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단풍이 절정이고 오늘은 10월의 마지막날이다. 이런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세월은 제 갈길을 가고 남아있는 자들만 뒤늦게 정신 (못)차린다(그런 세월 죽이는 일로 세월을 다 보내다니!). 그나마 가을이어서 다행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좀 붉어져도 단풍에 묻혀갈 수 있으니. 점심 먹고 잠시 걸었지만, 천성이 다소간 게으른 탓에 산책은 눈으로만 즐기기로 한다. 그럴 때 도서 산책은 꽤나 요긴한 핑계가 된다. 교양있는 척하며, 게으름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덤으로 천재들과도 아는 척하고...

 

 

 

 

이번에 맨처음 꼽을 책은 단연 도날드 스포토(D. Spoto; 1941- )의 <히치콕>이다. 나대로 히치콕의 대해서는 작년에 지젝 편,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에 실린 평문들을 자세히 읽으면서도 언급한 적이 있고, 그때 스포토의 저명한 전기 <천재의 이면: 알프레드 히치콕의 생애>가 번역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더랬다. 이번에 <히치콕>이란 제하에 신간이 나왔길래 나는 그 전기인가 했는데, 책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예술세계: 그의 영화인생 50년>이란 원제의 또다른 책이다. 국역본의 제목은 <히치콕: 히치콕의 영화 50년>(도서출판 동인).

이번주 영화주간지 <필름 2.0>에도 소개가 됐는데, 잠시 옮겨보면 이렇다. "드디어 나왔다. <히치콕>의 저자 도날드 스포토는 슬라보예 지젝과 로빈 우드, 그리고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와 클로드 샤브롤에 뒤지지 않는 히치콕 마니아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예술'이라는 원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처음 1976년에 나왔고(*아마존에서 현재 판매중인 건 1991년판이다), 이를 받아본 히치콕은 도날드 스포토를 LA로 초청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히치콕의 초기 무성영화로부터 <로프> <이창> <토파즈>까지 45편의 영화들을 연대기적 접근방식으로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포토의 신간은 그의 전기와 함께 히치콕 기본서에 속한다. <필름 2.0>의 기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한나래, 1994)가 그런 기본서이며, 역시나 '까이예' 비평가 출신의 샤브롤과 에릭 로메르가 편집한 책으로 작년에 국역본이 나온 <알프레드 히치콕>(현대미학사, 2004)도 히치콕의 초기작들을 다루고 있는 기본서이다. 거기에 새로운 기본서로 추가된 것이 지젝의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고. 해서, 반갑고 고무적이다(기본서들은 우리 교양의 기초를 튼실하게 해준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히치콕의 영화 대부분은 국내에 비디오나 DVD 타이틀로 출시돼 있다(주로 '유니버설'이나 '씨네코리아'에서 나왔고, 나오고 있다). 하니 여유만만한 분들은 45편의 영화 리스트와 스포토의 해설을 옆에 놓고 히치콕의 영화들을 연대기순으로 죽 관람하시면 되겠다. 

로로로 시리즈로 나온 또다른 전기 <앨프레드 히치콕>(한길사, 1997)은 너무 간략한 느낌이 있지만 일독할 만하다(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저작 목록을 보건대 스포토는 일급의 전기작가이며,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즈와 배우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로렌스 올리비에, 잉그리드 버그만 등에 관한 전기도 갖고 있다. 그 중에서 국내엔 <제임스 딘>(한길아트, 1999)이 번역돼 있다. 예수와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전기도 쓴 걸로 봐서 거의 종횡무진이라고 해야 할 듯. 국내에 잘 알려진 전기작가로서는 20세기 전반기의 슈테판 츠바이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 물론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소개된다면...  

 

 

 

 

두번째 책은 히치콕(1899-1980)과 같은 생년을 가진 미국 작가 헤밍웨이(1899-1961)가 "모든 현대 미국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헉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예찬한 가장 '미국적인'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철학이야기'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북인)이다. 원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man?)'. 지난 여름에 <지구로부터의 편지>(베가북스)라는 풍자적인 이야기가 번역/소개된바 있지만, 근년/최근에 와서 트웨인의 책들이 신간으로 자주 눈에 띈다. 사실 이번 신간 때문에 새삼 더 주목하게 된 책은 지난 2월에 나온 그의 자서전, <마크 트웨인 자서전>(고즈윈, 512쪽)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내가 이 연재를 잠시 쉬던 때에 나온 책이서 거명하지 않고 지나갔던 책인데, 이 기회에 눈도장을 찍어둔다.

그의 자서전은 서강대 장영희 교수가 "대작가 마크 트웨인이기 전에 인간 마크 트웨인으로서 철저한 자기성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 이웃으로서의 모습과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삶을 꿰뚫는 예리한 풍자 밑에 흐르는 슬픔과 페이소스가 담겨 있는 자서전 문학의 정수"라고 평하고 있는 책으로 트웨인의 독자나 예비독자라면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 할 책이다.

 

 

 

 

미국 문학의 '간판' 작가답게 트웨인은 국내에도 헤밍웨이만큼 잘 알려져 있지만 주로 '아동물'을 통해서이다. <톰 소여의 모험>이 웬만한 아동/청소년 문고에는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고, 나도 초등학교 때 소년소년 세계명작 시리즈로 트웨인을 처음 만났다. 유감스러운 건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게 트웨인과의 인연의 전부라는 점. 나 또한 사실 대학에 와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미국문학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작품이란 걸 알게 되고서 다소 놀랐을 정도였다(특히, 현대 미국문학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의 견해 참조). 그간에 머리가 큰 만큼 <허클베리 핀의 모험>(민음사, 1998/2005)도 이젠 '고전'으로 다시 읽어볼 만하다.

 

 

 

 

레슬리 피들러의 제자이기도 한 김성곤 교수의 <미국문학과 작가들의 초상>(서울대출판부, 1993)은 내가 '미국문학 사전'으로 자주 애용하는 책인데, 거기엔 영국시인 오든(W. H. Auden)의 흥미로운 평문 '허크와 올리버'가 실려있다(전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든은 두 작품, 즉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현대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명하면서 두 주인공 허크와 올리버를 비교한다. 그는 자연에 대한 태도, 현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시간과 돈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들을 대조하는데, 가령 유럽(영국)인에게서 자연이 어머니의 품 같다면, 미국에서의 자연은 야성적이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이 읽기에 <헉핀>은 매우 슬픈 소설이라고 말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끝장면에서 올리버가 사랑이 있는 가정에 입양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하는데 반해서 유사한 모험들을 겪게 되지만 허크는 그의 친구 짐과 결국엔 헤어질 것이며 다시는 못나게 되리라는 걸 독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사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요소를 보지 못하는 반면에(사건들은 '반복'으로 의미화된다) 미국인들은 반복의 요소를 보지 못한다(사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지각된다. 이런 경우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돈의 경우도 대비되는데, "올리버의 경우, 그것은 법적 상속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허크의 경우에는 그것이 순전히 행운일 뿐이다." 오든은 거기서 조금 더 나간다: "미국에서 돈은, 자연이라는 용(龍)과의 전투를 통해 빼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곧 성인의 표증을 상징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다... 유럽의 단점은 탐욕과 인색이며, 미국의 단점은 이 양적인 돈이 성인의 표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중단해야 될는지 알기 어려운 데서 기인하는 근심이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질에 대해서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것은 미국의 소비일 뿐이다. 마치 유럽의 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 유럽의 탐욕이듯이." 음미해볼 만한 견해이다.

 

 

 

 

세번째 책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초원>(범우사). 이번에 나온 5권짜리 체호프 선집 중 제3권인데, 특별히 이 책을 꼽은 건 중편 <초원>이 최초로 번역됐기 때문이다(책에는 '구세프' 등 4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작년에 서거 1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들이 치러졌었다는 얘기는 '모스크바 통신'에서 전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오종우 교수의 체호프 선집 2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벚꽃동산>이 열린책들에서 나왔었는데, 탄생 145주년을 맞은 올해 좀더 그럴 듯한 5권짜리 선집이 나온 것. 그간에 많이 번역된 드라마의 경우에는 이채로울 것이 없지만(희곡 <바냐 아저씨>가 <바냐 외삼촌>으로 번역된 게 좀 튄달까), 초기 단편들이 대거 포함된 1-3권은 주목할 만하다.

1888년에 발표된 <초원>은 진지한 주제를 담은 분량 있는 작품을 써보라는 주위의 충고에 답하기 위해 씌어진 작품인데(방점은 '분량'에 있다) 주로 콩트나 단편들 위주로 써온 체호프에게 '중편' <초원>은 모험적인/실험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이었다. 한 소년의 초원 여행을 기본 플롯으로 갖고 있는 서정적인 작품인데, 초기 체호프의 전매특허인 '코믹'은 극소화되어 있으며 내게는 작품 자체의 의미보다는 작가가 왜 '장편'으로는 나아가지 못했을까를 궁리해보게 만드는 작품. 역자는 이 작품으로 학위논문까지 쓴바 있기에 적역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초원>이란 작품이 단연 상기시켜주는 이름은 러시아의 저명한 체호프 학자 알렉산드르 추다코프(추다꼬프)이다. 국내 대학에서도 강의를 한바 있고(나도 강연을 한번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인 제자들도 길러낸 분인데, 그의 출세작 <체호프의 시학>에 이 <초원>에 대한 자세한 비평적 분석이 실려 있기 때문(<체호프의 시학>은 체호프에 관한 단일 연구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그의 또다른 주저가 <체호프의 세계>이고, 이것은 <체호프와 그의 시대>(소명출판, 2004)로 번역돼 있다. 물론 전문서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과는 다소 무관한 책이지만. ('모스크바통신'에서도 거명한 바 있는) 추다코프 교수를 다시금 언급하는 것은 정정하던 그가 얼마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작년에 푸슈킨과 체호프에 관한 그의 강의를 청강해두지 못한 게 아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국내에선 체호프 전공자 오종우 교수의 연구서 <체호프의 코미디와 진실>(성균관대출판부, 2005)이 이번에 출간됐다는 것도 기록해둔다. 역시나 전문서이지만 애호가들도 읽어볼 만하겠다.  

  

 

 

 

네번째 책은 종교학자 엘리아데(1907-1986)의 <세계종교사상사>(이학사)이다. 전3권이 한꺼번에 출간됐는데, 우리 출판의 '역량'을 과시하는 듯해서 나름으로 부듯하다. '엘리아데'란 이름은 내게 좀 각별한데, 대학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들은 낯선 이름이 바로 '엘리아데'였기 때문이다(나는 첫학기에 조기수강신청했던 '철학개론'을 물리고 대신에 '종교학 개론'을 들었다). 해서 엘리아데는 내게 '대학'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모든 것과 결부돼 있다. 지성, 학문, 자유, 학자, 열정, 강의 등과 말이다. 하여간에 이번에 나온 방대한 저작은 <종교형태론>(한길사, 1996)과 함께 서가에 꽂아두고 쉬어쉬엄 읽어보면 좋겠다. 사실 모스크바 체류시 막판에 가장 망설였던 게 고서점에서 본 엘리아데 러시아어본들을 사느냐, 마느냐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은 인터넷에 전문이 올라와 있었다. 덕분에 이 방대한 책의 러시아어본을 나는 손에 물 안 묻히고 소장하고 있다. 

   

 

 

 

그 자체가 종교학 입문의 성격도 갖는 엘리아데 입문은 엘리아데의 제자이기도 했던 정진홍 교수의 <엘리아데: 종교와 신화>(살림, 2003)이 단연 독보적이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다른 적임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엘리아데 자신의 저작으론 <종교의 의미: 물음과 답변>(서광사, 1990)과 함께 <성과 속>(한길사, 1998)이 기본서. 독문학 연구자인 안진태 교수의 <엘리아데.신화.종교>(고려대출판부, 2005)도 다소 전문적이지만 지난 5월에 나온 관련서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실재의 윤리>의 저자 알렌카 주판치치의 니체론 <정오의 그림자>(도서출판b)이다. 원제는 '가장 짧은 그림자(The Shortest Shadow : Nietzsche's Philosophy of the Two)'. 저자 주판치치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로서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칸트와 라캉'을 다룬 전작에 이어서 잔뜩 기대를 모으는 책인데(앞으로 '주판치치의 모든 책'이 될 것이다) 혹자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에 비견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인연이 닿았다면 번역을 맡을 수도 있었던 책이라 이번 출간이 반갑고 기대된다(나 같이 게으른 역자를 안 만난 게 여러 모로 다행스럽다). 또 마침 책세상판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이번 겨울은 니체에 폭 빠져보는 것도 일리 있겠다. 초심자라면, 이번에 나온 로런스 게인의 '만화책' 입문서 <니체>(김영사) 정도는 떼주시길(나는 작년에 러시아어본으로 읽었다).

니체에 관한 전기로는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 2003)와 홀링데일의 <니체, 그의 삶과 철학>(이제이북스, 2004)가 기본서이다. 전자는 독어권을 대표하며(철학자 전기에 있어서 자프란스키는 최고의 실력자이다) 후자는 카우프만, 아서 단토 등의 책과 함께 영어권(미국)의 대표 저작. 참고로 홀링데일은 카우프만과 함께 니체 영역(英譯)을 양분했었다. 그리고 국내의 대표 저작은 '한국의 책 100권'에 선정된바 있는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 2000). 이젠 외국어로도 읽을 수 있다!(독역되었나?)...

기타 여러 시인들의 시전집들과 토마스 쿤 평전, 몇 권의 정치학 책과 데이비드 흄에 관한 책 등이 보관함에 들어 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어느새 캄캄하다...

05. 10. 31.

P.S.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제발 이젠, 그만 만나자구요?!

P.S.2. 이 페이퍼를 계기로 즐찾 400이 되었다. 평균 하루에 한 명꼴로 찾아주시는 분들이 늘었다. 찾아주시는 분들의 상당수는 출판관계자들인 것으로 안다(일부는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물론 엉터리나 찍어대는 분들은 나와는 아직도 계산할 게 많이 남아있다. 서로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겠으니, 모쪼록 독감들 주의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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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0-31 15:25   좋아요 0 | URL
한 발 빠르셨습니다. 흐흐...

로쟈 2005-10-31 15:32   좋아요 0 | URL
이런 거 먼저 찜하면 혹 상품이라도?..

이네파벨 2005-10-31 16:0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천재의 이면...>의 원제가 혹시 The Dark Side of Genius: The Life of Alfred Hitchcock 아닌가요? 이 원서 저에게 있어요! 10년쯤 전 미국에 있을때 벼룩시장에서 $1.5 주고 산 페이퍼북...
몇페이지 읽다 말고 처박아두었는데 시간나는대로 읽어보아야겠네요.

이 책을 쓴 스포토가 뛰어난 전기작가였군요...
전 개인적으로 평전이라는 장르를 무척 좋아하는데....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주 유명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전 히치콕은 개인적으로 잘 모르고...("새"와 "vertigo"를 보았을 뿐예요. 둘 다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파고들어온 느낌은 아니라서...)
오히려 "테네시 윌리엄스"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은....저에게 정말이지 intimate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실제로 윌리엄스의 삶도 그의 작품들 못지않게 어둡고 불행했다고 들은 기억이 나는데....

고통의 진흙탕에 속에서 딍구는 돼지처럼 온 몸에 고통을 처덕처덕 발라가며....
고통의 실을 잣는 거미처럼 제 몸 가장 깊은 곳에서 누구나 외면하고 싶고 누구도 감히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가장 어둡고 아픈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예술가들....
삶과 작품을 떼어놓을 수 없는 예술가들...

그런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을유문화사에서 기획중이라는 빌리 할러데이의 전기도 기대 중...)

근데 우리나라에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전기를 번역해 내놓으려는 용감한(or 돈벌생각 없는) 출판사는 아마 없겠죠?

바람구두 2005-10-31 16:19   좋아요 0 | URL
아니, 그 대신에 땡스 투 했답니다.

로쟈 2005-10-31 17:30   좋아요 0 | URL
이너파벨님/ 그 책 맞습니다(잘 사두신 겁니다). 부피가 좀 되죠. 저는 같은 1899년생인 작가 나보코프와 히치콕을 비교해보려는 생각에서 관련 대목을 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두 사람이 같이 작업을 할 뻔 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바람구두님/ 땡큐...

니브리티 2005-11-01 09:14   좋아요 0 | URL
와~ 주판치치의 책이 나왔군요! 마침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읽고 있던 참인데...이중긍정 얘기는 도통 머리가 아파서...이해할 듯 하면서도 논점을 놓치거나...그동안의 내 글쓰기가 '원한의 글쓰기'는 아니었나 섬뜩했다는...ㅜ.ㅜ 정말 잘됐군요. 당장 주문해야지...ㅋㅋ

비로그인 2005-11-01 17:08   좋아요 0 | URL
김재인 씨가 이경신의 "니체의 철학" 번역을 "쓰레기"라고 평하셨던데 로쟈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로쟈 2005-11-01 17:13   좋아요 0 | URL
제가 <니체와 철학>을 아직 통독하지 않았는데, 진태원씨 같은 경우는 읽을 만한 번역이라고 했었죠. 제 생각엔 <니체와 철학>보다도 <들뢰즈 커넥션>에 더 오역이 많을 거 같은데...
 

지난번 읽기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거기에 덧붙이려다가 자리를 따로 마련했는데, 분량이 짧게 끝나면 도로 갖다 붙일 작정이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님이 추천한 만델바움(A. Mandelbaum)의 영역본(Everyman's Library, 1995)과 함께 <미메시스>의 저자 아우얼바하(E. Auerbach; '아우어바흐'로도 표기)의 <단테: 세속 세계의 시인>(시카고대출판부, 1961/1974; 독어본은 1929)도 대출했다. 영역된 <단테>는 195쪽이며 분량으로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신곡>을 읽으며, 혹은 읽고 나서 내가 읽고픈 책인지라 미리 대출해놓은 것. 

 

 

 

 

아우얼바하(1892-1957)가 <미메시스>를 출간한 것이 1946년이므로(영역본은 1953년에 나온다) 그가 37세에 출간한 <단테>는 그의 초기 저작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특별히 이 책을 기억하게 된 것은 작년 러시아 체류 시절에 러시아어본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미메시스>의 저자라는 것 말고는 저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이 없었던 나로선 비교적 얇은 분량의 '단테론'에 여러 차례 손이 갔다. 하지만 끝내 구입하지는 않았는데, 재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어차피 영역본으로 읽으면 되리라는 판단과 아직 <신곡>도 읽지 않았다는 사정이 거기에 보태어졌다. 그건 러시아어본 <미메시스>에도 똑같이 적용이 됐는데(나는 국역본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무리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미련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지난 1999년 한 학술지에 아우얼바하 특집이 마련되었었고(특별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 특집은 2003년에도 있었다. 그건 이유가 없지 않은데, <미메시스>(영역본) 출간 50주년 기념으로 <미메시스>(프린스턴대출판부, 2003)가 재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E. 사이드나 T. 이글턴 같은 쟁쟁한 비평가들이 새로운 서평을 씀으로써 아우얼바하의 업적을 기렸다(사이드의 글은 계간 <세계의 문학>에 이글턴의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각각 번역/소개되었다). 내게 더 흥미로웠던 건 이글턴의 시각이었는데, 그는 동시대 이론가들이었던 바흐친, 루카치와 아우얼바하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루카치에게 현실주의가 부르주아적인 것이었다면, 아우어바흐에게 그것은 서민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우어바흐는, 루카치의 역사주의와 바흐찐의 성상파괴주의가 혼합되는 흥미로운 교차점이다."(지주형 역) 이들의 계열체는 이렇다: 루카치(부르주아)-아우얼바하(서민)-바흐친(민중)

 

 

 

 

잠시 우회했는데, 여하튼 단테와 <신곡>에 대한 관심이 작년부터 무르익었었다는 개인적인 사정 얘기이다. 말이 나온 김에 그런 개인 사정을 조금 더 늘어놓자면, <신곡>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중2 때이다. 학교에서 공부 라이벌이었던 한 친구가(이 친구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변호사가 돼 있다) 어느날 세로 읽기로 된 <신곡>을 들고 다녔던 것. 200쪽 정도의 분량이었으니까 지금 생각에 좀 조잡한 다이제스트판이었던 듯싶은데(당시에 따로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이름을 꿰고 있지만 정작 읽지는 않은 '고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는 게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같은 책을 사서 (끼고 다니지는 않고)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해설만 읽었던 모양으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를 나는 이후에 (여러 미팅 자리에서) 여러 번 욹어먹은 기억이 있다. 가령,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말이야... 너무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너무 멀리 떨어질 수도 없어서... 진정한 사랑이란 아마도...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본론이란 특별한 게 아니고 지난번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서" 읽기를 약간 보충하고자 할 따름. 내가 새롭게 동원하고자 하는 건 서두에서 언급한 만델바움의 번역과 허인 옮김으로 돼 있는 '단떼'의 <신곡>(학원출판공사, 1996)이다. '학원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인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 헌책방에서 2,000원을 주고 샀다. 2단 조판의 본문이 376쪽이므로 다이제스트는 아니지만 번역본 서지나 역자에 대한 소개 등이 누락돼 있어 신빙성 있는 번역인지는 좀 의심스럽다. 하여간에 이 번역본에서 지난번에 읽은 첫 9행을, 비교를 위해서 한형곤 역과 같이 옮겨보면 이렇다. 만델바움의 영역도 나란히 옮겨놓겠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한형곤)
-인생의 중반기에서/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컴컴한 숲속에 있었다.(허인)
-When I had jouneyed half of our life's way,/ I found myself within a shadowed forest,/ for I had lost the path that does not stray.(만델바움)

-아, 거칠고 사납던 이 숲이/ 어떠했노라 말하기가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한형곤) 
-그 가열하고도 황량한, 준엄한 숲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입에 담는 것조차 괴롭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허인)
-Ah, it is hard to speak of what it was,/ that savage forest, dense and difficult, which even in recall renews my fear:(만델바움)

-죽음 못지 않게 씁쓸했기에/ 나 거기서 깨달은 선을 말하기 위하여/ 거기서 본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리라.(한형곤)
-그 괴로움이란 진정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거기서 목격한 두세 가지 일을 우선 이야기할까 한다.(허인)
-so bitter - death is hardly more severe!/ But to retell the good discovered there,/ I'll also tell the other things I saw.(만델바움)

1, 2연의 번역은 지난번 읽기를 수정할 사항이 없다. 3연에서 역시나 'the good'의 번역이 문제인데, '선을 깨닫다'(한형곤)나 '선을 만나다'(박상진)란 표현이 어색하다는 건 여기서도 변함없다. 다만 허인 역에서는 '행복'이 지옥와 연옥의 안내자로 등장하는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뜻한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박상진 역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이 두 행을 "그러나 나는 거기서 귀중한 선(善)을 만났으니, 내가 만난 선을 보여주려면 거기서 본 다른 모든 것들도 말해야 하리라"라고 옮겼을 법하다. 박상진 역은 만델바움의 영역과도 걔 중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 과연 그 '선' 혹은 '행복'이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더 읽어봐야겠다. 참고로, <신곡>을 읽으면서 반드시 참조해야 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는 천병희 선생이 정역본이 작년에 나왔다(이래저래 <신곡> 읽기를 피해갈 구멍이 없는 셈!).

 

 

 

 

이상을 종합하여, 나의 '독단'에 따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번역 작업은 때로 작곡과 유사하다).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 가야할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을 헤맸었네.
-아, 얼마나 아득하고 거친 곳이었는가/ 말로 다 이를 데 없고/ 생각만으로도 두려워라.
-죽음도 그보단 덜 쓰라릴 것이나,/ 거기서 나 은총을 마주했으니/ 이제 이 모든 걸 이야기하리라.

05. 10. 26. 

P.S. 아주 짧은 분량은 아니군... 마지막 연에서 '은총을 마주했으니'가 '신의 은총'이 아닌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면, '은혜/은인을 만났으니'라고 옮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이런 게 나대로의 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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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0-2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잘 읽었어요.

로쟈 2005-10-27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에 감사를...

2005-10-27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0-28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칼라일 읽기 프로젝트를 저도 구경하면 안될까요?^^

쿠자누스 2005-11-0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본을 출간하시면 어떨지요 ? 주문 예약을 하겠습니다.

로쟈 2005-11-0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본이라니요? 턱도 없는 말씀이고, 저는 고전을 제 식으로 읽고 즐길 뿐입니다. 조만간 박상진 교수의 <신곡> 새 번역본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런 걸 기다리는 설렘을 누리면서...

2008-12-05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생길 반고비에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읽는다. 단테가 얘기한 반고비는 ("인생은 기껏해야 70년"이란 성서 시편의 구절을 기준으로 하여) 35세이지만, 그리고 그 나이라면 나로선 몇 년전에 (일없이)통과해 왔지만, 얼추 반고비로 간주하여(평균수명이 좀 늘어나기도 했으니 혹 여든까지 살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신성한 코미디'를 한번 읽어볼 계획이다. 이런 계획을 더 일찍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 개정된 완역본 <신곡>과 관련서들이 얼굴을 내민 게 바로 얼마전이기 때문이다.

 

 

 

 

 

 

 

 

 

해서 <신곡>을 읽기 위해 내가 갖추어 놓은 책은 한형곤 교수의 완역본 <신곡>(서해문집, 2005), 박상진 교수가 (산문으로)풀어쓴 <신곡>(서해문집, 2005), 그리고 김운찬 교수의 해설서 <신곡>(살림, 2005)이다. 거기에 덧붙여 도서관에서 영역본 <신곡>(J. Ciardi 옮김, New American Library, 2003)을 대출했고, 작년에 구해온 러시아어본 <신곡>(악트출판사, 2002)을 펼쳐놓고 있다(605쪽의 러시아어본은 '새 책'인데 헌책방에서 3,400원에 산 것이다. 그런 게 애서가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읽을 줄 모르는 이탈리아어(단테는 피렌체 방언으로 썼다고 하며 그게 '단테 덕분에' 표준어로 성장했다고 한다)를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 띄워놓았다. 계획상으로 이 읽기는 이번 겨울까지 계속될 것이며, 간간이 읽기의 흔적들을 이런 자리에 남겨놓도록 하겠다. 오늘은 시작하는 의미로 '지옥편'의 첫 아홉 행을 읽는다.

 

먼저 원문은 이런 모양으로 돼 있다(왼쪽의 숫자는 칸토(Canto)와 행수를 표시한다. 시에서 '칸토'란 소설의 '장(章)', 혹은 'chapter'에 해당하는 용어인데, 현대 시인들 가운데서는 T. S. 엘리엇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E. 파운드의 시집 <칸토스(Cantos)>(문학과지성사, 1992)가 유명하다. '시편들' 정도의 뜻이 될까? <신곡>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곡'이라고 옮기는바, '1.1'은 제1곡의 제1행이란 뜻이다.

 

1.1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1.2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1.3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1.4   Ahi quanto a dir qual era è cosa dura
1.5 esta selva selvaggia e aspra e forte
1.6 che nel pensier rinova la paura!

1.7   Tant'è amara che poco è più morte;
1.8 ma per trattar del ben ch'i' vi trovai,
1.9 dirò de l'altre cose ch'i' v'ho scorte.

 

<신곡>의 형식은 알다시피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3부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은 33편의 곡(노래)으로 돼 있다(단테는 '3'이란 숫자에 유달리 집착했다고). 김운찬 교수의 해설을 참조하면, 각각의 시행은 11음절로 돼 있으며, 세 개의 행이 하나의 단락을 이루는 3행 연구(聯句)로 구성돼 있다. 거기서 1, 3행이 각운을 이루고 있는바, aba, bcb, cdc...하는 식으로 운이 맞추어져 있는 것. 예컨대, 인용한 대목에서 굵은 글씨로 표기한 각 연구의 1, 3행 마지막 단어들이 각운을 맞추고 있는 단어들이다. 33편의 각 곡은 115-160행 사이의 행들로 구성돼 있으며(가장 많이 활용되는 길이는 139행과 142행이라고), 맨마지막에는 3행 연구 다음에 1행이 덧붙여진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 <신곡> 전체는 1만 4,233행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 첫 9행은 그러니까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의 첫 세 걸음인 셈이다. 나는 3행 연구를 편의상 '연'이라고 부르겠다. 해서, 1연부터 살펴보면, 우리말 번역은 이렇게 돼 있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한형곤, 42쪽)

 

시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행가름은 돼 있지만, 원시처럼 운율(특히 각운)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우리 완역본의 경우엔 3행연구의 연 구분을 따로 해주고 있지 않다(그랬다면, 현재 968쪽인 번역본의 쪽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 불어났을 것이다). 일종의 절충식인 것. 참고로 영역본에서 1연을 옮기면 이렇다.

 

Midway in our life's journey, I went astray
from the straight road and woke to find myself 
alone in a dark wood. How shall I say

 

1, 3행의 마지막 단어를 굵을 글씨로 표기한 것은 각운을 맞추고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건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굴절어에 속하는 같은 인구(印歐)어일 경우에 시 번역은 시로서의 형식적 조건을 맞추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내용상 약간의 변형을 감수하더라도). 반면에 교착어인 한국어로는 그런 형식미를 충족시켜주기 어렵다. 해서, 박상진 교수가 산문으로 풀어쓴 문장, "인생의 반평생을 지냈을 무렵, 나는 바른길에서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들어서게 되었다."를 그냥 행가름만 해주면 한형곤 교수의 번역과 별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인생의 반평생을 지냈을 무렵, 
나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들어섰다.(박상진, 14쪽)

 

혹은 같은 대목의 다른 번역:

 

우리 인생길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 처해 있었다.(김운찬, 59쪽)

 

다시 말해서 <신곡>의 시로서의 묘미는 대개의 시 번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역본에서는 음미하기 어렵다. 해서, 우리가 따라가볼 수 있는 것은 그저 대략적인 줄거리이고 여정일 따름. 원문의 'mezzo'(많이 보던 단어이다!), 영역의 'midway'에 해당하는 것이 우리말의 '반 고비'인데, '고비'란 '막다른 때나 상황'을 가리키는 고유어이고 '반 고비'는 인생의 전환점, 30대 중반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비교적 제한적인)쓰임새를 갖고 있다. 이 경우에는 '반평생'이나 '한가운데에서'보다는 '반 고비'란 말이 시적이다. 참고로,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30대 중반에 쓴 기행문집에 <반고비 나그네 길에>가 있었다.

 

 

 

 

 

 

 

 

 

1연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인생길 반고비에서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서 정신이 들었다는 것. 그런 상황에 처해서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는 게 2연의 (당연한)내용일 테다.

 

아, 거칠고 사납던 이 숲이   
어떠했노라 말하기가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산문적으로 조금 풀면, "그 숲이 얼마나 거칠고 무서웠던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절로 솟아난다."(박상진) 그렇다면, 이러한 회상을 늘어놓고 있는 화자-단테는 그러한 경험/여정이 완료된 상태(=현재)에 놓여 있다. 요컨대, 어두운 숲에서의 두렵고도 굉장한 경험을 이제 말해보겠노라는 것. 왜? 그 이유가 3연이다.

 

죽음 못지 않게 씁쓸했기에   
나 거기서 깨달은 선을 말하기 위하여
거기서 본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리라.

 

다시 풀면, "죽음도 그보다는 더 무섭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거기서 귀중한 선(善)을 만났으니, 내가 만난 선을 보여주려면 거기서 본 다른 모든 것들도 말해야 하리라." 다른 번역들을 참조하건대, (한형곤 역에서의) '죽음 못지 않게'라는 동등비교보다는 (박상진 역에서의) '죽음보다 더'라는 우등비교가 더 타당한 듯하다(문맥의 논리상으로도 그렇다). 비교의 대상은 물론 '숲'과 '죽음'이다. 그리고 내가 좀 어색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이란 번역어인데, 짐작에는 원문의 'ben'(원형은 'bene'라고 한다)을 옮긴 게 아닌가 싶다(불어의 'bien'을 연상케 하는데, 영어의 'good'에 해당한다). 참고로, 이 3연의 영역은 이렇다.

 

Death could scarce be more bitter than that place!    
But since it came to good, I will recount 
all that I found revealed there by God's grace.  

 

'선(善)' 이란 뜻 외에 불어 bien이나 영어의 good, 그리고 러시아어의 blago(영어의 'good' 혹은'grace') 모두가 공유하는 뜻은 '행복'이나 '은총'이며, 기독교적 문맥에서는 '선'보다 '은총'이 더 적합한 번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화자인 단테는 어두운 숲과 거기서의 경험이 죽음보다도 더 두렵고 씁쓸했지만(그걸로 끝이라면 더 얘기할 것도 없다), 거기서 '은총'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제 모든 걸 얘기하겠노라는 것(recount, 즉, 하나씩 되새김질하면서). "거기서 본 다른 것들"도 문맥상 "거기서 본 모든 걸들"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물론 나는 <신곡>에서 내가 읽은 모든 걸 늘어놓은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거기서 읽은 몇몇 대목들' 정도를 앞으로 따라가볼 작정일 뿐. 왜? 벌써 인생길의 반고비를 지나(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테를 따라서 한번쯤 지옥과 천국을 오락가락 해보는 편이 마땅하다... 

 

0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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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0-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점심을 드시고 와서 나머지 글을 쓰시겠지만 일단 추천부터 해 두렵니다.
미리 보지 않아도 나쁜 글이 아닐 거라는 걸 아니까요. 흐흐.

로즈마리 2005-10-2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손 대고 싶은데...이럴 때 이탈리아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

로쟈 2005-10-2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천국은 장담할 수 없구요, 지옥 정도는 같이 가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2005-10-25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0-2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Mandelbaum의 영역본도 도서관에는 있는데, 제가 어떤 번역본이 더 나은가에 대한 정보는 안 갖고 있었습니다. 추천해 주시니까 그 책도 참조하겠습니다. 뭐, 저로선 <신곡>을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울 생각까지는 안 갖고 있습니다(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서 러시아어를 배우겠다는 게 쉬운 결심이 아니듯이). 다만, 스페인어권 시를 읽을 때 원문을 낭송해보곤 했었는데, 그런 방식 정도를 흉내 내볼 수 있겠네요(이탈리아어도 대충 철자대로 발음하는 거 맞지요?^^)...

산손 2006-06-0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 리플 답니다 ;; 저는 최민순 신부 번역을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한뉘 나그냇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이던 나 컴컴한 숲 속에 서 있었노라/아으 호젓이 덧거칠고 억센 이 수풀 그생각조차 새삼 몸서리 쳐지거든 아으 이를 들어 말함이 얼마나 대견한고!/죽음 보다 못지않게 쓰거운 일이 었어도 내 거기서 얻어본 행복을 아뢰려로니 게서 익히 보아둔 또 다른것들도 나는 얘기하리라'. 읽기 편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영어로 번역이 미심쩍은 거 살펴보면 최민순 신부님이 더 맞더라구요(불어, 스페인어 번역과 일치하죠). 영어번역은 워낙 여러 시도가 있었는지라 ;; 이탈리아어랑 대조하면서 보시려면 Singleton 아저씨의 산문 번역(이탈-영어)을 참고하시면 될 거에요. 주석본도 같이. 이탈리아어 낭송은 www.ilnarratore.com에 단테 검색하시면 Canto I 낭송한 게 있습니다. 이상 뒷북이었습니다 ;;;
 

이 연재의 경우 주로 알라딘의 신간 소개를 참고하기 때문에 간혹 빠트리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을 일간지 북리뷰에서 보게 되면 반가우면서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부득불 새로운 소개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최근에 그런 책들이 몇 권 되기 때문이다. 피터 게이의 <부르주아전>(서해문집)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책의 부제는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로 돼 있는데, 원제가 '슈니츨러의 세기(Schntzler's Century)(2002)이다. 피터 게이는 역사학자로서 현재는 예일대학의 명예교수로 있는 분이라는 데, 우리에겐 <계몽주의의 기원>(원제는 '계몽주의: 한 가지 해석 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라는 방대한 책으로 소개된 양반이다. 계몽주의에 관한 저서도 갖고 있지만 서지를 보면 바이마르 시대가 '주전공'인 듯하다. 프로이트에 관해서도 800쪽이 넘는 전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도서관에서 보던 책이다!). 아마도 이 시기에 관해서라면 미국에서도 최고 권위자일 듯하다. 그러니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에 대해 이 만한 규모(430쪽 가량)의 책을 쓰는 건 뭐 식은 죽먹기일 수도.

소개에 따르면 책은 "1815년부터 1914년에 이르는 19세기 중간계급의 '전기'다. 지은이가 길잡이로 삼은 인물은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극작가이자 소설가였던 아르투어 슈니츨러. 슈니츨러는 14세부터 5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지은이는 슈니츨러의 일기를 펼치면서 슈니츨러 자신과 그가 그려낸 인간 군상, 곧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를 쓴다." 특이한 것은 저자가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을 역사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 "이 책에서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대표적인 요소들이 - 섹슈얼리티, 불안 - 서구 부르주아의 내면을 이해하는 열쇠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역사학의 프로이트'인 피터 게이는 '문학의 프로이트'인 슈니츨러의 눈으로 19세기를 조명함으로써 정신분석학과 역사학의 만남을 꾀하고 있다."

원로 학자의 성 '게이(Gay)'는 이래 저래 검색하기 불편한(!) 이름인데, 그가 프로이트에 빠져들게 된 게 비단 성(性) 때문이 아니더라도 혹 그런 성(姓)과 관련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간에 개인적으론 관심을 갖게 되는 저자이며 더 많은 그의 책들이 번역되기를 기대한다(주로 두꺼운 책들을 쓴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한편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계급에 대한 전기를 감당하게 된 슈니츨러는 우리에게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 원작자로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 작가이다. 프로이트로부터는 '심층 심리의 탐구자'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는데, 52년 동안 일기를 쓸 정도면 '숨기고 싶은' 그러나 '기록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기도 많았을 것이다(물론 대부분은 이상 성심리나 콤플렉스에 관한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큐브릭이 현대적으로 각색한 <꿈의 노벨레>부터도 성에 관한 오해와 판타지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슈니츨러의 다른 책들은 읽어본 바 없는데, <특별한 사랑이야기> (문화사랑, 1998), 희곡 <사랑의 유희>(성대출판부, 1999), 소설 <마지막 도박>(세계사, 1999), 단편집 <죽은 자는 말이 없다>(문예출판사, 2000), <사랑의 묘약>(문예출판사, 2004)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 최근에 '도박'과 관련한 논문도 쓴 김에 <마지막 도박> 정도는 읽어봐야겠다(이 책의 소개에는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작가가 쓴 장편소설'로 돼 있다! 정선에 가실 분들은 미리 필독하시길.). <사랑의 묘약>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개정판이다(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을 패러디한 제목인 듯한데, 원제가 그런지는 모르겠다). 

 

 

 

 

두번째 책은 데이비드 버스의 <마음의 기원>(나노미디어).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는 저자는 현재 텍사스대학의 심리학과 교수로 있다는데, 우리에겐 <욕망의 진화>(백년도서, 1995),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청림출판, 2003)로 알려져 있다. 나는 둘다 갖고 있고 전자를 읽었다. 버스는 도킨스 같은 스타 과학자들의 필력을 자랑하진 않는다. 원제가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 the new science of the mind)'인 이 책도 언젠가 도서관에서 원서를 본 적이 있는데(1999년에 초판, 작년에 2판이 나왔다) 딱 대학교재 같은 구성과 내용으로 돼 있다(그러니 '진화심리학 입문' 정도의 책인데, '마음의 기원'이란 역서명은 좀더 많은 독자를 유인하기 위한 방책인 듯싶다).  

물론 '좀더 많은 독자들'께서 바로 이 600쪽이 넘는 책을 집어들기는 어려울 테고, 딜런 에반스의 <진화심리학>(김영사, 2001) 정도로 먼저 몸을 푸시는 게 좋겠다. 그런 후에 최재천 교수 등이 쓴 <살인의 진화심리학>(서울대출판부, 2003)은 진화심리학 '연습' 정도로 훑어보고 그래도 내키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을 경우에 비로소 버스를 읽어나가는 게 제대로 된 코스 같다. 그 코스에서 옆길로 새는 독자들을 위해선 신간 <다윈은 어떻게 프로이트에게 낚시를 가르쳤는가?>(바다출판사)가 준비돼 있다(이런 제목들은 다 누가 짓는 것인지?). '낚싯대로 건져 올린 인간, 진화 그리고 심리학 이야기'란 부제를 갖고 있는데, 낚시광인 저자가 "물에서 뭍으로 진화를 거쳐 '낚시하는 인간'으로 진화해온 인류와 낚시꾼의 경험담을 전해준다"고. 물론 거기에 걸려들 독자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구호: "헤이, 우리는 삼천포로 간다!"

버스의 또다른 책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의 원제는 '위험한 열정(The Dangerous Passion)'(2000)인데, 많이 '노력한' 역서명이지만 원제가 유인책(미끼)으로는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판매율이 아주 저조하다). 책은 <언어본능>의 저자 스티븐 핀커도 추천하고 있는 만큼 '엉터리'는 아니다. '성적 질투와 살해', '배우자 살해에 대한 진화적 설명', '배우자 살해를 당하기 쉬운 여성들' 등 자극적인 내용들도 많이 포함하고 있으므로 일독해볼 만한 책. 사실 <살인의 진화심리학>도 '배우자 살해'에 관한 연구인데, 이게 초창기 진화심리학의 '인기 있는' 주제였다.  배우자 살해라면, 물론 대개는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경우인데('나는 도끼 부인과 결혼했다' 케이스가 아니라면) 좋다고 쫒아나딜 때는 언제고 죽이는 건 또 뭔가?(죽도록 사랑해서 죽이는가?) 

그런 게 문득 궁금한 독자라면 <남자는 원래 그래?>(리좀)을 손에 들만 하다. 저자 모리오카 마사히로 교수는 <무통혁명>(모멘토, 2005)의 저자이기도 한데, 신간은 남성의 성심리와 '불감증'을 다루고 있다(오늘자 한겨레가 자세한 리뷰를 싣고 있다. 참조하시길). 변태적이거나 도착적인, 하지만 일반적인(!) 남성심리에 대해서라면 일본인 저자의 통찰을 참조해볼 하다. 일본이 그 방면으로는 상당히 앞서가고 있는 나라니까 말이다(여고생 팬티를 자판기에서 판매하는 나라가 또 있는지?).   


 

 

 

 

세번째 책은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의 <자유주의적 평등>(한길사)이다. 원제는 'Sovereign Virtue'(2000). '주권의 미덕'이란 뜻인가? 개략적인 소개를 옮겨오면 이렇다: "현대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롤스 이후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서 자유주의가 평등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평등권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주장한다. 드워킨은 지금까지의 현대 정치철학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대다수 정치사상의 입장들을 평등에 대한 하나의 견해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고, 고대의 그리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철학의 문제를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지의 문제로 다루고자 한다. 드워킨의 정치철학에서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철학에서 공동체는 자유와 평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정치적 이상으로 인정된다. 그는 공동체와 자유와 평등을 동일한 하나의 정치적 비전의 상호보완적인 측면들로 본다."

사실 작년,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들 중에는 <법의 제국>(아카넷)이라는 두툼한 법철학서도 있어서 다소 놀랐더랬는데('드워킨'이란 이름은 인문서를 읽다 보면 곧잘 등장한다), 이번에 '쐐기'를 박는 책이 출간된 것. 며칠 전 주문했던 <법의 제국>은 오늘 받았는데, '법'과 관련한 논문을 준비중에 있기 때문에 일단 구매를 했고 언제 통독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드워킨의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법철학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책은 역시나 작년에 출간된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이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책들이 나와 있는데, 내 생각에 역시나 표준적인 것은 스티븐 뮬홀(멀할)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1)이다. 그 책의 한 장이 드워킨에 할애돼 있다.

 

 

 

 

네번째 책은 '소련'에 관한 책이다. 미국인 저자들이 쓴 <소련의 역사와 계급이론>(이후).  원제는 '계급이론과 역사'이고, 부제가 '소련에서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이다. 2002년에 나온 책이니까 비교적 신간이며 빨리 소개된 편인데, 거기엔 역자가 저자들에게 배운 제자라는 속사정도 들어 있다. 한국어판 서문이 2003년 9월에 씌어지고 옮긴이의 말도 작년 1월에 작성된 걸로 돼 있는데, 책이 지금에야 나온 건 무슨 사정 때문인지? 하여간에 비록 소련 '경제'를 다룬 책이지만 넓은 의미에선 '전공서적'에 속하기 때문에 나로선 반갑다. 스티븐 레스닉과 리처드 울프, 두 공저자는 맑스주의 계급투쟁이론의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는 '앰허스트학파'의 리더들이라고 하는데, 그 방면으론 눈이 어두워 어느 정도 지명도에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여러 권의 공저를 냈지만, 한국어로는 처음 소개되는 듯하므로 나의 무지가 흠은 아니겠다.    

줄거리는 생각보다 단순해 보이는데, 저자들은 소련의 경제를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분석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러한 시각을 빌려 남북한도 비교해볼 수 있으리라고 시사하는데, 가령 남북한에서 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대립적인 체제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각각에서 작동하는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것. 그렇다면, "생산수단의 집단소유와 국가계획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농장과 공장에서 공상주의는 결코 성취되지 않았다. 대신, 북한에는 국가자본주의가 존재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북한사회에 여전히 가능한 대안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라면, "남한과 북한 사회 모두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한 판단을 입증/반증할 만한 데이터를 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내가 동의할 만한 견해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와 김일성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으며, (손호철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강정구나 조갑제나'이다. 오늘자 한겨레 북리뷰에 실린 도정일 교수의 칼럼에서도 '상식적인' (그러나 현재 간과/무시되고 있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는 북두칠성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자도 관용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그게 그 체제의 짐이고(*혹은 딜레마이고) 영광 아니더냐? 그 짐을 질 자신이 없거든 일찌감치 걷어치워라. 너희가 북한과 같아지고 싶어서 안달이냐?"

어떤 나라는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하고 경축 분위기인데, 또 어떤 나라는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거의 '국난'을 당한 듯 시끌벅적이다. 만경대 정신을 떠받들겠다는 지식인이 (우리식 분류로) 좌익이고 친북인사라는 건 부인하지 말자.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지난 월요일자 한 신문의 칼럼에서 한 헌법학자는 '흔들리는 대한민국의 기본질서'라는 제하에 "사상과 양심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들어 국가적 범죄도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하나 사상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법률로 제한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일갈했는데, 과거 유신헌법 기초에 관여했었다는 그의 전력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는 걸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원로들이 며칠전에는 구국운동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그 구호가 대한민국 만세였는지, 말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런 취지로 만경대주의자들을 다 잡아넣는다고 치자. 한데,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북한식'이며 '북한식 인권의식' 아닌가? 현 국가보안법이 이렇듯 '북한과 같아지고 싶어서 안달'하는 이들을 처분할 수 없다면, 그건 뭐하는 법인가? 거꾸로 만경대주의자에 대한 관용을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강변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또 무슨 자격으로 진보주의자인가? 북한보다 나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인데, '강정구 사건'과 관련하여 이보다 '보수적인' 태도가 또 있을까?(실상 남한이 북한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못한' 체제라는 것이 폭로되어야 혁명/통일 대업 달성에 유리한 것 아닌가? 그러니 더 많은 이들이 국보법으로 잡혀가야 정세가 더 호전되는 것 아닌가?) 내막은 또 짜고 치는 수작들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상식적으론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한국정치인 듯한다... 

어쨌든, 예전에 <소련국가자본주의>(책갈피, 1993)란 책이 나왔었는데, 신간과는 기조가 유사할 듯싶다. 소련 경제에 대해서는 권위자라고 하는 알렉 노브의 <소련경제사>(창비, 1998)도 참고할 만한 책.

 

 

 

 

마지막 책은 얼마전 101세로 세상을 떠난 중국의 대작가 파금의 <파금수상록>(학고방). 우리에겐 그의 대표작 <집(家)> 등이 소개돼 있는데, 한때 노벨문학상 단골후보이기도 했던 '큰집' 작가에 대한 예우로서는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언론에서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바진'이라고 표기했던데, 아마도 중국어로는 그렇게 불리는 모양이다(대역본 <바진 소설선>이 출간돼 있다). 등소평(덩샤오핑)과는 동갑내기로서 서로 막역했다고 하는데, 젊은 시절 무정부주의에 심취했던 듯 파금(바진)이라는그의 필명은 그가 존경하던 러시아의 무정 부주의자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의 한자음에서 각각 첫 음절과 마지 막 음절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식으론 '바킨'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데, 우리로선 이 '바킨' 같은 작가를 기대할 수 없는데, 우리말로 된 '바쿠닌' 책이 한권도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E. H. 카가 쓴 평전 <미하일 바쿠닌>(종로서적, 1989)이 좀 돌아다녔지만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그나마 크로포트킨은 사정이 좀 나아서 그의 <자서전>(우물이있는집, 2003)과 상호부조론 <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2005)가 나와 있는 정도. 이 걸출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에 대해서는 할 수 없이 <아나키스트의 초상>(갈무리, 2004) 같은 책들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겠다. 저자인 폴 애브리치는 아나키즘 전문가로서 그의 책으론 <러시아 아나키스트, 1905>(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예문, 1989) 등이 더 번역된 적이 있다. 지금은 다 어데로 갔나? 하긴, 뭐이 아나키스트는 아무나 하나...  

05. 10. 21.  

 

 

 

 

P.S. 언젠가 한번 언급했었는데, 시인-비평가이자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친구이기도 한 이장욱의 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이 출간됐다.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 소설가 공지영의 평에 따르면, "만만치 않은 문장력과 사회에 대한 통찰, 소설의 구성에 대한 고심의 흔적이 엿보였다. 고심을 많이 했다고 해서 꼭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은 아니지만 그 치열한 대결의식에 점수를 주고 싶었다. 최근에 나온 신인의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 아닐까 자부한다"고.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다음 생(生)으로 미룬 장래 희망이 있었다. 아주 유연한 유격수. 무표정한 프로바둑 기사. 소설가. 다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소설가가 되었다. 가능하다면 유연하고 무표정한 그런 소설가가 되도록 하자." 지인(知人)의 책이라고 나도 따로 표정을 짓지는 않겠다...

덧붙여,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는 진주 태생의 시인 허수경의 네번째 시집이 나왔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나는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비, 2001)가 다소 불만스러웠으나 새 시집에 대한 기대마저 놓은 건 아니었다. 소개에 따르면, "시인은 시편들을 통해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反전쟁에 대한 노래, 이 아이러니를 그냥 난,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다고 말한다." "먼 이국땅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시인이 오래된 지층 사이에서 혹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넘쳐나는 전쟁 소식을 접하며 마치 발굴하듯 모국어로 옮긴 한 자 한 자의 시어는 '시'가 '역사'를 대할 때 보일 수 있는 한 전범이"라고 하니까 일독해 보시길. 그이의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현대문학)은 지난달에 나온 책이다.

이제 '감자의 시간'이다. 빨리 귀가해야겠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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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efire 2005-10-22 03:06   좋아요 0 | URL
피터 게이의 [바이마르 문화]는 예전에 모 출판사 문고판시리즈인가로 번역되었습니다. 도서관(어떤 곳은 구간)에서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 90년대 이후 바이마르 문화연구가 서구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기(막강 [바이마르 리퍼블릭 소스북] 이후로) 전까지 이 책이 유용한 입문서 역할을 했었죠. 지금은 당장 보기 힘들지만 관심이 가네요. 일단 보관함에 걸어둡니다.

푸른꽃 2005-10-22 08:43   좋아요 0 | URL
피터 게이의 성은 원래 Froehlich였어요. 독일어로 "즐거운"이란 뜻이죠. 나치 집권 후 유태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같은 의미의 Gay로 바꾼 거예요. 물론 요즘엔 다른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되는 단어지만요.^^

로쟈 2005-10-22 15:03   좋아요 0 | URL
palefire님/ 예, <바이마르 문화>는 탐구당에서 나온 적이 있습니다. 푸른꽃님/ 그렇군요. 독일문화사에 정통한 이유가 있었군요. 하긴 니체의 '즐거운 지식/학문'도 영어로는 'Gay science'죠.^^

evopsy 2005-11-01 12:07   좋아요 0 | URL
추측하신대로 데이비드 버스의 [마음의 기원]은 원래 대학의 심리학과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과서입니다. 그가 텍사스대학에서 하고 있는 [진화심리학]강의도 이 책을 교과서로 하고 있습니다. "오셀로...헤라"' 이 책은 차라리 원제 그대로 [워험한 열정]이라 하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말씀에 십분 동감합니다. 흑..
 

어제 TV 등 언론에서는 노언 촘스키가 영미의 시사지들이 인터넷 투표를 통해서 선정한 '세계의 지성' 중 '최고의 지성인'으로 뽑혔다고 보도했다. 약 2만명이 참가한 투표에서 약 5000표를 획득, 2500표를 얻은 움베르토 에코를 더블 스코어로 따돌렸다고. 주로 영어권 네티즌이 참여한 것이므로 영미쪽 지식인들이 대거 선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프랑스쪽 지식인들은 톱10 안에 한 명도 들지 못했다). 어제 귀가길에 문화일보에서 이 '톱10'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대중문화'의 산물이기도 한 이런 투표 자체에 별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동시대 지식인들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가늠하는 데는 유익한 지표인 듯싶어서 소개하고 몇 자 덧붙인다(내가 흥미를 느낀 건 생물학자들의 부상이었다).

1위 노엄 촘스키(미국). 직업은 언어학자로 돼 있지만, 정치비평가, 문명비평가 정도로 더 잘 알려져야 마땅한 사람이고, 주로 하는 일은 '미국 비판'이다. 네오콘 잡지의 한 편집장은 촘스키와 하워드 진을 가리켜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대중이 보기엔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물론 비판의 테마와 강도와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촘스키의 인지도가 높은 것은, 내가 보기에, 가장 쉽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그의 언어학 책이 쉽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가 프랑스의 현학적인 지식인들에 대해서 못마땅해 한 것은 당연한다(푸코 등을 읽다가 좌절한 사람들에게 촘스키는 희망이다). 대중들이 읽을 글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쓰라는 것. 그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힌 만큼 그의 '전략'은 유효해 보인다.   

  

촘스키의 책들은 국내에 '너무 많이' 소개돼 있다(국내엔 촘스키의 제자들도 여럿 된다). 수준 이하의 번역들도 많다고 하지만, '어렵지 않은' 책들이기 때문인 듯. 그의 전기로는 <촘스키, 끝없는 도전>(그린비, 1999)와 <촘스키>(시공사, 1999)가 같은 해에 나왔다(나는 전자를 읽고 후자를 사두었다). 바쁘신 분들은 <30분에 읽는 촘스키>(랜덤하우스중앙, 2004) 정도를 읽어주시면 되겠다. 책의 역자이자 전문번역가인 강주헌씨는 요즘 부쩍 촘스키에 빠져 있는 듯한데, 가장 최근에 나온 촘스키 책도 그가 번역한 <지식인의 책무>(황소걸음, 2005)이다. 물론 책은 제목에서부터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한마당, 1999)를 떠올리게 한다. 대중적 인지도에다 사회적 책무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 촘스키는 우리 시대의, 미패권주의 시대의 '사르트르'이다(사르트르적 의미의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뜻한다).

2위 움베르토 에코(이탈리아). 직업은 문학비평가로 돼 있지만, 기본적으론 기호학자이고 게다가 소설가이다. 아마 러시아에서 이런 류의 투표를 했다면, 촘스키를 거뜬히 따돌렸을지도 모른다. 정치비평서들이 일부 '전문서'로 소개돼 있는 촘스키와는 달리 에코의 경우는 소설과 문학비평서, 중세미학연구서 등이 시리즈로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러시아보다 국내에 더 많은 '에코'가 나와 있다(그의 '조이스'론이 소개되지 않은 게 아쉽지만). 거의 '에코 천국'이라고 할 만큼.  

 

 

 

 

 

  

 

 

 

국내의 에코 전문출판사로는 열린책들과 새물결을 들 수 있는데, <움베르토 에코 평전>(2004)는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에코 붐'을 만들어낸 건 물론 그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초판은 1986)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에코 자신이 쓴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열린책들)와 이윤기 선생의 번역을 교정해준 것으로 잘 알려진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가 부수적인 참고문헌이 된다. 개정판도 갖고 있지만 내가 읽은 건 <장미의 이름> 초판이며, 작년에 러시아어본도 구해왔기 때문에 나중에 개정판으로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인다(<푸코의 진자> <전날밤> <바우돌리노> 등의 다른 소설들은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만 하도록 한다). 모두가 알 만한 사실은 <장미의 이름>이 장 자크 아노에 의해서 영화화됐다는 것(숀 코너리와 크리스천 슬레이터 주연). 그리고 대부분이 모를 만한 사실은 <장미의 이름>이 다른 역자에 의해서도 번역됐었다는 것. <장미의 이름으로>(우신사, 1986). 프랑코 모레티의 표현을 빌면 번역 또한 '도살장'이어서 살아남는 번역은 몇 안된다.   

 

자신의 최초 전공이기도 했던 중세미학에 관한 책으론 <중세의 미와 예술>(열린책들, 1998), 기호학자로서 명망을 얻은 책으로 <기호학과 현대예술>(열린책들, 1998)이 국내엔 소개돼 있다(<기호학과 현대예술>은 불어본의 번역이고, 영어본 번역은 <기호학이론>(문학과지성사)이다. 이 국역본보다는 영어본이 훨씬 읽기 쉽다). 기호학자로서의 출세작 <기호학 이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2005)에 대해서는 한번 소개한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대신에 추천할 만한 것은 에코가 공저한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인간사랑, 1994). 역자가 에코의 제자이다. 에코 기호학에 관한 국내 연구서로는 박상진 교수의 <에코 기호학 비판>(열린책들, 2003)이 유일하지 않나 싶고,  김성도 교수의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 2003)에는 에코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좀 특이한 책으론 에코의 축구광적인 면모를 기호학과 엮은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이제이북스, 2003)가 있다.  

 

에코는 잡지에 기고하는 짤막한 에세이로도 유명한데, 국내엔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열린책들, 1995)으로 또 흥행몰이를 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열린책들, 1999)은 그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이후에도 물론 열린책들에서는 그의 에세이집들을 꾸준히 내고 있으나 내가 사거나 읽지 않았으므로 언급을 자제하겠다. 에코의 에세이들에 비교적 일찍부터 눈길을 준 출판사가 새물결이고,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1993)을 시작으로 댓 권을 연이어 출간했었다. 얼마전에 그 책들이 재출간됐다(일부는 독일어판의 번역이다). 이 정도면 에코는 촘스키 뺨치는 지성인이다.  

3위는 리처드 도킨스(영국).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일 듯하지만, 도킨스가 그래도 3위에 오를 줄은 미처 몰랐다. 영국에서의 대중적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도킨스에 관해서는 여러 번 소개한 바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간단하게 훑어보기로 한다. 

국내에 제일 처음 소개된 도킨스의 책은 <이기적인 유전자>(두산동아, 1992)이고, 그의 책으로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이다. 물론 그때 도킨스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막연하게 '이타적 행위'라는 게 모종의 심리적/도착적 만족감을 주는 '이기적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는데, 늘 그렇듯이 서점을 두리번 거리던 차에 <이기적인 유전자>란 책이 눈에 띄었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유레카!'(우리식 버전으론 '심봤다!') 이후에 원서의 개정판을 옮긴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1993)이 출간됐고, 절친한 친구는 나의 권유에 따라 그 책을 읽고서 '유레카!'를 복창했다(그는 한동안 나만큼 도킨스를 욹어먹고 다녔다). 지금의 <이기적 유전자>(2002)는 보다 세련된 장정을 하고 있는바(표지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이름하여 '고전100선'이요, 대학생/청소년 필독서이다.     

이후 도킨스의 주저라고 할 만한 책으론 <눈먼시계공>(민음사, 1994)과 10년만에 재간된 <눈먼 시계공>(사이언스북스, 2004)이 있다. 작년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을유문화사)은 내가 원서까지 사둔 책이지만 아직 읽지 않았으므로 감동을 적기는 어렵지만, 하여간에 다른 책들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최신간인 <악마의 사도>는 이전에 소개한바 있듯이 주로 칼럼모음집인데, '인간' 도킨스의 체취를 가장 강하게 내뿜는다. 도킨스 다이제스트를 원하는 독자라면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이제이북스, 2002)를 보셔도 좋겠다(다이제스트라 감질이 나겠지만). 

세계석학 30인과의 대담집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가야넷, 2000)에는 촘스키와 에코는 물론 도킨스와의 대담도 실려 있다(지젝도 들어가 있다!). 내가 감히 사두지 못한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스, 2002)에도 도킨스는 (당연히) 공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내 기억에 존 브로크맨이 편집한 <제3의 문화>(대영사, 1996)에서도 도킨스를 읽을 수 있다. 그의 호적수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와의 비교는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를 참조할 수 있다.

4위 바츨라프 하벨(체코). 이 리스트에 들어 있는 유일한 동유럽 지식인. 직업은 극작가이자 정치인으로 돼 있는데, 대통령을 역임한바 있으니 저명한 인사이지만 국내에는 별로 연고가 없는 듯하다.  

뒤져보면 하벨의 책으론 <대통령의 꿈>(들꽃세상, 1992)이 처음 소개됐었고, '하벨 대통령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사상'이란 부제의 <프라하의 여름>(고려원, 1994)과 드라마 <청중>(예니, 2000)이 소개돼 있는 정도. 동구권 희곡모음집인 <탱고 外>(현대미학사, 1994)에도 <도시 재개발 계획>이라는 하벨의 작품이 들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지역적 편향성 때문에 러시아/동구권 지식인들에 대한 소개/이해는 턱없이 부족한 편. 멋쩍은 김에 하벨의 나라 체코에 대한 안내서 두 권 정도만을 적어두기로 하자. 체코 문학 전공자인 김규진 교수의 <체코 문화>(한국외대출판부, 2000), 그리고 체코 여행 가이드북 <체코>(휘슬러, 2005).

5위 크리스토퍼 히친스(영국). 직업은 정치평론가라고 돼 있는데, 톱10의 지식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소한 인물이다. 나의 견문이 짧은 것인가 하고 검색해 보았더니, 국내에 소개된 건 <키신저재판>(아침이슬, 2001) 달랑 한 권이다. 하면, 나의 '무식'을 탓할 수는 없는 것.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검색해 보니까 <선교사의 입장: 마더 테레사의 이데올로기>(1995)란 책이 있고,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저한 <희생자를 탓하기: 사이비 학문과 팔레스타인문제>(1988), 아담 바르토스란 이와 공저한 <국제 영토: UN, 1945-95>(1994)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아마도 영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평론가인 모양(우리의 경우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두 권의 책이 더 출간되어 추가해놓는다.  

6위 폴 크루그먼(미국). 내가 이름을 아는 몇 안되는 현역 경제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근엔 反부시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며(뉴욕타임즈에 칼럼을 쓴다) 해마다 노벨경제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다고(*결국 2008년에 수상했다). 촘스키와 함께 MIT에 몸담고 있고, 1953년생이니까 나이도 비교적 젊다.  

그의 책으론 <경제학의 향연>(부키, 1997)이 유일하게 내가 갖고 있는 책이다(*화제작 <미래를 말하다>도 소장하게 됐다). 그가 공저처럼 돼 있는 <복잡계 경제학2>(평범사, 1998)도 갖고 있었지만 지난번에 책정리를 하면서 <복잡계 경제학1>과 함께 쓰레기장으로 갔다. 아마도 그 책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자기 조직의 경제(Self-organizing Economy)>(부키, 2002)일 것이다. 제목만으로도 대충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데, '복잡계 경제학 개척자'로도 평가된다는 크루그먼은 이 책에서 "복잡계 경제학의 사고방식과 모델을 다"룬다고. "그는 '불안정으로부터의 질서(order from instability)'와 '불규칙한 성장으로부터의 질서(order from random growth)'라는 자기 조직화의 두 원리가 어떻게 도시의 형성과 기술 집중 및 경기 순환 등 제반의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자기조직계'에 대한 책들이 한동안 붐을 탄 적이 있는데,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카오스: 현대 과학의 대혁명>(동문사, 1993)이 발단이었다(물론 얀치의 <자기조직하는 우주> 같은 신과학 천문학서도 있었다). 이어서 <복잡성 과학이란 무엇인가>(까치, 1997) 등이 나왔고, <복잡계란 무엇인가>, <왜 복잡계 경제학인가> 같은 일본서들이 번역/소개됐다. '복잡계 경제학'에서 크루그먼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름은 '수확체증의 법칙'을 주창했던 브라이언 아서인데, 크루그먼은 이를 더 발전시킨 공로가 있는 듯. 이 '자기조직화'는 문학/예술에서도 많이 나오는 테마이며, 들뢰즈를 읽다가도 종종 마주치는 용어이다. 그러니 나중에 좀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하는 크루그먼의 나머지 책들이다.  

7위는 위르겐 하버마스(독일). 작년 10월에 데리다가 타계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하버마스와 함께 이 명단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로한 세계철학계의 원로이지만 하버마스는 언제나 '막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막내였으며(물론 그의 제자들이 2세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1세대 학자들의 파워와 명망에 미치지 못한다) 20세기 독일철학의 막내이다.  

독일 관념론의 적자를 자처하는 독일의 '괴물' 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에코리브르)가 지난 여름에 출간됐었다. 회슬레는 방한강연을 가진바 있으며 그때의 인연으로 한국여성과 결혼했다)가 꼽은바, (거명 당시에 생존하고 있던) 20세기 최고의 독일 철학자는 바이스체커, 가다머, 칼-오토 아펠, 하버마스 4인이었다(거기서도 하버마스는 가장 '젊은' 철학자였다).   

 

 

하버마스의 책들은 국내에 '충분히' 번역/소개돼 있다. 물론 질과는 무관하게. 예컨대,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린 <인식과 관심>(고려원, 1996)은 오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책이며, 따라서 '대중들'은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프랑스의 난다긴다하는 철학자들을 '신보수주의' 철학자로 몰아세우며 그의 '거장적' 면모를 부각시킨 책이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 1994)이다(이 또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있다). 기억에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인 <공론장의 구조변동>(나남, 2001)부터 <소통행위이론1>(의암, 1995, 이건 2권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대표적인 '부실'번역 사례이다)를 거쳐서 <사실성과 타당성>(나남, 2000)에 이르는 주저들은 대부분 국역본을 갖고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의사소통의 철학>(민음사)와 대담 <테러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하버마스에 대한 국내 연구만 해도 (상대적으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8위 아마티아 센(인도). 경제학자. 인도 출신으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센의 책들은 수상에 힘입어 바로 출간된 바 있다. <불평등의 재검토>(한울, 1999), <윤리학과 경제학>(한울, 1999)이 그것이다.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라고도 불린다니까 그걸로도 그의 학문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그런데도 케임브리지대의 교수이다!).  

센의 신간은 <자유로서의 발전>(세종연구원, 2001)이며, 소개에 따르면 "아마티아 센은 이 책에서 개인을 단순히 분배된 혜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능동적인 행위자로 보고 논의를 진행한다. 그리고 국가, 시장, 법 체계, 정당, 언론, 이익단체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사회적 장치들이 개인의 실질적인 자유를 충족시키고 보장하는 데 얼마나 공헌하는가 하는 일관된 관점으로 중국과 인도, 유럽과 미국 등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을 검토한다. 이 책은 개인의 자유 속에 정치 참여와 경제 발전 그리고 사회진보의 능력이 어떻게 놓여 있는가라는 물음에 지표를 제시하며, 발전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알려진 바이지만, <국부론>의 저자이자 동시에 <도덕감정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으며, 경제학의 두 축은 윤리학과 경제(공)학이다. 센은 거기서 잊혀지거나 간과되고 있는 윤리학의 전통을 경제학에서 다시 되살리고자 애쓰고 있는 것. 이를 테면 '아담 스미스 구하기'이다. 그리고 그게 '나라 구하기'이다, 경제기술자들아! 

9위는 역시나 도킨스의 경우처럼 나를 놀라게 했는데, 미국의 생물/지리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이다. 사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지만 다이아몬드가 대중적인 인기만큼이나 지식인으로서 대우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롭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요컨대,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며, 그의 최신간 <붕괴: 어떻게 한 나라가 망하는가>가 빠른 시일 안에 번역되기를 기대한다(*<문명의 붕괴>로 번역되었다). 

10위는 인도 출신의 소설가 살만 루시디. 문제작 <악마의 시>로 1989년 이란정부(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더욱 유명해진 작가. 그런 연유로 노벨상을 타기는 힘들겠지만(이번에 터기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는 파묵이 논란 끝에 수상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아마도 루시디는 노벨상 수상작가보다 더 유명한 작가일 것이다(루시디의 문학에 대해서는 언젠가 박노자가 한 칼럼에서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한바 있다). 그의 작품으론 <악마의 시>(문학세계사, 2001), <무어의 마지막 한숨>(문학세계사, 1996)가 번역돼 있고 <하룬과 이야기바다>(달리, 2005)도 올해 나왔다. 좀 오래된 번역으론 <한밤의 아이들>(하서출판사, 1989)과 <악마의 수치>(청림출판, 1989) 등이 있다(*이젠 '루슈디'로 소개되고 있다).  

 

05. 10. 18.

P.S. 이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7위,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19위에 올라 있다고. 울포위츠를 선정 리스트에 올린 시사'잡지'들의 양식이 좀 의심스럽긴 하다(하긴 '은행' 눈치도 봐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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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버마스 이야기 (1)
    from to be immortal 2007-06-29 16:15 
    ...
  2. 하민혁의 생각
    from haawoo's me2DAY 2009-10-01 23:19 
    #하우R_ '세계의 지성' 톱10l로쟈의 저공비행 http://is.gd/3Qu5I 이 분,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하다
 
 
주니다 2005-10-1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가 1등 먹었다는 소식을 접하니 얼마전 조선일보에서 봤었던 '책조차 안 읽는 한국의 보수들'이란 기막힌 칼럼이 떠오르는군요.
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510/200510100417.html
그나저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도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더군요. ㅠ.ㅠ
5장 '~사랑의 이데올로기'와 관련해서 좀 더 읽어줘야 할 책/논문이 있다면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딸기 2005-10-18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반적으로, 논쟁적인 스타일의 사람들-매스컴에 많이 등장해서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이 뽑힐 수 밖에 없는 조사였습니다만, 몇몇 인물들은 저도 꽤 재미나게 책을 읽었던 사람들이기에 결과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습니다 ^^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경우는 그야말로 '논란'이 많지요. 저는 '키신저 재판'을 꽤 재미있게 읽었답니다(책 자체의 밀도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촘스키 책에도 히친스가 종종 언급되곤 했어요. 이라크전에 찬성했다는 얘기 듣고 저도 좀 의아해 했었습니다. 히친스는 영국 출신이긴 하지만 20년 넘게 미국에서 활동했으니, '미국 지식인'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겁니다. 히친스가 이라크전 지지선언, '나는 왜 좌파가 아닌가' 선언 등등을 내놨을 때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심지어 책 한권 달랑 읽은 저조차도 그 심정이 이해가 가더라니까요. :)

호랑녀 2005-10-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 한 권, 아는 사람 세 명...ㅜㅜ
내가 얼마나 얕은지, 지성과는 얼마나 거리가 머~~~ㄴ 사람인지 알게 하누만요 ㅜㅜ

로쟈 2005-10-18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라캉의 성공식은 사실 굉장히 난해합니다. 조금 가닥을 잡으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아시겠지만,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란 책에 모아놓은 논문들이 수준높은 해제들입니다. 같이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마이어스의 요약보다 더 용이하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겠네요(핑크의 글 정도가 만만할 수 있지만).

딸기님 혹은 딸기우유님/ 히친스의 책을 읽어보셨군요.^^ 저겐 좀 생소한 이름이기에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는데, 네오콘들이 그렇듯이 히친스도 국제문제에 있어서는 '과도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하긴 '넘들'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지식인의 조건이긴 하죠. 좌파이건 우파이건.

호랑녀님/ 상당히 '대중적인' 리스트와 거리가 머시다면, '비대중적'(=귀족적)이신 거 아닌가요?..

yoonta 2005-10-19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르게--------->위르겐...
인식과 관심이 그렇게 오역투성이였군녀..어쩐지 죽어라고 안읽히더니만..-_-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도 안읽히는건 마찬가지..
리차드 도킨스나..제럿 다이아몬드등이 올라온건 좀 의외군요..생물학자들이 이렇게 인기가 많다니..상대적으로 호킹같은 물리학자가 없는것도 그렇고...

프랑스 지식인들이 한명도 안보이는것도..좀 그렇네요..뭐 유명한 분덜은 대부분 타계하긴 했지만..

비로그인 2005-10-1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촘스키가 푸코 등을 평한 글을 읽은 적이 있던데 촘스키는 거의 푸코 등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상식에 기대어서 그들을 격하시키고만 있던데..쩝. 그리고 도킨스의 그 무지막지한 과학주의도 토마스 쿤에게 공감하고 있는 저에게는 부담스럽더군요. 생명의 존엄이 단지 DNA의 연속성에 인한다는 논지에도 전혀 동의할 수 없고요.(그렇다면 "왜" DNA가 보존되어야 하는지? 더 나아가 그렇다면 우리는 DNA의 연속성이라는 유일의 가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지?)... 회슬레를 언급하셨던데 정말 회슬레가 "괴물 철학자"인가요? 인식론 상대주의의 윤리적 귀결을 비판하면서 독일 관념론의 부활을 외치던데, 그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할지는 좀....흠.... 비트겐슈타인 이후로 철학은 끝났다고 믿고 있는지라....

주니다 2005-10-1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라캉의 성공식은 인내심을 갖고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번역상태가 어떤지요? 제 허리상태는 별로 안좋습니다만. 흐흐흐

2005-10-19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0-1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생물학자들의 부상은 의외이지만 당연한 현상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호킹의 경우는 물론 <시간의 역사> 같은 '대중적인' 책도 있지만, 아무래도 생물학보다는 접근하기 어렵지요.

구스님/ 가다머가 '회슬레'를 칭찬하면서 서양철학사의 보기 드문 천재라고 부른 적이 있지요(둘은 교양철학 방송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한 적이 있고, 국내에도 방영된바 있습니다). <헤겔의 체계> 같은 대저를 20대에 툭툭 써놓는 걸로 보아 ('천재성' 여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괴물'로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군요. '비트겐슈타인 이후'라는 '초기 비트겐슈타인'에 국한된 것 아닐까요? 비트겐슈타인 전공 철학자들이 아직도 많은 걸 보면, 엔드게임(Endgame)은 당분간 더 지속될 거 같습니다.

주니다님/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사놓고 아직 안 읽었지만 번역에 대해서 지적하는 의견은 아직 못 봤습니다. 그보다는 '허리상태'에 더 신경쓰심이.^^

이네파벨님/ 별로 간추리진 못했습니다(제가 좀 수다스럽죠). 퍼가시는 건 언제라도 무방합니다. 다만, 오타나 착오 같은 게 창피할 따름...

비로그인 2005-10-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슬레가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임에는 동감하지만 과연 그의 철학적 시도가 성공할 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스럽네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리처드 도킨스를 누를 수 있었을까요? 요즘은 정말 사회생물학의 인기가 치솟더군요. 다니엘 데넷 같은 철학자가 주목 받는 것도 그런 흐름에 서 있는 것 같고요.(물론 다니엘 데넷은 사회생물학의 주된 흐름에 비판적이지만요.)

로쟈 2005-10-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넷은 <확장된 표현형> 개정판에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도킨스와는 절친한 사이인 듯하고. 개인적으론 데넷의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다윈의 위험한 사상> 같은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게 유감입니다.

yoonta 2005-10-19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가 푸코를 어떻게 비판했는지는 모르겠는데..푸코와 촘스키는 '정치'를 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요..비교적 전통적인 무정부주의에 기반한 촘스키의 정치는 주로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대중들에게 '새로운 정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방식인 반면 푸코는 '이론적 개입'을 통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한 사람이죠..때문에 촘스키가 푸코를 정말로 이해했느냐 안했느냐는 중요한것이 아니게 됩니다..촘스키가 푸코를 비판했다면 아마도 그런 입장에서 했을 것이고요..이론적 비판이 아니란 거죠..

딸기 2005-10-1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퍼가도 될까요?

로쟈 2005-10-2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물론입니다. 근데, 오타나 다 수정됐는지 모르겠네요. 머리도 감을 걸 그랬나...

딸기 2005-10-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보니 상당히 미인이신데요 ^^

2005-10-21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5-10-2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 말을 한다고 기분 좋아하실 것 같지 않은데... 흐흐.

니브리티 2005-10-2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로쟈님 미인이시죠..^^;;

로쟈 2005-10-2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그런 식의 반응들을 보이시면 '전환'할 수도 있습니다!?..

쿠자누스 2005-11-02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에 올라온 '세계의 지성' 가운데 '하바마스'와 통화를 했었지요.
[그의 제자라는] "송두율 교수의 구속에 항의하는 탄원서를 한국정부에 보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라는 질문에 "그의 전화를 며칠 전 받았다. 탄원서 쓴 일 없고
쓸 생각도 없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참 비정하더군요.
코소보 전쟁 때는 이 침략 전쟁이 "정당하다"고 말해서 놀란 적이 있는데
여하튼 권력에 순종하는 기질이 보입니다.
이 사람 책애서 건질 게 무언지 참 궁금합니다.

쿠자누스 2005-10-3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위 바츨라프 하벨(체코)도 코소보 전쟁이 '인권 회복을 위한' 전쟁이라고
환호를 했으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겠고

5위 크리스토퍼 히친스(영국)는 치밀한 고증을 통해서
키신저를 국제 전범재판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주목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문제만 걸리면 '돌아버리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요.

911 테러를 네오콘의 Insider job이라는 분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반 유태주의자들이라고 비방하니까요.

또 1위 촘스키는 911이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한 저항'이라고 했으니
히친스와 비교하면 오십보 백보겠지요.

그 유명하다는 사상가 지식인들이 다 무언지 회의가 갑니다.

로쟈 2005-10-3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자누스님의 '회의'에 공감합니다. 제가 공감하지 않는 것은 '그 유명하다는 사상가 지식인들'에 대한 쿠자누스님의 (애초의)'기대'입니다(지금은 안 갖고 계시겠지만). 지식인들은 성인군자가 아니며 무오류적이지도 않습니다. 단지 대중보다 우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하여 남의 일에 간섭할 따름이며, 그러한 간섭이 간혹 여론을 환기시키고(호도할 때도 있지만) 사고를 자극할 뿐이겠지요(때로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고). 영미 네티즌들이 뽑은 리스트와는 다른, 쿠자누스님의 대안적인 리스트를(가능하다면) 기대해봅니다...

yoonta 2005-11-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가 911테러를 insider job이라고 하지 못하는데에는 저도 불만이 있습니다..그렇다라고 주장하지는 못할지라도..최소한 문제제기는 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촘스키처럼 명망있는 지식인이 911테러에 대한 음모론적 접근을 한다는건 지극히 조심스러워야 될 일인 것도 사실이지요..때문에 기존에 알려진 사실들..언론에 보도된 사실들만을 기초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나갈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그런 부분에서의 역할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고 보는것 같고요..때문에 물론 911테러의 내부공모론 같은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내면 네오콘에 대한 결정적 타격이 될수있긴 하지만 테러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정보기관에 의해 통제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함부로 그것을 발설할수는 없겠죠..그것을 두고 촘스키의 한계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인것 같습니다..유태인문제와 관련해서 촘스키는 같은 유태계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할정도로 급진적인 주장을 많이 해온 사람입니다..히친스와 같은 부류와는 분명 다르죠..

네오 2005-11-0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크루그먼은 지금 MIT가 아니라 프린스턴의 재직중입니다....

로쟈 2005-11-0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제가 참조한 건 알라딘의 저자 소개라서. 어쨌든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쿠자누스 2005-11-02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한 인간의 사상의 크기는 그가 떠맡은 고통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인류사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과두 권력의 유희(테러, 전쟁)에
휘말려 희생되는 먼 나라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그 사람들이 어떤 발언을 하는지 유심히 살펴 봅니다.

저는 대안의 서양 현대 사상가로 라이프니츠
http://www.utm.edu/research/iep/l/leib-met.htm

쉴러
http://www.theatredatabase.com/18th_century/friedrich_schiller_001.html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미국 독립전쟁을 성사시킨, 벤자민 프랭클린을 정점으로 삼은 유럽-미국 지식인 써클의 후세대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의, 보이지 않는 대영 제국의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지요.

쿠자누스 2005-11-0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 Insider job 이론은 세계 최고 수준의 독립 저널리스트들/자발적 사설 탐정들에 의해서 세계화하는 추세에 들어섰다고 봅니다. 인류 역사 이래,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은 열외지만, 이만한 연구 공동체가 지구상에 존재한 일이 있었을까요 ? 인류의 미래가 걸린 일에 이름도 없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발벗고 나서는 판에, 촘스키나 히친스가 딴 소리를 하는 게 너무나 한심했지요. 국제정치의 수많은 공식버전을 처참하도록 찢어놓는 그들의 무시무시한 내공이, 그날의 가상 현실앞에 맥을 못추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촘스키의 문제는 그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의 인식 반경이 정말로 그 정도라면 그에게 불행이고 그런 게 아니라면 그를 신뢰했던 사람들의 불행이라 생각합니다.

yoonta 2005-11-02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11의 내부자공모론이 수많은 독립저널리스트 혹은 탐정들에 의해 제기되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도 911사건 초기부터 내부공모쪽으로 의심했었죠. 국내에 간행된 몇권의 책들 그리고 웹에서 접한 글들을 읽어보고 그 심증을 굳히기도 했습니다. (타플리의 책은 아직 못봤네요) 독립저널리스트들중 일부 예컨데 이리유카바 최같은 분은 촘스키도 그가 이야기하는 그림자정부의 관련인물로 보기도 하죠..그런 관점에서는 촘스키조차도 911사건을 공모한 그룹의 일원으로 보일수도 있더군요..

그런데 이처럼 심증이 가기는 하지만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촘스키같은 분이 (그 역시 '내부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심증'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울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같은 경우 역시..수많은 음모론이 '세계화'되기는 했죠..그러나 그 결정적인 팩트를 알수없는 상황에서 그 가설들을 주장하는 것은 촘스키가 보기에는 뭔가 불충분해 보이고 그런 상태에서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그런 점에서 올리버 스톤감독같은 분은 용기있는 분이죠) 저는 아직 촘스키가 911과 관련되어 어떤 언급을 했는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그의 입장은 미국의 잘못된 중동정책이 테러를 불러왔다하는 점만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쿠자누스님이 지적하신 insider job을 비록 촘스키가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저는 위와같은 정도만의 정치적 해석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봅니다..

'팩트'를 발굴해 내는 일은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주어도 될것 같네요...좀더 시일이 지나 그 발굴된 '사실들'이 좀더 풍부해지고 그리고나서도 촘스키가 올리버 스톤감독같은 발언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그의 '한계'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죠.

그러나 아직은 그런 평가를 하기에는 좀 이르다고 봅니다.

쿠자누스 2005-11-0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FACT를 발굴하는 것, 그것이 그의 직업 아닌가요 ?
insider job 이론가들의 Fact를 찾는 방법론, 문제제기 능력(http://peacemaking.co.kr/news_view.php?no=1348)을 촘스키 같은 석학이 보여주지 않는다는 게 좀 이상합니다. 그의 발언은 권력이 바라는 최대치의 발언이라 봅니다.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를 보면, 911도 검사의 기소가 가능한 단계로 가는 듯 합니다. 문제는 미국 내부의 정치지형이겠지요. 케네디 암살 사건이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것도 거기 관련된 세력이 미국 권력의 한 축에 버티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 체니/럼스펠드 주변 인물들이 기소되는 걸 보면 예측 못할 일이 벌어질 것 같기도 합니다. 성공한 쿠테타의 장본인들이 사형선고 받는 거, 불가능하다면 미국엔 미래가 없겠지요.

로쟈 2005-11-0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의 논쟁에 대해서는 '구경'만 하겠습니다. 한가지, "한 인간의 사상의 크기는 그가 떠맡은 고통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쿠자누스님의 말씀은 음미해볼 만하지만, '환원적'이라는 의구심도 갖게 됩니다. 말씀하신 고통은 자신의 고통인가요, 아니면 타인의 고통인가요? 고통의 주체, 혹은 인칭의 문제 자체가 굉장히 복잡한 것 같습니다. 더불어, 자신이 감당하는 고통을 다시 감당해야 하는 '언어'의 문제도 걸려 있습니다. 사상의 언어적 구성물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큰 고통은 자신의 고통을 언어로, 사상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먼 나라 사람들의 고통'(먼 나라!)에 대한 감수성은 치하할 만하지만, 그 고통에 끼여드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해 '발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그 고통은 그 '발언'으로 감싸지고 구제되는 성격의 고통인가요?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어디까지 발언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물음들을 저로선 갖게 됩니다. 데리다의 얘기지만, 테러란 '죽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죽어가게 내버려두는 것'까지도 포괄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무한책임입니다. '테러/전쟁', '먼 나라' 등의 표현은 문제와 책임을 국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듭니다. 요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쿠자누스님의 고견을 앞으로도 경청하겠습니다...

yoonta 2005-11-0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는 그렇다고 치고..쿠자누스님께서 대안의 사상가로 추천하신 두 인물..라이프니츠와 쉴러는 어떤 점에서 추천하시는 건가요? 라이프니츠같은 경우..들뢰즈가 연구하기도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만..

혹시 헤르메스주의나 신비주의의 계보와 관련된 것이 이유는 아닌가요? 쿠자누스님의 닉네임에서도 왠지 그럴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하얀재 2005-11-0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자누스님은 말 곳곳에서 도덕원리주의자의 혐의를 풍깁니다. 송두율교수가 하버마스의 제자라지만 탄원서를 안 써주었고 또 써줄 생각도 없다는 그의 말에서 꼭 하버마스가 비정한 사람이라는 결론이(그것도 도덕적 결론이죠) 도출되지 않습니다.

또한 코소보 전쟁이 정당하다는 그의 주장에서 권력에 순종한다는 도덕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님의 말도 그러려니 합니다만 그 결기가 보기에 안타깝군요. 이하 제 시간이 아까워 생략합니다.

그리고 로쟈님의 '겸손'도 보기에 느끼하군요. 남의 감수성에 대해 '치하'하기에 앞서 먼저 님부터 표현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해주셨음 합니다. 어렵게 갈 거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을 돌리는 것은 결국엔 자기오만, 지적 거드름 없인 나오기 힘든 자세입니다.

로쟈 2005-11-02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변태님/ 제가 '겸손'하다는 얘기는 오랜만에 듣는군요(적어도 이 서재에서만큼은 그닥 겸손하게 행세하지 않았는지라). 그런데, 다른 대목에서라면 몰라도 제 댓글에서 ('겸손'에 가려진) '자기오만'과 '지적 거드름'을 알아보셨다는 건 놀랍습니다. 저는 님이 '도덕원리주의자'의 혐의가 풍긴다고 한 쿠자누스님의 견해에 대해 '환원적'(마찬가지로 모든 사안을 몇 가지 도덕적 원칙으로 환원하는 것이죠)이지 않은가라는 의구심을 제기했고, 사안은 생각보다 복잡한 듯하다는 의견을 보탰습니다. 어떤 표현이 부정확했는지(그래서 느끼했는지) '분명하게'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어렵게 갈 거 없이요). 혹 시간이 나신다면...

yoonta 2005-11-0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변태님이 로쟈님을 아직 잘 모르시나봐요..^^

쿠자누스 2005-11-0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변태님: 비정하다는 느낌 뿐만이 아니었지요. 단순한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질문에 마치 무언가에 압박을 받는 듯한 긴장되고 톤이 높은 음성, 게다가 마지막엔 누구도 자기에게 탄원서를 부탁한 일이 없다는, 불필요한 얘기까지 덧붙이는 그에게서‚ 좀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제 느낌으론, 그가 송 교수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아서 그런 답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나토는 지난 90년대 10년 가까이 서구 매스컴과 공모하여 그들의 침략전쟁을 ‘인도주의적 개입’ ‘도덕적 ACTION’으로 위장하고 유고 연방을 산산 조각내고는 반식민지로 만들었지요. 하버마스는 나토의 여론 조작에 말려 들었으니 스스로 파산 선고를 한 셈이지요.

쿠자누스 2005-11-05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 쿠자누스는 Nikolaus von Kues 이름을 도용한 것이고요 신비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라이프니츠, 쉴러 두 사람을 제가 꼽은 이유는, 우선 그들의 삶과 저작이 너무나 흥미롭고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반면에 현대에 들어와 거의 잊혀졌기 때문이지요. 두 사람 모두 병사했다고 전해지지만 대영제국이 암살했다는 게 저의 가설입니다.

쿠자누스 2005-11-03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보내 주신 질문, 제가 답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네요. 그 답을 구하는 데에 같이 생각해 볼 만한 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아래에 소개합니다. '세계의 지성인'이 되는 자격조건에 대한 해설입니다.


Such a person, guided by the humanist ideal. has the duty
to pursue his own self-development,
and to do his utmost to develop all his latent capacities
for the benefit of all mankind.

That also includes the development of his emotions
away from infantile egocentricism and
toward the true intercourse with human reason.

Such a person must no longer force himself to do
what reason decrees, but
his actions must come into harmony with his sense of joy.

The individual who passionately accomplishes
that which is necessary
has, as Schiller says, a beutiful soul.

로쟈 2005-11-0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에 대한 감수성 하면 제게 바로 떠오르는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실러(쉴러) 또한 그는 직접 인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레비나스의 자기 윤리학의 거점을 마련한 것도 이 작품에 대한 (어린시절의)독서를 통해서였습니다. 제 생각에 쿠자누스님의 윤리학에 라이프니츠 이상으로 중요하며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윤리학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아주 오래된 숙제이기도 한데...(제가 워낙에 핑계가 많은 '학생'이라서...)

yoonta 2005-11-0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콜라우스 쿠자누스(Cusanus, Nicolaus) 이사람과 Nikolaus von Kues 이사람은 같은 사람 아닌가요? 쿠자누스가 Kues혹은 Cues출신이라서..Nikolaus von Kues 이렇게도 부르는걸로 아는데...어쨋든 제가 말씀드리는 분이 그분이라면..쿠자누스는 르네쌍스시대를 이끈 신비주의의 대가죠..신과 우주를 수와 비례로 설명하려고 하였고 신과 우주의 무한성을 주장하여 부정신학을 주창하기도 한 사람이죠..그러한 신비주의사상은 케플러나 뉴튼같은 과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알고있습니다...더불어 르네쌍스에도 큰 영향을 주어..범신론으로도 해석되는 르네쌍스 자연주의와도 연결되는 인물이죠..결과적으로 라이프니츠나 스피노자에도 큰 영향을 주고요..특히 라이프니츠는 그의 단자론 철학에서 보여지는 신비주의의 영향을 쿠자누스에게서 받았다고 볼수도 있고요..쉴러는 잘 모르겠지만.. 쿠자누스나 라이프니츠 더불어 같은 독일지식인이고..괴테와 같이 르네쌍스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일종의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들의 계보혹은 유사성 같은게 보인다는 점에서 여쭈어 본 것인데요...좀 다른 시각이신것 같군요..

대영제국에 의해 라이프니츠나 쉴러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첨 듣는 이야기네요..현대에 와서 쉴러나 라이프니츠가 잊혀진게 당시 대영제국의 의도때문이라고 보시는 것 같은데..그러한 라이프니츠와 쉴러를 암살해야만 했던 당시 대영제국의 음모?가 오늘날의 세계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쿠자누스 2005-11-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도스토예프스키도 쉴러를 읽었군요. 그의 윤리학도 흥미롭겠네요.

Yoonta님: 전 처음에 그 두 가지 이름에 많이 헷갈렸지요.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몰라서 더 공부해보아야 겠네요. 저는 그들을 플라톤 학파의 대표 주자로 봅니다. ‘대영 제국의 암살'이라는 가설의 근거로는....

1. 라이프니츠는 러시아 황제의 고문이기도 했고 말년에는 영국 왕실의 재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유럽 최고의 외교관이었는데 그의 장례식이 썰렁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가 영국 재상이 되는 걸 결사 반대하던 세력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닐까요? 그들이 바로, 미적분의 원조가 (돌팔이) 뉴튼이라 우기고 라이프니츠를 표절범으로 매도하는 사기극을 꾸몄지요. 유럽/러시아/중국의 문화 과학 교류, 유라시아 산업화를 추진한 그를 대영제국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2. 쉴러는 영국의 제국경영전략을 꿰뚫어보고 미국 독립 전쟁에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기에 또 미국이 독립한 후에는 '유럽의 미국화'라는 음모를 꾸몄기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을 거라 봅니다. 쉴러의 사상을 음악으로 표현한 모차르트도 오스트리아에서 개혁파가 제거될 때 주검도 없이 사라졌지요. [영화/연극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정치적 무뇌아'로 각색한 (대영제국의) 치졸한 엽기극이었구요.]

대영 제국은 지금도 지구 영토의 상당 부분과 금융, 에너지/지하자원 시장은 물론 의식산업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그들의 촉수로부터 우리는 하루도 자유로울 날이 없을 겁니다.

로쟈 2005-11-0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자누스님식의 '음모론'이군요. 그러고 보니, 부시도 대영제국의 푸들인가요?

쿠자누스 2005-11-08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대통령 가운데 암살된 4 사람의 공통점은 '미국의 영국화/ 재식민화'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평양에서 출간된 어느 책에는 그들이 '인민을 배반'했기때문에 불행한 죽음을 자초했다고 써있더군요.] 부시 가족 3대는 친영파의 '원조'라고나 할까요. 부시 조부는 히틀러에게 흘러가는 월가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일이 들통나 국가 반역죄로 옥살이를 했지요.

새들처럼 2005-11-0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붕괴>가 <문명의 붕괴>로 번역돼 나왔네요.

로쟈 2005-11-0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이미 몇자 적었습니다.^^

sayonara 2006-04-2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많이 읽을지언정 다양하게 읽지 못하는 제 자신이 초라하네요.
에코와 크루그먼에만 심취했었던 편협함이란... 한편으론 앞으로 읽을 책이 많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하고... ^_^

로쟈 2006-04-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에 오랫만에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에코만 해도 워낙 박식하고 폭넓은 사람인지라 '편협함'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요. 에코를 다 따라 읽으면서 편협해지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sayonara 2006-04-2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엄청난 위로를... *^o^*