아르바이트를 하지요.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캐릭터에 작가인 제 모습이 골고루 투영돼 있습니다.”

-27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에서 만난 작가 박씨는 책 읽기와 글 쓰기에만 능한 듯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2005년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작가 생활을 해 왔으나 언론 인터뷰는 처음이라 너무 떨린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경쾌하게 읽히는 그의 소설과는 달리 대화는 띄엄띄엄 느리게 진행됐다.

-부산에서 대학·대학원을 나온 그는 사회과학 전공 논문을 준비하며 책읽기의 즐거움에 푹 빠졌고, 이후 소설 쓰기에도 눈을 떴다고 했다. 그는 보통 신인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오늘의 작가상에 투고하며 수상의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제 소설이 빠르게 잘 읽힌다는 반응은 예상 밖이에요. 수많은 책들을 인용했는데…. ”

-그의 소설에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파트리크 모디아노, 폴 오스터, 레몽 장, 구효서 등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췌한 구절들이 구석구석에 배치돼 있다. 철학, 사회과학 저서들도 꽤 인용돼 있다. 이것들이 현학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주인공 서연이 책 읽기를 지식을 확장하기 위한 학습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몰입에의 놀이로 즐기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좋아하는 책을 읽을 뿐이다. 막연하긴 하지만 책을 읽고 있는 순간만은 적어도 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로써 주인공 서연이 책 속에서 발견한 빛나는 구절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이면을 알아가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한다. 책 읽기의 체험에만 의지했으면 이 소설이 수많은 ‘독서일기’와 비슷해졌을 것이다. 아내와 사별한 후 식당업으로 홀로 딸을 키우는,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아버지, 서연의 고교동창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겠다는 ‘유희’,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사랑에 빠진 친구 ‘채린’ 등이 주인공과 엮어내는 희로애락은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특히 서연이 절판된 책들을 구하기 위해 만나게 된 ‘남자’의 실연 복수극에 동참하는 이야기는 주말 드라마의 한 대목처럼 박진감이 있다.서연과 남자가 책을 주제로 한 대화 틈틈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끼워넣는 것은 이 시대의 문화코드가 영상 쪽으로 기운 것을 어쩔 수 없이 반영하고 있다. “저는 영화의 대본과 같은 소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소설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재미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이미 장편소설 하나를 써서 퇴고 중이라고 했다. 지금까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서른 살이 되어가는 여자들의 성장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그는 이후엔 탐정소설류를 쓰고 싶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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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29 09:12   좋아요 0 | URL
제가 옛날 사람이 되어 버렸나봐요.글을 읽다보니 순간 그런 생각도 듭니다.돈벌이 만이 최고의 가치로 규정되어 버린 개발독재 세대의 가치가 진저리처집니다.그러나 또한 노동을 통한 가치의 실현을 도외시하고 노동의 의미를 극도로 개인화,파편화 시켜 버린 프리터나 일명 백수족들의 윤리가 과연 옳바른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물론 백수가 늘어나는 것이 그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 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만.....책을 위해 백수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 가치 전도라는 생각이 듭니다.아무래도 저도 이제 늙나보네요.켕

로쟈 2006-06-29 09:38   좋아요 0 | URL
백수족들의 '윤리'에 대해서 이견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한 가지 '가능한' 선택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비노동만큼 반국가적, 반자본적인 것도 없을 테니까요. 자멸적인 것이긴 하나...

기인 2006-06-29 09:57   좋아요 0 | URL
박주영, 책세상에 칩거하는 ‘프리터族’ 그려" 는 '그녀'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음. 저는 노동을 통한 가치의 실현이, 그 '가치'가 교환가치나 사용가치가 아닌 자아실현 같은 '가치'가 존재한다는 데에는 부정적입니다. 적어도 상당수의 노동현실에 있어서는요.
그렇다고 부모를 착취(?)하는 삶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문학 대학원생은 뭐랄까.. 이 또한 일종의 프리터 족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 로쟈님 인터뷰 중에 인문학의 기생성은 이렇게 인문학 대학원생의 존재 방식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 공대 대학원생들은 투덜되기는 해도 먹고는 살던데요;;) 그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주로 '과외'라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종의 계급 재생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맘에 안 들어서 요즘은 과외를 안 하고 서서히 굶어죽어가고 있습니다 ^^;

로쟈 2006-06-29 10:02   좋아요 0 | URL
암세포를 죽이는 방법 중의 하나가 굶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 안 사기...

드팀전 2006-06-30 09:19   좋아요 0 | URL
출구가 막힌 사회가 주는 반강요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글을 쓴다거나 공부를 한다거나 하는 것 등을 목표로 자발적 백수를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그 역시 항구적 백수의 윤리를 쫓는 다기 보다는 단계상 거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프리터나 백수모델에 대입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문학 대학원생들은 지금은 그렇지만 다들 교수나 평론가나 뭐 이런 목표를 지향하고 가는 도정이지 자발적 백수나 프리터를 상정해 두고 공부하진 않을테니까요.
노동현장에서 노동이 자아실현 가치로 각성되기 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대게는 밥벌이를 위해서 마지 못해 일한다고 하지요.-좀 멋있게 이야기하면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라고 하겠지만-전 밥벌이란 말이 더 좋아요.직업 선택의 첫 관문에서 자신의 가치를 고려치 않고 밥벌이만을 위해 일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의 가치를 찾기 어려운 경우를 많이 봅니다.하지만 프리터나 백수처럼 취미의 일상화를 통한 자아실현 만큼이나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장에서 자아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어렵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지향점이라고 생각하기에 부정적인 견해는 잠시 거두어 두고자 합니다.
 

최근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두툼한 평전이 출간되어 살짝 흥분시키는 가운데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까지 열린다고 한다. 그를 좋아하는 시네필들이라면 '신경안정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제를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고 뒤이어 평전에 관한 정보들을 이어붙이도록 하겠다.  

 

국민일보(06. 06. 28) 누벨바그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프랑스문화원과 동숭아트센터가 ‘시네 프랑스’ 네번째 시리즈로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 연다. 다음달 4일∼8월29일 매주 화요일 저녁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트뤼포 감독의 대표작 9편을 만날 수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세계적인 거장이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이란 뜻으로 전형적인 영화 문법에서 탈피해 줄거리보다 표현에 중점을 두는 ‘작가주의 영화’를 주창했던 흐름이다. 누벨바그 이후 영화의 개념이 바뀔 정도로 세계 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트뤼포는 1940년대 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ue Francaise)’에서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등 영화 동지들을 만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아래 사진에서 앞줄 왼쪽이 트뤼포. 맨뒷줄에는 안경을 쓰고 있는 고다르와 샤브롤의 모습이 보인다.) 

 



-1954년 영화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에 발표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ema Francais)’은 프랑스 전역에 누벨바그를 불러 일으키는 토대가 됐다. 이 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영화를 독창성이 결여된 미적 침체상태로 보고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미적 가치기준을 마련했다. ‘작가주의 영화’의 탄생에 이론적 뒷받침이 됐다는 점에서도 영화사적 의의가 있다.

-트뤼포는 1959년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로 장편영화에 데뷔했다. 장인이자 영화제작자였던 이냐스 모르겐스턴이 “그렇게 잘났으면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하자 직접 영화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트뤼포는 이 영화로 그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 역시 예술적으로는 물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둬 세계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트뤼포는 이후 <400번의 구타>의 주인공 ‘앙트완 두아넬’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연작 시리즈 <앙트완과 콜레트> <훔친 키스> <부부의 거처>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20여년간 열정적인 영화작업을 계속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의 대표작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이웃집 여인>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 외에도 <마지막 지하철> <부부의 거처> <두 영국 여인과 대륙> 등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선보인다(*대표작 중 하나인 <쥘과 짐>이 빠진 것이 특이하다. 다들 봤을 만한 영화라서인가?). 


<상영작 목록>
- 7월4일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1977)’ / 15세 이상 관람가
- 7월11일 ‘400번의 구타(1954)’ / 전체 관람가
- 7월18일 ‘이웃집 여인(1981)’ / 15세 이상 관람가
- 7월25일 ‘마지막 지하철(198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1일 ‘훔친 키스(1968)’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8일 ‘부부의 거처(197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15일 ‘두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1971)’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22일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29일 ‘사랑의 도피(1978)’ / 15세 이상 관람가

 

그리고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의 10번째 책으로 출간된, 세르주 투비아나, 앙트완 드 베크의 평전 <트뤼포>(을유문화사, 2006). 원저는 1996년에 출간된 'Francois Truffaut'(갈리마르, 1996)이다. 번역본의 분량이 796쪽이니까 현재로선 결정판이 아닐까 싶다. 소개에 따르면, "트뤼포는 생전에 여러 차례 자서전을 기획했으나, 본격적인 자서전 집필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그가 수집해 둔 자료만 보존되어 있는 상황이다.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은 52세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52편의 작품, 동료들의 증언과 트뤼포의 일기, 메모, 개인 문집 등 방대한 사적 자료를 토대로, 트뤼포의 후배 영화인들이 집필한 책이다."

 

"부모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비행 소년으로 낙인찍혀 불행한 성장기를 보냈던 트뤼포는 단절된 외부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위해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수백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예술가들의 오만함에 조소를 보냈으며, '400번의 구타', '훔친 키스', '쥘과 짐', '아메리카의 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같이 '나'에 대한 영화, '삶을 찍는' 영화를 만들며 세계영화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하면, 이 전기는 그의 '입지전'이기도 하겠다.

 

 

 

 


 

 

 

 

"상처를 남긴 성장 과정, 히치콕, 혹스, 르누아르 같은 거장들에 대한 숭배와 교류, 영화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연출의 비밀들, 시네필들의 우정, 연애와 불륜,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의 방황을 비롯하여, 트뤼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사회의 지적인 분위기, 누벨바그 세대의 형성 발전 과정, 1968년 5월의 칸영화제 풍경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풍부한 사진과 트뤼포의 모든 영화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필모그래피가 함께 실려 있다."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시네필 평론가 정성일은 "이 책만은 정말 번역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다. 왜냐하면 매일 밤 나만 몰래 침을 발라가면서 페이지를 넘기며 트뤼포에 대한 사랑을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추천의 글에 적었는데, 그의 기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로선 유감스럽겠지만, 애호가 수준의 독자들에겐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도 몰래 침을 발라가며 얼른 읽어보도록 하자...

 

06. 06. 28.

 

P.S.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관련칼럼을 보충하는 의미로 옮겨온다. 내가 가보지 못한 트뤼포 영화제의 후일담도 곁들이고 있어서 읽어봄 직하다.

 

필름2.0(06. 07. 21) 트뤼포, 영화광의 초상

-7월 4일 오후 7시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프랑수아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영화제의 개막행사가 열렸다. 8월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상영될 9편의 트뤼포 영화 가운데 첫 번째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가 상영됐다. 이 개막행사는 최근 출간된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앙트안 드 바에크, 세르주 투비아나 공저, 한상준 역, 을유문화사)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것이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역자 한상준 씨가 스크린 앞에 나섰다. 인사말 대신 그는 모 월간 음악잡지 기자로 일했던 1984년 당시 트뤼포의 부음 소식을 듣고 썼던 편집후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한 젊은 영화광이 선배 영화광의 삶과 죽음에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 성격을 띤 그 글의 마지막은 트뤼포의 죽음과 더불어 영화광의 청춘기도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이 모두 한상준 씨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존경하는 감독의 평전 번역을 손수 맡은 외국의 영화광이 보여준 헌정의 표시로는 최상의 것이었음을 누구나 인정했을 것이다.

 

 

 

 

 

 

 

 

 

-한상준 씨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저널리즘과 학계,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꾸준히 활동했으며 우리끼리 영화 내공을 따지면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인물이다. 그는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 번역하기 위해 프랑스판과 영어판, 일어판을 두루 참고했는데 역자의 완벽주의는 출판사 측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의 손을 거쳐 깔끔하게 번역된 책은 8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세부적인 구성과 묘사력 면에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저자들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트뤼포의 삶은 영화에 비해 덜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훨씬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는 감옥 같은 학교와 학교 같은 집을 왕래하며 부모의 정을 거의 받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고 결핍된 애정을 스크린에 투사해 거기에 자기 삶을 바쳤다. 그의 구원은 오로지 영화에만 있었다. 그는 인생보다 영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드는 일과 영화를 비평하는 일과 영화인에 관해 말하는 일에 자기 삶의 상당수를 바쳤다.

 

-대체로 이런 영화광의 삶은 경멸을 받기 마련이다. 영화광이야말로 인생의 실상을 모르는 바보라는 경구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영화광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영화관에서 배우지만 영화관은 인생을 정직하게 가르쳐주는 장소가 아니다. 영화는 환상이며 꿈이며 도피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관은 현실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해방구이며 실제 삶의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 평전에 실린 실제 트뤼포의 삶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그런 고통스런 긴장이다. 이를테면 연애에 관해서도 트뤼포는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연애와 자신의 실제 삶에서 추구하는 연애의 경계를 곧잘 허물고자 했다. 영화에 빠져 살면서 실제 인생을 영화의 그것과 닮은꼴로 만들려 시도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경계 허물기는 쉽지 않은 것이어서 이는 트뤼포의 전체 삶에 예기치 않은 긴장과 혼란을 초래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제의 첫 번째 작품으로 상영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는 그런 트뤼포의 삶의 형식을 잘 요약해주는 영화였다. 아주 오래전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전성기를 지난 감독의 주책스런 상상력의 발현이라고만 여겼던 영화가 이번에 다시 보니 특별한 정취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결혼하지 않은 채 숱한 여자들과 연애하는 것에 전력하는 한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을 쓸 때 다른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책의 제목을 바람둥이라고 쓸 만큼 이 남자의 삶은 부도덕하다. 특별히 잘나서 주목할 만한 매력이 없는데도 숱한 여자들을 매혹시킨 이 남자의 비밀이 영화 속에서 명쾌하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유형의 삶이 주는 긴장의 중독성이랄까, 하는 것에는 어렴풋이 공감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베르트랑 모란은 각양각색의 여자들에게 신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 백화점에서, 세탁소에서, 렌터카 사무실에서,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집 근처 상점에서 자신의 눈길을 뺏는 다리를 지닌 여성에게 돌진하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여자들의 다리는 지구의 모든 방향을 측정하면서 평형과 조화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 컴퍼스'다.

 

 

-한 정신 나간 남자의 일대기를 다룬 듯한 이 영화는 기묘한 종교적 열정으로 승화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죽어가면서도 간호사의 아름다운 다리를 보고 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려 애쓰다가 쓰러지는 베르트랑 모란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의 이 영화에 관한 대목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에서 외제니의 아버지가 사망 직전에 사제의 금제 십자가를 낚아채려 애쓰는 묘사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에서 베르트랑 모란의 자전적 소설의 가치를 알아본 책 편집자이자 마지막 애인이었던 주느비에브는 베르트랑이 자기도취에 빠진 구제불능의 남자가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 비상한 혜안을 지닌 사람임을 인정한다. 이는 베르트랑의 영혼이 어떤 관습의 고정성이나 일상의 무감각에도 갇히지 않았던 열정의 소유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주느비에브는 베르트랑과 짧은 연애를 즐기면서 그가 자신의 가슴을 만질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는 관계의 긴장을 버텨내는 열정은 이 책에 따르면 프랑수아 트뤼포의 삶에서 줄곧 염원하던 가치와 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삶이 마냥 행복할 리는 없었다. 성장기의 자전적 체험을 다룬 <400번의 구타>로 성공하면서 겪은 부모와의 불화에서부터 아내와 딸들과 누린 일시적인 평화와 장기적인 부조화의 갈등도 그렇고 영화를 찍을 때 누린 공동체적 친밀감과 영화가 끝난 후에 느끼는 이별의 상실감 같은 것들이 그의 삶과 영화에선 늘 반복된다.

 

-이번 영화제에서도 상영되는 트뤼포의 또 다른 후기작 <이웃집 여인>에서 오랜만에 이웃으로 재회한 남녀 주인공은 젊은 시절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자신들의 열정을 되살릴까 말까 한동안 고민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마침내 억제할 수 없는 열정을 분출시켜 그들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여자는 남자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사랑의 절정기에 죽음을 맞는 이 돌연한 결말은 인생의 충만한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지극한 절망의 표현이다(*언젠가 TV에서 본 영화이다. 제라르 드파르디유 주연). 영화라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종의 시체애호증처럼 필름이 마모될 때까지 우리는 스크린 속 꿈의 실체를 거듭 음미하고자 영화관을 찾는다. 비디오와 DVD로 매체가 호환되는 현대에 그런 영화광의 매혹은 점점 과거의 것이 돼가고 있지만 유한한 실제 삶과 달리 실제 삶을 모방한 이미지는 불멸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트뤼포의 영화적 스승이기도 한 평론가 앙드레 바쟁의 명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영화는 현실에서 되살릴 수 없는 일종의 시체와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불멸성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다. 트뤼포의 삶과 영화는 바로 그런 삶의 불가능한 충만함에 대한 거듭된 시도이고 열정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트뤼포는 프랑스 영화계의 기린아가 되기 위해 엄청난 야심을 불살랐던 젊은 시절부터 영화계의 중심부에 오르게 된 장년에 이르기까지 숱한 권력적 행보를 서슴지 않았으면서도 그의 스승 앙드레 바쟁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극적인 삶을 살았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그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흥미로운 영화세계를 펼쳤으며 그것 이상으로 굴곡 많은 삶의 궤적을 보여준 한 영화광의 삶을, 스크린 안과 밖이 겹치면서 생기는 긴장과 열정의 충돌을 통해 상세히 묘사하는 역저로 누구에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

 

06.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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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28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잘났으면 영화를 만들어보라”...그래서 만든 영화가 걸작이었으니 그 장인의 표정이 어떻했을까 심히 궁금해지네요^^

로쟈 2006-06-2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떨떠름했다면 좀 모자란 인격이고 그래도 부듯해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제 구내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서 반갑고 놀라웠던 책은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이다. 기분상으론 '횡재'한 느낌이었지만, 거저 책을 얻은 것도 아니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얌전하게 두고온 책이니 야단스레 떠들 일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반가운 마음이 다 가시지 않는 것은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이 나온 걸 눈여겨보았고, 연말에는 즐겨읽던 일간지의 '엑스 리브리스'에서 역사부문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었기 때문에(<치즈와 구더기>의 저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책과 함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어둔 까닭이다. 아래가 러시아어본이다.

Cover. Прошлое - чужая страна. Пер. с англ. Лоуэнталь Д.

 

 

 

 

 

 

 

해서 저자나 책의 지명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내겐 읽어볼 만한 '대단한 책'으로 각인됐고, 귀국한 이후에 원서를 구해볼 생각을 했었다. 그게 어쩐 일로 흐지부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책의 두께와 만만찮은 가격이 걸림돌이었을까? 하드카바의 러시아어본도 상당한 고가의 책이다). 그러던 차였으니까 아무런 예고없이 출간된 국역본이 조금 과장하자면 잃었던 혈육을 되찾은 것 같은 '감동'을 전해준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어정쩡하게 시중에 깔린 탓에 지난주 리뷰들에는 다 빠졌지만, 아마도 이번 주말 북리뷰란들에는 큼지막한 서평들이 실린 것이다.  

하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그다지 여유로운 성격이 못되는 나는 이곳저곳에서 책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려고 했고, 아직 알라딘에 충분한 책소개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른 곳에 있는 책소개라도 여기에 옮겨놓는다(출판사측 리뷰인 듯한데, 알라딘에는 왜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나로선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와 함께 올여름의 끝무렵에 읽어볼 책으로 꼽아두고 있는 책이다(좀 여유가 있다면,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대출해서 읽어보아도 좋겠다).

 

 

 

 

-과거는 왜 낯선 나라인가? 19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현재와 유사하다는 가정 아래 규정하고 판단했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항상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되었고, 중요한 사건들도 항상 유사한 동기나 열정에 의해 촉발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사실 과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삶은 지금의 삶과는 아주 다른 존재방식과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낯선 나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사실상 과거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과거가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사실상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나라이기 때문에 인지될 수도 판단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불변하고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우리와 상호작용하며, 과거와 현재가 융합하는 유산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과거는 실재하지만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 알려질 수 없으며’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된다’고 말한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재해석된 과거가 과거의 진실을 전복시키기보다는 과거의 의미를 이해하고 과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로 부활한다. 이 책의 1부에서 논의되었듯이 과거는 우선 선택적으로 이용된다. 과거는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으로서 혜택을 주기도 하지만 현재를 억압하거나 과거의 악행이라는 족쇄를 현재에 채우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하고 확대하기도 하며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하거나 삭제하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 인식과 이용의 기본 태도에서부터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거의 개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기억에만 의존하던 시대와 달리 역사가 씌어진 이후부터는 과거가 훨씬 믿을 만하고 확실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역사 역시 해석자의 주관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현재의 필요라는 요구의 개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건 이후 연달아 일어난 이후의 새로운 사건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현재 서술자의 지적 혜택이라는 문제도 개입되어 있다. 또한 기억과 역사는 모두 과거로부터 살아남은 물질적 흔적들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데, 유물 역시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과거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개조하고 변형시키는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3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과거가 현재에 가져다주는 분명한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합의된다’고 느껴진다고 말한다. 과거는 아주 일차원적으로는 개인의 향수를 달래주고 안정감을 제공하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월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 목적에 맞게 합의되고 개조되는 것이다. 게다가 훼손된 과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보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할 때조차도 사실상 현재의 방법론으로 과거를 조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재해석된 과거는 조금의 진실도 담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폄하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아니다’이다. 저자는 역사가 다시 기록되듯이 과거가 현재의 지식과 가치가 변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피한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과거는 불변하는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기억, 역사, 유물의 누적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누적물이라는 개념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개조된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그것을 만들어낸 자들뿐 아니라 이를 물려받은 사람들의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뿐 아니라 현재의 전망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며, 또한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부활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다. 과거가 변화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과거는 또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의 신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단지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처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렇듯 끊임없이 변화하며 현재로 부활하는 과거는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을 떨쳐내는 데 이바지하며 자유롭게 선택된 미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결론 부분을 저자는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도 결국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비로소 과거를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단순히 보존되기만 하는 세습된 유산은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된다. 과거는 길들여짐으로써―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용인하고 기뻐함으로써―가장 잘 이용된다.”

06. 06. 28.

P.S. 주말 북리뷰들을 훑어봤는데, 국민일보와 한국일보 등만이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 대한 서평을 싣고 있다. 이 중 한국일보 안준현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07. 01) 과거는 낯선 나라다 '변화하는 과거 자유로운 미래'

-이승만,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과거인가. 공산 독재를 막은 ‘자유민주’ 국가의 수립기이자 숙명 같은 가난을 떨쳐낸 경제 건설의 눈물 나는 여정이었을까. 아니면 친일파와 손잡고 분단을 이끈 원통한 세월이자 장기 집권을 위해 인권과 노동을 짓밟은 암흑 같은 독재의 시기였을까.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지만 과거는 이미 실재했던 확실한 대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미래는 다양한 예측의 영역인 반면, 과거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실체를 가진 확실한 기록으로서, 단 하나의 올바른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날선 대립도 이런‘고정불변의 과거, 올바른 진리’라는 사고의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는 곧잘 이용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현재를 억압하는 족쇄를 얻기도 했으며,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 확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 삭제해 왔다.

-하지만 과거 역시 미래처럼 변화의 가능성이 늘 열려 있는‘낯선 나라’라는 게 저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방대한 인문학 지식과 깊은 성찰로‘그리워하고, 돌아보고, 변형시키는’, 인류와 과거의 관계 맺기를 탐구한다. “과거는 아주 다른 존재 방식과 사고와 믿음의 세계이며, 우리가 걸어온 길이되 현재와 단절된 세계이다.”

-특히 향수(노스탤지어)가 일종의 소비산업이 되고, 박물관, 역사테마공원, 유적 등이 관광지가 된 현대에서 과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저자는 ‘과거 바라기, 과거 알기, 과거 변화시키기’의 세 주제로 과거에 접근한다. ‘과거 바라기’는 소설과 영화, 17~18세기 영국 프랑스, 빅토리아시대 영국, 남북전쟁 전후 미국 등의 구체적 예를 들어가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심리를 파고든다. “과거는 어떻게 우리를 풍요롭게 혹은 빈곤하게 하는가.

-우리는 왜 과거를 포용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는가.”‘과거 알기’는 과거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억, 역사, 유물’이라는 세 경로를 통해 고찰한다. ‘과거 변화시키기’는 과거를 인지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과거를 변화시킨다는 묘한 역설을 얘기한다. 현대 미국 영국에서의 과거 유산 복원이나 개조 움직임 등을 통해 인간이 과거를 어떻게, 왜 변화시키며, 그런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핀다.

-저자의 결론은 과거는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과거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도, 미래에 볼 과거도 아니다. 과거는 어떤 시기 특정한 사건을 넘어서는 연속적인 기억과 역사와 유물의 누적물이며, 이 점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택 가능한 전망을 제공하는 ‘자유롭게 하는’과거가 된다. “과거라는 누적물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 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 개조된 부분까지 포함한다. 과거는 그것을 만든 자들뿐 아니라 물려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의 증거다.”

-1985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되는 등 명저로 통했지만 방대한 분량과 쉽지 않은 내용 탓인지 지금까지 번역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인 역자들은 후기에서 “다양한 자료와 지식에 매혹되어 논점을 잃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라며, “끝도 없이 고유명사를 제시하며 새로운 지식을 강요하는”이 책을 다 읽는 것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긴 여정’이 될 것이라고 했다(*아무도 나서지 않는 번역으로의 긴 여정에서 돌아온 역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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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17 08:17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선생의 비평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 제목이 좀 낯익은데,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를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둘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보니 L. P.하틀리의 소설 <중개인>에 나오는문장이라고(로웬덜의 책은 장서용으로 구입만 해놓고 읽진 않았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