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인도의 한 가정부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하게 됐다는 내용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한 印 가정부의 인생역전"이 기사의 타이틀이다. 조만간 번역/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프리뷰'로 분류해놓는다.

Baby Haldar

한국일보(06. 07. 15) 시골 출신의 가정부에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한 인도 여성의 고단했던 삶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화제의 인물은 자전적 소설 <평범하지 않은 인생(A life less ordinary)>를 펴낸 바비 할더(32).

-프랑스 일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14일 못배운 인도 여성들이 전통이란 미명 하에 얼마나 억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책이 그동안 소설가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재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며 자세히 소개했다(*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인도 출신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이다. 가정부 또한 그녀가 말하는 '하위주체'가 아닌가?).

 

 

 

 

-4살때 어머니가 가출하고 12살때 강제로 결혼한 뒤 남편에게 온갖 구박을 박다가 결국 집을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할더는 책의 첫 부분을 이렇게 시작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거의 바깥에서 살았고 가족 부양은 아예 신경쓰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는 시장에 간다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4살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집에 쌀이 없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후 계속해서 다른 새엄마가 들어오는 가운데 할더는 가정불화와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러던 어느날 할더의 언니는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먹을 것이 없다는게 이유였다. 하지만 이때 할더는 어린 나이에 시집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몰랐다. 할더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나이가 배가 많은 남편에게 시집가라고 했을 때에도 "결혼하면 모든게 좋을거야. 최소한 밥은 실컷 먹겠지"라고만 생각할 정도로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지옥이란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 이듬해에 임신을 했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했다. 하루하루가 악몽인 가운데서도 할더는 2명의 아이를 더 나았다. 그러던 어느날 할더는 남편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졌다. 먼저 시집갔던 언니는 형부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도 전해졌다.

-집을 나오기로 결정한 할더는 무작정 뉴델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나 청소부의 일을 하면 되겠지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하지만 도시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아들을 한 집에 하인으로 보내고 자신도 가정부로 일하면서 생활은 좀 나아졌지만 그녀가 만나는 집주인들은 인간도 아니었다. 어떤 집주인은 일을 많이 부려먹으려고 업무 시간에는 아이들을 다락에 가두라는 요구까지 했다. 그녀는 "한 집주인은 커미와 음료수, 과일 등 시키는 대로 갖다주고 나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사지를 하라고 했다. 정말이지 잠시도 쉴새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13살때 엄마가 된 뒤 너무나도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바비의 어떤 과거를 보더라도 그녀가 인도 문학계에 혜성으로 떠오른 이유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사실 지독한 집주인들에게 시달리면서 혼자서 3명의 자식을 부양해야 했던 할더로서는 독서라든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그랬던 할더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그녀가 인류학 교수 출신의 브라둡 쿠마르의 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교수들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서재를 청소하라고 시켰을 때 할더가 먼지를 털면서 슬쩍슬쩍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쿠마르는 할더가 작가로서의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연필과 노트를 주면서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5세였다. 할더의 글을 읽고 뭔가 특별하다는 판단을 했던 쿠마르는 계속 글을 써보라고 권했고 몇달 뒤 그는 할더와 마주 앉아 책을 낼 수 있도록 문법상의 오류와 중복된 부분을 뜯어 고친 뒤 이를 복사해 출판사에 있는 친구에게 보냈다.

"아주 좋아하더군요. 내 글이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연상하게 했던가 봐요. 그래서 매일 내가 겪은 삶을 써내려 갔죠. 그때만 해도 책으로 나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Light and Darkness

-할더의 글은 문단에서 획기적이란 평가를 받으면서 인도에서 사용되는 몇가지 언어로 출판돼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고 있다. 올 초에는 영문판도 나왔다. 이 책에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나 어떠한 감상주의적 색채도 없다. 할더는 아버지나 남편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는다(2004년 9월의 BBC기사를 보니까 그녀의 첫번째 책은 <빛과 어둠(Aalo Aandhari)>(사진)이며, 이 작품은 영화화 제안까지 받아놓고 있다고 한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은 그녀의 신작이면서 자전적인 대표작인 모양이다).

-하지만 할더는 그들에 관한 `팩트'만 갖고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담한 수법'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델리 인근 구르가온에 있는 쿠마르씨의 하인숙소에 살고 있는 할더는 지금도 낮에는 가정부로 일하면서 밤에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나면 비로소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또 글을 마무리하고 나면 아버지와 남편에게 나름대로의 복수를 한 것 같아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힌두스탄 타임스는 서평에서 "이 책은 인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수백만 밑바닥 여성들의 운명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평가했다(*제1세계에서 근대문학은 이미 종언을 고했지만, 제3세계에서 근대문학은 아직 '미완의 기획'인 것. 인간의 운명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우리 주변에서는 점차 쇠퇴해가고 있는 '위대한 문학'이다).

-IHT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프랑크 매코트가 소년기의 비참한 생활을 엮은 자서전인 <안젤라의 재>에 견줄만한 이 책이 1970년대 북인도에서 살았던 한 여성의 황량한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전했다.(정규득 특파원)

06. 07. 15.

P.S. 바비 할더(1972- )의 자전적 소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 생각보다는 빨리 번역돼 나왔다. <신데렐라가 된 하녀>(문이당, 2006)이 그것이다. 제목 대로라면 작가=신데렐라이다?! ..

06.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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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7-15 19:19   좋아요 0 | URL
(*교수들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_.. 라고 표시해 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

로쟈 2006-07-15 19:39   좋아요 0 | URL
사실 가정부 할더 덕분에 교수 쿠마르의 이름이 '불멸'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니까 할더 또한 쿠마르의 은인인 셈이죠. 그런 게 변증법이기도 하구요...

이리스 2006-07-15 22:38   좋아요 0 | URL
누구를 만냐느냐, 그것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꽤, 크게 바뀌지요.
 

오늘의 작가상과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정미경의 신작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생각의나무, 2006)의 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근에 발표된 한국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두어 명의 다른 작가와 함께 정미경은 '눈에 띄는', 혹은 한 작품에서 작가 즐겨 쓴 표현을 빌리자면 '안기는' 작가이다. 무엇보다도 안정감 있는 문장이 신뢰감을 주고 부르주아적 삶의 엘레강스한 비루함을 포착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새로운 걸 발견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네 잔혹한 일상을 정확하게 기록해두는 것도 작가의 덕목이다). 이 '관심 작가'의 작품들을 더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 이유이다. 기사의 타이틀은 "거짓말 하는 자여, 그대 약한 자여!"이지만, 본문중의 표현으로 바꾸었다.

한국일보(06. 07. 15) 진실은 과연 아름다운가. 삶의, 그리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그렇다면 너무 뻔하지 않은가. 또 그렇다면 삶이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버젓해보이는 것들의 빈약한 실체를 흔히 본다. 거짓이 진실을 지탱하고 진실이 거짓을 거느림으로써만 간신히 서는 삶의 어쩌지 못할 국면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때의 진실과 거짓은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극명하게 맞서는가. 우리의 판단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스스로를 심판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루의 생을 연장하기 위해 허구의 교태를 떨어야 하는 ‘세헤라자데’가 바로 우리 자신(‘무언가’)이기에,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면은 설탕보다, 화장지보다, 혹은 와인빛 루주보다 더 필수적”(‘표제작’)임을 알기에 그렇다. 정미경씨의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생각의 나무)는 그렇게 ‘비루한 다큐멘터리’ 같은 우리 삶의 이면들을 차갑게 응시한다.

 

 

 

 

-돈으로 이국(異國) 사형수의 신장을 사서 생을 연장한 뒤 그 죄의식에 시달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는 카메라를 매고 위험한 분쟁지역만 찾아 다닌다. 삶과 죽음의 경계로 자신을 내모는 ‘나’에게 참다 못한 연인은 이렇게 말한다. “잘난 척 하지 마. 만약에,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아? 아니잖아.”(58쪽)

-‘무언가’에는 타인의 음탕한 목소리를 들어야만 간신히 발기하는 남자 ‘K’와 그 ‘조잡한 픽션’ 속에서 스스로 사랑 받는 여자를 연출함으로써 대리 만족하는 ‘나’가 나온다. 엉터리 개발정보로 땅을 파는 회사의 전화 상담원인 ‘나’는 환멸의 일상에 지친, K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고용된 존재다. 그렇지만 문득 이 미친 사랑놀이를 고객인 K보다 ‘내’가 더 원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떨쳐내지 못할 헛것들을 붙들고 산다는 점에선 K와 내가 다를 게 없”(110쪽)지 않은가. 다르지 않음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의 자조와 냉소와 푸념과 탄식은, 수긍하기 싫지만 엄연히, 우리 일상의 국면에 닿아있고, 빈약한 실체의 육성으로 사무친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말하는 나까지도 위로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진화된 거짓말을 하고싶다."(‘무언가’)

"사람들은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거짓말이나 불성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를 끊어놓는 것은, 물 위로 떠오른 익사체처럼, 대개 감추어져야 할 사실이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결하고 때로 사악하다.…모든 거짓말은 아름답다. 자신을 혹은 상대를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나 거짓말을 하니까. 다만 끝까지 지켜지지 못한 거짓말만이 더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자신을, 상대방을 깊이 찌른다."(‘모래폭풍’)

-그럼에도 “사람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다. 때때로 한없이 사소한 것에 기대어 삶의 참담한 무게를 견”디고, 제 울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요한 일상의 힘에 맞선다. 비루한 연애에 힘겨워 하며 매달 월급날마다 백화점에 들러 자신에게 선물을 부치는 여자(‘검은 숲에서’), ‘서로의 은닉된 삶의 한 조각씩’을 나누며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서로를 대하는 남자와 여자(‘표제작’) ….

-작가는 이 서글픈 삶의 이야기를 ‘바다 위로 빗방울이 스미는 풍경’을 바라보며 ‘비냄새, 바다냄새’를 맡고 선 자의 표정과 내면으로 나직이 전한다. 위안이나 희망은 자욱한 해무 속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 너머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들은 표제작에서 말한 ‘케타민’ 주사앰플 같은 것인지 모른다. 악몽을 꾸게 하는 마취약물. 그 주사를 맞고 잠들었다 깨어나면 누워있는 병실이 얼마나 평온하며 따스한 곳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최윤필 기자)

06. 07. 15.

P.S.  작가의 장편소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현대문학, 2005)는 전년도 동인문학상 후보작이기도 했는데, 당시에 조선일보에 게재됐던 후보작가 인터뷰를 자료삼아 옮겨온다.

조선일보(05. 09. 29) 자본주의의 본질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확대 재생산, 그리고 그것의 성취 속도를 놓고 벌이는 경쟁적 질주에 있다. 2005 동인문학상 최종 후보작 네 작품 가운데 유일한 장편소설인 정미경 씨의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현대문학)는 바로 욕망과 질주를 정색하고 다룬 작품이다.

―동인문학상이란 어떤 상이라고 생각하나.

“아 그런 어려운 질문을….(웃음) 단편이 아닌, 장편이나 소설집에 주는 상으로서는 공정하고 투명해서 작가로서는 받고 싶은 상이다.”

―심사위원들께 불만은 없는가.

“상이 오래되다 보니 원로해지셨는데,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봐주셨으면 한다.”

―당신은 철저한 자본주의자인가.

“사람이 지배하던 돈이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진화하면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카지노 자본주의로 넘어와 이젠 뭐든지 ‘한탕’하려고 한다. 문학에서도 팔리면 선(善)이고 안 팔리면 쓰레기다. 나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받으면 기자가 되고 싶다.(웃음) 소설가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소설이 다를 것이다. 나는 소설이 나를 매혹했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 사랑, 소설, 결혼처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에 인간이 매혹되는 것 같다.”

―이번 후보작을 보면 1987년 ‘6월 항쟁’의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젊은이들이 15년 뒤인 2002년 6월 월드컵 열기로 들뜬 광화문 거리에서 철저히 변화된 모습으로 만난다. 신분상승, 명예욕, 자본주의적 욕망에 중독된 그들이 타락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이유는 뭔가.

“모두가 타락하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사회의 영향을 받게 돼 있다.”

―소설 도입부에서 주인공 이중호는 시속 180㎞로 자동차를 몰며 엑스터시를 즐긴다. 운전할 때 과속하는가.(정미경 씨는 폭스바겐의 골프를 몬다.)

“어떤 사람이 내가 운전하는 걸 보더니 ‘소설 쓰지 말고 카 레이서로 나서라’고 했다. 굉장히 과속하는 편이다.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낼 때는 계기판을 안 본다.”(*정미경은 '대한민국 1%'의 감성을 다룰 줄 아는 아주 드문 작가이다.)

―금융투자기법, 정치권의 움직임 같은, 일반적인 접근이 쉽지 않은 영역에 어떻게 취재를 했는가.

“자료도 모으고, 전문가 인터뷰도 하고, 그들이 일하는 현장도 가 보고, 직접 투자도 해보았다. 충격적이고 재미있었다. 특히 선물 옵션은 하루 만에 열 배 이상 따거나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이 금융투자 전문가인데 콜걸을 10명 이상 만나면서 한 번도 섹스를 하지 않는다. 돈 잃고 따는 것 이외는 관심이 없다.”

―소설 쓸 때 몰입을 위해 어떻게 하나. 휴대폰 꺼놓기, 가족과 헤어져 있기 같은…?

“집 근처 작업실이 하나 있다. 걸어서 6, 7분 정도. 각성 효과를 위해 커피, 녹차, 물을 마시고, 점심은 안 먹는다.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냉장고에 포도와 감을 넣어 놓았는데 손을 안 댔더니 나중에 건포도와 곶감이 돼 있었다. 동창도 연락을 안 해준다. 거의 왕따다.”

―남편(김병종)이 유명 화가이며 산문집도 여러 권 냈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이 질문 빼달라.(웃음) 도움도 걸림돌도 되는 양면성이 있다. 내가 피해를 줄 때도 있다. 그 사람 책 나왔을 때 ‘마누라가 써 준 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큰아이도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는데 선생님이 ‘네 엄마가 써줬냐’고 하더라는….”

―이번 작품이 마음에 드는가.

“인간을 확대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여전히 수다스러웠다. 안드레 코스톨라니라는 금융투자가가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라는 말을 했다. 나도 내 마음의 열정을 차갑게 다루었으면, 소망하고 있다.”(*쿨하다는 건 이 작가의 강점으로 보인다. 감정의 군더더기를 비교적 남기지 않는다는 것. 건포도나 곶감처럼 더 말린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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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관련 신간 리뷰를 옮겨온다. <앤디 워홀 손안에 넣기>(마음산책, 2006)이 책의 제목인데, "미국의 한 딜러가 앤디 워홀의 그림 한 점을 소장하기 위해 고투한 12년간의 여정이자, 미술시장에서의 장사 노하우에 대한 상세한 기록"으로서 "12년에 걸친 '워홀 찾기'와 그 과정에서 지은이가 체험하며 얻은 경험들은, 워홀의 미술사적 위치뿐 아니라 그의 명성에 한몫을 한 책략과 마케팅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려준다"고. 아래는 저자 리처드 폴스키.

원제가 'Bought Andy Warhol'(2003)이니까 '손안에 넣기'는 무슨 비유가 아니다(더불어 워홀이 생전에 떼돈을 번 이유도 짐작할 만하다). 부제는 '미술가, 딜러, 경매 하우스, 그리고 컬렉터들의 숨은 이야기'. 제목이 이미 8할 이상을 말해주고 있다. 리뷰는 문화일보의 것이다.

문화일보(06. 07. 14) 왜 부자들은 미술품 수집에 열성일까. 높은 안목, 부의 과시, 그것도 아니면 체면치레? 저자는 미술품 수집의 마력을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럭셔리’라는 말로 표현한다. 돈만 있다면 누구나 비싼 차, 좋은 주택, 명품패션을 즐길 수 있지만 ‘세상에 단 하나’라는 고유성이 있는 예술품은 다르다. 이것이 상류층의 경쟁심에 불을 붙이고, 컬렉션 과정 자체에 묘미를 느낀 애호가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미술품 거래를 담당하는 딜러이자, 화랑주인, 기고가까지의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작가와 딜러, 그림 경매와 매매, 애호가 혹은 컬렉터들의 내면을 상세히 기록했다. 큰 줄거리는 미국 팝아트 전문딜러인 저자가 앤디 워홀의 작품에 반해 처음 구입하기로 마음먹은 시점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후에야 작품 한점을 구입한 경험담이다(*그 12년이 분량으론 443쪽이다). 그러나 작품구매 과정보다 앤디 워홀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소개, 미술품 거래의 실체, 컬렉터의 성향 등 서구 미술계의 온갖 잡다한 이야깃거리를 술술 풀어나간다.



 

 

 

-먼저 저자는 자신의 경험처럼 특정 작가, 특정 작품에 매료된 이의 즐거움을 고백한다. 미칠듯이 갖고 싶고, 나만의 공간에서 즐기고 싶은 미술품을 발견했을 때 애호가가 느끼는 감정은 첫사랑 못지않은 황홀경이라는 것. 팝아트 중에서도 저자가 소개하는 앤디 워홀 이야기는 더욱 매혹적이다.

-“돈과 명예가 나의 페티시(fetish·숭배물)”라고 거침없이 말했던 앤디 워홀은 미술계에서 홍보와 대중적 지명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작가였다. 공방으로 불리는 작업실에서 조수들을 이용해 작업을 하고, TV와 대중스타를 적극 활용했던 앤디 워홀의 생활 자체가 곧바로 20세기를 반영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왜 예술 혹은 예술가가 한 시대의 증명서인가를 알게 해준다.

-또 주식거래와 비슷한 투자일수도 있지만 좋은 예술품을 사고 팔려면 예술 자체를 공부해야 한다는 충고도 들어 있다. 초짜컬렉터인 한 부부를 모델로 갤러리를 방문해 작품구입 설명을 듣게 하고, 그 과정을 세세히 기록한 것은 미술품을 사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귀중한 간접경험이 될 듯 싶다.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유명갤러리와 미술관, 현대미술품을 보는 관람객 등 현지를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생생한 사진들이 눈을 즐겁게 하고, 저자 특유의 유머감각이 책장을 쉽게 넘기게 만든다. 일례로 미술품 거래때 조심하라며 저자가 남긴 말. “‘다락방에서 발견했어요’와 ‘할머니가 주신 거예요’는 믿지 말라. 특히 ‘할머니의 다락방에서 발견한 그림이에요’는 더욱 조심하라.”

06. 07. 14.

P.S. 경향신문의 리뷰기사도 옮겨온다. 타이틀은 "작품보다 돈가치…미술시장 꼬집기"이다.

경향신문(06. 07. 15) “이 바닥이 다 그렇지 뭐.” 사람들은 어떤 분야의 잘 알려지지 않은 뒷모습을 곧잘 ‘바닥’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이 책은 미술 ‘바닥’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쓴 책이다. 책 제목을 원제 그대로 해석하면 ‘나는 앤디 워홀을 샀다’가 된다. 말 그대로 화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12년에 걸쳐 ‘워홀의 작품을 어떤 경로를 통해 얼마에 사게 되는지’에 대해 기술한,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다.

-작가가 조명하고 있는 것은 ‘미술작품’ 자체가 아닌 ‘미술 시장’이다. 그가 워홀의 샌프란시스코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던 어느날 밤 집에는 10통이 넘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병원에서 무사히 수술을 받은 워홀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 그리고 누군가의 한 마디, “가격을 3배로 올려요.”

-작가의 여정과 함께 워홀의 작품을 따라가노라면 결국 가격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미술 시장의 이면을 만나게 된다. 4,100점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그림을 파는 직업 미술가에 대한 인식을 개척한 워홀과 미술품 거래상의 모습은 닮았다.

-미술품 투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는 워홀의 작품을 중간 중간 곁들이며 미술 시장에 대해 생생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워홀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나 그의 괴짜 인생에 대한 일화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2% 부족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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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북리뷰의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에서 도정일 교수의 칼럼 ''문학집배원'의 인기비결'을 옮겨온다. 문학의 사회적 가치/효용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는지라 제목을 본문의 문구인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로 바꾸었다. 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짐작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인간은 대체로 유구하다), 칼럼은 보다 긍정적인 견해를 제출하고 있다.

한겨레(06. 07. 14) 평소에 시, 소설, 드라마 같은 문학작품을 즐겨 읽거나 일 년에 최소한 몇 편이라도 챙겨 읽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될만한 어떤 행동상의 특징을 보이는가? 문학교수들치고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을 향해 던져보거나 그 질문에 자진해서 시달려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선은 그것이 문학 그 자체와는 별 관계없는 질문처럼 들린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정치학을, 혹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만한 행동 특징을 보이는가라는 것이 정치학이나 경제학 본령의 질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어쩌면 이게 진짜일지 모른다) 그 질문에 그렇다/아니다로 대답할 실증적 증거를 들이댈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거라면 몰라도 문학독자와 비독자 사이의 행동 차이라고?

-그러나 그 질문은 상당히 의미 있다. 평생 대학 강단에서 소위 ‘문학 강의’란 걸 하면서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던져보는 일이 없다면 문학 강의가 될까? 학생들에게 시, 소설, 드라마를 읽어라 해놓고 그 읽기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어떤 변화 효과를 일으키는지 아닌지 아무 관심도 없다? 내 생각에, 많은 경우 문학 강의가 망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질문이 강의의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교육 일반이 의도하는 것이지 '문학 강의'만의 특화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변화를 측정하거나 측정의 방법을 찾아내는 일은 문학 강의의 본령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질문 자체가 아예 제기되지 않는다면 문학 강의의 교육적 의미는 살아날 길이 없다(*이러한 주장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얼마간 공감하면서도, 이젠 문학교육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해 있구나, 라는 유감). 학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중적으로도, 문학을 읽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문학 독서의 중요성을 어디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구 문예진흥원)는 작년부터 ‘문학의 대중적 친숙화’를 위한 사업들을 펼쳐오고 있다. 작년에는 ‘문학회생’이라는 이름으로, 금년에는 ‘문학나눔’이라는 명칭으로 전개되고 있는 사업들이 그것이다. 회생이건 나눔이건 간에 사업의 목적은 문학의 대중적 향수 기회를 넓히기, 곧 사람들이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크게 열고 넓혀보자는 것이다. 창작자들을 위한 생산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향유자를 위한 지원이다. 이 점에서 문학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고 들어가 시민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문학을 나눌 수 있게 지원한다는 것은 독서인구 키우기는 물론이고 시민의 예술참여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사업이다.

-문학의 이런 대중적 친숙화 작업의 하나로 지금 두 달째 진행되고 있는 것이 시인 도종환의 ‘시 배달’이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인터넷으로 배달해주는 것이 그 사업의 골자다. 시인이 손수 고른 시가 플래시 영상카드에 실려 텍스트와 낭송의 형태로 매주 월요일 아침 사람들에게 ‘선물’로 배달된다. 스스로 ‘문학집배원’이 되어 시 배달에 나선 시인은 우리더러 잠깐 삶의 템포를 조절하고 “당신의 한 주일을 시 한 편 읽는 것으로 시작”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일상의 바쁜 쳇바퀴에 갇힌 사람들에게 이건 신선한 메시지다. 시인의 이런 노력에 대한 호응이 ‘폭발적’이라는 소식이고 보면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얼마나 목말라 있었던가를 알만하다. 대구 지역에서는 교육청이 나서서 대구경북 일원의 중고등학생 2만 여명에게 월요 아침의 시를 받아볼 수 있도록 주선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람들은 왜 시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시가 그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의 핵심은, 내 생각에, 시가 ‘연결의 다리’라는 데 있다. 시는 사람들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하고 나를 나 아닌 모든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고 나를 나 자신에게 연결한다. 사람과 사람들을 이어붙이고 인간과 별과 바람, 나무와 구름, 지렁이와 개구리까지도 한데 이어 붙인다는 점에서 시는 인간이 가진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무엇보다도 시는 내가 나보다 더 큰 어떤 것, 내가 ‘나’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과 연결되게 한다.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이라는 소리가 고깝게 들리는 사람에게라면 말을 바꿔도 된다. 나보다 더 작고 약하고 미천한 것, 그래서 내가 노상 업신여기고 깔아뭉개고 구둣발로 걷어찼던 것들을 어느 순간 나에게로 이어 붙여 그 모든 작은 것들의 존재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다. 사람들이 시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는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시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시가 가진 이 연결의 마술 때문이다. 시가, 문학이, 사람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의 원천도 거기 있다.

 

 

 

 

-문학독자한테서는 비독자와는 다른 어떤 행동상의 특징이 발견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의 사회적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시도를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미국 예술기금위원회(NEH)가 2002년에 연방 통계청을 통해 실시한 ‘미국인의 예술참여도’ 조사를 보면 그 질문과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발견은 문학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자선활동이나 자원활동 같은 사회적 참여행위의 빈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다른 변수들과는 정말로 무관한 것일까?).

-문학독자들이 사회적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3%임에 비해 비독자의 참여율은 17%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참여란 연결의 다른 이름이다. 문학 외의 예술 형식, 음악회에 가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인접 예술 영역에 대한 참여율도 문학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는 것도 그 조사에서 드러난 발견의 하나다(*문학 체험이 공감의 능력을 확장시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긴 하다. 그런데, 거꾸로 미술관/박물관을 방문할 여력이 되고 자선활동에 참여할 준비가 돼 있는 이들이 문학도 향유하는 건 아닐까? 이 '인과성'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가능한가?).

 

 

 

 

-우리는 문학의 가치와 효용이 그것의 무효용성에 있다는 주장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 있다(*가장 대표적인 건 자신의 '쓸모없음'으로 유용성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는 김현의 문학론이다). 그 주장의 진리 가치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문학을 읽고 즐기는 행위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행위가 사회적 삶의 기초라면, 문학 읽기는 사람이 사람으로 자라고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그리고 시민적인 힘의 원천이다. 도종환 시인의 시 배달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의 큰 줄기 하나도 거기 있을 것 같다.

(*)시배달의 사회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치와 효용'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사회적 장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확장시키려는 노력과 결부돼 있으며 또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나는 문학전공자들의 인성이 (아무래도 문학작품을 덜 읽게 되는) 공학도/공학자들의 인성보다 특별히 우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는 게임중독자들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는데, 게임매니아를 자처하는 문학교수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인지! 해서, 이 칼럼은 아무래도 아침에 배달되는 기분좋은 덕담 정도로 치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문학이 사람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가? 당연하지! 한데, 그 바꿔놓기 능력에 있어서 문학이 돈이나 정념을 따라갈 수 있을까? 뭐라고요, 문학이 돈이나 정념에 들러붙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06.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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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7-1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저로선 감수성(sensibility)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도올 김용옥이 언젠가 인(仁)이란 바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란 취지의 강연을 하는 걸 보았는데, 문학은 그러한 감수성과 직결돼 있는 것이죠. 물론 모든 문학이 그런 건 아니고 허접한 문학도 많이 있는 거지만...
 

주말인 7월 15일은 1904년 7월 15일 세상을 떠난 러시아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서거 102주기를 맞는 날이다. 2년전, 그러니까 2004년 7월 15일 서거 100주기를 맞이하여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페이퍼의 원래 제목은 '안톤 체호프, 혹은 등신스러움의 예찬'이었다). 이미지도 몇 개 같이 띄우고. 주말까지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7월 15일)이 러시아의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서거(逝去) 100주기를 맞는 날이다. 이미 지난 통신문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그가 독일의 한 휴양도시(뉴스에서 보니까 이 휴양도시 바덴바일러에는 체홉박물관이 생겼으며, 그가 묵었던 숙소도 인테리어는 달라졌지만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한 날짜는 러시아의 구력(舊曆)으로 7월 2일이고, 신력(新曆)으로는 7월 15일이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신력을 쓰기 때문에 오늘이 ‘공식적인’ 사망일인 셈이다(*아래는 바덴바일러의 체호프박물관. 앞에서 적은 대로 2004년 7월 15일 개관했다).  

그는 (구력으로) 1904년 6월 3일 의사의 권유에 따라 요양차 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아내 크니페르와 함께 떠났었고, 건강이 약간 호전되는 듯하자 이탈리아 여행(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얄타로 돌아오려고 했다)까지 계획했었다. 하지만 7월 2일 새벽 1시에 그의 병세(‘폐결핵’으로 기억된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호흡이 곤란해지기 시작했고, 급하게 달려온 의사는 심장 쇼크라고 진단한다. 장뇌(樟腦)까지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점차 혼수상태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그는 얼음주머니로 가슴을 마사지하려는 아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텅 빈 심장에는 얼음을 놓지 않는다오.” 의사가 새로운 산소통을 가져오도록 했지만, 체홉은 만류한다. “그들이 오기 전에 나는 죽을 겁니다.” 그는 새벽 3시에 숨을 거둔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하게 평정을 지켰다고 한다. 샴페인을 마시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하고(*아래는 바덴바일러에 세워진 체호프의 동상).



해서, 예의상 다른 할 일들을 잠시 제쳐놓고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다. 물론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지만(이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최소한 ‘입막음’ 정도는 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잘 준비된 글을 쓰고 싶지만, 그건 한 ‘세월’을 필요로 할 듯하다(우리의 인생은 고작 몇 사람의 작가를 읽고 이해하기에도 너무 짧다!).

오늘 저녁 러시아의 채널 ‘쿨투라(=문화)’에서는 기념일을 맞아 <체호프를 찾아서>란 특집프로그램과 함께 그의 원작을 영화화한 <다락방이 있는 집>(1960)을 방송한다. 이미 읽은 단편인데, 내용은 영화를 좀 봐야지만 기억에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내 경우에 체홉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런 식이다. 즉, 강하게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볍게 지나가버린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는 달리, 체홉은 우리의 삶에 좀처럼 간섭하고자 하지 않는 작가이다. 그는 배우였던 아내 크니페르의 삶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 약속이 있어서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쿨투라’에서는 어제 이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1937- )의 <바냐 아저씨>(1970)를 방영했고, 내일은 세번째 시리즈로 니키타 미할코프(1945- )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1977)을 방영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 두 편의 영화 모두 한국에도 출시돼 있다는 점인데(생각하면 이례적이다), 한번 비디오가게들을 뒤져 보시길. 모두 볼 만한 영화들이다. <바나 아저씨>는 한국에서 처음 봤을 때 좀 평범하다 싶었는데, 어제 다시 보니까 수작이다. 일단 캐스팅 면에서, 최근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레프 도진의 연극 <바냐 아저씨>보다 ‘사실적’이다...

저녁을 먹고 ‘꿀뚜라’에서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을 보았다. 3일 동안 특집으로 편성된 체홉 작품 3편을 영화로 보았는데, 어제 본 <다락방이 있는 집>이 평범한 영화라면, 그제 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는 수작이고, 오늘 본 니키타 미할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은 걸작이다. <다락방이 있는 집>은 조금 늦게 보는 바람에 감독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전형적인 ‘소비에트 문예영화’이며 작품의 줄거리는 그대로 옮기고 있지만 평면적이고 아무런 영감도 주지 않는다. 이런 영화들을 보노라면 미할코프-콘찰로프스키 형제의 영화가 얼마나 뛰어난가를 새삼 알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경우 캐스팅 면에서 보다 ‘사실적’이란 얘기를 서두에서 했는데, 의사인 아스트로프 역으론 수염이 덥수룩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가 나온다. 9시간짜리 대작 <전쟁과 평화>(1967)의 감독 말이다(국내에서도 상영되었던 극장판은 3시간짜리 축약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혹 본다르추크란 이름을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1960-70년대 소비에트 영화의 한 ‘권력’이었던 본다르추크를 타르코프스키는 혐오스러운 인물로 몇 차례 언급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망명감독 타르코프스키와는 달리(타르코프스키는 ‘소비에트 감독’이 아니라 ‘러시아 감독’이다) 소비에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의 한 명이자 배우였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중요한 배역으로 나오며(*사진의 피에르 베주호프 역이다) 역시 자신이 감독한 푸슈킨 원작의 영화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는 주역인 ‘고두노프’로 출연한다. 더불어 나는 보지 못했지만, 체홉의 중편 <스텝>을 영화로 찍었다고 한다.

이 본다르추크의 ‘아스트로프’는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샤프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아스트로프’와는 달리 ‘바냐 아저씨’와 함께 피로한 나날의 일과에 찌든 중년의 사내로 등장하며 내가 보기엔 그것이 체홉의 원작에 더 충실하다(원작에서 바냐 아저씨는 47세이며 친구인 아스트로프도 비슷한 나이이다). 머리가 벗겨진 ‘세레브랴코프’도 도진 연극에서의 ‘김무생 같은’ ‘세레브랴코프’보다는 내가 상상하는 ‘세레브랴코프’와 더 잘 맞는다. 유모나 바냐의 모친도 연극에서보다는 더 적절한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내가 연극보다는 영화를 더 선호하는 탓일 수도 있다). 콘찰로프스키는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특별히 인물에 대한 클로즈업과 배경공간에 대한 딥-포커스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화면에 깊이와 긴장을 부여하고 있다. 이 정도 수준으로 영화를 뽑아내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동생 미할코프는 한술 더 뜬다. 내 기억에 그의 세 번째 작품쯤 되는데, 30대의 감독 미할코프는 이미 거장다운 솜씨로 체홉의 미완성 희곡을 완벽하게 영화의 언어로 옮겨놓고 있다(이미 이전에 언급한바 있지만, 레프 도진이 연출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역시 이 미완성 희곡을 무대에 올린 <제목 없는 희곡> 덕분이었다. 이 작품의 연출기가 그의 환갑을 기념해서 책으로 나왔다는 얘기도 이미 했는데, 곧 서점에서 구해볼 생각이다). 더불어 본다르추크와 함께 아마도 러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배우 겸 감독일 미할코프는 이 영화에서도 조연이긴 하지만 제 몫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그가 맡은 역도 의사이다. 사진의 가운데 남자. 왼쪽의 여인은 소피야, 오른쪽은 플라토노프의 아내 사샤).

국내에 출시돼 있는 그의 영화는 이 영화를 포함해서 <오블로모프의 생애>(1979)(<오브로모프의 생애>로 돼 있다), <위선의 태양>,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는 <시베리아의 이발사>) 등인데, 그의 가장 뛰어난 연기는 주연으로 출연한 <위선의 태양>에서 볼 수 있다(이 영화에는 그의 딸 나디야가 함께 출연하며, 그가 황제 알렉산드르 3세로 등장하는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는 큰딸 안나도 나디야와 함께 출연한다). 소비에트의 영화 권력이었던 본다르추크와 마찬가지로 미할코프 또한 포스트-소비에트의 한 영화권력으로서 모스크바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다르추크와는 다르게 내가 일부에서는 국수수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하는 미할코프를 신뢰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가 영화를 잘 만들기 때문인데, 더구나 그게 ‘체호프적인’ 영화일 경우에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주는 수밖에 없다.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혹은 멜로드라마나 코미디라도, 장르영화의 경우에는 인간성이 모자라거나 더러운 감독도 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없이 체홉의 작품을 영화로 잘 만든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그것이 나의 편견이라면 편견이다). 왜 그런가? 체홉 작품의 중심은 ‘잘난 놈들’의 이념이나 행동이 아니라 ‘못난 놈들’의 무능력과 불가피한 회한이기 때문이다. 단편소설과 중편소설까지는 썼지만 그가 장편소설은 쓰지 못한/않은 이유가 나는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는 장편을 지탱할 만한 이념이나 행동을 인물에게 부여할 수 없었다. 그가 쓴 것은 고작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드라마들이었다.

한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등신들’인바, 등신들을 데리고는 장편소설을 꾸려나갈 수가 없다. 그들은 모험에 나설 만한 용기도, 여자들을 꼬실 만한 재간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사색가나 사상가들도 아니다. 그러니 무슨 ‘소설’이 되겠는가? 참고로, 그의 작품들에 자기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총 2,355명이다. 이건 내가 조사한 게 아니라 어제 나온 <니자비씨마야>의 신간 서평에서 읽은 것이다. 체호프에 관한 최신간의 제목은 <안톤 체호프의 모든 주인공 – 모든 러시아>(2004, 256쪽)인데, 저자는 마리나 트카첸코이고 책은 일종의 등장인물사전이다(요컨대 A에서 Z까지). 그리고 이 인물들의 숫자가 말해주는바, 책의 부제대로 ‘모든 러시아’ 혹은 ‘러시아 전체’를 카바하고 있다.

더불어 체홉의 작품을 영화/연극에서 연기한 유명한 배우들의 이름들까지도 망라하고 있다니까 러시아 ‘백과사전’으로도 손색이 없겠다(물론 서평자는 몇 사람이 빠졌다는 지적을 하고 있지만). 저자인 트카첸코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도 완전한 등장인물 목록(=사전)을 만들 계획이라고 하는데, 그녀도 좀 오래 살아야겠다(책 구경을 하려면 나도 오래 살아야겠고). 하여간에 2,355명이 등장하는바, 그 대부분이 ‘등신들’이며 그러한 인간들의 무능력(나약함)과 회한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라면, 인간에 대한 연민을 평균치 이상 갖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는바, 우리가 그런 사람을 믿어서 손해 볼 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학교수인 처남(세레브랴코프)을 숭배하면서 25년간을 그 뒷바라지 하느라 ‘도스토예프스키’(=잘난 소설가)도 ‘쇼펜하우어’(=잘난 철학자)도 되지 못한 우리의 ‘바냐 아저씨’의 경우가 웅변적을 말해주듯이, 체홉의 인물들은 “될 수도 있었던” 혹은 “할 수도 있었던” 삶의 중요한, 결정적인 모멘트들을 두 눈 다 뜨고 놓쳐버린 가련한 ‘등신들’이다(3막에서 분노가 폭발한 바냐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세레브랴코프에게 총을 쏘지만 그마저도 빗나간다). 그걸 확인한 이상,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면 본때라도 날 테지만(<갈매기>에서 권총 자살하는 트레플료프처럼), 이 ‘등신들’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런 희망 없이 담담한 회한만을 가슴에 안은 채 예전의 삶으로, 일로 되돌아간다. 정말 등신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말이다. 누가 그들의 ‘등신스러움’을 비웃을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와 ‘쇼펜하우어’가 아니라면, ‘영악한 놈들’뿐이다. 내 생각에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제법 잘난 소설가와 철학자들은 그다지 많을 거 같지 않으므로 대부분은 ‘영악한 놈들’일 확률이 높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당신이 체홉의 문학이 다소 싱거우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면(혹은 아직도 별로 읽은 게 없다면), 당신은 자기 생각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며(적어도 ‘똑똑한 체하는 사람’이며), 나의 분류에 따르면 아주 ‘영악한 놈’이다.

이런 일에는 굳이 발뺌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세상의 한편엔 등신들이 있고, 다른 한편엔 그들을 등쳐먹고 사는 영악한 놈들이 있는 것이니까(가령, 자치단체 의원이라고 뽑아놓으면 해마다 남들 휴가철에 ‘의원외교’ 하러 ‘해외연수’ 가는 놈들 말이다. 혹은 외제차 타고 다니는 ‘일부’ 주지/목사님들 말이다. 또 짜집기한 리포트로 학점 잘 받았다고 좋아하는 ‘일부’ 대학생들이나, 표절한 논문으로 연구비 타먹는 ‘일부’ 교수님들 말이다). 이런 ‘영악한 놈들’이 권력의 맛을 좀 알면 ‘사악한 놈들’이 되는 건 시간 문제이다.

해서 나는 교육적인 목적에서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도 젊은 세대들에게 체호프를 보다 많이 읽히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자신의 ‘등신스러움’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한탄할 게 아니라 ‘등신스러움’의 그 유구한 보편성(!)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등신들끼리의 ‘연대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합창하는 정신으로). 물론 세상은 등신들이 바꿔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혹은 ‘체르니셰프스키’)나 ‘쇼펜하우어’(혹은 ‘헤겔’)의 몫일 것이다(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도스토예프스키’와 ‘쇼펜하우어’를 주워섬기는 우리의 ‘바냐’는 얼마나 눈물겹도록 등신스러운 것인지!). 하지만 적어도 ‘영악한 놈들’한테 당하고만 살지 않기 위해서는 등신들의 확실한 주제파악이 필요하다. 자신이 등신인 줄 모르거나 8등신만 좋아하는 등신이 상(上)등신이므로.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에 등장하는 ‘등신’의 이름은 ‘플라토노프’이다(사진). 그래서 체호프가 쓴 최초의 희곡이자 미완성 희곡(전집에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들어가 있다)인 이 작품은 <플라토노프>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35세이지만 이미 머리가 반 이상 벗겨진, 시골학교의 교사이다. 한편 소피야는 오래 전, 정확히는 7년 전에 헤어진 옛 애인 플라토노프와 우연한 자리에서 재회하는데, ‘젊은 이상가’였던 그가 고작 ‘교사’라는 사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게다가 그에게는 소박하지만 촌스러운 아내 사샤가 붙어 있다. 반면에 플라토노프는 지적이면서도 강인한 여인 소피야가 어째서 한심하면서 유치한 ‘마마보이’ 귀족과 결혼했는지 의아해하며 그녀를 비난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7년간 잊혀졌던 사랑이 다시 불붙는다. 이제 어찌해보기에는 너무 뒤늦은 사랑이…

미할코프는 러시아식 별장(=다차)의 파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얘기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미묘하게 변화해가는 두 사람의 심리를 섬세하게 주시하면서, 때론 한 템포 늦춰 관조하면서 따라간다. 아마도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떠들어대는 초반부가 얼른 눈에 익지 않을 것이다(나도 그랬으니까). 해서, 이 영화의 진면목, 곧 체호프의 진면목은 두 번, 세 번 보아야 알 수 있다(나는 대여섯 번 본 것 같다). 체호프의 단조로운 듯한 단편들도 두 번, 세 번 곱씹어 읽어야만 제맛을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해서, 그 ‘제맛’을 좀 느끼게 되면, 이 한심한 인물들의 ‘회한의 드라마’에 웃음이 터지고 눈물이 나오게 된다. “우리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니었어!”(“하지만, 난 벌써 서른 다섯 살이야!”)



영화의 절정에서 회한과 절망이 폭발한 플라토노프는 울부짖으면서 주연장을 뛰쳐나가고 곧장 바닷가의 절벽으로 내달려간다. 그리고 그 뒤를 아내인 사샤가 “미셴까! 미셴카!”(플라토노프의 이름인 ‘미하일’의 애칭)를 울부짖듯이 다급하게 부르며 쫓아간다. 그 다음 장면은 혹 이 영화를 직접 구해볼 사람들을 위해서 말하지 않겠다. 다만, ‘아, 미할코프!’(혹은 ‘아, 체호프!’)에 값한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얼마나 눈물겨우면서 웃기는 장면인 것인지!..  

04. 07. 15./ 06. 07. 14.

 

 

 



P.S.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이란 제목에서 ‘피아노’는 영어로 ‘mechanical piano’이다. 이걸 ‘기계피아노’라고 하는지 ‘자동피아노’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초반에 이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하인이 연주하는 척하지만 연주곡이 입력돼 있는 자동 피아노이어서 사람이 건반을 치지 않아도 저절로 연주곡이 흘러나온다(이걸 보고 사샤가 놀라서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이 자동피아노가 상징하는 바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건 ‘손 한번 못 대본 삶’이다. 즉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버린 삶, 등신 같은 삶이다. 내가 결석한 삶이며,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는 세상이다. 혹 이런 자동피아노가 매혹적이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등신이 아니라 ‘영악한 놈’일 확률이 높다. 더불어 ‘인간-등신들’보다는 ‘기계-인간들’의 미래를 더 선호할 가능성도.

‘기계-인간들’의 구호가 체르니셰프스키와 레닌의 구호, “무엇을 할 것인가?”(=슈또 젤라찌?)라면, ‘인간-등신들’의 구호는 “어떻게 할 것인가?”(=까끄 젤라찌?)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인가?”(=까끄, 까끄 젤라찌?)이다. 여기서 ‘어떻게’의 반복은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데, 그것은 ‘어떻게’의 수단성과 방법론을 무력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젤라찌’라는 ‘하다(do)’ 동사는 별 의미가 없게 되며, 남는 건 “어떻게, 어떻게”(까끄, 까끄)이다. 이건 데리다가 조이스론에서 분석하고 있는 “예스, 예스(yes, yes)”의 체홉 버전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지경인데, 어쨌든 이 “까끄, 까끄(kak, kak)”의 우리말 번역이 “어떻게, 어떻게”이며, 이걸 한 단어로 바꾸면 ‘어쩌자고’이다.

이 ‘어쩌자고’는 “이런 세상에, 어쩌자고, 세상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고 시인 이성복이 노래/탄식할 때의 그 ‘어쩌자고’이다. 그의 시구에서 ‘어쩌자고’ 대신에 반복되는 것은 ‘세상에’인데, 뒤집어서 말하면, “까끄, 까끄”의 또 다른 우리말 번역은 “세상에나, 세상에나”이며, 그것은 흔히 등신들을 일컫는바 “인간아, 인간아”로 번역되어도 무방하겠다. 이 ‘어쩌자고’의 문학, ‘세상에나, 세상에나’의 문학, ‘인간아, 인간아’의 문학으로서의 ‘까끄, 까끄’ 혹은 러시아문학의 한 갈래로서의 ‘까끄, 까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말하도록 하겠다(나는 이런 ‘등신짓’을 할 게 아니라 당분간 번역을 해야 한다).

한편, 미할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이 국내에 처음 출시된 것은 1991년도이다. 내가 특별히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니고, 정성일의 영화평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는 1992년 1월에 <91년 비디오 베스트 10>을 꼽으면서 그 중의 한편으로 이 영화를 지목했다. 그대로 옮기면 “소련의 해체 뉴스가 91년도 뉴스 베스트 10에 낀다면 다음의 소련영화는 비디오 10편에 선정되어야 할 것이다. 니키타 미하르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우진시네마)은 소련영화가 모두 프로파간다라는 이쪽의 선전이 거짓말임을 보여준다. 안톤 체호프의 원작을 화면으로 옮긴 이 영화는 섬세하며 서정적이고 부드럽다. 이러한 문화유산이 있는 한 소련은 해체될지언정 쉽사리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미하르코프’보다는 ‘미할코프’가 좀더 정확한 표기이며, “섬세하며 서정적이고 부드럽다”란 평에는 나도 동의한다(하지만, 후반부는 격정적이다). 

P.S.2. <시베리아의 이발사>(1998) 이후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니키타 미할코프가 두 편의 신작을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그 중 한편은 <위선의 태양>의 속편으로 전편의 배우들이 대부분 다시 캐스팅되었다. 미남 배우 올렉 멘쉬코프(아래 사진)와 미할코프의 딸 나제즈다(나디야; 나쟈, 위의 사진)도 다시 선보인다는 얘기. 내년쯤 개봉할 예정인 듯한데 제법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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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7-1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이 아니라 <중간이층이 있는 집> 아닌가요? 주인공이 언니와 동생 두 여인과 회으주의적 남자주인공 나오는 그런 스토리 아닙니까?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에도 이 책 이야기가 나오는데...

로쟈 2006-07-17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자매와 풍경화가가 나오는 이야기 맞습니다. <다락방이 있는 집>이란 번역만 봤는데, <중간이층이 있는 집>이라고도 번역돼 있군요. 중간이층이라기보다는 우리식 개념으론 '옥탑방'에 가깝습니다. 2층 위에 방 하나 더 얹어놓은 것입니다...

사마천 2006-07-1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열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번안해가지고 문학회에서 자기가 지은 것처럼 발표했다가 망신을 당합니다. 당신만 외국어 아느냐고... ^^
당시는 불온서적이라 국내에 번역이 안되었다고 하더군요.
내용은 꽤 서정적인데 체홉까지 불온화하던 박정희 시대란 놀랍죠...

로쟈 2006-07-1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기억이 나는데, 이 작품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