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에 한 카페에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옮겨놓는다. 종교에 관한 토론/논쟁에 부득이하게 끼어들어 한 마디 거들었던 글인 듯하다. 다시 읽어보면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엇이 변하고 안 변하고 하는지를 알겠다.

저는 굳이 밝히자면, 무신론자이고, 범신론자입니다. 저에겐 무신론과 범신론의 차이가 잘 구별되지 않기에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분류하기로 하지요. 하긴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냐 하는 것이 대개는 기독교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판단 혹은 태도에 따른 것이어서, 그러한 사유 전통이나 범주의 바깥에서 바라볼 경우,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죠.

그리고 사실, 러시아의 무신론이란 것도 19세기에는 일종의 신앙이었기에, '무신론'에 말에 대한 '체감' 또한 저마다 다를 거라는 점도 인정해야겠구요. 하여간에 신의 존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자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논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유대교적 전통이나 부정신학에서의 신은 똑같은 기독교적 신이라 하더라도 양상이 좀 다르다는 건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는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 왜냐면, 우리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으며 모자라니까. 조금 만용을 부려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해서, 그 증명 때문에 신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만약에 '존재'한다면, 존재 '증명'이 안된다고 해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겠죠.

요는 신의 존재 증명이니 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면) 기독교적 담론 체계(/전통) 내에서의 언어게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믿는 자에게만 중요한. 믿지 않는 자에게는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 봉다리만큼이나 사소한. 그러면서 때로 거룩한.

 

 

 

 

이러한 토론/논쟁에 제가 깊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러한 '게임'에 멀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대심문관>)이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관념이 주는 재미라는 건, 한 인류학자가 지적한 대로,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이어서, 우리 삶을 가상으로만 지배할 따름입니다. 삶을 철학화하는 데 대해 반감을 가졌던 체홉의 경우를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이반 카라마조프가 가졌던 의문 중의 하나는 신의 존재라기 보다는 신의 의미입니다. 하여간에 이러저러한 신의 존재한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러한 신(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칩시다.(그런 믿음은 가정이 아닐 경우, 대개는 용기의 결여에서 나오는 것인데- 즉 끝까지 가보지 않는 사유)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지는지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무고한 고통이 감면됩니까? 소위 세계 고가 탕감됩니까?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아침마다 전철역에서 설교하는 분도 있는데, 정말 그런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제 생각에 그 믿음의 환희 때문에(혹은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터져 죽든가 혼절하든가 해야하지 않을까 싶군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건 좋지만, 주인 의식이라는 게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가진 믿음이 반드시 옳은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보다 태만하며 부정직한 믿음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믿음은 '인간적'이기조차 합니다.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며 모자란...

 

 

 

 

'하늘을 나는 새, 들의 백합'이란 성경 구절도 있지만("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자신의 존재를 그 새들과 백합과 차별화시키면서 잘난 체하기보다는 그 새들과 백합의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본받아 보려는 삶이 제겐 좋아보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말할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타자로서의 자신뿐만 아니라(우리는 자신에게 낯설지 않던가요?) 다른 이, 다른 존재들의 언어에 귀기울이기 위한 것입니다. 일종의 말건넴이지요.

정말로 보기에 좋더라는 세상에 살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의(모든 사람은 아닐 겁니다) 꿈이고 열망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손에 물 안 묻히고, 무슨 믿음 하나로 이루려고 하는 건 교만이겠지요. 믿거나 말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의 조그만 정의들을 위해서 조금씩 노력해 가는 것, 가끔은 퇴보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하여간에 어딘가를 주시하며 가는 것, 그것이 저에겐 신의 존재 증명보다도 신의 의미보다는 중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신론자이고, 굳이 말하자면 범신론자입니다. 당신들이 모두 신으로 보이니까...

 

 

 

 

(*)마지막 멘트는 그냥 유머이다. 그리고 그 유머의 다른 말이 '이데올로기'이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인간을 신이나 벌레로 간주하는 태도가 이데올로기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사이의 어중간한 무엇이다. 혹은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의 '제3의 침팬지'일 뿐이다...   

06.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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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문학기자(이면서 현재는 수석논설위원)인 박래부씨가 <작가의 방>이란 책을 최근에 냈다(서해문집, 2006). 지난주말에 북리뷰들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인데, 오늘자 한국일보(06. 05. 30)에 소개 기사가 실렸다. 기꺼이 옮겨오도록 한다. '남의 집' 혹은 '남의 서재' 구경에 특별히 취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블로그 자체가 '나의 서재'인 만큼 작가들의 서재를 눈동냥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기사의 필자는 (동업자이면서 필히 후배일) 최윤필 기자이다.

한편, 박래부 기자는 직장 선배였던 김훈과 '문학기행'을 연재하기도 했었는데, 찾아보니 2004년에 세번째 판이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따뜻한손)로 출간됐다. <화가 손상기 평전>(랜덤하우스중앙, 2000)도 그의 작품이다.

-‘작가의 방’…, 이라는 묘한 울림의 에스프리를 담은 책이 나왔다.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인 문학기자 박래부씨가 우리 시대의 좋은 시인 소설가 6명- 이문열, 김영하,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 의 집을 찾아가, 집과 방과 책과 책상을, 거기에 녹아 든 햇살과 바람과 음악과 그림을, 또 그들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한 책이다.

-그들의 빛나는 문학이 탄생한 공간과 거기에 투영된 작가 자신의 내면이 아스라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문학과 만나는 지점들. 필자는 그 지점의 표정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격조 있는 문체로 담아냈고, 출판저널 기자 박신우씨는 사진으로, 일러스트레이터 안희원씨는 맛깔스러운 그림으로 빈 곳을 채워주고 있다.

-처음 들른 ‘방’인, 소설가 이문열씨의 경기 이천 ‘부악문원’을 두고 그는 “그 자체가 평생 추구해온 탈이념적 복고주의적 이상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혹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디세이에 다름 아닐 것”이라고 썼다. 그 정신적 ‘오디세이’의 서재는, 성채를 방불케 하는 규모와 공간 벽면을 가득 채운 저서에도 불구하고, 자기 과시나 예술적 취향에는 거의 돈을 들이지 않았다. 철저히 ‘기능적’이다. “검소한, 또는 무미건조해 보이는 취향 고백을 듣지 않더라도, 그의 소설 역시 예술지향적이기보다 철학지향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문학에만 전력투구하는 유형의 작가라는 것, 목표와 주제에 치열하다는 것을 말해준다.”(29쪽)

-이렇듯 그가 안내하는 작가의 방은 그들의 내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10여년 전 ‘문학기행’시절의 행로에서 문학이 배태된 거시 공간을 살폈다면, 이번 책에서 그는 작가들의 미시공간, 그리고 내면의 공간을 살핀다.

-자유로운 인문주의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젊은 소설가이자 교수인 김영하씨의 연구실, ‘꾸밈없는 착함이 거처’하는 강은교 시인의 소박하고도 정갈한 방, 작은 도서관쯤은 될 법한 장서를 갖추고 책이 자신의 오락이라고 말하는 소설가 공지영씨의 ‘방’.

-시골 청년을 시인으로, 지식인으로 성장시킨 ‘조강지처 같은 책’들을 둘 데 없어 학교와 고향집, 전주의 아파트에 나눠 쌓아두고 있는 김용택 시인의 ‘방’을 나서며 그는, “자연 전체를 하나의 큰 서재로 여기는 시인은 드물지만 행복하다”(231쪽)고 썼고, ‘집 전체가 정갈한 카페’를 연상케 하는 소설가 신경숙씨의 집필공간 옆 책장에서는 ‘문학전집’을 꺼내보기도 한다. 작가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큰오빠가 선물한, 소설 <외딴방>에 그 과정을 쓰기도 했던 그 오래된 책이다.

-필자는 작가들의 서재에서 귀하고 반가운 책이나 사상가를 만나면 못내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의 단상을 적는다. <외딴방> 이야기 끝에 필자의 대학시절 야학교사 경험을 이야기하는 등 기억을 더듬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의 방과 그들의 문학 이야기일 뿐 아니라, 기사로 문학텍스트를 심심찮게 압도했던 문학기자(필자)의 삶과 문학에 대한 열애의 은근한 추억담 같기도 하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30일부터 내달 6일까지 종로구 사간동 ‘유갤러리’에서 전시된다.

06. 05. 30.


 

 

 

P.S. 서재 훔쳐보기가 흥미로웠다면, 아예 돗자리 펴고 작가들의 사생활까지 염탐해볼 수도 있겠다. 김화영 교수의 <한국 문학의 사생활>(문학동네, 2005)이 요긴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 시인들 얘기는 <시인박물관>(현암사, 2005)에서도 엿들을 수 있겠고. 끝으로 맘에 드는 서재 이미지를 하나 옮겨온다. 다소 호사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게 염치 있어 보인다(물론 서가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야 하지만). 가끔은 내가 가족뿐만 아니라 책들도 혹사시키는 게 아닌가란 자책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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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6-05-30 11:13   좋아요 0 | URL
마지막 이미지는 안보이는데요?

로쟈 2006-05-30 11:17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아직은 보이는데... 가 아니군요. 다시 구해와야겠습니다.^^

3794 2006-05-31 19:34   좋아요 0 | URL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게 염치 있어 보인다'// '염치 있어보인다' 는게 무슨 뜻인가요?^^;;

로쟈 2006-05-31 19:51   좋아요 0 | URL
염치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고작 책들로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건 염치 없는 일인지라...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최후의 걸작은 알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이다. '저자로부터'라고 돼 있는 머리말을 읽으면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작가가 구상했던 작품, 곧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알료샤)의 전기'를 구성하는 두 부분 중 첫번째 이야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대목은 바로 두 번째 소설이며, 내 주인공의 행위는 이 시대,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에 속해 있다. 첫 소설은 겨우 13년전에 일어난 일이며, 어쩌면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나의 주인공의 어린시절의 한순간에 불과하다."(열린책들판, 22쪽)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정수이자 서구 소설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작품이 주인공의 어린시절 '한순간', 혹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도스토예프스키의 창작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었을까?).  

 

 

 

 

러시아문학에 대한 강의를 맡아서 하다 보면, 부득불 이런 걸작들을 '상대'해야 하는 때가 닥친다. 스릴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웬만한 연구서를 써도 다 카바가 안될 작품에 대해서 적당히 '아는 체'한다는 게 매번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잔인한 천재'를 내려다보면서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면피용 강의안이야 어떻게든 마련하지만, 언제나 미진함을 느끼게 된다. 변죽만 건드릴 뿐 아직 '전면전'을 치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매번 당하고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이번 여름에는 진지전을 위한 참호라도 몇 개쯤 파둘 생각이다.

여기서는 그러기 전에 먼저 작품 해제 두 편을 옮겨둔다. 하나는 '서울대 권장도서' 해제로 동아일보에 게재됐던 것인데, 필자는 김희숙 교수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에 다른 지면을 위해서 내가 쓴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19세기 러시아 장편소설의 위대한 시대를 장엄하게 끝맺는 걸작이다. 이 소설은 신에 의해 세상에 허용된 악에도 불구하고 신을 변호하고 창조의 목적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구상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영원한 주제(믿음 자유 악 구원 인류의 운명에 관한 문제들)를 범죄소설의 틀을 빌려 탐구하며 그 속에서 친부 살해를 카라마조프 집안의 사건을 넘어선, 아버지―신의 살해라는 이념적 차원과 연관시킨다. 그는 각각 정념과 이성과 신앙을 대변하는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형제의 삶과 의식을 좇아가면서, 무신론적 합리주의나 공리주의가 아닌 영혼의 자유와 진정한 인간애, 속죄, 수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신앙을 소설에서 실천하는 인물은 알료샤와 그의 영적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다. 그러나 작가의 창작 계획상 미완으로 머문 이 소설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진리를 자신의 내면에 지닌 ‘신의 인간’ 알료샤가 아닌 ‘마돈나의 이상’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에 이끌리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죄’의 의식과 인간성의 부활로 나아가는 드미트리다.

-그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은 합리주의자 니힐리스트를 자처하며 “이 세계의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겠다”는 ‘반역자’ 이반이다. 그의 창조물인 대심문관에 따르면 내적 자유를 감당하기에 너무 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자유는 곧 저주다. 그런즉 자유를 인간에게 부여했던 그리스도는 기적, 신비, 권위에 의거하여 자유 대신 빵과 지상낙원을 보장하는 공식적 기독교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대심문관의 전설’은 로마가톨릭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으로서, 신적 원칙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한 분석으로서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스스로를 ‘불신과 회의의 자식’이라 불렀던 본래 성향과는 모순되게 작가가 자신에게 부과한 과도한 종교적 역할은 소설에 의도치 않은 파열을 가져온다. 과도하게 열렬한 믿음은 오히려 긍정을 부정과 동행케 한다.

-그는 반역자 이반과 대심문관의 반대편에서 영혼 불멸과 진정한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지만, 이반의 말 속에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울린다. 대심문관에 대한 그리스도의 입맞춤 역시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그들의 지상적 행복을 위해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희생하는 자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누설한다.

-이반도 파열을 보인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의심하며, 믿음을 갈구하나 오만함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가에게 나타나는 파열, 타락의 심연과 천상의 심연을 마음속에 함께 지닌 인물들, 찬반 사이에서의 흔들림 때문에 이 작품은 변신론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실패한 명제소설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소설의 ‘예술적’ 성공을 의미한다. 미의 본성에 대해 드미트리가 한 말 ‘소돔의 이상과 마돈나의 이상을 동시에 찬미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 소설 전체에도 적용된다. 영혼의 불멸과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소돔에서 마돈나에 이르는 모든 길에 뻗쳐 있는 이율배반으로 가득찬 삶, 살아 있는 삶에 바치는 송가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카라마조프 집안의 사람들이다. 아버지인 표도르와 그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가 이 집안의 구성원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장편 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범죄소설적인 구성을 따르고 있다. 즉, 친부 살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탐욕스럽고 방탕한 노인 표도르와 큰아들 드미트리는 그루센카라는 여인을 두고 질투와 증오 속에서 서로 반목한다. 그러는 중에 표도르가 살해되자, 혐의는 당연히 드미트리에게 간다. 하지만 표도르를 살해한 사람은, 둘째 아들 이반의 정신적 사주를 받은 스메르자코프였다. 스메르자코프가 죽는 바람에 드미트리의 무죄 입증은 어려움에 처한다. 드미트리는 비록 직접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시베리아 유배길에 오른다. 이렇듯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전개에 재미와 깊이를 부여해 주는 것은, 이 세 아들이 대표하는 인간형이다.

큰아들 드미트리는 무엇보다도 정념의 인간이고 미학적 인간이다. 그는 '마돈나의 이상'(성스러움)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추악함)에 이끌리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면성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 넓기 때문이고, 또 이 양면성이 그가 보기에 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미는 마돈나에만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소돔 속에도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는 두려우면서도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드미트리는 말한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그의 여러 모순적인 행동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둘째인 이반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작품 속에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무신론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가 제시하는 무신론의 핵심은,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의 전설'에 집약되어 있다. 대심문관은, 무지한 인류를 영원히 사로잡을 수 있는 세 가지 힘, 즉 기적, 신비, 권위를 거부하고, 지상의 빵 대신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그리스도를 비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겐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만큼 짐스러운 것이 없다. 인간은 무력하기 때문에 자신을 이끌어 줄 강력한 힘과 물질적인 풍요를 갈망하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간적인'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심문관의 논리를 서구적 합리주의, 공리주의, 무신론, 사회주의, 그리고 모든 형태의 사이비 메시아주의의 논리이다.

이반이 이러한 논리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감성마저 배제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상,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다. 신이 만든 세상에서 고통받는 인류, 특히 고통받는 어린아이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천국 입장권을 반환하겠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가진 논리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막내인 알료샤는 종교적 인간이고 신앙의 인간이다. 광활한 러시아적 영토에 걸맞는 드미트리의 영혼이 러시아의 현재를 상징하고, 이반의 무신론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당대의 여러 지식인들이 제시한 서구적 합리주의 정신을 상징한다면, 알료샤의 신앙은 작가가 제시하는 미래의 러시아를 상징한다.

작가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는다. 알료샤는 이러한 작가의 믿음을 소설 속에서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사실, 알료샤의 성격과 이념적 입장은 이 작품에서 드미트리나 이반에 비해 완정하게 형상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이 작품이 지닌 미완의 성격과 연관된다. 당초 작가는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고, 이 작품은 알료샤의 어린 시절에 일어난 한 사건, 즉 아버지 살해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료샤가 대표하는 인간형에서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작가의 희망과 암시적 대안을 읽어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떠한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가 수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유토피아는, 불합리하고 변덕스러우며 때로는 한없이 무능력한 존재인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과 고통, 그리고 수난을 거쳐서 도달하게 될 신의 왕국이었다. 이 신의 왕국은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라는 죄의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한 죄의 속죄 과정에서 겪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다름 아닌 인간성 부활의 희망이 된다.

이 작품에서 드미트리가 겪는 고통과 그의 영혼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도식 속에서 전개되며,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창작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수난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이다.

 

06.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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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5-3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제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고 늘 주변사람에게 권하곤 하는 책입니다, 혹시라도 안 읽은 사람이 있으면... 전 중 3 여름방학때 처음 접했었는데, 정말 충격이었죠.
도프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입니다만(무게로나 양으로나 말이죠 ^^) 늘상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5-3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내 인생 최고의 책'으로 올려놓으셨군요.^^ 브루벨의 그림도 좋아하시는 걸 보면, '러시안 필' 하셔도 되겠습니다.^^

Bartleby 2006-06-1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얼마전에 출간된 장 폴 브리겔리의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해냄, 2006)는 사드의 독자라면 탐을 낼 만한 전기이다. 이미 모리스 르베의 전기가 <사랑, 자유 그리고 거짓말>(창, 2001)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지만, 왠지 더 믿음이 가는 것은 브리겔리의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프랑스 혁명기 몰락귀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다 당대와 이후에 수많은 전기 작가들에 의해 왜곡된 사드의 일생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는데, "1부에서 사드의 일대기를, 2부에서는 사드가 영향을 미친 분야와 그 기록들을 담았다. 58컷의 도판과 함께 바타이유, 보들레르, 바르트 등의 사드 연구 저작들이 수록되었다."

스튜어트 후드의 <사드>(김영사, 2005)와 함께, 그리고 기네스 기비 감독의 영화 <사드>(1996)와 함께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지도이자 매뉴얼로서 갖춰둘 만한 책이다. 아직 재정형편상 구해놓지 못했는데, 마침 오마이뉴스(06. 05. 26)에 자세한 서평이 게재되었기에 옮겨다놓고 '예고편'으로 읽어보도록 한다. 필자는 지용진 기자이며, 타이틀은 "탐미주의자? 자유주의자? '사드'를 다시 보자"이다.

-이탈리아 감독 빠졸리니(*파졸리니 혹은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은 불쾌할 정도로 적나라하다(*오래전에 영화 전공자로부터 빌려본 적이 있는데, 요즘은 영화를 구해보는 일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영화는 거친 영상을 통해 사도마조히즘의 직접적인 재현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현실 자체를 무마시킬 정도로 뇌를 얼얼하게 만든다. 영화에 녹아있는 사디즘의 정의(定義)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의 권력’을 통해 규정되면서 복종의 미학을 정당화시킨다. 사도마조히즘은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는) 역겨운 대상으로만 기능하고, 그 의미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발휘된다.

 

 

 

 


-우리가 소비하는 사디즘의 실체는 무엇일까?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비정상적인 행위에 의한 쾌락과 음탕함 그리고 강제적인 유린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본질을 벗어난 그야말로 편의적인 접근이다. ‘쾌락과 불쾌’의 단순한 구도 안에 ‘사디즘’의 의미를 가둬두는 것은 그래서 옳지 못하다.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장 폴 브리겔리 지음 / 성귀수 옮김)는 그러한 박제된 통념을 거두기 위해 인간 사드(1740∼1814)의 인생을 장황하게 서술했다. 사드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의 시간을 객관적인 자료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63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긴 서적에서 느껴지는 방대함은 사드에 의한, 사드를 위한, 사드의 이야기로 촘촘히 매워져 스펙터클 함마저 감돈다. ‘집대성’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이유다.

-크게 2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된 이 책은 제 1부에서는 그의 불꽃같은 인생을 다뤘고, 제 2부에서는 균형 있는 시각에 근거해 그를 에워싼 통설을 세세히 드러냈다.

-수많은 정부(情婦)를 둔 외교관 아버지와 폭군의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아래서 사드는 아버지의 성적 괴벽이 적힌 일기를 보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의 의식을 점령한 성(性)은 그로테스하게 변질되면서 애초부터 정상적인 성적 의식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아버지에 의한 강제 정략결혼으로 인해 사드는 ‘사랑’이란 감정을 싹 틔우기 전에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랑’의 본질을 오늘날 우리가 멋대로 해석하는 ‘사디즘’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사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린 시절은 ‘불행’으로 점철된 시기였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영역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그의 불행을 밖으로 끄집어내 재해석하고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은 결론을 미리 고정시켜 놓고 이유를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실패한 사랑과 그에 이은 정략결혼. 사드는 점점 알 수 없는 혼란에 침잠하게 되면서 그 안에 잠재돼 있던 성욕과 변태성을 긍정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광란한 방탕함과 예수상(像) 모독으로 감옥에 가게 된 사드는 아버지가 남긴 원고를 꼼꼼히 읽으며 자신만의 세상을 조금씩 갖춰가면서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용되는 인물로 거듭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에 대한 사드의 기억이다. 그는 억압과 괴벽의 아버지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애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신화화를 이룩해냈다. 반면,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난 것처럼 어머니에 대한 평가는 관대하지 못하다. 이른바 전복(顚覆)된 오이디푸스를 반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저서를 활용해 이를 입증하면서 사드의 삶에 관해 철저히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이 책의 의도가 바로 객관성에 근거한 ‘사드읽기’라는 점을 헤아린다면 저자의 자료수집과 인용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사드(Sade)’의 인생을 책 속에 옮겨와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오해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지만 의도를 강요하거나 인위적인 결론을 맺지 않는다. 다만 수백 년 간 누적된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면서 천재로 살다간 한 인간의 파란만장했던 삶 자체에 무게를 둔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드 만큼이나 포괄적으로 인용되는 인물도 드물다. 종교, 풍습, 철학, 예술 심지어 정치까지도 ‘사드’를 안으로 끌어들여 고정된 영역 안에서 재활용시키며 번식시켰다. 문제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적 활용이 아니라 각각의 분야에서 차별적으로 해석됐다는 데 있다. 사드의 불행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은 추종자들은 자신의 영역에 맞게 사드를 활용했다. 하나의 사드가 여러 의미로 분열돼 다양한 색깔을 지니게 된 것. 저자가 가장 무게를 두고 이야기하는 문제점이다. 사드는 악마적인 천재였다. 동시대에서는 미처 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게 비쳐졌지만 그가 후세에 끼친 정신적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연의 정상상태로서의 사디즘은 ‘도착적인 자연주의’를 표방하지만 동시에 자연주의 문제 안에 머무름으로써 자연에 기댄다. 자연을 부정하면서 자연의 이름으로 사회의 인위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모순구조는 ‘사드’라는 개념을 더 모호하게 만든다. 이렇듯‘사드’의 모호성은 그를 종교로 삼는 탕아들에게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개념이 돼버린 ‘사드’의 전설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프랑스 대혁명 동안, 무차별적인 살인과 폭동을 목격한 사드는 인간에 내재한 폭력성에 대해 고찰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적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탐구하게 되고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정당화한다. 이후 나폴레옹 시절에는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남은 일생을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면서 <쥘리에트> 등의 불후의 명저를 남긴다.

-사드를 거론하는 것은 음담패설에서는 유용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저자는 왜곡된 사디즘에 경도된 나머지 전체를 보지 않고 작위적인 해석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저자가 <사드>에 천착하는 목적은 ‘바로 알리기’다. 저자의 전방위적인 탐구는 사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과 맞물리면서 진정성으로 독자들을 포섭한다. 다분히 다큐멘터리 적인 시각에서 그의 인생을 쫓으며 ‘사드’의 오용(誤用)을 걱정하는 저자의 노력이 눈부신 건 일차적으로는 방대한 분량에 있겠고, 그 다음으로는 진정성을 들 수 있다. 지면 곳곳에 묻어 있는 저자의 어법은 사드에 대한 몰이해의 실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이 스며있기 때문에 와 닿는다.



-사드의 실험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자각이었다는 사실은 스스로 내린 정의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인간은 혼자이고, 악은 필연적으로 만연한다.”소름끼치도록 자기 희열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고뇌는 절대본능을 추구한 방탕한 탐미주의자인가? 욕망의 충족을 선도한 희대의 성적 자유자인가? 선택은 온전히 ‘사드’를 읽는 독자의 관점에서 갈린다.

06.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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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수신문(06. 05. 27)에 게재된 김학이 교수(동아대)의 문화비평을 옮겨온다. 타이틀이 '자학은 자만보다 진실되다'이고, '과거의 청산과 이해?'과 부제이다. 지젝의 논의를 끌어오고 있기에 '로쟈의 지젝' 카테고리로 분류해 넣었다.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과거청산에 대한 논의가 되풀이되고 있다. 얼마 전 교수신문에서도 학진지원사업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이 문제가 논의된 바 있다. 과거를 대면하는 방식이 거듭해서 논해지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입증해주는 반가운 현상이다. 물론 역사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어느 역사가는 정부가 지원하는 과거청산 작업에 정치성이 개입되는 것을 경계하고, 다른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엄밀한 확증과 이에 따른 상징 차원의 조치들을 주장하기도 하며, 또 다른 역사가는 과거 사실의 규명이 과거에 대한 내면적 성찰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청산의 방법에서는 의견이 서로 다른 역사가들이, 과거청산의 목표에서는 똑같은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다. 상처의 치유와 사회적 화해가 그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상처 치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에서 홀로코스트가 표현되는 양상을 분석한 적이 있다. 두 가지 유형이 구분된다. 하나는 홀로코스트라는 절대악 속에서도 인간적 가치가 견지되는 비극적 양상을 그려내는 영화들이다. 반드시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그 대표적인 경우가 스필버그의 <쉰들러의 리스트>이다. 다른 하나는 그 절대악에 희극적으로 접근하는 영화들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대표적인 경우로, 그 영화에서 아버지는 수용소의 현실을 놀이로 변형시키고, 그렇게 아들을 구한다. 물론 비극이 첨가된다. 아들은 생존하지만 아버지는 죽는다. 지젝은 덧붙인다. 베니니가 일관성을 유지했다면, 다가오는 미군 탱크가 아이를 나치 저격수로 오인하여 사살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지젝이 주목한 것은 그러나 비극과 희극의 피안에 있던 사람들이다. 나치 수용소에는 당시 “무젤만(Muselmann)”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영화 <소피의 선택>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겠다는 나치의 협박에 직면하여, 딸을 죽도록 하고 아들을 살린 소피 같은 이가 바로 그런 존재이다. 무젤만은 삶의 이유가 남김없이 파괴된, 먹고 마시는 것이 허기와 갈증과 무관하게 그저 맹목적인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사람 아닌 사람, 그야말로 “인간의 영도(零度)”이다.

-무젤만은 미학화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를 희극으로 표현하면 비극이 되어버리고, 비극으로 표현하면 희극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듯 미학화가 실패하는 존재는 인간의 상징질서의 피안에 있는 존재다. 언제나 그렇듯 지젝은 여기에서도 라캉의 “실재(the real)”을 발견한다. 실재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다. 치유란 과거를 기성의 상징질서에 포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오히려 새로운 상징질서를 구성해내기 위한 초석으로 삼아야 할 그런 어떤 것이다. 실재는 사회적 화해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난 구멍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어두운 과거에 “무젤만”이 득실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교와 적용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정한 과거가 현재에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그 과거를 현재의 기성 가치 속에 통합시키는 작업에 멈추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과거는 새로운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때 비로소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치유와 화해의 통로로만 삼아서는 안 된다. 치유와 화해는 오히려 과거를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작업 과정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그 과정의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치유와 화해를 과거청산의 목표로 삼는 순간, 기억의 적절한 정도와 가해자와 피해자의 엄격한 구분이 문제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과거청산을 새로운 갈등의 원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막말로 그렇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인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모두가 가해자는 아니라고? 맞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실재”와 연관된다. 자학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학은 자만보다 얼마나 더 진실된가.(*필자의 주장이 단평이 아닌 책 한권, 적어도 논문 한편 정도의 분량을 얻었으면 좋겠다.)   

06.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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